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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소 희곡작품을 즐겨 읽지 않는다. 그 이유는 개인적인 문제도 있지만, 우리나라 교육상의 문제도 있다. 고교시절, 수능에 맞춰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유명한 몇 작품의 희곡만 접하게 된다. 수능에 희곡이 자주 출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더더욱 외국 작품을 수능에 싣는 경우는 드물다. 그렇기에 외국인이 쓴 희곡작품은 누군가의 추천이나, 자신의 의지 아니면 접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교수님께서 추천해주신 이오네스코의 코뿔소를 읽고, 희곡의 매력과 깊은 감동을 느꼈다.

 

처음 교수님이 이 희곡을 극찬하며, 읽어보라고 하셨을 때 나는 또 과제가 하나 늘었다고 불평을 토로했다. 그리고 희곡을 접하고 난 뒤에도 나의 이러한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다 읽고 나서야 작가의 깊이 있는 의도를 알아냈고, 나는 왠지모를 신음소리를 냈다.

 

나는 제일 먼저, 제목에 초점을 두었다. 과연 코뿔소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며, 왜 하필 작가가 많은 동물들 중 코뿔소를 선정하였는지 생각해보았다. 작가는 뿔이 달린 짐승을 찾고자 했을 것이다. 뿔이 가지는 의미는 다양하지만, 무엇보다 무서운 이미지가 강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독한 짐승을 찾고자 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어떤 짐승을 부정적 존재로 드러내야했기에 코뿔소를 선택한 것이라 짐작한다. 그리고 코뿔소는 이 작품이 나타내고자 하는 전체적인 의미를 파악하는데 한몫 한다. 코뿔소의 사나움, 그리고 이 작품이 쓰여진 연대가 1950년대, 작가는 프랑스인 등 이러한 점들을 봤을 때, 코뿔소는 부정적이며 나치즘, 파시즘 등과 같은 이데올로기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코뿔소는 이오네스코의 여러 희곡 작품 중 쉬운 작품에 속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내가 읽기에는 너무나도 어렵고 난해했다. 그래서 몇 번이고, 읽는 걸 포기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읽을수록 흥미롭고 관심가는 작품임에는 부정할 수 없었다.

 

코뿔소에는 17명의 등장인물이 있는데, 주요인물로는 베랑제, , 데지, 뒤다르, 보따르로 볼 수 있다. 작품은 총 3막으로 구성되어있다. 1, 작품의 첫 장면은 평화로운 분위기의 시골 어느 마을의 광장에서 시작된다. 주인공인 장과 베랑제가 나와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마을 주민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코뿔소가 등장한다. 사람들은 모두 같은 대사로 아니 코뿔소가!” 하며 놀라워하지만, 베랑제는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이 장면에서 사람들의 획일화된 모습을 볼 수 있다. 나는 이 장면에서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사막도 늪지대도 아닌 어느 시골 마을에 느닷없이 코뿔소가 등장한다는 것이 어이가 없는 설정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의도였을지 모르지만, 코뿔소의 느닷없는 등장에 놀란 건 등장인물 뿐만 아니라 나를 비롯한 여러 독자들이었을 것이다. 장과 베랑제의 대화와 논리학자와 노인의 대화가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었다. 그리고 느닷없이 또 한 마리의 코뿔소가 등장해 어느 주부의 고양이를 밟아죽이고 사라진다. 나는 이 부분에서 또 한번 어이없는 웃음을 자아냈다. 하지만, 이 부분을 통해 코뿔소가 부정적 존재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식했다. 그리고 사람들뿐만 아니라, 고양이를 비롯한 작고 힘없는 여러 짐승들 또한 피해자임을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부인을 위로하지만, 처음에 등장한 코뿔소와 다음으로 등장한 코뿔소가 동일한지에 대해 논쟁을 펼친다. 처음 등장한 코뿔소와 다음으로 등장한 코뿔소가 동일한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작가는 이것에 대한 논쟁을 펼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비판하려는 의도에서 이렇게 서술한거 같았다. 결국 장과 베랑제는 그 문제로 싸움을 하고 헤어진다.

 

2막에서는 1장과 2장으로 나눠진다. 1장에서는 코뿔소가 나타났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동료 보따르와 데지, 뒤다르 사이에 논쟁이 발생한다. 그리고 얼마 후, 회사동료 뵈프씨가 코뿔소로 변하여 회사의 층계를 부순다. 베랑제와 그의 동료들은 잠시 갇혀 있다가 소방수에 의해 구조된다. 그리고 코뿔소의 숫자가 늘어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코뿔소가 회사에까지 들어오고, 도시를 부수고 한다는 전개가 너무 흥미로웠다. 2장에서는 베랑제는 친구인 장과 화해를 하기 위해, 장의 집을 찾아간다. 하지만 장은 이미 코뿔소로 변화되어 가는 중이었고, 두려움에 베랑제는 집을 뛰쳐나간다.

 

3막에서는 베랑제의 회사 동료인 뒤다르와 데지가 코뿔소로 변한다. 그리고 베랑제는 최후의 인간으로서의 다짐을 한다.

 

코뿔소는 베랑제의 “...마지막까지 난 인간으로 남겠다! 굴복하지 않아!”라고 외치며, 끝을 맺는다. 자신도 코뿔소가 된 사람들처럼, 동화되어 어울리며 살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외롭고 고독해도 인간으로 남겠다는 베랑제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베랑제는 1막에서 무기력하고 무관심한 사람으로 나타났다. 2막에서는 여러 사람이 코뿔소로 변화는 것을 보고, 두려워 밖에 나가지도 못하는 소극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자신만 남고, 다 코뿔소를 변했을 때 베랑제는 자신이 비정상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진다. 그러나 그는 굳건히 인간을 고집하며 최후의 승자로 자리 잡았다. 나는 베랑제의 이런 모습에 기립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 이유는 베랑제의 모습이 나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나도 소심하고, 나약한 면이 많다. 그리고 권력 있는 사람 옆에 서서, 나약한 자들을 많이 괴롭혔었다. 이런 나의 모습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특히, 중학교 시절 따돌림 당한 한 친구 녀석이 생각나서 작품 읽는 내내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남들이 그 친구를 따돌림 시켜 나 또한 그 친구를 따돌린 적이 있다. 왠지 나 또한 그 친구를 따돌림 시키지 않는다면, 내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질 거 같아서 몇 번이고 괴롭혔다. 그 친구에게 너무 부끄럽고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베랑제처럼 마지막에 승리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의 이러한 면들을 고쳐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이 전부 를 외친다고 해서, ‘를 외친다면 난 그들과 다름없을 것이다. 코뿔소와 다름없는 존재일 것이다. 앞으로는 남들이 를 외친다면, 당당히 아니요를 외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장은 이 작품에서 매우 정확하고 논리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의 대화에는 약간의 궤변 또한 포함되어 있다. 결국, 장은 욕실과 방안을 왕래 하며 코뿔소로 변한다. 그 장면에서 나는 변화는 모습을 매우 흥미롭게 읽어 보았다. 서서히 이마에 뿔이 나고, 피부가 검푸르게 되어가는 모습이 불쌍하였다. 장의 코뿔소의 변화는 의미하는 바가 매우 크다. 지식인 또한 코뿔소로의 변화, 즉 어떤 이데올로기의 변화에 쉽게 적응하는 존재임을 드러낸다. 코뿔소로 변한 장은 자신을 걱정하는 친구 베랑제를 무시하며, 밟아 죽이려고 한다. 이데올로기가 친구마저도 버릴 수 있는 무서운 사상임을 드러내고 있다. 나는 장의 이런 행동도 나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친한 친구라도 나의 의견생각과 같지 않으면, 멀리하는 경향이 있다. 이 또한 자기 사상만 고집하는 현대인의 문제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2막에서 엉터리 논리학자가 코뿔소로 변하는 모습은 마음에 들었다. 1막을 읽을 때마다 논리학자의 대화가 엉터리라고 느꼈으며, 제일 먼저 코뿔소로 변하라고 저주를 퍼부었다. 결국에는 코뿔소가 되었지만, 많은 사람이 코뿔소로 변한만큼, 약간의 안타까운 마음이 없질 않았다.

 

나는 3막에서 데지가 코뿔소로 변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베랑제와 데지의 사랑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었으나, 결국 코뿔소로 변하는 데지의 모습에서 나는 안타까워 고개를 흔들거렸다. 베랑제와 데지의 행복한 결말로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봤지만, 이 작품이 부조리한 사회의 모습을 비판하는 작품인 만큼, 사랑하는 사람의 코뿔소 변화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마저도 포기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의 무서움에 많은 사람들이 치를 떨었을 걸 생각하니 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품은 독일의 나치즘을 풍자한 희곡이다. 우리나라에 탈춤과 가면극이 있는 것처럼, 극을 통해서 시민들의 고통과 슬픔을 덜어냈을 것이다. 이 작품을 좀 더 확대한다면, 전체주의, 우익과 좌익, 민족주의 등으로 확대되어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 개인주의에 살고 있다. 하지만 작가의 의도처럼, 어떤 이데올로기도 정당화 될 수 없다. 사상과 이념의 대립은 많은 희생자를 만들고, 사람들을 병들게 한다는 것에 초점을 둘 수 있다. 중국의 티베트 탄압, 러시아의 체첸민족 탄압, 여러 종교분쟁 등 지금도 끊임없이 이념과 사상의 분쟁은 계속되고 있다. 어떤 것이 옳다고 할 수 없다. 서로의 사상과 생각, 의견 등을 존중해 준다면, 아름다운 세상이 열릴 거라는 믿음을 가져본다.

 

문화는 문화 상대주의 이론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어떤 의견과 생각을 무조건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비판하면 안된다. 그 사람이 살아온 배경과 환경적 요인 등에 비추어 파악해야 한다. 이처럼, 이데올로기 등의 사상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여러 사람들이 코뿔소로 변하고 있다. 그리고 코뿔소로 변하지 않는 사람들도 벌벌 떨면서, 코뿔소에 동화되어 간다. 하지만, 이 희곡의 마지막 대사처럼, 인간으로 남길 바란다.

 

기회가 되면, 글이 아닌 연극을 통해 코뿔소를 접하고 싶다. 서울 대학로 주변에서 자주 공연을 한다고 하니, 시간이 되면 꼭 찾아가서 보아야겠다. 그리고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 ‘수업등의 작품들도 읽어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