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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한밤중에 민서는 / 강애영

 

22:30

이때쯤이면 주임은 말이 많아졌다. 주임은 변덕쟁이에 수다스러웠고 허언증까지 있었다. 그는 한밤중에 천장에 뚫린 어둑한 환풍구를 바라보며 달토끼가 보인다고 말했다. 에이, 뻥치지 마요. 마음 같아서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민서는 꾹 참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면 그는 더 신이 나서 졸라맨의 유래에 대해 주절거렸다.

암스트롱의 진짜 임무가 뭔지 알아? 그의 임무는 달토끼에게 피로회복제를 주고 오는 거였대. 안 믿긴다고? 믿어야 보여. 혼자서 밤에 공장을 지키다보면 말이야 가끔씩 천장에 있는 환풍기가 멈추곤 해. 저어기 가운데 환풍기 사이를 잘 살펴봐. 글쎄, 달토끼가 커다란 방아를 왼손에 쥐고서 오른손으로는 피로회복제를 마시고 있다니까. 피로할 땐 역시 박카스가 최고지. 언젠가는 TV에 달토끼가 모델로 나오게 될 거야. 우리처럼 이렇게 금형을 찍어내며 박카스를 선전하면서 박카스! 피곤할 땐 박카스를 나누세요. 그러면서 전설의 옥토끼도 세대교체가 되는 거지. 앞으로는 슈퍼토끼가 달을 지키게 될 거야. 하나 더 마실래? 철야시간에는 두 개는 마셔야 졸리지 않아. 중독되면 어떻게 하냐고? 졸려 죽는 것보단 낫지. 졸라맨 알지. , 졸리다. 졸리다 생각다보면 졸라하고 발음이 안 될 때가 있어. 피곤하면 혀도 둔해지거든. 졸라맨도 그래서 탄생했을 걸. 누군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림쟁이였을 거야. 마감은 임박했지 그림은 안 그려지지 에라 모르겠다. 막 끄적인 거야. 기운은 없고 졸리고 연필심은 툭툭 부러지고. 화가 나서 팔다리를 뚝뚝 꺾었을 걸? 그러면 죽는 거 아니냐고? 에이, 어린 거야? 순진한 거야? 그림인데 뭐 어때. 그렇다고 내가 죽을 순 없잖아. 졸려 죽는 것보단 캐릭터가 대신 죽는 게 훨 낫지. 인간이 원래 잔인해. 괴롭히다 보니까 졸음이 싹 가신 거라. 넌 남 안 된 일에 막 웃음이 나고 그런 적 없어? 좆나 졸린다고 해 봤자 더 졸려. 따라해 봐, 좆나 졸려 좆나맨. 웃기지? 안 웃겨? 그래, 그렇게 웃어야지. 그래야 철야작업을 할 수 있어. 암튼 박카스 하나 더 마시고 힘내자고!”

주임은 한입에 박카스를 털어 넣고서 천장을 올려다보며 하이 토끼야, 하고 손까지 흔들었다. 그는 볼 때마다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특히 한밤중에는 더 그랬다. 아무리 살펴도 천장에는 토끼는커녕 토끼 모양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주임이 웃으면 함께 웃을 수 있었고 웃고 나면 조금은 피로가 풀리기도 했으니까. 말이라는 게 참 이상했다. 자꾸 듣다보니 진짜 토끼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야밤에 달토끼가 함께 일한다고 생각하면 친구가 생긴 것 같아 왠지 모르게 든든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런 밤은 아주 잠깐이었다. 주임이 웃을 때는 토끼를 쳐다볼 때뿐이었다. 노후 된 프레스기는 하루에도 서너 번씩 고장이 났는데 하필이면 야밤에 그것도 단 둘이 있을 때 자주 멈추었다. 그때마다 주임은 엉뚱하게도 민서에게 화풀이를 했다. 막 때리거나 그러지는 않았는데 자꾸 이상한 말로 민서를 괴롭혔다.

미친놈. 믿을 걸 믿으라지. 내가 그렇게 호구로 보여? 좆같네. 어딜 간 거야? 금방 돌아온다며. 더러운 새끼야, 얼른 오지? 안 와? 좆같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더럽게 지저분한 입으로 쪼아대니까 좋냐? 쪼다새끼.”

민서는 시끄러운 기계음에 맞춰 실컷 욕을 하다가 아차 싶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혼자 있으니까 좋네! 민서는 주임처럼 아무 말이나 중얼댔지만 그것도 이내 시들해졌다. 한밤중에 넓은 공장을 혼자서 일하는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어쩐지 으스스한 게 어둠속에서 무언가 툭 튀어나올 것만 같아 민서는 일하는 도중에도 자꾸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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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5

민서가 작업대에 쌓인 물건을 한쪽으로 치우려고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굉음이 들려오더니 바닥이 흔들렸다. 지진이라도 난 줄 알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민서는 숨을 곳을 찾지 못해 기계 아래로 납작 엎드렸다. 이어 전등이 몇 번 깜빡이더니 정전이 되었다. 공장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민서는 조심스럽게 일어나서 두 손을 비벼 먼지를 털어내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플래시를 켰으나 촛불처럼 흔들리는 불빛은 바닥을 겨우 비추었다. 어둠에 곧 잠식당할 것처럼 위태로운 빛에 기대어 민서는 겨우 단자함으로 다가갔다. 버튼을 눌러 단자함 뚜껑을 열자 털커덕 소리가 공장에 울려 퍼졌다. 소음이 사라진 공장은 작은 소리도 크게 되돌려놓았다. 전원 스위치를 올렸다. 차단기는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두 번째 라인 중간 스위치가 말썽이었던 게 생각나 민서는 첫 번째 라인 차단기만 올렸다. 전류가 흐르자 미묘한 전파음이 발생한다. 전원이 연결된 안쪽 기계에 전원등이 켜졌다. 밤에 친구도 없이 혼자서 떠도는 반딧불이 같다. 전등은 입구 쪽만 켜졌다. 어둠의 농도가 옅어지자 시커먼 기계들이 점차 형체를 드러냈다.

민서는 귀신의 집에라도 들어선 듯 으스스한 기분이었다. 멈춘 기계를 작동시켜야 했지만 높이 올라간 펀치를 보니 더럭 겁부터 났다. 무쇠 펀치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절굿공이처럼 일시정지 상태로 허공에 떠있다. 금세라도 툭 아래로 떨어질 것 같아 아슬아슬해 보인다. 설핏 고개를 돌리면 주변의 기구들이 살아 움직여 민서에게 다가설 것 같다. 두려움에 몸을 웅크리고 있자니 퍼뜩 주임의 말이 생각났다. 혼자서 공장을 지키다 보면 달토끼가 보일 거야. 설마하면서도 민서는 슬며시 눈을 치뜨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가운데 환풍구 사이로 한줌의 달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토끼는 무슨. 그때였다. 어디선가 삐걱,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민서는 주변의 어둠을 주시했다. 야옹이니? 이럴 땐 길고양이라도 옆에 있었으면 싶어 불러보았지만 아닌 것 같았다. 이번에는 좀 더 가까이서 삐걱 했다. 소리는 점차 커지더니 일정한 리듬을 탔다. 천장에서 나는 소리였다.

달토끼가 있을 리가 없어.”

민서는 중얼거리며 천장을 봤다. 설핏 스친 형체가 아니었다. 민서가 눈을 끔뻑이고 다시 살폈다. 토끼가 분명했다. 자그맣고 예쁜 옥토끼가 아니라 주임이 말한 슈퍼토끼였다. 천장을 가로지르는 호이스트 후크에 매달려 토끼가 그네를 타고 있었다. 두렵기도 했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반가움에 민서는 토끼를 향해 살짝 미소 지었다. 토끼는 반응이 없었다. 놀이에 심취한 듯 와이어에 매달려 그네를 타느라 민서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

민서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지만 실은 토끼가 무슨 말이라도 해주길 바라서였다. 이번에는 용기를 내어 곧장 물었다. 그곳 기계도 고장이 나? 그래서 놀고 있는 거야? 그러자 리듬이 뚝 끊겼다. 공장은 다시 적막과 어둠이 점령했다. 달토끼도 환풍구 사이로 비추던 달빛도 보이지 않았다. 헛것을 보았나? 민서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천장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넘어진 김에 민서는 바닥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분명 토끼였어. 달빛을 타고 이동한다면 시간여행도 가능할까? 어둑한 천정을 바라보며 민서는 두 팔과 두 다리를 동시에 들어 올리고서 중얼거렸다. 이대로 침대위로 이동했으면…… 공중 부양이라도 하고 싶었다. 문득 낮에 휴게실에서 잠깐 본 잡지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어느 포토그래퍼가 찍은 사진 속에서 젊은 남녀 두 명이 서로를 향해 훌쩍 뛰어오르고 있었다. 접혀진 다리와 나는 듯한 팔과 서로를 향해 활짝 웃어 보이는 모습이 한 쌍의 새처럼 보였다. 그들은 허공을 나는 자유로운 새였다. 티지 타베우니에 있는 날짜변경선을 건너 뛴 모습이었다. 두 사람은 날짜 변경선을 건너 뛴 것이 아니라 오늘과 어제의 경계를 벗어난 것 같았다. 민서는 그곳에서 건너뛰면 무엇이 보이는지 궁금했다. 날짜 변경선은 런던 그리니치 천문대에와 피지 타베우니 두 군데에 있다고 했다. 지구를 세로로 관통하면 두 곳은 직선을 이룬다고. 민서는 첫 번째 여행지를 티지 타베우니로 정했다. 두 번째는 북극으로 가 오로라를 구경하고 싶다. 가능할까?

어릴 때 민서는 꿈이 많았다. 얼른 커서 취직하는 게 목표였다. 돈을 벌어 엄마 병원비를 대고, 나라 용돈도 주고, 여친도 사귀고, 조금씩 저축해서 차도 사고. 노력만 하면 원하는 것은 뭐든지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민서는 더 이상 희망하지 않는다. 꿈은 이루기 어려운 거라는 걸 너무 일찍 알아버린 것이다. 곧 자정이 된다. 이쪽과 저쪽의 경계가 있기는 하는지. 민서는 초를 재며 다가오는 생일을 혼자서 맞이한다. 아무도 축하해 주지 않는 성인이 되는 날, 바라는 것은 단지 하나 뿐이다. 작동을 멈춘 저 고집 센 고장 난 프레스기가 무탈하게 돌아가길 원한다.

민서는 어른이 되기도 전에 일찌감치 답답하고 암울한 현실을 알아버렸다.

엄마는 오후 다섯 시경에 응급실로 실려 갔다. 며칠 전부터 허리 통증을 호소하더니 결국 구급차를 불렀다고 나라가 카톡으로 알려왔다. 이태 전부터 의사는 디스크 파열이라고 수술을 권했지만 엄마는 치료를 자꾸만 미루고 있었다.

오빠! 엠알아이 찍어야 하는데 선납이래.

나라가 병원 상황을 실시간으로 전하고 있지만 민서는 답을 할 수가 없다. 사장은 이번 납품이 끝나면 밀린 월급을 주겠다고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라는 병원비를 재촉하고 기계는 멈추었다. 그렇다고 쉴 수도 없다. 잠을 자고 싶지만 공기를 마치지 못하면 사장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퇴근 시간이 임박해서였다. 민서는 병원비를 말해보려고 적절한 타이밍을 살피고 있었다. 사장이 막 사무실에서 나설 때 주임이 한 발 앞서 사장에게 뛰어갔다. 두 사람이 사무실로 들어가자 민서는 사장에게 어떻게 돈 이야기를 꺼낼지 혼자서 연습했다. 저 가불 좀. , 엄마 병원비가 급해서 그러는데요. , 제 월급 밀린 거…… 주임과 사장이 다시 나오자 민서는 사장에게 다가가 쭈뼛거렸다. 이번에는 사장이 선수를 쳤다.

, 허군. 자네는 이번 납품 마치면 곧바로 밀린 임금 해결해 줄게. 걱정 말고 조금만 기다려.”

민서가 머뭇거리자 이번에는 주임이 얼른 대답하라고 채근했다. . 민서가 마지못해 대답하자 주임은 저 혼자 신나서 사장의 뒤통수에 대고 구십 도 인사를 했다. 그러더니 사장의 차가 공장 입구를 빠져나가자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 난데. 곧 갈게. , . 주임은 자신이 사장이나 된 듯이 점퍼 깃을 세우더니 민서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말했다.

아가야! 내가 볼 일이 있어서 잠깐만 나갔다 올게,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해! 알겠지! 힘들면 달을 쳐다봐. 달토끼는 방아 대신에 프레스기 펀치를 들고 있어. 시절이 바뀌었으니 당연한 일이지. 사람들이 왜 달에 간 줄 알아? 사실은 프레스기를 설치하러 간 거야. 슈퍼토끼를 만들었거든. 토끼한테 일거리 다 뺏기고 싶지 않으면 잘해.”

콧노래를 흥얼대며 나간 주임은 자정이 다 되도록 감감 무소식이다.

기계가 고장 났어요. 어떻게 해요?

민서는 주임에게 문자를 보내놓고 폰 화면만 빤히 들여다본다. 평소 같으면 당장이라도 전화를 걸어 욕부터 해댔겠지만 구석진 곳에서 밀린 잠이라도 자는지 답이 없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온다. 전원만 켜면 되는데. 겁쟁이군. 넌 이제 성인이야. 한 가정의 가장인데 엄마를 책임져야지. 누구야? 달토끼야?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지만 어슴푸레한 어둠뿐이다. 민서는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계기판 앞에 섰다. 후욱, 숨을 삼킨 민서는 용기를 내 작동 버튼을 눌렀다. 투둑 소리가 들렸을 뿐 기계는 꼼짝하지 않았다. 한숨을 내쉰 민서는 다시 컨테이너 상자에 주저앉아 두 팔로 무릎을 감싸고는 머리를 기대고 깜짝 졸았다. 기름띠로 얼룩진 주황색 후드티에도 원래의 색을 잃은 청바지에도 아직 앳된 얼굴에도 깊숙이 노곤함이 배어있다. , 전화했어? 민서는 기계가 멈췄다고 웅얼거렸다. 오작동 센서를 꺼놓고 작동시키면 될 거야. 그래도 돼요? 잠에서 깬 민서가 벌떡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폰을 살폈지만 그대로였다. 민서는 계기판 앞 왼쪽에 있는 오작동 센서등을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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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0

시작 버튼을 누르자 프레스기가 덜컹거리며 움직였다. 묵은 해소기침 같은 거친 소리였다. 공장에 다시 소음이 일었다. 절굿공이가 내려와 쿵덕하고 원단을 내리쳤다. 상판이 올라가고 하판에 물렸던 원단이 절단되어 나왔다. 민서는 생산품을 적재함 위로 쌓았다. 컨베이어벨트가 돌아가며 다음 원단을 밀어 넣었다. 악어처럼 아가리를 벌려 원단을 삼킨 프레스기가 생산품을 뱉어냈다. 민서는 생산품을 옮기느라 벌건 눈을 연신 끔뻑이며 손을 놀렸다. 눈을 치떠도 자꾸만 눈꺼풀이 내려와 스르르 눈이 감겼다. 박카스라도 마셔야 했나? 생각해보니 오늘 밤에는 야식으로 나오던 빵도 박카스도 없었다.

주임은 철야 때마다 박카스 두 개는 마셔야 졸리지 않는다고 했다. 피로회복제를 두세 병 마신 날 주임은 기분이 좋아보였다. 그렇지만 방심은 금물이었다. 변덕이 심한 주임은 순식간에 돌변했다. 어느 날, 민서는 박카스를 마시다 말고서 뚜껑을 닫았다. 뭐야, 왜 마시다 말어? 그게 아니라 맛이 좀. 민서는 말해놓고서 아차 싶었다. 심하게 구겨진 주임의 얼굴은 이미 벌겋게 달아오른 뒤였다.

내가 이상한 거라도 섞었단 말야?”

, 아닙니다. 가 감기가 와, 와서. 맛을 잘……

너어, 이이이 새끼, 사수를 못 믿고 의심을 해? 무조건 믿어야지. 아아아 안 그래? 미미미 믿어, 안 믿어?”

주임은 화가 나면 말을 더듬었다. 차라리 때리면 맞는 것이 나을 것 같았지만 주임은 때리지도 않으면서 폭언을 일삼았다.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이 목적인 냥 기분이 풀릴 때까지 거침이 없었다.

와아아아아, 가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 가아아아아. 어쭈 아아아 안 가? 아아아 안 와? 자식 니가 그그그 그러니까 복이 없는 거야. 아아아 아버지도 없지? 어어어 엄마도 벙어리고.”

주임의 화가 풀릴 때까지 말대꾸는 절대 금지였다. 한 마디 했다간 백 마디가 되돌아왔다. 차라리 몇 대 얻어터지고 말지. 그럴 때마다 민서는 최면을 걸었다. 나는 민서가 아니다. 민서의 그림자다. 그림자가 밟힌다고 영혼이 상할 리가 없다. 민서는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고 나면 정말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혼자가 되면 가슴 한쪽이 당기고 결렸다.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그럴 땐 게임을 했다. 심즈에서 원하는 대로 집을 짓고 여친도 만나고 사랑도 하고나면 기분이 좋아졌다. 공장에 들어와서는 게임할 시간도 없었지만 일단 의욕이 없었다. 한 달에 한 번 쉬는 날에는 비 맞은 빨래처럼 축 늘어져서 휴게실 이층에 있는 간이침대에서 종일 잠만 잤다. 자고 나면 식은땀으로 온 몸이 축축해서 옷이 다 젖었다. 이대로 버티다가 죽을 것 같았다. 그때마다 민서는 고3때 담임선생님의 말씀을 떠올렸다. 선생님은 실습생으로 나가는 반 친구들에게 무조건 버티라고 했다.

나무의 색이 원래 하얀 색이었다. 태초에 지구에 불이 났을 때, 환경에 적응하느라 검붉은 색을 갖게 되었다. 적응한 동식물이 지구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눈밭에 사는 북극곰이 흰색을 유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무도 곰도 생존을 위해 견디는 것이다. 견뎌야 한다. 견디는 자가 살아남는다. 무조건 버텨야 한다. 명심하도록.”

한밤중에 민서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죽을 것 같아도 견디는 게 맞는 걸까? 이럴 때는 주임이 말도 안 되는 허풍이라도 떨었으면 좋겠다.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민서는 졸음이 쏟아져 미칠 지경이다. 투둑, 어디선가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불현듯 공포가 밀려왔다. 민서는 어릴 때 했던 공포체험을 떠올렸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민서는 놀이공원으로 체험학습을 갔다.

귀신의 집은 가짜에요. 그래도 체험이지만 심장이 약한 친구들은 들어가지 마세요.”

안내원과 선생님의 말을 듣고 몇 명의 아이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선생님이 가짜라고 하잖아. 겁쟁이. 난 하나도 안 무서워.”

두려움이 없는 일부 아이들이 앞장서 줄을 섰다. 하지만 막상 귀신의 집에서는 큰소리치던 아이들도 대부분 자지러질듯이 비명을 질러댔다. 비명을 지르지 않는 친구는 거의 없었다. 두렵기는 민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민서는 몇 번의 한숨을 내쉬었을 뿐 가만히 어둠을 응시했다. 어둠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기다란 손톱이 민서를 할퀼 것처럼 다가와도, 허리까지 흘러내린 긴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허연 얼굴을 뒤덮은 붉은 피를 볼 때도, 두려웠지만 소리쳐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다. 체험이라고 했으니까. 눈을 똑바로 뜨고 어둠을 주시했다. 한 귀신은 플래시로 자신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민서가 눈을 부릅뜨고 귀신을 노려보자 오히려 귀신이 당황해 어둠 속 어딘가로 숨어버렸다. 눈에 보이는 것이 오히려 공포감을 줄여준다는 사실을 민서는 어린 나이에 깨달았다.

그날 이후로 민서는 공포체험을 놀이로 생각했다. 집에서 하는 공포체험은 귀신의 집보다 더 실감났다. 나라는 장롱 안 이불속으로, 민서는 베란다에 있는 헌 상자 속에 숨었다. 괴성이 오가고 물건들이 부서지고 흐느낌이 들려와도 민서는 두 손으로 귀를 막고서 숨소리를 죽였다. 너무 무서운 날에는 마법이 통하길 바라며 주문을 외웠다. 도마칼도마칼도마칼…… 주문은 효과가 있어서 다음 날 아침이면 엄마의 칼질소리가 들려왔다. 벌떡 일어나 보면 이불을 다 걷어찬 나라가 옆에서 자고 있었다. 나라에게 이불을 덮어준 민서는 방문을 열고 나가 거실을 살폈다. 이불을 덮은 김 씨가 코를 드르렁 거릴 뿐 주변은 말끔했다. 낡은 상자는 창밖 베란다에 얌전히 놓여 있었고 거실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꿈인가 싶을 정도로 말끔했다.

1이 되던 여름밤에 열린 베란다 문을 내다보던 민서가 나라에게 물었다. 공포놀이 했던 거 생각나? 몰라. 밤마다 너는 장롱에 숨었고 나는 상자에 숨었잖아. 꿈꾼 거 아냐? 이거 봐 장판 곳곳에 날카로운 것에 패인 자국이 있잖아. 싱크대도 오래된 컴퓨터 책상도 흠집투성이야. 그거야 낡았으니까 그렇지. 나라는 시큰둥하게 대답하며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민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라가 네 살 무렵이었으니까. 민서도 기억나지 않는 게 있다. 김 씨가 언제부턴가 보이지 않았는데 엄마에게 물으면 무조건 도리질을 하며 모모모 라, 라고 했다. 엄마가 허리를 다쳐 한동안 병원에 입원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김 씨는 기억에 없었다. 김 씨 이야기만 나오면 엄마는 시선을 피했다. 그늘진 엄마의 얼굴이 보기 싫어 민서는 더 이상 캐묻지 못했다.

, 읽씹이야?

답장 좀 해.

나라는 잠도 안 오는지 계속 카톡을 보내고 있다. , 씨팔. 신물 난다. 민서는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깜짝 놀랐다. 신물. 어디서 들었던 소리였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공장에 처음 들어왔을 때 전임자가 했던 말이었다. 전임자가 업무를 인수인계하고서 민서에게 말했다. 금방 신물 날 걸요? 그때 민서는 오직 제 손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에 들떠있었다. 세 달이 지난 지금 민서는 저도 모르게 전임자가 한 말을 따라하고 있었다. 시팔, 돈도 안 주고. 민서는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중얼거렸다.

이틀 전에도 민서는 사장에게 월급에 대해 말을 꺼냈다가 거절당했다. 미지급액이 벌써 백이십만 원이었다. 첫 월급날이었다. 사장이 사무실로 부르더니 기초수급자냐고 물었다. 민서가 고개를 주억거리자 사장은 누가 물으면 아르바이트생이라고 둘러대라고 했다. 일정금액을 받으면 수급자에서 제외 된다는 말에 민서는 사장의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엄마의 병원비와 약값은 수급자가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사십만 원을 빼고 입금시킨 사장은 나머지 금액은 수습기간이 지나면 현금으로 주겠다고 했다. 3개월이 지났는데도 사장은 돈을 안 준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사장은 말과 행동이 달랐다. 그는 기계가 고장 나 작업에 차질이 생기면 장난 아니게 화를 냈다. 최신 프레스기를 사야겠다고 투덜거리고, 빨리 고치라고 주임을 다그쳤다. 심지어 주임이 수리를 못하면 폭력을 휘둘렀다. 도로 한복판에 서 버린 차에 화풀이를 하듯이 주임을 발로 차거나 넘어뜨리기도 했다. 주임은 개처럼 낑낑거리며 사장의 발길질을 견뎌냈다. 민서는 말리지도 못하고 구타장면을 고스란히 지켜보고 서 있었다. 당장에라도 일을 그만두고 싶었지만 선생님의 당부가 생각나 꾹 참고 있었다. 사회생활은 무조건 견디는 거라고 했다. 아니꼽고 더러워도 견뎌야 한다고. 정 그만 두고 싶으면 일 년만 버티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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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0

사장이 전화를 걸어와 대뜸 소리부터 질렀다.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아? 주임은? , 화장실? 이번 납기일 꼭 지켜야 하는 거 알지? 생산량 차질 생기면 둘 다 모가지야.”

사장은 제 말만 하고서 전화를 끊어버렸다. 통화 말미에 사장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왔다. 내가 다시는 가불해 주나봐라. 어디서 또 술 처먹는 거 아냐? 사장은 철야 때마다 새벽 한 시에 전화를 걸어와 작업 상황을 확인했다. 주임도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민서는 성급한 사장이 지금이라도 공장으로 달려오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센서를 꺼놓고 작업한 걸 알면 사장은 뭐라고 그럴지. 생각만 해도 다리가 후들거린다.

주임은 이제 핸드폰까지 꺼 놓았다. 그는 종종 센서를 끄고서 작업을 했다. 그래도 되냐고 걱정스러워 물으면 주임이 새까맣게 어린 게 뭘 아는 척이냐며 이죽거렸다.

민서, 너 성이 허 씨라고 했지? 대기업에서 널 왜 안 받아준 줄 알아? 넌 아버지가 없잖아. 엄마가 허 씨라고? 딱 봐도 넌 인도계야. 아님 파키스탄이든지. 인도나 파키스탄이나 원래는 한 나라였다지? 너무 기죽지는 말고. 허 씨도 가야국 수로왕 부인인 허황옥이 시조잖아. 눈은 크고, 겁 많게 생겼고, 구릿빛 피부에, 어딘가 비율이 안 맞아.”

주임의 말은 듣다보면 언제나 그럴 듯했다.

그런 것 같기도 해서 민서가 동의하듯 고개를 주억거리면 주임이 이번에는 엄마를 걸고 넘어졌다.

너네 엄마가 벙어리라며 아아아가, 아아아가, 하고 부르지. 그것도 삑사리 나게. 그러니까 와와와 가가가 하는 거야. 너 별명은 이제부터 와가야. 아가아가와아아가아아 어쭈 안 와? 이리 오라잖아. 그냥 저리 가라.”

그러면 민서는 어쩔 줄 몰라 오지도 가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그래요. 주임님, 엄마와 저를 놀려도 상관없어요. 그러니 제발 돌아오세요. ? 주임님!”

민서의 소리가 공장에 울려 퍼지다가 이내 어둠속으로 흩어졌다.

니 말이 다 맞다고, 씨팔. 됐냐? 그러니까, 제발 돌아오라. !”

고래고래 욕을 해도 소용없었다.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민서는 이대로 공장에 갇힌 건 아닌지 덜컥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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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5

기계소리가 이상했다. 생산품을 살펴보니 한쪽 가장자리가 스크래치가 나있었다. 옮겨놓은 생산품도 전부 불량이었다. 여태 헛일을 한 것이다. 사장은 원단 값을 월급에서 까겠다고 야단일 것이다. 불량이 발생하면 주임은 기계 위로 올라가 스크래치 난 부분을 그라인더로 갈아내고서 에어를 분사했다. 구경만 했지 직접 해본 적은 없었다. 민서는 전원을 끄고서 하판 다이위로 올라섰다. 상판에 닿지 않게 몸을 최대한 접고서 홀더를 내려다 봤다. 어둑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왼손으로 핸드폰 플래시를 켜고, 오른 손으로 그라인더를 들자 중심잡기가 어려웠다.

민서가 다시 내려왔을 때 연달아 카톡이 울렸다.

대답 좀 하라니까.

자는 거야?

걱정 마, 오빠가 어떻게든 해 볼게. 민서가 손가락을 움직여 답장을 쓰려했으나 철자가 자꾸만 엇나갔다. 미치겠다. 민서는 엠알아이 비용을 검색했다. 삼십 만원에서 팔십만 원으로 병원마다 비용이 다르다고 했다. 지긋지긋하다. 정말이지 신물이 난다. 자고 싶다. 선 채로 눈을 감는다. 주임이 놀려댄다. 와아아 가아아. 네가 왜 와가인지 알아? 민서는 감았던 눈을 번쩍 뜬다.

개새끼. 민서는 욕을 하며 와가를 검색했다. 와가 - 식당. 와가 - 지붕의 한 형태. 와가 - 파키스탄과 인도네시아의 국경지역. 민서는 와가지역에 대한 어느 블로거의 여행기를 살폈다.

와가 지역에서는 매일 국기 하강식이 열린다. 양측 군인들이 닭벼슬처럼 생긴 모자를 쓰고 과장된 몸짓으로 하강식을 한다. 파키스탄 쪽은 검은색이고 인도 쪽은 붉은 모자를 썼다. 군인들은 근엄하지 못하고 우스꽝스럽다. , 웃음이 새어나온다. 이렇게 웃어도 되는지 반성하다가 다들 웃고 떠들어서 마음 놓고 응원했다. 그들은 편을 가르지 않고 환호성을 지른다. 청군 백군 나누다가 운동회가 끝나면 머리띠를 벗어 던지고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의 운동회 같은 분위기다. 관광객들은 국기 하강식을 보기위해 와가지역을 찾는다. 양쪽 군인들은 복장만 다르게 하고 같은 동작을 거행한다.

민서는 아래 동영상을 클릭했다. 검은 화면에 시끄러운 소음이 먼저 들려온다. 이어 화면이 뜨고 국기 하강식을 구경하는 인파가 보인다. 양쪽의 군인들이 진지하게 식을 거행한다. 엄숙하다기보다 우스꽝스러운 축제 같다. 관람객 모두가 환호성을 지르며 하강식을 응원한다. 북쪽보다는 남쪽에 사람들이 더 많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옷만 다르게 입었지 생김새도 행동도 서로 비슷하다. 민서는 화면에 보이는 관람객들을 자세히 살핀다. 모두가 어딘지 모르게 한군데씩 자신과 닮아 있다. , , , 비율이 안 맞는 어색함까지. 그제야 민서는 주임이 인도계라고 놀리는 이유를 알 것만 같다.

민서는 아버지가 없다. 그런 민서에게 사람들은 다문화가정 아니냐고 대놓고 물었다. 눈이 크고 피부가 검다는 이유였다. 한국인이에요. 민서가 대답하면 이번에는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더 놀라 질문공세가 이어졌다. 부모님, 아님 혹시, 조상 중에 누구라도 섞인 거 아냐? 그들이 무심하게 내던진 말에 민서는 기가 죽었다. 엄마는 고아원에서 자랐다. 벙어리에다 수화도 배우지 못한 엄마는 고아원에서 나온 뒤로 식당을 전전하며 살았다고 했다. 이 또한 의붓아버지가 술주정삼아 했던 말이라 사실여부를 확인 할 수가 없다. 김 씨는 엄마가 일하던 식당의 손님이었다. 어느 날 그는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고는 엎어진 채로 잠이 들었다. 그런 김 씨를 엄마가 집으로 데려오면서 함께 살게 된 것이다. 어느 날, 동생이 태어났다. 이름이 나라이다. 김나라. 나라는 이름 때문에 아이들이 놀린다고 친구들과 자주 싸우고 들어왔다. 내가 다 생각이 있어서 지어준 이름이야. 김 씨는 나라에게 기죽지 말라고 큰 소리를 쳤다. 김 씨는 말한 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나름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믿는 만큼은 아니어도 그 언저리라도 맴돌라는 뜻으로 거창하게 나라의 이름을 지었다고 했다. 하지만 김 씨는 술에 취하면 믿음과는 정반대로 행동했다.

빨리 죽어야지. 암 죽어야 해. 이렇게 살아서 뭐해.”

술상에 고개를 처박고 꾸벅거리며 졸던 김 씨는 잠에서 깨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주임은 시간여행이 가능하다고 했다.

믿으면 가능하다니까? 넌 어디로 가고 싶어? 잘 생각해 봐. 행복했던 때가 있었을 거 아냐. 간절히 기도하면 신이 들어줄 거야. 하지만 딱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어. 어떤 작가가 시간 여행자를 위한 사소한 배려를 했는데 시간여행자들은 그 배려 때문에 타임루프에 갇히게 돼. 계속해서 죽음을 되풀이 하다니 그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야. 시간여행을 한다면 타임루프를 조심하라고. 명심해!”

민서는 아무리 떠올려도 행복했던 기억이 없었다. 아버지가 있었다면 행복했을까. 단 한순간이라도 행복하기만 하다면 그곳으로 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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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0

민서는 핸드폰 프래쉬가 홀더 안을 비추도록 고정시키고 하판 위로 올라섰다. 그라인더를 켜자 칼날이 돌아가며 진동이 발생했다. 팔이 떨려왔다. 손에 힘을 주고 홀더 안쪽 가장자리로 그라인더를 들이밀었다. , 투둑. 그라인더가 튕기더니 홀더 안쪽으로 떨어졌다. 핸드폰마저 꺼져버렸다. 민서는 홀더 안으로 고개를 숙였다가 어둠 속으로 훅 빨려들었다. 한동안 거꾸로 추락하던 민서는 어느 순간 익숙한 공간에 도착했다.

민서는 뚜껑을 열고 상자 밖으로 나왔다. 어둠에서 익숙해지자 흐릿하게 사물들이 보였다. 어릴 때 살던 집 베란다였다. 중창을 열고 거실로 들어선 민서는 부엌 쪽으로 몇 걸음을 옮기다가 주춤하고 멈춰 섰다. 식탁 아래에 여자를 깔고 앉은 사내의 등이 보였다. 바닥에 누운 여자는 시퍼렇게 질려 비명소리도 내지 못하고 떨고 있었다. 그 뒤로 소주병을 집어든 아이가 보였다. 아이는 잠시 주춤하더니 사내의 뒤통수를 향해 힘껏 내리쳤다. 순간 눈을 감았는데도 민서는 보고야 말았다. 바닥으로 쓰러져 피를 흘린 사내는 의붓아버지 김 씨였다.

민서는 날짜 변경선 앞에 섰다. 동쪽은 어제 서쪽은 오늘이라고 했다. 어제로 한발 건너가니 응급실로 이송중인 엄마가 보였다. 나라는 원무과에서 접수를 하려다 말고 카톡을 보내고 있다. 민서는 다시 오늘로 건너왔다. 응급실 구석진 곳 침대에서 엄마가 통증을 이기지 못해 신음을 토해낸다. 컵라면으로 저녁을 때운 나라가 스톨의자에 앉은 채 한손으로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한손으로는 핸드폰을 쥐고서 침대 모서리에 기대 잠들어 있다. 오빠! 엄마의 신음소리가 거슬렸을까. 나라가 잠꼬대를 하며 고개를 들어 액정을 들여다본다. 액정 화면이 밝았다가 꺼진다. 비몽 간에 나라는 다시 눈을 감는다. 이내 고개가 스르르 꺾인다.

다시 공장이다. 언제 왔는지 사장과 주임이 와 있다. 주임이 민서의 양팔을 붙들고 흔들었다. 주임님 시간여행이 가능해요. 민서가 말했지만 억병으로 취한 주임은 제 말만 하느라 횡설수설이다.

, 어쩌죠? 말짱해 보이는데 숨을 안 쉬어요.”

넌 뭐했어? 저 지경이 되도록 뭐했냐고, 이 새끼야!”

화를 참지 못한 사장이 주임의 정강이를 냅다 걷어찼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주임이 두 다리를 부여잡고 변명을 늘어놓는다.

, 화장실에 있었어요. , 변비가 심해서요. , 배터리도 다 돼서 얼마나 앉아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단순한 일이라 녀석이 잘 지키겠다고 해서. , 제 잘못입니다. 어린 녀석을 잘 돌봤어야 했는데.”

그러니까 왜 공장을 비우고 술을 처먹어? 네가 다 책임져 개새끼야.”

격노한 사장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쇠파이프를 집어 든다.

섬뜩함에 민서는 얼어붙은 듯 꼼짝할 수가 없다. 어쩐지 기시감이 드는 장면이다. 언젠가 본 것 같은데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문득 타임루프를 조심하라던 주임의 말이 생각났다. 민서는 두 손을 그러쥐고서 간절하게 기도한다. 제발 타임루프만 피하게 해주세요. 그러면 신을 믿겠습니다. 그러자 천장 가운데 환풍구 사이로 달빛이 쏟아져 내린다. 번쩍 눈을 뜬 민서가 빛을 향해 빨려들듯 걸어간다.

이내 공장에는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다.




  <당선소감>


   "소설 속 인물들이 현실의 나를 붙들었다"



바라고 희망하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면 모든 것이 명료해진다. 글을 쓰는 것. 그것은 시간과는 무관한 내 삶의 이유였다. 어린 시절 나는 작은 마당에서 하이힐을 신고서 홀로 소월시집을 암송했다. 쇠징이 박힌 하이힐은 외할아버지가 소월시집은 아버지가 사주셨다고 했다. ‘나는 세상모르고 살았노라’, 를 암송하며 어머니를 기다렸다. 물때에 맞춰 갯벌 한가운데서 낙지를 잡던 어머니는 살얼음이 어는 겨울에도 정수리를 녹일 것 같은 여름 땡볕에도 그곳에 계셨다. 저 먼 곳에서 하얀 빛을 받은 허리숙인 그림자를 바라보며 나는 왜? 라는 물음표를 새겼다.

내게 유일한 신은 세상에 많은 작가들이었다. 소설 속 인물들이 현실의 나를 다독거렸다. 그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살았을지. 늦은 나이에 소설을 쓰기로 결심하고 목숨 줄처럼 붙들었다. 그것이 나를 살게 했고 쓰면서 행복했다. 하지만 문청의 길은 녹록치 않았다. 돌고 돌아 제자리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제는 주저앉고 싶었다. 당선 소식을 듣고 먼저 부모님이 생각났다. 고집 센 딸을 키우느라 고생하신 두 분은 병으로 일찍 돌아가셨다. 흐뭇해하실 두 분의 미소가 선연하다.

그동안 나를 일으켜 세운 수많은 인연을 소중히 여기겠습니다. 광주대 문예창착 교수님들, 묵묵히 지켜봐 주신 이기호 교수님, 그 외 많은 스승께 배움을 얻었습니다. 함께 공부한 오랜 문청 친구들, 묵묵히 지켜봐주신 가족들, 지인들 모두에게 이 기쁨을 돌립니다.

심사위원님께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경계에 선 이들의 통각에 시선을 둔 글을 쓰겠습니다.



  ● 전남 완도 출생.

  ● 광주대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졸업.

  ● 2012 동서문학상 소설 가작 수상.


 

  <심사평>


  "삶의 비극성, 시간여행 장면 등 과감한 환상성 돋보여"


이번 신춘문예 응모작품 중 최종 10편 정도를 놓고 당선작을 선정하는 과정을 거쳤다.

전반적으로 안정된 문장에 시의성 있는 작품이 많았다. 그중에서 누구라도’, ‘레치가 악마를 다시 그린 이유’, ‘백린’, ‘한밤중에 민서는을 놓고 많이 고심했다.

최종 당선작은 백린한밤중에 민서는을 놓고 정하게 됐는데 두 작품이 뚜렷한 개성을 지니고 있었다. ‘백린은 냉혹하고 비정한 하드보일드한 문체라면 한밤중에 민서는은 느리고 우울한 톤이었다. 우울하기는 백린도 마찬가지였고 두 작품 다 비극적 서사였다.

비극을 구성하는 방식의 차이랄까, 서사를 구성하기 위해 어떤 비유를 끌어오고 어떤 사유의 과정을 통과하는가 하는 대비 역시도 뚜렷했다.

백린목숨이 걸린 돈이 소재라면 한밤중에 민서는목숨이 걸린 노동이 소재였다. ‘백린은 집중력 있고 시원시원하게 서사를 밀고 나가는 데 반해 한밤중에 민서는은 산만하고 정보도 많고 다소 신파였다.

서사의 재미로 보면 백린이었지만 이 작품은 문학이라기보다 영화에 가까웠고, 이상하게도 그 이후가 잘 보이지 않았다.

이에 반해 한밤중에 민서는은 삶의 비극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타임 루프(time loop) 개념 등 이것저것 끌어들여온 사유의 측면이 돋보였다.

또 후반부의 시간 여행을 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과감한 환상성 또한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한밤중에 민서는을 당선작으로 정했다.

심사위원 : 강영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