안다는 것 ‘즉 앎’에 대하여

category 국어 및 교육학 자료 2012. 6. 20. 03:29
728x90

  ‘진정한 앎이란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 자신 안에 하나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아득한 과거의 영원한 미래를 함께 지니고 있는 신비로운 세계다. 홀로 있지 않더라도 사람은 누구나 그 마음의 밑바닥에서는 고독한 존재다. 그 고독과 신비로운 세계가 하나가 되도록 거듭거듭 안으로 살피라. 무엇이든지 많이 알려고 하지 말라. 책에 너무 의존하지 말라. 성인의 가르침이라. 할지라도 종교적인 이론은 공허한 것이다. 그것은 내게 있어서 진정한 앎이 될 수 없다. 남한테서 빌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겪은 것이 아니고, 내가 알아차린 것이 아니다, 남이 겪어 말해 놓은 것을 내가 아는 체할 뿐이다. 진정한 앎이란...... 내가 몸소 직접 체험한 것. 이것만이 참으로 내 것이 될 것이 있고 나를 형성한다.’

 

  법정스님의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중에 한 구절이다. 앎은 개인의 체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지식을 말한다. 사람은 자신이 배우고자 하는 학문이나 행동을 배움과 공부를 통해 습득한다. 이 습득 자체로 안다고는 할 수 없다.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내면화 시켜야만 진정한 의미의 안다가 될 것이다. 사람은 아는 척을 많이 한다. 자신의 지식이 많음을 남들 앞에서 자랑하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자신이 한번 듣고, 읽었다 해서 진정한 의미의 앎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백번 읽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이 좋고, 백번 보는 것보다, 한번 체험하는 것이 좋다는 말이 있다. 이처럼 자신이 단순하게 접한 지식은 안다고 할 수 없다. 단지, 기억 속에 저장된 조각난 지식에 불과하다.

 

  그런데 자신에게 내면화되어있는 앎을 무조건 안다고 규정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앎 그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앎이 사회에 전반적으로 두루 쓰이며, 활용적일 때 진정한 앎이라고 할 수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무엇이든 아는 사람은 없다. 다만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태어난 몇몇 소수의 사람들이 남들보다 빨리 학문을 접한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본다. 태어날 때부터 나 자신이 천재였다면, 정말 사는 게 재미없을 거란 생각이 든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나이에 맞는 지식을 접하고, 습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다는 것은 어찌 보면, 살아가는데 흥미와 재미를 선사한다. 자신이 배우고자 하는 학문과 행동, 그리고 그것에 대한 호기심이야 말로 앎을 습득함에 있어 매우 효과적일 것이다. 그리고 그 앎을 자신의 앎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앎이 되어야 한다.

 

  인정하기 싫지만, 사회의 여러 정치인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우리는 흔히 지식인이라고 한다. 지식인의 기준이 매우 묘하다. 단지 많은 걸 안다고 해서 지식인이라고 한다면, 우리 사회에 지식인의 숫자는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교수, 선생님, 소설가, 정치인 등 모든 사람들을 지식인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범죄자 또한 지식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범죄를 저지르기 위한 치밀한 계획과 행동은 여타 지식인을 능가하는 경우를 흔히 보아왔다. 지능적인 범죄를 우리는 앎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앎을 규정하기에는 어려움이 매우 크다.

 

  우리는 매우 많은 지식을 자신이 습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보아 온 모든 글, 행동, 사건 등 자신이 겪은 모든 일들을 자신의 지식 즉 앎이라 칭하기에는 어려운 면이 적지 않게 있다. 많이 안다고 좋은 건 아니다. 적은 양의 지식을 알아도, 그 분야에 대해 뛰어난 실력을 발휘한다면 그것은 많이 아는 것보다 낫다. 앎의 양을 측정하기는 힘들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에 지식이 있다고, 무조건 안다고 규정하는 일은 1+12라는 사실을 안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진정한 앎은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과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또한 앎은 지식적인 측면을 넘어서 사회를 바라보는 올바른 시각과 타인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자 우리 사회와 자신의 교류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냉철한 시각으로 앎을 규정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