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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신호와 소음 당선작 / 이민희

1. 관찰

  나는 요즘 CCTV로 사람을 본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CCTV 속의 고객들을 관찰한다. 십육 분할 대형 모니터 여섯 대가 설치된 Y마트의 지하 보안실. 나는 그곳에서 아흔여섯 개의 화면을 스쳐가는 사람들의 취향과 기호를 순간순간 추적한다. 마트 곳곳에 설치된 광각 렌즈는 백팔십오 도에 달하는 가시각으로 사람들의 움직임을 포착했고, QHD급 고화질 카메라 역시 증거 자료로 제출해도 될 만큼 픽셀이 촘촘했다. 최근에는 이미지를 분석하는 소프트웨어까지 더해져 고객들의 체류 시간은 물론 방문 카운팅 데이터까지도 간단히 출력해냈다.
  물론 아직까지는 기계가 모든 것을 다 말해 주지 못했다. 결국은 누군가가 디지털 길목을 지키고 서서 나름의 관점을 갖고 신호와 소음을 분별해야 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 의미 있는 신호이고 또 어떤 것이 노이즈인지는 해석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었다. 나는 이 모호한 작업을 마케팅 팀의 공계향 씨와 함께 하루 여덟 시간에 걸쳐 번갈아 하고 있다. 몇 가지 지표를 미리 정해둔 뒤, 고객들을 관찰하며 그 내용을 데이터로 축적했다.
  그중에서도 우리의 관찰 대상은 혼자 쇼핑을 오는 사람들, 이른바 '혼쇼핑족'에 집중돼 있었다.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영화관에 가며, 자신만의 즐거움을 위해 단 한 장의 콘서트 티켓을 끊는 사람들. 부담스러운 관계와 불편한 사회성으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자유로이, 그러나 고독하게 유영하는 1인 가구 소비자가 Y마트의 새로운 타깃이었다. 1인 가구는 이제 대한민국에서 가장 흔한 가구 형태 중 하나였다. 삶의 질을 중시하는 이들의 구매력만 해도 어느덧 120조 원 규모에 다가서고 있었다.
  본격적인 마케팅을 위해 Y마트는 이들에 관한 데이터부터 수집했다. 구매 기록을 포함해 숫자로 표현될 수 있는 모든 정량적 데이터를 긁어모았고, CCTV 관찰과 인터뷰 방문을 더해 정성적 데이터까지 보완할 계획을 세웠다. 이렇게 축적된 데이터에서 이름과 주소 같은 개인정보들을 제거한 뒤에는 구체적인 타깃 프로파일을 작성하는 것으로 일단의 작업이 마무리될 예정이었다. 말하자면 얼굴을 지워낸 데이터 위에 그 누구도 아닌 한 사람의 삶을 스케치해봄으로써 타깃을 특정화하는 작업이 마지막 단계로 남아 있는 셈이었다. 데이터로 시작해 데이터로 끝나는 이 장밋빛 계획에 조 이사는 누구보다 단단히 들떠 있었다.
  "대세는 데이터야. 요즘은 그게 원유이자 자본이지."
  모두들 그렇게 말하는 시대이기는 했다. 다들 데이터에 물을 붓고 악력을 더하면 그럴듯한 반죽이 되리라고 믿었다. 장차 그 반죽이 꽈배기가 될지 도넛이 될지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 해도 말이다.
  데이터로 빚어낼 미래의 빵. 조 이사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거부하기 힘든 아이디어였을 것이다. 가뜩이나 저조한 매출 실적에 조 이사는 안팎으로 압박을 받고 있었다. 무게가 나가는 생필품은 택배로 배송 받고, 신선도를 따져야 하는 채소와 과일조차 이른 새벽, 현관 앞에서 건네받는 시대였다. 편의점을 제외한 모든 오프라인 유통업체가 적자를 내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더 이상 업계 관계자들만의 비밀이 아니었다. 하다못해 주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라도 신박한 뭔가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조 이사는 힘주어 말하고는 했다.
  "전 세계에서 하루 이십사 시간동안 만들어지는 데이터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 『해리포터』 책으로 치면 육천오백억 권 분량이야. 그나마 이것도 작년에 나온 통계라고. SNS며 온갖 커뮤니티, 웹사이트, 휴대폰까지…… 이제 우리는 그 디지털 빵 부스러기에 사활을 걸어야 해."
  유령은 늘 소문과 풍문을 타고 다가온다. Y마트의 마케팅 팀 역시 실체가 모호한 유령을 마주하고 있었다. 빅데이터 혹은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눈에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유령들. 이 유령들은 일종의 유행과도 같아서 해일처럼 몰려들어 눈과 귀를 잠식했다. 정말로 원하는 것이 아니라 원해야만 하는 것들을 부추기며 서로를 끝내 전염시켰다. 녹색성장이라든가 창조경제라는 이름표를 달고 나타났던 지난날의 그 유령들처럼 말이다. 트렌드와 이슈에 민감한 기업 마케팅이란 사실상 이 유령들과의 투쟁의 역사와 다를 바 없었다.
  어쨌든 이 시대의 트렌드에 따라 Y마트는 시스템을 정비했다. 보다 쉽게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도록 각 분야의 특화된 장비들을 들여왔고, 디지털 코인을 채굴하기에 앞서 알리바이도 마련해두었다. 매장 내 코너마다 'CCTV 촬영중'이라는 안내문을 내걺으로서 고지의 의무를 다했으며 새롭게 바뀐 포인트 적립 제도를 빌미 삼아 긴 약관을 고객들에게 들이밀었다. 깨알 같은 글씨로 나열된 수많은 조항 속에 '개인정보 수집 이용 동의'와 '개인정보 제3자 제공 동의' 항목도 버젓이 넣어두었다.
  덕분에 단편적이나마 몇 가지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덟 캔짜리 맥주를 세 묶음 이상 구매하는 남성들이 주로 어느 연령대에 속하는지, 간헐적으로 마트를 방문하는 여성 고객들에게는 어떤 서비스 쿠폰을 발송하면 좋을지. 우리는 고객들이 화들짝 놀라 달아나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유지하며 풋내기 탐정처럼 그들의 디지털 발자국들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이 대목에서 소설 『1984』의 빅 브라더를 떠올리지는 않기를 바란다. 그는 감시하고 군림하지만 우리는 관찰하고 편의를 제공할 뿐이다. 더구나 권력으로 치자면 그것을 손에 쥐고 흔드는 자는 공급하는 우리가 아니라 차라리 CCTV 저편의 수요자들이라 해야 옳다. 결핍을 느끼고 욕망하면서도 변덕스러운 선택과 모호한 반응으로 번번이 달아나버리는 소비자들. 무심한 소비와 은밀한 열망 사이에서 제각각으로 흩어져 움직이는 물음표 같은 존재들.
  이를테면 내게는 지금 CCTV에 비치는 저 여자가 그러하다. 여자는 벌써 십 분째 주방용품 코너를 배회하고 있었다. 독일제 투각 접시와 폴란드산 머그잔들을 차례로 만져보고 손에 실리는 무게를 일일이 가늠했다. 무채색 테이블보와 빌레로이앤보흐 사의 냅킨 세트를 삼 분 가까이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진열대 아래로 늘어뜨린 광고성 셸프토커와 가격표 또한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하고 많은 혼쇼핑족 중 내게 여자가 포착된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그저 이것저것을 둘러보는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시선이 자못 집요하고 꼼꼼했다.
  다음 순간 여자는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프라이팬 진열대 쪽으로 천천히 카트를 몰고 갔다. 짙은 초록과 어두운 주황색으로 도장된 프라이팬들이 CCTV 화면 아래쪽으로 가지런히 도열했다. 열전도율이 높은 알루미늄 소재로 매출에 꾸준히 기여하는 상품이었다. 음식이 쉽게 눌어붙지 않는 데다 팬 내부에 색이 배이지 않아 세척도 용이했다. 그러나 여자는 그쪽으로는 시선 한 번 던지지 않은 채 세라믹 프라이팬 진열대 앞에 홀린 듯 멈추어 섰다. 베이비핑크, 크림화이트 계열의 부드러운 파스텔 톤에 우드 재질의 손잡이가 감각적인 느낌을 주는 상품이었다. 팬 내부가 하얗다 보니 사용할수록 흔적이 드러나는 조리기구의 특성상 관리하기 힘들지 않을까 싶은데 여자 역시 뭔가를 고려하는 듯 표정이 골똘했다. 그 위에 내려앉을 탄화된 기름얼룩과 흠집이라도 상상해 보는 것일까.
  나는 펜을 쥔 채 잠자코 기다렸다. 묵직한 내구성과 시각적인 만족감 사이에서 여자가 어서 결정을 내리기를, 마땅한 생활의 편리와 순수한 소유욕 사이에서 취향을 드러내 주기를 기대했다. 그 뒤로도 한참을 망설이던 여자가 마침내 집어든 것은 이십 인치짜리 크림화이트 색 프라이팬이었다. 저 팬 위에 달걀 프라이 세 개나 올릴 수 있을까 싶어 의아했지만 어쨌든 나는 여자의 선택을 노트에 옮겨 적었다. 시간도 체크했다. 여자가 주방용품 코너에 들어선 지 정확히 이십삼 분 만의 일이었다.
  그 끝에 어림짐작으로 '삼십대 여성'이라는 메모를 덧붙이다가 나는 화면을 확대했다. 여자의 카트 안에 담긴 것들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열을 가하거나 데우기만 하면 되는 냉동 스파게티니 볶음밥 같은 즉석조리식품들이 더러 눈에 들어왔다. 낱개로 포장된 바나나 세 개와 부채꼴 모양의 상자에 담긴 조각피자, 그 옆으로 열두 롤짜리 화장지도 카트에 담겨 있었다. 오늘부터 생활용품 코너에서는 삼십 롤짜리 화장지를 사면 똑같은 상품을 덤으로 주는 1+1 행사를 하고 있었다. 주말을 앞두고 고객들을 유치하기 위해 구성한 미끼 상품이었다. 그럼에도 여자는 공짜 덤을 마다하고 열두 롤짜리 패키지만 단출하게 카트에 실었다.
  한 사람이 찾는 것은 많은 경우 그 사람 자체에 대해 알려준다. 나는 적은 용량만을 꼼꼼히 카트에 옮겨 담는 사람에 대해 상상해 보았다. 미끼상품에 쉽게 유인되지 않는 사람. 덤으로 안기는 화장지 더미를 부담스러워하는 사람. 적당히 끼니를 때울 때가 많지만 주방기구만큼은 자신의 취향에 따라 까다로운 선택을 내리는 사람에 대해.
  예측컨대 여자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아는 사람이었다. 뚜렷한 목적 없이 서성이던 주방 코너에서 자기 취향에 맞는 상품을 찾아낸 뒤에는 곧장 그 장소를 벗어났다. 관리하기에는 다소 불편하더라도 감각적인 디자인을 통해 더 큰 만족감을 얻는 편을 택했다. 물론 가끔은 제대로 요리를 해서 근사한 한 끼를 즐길 생각도 있으리라. 고민 끝에 선택한 프라이팬으로 언젠가 아기자기한 요리 몇 가지를 선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주방은 훈김 가득한 작업장이기보다 세련된 조리기구들이 놓여 있는 인테리어의 한 부분으로서 더 많은 충족감을 줄 확률이 높았다. 여자에게 소비란 이렇듯 자신의 취향과 욕망을 신중하게 추구하는 과정이었다. 고민 끝에 나는 여자를 '신중한 계획가'와 '디자인을 중시하는 소비자' 항목에 중복 분류했다.
  "잘 돼 갑니까?"
  김중남 씨가 의자를 끌며 다가와 슬며시 물었다. 한 손에는 오늘도 달큰한 커피 향이 나는 종이컵이 들려 있었다. 고객들이 많이 몰리는 오후부터 자정까지 근무하는 김중남 씨에게 커피는 익숙한 피로와 무료함을 눅이는 그 나름의 수단이자 강장제였다. 삼층에 달하는 마트 구석구석이 그에게는 어느새 닳고 닳을 대로 빤해진 탓이다. 그래서인지 삼교대로 근무하는 보안요원들 중에서도 그는 유독 내 작업에 관심이 많았다. 한때는 나를 경비 보안직들을 감사하러 온 본사의 염탐꾼으로 여기고 냉랭한 태도를 풀지 않았으나 꾸준히 누적되는 작업물을 지켜보며 차츰 냉기를 풀고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냥 그렇죠, 뭐."
  나는 김중남 씨의 시선을 의식하며 슬쩍 노트를 덮었다. 주방코너 이십삼 분 체류, 파스텔 톤 프라이팬 선택, 감각적인 디자인 취향, 빌레로이앤보흐 사의 냅킨에 관심 있음, 삼십대 여성……. 노트에 적힌 것은 보기에 따라 음흉한 스토커의 끼적거림과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이 프로젝트 자체를 크게 신뢰하지 않는 김중남 씨에게는 터무니없는 헛수고처럼 비칠 수도 있었다. 사람들을 관찰하고 거기에서 어떤 기회를 발견한다는 아이디어에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이는 그에게 허무맹랑한 생각에 지나지 않았다. 김중남 씨에게 인간이란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이었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견제의 시선을 거두지 않는 것만이 피차 얼굴 붉힐 일을 막을 수 있었다. 선량한 고객과 변변찮은 좀도둑, 술 취한 진상들을 가려내는 데 이골이 난 십일 년 차 보안요원으로서 그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기본적으로 비관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한순간 헤까닥하는 거죠. 사람이란 게 그렇더라고요. 쎄한 느낌이 들어서 잡고 보면 틀림없어요. 입성도 좋고 허우대도 멀쩡한 사람들이란 말이죠. 그런데 그런 짓들을 해요. 지난달에는 어떤 젊은 아줌마가 두 살짜리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와서는 글쎄 ……."
  김중남 씨의 이야기 속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있다. 진저리를 치면서도 그는 자신이 목격한 사람들을 늘 생생하게 기억했다. 미처 다 소화시키지 못한 인간의 면면이 어쩌면 끝없이 그를 흔들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인지 그가 설파하는 인간론을 듣고 있노라면 달의 뒷면에 대해 종종 생각하게 된다. 영미권에서는 달의 뒷면을 '달의 어두운 면(the dark side of the moo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기에서 '어둡다'는 것은 빛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라 '알려지지 않았다'는 의미에 가깝다. 내게는 그저 소비자일 뿐이었던 사람들의 다른 한쪽에도 그와 같은 달의 뒷면이 있다. 호기심. 충족되지 않은 욕망. 지루한 일상으로부터 달아나고자 하는 마음. 혹은 무엇이 결핍되었는지 알지 못한 상태에서 방향 감각 없이 폭주하는 충동. 지구에서는 관측할 수 없는 달의 뒷면처럼 인간은 함께 공전하면서도 서로의 반대편에 대해 알지 못했다.
  "…… 애는 애대로 울어대고 아줌마는 아줌마대로 눈물바람으로 흐느끼고, 아이 때문에 계속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 것 같다고, 자기도 대체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그냥 조용히 보내줬지 뭡니까. 원래는 그러면 안 되거든요."
  뜻밖의 결말에 나는 김중남 씨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는 종이컵에 든 커피를 꿀꺽 삼키고 미련 없이 일어서더니 거울 앞으로 다가가 이름표를 고쳐 달았다. 곧 매장을 한 바퀴 둘러볼 셈인 듯했다. 그는 어깨 너비로 다부지게 다리를 벌리고 선 채 허리에 힘을 주고 가슴을 한껏 폈다. 모든 채비를 마친 뒤 헛기침을 하며 보안실 문을 열었다. 나는 잘 다녀오라는 뜻으로 김중남 씨를 향해 한 손을 가볍게 들어보였다. 그는 고객들을 정중하게 대하지만 굽신거리지는 않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나도 모르게 친절해지곤 했다.

 
2. 보고서

  오후 다섯 시. 마케팅 팀의 공계향 씨가 보안실 출입문을 열고 들어섰다. 보통은 오후 네 시쯤 출근해 업무를 인계받곤 했으나 오늘은 K연구소에 들렀다 오느라 평소보다 조금 늦었다. 오늘 오전, K연구소에서 데이터 분석 결과가 나왔다고 연락해 왔던 것이다. 지난주 조 이사의 지시에 따라 분석을 의뢰한 자료였다. 지금 공계향 씨가 들고 있는 두툼한 서류 봉투가 바로 그 결과물이었다.
  사실 간단한 통계나 경향 분석 정도는 회사 내의 인력으로도 소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 이사는 심도 깊은 데이터 분석을 통해 보다 폭 넓은 시선의 시사점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랐다. 확장 가능한 비즈니스 모델을 타진하고, 궁극적으로는 Y마트의 방향성 제시나 미래까지도 예측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마침 데이터의 양만 충분하다면 의미 있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K연구소가 나서자 조 이사는 주저 없이 그들에게 일을 맡겼다.
  결재를 받기 위해 때마침 조 이사의 사무실에 있던 나는 이러한 흥정이 오가는 현장을 본의 아니게 지켜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업계 동향을 추측하는 일 정도야 가능하다 해도 미래까지 예측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 대목만큼은 어쩐지 신뢰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불확실한 미래를 두려워하는 누군가의 연약함을 다른 누군가가 기회로 이용한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그보다는 차라리 Y마트가 직면한 현실을 인정하고 '최저가 100일 퍼레이드' 같은 행사를 한 번 더 기획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검증되지 않는 기관에 덜컥 일을 맡기기보다는 그 편이 기회비용을 아낄 수 있는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침묵했다. 인간의 행동에는 상수가 없으며 따라서 어떤 사회현상에 대한 예측이란 불가능하다고 했던 한 경제학파의 견해를 조 이사의 면전에서 줄줄이 읊어댈 수는 없었다. 조 이사의 얼굴에 그야말로 모처럼 밝은 미소가, 흥분을 감추지 못한 기대가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모든 경제 지표가 추락하고 있다는 것,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처럼 조만간 한국도 장기침체의 그늘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을 마케팅 경력 이십 년 차에 달하는 조 이사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조 이사는 결국 일을 추진했고, 나는 지시에 따라 일련의 데이터들을 K연구소로 넘겼다. 성공적인 빅데이터의 분석 사례를 애써 상기하며 우리 또한 그와 같은 사례로 꼽히기를 바랐다.
  이를테면 서울시가 심야버스의 운행 노선을 확정하기 위해 한 통신회사의 고객 데이터를 활용한 경우를 들 수 있다. 듣기로 서울시는 통신회사와 양해각서를 맺고, 자정부터 오전 다섯 시까지의 통화 및 문자메시지 데이터 삼십억 건을 분석했다고 한다. 고객들의 통화 기지국 위치 데이터와 휴대폰 요금 청구지 주소를 활용해 그 두 지점을 잇는 식으로 유동 인구를 추론해 낸 것이다. 그토록 야심한 시각에는 다들 자기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법이니까 충분히 발생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삼십억 건까지는 아니었으나 우리가 넘긴 데이터도 적지는 않았다. Y마트의 매출이 기록된 POS 데이터는 물론 최근 3년간 방문 기록이 남아 있는 고객들의 구매 데이터까지 포함해 그 양이 상당했다. 거기에는 Y마트의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을 팔로우한 고객들의 데이터도 포함되어 있었다. 포인트를 적립해 주는 조건으로 정보 제공 동의를 마친 소셜 데이터였다. 지금 공계향 씨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바로 그 모든 빅데이터를 분석한 자료였다.
  "어떻든가요?"
  나는 공계향 씨가 들고 있는 서류봉투를 가리키며 숨을 골랐다. 어쩐지 바로 보고서를 펼쳐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마케팅 팀은 마케팅 팀대로 고객들을 관찰하며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었으나 외부인의 시각으로, 그것도 광범위하게 수집된 데이터로 추론해 낸 Y마트의 현재와 미래가 신경 쓰이지 않을 수는 없었다. Y마트의 매출 부진이 줄곧 내부에서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데만 익숙해 있었던 탓이 아닌가 하는 자책도 마음을 무겁게 했다.
  공계향 씨가 우물쭈물 봉투를 내밀었다.
  "아무래도 팀장님이 직접 보시는 게……. 전 잘 모르겠어요."
  봉투를 열자 삼십 여 쪽 분량의 보고서가 두툼하게 손에 잡혔다. 뭔가 다르기는 달랐다. 페이지마다 화려하게 인쇄된 도표와 그래프는 단박에 시선을 사로잡았고, 해상도 또한 완벽했다. 결과를 나열하고 전시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매우 능란하다는 인상을 주었는데 이는 곧 그들이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분명하다는 확신으로 이어졌다.
  보고서는 장엄한 목소리의 서론으로 시작되었다. 정보 기술 시대를 지나 데이터 기술 시대에 도래한 작금의 현실을 짚어가며 빅데이터의 출현 배경에 대해 설명했고, 세계적인 활용 추세를 열거함으로써 빅데이터 연구의 당위성을 힘주어 강조했다. 저성장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빅데이터 산업을 정부와 기업 차원에서 보다 더 지원하고 활성화해야 한다고도 쓰여 있었다. Y마트의 매출 증대를 위한 시도가 빅데이터 지원 활성화와 무슨 뚜렷한 관계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일단 페이지를 넘겼다. 그러자 본론이 시작되었고 나는 곧 본격적인 혼란에 빠졌다.
  상당 부분이 데이터의 수집 설계와 데이터 정제 및 추출 과정을 설명하는 데 할애된 탓이었다. R이니 파이썬이니 하는 분석 소프트웨어의 특징이 이러저러한데 그중 이번 분석에서는 R을 적용했으며, 분류 알고리즘은 무슨 방법을 채택했는지, 구체적인 상품명을 수집하기 위해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단계별로 상세하게 설명한 페이지만 해도 절반 분량이 넘었다. 어렵사리 그 대목을 간신히 읽어 내자 더 큰 고비가 닥쳤다. '복수의 의사결정 나무(decision tree)를 만들고, 각 나무의 터미널 노드(terminal node)가 두 개로 분기하는 지점마다…… 분류 결과를 다수결하여 머신러닝 알고리즘으로 안정성과 정확도를 향상시키기 위해…….'
  "공계향 씨는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소위 전문가라는 이들과 현장 사이의 괴리감이 이런 것일까. 그들의 언어와 우리의 언어 사이에는 쉽게 가로지를 수 없는 까마득한 구렁이 가로놓여 있었다. 나는 기꺼이 나의 무지를 드러내며 공계향 씨에게 답을 재촉했다. 하지만 공계향 씨는 잘못 써온 반성문을 제출한 학생처럼 주먹 쥔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안절부절못할 뿐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대부분의 페이지를 건너뛴 채 얼마 되지 않는 결과 분석 페이지를 펼쳐들었다. 나로서는 오리무중인 이 엄정한 과학의 언어들이 도달해 있을 결과를 듣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말랑말랑한 속세의 말들로 쓰인 몇몇 대목이 눈에 띄었다.

  ? 월별 구매금액이 백만 원 이상인 고객들 중 매우 트렌디한 경향이 있는 고객 세그먼테이션은 스포츠 스타 P씨를 좋아하는 경향이 높다.
  ? 캡슐 커피 머신과 캡슐 커피를 동시에 구매한 고객들은 백미 십 킬로그램, 세탁세제 사 리터, 샴푸와 컨디셔너를 한꺼번에 구매할 확률이 개별 고객당 72.8퍼센트에 달했다.

  첫 번째 분석은 Y마트의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을 팔로우한 고객들의 소셜 데이터에 월별 누적 금액을 교차 분석한 결과였고, 두 번째 것은 고객들의 구매 기록을 상품군별로 나누어 분석한 내용이었다.
  "VIP 고객들에게 사은품으로 스포츠 스타 P씨의 브로마이드라도 나누어줘야 하나?"
  내가 듣기에도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공계향 씨도 왈칵 성을 내며 대답했다.
  "그런데 팀장님, 스포츠 스타 P씨는 누구나 다 좋아하지 않나요? 그 사람은 안티도 없다고요!"
  "어쨌든 캡슐 커피 머신을 사용하는 사람들도 꾸준히 밥을 먹고, 빨래하고, 머리를 감는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게 확인되었네요. 72.8퍼센트의 압도적인 확률로."
  몇 페이지 뒤에 나오는 텍스트 마이닝(text mining) 결과는 더 암울했다. 텍스트 마이닝이란 자연어, 그러니까 속세의 언어로 쓰인 텍스트 가운데 의미 있는 정보를 발견하는 기술을 뜻한다. 언어학과 통계학, 기계 학습 등을 기반으로 글에 담긴 주요 키워드들을 추출하여 경향을 파악하는 분석 기법이었다. 그림으로 설명하자면, 갖가지 색깔의 크고 작은 글씨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네모난 화면을 떠올리면 된다. 이때 글씨가 클수록 비중이 높고 중요한 키워드라고 할 수 있었다.
  Y마트 고객들의 소셜 데이터에서 추출한 텍스트 마이닝도 꼭 그와 같은 그림으로 형상화되어 있었다. 다만 힐러리 클린턴이나 버락 오바마의 그것처럼 근사하지 않았을 뿐이다.

  최저가. 싼맛. 서비스 쿠폰. 구려. 포인트. 애매함. 1+1. 화장지. No관심. 할인행사. 청소기. 조각피자…….

  나는 조용히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나의 Y마트가 온라인에서 그와 같은 치명적인 낱말들로 난타 당하고 있다는 슬픔과는 별개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제4차 산업혁명, 데이터 기술 시대에 걸맞게 소박하나마 몇 가지 전략을 수립하고자 했던 조 이사와 우리에게 현실은 너무나 가혹했다.
  보고서 끝에는 작성자의 의견도 첨부되어 있었다. 자신들이 보기에도 분석 결과가 미진하다 싶었는지 손으로 황급히 덧붙여 쓴 메모였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유의미한 데이터가 충분히 확보되지 않아 결과 분석에 다소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좀 더 많은 양의 데이터가 확보된다면, 다양한 기계 학습 알고리즘을 통해 구매 예측 모델을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이 사람들아, 문제는 데이터가 아니라 해석이야. 나는 메모를 외면하며 끝내 보고서를 덮었다. 원인과 결과, 작용과 반작용.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와 같은 강력한 인과관계였다. 하지만 우리가 주운 디지털 빵 조각들은 어딘지 조금씩 이상한 모양으로 어긋나 있었다. 만능열쇠처럼 여겨지던 새로운 시대의 유령 역시 결정적인 질문 앞에서는 느슨한 상관관계 이상으로 인간을 표현해내지 못했다.
  어쩌면 빅데이터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에게 그것을 통찰할 만한 '빅인사이트'가 부족한 건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소셜 미디어에서 진솔하고 정확한 의견을 구하려 했던 판단 자체가 안이했는지도. 아니, 애초에 전제부터 잘못되었다. 숫자로 산출된 데이터로는 그 요령부득의 존재들에 가닿을 수 없다는 것. 인간은 결코 그런 식으로 말끔하게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 시그널로 치자면 인간은 소음이 많은 신호에 속했다. 누구도 다른 누군가에게 자신의 뜻과 마음을 온전히 전송할 수 없다. 우리의 소통은 부분적으로 늘 어떤 그림자에 가로막히며 오해와 왜곡과 우연을 거쳐 가까스로 살아남은 간략한 진실만을 서로의 손에 쥐어줄 따름이다. 하물며 그와 같은 심연에서 과연 우리가 뭔가를 계량해 낼 수 있을까.
  "공계향 씨, 이 보고서 우리 말고 또 누가 봤나요?"
  "아직은 저희뿐이에요. USB에도 보고서 파일을 담아오긴 했는데 조 이사님께는 어떻게 올려야 할지……."
  채택되지 않은 보고서는 비용이 된다. 어떻게든 보고서를 활용해 프로젝트를 살려야 했다. 소기의 성과를 거뒀노라고 설명할 만한 그 무언가, 사람들의 입을 통해 회자될 만한 그 무언가를…….
  나는 문득 스포츠 스타 P씨의 캘린더를 제작하면 어떨까 하는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빅데이터의 분석 결과에 따라 P씨의 캘린더를 제작하겠다고 품의서를 올리는 거다. 왜냐하면 빅데이터가 그렇게 말하니까. 깐깐한 임원진들도 빅데이터라면 쉽게 딴죽을 걸지 못할 테니까. 또 사람들이 P씨를 워낙 좋아한다고 하니까. 하물며 요즘은 달력을 나눠주는 곳도 별로 없지 않은가. 여기에 대외 활동에 소극적인 P씨의 리미티드 에디션이라는 입소문을 살짝 얹어서……. 아니, 이참에 P씨를 Y마트의 모델로 기용하는 거다. 왜냐하면 애매하고 구린 이미지, No 관심인 Y마트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구원투수가 없으니까. 캡슐 커피 머신을 구매한 고객들이 서운해 할 수도 있으므로 그들을 대상으로는 '끓는점을 향해 마지막 1도를 올려라.'와 같은 P씨의 명언이 인쇄된 머그컵을 사은품으로…….
  '스포츠 스타 P씨'와 '달력'으로 점화된 뉴런 하나가 시냅스와 축삭돌기를 따라 달리며 전두엽과 후두엽, 측두엽과 두정엽 사이에서 폭주하고 있었다. 나는 들불처럼 번져가는 두뇌 속의 전기신호에 가까스로 제동을 걸었다. 왠지 자꾸만 잠겨 들어가는 목소리를 돋우며 공계향 씨에게 말했다.
  "일단 여기 나온 내용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고민해 봅시다. CCTV 관찰 데이터도 수집 중이고, 다음 주에는 인터뷰 일정도 잡혀 있으니까요."
  CCTV를 골똘히 들여다보던 공계향 씨가 네, 하고 조그맣게 대답했다. 테이블에 펼쳐놓은 그녀의 노트에는 프레임 단위로 쪼개진 관찰 데이터 대신 헝클어진 선 모양의 낙서로 가득했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을 꼭 닮은 저 낙서는 신호일까, 아니면 소음일까. 어쩐지 더 무거워진 듯한 보고서를 들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공계향 씨는 그럼 이만, 하는 듯한 고갯짓을 하고는 다시 CCTV 관찰 모드로 돌아갔다. 수고해요, 하고 퇴근 인사를 하면서 뒤를 돌아볼 때까지도 공계향 씨는 한손에 펜을 움켜쥔 채 미동이 없었다.


3. 역관찰

  지하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을 때 재킷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나는 아마도 아내일 것이라고 추측하며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오늘 금요일인 거 알지? 아홉 시에는 집에서 출발해야 하니까 늦지 않게 와 줘.

  물론 잊지 않고 있다. 벼락이 치고 바람이 거세도 일보 후퇴 없이 전진하는 아내의 금요일 철야예배 스케줄을 내가 어찌 잊겠는가. 나는 아내의 귀가 명령에 고분고분 알았노라고 답장을 보냈다. 작은 바람이 있다면, 결혼 전부터 몰던 아내 소유의 2009년도식 소나타가 오늘도 무사히 아내를 교회까지 실어다 주기를 바랄 뿐이다.
  아내는 크리스천이었다. 그리스도의 군병답게 일요일은 물론 금요일 밤의 철야예배도 빼먹는 법이 없었다. 그때마다 나는 아내 혼자 홀가분하게 교회에 다녀올 수 있도록 어린 딸을 돌보며 내 나름의 배려를 하고 있다. 말하자면 나는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신혼 초에는 아내와 함께 주일 성수라는 것을 한 적도 있다. 그러나 모든 건 변하는 법이다. 그저 일주일에 한 번, 주일예배에 참석할 뿐이었던 아내가 어느 날 갑자기 열혈 신도로 돌아선 것처럼. 공교롭게도 그 시기가 우리 부부의 미지근한 권태기와 맞물려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그저 우연의 일치일 것이다.
  아내의 금요일 밤 외출은 일 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철야라고는 해도 자정께면 꼬박꼬박 집으로 돌아왔으므로 크게 문제 삼을 건 없었다. 하지만 금요일 밤마다 잔뜩 눈이 부은 얼굴로 귀가한다는 사실만큼은 가만히 두고 볼 일이 아니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그 뒤로도 아내는 매주 비슷하게 망가진 얼굴로 돌아왔다.
  그제야 나는 아내에게 차가 필요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부은 눈과 운 것이 분명한 얼굴을 타인에게 드러내 보이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 정작 집을 나설 때마다 아내는 큼직한 자동차 열쇠를 손에 쥔 채 변명하듯 이렇게 덧붙이고는 했지만 말이다. 취객들 사이에 섞여 앉아 귀가하는 것도 불안하고, 버스가 끊길까 봐 기도를 하다 말고 종종거리며 교회를 나서는 것도 싫다고.
  내가 농으로라도 그럼 그냥 집에 있으면 되잖아, 하고 대꾸하지 않는 건 아내가 이 문제에 관한 한 대단히 진지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결혼을 약속할 때부터 아내의 종교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기로 다짐을 해 둔 터였다(아내는 매번 이 '종교'라는 표현을 '신앙'으로 정정했다). 일종의 신성불가침 영역을 일찌감치 설정해 둔 셈이었다.
  금요 철야예배는 밤 열 시에 시작해 찬양과 설교로 일단을 맺었다. 그 뒤에는 출구 주위의 조명 몇 개만을 남겨둔 채 예배당 전체의 모든 불을 껐다. 주위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저마다의 기도에 집중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적당히 떨어져 앉아 기도를 시작했다. 나직한 가스펠이 흐르는 가운데 혼잣말 하듯 무언가를 읊조리는 사람도 있었고, 두 팔을 치켜들고 목 놓아 간구하는 이들도 있었다. 개중에는 해석이 불가능한 이방의 언어로 속사포 같은 방언을 터트리는 사람도 있었다.
  아내는 그저 조용히 앉아 있었다(그렇다, 나는 신앙심 때문이 아니라 아내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음을 고백한다). 어둠이 짙어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이따금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치기도 했다. 그렇게 울다가 한숨과 함께 호흡을 고르는 휴지기를 거치고 난 뒤 다시 눈물을 닦아내는 과정이 삼십 분 넘게 되풀이되었다.
  그날 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먼저 돌아오면서 나는 스멀스멀 치밀어 오르는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아내의 속엣말들을 고스란히 전해 듣는 신에게 질투가 났다. 아내에게도 화가 났다. 자신의 가장 연약한 모습을 내가 없는 곳에서 드러낸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마치 반려자인 나에 대한 냉엄한 평가처럼 느껴졌다.
  시간이 흘러 분노가 차츰 희미해진 뒤에는 두서없이 떠오르는 질문으로 마음이 어지러웠다. 대관절 무슨 기도를 하기에, 어떤 아픈 속내를 묻어두었기에 사람이 저렇게 온 마음을 다해 울 수 있단 말인가? 무엇 때문에? 대체 왜?
  떵떵거리게 살게 해주지는 못했다. 그래도 꼬박꼬박 월급을 갖다 바치고 있었고(대부분의 남편들이 제일 먼저 내세우는 말이기는 하다), 딴 생각을 한 적도 없다(다른 남편들은 어떤지 몰라도 나는 진실하다). 온라인 게임 아이템을 구매한답시고 현금을 몰래 융통할 만큼 잔머리를 굴리지도 않았다(게임을 즐기지도, 잘 하지도 못한다). 일주일에 한 번뿐이기는 해도 딸에게 동화도 척척 읽어준다(그 아이가 내가 들려준 동화를 듣고 종종 악몽을 꾸는 건 내 탓만은 아니다).
  이런저런 고민 끝에 도달한 결론은 아내가 나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보란 듯이 눈물의 흔적을 드러낸 건 아니었으나 애써 감추지도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신호가 아닐까. 어둠에 얼굴을 지운 채 캄캄한 예배당에 앉아 있어야만 비로소 진정이 되는 어떤 헝클어진 마음의 소음이 있다는 것일까. 허나 어렵사리 그에 관한 말을 꺼내려 들면 아내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는 당신한테 고마운 게 참 많아, 하고는 이내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아내의 눈물은 신호 대 잡음비(Signal-to-Noise Ratio, SNR)로 치자면 데시벨이 낮은 사인처럼 느껴졌다. 모든 신호에는 소음이 섞여 있다는 과학적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어떤 것이 신호이고 어떤 것이 소음인지 파악하기 힘들 만큼 노이즈가 많이 섞여 있었다는 뜻이다. 웬만해서는 이렇다 할 요구를 하지 않는 아내가 금요일 밤만큼은 내게 배려를 요구했고, 평소와는 다른 사람의 얼굴을 하고 귀가했다. 그러나 금요일 밤을 제외하면 아내는 여전히 쾌활했으며 연애 시절처럼 간혹 싱거운 장난을 치기도 했다.
  어쩌면 아내의 사인은 내 대답이 필요하지 않은 신호인지도 몰랐다. 노이즈의 파고가 높달 뿐 일방향으로 내달리는 저 자신만의 시그널로서 만족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런 생각으로 나는 아내의 부은 눈에 끝내 담담해졌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아내의 모든 태도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뻔뻔하게도 나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백색소음. 이를테면 나는 아내의 눈물을 바람 소리나 빗물이 떨어지는 소리 같은 일종의 화이트노이즈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모든 건 전과 다름없다고. 아내의 정기적인 외출, 부은 눈만 빼면.

  미현이가 당신이 동화 읽어주는 날이라고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 참, 엘사 인형 사오는 것도 잊지 말고.

  미현이는 디즈니가 선사한 판타지에 한껏 빠져 있는 우리 딸의 이름이다. 눈과 얼음을 조종하는 그 아렌델 왕국의 여왕에게 여섯 살 우리 딸은 온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여왕다운 성숙함과 기품보다는 우아하게 땋아 내린 금발과 푸른빛 드레스에 더 빠져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비된 입장에서는 교육방송의 뽀로로 동산에 딸아이가 되도록 오래 머물러 있기를 바랐으나 자식이란 본래 부모 마음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어린이날, 직원 할인가로 구입한 뽀로로 버스를 건네자 아이가 마지못해 하던 말을 나는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이런 건 아기들이나 가지고 노는 거야."
  아기가 아기 특유의 혀 짧은 발성으로 그런 말을 할 때 어버이는 쏜살같은 세월의 뒤편에서 홀로 울적해질 수밖에 없다. 어쨌든 일주일에 단 하루, 오늘만큼은 더 이상 공식적으로 아기가 아닌 딸아이를 내가 재워야 했다. 두 주 전부터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던 선물이 더해진다면 오늘의 마지막 일정은 큰 문제없이 종료될 것이다.
  나는 엘리베이터에 올라 삼층 버튼을 눌렀다. 완구 코너는 이층에 있었지만 엘리베이터 내부의 이층 버튼은 작동되지 않도록 잠겨 있었다. 따라서 마트 일층으로 진입해 매장 내부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이층으로 오르든지, 삼층 매장까지 올라가서 그 안에 있는 에스컬레이터로 다시 한 층을 내려가야만 했다. 교활한 마케터든 똘똘한 건축가든 누군가 고객들의 이동 동선을 그렇게 설계해 두었다.
  그것은 곧 이층에 진열된 샴푸 하나를 사기 위해 일층의 신선식품과(벌써 귤이 나왔네!) 가공식품 코너를 지나(집에 두유가 떨어졌는데 마침 30% 할인 행사를! 이참에 아예 두 박스 사서 쟁여 두자) 화장지나 키친타올 같은 생활 잡화 코너를 두루 거쳐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런 사정은 삼층에서 이층으로 진입하는 고객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삼층 출입구 근처에 포진한 전자제품 코너를 우선 통과해야 했으며(SSD를 장착한 노트북 가격이 칠십구만구천 원밖에 안 하다니!) 스포츠용품 매장도 반드시 지나쳐야 했다(일 년에 몇 번 신지도 않을 기능성 러닝화를 말없이 만지작거린다). 이 복잡한 경로 때문에 고객들은 알면서도 매번 걸음을 멈추고 지갑 속 형편을 헤아려야 했는데 이것이야말로 Y마트가 견지하는 과학이었다.
  이러구러 이층에 도착한 나는 캐릭터 상품을 모아 둔 코너로 향했다. Y마트에 재고가 있는 엘사 인형은 한 종류뿐이었다. 이만 원짜리 엘사가 바로 그것이었는데 폭신한 삼등신 솜인형으로 앞머리를 내려 동그랗게 만 모습이 상당히 귀여웠다. 허나 바로 그 점 때문에 자신이 더 이상 아기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딸아이에게는 아가들의 장난감처럼 비칠 우려가 있었다. 인터넷에서 봐두었던 엘사 인형처럼 팔다리의 관절을 구부릴 수도 없었고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눈매로 엘사 특유의 캐릭터를 재현해내지도 못했다.
  나는 별 도리없이 이만 원짜리 엘사를 골라 완구 코너를 빠져나왔다. 딸아이가 이걸로 만족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러고도 왠지 실패한 쇼핑이라는 느낌을 곱씹으며 계산대를 향해 걷고 있을 때였다. 또 한 번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이번에도 아내인가 싶어 확인해 보니 뜻밖에도 공계향 씨가 보낸 메시지였다.

  팀장님, 엘사 인형도 좋지만 엘사 드레스를 선물하는 건 어떨까요? 저라면 인형을 가지고 놀기보다는 직접 엘사가 되고 싶을 것 같아요. 지금 서 계신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다섯 걸음쯤 가면 캐릭터 코스튬 코너가 있답니다. 참고하세요. ^^



  나는 공계향 씨가 보낸 문자를 보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학습지와 스티커 북 판매대 위쪽으로 'CCTV 촬영중'이라는 안내문과 카메라가 눈에 띄었다. 공계향 씨는 지금 저 카메라로 나를 본 것이 분명했다. 사각지대 없이 매장을 비추는 카메라가 나와 엘사 인형의 이미지를 공계향 씨에게 실시간으로 중계한 것이다.
CCTV 밖에서 사람들을 관찰하던 입장에서 이제 역으로 관찰 당하는 입장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나는 좀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공계향 씨가 일러준 코스튬 코너로 주춤주춤 걸어가던 길에 또 다른 CCTV 카메라를 발견하고 나는 결국 걸음을 멈췄다. 그 카메라 역시 인기 절정의 캐릭터 피규어와 삼십 대 후반 직장인 남성의 이미지를 지금 고스란히 공계향 씨에게 송출하고 있을 터였다. 나는 한손에 엘사 인형을 든 채 어정쩡한 미소를 지으며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런 나를 보며 지하 보안실에서 공계향 씨도 손을 흔들고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4. 취향의 학습

  딸아이의 방에는 작은 침대와 키 낮은 책장, 베이비장이라고도 부르는 크림색 서랍장과 당근 모양의 손잡이가 달린 옷장이 있다. 자질구레한 장난감을 넣어두는 서랍식 수납장도 있다. 노랑, 연두, 분홍, 파랑. 제각각 다른 색의 플라스틱 수납 바구니가 달린 것으로 원목 프레임 안쪽의 파인 홈에 바구니를 걸어 서랍처럼 넣었다 뺐다 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이 모든 가구들의 높이는 일 미터 내외로 내 가슴 언저리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처럼 아담한 가구들로 가득한 방 한가운데 나는 구부정히 서 있다. 더 이상 아기가 아닌 딸아이가 아직 준비를 마치지 못한 까닭이다. 교회에 간 아내 대신 도와주려고 해도 딸아이는 왕위 계승을 앞둔 여왕이라도 된 양 근엄하게 손을 내밀어 거부 의사를 밝혔다.
  Y마트에서 사온 고급형 엘사 드레스에는 구성품이 여럿 포함돼 있었다. 팔꿈치까지 올라오는 장갑 한 켤레와 잘못 만졌다가는 똑 부러질 것 같은 마법봉, 푸른색 큐빅이 박힌 왕관 모양의 머리띠까지 들어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엘사가 요란하게 치장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던 것 같지만 애니메이션 원작을 본 지 워낙 오래된 탓에 확신할 수는 없다.
  어쨌든 그 탓으로 딸아이의 치장에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드레스라는 것이 본래 착용하기에 번잡스러운 옷이기는 했다. 게다가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에 대한 아이의 환희와 흥분으로 옷을 입고 머리띠를 두르는 모든 과정이 더디게 진행되었다.
  사실 딸아이에게 엘사 인형이 일종의 '니즈'가 된 지는 꽤 오래 됐다. 같이 어린이집을 다니는 또래들이 대부분 이미 엘사 인형을 가지고 있었고, 마법봉이니 머리띠니 하는 엘사 아이템을 착용하고 등원하기도 했다. 딸아이는 <겨울왕국>을 보기도 전에 그 반짝거리는 것들에 먼저 현혹되었다. 셀럽이나 인플루언서의 인스타그램에 팔로어들이 좋아요, 를 누르듯 또래들의 취향을 학습하며 좋아요, 를 외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소외되지 않기 위해, 또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하나쯤은 지니고 있어야 한다면서 목소리를 높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내 친구들은 다 가지고 있단 말이야!"
  딸아이가 사달라는 대로 손에 쥐어 주었으면 잠깐 가지고 놀다가 금방 싫증을 내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내는 책에 비해 인형이나 장난감만큼은 함부로 사주지 않았고, 그 탓에 딸아이의 엘사 니즈는 충족되지 못한 채 '필요하다'가 아니라 어느덧 '꼭 갖고 싶다'가 되었다. 그리고 그 갈망은 또래 중 누군가 지니고 있던 엘사 인형이라는 구체적인 대상을 향해 집중되었다.
  "엘사 인형보다 이게 더 비싸고 좋은 거야. 이 하늘하늘한 시폰 소재의 망토를 보렴. 너는 이제부터 엘사가 되는 거야."
나는 순발력 있게 판타지를 주입했다. 행여나 엘사 인형을 찾으며 울어대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였다. 다행히도 딸아이는 인형 대신 드레스를 받고도 자신이 내내 원했던 바가 바로 이것이었다는 듯 와락 달려들어 그것을 소중히 품었다. 더 비싸고 좋은 것이라는 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공계향 씨의 말대로 엘사가 되는 것이 아이 자신조차 인지하지 못했던 숨겨진 욕망이었던 것일까. 어쨌든 이 어린 고객의 만족은 나의 기쁨이었다.
  드디어 착장을 마친 아이가 엘사 장갑을 낀 팔을 쭉 뻗어 방 한쪽에 놓인 민트색 토끼 의자를 가리켰다. 바른 자세로 앉는 습관을 들인다는 그 플라스틱 의자는 백 퍼센트 국내에서 생산된 믿을 만한 상품으로 나 같은 성인 남자가 무게를 실어 앉아도 끄떡없었다. 다리길이가 맞지 않아 조금 불편하다는 점만 빼면 토끼의 두 귀 모양을 한 등받이가 하중을 탄탄히 지탱해주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그 의자를 끌어다 아이의 침대 곁에서 동화를 읽어주고는 했는데 어느덧 이것이 일종의 점화 버튼이 되었다. 금요일 밤, 동화 읽기, 토끼 의자가 하나의 상자에 담긴 구성품처럼 딸아이와 나의 한순간을 동심원으로 묶고 있는 셈이었다. 언젠가 딸아이도 나만큼 키가 자라고 머리가 여물겠지만, "이런 건 애들이나 가지고 노는 거잖아"라는 말로 내가 사온 또 다른 장난감과 선물들을 싱겁게 내칠 수도 있겠지만 그 울적한 상상 속의 장면들은 아직 여기에 도착하지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엘사 드레스를 입고 침대에 얌전히 누워 있는 저 아이에게 이야기를 읽어줄 시간이 충분했다.
  딸아이가 엄숙한 제의를 주관하는 제사장처럼 내게 눈짓을 했다. 모처럼 소음 없이 또렷한 그 신호에 나는 침대 곁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시작한다.
  응.
  제목, 개구리 왕자
  응.
  옛날, 아주 먼 옛날, 한 왕국에 예쁜 공주님이 살았어요.
  응.
  미현이 엄마나 미현이처럼 예쁜 공주님이었지요.
  히히.
  정말이에요. 어느 날 공주는 아버지인 왕에게 황금 공을 선물 받았답니다.
  응.
  반짝반짝 금빛으로 빛나는 아주 멋진 공이었지요.
  응.
  공주님은 숲속에서 황금 공을 갖고 혼자 놀고는 했어요.
  응.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 혼자 노는 걸 더 좋아했던 거예요.
  으응.
  공주님은 울창한 숲속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행복해 했어요.
  울창한 게 뭐야?
  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졌다는 뜻이야. 그러면 숲속에 그늘도 많고 시원하겠지?
  응.
  그렇지만 너무 그늘이 많으면 어두워서 좀 무섭겠지?
  응.
  그래서 공주님은 햇빛도 잘 내리쬐고 연못도 있는 큼지막한 보리수나무 아래 앉아 있고는 했답니다.
  보리수나무 본 적 있어.
  그래?
  응. 엄마랑 식물원에 가서 봤어. 조그마한 빨간 열매가 이만큼 많이 달려 있었어.
  그랬구나. 보리수나무를 엄마랑 같이 봤구나.
  응.
  아무튼. 공주님은 연못 옆에서 제일 좋아하는 놀이를 하며 즐거워했어요. 황금 공을 하늘 높이 던졌다가 두 손으로 다시 받았지요. 그렇게 황금 공을 하늘 높이 던졌다가, 다시 받았다가, 또 다시 하늘 높이 던졌다가……
  계속해, 아빠.
  아직 안 자는구나.
  응.
  공주님은 계속 황금 공을 가지고 놀았어요. 그러다 그만 연못에 풍덩 황금 공을 빠트리고 말았답니다.
  어떡해.
  얼른 황금 공을 꺼내려고 했지만 연못은 아주 깊었어요. 공주님은 속이 상해서 울기 시작했지요. 처음에는 훌쩍훌쩍 작은 소리로 울다가 점점 더 크게 울었어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에요. 황금 공을 연못에 두고 갈 수도 없었고, 혼자 힘으로 꺼낼 수도 없었죠. 그렇게 한참 울고 있는데, 갑자기 무슨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공주님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았어요. 그랬더니 개구리 한 마리가 연못 밖으로 머리를 삐죽 내밀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응.
  개구리가 말했어요. 공주님, 왜 그렇게 우는 거예요? 공주님이 말했어요. 내 황금 공이 연못에 빠져서 울고 있어. 내가 아주 좋아하는 공이거든. 하지만 연못 깊숙이 빠져 버려서 꺼낼 수가 없어. 그러자 개구리가 공주님에게 말했어요. 제가 공주님을 위해 황금 공을 꺼내 올게요. 그러니 그만 눈물을 닦으세요…….

  눈물 많은 공주 이야기를 읽고 있자니 아내 생각이 났다. 지금쯤은 교회에 도착했겠지. 부쩍 추워진 날씨에 종종걸음으로 어깨를 웅크리고 걷겠지. 드레스 차림으로 외롭게 빙산을 오르던 <겨울왕국> 속 엘사의 모습도 불현듯 그 위로 겹쳐졌다. 내색하지 못했던 묵은 감정을 터트리고 아무도 없는 곳에 자신만의 얼음 궁전을 완성한 뒤, 그녀는 뭐라고 외쳤던가. 외롭다고, 하지만 자유롭다고 그랬던가.
  혼자 있을 곳을 찾아내기 위해 아마도 여자들은 항상 어딘가로 가곤 하는가 보았다. 마법을 통제할 방법을 찾지 못해 사랑하는 이들에게서 멀리 떠나던 엘사처럼 혹은 나의 아내처럼 혼자 있기 좋은 얼음의 성, 혼자 있기 좋은 불 꺼진 예배당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까무룩 잠이 든 딸아이를 한동안 내려다보다가 나는 그림책을 덮었다. 일찌감치 잠이 든 딸아이 덕분에 오늘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동화를 만들지 않아도 되었다. 연못에서 황금 공을 꺼내 온 개구리가 그걸 빌미로 공주의 성에 쳐들어오거나 공주의 침실에서 함께 잠들겠다고 우겨대기 전에 아이가 잠들어서 다행이었다. 화가 난 공주가 개구리를 집어 들어 벽을 향해 세게 내동댕이치기 전에 말이다. 명작 동화라는 이름으로 유통되는 이야기에는 난폭한 장면들이 은근히 많았다.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바라볼 뿐 아니라 숱한 왕자와 공주들을 동원해 편견을 강화했다. 그래서 이야기 속 인물들은 온전히 행복하든지 완전히 불행했다. 지극히 선하거나 지독히 악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꼭 그렇게 온전하거나 지극하지 않다는 사실은 그래서 때로 위로가 되기도 하고 경계가 되기도 했다.
  드레스의 푸른빛 탓인지 아이가 조금 추워 보여서 나는 이불을 단단히 여며주었다. 창문을 잠그고 보일러 온도조절기를 조정했다. 그러고도 아이 방의 문고리를 잡은 채 나는 다시 한 번 방안의 모든 것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제 기능을 다하고 있는지 확인했다. 불을 끄자 아이와 흰 침대 위로 어두컴컴한 그늘이 드리워지고 창밖의 풍경이 채도 낮은 그림처럼 벽 위에 걸렸다. 동네 상점들의 노랗고 빨간 간판 불빛 사이로 두 개의 붉은 십자가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작게 명멸하는 빛의 점들 사이에서 그것은 매우 뚜렷한 신호처럼 어딘가를 향해 붉은 빛을 송출하고 있었다.

 
5. 인터뷰

  "긴장하실 필요 없어요. 그냥 자연스럽게 대답하시면 됩니다."
  공계향 씨가 남자12에게 말했다. 남자12가 멋쩍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런 거 처음이라서 좀 떨리네요. 입사 면접 볼 때 생각도 나고……."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평소 Y마트를 이용하면서 느꼈던 점들을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Y마트에서 한 행사 중에 좋았던 거라든지 개선해야 할 점이나 건의사항도 들려주시면 좋겠고요."
  공계향 씨는 잘 훈련받은 인터뷰어처럼 차분한 말투로 남자12를 안심시켰다. 인터뷰 대상자의 말에는 그처럼 담담하게 반응하는 것이 중요했다. 공감은 경청하는 눈빛 정도면 충분했다. 자칫 질문자가 지나친 공감을 표하면 상대 역시 과장된 답변을 하거나 실제와는 다른 말을 늘어놓게 될 수도 있었다.
  격해진 감정만큼 정보를 표현하는 말들이 중구난방으로 튀어나오는 것도 문제였다. 개인에 따라 매우 다르게 활용되는 형용사와 부사의 경우, 그런 현상이 특히 더 두드러졌다. 그 고저장단의 미묘한 뉘앙스를 오와 열을 맞춘 데이터의 형태로 축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진짜 좀 그랬어요."와 "그런 부분은 많이 개선되어야 할 것 같아요."하는 말에 담긴 실망감을 헤아리며 공계향 씨가 세상 다정한 얼굴로 "그걸 별점으로 표현하신다면 하나일까요, 두 개일까요?"하고 묻는 데에는 그런 까닭이 있었다.
  "저희가 보고서를 작성해야 해서요. 추후 정확한 답변 작성을 위해 녹화를 했으면 하는데 괜찮을까요? 불편하시면 언제든 녹화를 중단하실 수도 있습니다."
  공계향 씨가 캠코더의 버튼을 가리키며 남자12에게 말했다. 그러자 남자12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자신의 집까지 공개한 터라 그랬는지 남자12는 대체로 모든 제안에 긍정적인 편이었다.
  남자12는 오늘의 세 번째 인터뷰이로 삼십 대 초반의 직장인이었다. 작은 침실이 딸린 스무 평 남짓한 오피스텔에 혼자 거주하고 있으며, Y마트에서 매월 오십만 원 이상의 상품을 구매하는 고객이기도 했다. 또한 그는 Y마트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방문 인터뷰를 신청한 백육십칠 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우리가 찾는 1인 가구의 조건에 정확히 부합했다.
  본래 우리는 스무 명 내외의 대상자를 염두에 두고 인스타그램에 공지를 올렸다. 우리가 내건 조건은 세 가지였다. 직접 고객들의 집을 방문해 그곳에서 인터뷰를 진행한다는 것과 열흘간 실내에 CCTV를 설치해 그 녹화 내용을 마케팅 자료로 활용하겠다는 것이었다. 세 번째 조건은 외부에 조사 내용을 발설하지 말라는 당부였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인증과 과시에 목마른 디지털 유목민들 탓에 빠르든 늦든 유출은 언젠가 한번은 벌어질 일이었다. 우리로서는 그 시간을 지연시키고 약간의 주의를 환기시킬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다만 사생활을 공개할 사람들이 있을지 그게 걱정이었다. 한 시간 남짓 진행하는 인터뷰라고는 해도 모르는 이들을 집안으로 들인다는 건 아무래도 망설여지는 일이었다. 오죽하면 신청자가 몇 명 나오든 일단 작업을 진행해 보라고 조 이사 쪽에서 우리 팀을 독려할 정도였다.
  그런데 사례로 제공하기로 한 오십만 원 상당의 Y마트 상품권 때문인지는 몰라도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신청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우리는 쉽게 삼십 명의 표본 집단을 추려냈다. 막상 대상자로 선정된 뒤 포기 의사를 밝혀온 사람들도 있었기에 그 빈자리를 채우느라 그저 하루이틀 시간이 지체되었을 뿐이다.
  공식적으로 우리는 이번 인터뷰 조사가 Y마트 고객들의 만족도에 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건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했다. 정확한 의견을 들을 생각이었다면 인터뷰보다는 설문 조사를 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말보다 활자로 소통할 때 거짓말을 덜 하는 경향이 있었다. 조사에 들어가는 비용으로 보나 인력 배치에 있어서도 설문 조사가 훨씬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굳이 방문 인터뷰를 강행했던 것은 우리의 진짜 목적이 1인 가구를 방문해 그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관찰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관심사가 어디를 향해 있는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며 어떤 값을 치르고서라도 소유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궁금했고 끝내 알아낼 작정이었다.
  공계향 씨와 나는 2인 1조로 움직이며 하루에 많게는 네댓 명의 대상자를 인터뷰했다. 미리 작성된 설문지에 따라 공계향 씨가 질문을 하면 나는 답변 내용 중 기억해둘 만한 것들을 노트에 적으면서 틈틈이 그들의 집을 관찰했다. 내성적인 관리자처럼 실무자 뒤로 한 발 물러나 인터뷰를 지켜보면서 실은 다른 것들을 살피고 있었던 셈이다. 현관 입구에 놓인 접이식 산악자전거가 준전문가용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둔다든가, 노트북 옆에 꽂힌 USB가 마블의 인기 캐릭터 그루트임을 알아보는 식으로 그들의 취미와 레저 생활을 가늠했다. 물 한 잔을 부탁하면서 냉장고 사정을 슬쩍 훔쳐보기도 했다.
이렇게 인터뷰를 마친 뒤에는 4테라바이트 용량의 하드디스크가 장착된 CCTV 카메라 세 대를 거실과 주방 곳곳에 설치했다. 그로부터 열흘 뒤에 카메라를 수거해 오는 것으로 공식적인 조사 일정은 모두 끝날 예정이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공계향 씨가 녹화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남자12가 뭔가를 곰곰이 떠올리는 듯한 얼굴로 이건 중요한 얘기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요, 하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Y마트뿐만 아니라 대형마트에 가면 느끼곤 하는 건데요. 제가 직장인이다 보니 주로 주말에 가거든요. 카트 하나 꺼내 갖고 1층부터 3층까지 훑으면서 일주일치 장도 보고 그 사이 무슨 물건이 나왔나 살펴보기도 하고요."
  공계향 씨가 남자12의 말에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뭐랄까. 주말에는 그 왜 가족 단위로 많이들 오잖아요. 애들도 데리고 같이. 오순도순 장 보는 모습이 좋아 보이기는 해요. 저도 운이 좋으면 언젠가 저렇게 아이들 데리고 장을 보러 나오겠구나 싶기도 하고요. 그런데…… 솔직히 좀 불편할 때도 있어요. 진열대 막 돌아서는데 애들이 튀어나와 카트에 부딪혀서 놀란 적도 있고, 뭘 좀 사려고 해도 그 앞에 몰려서서 사지 마라, 사야 된다, 집에 있는 거 다 떨어졌다 하면서 실랑이하는 가족들이 불편해 그냥 지나친 적도 있고요."
  나는 남자12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불편'과 '가족'이라는 단어를 노트에 적어 두었다. 인터뷰를 시작한 지 불과 오 분 여 만에 두 번이나 언급할 만큼 거기에는 그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중요한 뭔가가 담겨 있었다. 1인 가구 소비자로서 접할 수밖에 없는 감정의 실체. 홀가분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문득 깨닫게 되는 뚜렷한 자각. 나는 '불편'과 '가족'이란 낱말이 나란히 쓰여 있는 줄에 '소외감'이라는 단어를 물음표와 함께 남겨두었다.
  "…… 회사나 출퇴근길에서 아무래도 많이 지치게 되잖아요. 주말까지 그렇게 떠밀리면서 복작대기는 싫은 거죠. 그래서 저는 주말 아침 일찍 가든지 금요일 밤에 퇴근하면서 마트에 들러요. 그때가 그나마 한산해서 좋더라고요. 제가 혼자라는 사실을 자꾸 환기시키는 그런 환경이 아니라서요."
  남자12의 말을 듣고 있자니 엊그제 인터뷰했던 여성8의 말이 떠올랐다. 그녀 역시 비슷한 말을 했다. 다만 그녀의 표현은 조금 더 감정적으로 치우쳐 있었다. 그녀는 마트에서 혼자 장을 볼 때마다 처량한 기분을 느낀다고 했다. 영화를 혼자 보러 갈 때와는 또 다르게 여러 가지가 신경 쓰인다는 것이었다. 영화관은 똑같은 스크린을 바라보며 다들 엇비슷한 자세로 앉아 있지만 마트는 복잡한 이동 동선만큼 사람들의 시선이 수시로 서로 얽히다 보니 그런 것 같다면서. 고작 사과 몇 알, 잡곡 몇 킬로그램을 사자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치여 가며 카트를 몰다 보면 먹고 사는 일에 대해 여러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모든 게 다 귀찮아진다고도 말했다.
  그와 관련해 얼마 전 CCTV로 보았던 장면 하나도 생각났다. 어떤 남성이 자신이 가려던 방향의 통로가 사람들과 그들의 카트로 꽉 막혀 정체되자 그대로 방향을 돌려 곧장 계산대로 향하는 모습이었다. 우리가 관찰 대상으로 삼은 혼쇼핑족 대부분이 그와 비슷한 행동을 할 때가 많았다. 매장이 혼잡하면 혼잡할수록 귀찮은 일을 해치우듯 바삐 상품을 골라 셈을 치른 뒤 재빨리 마트를 빠져나갔다.
  "어떨 때는 그냥 패키지를 하나 집어 오는 걸로 장보기가 끝나면 좋겠어요. 그 왜 K문고의 바로드림 서비스 같은 거요. 매장을 일일이 돌아다닐 필요 없이 마트 입구에서 미리 포장된 상품들을 한 번에 들고 오는 거예요. 그러면 정말 편할 거 같은데……."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이를테면 상자 모양의 '1인 패키지' 같은 걸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일주일치의 식료품과 생활용품들을 5만원 이내의 패키지 상품으로 구성해서 매장 한쪽에 내놓는 거다. 일일이 사람들과 부대끼며 쇼핑하기가 귀찮다면 이곳에서 상자 하나만 골라 바로 계산을 치르면 된다. 고객 입장에서는 패키지 단위로 매주, 매달 지출 규모를 예상할 수 있어서 좋고, Y마트는 Y마트대로 신상품 출시에 따른 매출 증가 효과를 얻는다. 식습관이나 취향을 고려해 '채식주의자용 비건 패키지'나 '이번주는 육식!'처럼 식품의 구성을 달리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계절에 따라 수박이나 귤 같은 제철 과일을 포함시킬 수도 있을 테고,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할인 특가로 와인을 준비해도 좋으리라.
  그렇게 절약한 시간과 비용은 그들에게 특화된 상품을 쇼핑하는 쪽으로 유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족 방문객들이 두부와 세탁 세제, 생수 등을 카트에 힘겹게 옮겨 싣는 동안 홀가분하고 자유롭게 소비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패키지 코너 근처에 마이크로블록이나 오백 피스짜리 퍼즐처럼 가격이 저렴하고 진입 장벽이 낮은 취미용품들을 전시해도 좋을 테고, 아예 극단적으로 루이스폴센 같은 프리미엄급 인테리어 소품들을 선보이는 기획도 해볼 만했다. 이렇게 학습된 취향은 언젠가 소비로 드러나기 마련이었지만 꼭 그렇지 않다 해도 상관없었다. 그 시점부터 Y마트는 그들에게 처량하고 소외된 느낌 대신 새로운 취향과 기호를 선사하는 기분 좋은 공간으로 되새겨질 테니까.
  여러 사람의 목소리와 팝콘처럼 튀어나오는 아이디어들로 조그마한 패키지 상자가 점점 더 구체적인 형상을 띠어 갔다. 일단 여성 혼자 들 수 있는 무게와 크기라야 했다. 너무 무거우면 들고 가기도 힘들뿐더러 간편하게 마트에 들러 손쉽게 들고 간다는 편의성을 강조한 애초의 취지가 흐려질 수도 있었다. 디자인에 민감한 여성 고객들을 고려하자면 상자의 외양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아무리 생필품과 찬거리가 든 패키지라고는 해도 모양새가 빠져서는 곤란했다. Y마트에서 고객들 각자의 주거지까지 가는 동안 패키지 자체가 또 다른 홍보가 될 수 있도록 세련된 인상을 주는 것도 중요했다.
주거형 오피스텔과 대단지 아파트 사이에 위치한 Y마트의 지리적 이점도 십분 활용할 때였다. 요즘은 지하철역에 근접한 역세권이나 공원이 가까운 팍세권만큼 '슬세권'이 뜨고 있지 않은가. 슬리퍼에 잠옷 차림으로 이용할 수 있는 근거리 편의시설 가운데 Y마트가 제외될 까닭이 없었다. 슬세권이 뭐 별 건가. 슬리퍼를 신고 나와 Y마트의 패키지를 하나 구입해 돌아가면 일주일은 무사히 지나간다는 식으로 홍보를 할 수도 있었다. 웬만한 건 집 근처에서 다 해결하려는 최근의 트렌드를 감안할 때 꼭 그렇게 엉뚱한 발상만은 아니었다.
  인터뷰를 마친 뒤, 나는 공계향 씨와 근처 카페에서 잠시 정비의 시간을 가졌다. 노트에 휘갈겨 쓴 글씨들을 스스로도 못 알아보기 전에 반듯하게 덧쓰기 위해서였다.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노마 윈스턴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더블샷라떼에 샷 하나를 더 추가했다. 고용량 카페인으로 더 이상 반응하지 않는 두뇌를 그렇듯 살살 달래고 있을 때였다.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조 이사였다.
  "김 팀장, 잘 되고 있나?"
  "그럭저럭요. 다음 주 중반쯤 인터뷰를 모두 마치면 그 주 주말 지나서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보고서는 다음 주 주말 전에 제출해줬으면 좋겠어."
  나는 휴대폰을 귀에 댄 채 소리 없이 웃었다. 인터뷰는 사실 이번 주 안으로 모두 마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대로 보고했다가는 주말에 나와서 보고서를 완성하라고 독촉해 댈 게 뻔했다. 양질의 보고서와 서로의 평화를 위해 때로는 약간의 지혜를 발휘할 필요가 있었다.
  "시간이 좀 촉박하긴 하지만 알겠습니다. 다음 주 주말 전까지 어떻게든 보고서를 올리겠습니다."
  "그래, 자기가 힘든 건 나도 잘 아는데 우리가 지금 한가한 입장이 아니잖아. 참, 보고서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조 이사는 불편하거나 스스로도 껄끄러운 이야기를 꺼내야 할 때면 상대를 늘 '자기'라고 부르며 돌연 친근함을 표시하곤 했다. 나는 결코 조 이사의 '자기'가 아니었으나 그러려니 하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K연구소 건 말이야."
  조 이사의 말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문제의 그 보고서 때문에 공계향 씨와 나는 지난주에 이틀이나 야근을 했다. K연구소에서 받은 내용을 그대로 윗선에 올릴 수는 없었기에 그걸 토대 삼아 이십 쪽짜리 보고서를 다시 작성했다. 화려한 그래프에 조금 더 음영 효과를 주었고, 그들의 분석 결과를 장황하게 인용함으로써 뭔가 굉장한 사실을 발견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그렇게 우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감추었다.
  다음날 돌아온 건 '세 줄 요약 바람'이라는 조 이사의 명쾌한 메모였다. 나는 별 수 없이 세 줄짜리 보고서를 다시 작성해 조 이사의 결재 라인에 올렸다. 세 줄 요약에서조차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진지한 거짓말을 위해서는 이십 쪽에서 삼십 쪽에 달하는 지면이 필요한 반면 진실을 말하는 데는 때로 한두 문장만으로도 충분했다.

[세 줄 간략 보고]

  ? K연구소는 데이터의 부족이 문제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데이터의 양이 아니라 해석이 아닐까요. 그들은 우리 Y마트의 고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합니다.
  ? 스포츠 스타 P씨에 대한 고객들의 호감은 사은품 등의 활용 방안을 생각 중입니다.

  조 이사가 원하는 세 줄짜리 보고서를 만들기 위해 나는 글자 간격을 조정했다. 아무리 고쳐 써도 세 줄이 넘어가는 걸 어쩌란 말인가. 빤히 보이는 불만을 앞으로의 계획과 사실 보고 사이에 끼워 넣으려니 나도 모르게 자꾸 말이 늘어났다.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보고서를 올린 뒤 후회로 마음을 졸이고 있는데 어찌된 일인지 조 이사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흘러 보고서를 올린 일 자체를 잊어버린 지금, 조 이사가 불쑥 다시 보고서 이야기를 들고 나온 것이다.
  조 이사가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나는 말했다.
  "K연구소가 말하는 건 저희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대부분 평균값에 관한 거예요. 삼십 명이 정원인 반 평균이 육십 점이라는 식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거죠. 하지만 그 반에 속한 아이들이 구십 점과 삼십 점 근처에 극단적으로 분포해 있다면 사실상 육십 점이라는 평균은 교수 학습 기준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누군가에게는 학습 내용이 너무 쉽거나 여전히 너무 어렵기 때문입니다."
  전화기 저편이 너무 조용해서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전화가 끊긴 건 아니었다.
  "이사님, K연구소가 말하는 평균은 실재하지 않아요. 데이터만 따르다 보면 존재하지도 않는 육십 점짜리 학생을 위해 무언가를 하게 될 수도 있는 거죠. 저희가 지금 며칠째 1인 가구를 방문해서 인터뷰하고 있는데요. 고만고만한 살림살이 규모는 비슷해도 그 안에는 다 제각각 다른 삶이 있어요. 저는 이 개별적인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지금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관찰을 통한 추론과 가설뿐이니까요. 그게 검증을 통해 사실로 확인될지 아닐지에 대해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무도 장담하거나 예측할 수 없는 거고요."
  두서없이 떠들었지만 뭔가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조 이사와 통화를 시작할 때만 해도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 있던 공계향 씨는 어느새 카페 계산대 쪽으로 건너가 메뉴판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잠시 뒤 조 이사가 말했다.
  "인간이라는 게 깊게 들여다보자면 심연과 다를 바 없지.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우리 일을 해야 해. 자, 이렇게 하자고."
조 이사는 깊은 한숨을 몰아쉰 뒤 나머지 말을 이었다.
  "할 수 있는 건 일단 다 해 보자. 이건 이래서 아니고, 저건 또 저래서 아니고. 이런 식의 소거법으로 가만히 셈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 난. 투 트랙(two track)으로 가자고. K연구소는 K연구소대로 계속 뭔가를 만들어 낼 수 있도록 연료를 공급해. 데이터가 부족하다고 하면 아무 거나 더 줘. 우리가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데이터로 그쪽에서 뭔가를 만들어 낼 수도 있는 거잖아. 그리고 우리는 우리대로 그동안 해 왔던 일을 하자고. 스포츠 스타 P씨? 좋아. 그걸로 뭐든 만들어 봐. 일단 그렇게라도 하나씩 실행해 보자고."
  조 이사의 마지막 말에 P씨의 명언이 들어간 머그컵을 발주하는 몇 달 뒤의 내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래,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전에도 여러 차례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결국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가 생각하는 인간의 모형을 빚어보다가 또 다른 시류의 유령에 휩쓸려 우왕좌왕하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의 과학은 빅데이터라는 패러다임을 중심으로 몇몇 예외적 현상을 논외로 치게 되겠지. 아직은 데이터가 부족해서 그런 거라고. 머신러닝을 통해 알고리즘 기능을 향상시키면 될 거라고. 그런 식으로 우리가 원하지 않았던 소음들을 신호에서 제거해가며 보고자 하는 것을 끝내 보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시대가 선택한 빅데이터가 그렇게 말하니까. '빅(Big)'은 크고 압도적이며 따라서 매우 옳고 타당하니까.
  긴 통화를 마치자 공계향 씨가 테이블로 돌아와서 팀장님, 오늘은 커피 더 드시지 마세요, 하고 페퍼민트 차를 내 쪽으로 밀어주었다. 카페 안에는 어느덧 노마 윈스턴 대신 이브라임 페레르와 오마라 포르투온도의 실렌시오가 느릿느릿 흘러나오고 있었다. 장미와 백합, 고통과 슬픔, 그리고 눈물. 나는 짧은 스페인어 실력으로 드문드문 들려오는 낱말들을 상기하며 왜 저 가수는 인생의 괴로움을 이야기하면서 꽃을 바라보고 있을까, 엉뚱하게도 그런 생각을 했다.

 
6. 카메라에 찍힌 것

  "Y마트, 미안합니다. 오늘은 다이소에서 사치 좀 부렸어요. 단돈 만 원으로 탕진하는 재미를 느낄 만한 게 Y마트에는 없잖아요. 아, 이런 거 말하면 안 되나요?"

  "보이세요? 이게 요즘 없어서 못 산다는 칫솔계의 샤� 켄트로얄이에요. 초극세모가 풍성해서 잇몸이 약한 사람도 부담 없이 쓸 수 있다고 하네요. 프티 사이즈는 헤드가 작아서 어금니 닦을 때 진짜 편리해요. 케이스는 또 어찌나 예쁜지! Y마트에도 이런 상품 좀 구비해 주세요."

  "스테이크는 이미 다 구워 놓았고, 이건 샐러드용 채소예요. 로메인, 양상추, 치커리, 비트, 방울토마토, 그리고 이건 리코타 치즈. 여기에 이탈리아 산 트러플 오일을 뿌릴 거예요. 보통은 샐러드에 발사믹 드레싱을 하는데 오늘은 제게 특별한 선물을 주기로 했어요. 연간 사업 계획서를 작성하느라 지난 몇 주 동안 전쟁 치르듯 살았거든요. 이런 때일수록 제대로 먹어야죠. 돈이 좀 들더라도 말이에요."

  유튜브에 올라온 먹방이나 상품 체험 후기가 아니다. 고객 만족도 조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CCTV 촬영 영상이다. 몇 주 전, 공계향 씨와 나를 앞에 두고 진지하게 인터뷰를 진행했던, 바로 그들 1인 가구 소비자들의 모습이었다.
  CCTV가 설치된 첫 날, 몇몇 사람들이 카메라를 향해 쾌활하게 말을 걸었다. 실시간으로 별풍선을 쏘아주고 하트를 눌러줄 상대가 마치 카메라 건너편에 있기라도 하다는 듯. 그들은 열심히 일한 자신에게 보상이 필요하다며 식재료를 아낌없이 투입해 근사한 샐러드를 만들어 보였고, 단돈 만 원으로 탕진의 재미를 누렸노라고 카메라를 향해 뜬금없이 자신의 일상을 보고했다. 가격 대비 성능을 따지느라 몇 시간씩 쇼핑 사이트를 교차 검색한다고 고백했던 바로 그 사람이 오늘은 프리미엄급의 칫솔 세트를 구매했다면서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이기도 했다.
  우리가 카메라를 통해 주로 살피고자 한 것은 그런 모습이 아니었지만 새겨들을 만한 이야기가 없지는 않았다. 이를테면 그들은 소소하게 돈을 지불한 대가로 작지만 확실하게 행복을 챙겼다. 이때의 소비는 철저하게 자신을 위한 보상이자 투자였다. 어차피 '티끌 모아 티끌'일 뿐이라면, 어차피 집을 가질 수 없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 현실을 다른 재미들로 채워가며 스스로를 돌보는 것도 일종의 지혜라고 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CCTV 카메라는 주방이나 거실이 잘 보이는 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지나친 프라이버시 침해를 막기 위해 가급적 무난한 장소를 고르다 보니 위치 선정이 그렇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화면은 사람들이 요리를 하거나 무언가를 먹는 모습, 거실에서 하는 행동 위주로 채워졌다. 관찰 대상자들이 주로 무엇을 어떻게 먹고 집안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살피고자 했던 의도에 비교적 부합하는 영상들을 담아낸 셈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집안을 오가다가 불현듯 카메라의 존재를 깨닫고 시선을 돌리거나 가재걸음으로 카메라 앵글을 벗어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사나흘쯤 지나자 사람들은 카메라에 차츰 익숙해졌다. 빤히 들여다보는 시선에 무감해졌으며 어느 순간부터는 카메라의 존재를 잊은 듯 행동했다. 어쩌면 진짜로 잊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여길 만큼 그들은 평소의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1인 가구의 경제적 주체로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어지는 삶은 늘 빤하게 분주했고, 카메라의 시선을 때마다 일일이 신경 쓰고 살기에는 생계의 무거움이 또렷하게 그들 앞에 버티고 선 탓이었다. 카메라에 대고 주절주절 일상을 읊는 달뜬 흥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이때부터가 비로소 진짜 관찰이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본격적인 분석에 앞서 나는 일단 한 사람 분량의 녹화분을 빠르게 돌려보았다. 이십사 시간 녹화된 세 대의 카메라를 육십사 배속으로 훑는 데만 꼬박 하루가 걸렸다. 그나마도 대상자가 자리를 비운 시간대는 건너뛰고, A카메라에서 자세히 확인한 내용을 굳이 다른 각도에서 촬영한 B, C카메라로 재차 검토할 필요가 없을 때 요령껏 생략한 결과가 그것이었다. 이런 작업을 매일 혼자 한다면 최소한 한 달, 공계향 씨와 둘이 종일 매달린다 해도 십오 일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조 이사를 찾아가 그 상황을 보고했다.
  "검토 과정을 일주일 정도로 더 단축할 수는 없고?"
  조 이사는 어림도 없는 소리를 웃지도 않고 했다.
  "가능합니다. 평행우주 저쪽 세계에서 살아가는 공계향 씨와 저를 각각 열다섯 명쯤 이쪽 세계로 데려온다면 이틀 안으로 끝낼 수도 있죠. 물론 그들이 협조적으로 나온다는 전제 하의 이야기입니다."
  나는 열중쉬어 자세로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나 역시 어림도 없는 소리를 웃지도 않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 이사는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어, 무슨 말인지 알겠다고. 아르바이트생 두세 명 정도 충원하면 되겠지?"
  "이사님, 아무리 그래도 여섯 명은 있어야죠. 대상자 한 사람당 녹화된 영상이 칠백이십 시간입니다. 하루에 한 사람 분량을 검토하는 것도 사실 무리라고요."
  "그럼 그렇게 해. 여섯 명으로 하되 일주일 안에 끝내는 거야. 나중에 딴소리하지 말고."
  조 이사가 예상 외로 순순히 나오자 조금 더 부를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어쩔 수 없었다. 여섯 명이라도 잘 챙겨서 일을 진행할 수밖에.
  소식을 전하자 공계향 씨가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더니 다음날 바로 사회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 여섯 명을 회의실에 앉혀 놓았다. 나는 그들에게 작업 과정 전반에 관한 보안유지 각서를 받은 뒤 녹화된 파일과 노트북을 지급했다. 그리고 영상에 나오는 사람들의 행동을 되도록 판단이나 추측이 아닌, 눈에 보이는 그대로 적어달라고 부탁했다. 이를테면 "굉장히 피곤해 보였다."라고 쓰기보다는 "저녁 아홉 시 이십 분에 집에 돌아와 외출복 차림 그대로 삼십 분 넘게 소파에 누워 있었다."라고 추출 가능한 정보들을 빠짐없이 기입하기를 원했다. 그러자 곧 이런 식으로 작성된 충직한 보고서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 화요일 아침 여섯 시 삼십 분, 여자6은 휴대폰 알람을 듣고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그로부터 십오 분 뒤 욕실에서 나와 스킨과 로션, 아이크림과 수분 에센스, 선크림 등을 차례로 얼굴에 펴 발랐고 파운데이션 쿠션을 얼굴 전체에 두드린 다음 다시 그 위에 파우더 팩트를 얇게 덧발랐다. 눈썹은 진회색 계열의 펜슬을 사용해 그렸고, 두 종류의 립스틱을 번갈아 입술에 섞어 발랐으며, 광대뼈 근처의 양 볼에 블러셔로 음영을 주었다. 아이섀도, 아이라인은 생략했고, 속눈썹에 마스카라만 덧발라 뷰러로 두 번에 걸쳐 고정했다. 이후 여자6은 칠 분 동안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렸고 핑크색 헤어롤을 이용해 앞머리를 둥글게 말았다. 그 차림으로 안방에 들어간 여자6은 오 분 뒤 감색 투피스에 검은색 핸드백을 어깨에 걸치고 나타나 주방 쪽으로 달려갔고, 냉장고 문을 열어젖힌 뒤 그 안에서 레드비트 즙이 든 파우치와 요거트를 챙겨들고 오전 일곱 시 십 분 종종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일분일초가 아까운 출근 시간에 여성들이 얼마나 많은 품을 들여가며 꾸밈 노동을 하는지에 대해 이보다 더 자세히 쓸 수는 없을 것이다. 때로는 사실을 꼼꼼히 기록하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문제 제기가 된다. 아침 식사 대신 화장을 택한 여자6의 모습에서 흔히 말하는 아름다움에 대한 자발적인 추구를 떠올리기는 어려웠다. 거기에는 그저 제한된 시간 안에 해치워야 하는 꾸밈 노동의 재바름과 고단함이 있을 뿐이었다.
  고단함은 특히 이들 1인 가구 소비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인상 중 하나였다. 직장으로 허겁지겁 달려갔던 이들이 밤이 깊어서야 느린 발걸음으로 귀가할 때 그들을 반겨주는 것은 많은 경우 적막과 침묵이었다. 그래서인지 다들 집에 돌아오면 보지도 않을 TV를 내내 틀어놓거나 휴대폰이나 태블릿PC로 음악을 재생해 일상의 배음을 먼저 채웠다. 그렇게 종일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공기를 가벼운 소리들로 채운 뒤에야 주방에서 거실로, 거실에서 욕실로 유영하듯 움직였는데, 그런 가벼운 움직임만으로도 적막하던 공간에 활기가 살아났다.
  이처럼 평일 저녁, 사람들은 임계점을 넘어선 피로를 가까스로 통제하며 지내다가 금요일이 가까워질수록 생기를 띠기 시작했다. 꽁꽁 감아두었던 요가 매트를 의욕껏 거실 한가운데 펼쳐놓는 것도 이 무렵이었고, 자전거 바퀴를 공회전시키며 체인과 케이블에 건식 오일을 발라두는 것도 이때였다. 식재료를 잔뜩 구매해 냉장고와 주방 수납장에 차곡차곡 넣어두며 콧노래를 흥얼거렸고, 마른오징어나 감자스낵 같은 주전부리를 한가득 옆에 쌓아 놓고 넷플릭스의 스릴러 시리즈를 검색했다.
  굿즈로 대변되는 사물이나 기계, 심지어 특정 브랜드에 대해 남다른 애착을 보이는 것도 이들 1인 가구 소비자들을 특징짓는 또 다른 모습 중 하나였다. 이들은 홀가분한 자유를 추구하면서도 사물이나 기계를 사람처럼 대했고, 번거로운 사회적 관계를 잘라낸 만큼 또 다른 상상의 공동체에 쉽게 정을 붙였다. 인간의 일자리가 조만간 기계 노동으로 대체되고 말 거라는 뉴스에는 분개하고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로봇청소기에 이름을 붙여주었으며 '아이폰 유저'니 '나이키 마니아'니 하는 등의 표현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브랜드에 빗대 표현했다.
  일주일 간의 영상 검토를 끝낸 뒤, 공계향 씨와 함께 각자 인상적으로 보았던 장면이나 행동 패턴 등을 간추리고 있을 때였다. 조 이사가 텀블러를 옆구리에 끼고 사무실에 나타났다. 500ml짜리 초록색 스웰 텀블러는 조 이사가 일상에서 발생하는 탄소 발자국을 줄인다는 명목으로 늘 휴대하고 다니는 일종의 착한 소비 인증템이었다. 다만 여느 텀블러들보다 폭이 좁고 유난히 길이가 길어서 언뜻 보면 누군가를 공격하기에 딱 좋은 기다란 방망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육모 방망이를 차고 다니던 조선시대 포졸 앞에서 그러하듯 나 역시 가끔은 조 이사 앞에서 죄 없이도 움찔하고는 했다.
방망이, 아닌 텀블러를 옆구리에 낀 채 조 이사가 공계향 씨를 보며 물었다.
  "보니까 좀 어때?"
  공계향 씨가 차분하게 조 이사를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음…… 저는 이분들이 혼잣말을 많이 하던 게 기억에 남아요."
  "그래?"
  "예, 누구랑 대화하나 싶을 정도로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자기 자신한테 혼잣말을 하고 그러더라고요. 마치 자기 자신을 다독이듯이요. 일일이 방해하고 참견할 사람이 없다는 건 조언을 구할 상대가 곁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무의식중에 그렇게 스스로를 환기시키고 일으켜 세우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조 이사가 그 말에 즉각 반응했다.
  "너무 외로운 거지."
  "인간은 어차피 다 혼자예요."
  "토끼 같은 처에, 깜찍이 같은 딸을 둔 김 팀장한테서 그런 말이 나온다는 건 너무 비관적인데."
  조 이사는 재미난 농담이라도 한 양 흡족하게 웃었고,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순간순간 느끼게 되는 외로움 같은 게 있잖아. 혼자 살든 같이 살든 겪을 수밖에 없는 감정이긴 한데, 그래도 옆에 있는 사람이 무심한 듯 한 마디 툭, 해주면 그게 참 별 거 아닌데도 위로가 된단 말이지. 고객 프로파일을 작성할 때 이런 측면을 좀 생각해 봐. 우리 1인 가구 고객들에게도 무심하게 툭, 다가설 수 있는 Y마트만의 그런 거 말이야."
  무심하게 툭, 이라. 두루마리 화장지와 백미 십 킬로그램, 사과 몇 알을 사서 돌아가는 Y마트의 고객들에게는 어떤 위로를 건네야 할까. 그들의 지갑을 갈취하는 데 혈안이 된 우리가 그런 위로를 건네는 일이 가능하기는 할까.
  "아, 그리고 이거. 자기들도 한 번 봤으면 해서 적어왔어."
  조 이사가 내게 메모 하나를 건넸다. 거기에는 여자3, 11. 2. p.m. 3: 12, 외시경, …… 이런 단어들이 뒤섞인 채 쓰여 있었다.
  "나도 CCTV 녹화분을 조금 봤는데 말이야. 여기 이 사람이 택배를 받는 장면이 있어. 그거 좀 봐야 할 거 같아."
  공계향 씨와 나는 노트북에 저장되어 있던 여자3의 CCTV 녹화 영상을 찾아내 조 이사가 이야기한 시점에 맞춰 화면을 재생했다.
  토요일 오후 세 시 십이 분. 여자3은 거실의 TV를 틀어놓은 채 소파에 누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때 인터폰이 울리면서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3은 벌떡 몸을 일으켰지만 곧장 그쪽으로 향하지는 않았다. 인터폰이 다시 울리고, 현관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동시에 자신이 쥐고 있던 휴대폰마저 진동하기 시작하자 여자3은 다급히 휴대폰을 소파 쿠션 아래로 밀어 넣었다. 문밖에 서 있는 이에게 자신이 집에 있음을 알리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그때 당황한 기색으로 집 안을 오가던 여자3이 신발장에서 남성용 구두 한 켤레를 꺼내 현관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런 다음, 소리 없이 현관문 가까이 다가가 외시경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뭘까요?"
  "궁금하네."
  그때 여자3이 현관을 향해 뭐라고 소리쳤다.
  "뭐라는 거지?"
  "뭘 부탁하는 거 같아요."
  여자3은 그 뒤로도 한동안 현관 앞에서 한참 서성였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현관문을 열어 그 옆에 놓인 자그마한 택배 상자를 재빨리 집어 들고는 곧장 문을 닫았다.
  "택배기사였구나."
  "그러게요."
  공계향 씨와 나는 그제야 여자3의 상황을 이해했다. 그러나 그 영상은 사정을 충분히 파악한 뒤에도 뭔가 미진한 불편함을 남겼다. 나는 누군가 내 집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인터폰을 울려대며 휴대폰으로까지 응답을 재촉하는 상황을 상상해보았다. 성인 남자인 나라도 패닉에 빠질 법했다. 시간에 쫓겨 움직이는 택배 기사의 형편은 납득이 가지만 주말 오후 나른하게 쉬고 있던 사람에게는, 특히 여성에게 그것은 습격과 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여자3은 문밖의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하기 전까지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택배 기사임을 확인한 뒤에도 상자를 문 앞에 놓아달라고 부탁하며 그와 직접 대면하기를 꺼렸다.
  파티션에 기대 서 있던 조 이사가 노트북 속의 영상을 가리키며 불쑥 말했다.
  "저거 어떤 마음인지 나도 잘 알아. 혼자 사는 여자 입장에서는 충분히 저럴 수 있지."
  방금 뭔가가 나를 건드리고 지나갔다. 나는 그것이 날아온 방향을 올려다보았다. 조 이사가 공계향 씨의 어깨를 툭, 치면서 자기도 그렇지 않아? 하고 되묻고 있었다.
  "맞아요, 이사님. 그래서 현관에 남성용 구두나 등산화 같은 걸 놓아두는 분들도 꽤 많잖아요. 일종의 방범용 소품인 셈이죠. 정작 택배기사들은 바빠서 그걸 볼 여유가 없다는데도 말이에요. 그런데 이제는 저 방법도 흔해져서 잘 통하지 않는 것 같더라고요."
  공계향 씨의 말에 조 이사는 이번에도 맞아, 진짜 그렇다니까, 하면서 맞장구를 쳤다.
  "심지어 집 앞까지 상품을 배송해주는 서비스도 불편해 할 때가 있더라고요. 모르는 사람한테 현관문을 열어주느니 차라리 품을 좀 들여서라도 매장에서 직접 물건을 사오는 편을 택하겠다는 사람도 있었어요."
  공계향 씨의 말에 조 이사는 수긍이 간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조 이사가 결혼하지 않은 비혼 여성이라는 사실은 새삼스러울 게 없었다. 그러나 좀처럼 자기 이야기를 하는 법 없는 조 이사에게서 '혼자 사는 여자 입장'에 관한 말이 나오자 어쩐지 당황스러웠다. 조 이사는 내게 그저 상사일 따름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무성(無性) 인간에 가까웠다. 그녀는 지시하는 기계에 불과했고, Y마트의 더 높은 윗선으로 우리의 의견을 이동시키는 알고리즘에 불과했다. 특히 내게는 고객을 쥐어짜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자본주의의 날름거리는 혀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조 이사를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그동안 내가 조 이사를 대해왔던 방식에 대해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인간조차 제대로 이해하려 한 적이 없었는지도 몰랐다.
  "이쯤에서 김 팀장도 뭔가 좀 의견을 말해 보는 게 어때?"
  그 순간 조 이사가 고개를 획 돌리더니 멍하게 앉아 있던 나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공계향 씨를 향해 친근한 미소를 띄우던 얼굴에서 익히 알던 평소의 그 성마른 모습으로 일 초 만에 다시 변신을 완료한 것이다. 조 이사를 향해 헐거운 미소를 짓고 있던 공계향 씨 역시 움찔하면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음……. 저도 따로 생각한 게 있기는 한데요."
  이럴 때일수록 조심하자, 는 생각과는 달리 실없는 웃음이 비실비실 흘러나왔다. 하려던 말들이 헝클어지면서 왠지 자꾸 말이 꼬였다.
  "1인 가구 소비자들을 위한 패키지를……그러니까 음……."
  "제대로 말해. 우물거리지 말고!"
  그렇지, 내게 조 이사는 이런 모습이라야 했다. 자기연민 따위는 개나 줘버릴 사람. 상대를 윽박지를 만한 기회는 절대 놓치는 법이 없고, 다섯을 제시하면 그것을 반 토막 내어 두 개 반도 아닌 두 개를 내밀며 뻔뻔하게 재협상을 시도하는 사람. 조 이사가 그렇게 나와야만 나는 그 모든 것에 느슨하게 거리를 둠으로써 건강한 적대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우리의 사무실에 필요한 건 바로 이와 같은 균형이었다.
  "참, 김 팀장. 지난번에 얘기한 고객 프로파일 작성해 올리는 것도 잊지 말고. 요즘은 스토리가 중요한 거 알지? 우리 1인 가구 소비자들의 스토리를 한 번 잘 만들어 보라고."
  조 이사는 밑 빠진 독에 물을 길어놓으라는 지시를 남기듯 나를 돌아본 뒤 사무실을 총총 빠져나갔다.
  스토리라. Y마트의 1인 가구 고객들에게도 무심하게 툭, 다가설 수 있는 그런 이야기는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 걸까. 이를테면…… 원고지 열 매 가량의 짧은 소설 형식은 어떨까. 날마다 강하게 부딪치는 외연뿐 아니라 그 안의 취약함까지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무심하게 툭, 위로를 건넬 수 있는 이야기 말이다. 어깨를 한번 으쓱할 뿐 꿋꿋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빤하고 지루한 하루의 나머지 반을 견디게 하는 이야기. 어쩌면 1인 가구 소비자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건 그와 같은 이야기인지도 몰랐다. 72.8%의 확률로 존재하는 엄연한 사실이 아닌, 모순되고 양면적인 행동을 보이며 시계추처럼 끊임없이 흔들리는, 우리가 잘 아는 어떤 특별한 한 사람의 이야기.  
7. 당신의 프로파일

  당신의 나이는 서른둘. 거주지에서 사십오 분 거리에 있는 직장에 근무합니다. 근무 환경은 나쁘지 않습니다. 건물 중앙에서 일괄 통제하는 깨끗한 공기와 쾌적한 냉난방의 혜택을 누리며 하루 여덟 시간에서 열 시간 가량 근무합니다. 열두 시가 되면 회사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습니다. 간혹 야근을 하게 될 때도 식당을 이용할 수는 있지만 당신은 그보다는 회사 근처의 편의점이나 패스트푸드점을 이용합니다. 회사 사람들과 굳이 저녁식사까지 같이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지요.
  누구의 얼굴도 바라보고 싶지 않은 저녁이라는 게 있기 마련입니다. 때로 상점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조차 소화시키기가 힘들어지는 그런 때, 당신은 도시 어딘가에 남아 있는 빈 테이블 하나를 찾아내 거기에 앉습니다. 주문한 햄버거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이어폰을 귀에 꽂습니다. 유튜브에 올라온 짤막한 동영상 한 편을 감상하면서 당신은 따뜻하고 매운 음식이 완성되기를 기다립니다. 곧 주문한 햄버거가 나오자 당신은 그것이 담긴 간소한 쟁반 앞으로 바짝 다가앉습니다. 햄버거 소스에 담긴 매운맛을 입안 가득 느끼며 당신은 한껏 얼얼한 느낌을 음미합니다. 부장과 차장과 과장에게 골고루 한 마디씩 들었던 탓인지 오후 내내 당겼던 그 매운맛이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다디답니다. 눈물이 찔끔 날 만큼 매운 것이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 경험했던 얼얼함과도 일견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을 잠깐 하기도 합니다.
  당신은 올봄에 대리 직함을 달았습니다. 입사한 지 3년 반 만의 일이지요. 빠르지도, 늦지도 않은 시기에 피라미드 아래쪽 계단 하나를 이제 막 딛고 섰을 뿐인데 분기마다 구조 조정 소식이 들려옵니다. 아직은 당신의 차례가 아니라고 하지만 조만간 닥칠 미래의 그 시간을 생각하면 뭐라도 해야 할 듯 싶어 당신은 꾸준히 영어회화 학원에 등록합니다. 중국어도 놓칠 수 없습니다. 인터넷 카페에서 만난 사람들과 스터디 모임을 결성하고 매주 시간을 정해 그들과 함께 공부하며 정보를 교환합니다. 오늘 저녁 마침 그 모임이 있습니다. 혼자 공부하기에 물어볼 것도 많고 받아야 할 자료도 꽤 됩니다. 그래서 야근을 해서라도 기획서를 마치고 가라는 과장에게 당신은 쭈뼛쭈뼛 다가갑니다. 오늘은 선약이 있어 곤란하다고 솔직히 사정을 털어놓지요. 대신 내일 아침 출근 전까지 완성된 기획서를 과장의 책상 위에 올려두겠다고 당신은 여러 차례 허리를 굽히며 양해를 구합니다. 그러고는 마치 도망치듯 외투와 핸드백을 챙겨들고 사무실을 나섭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참 이기적이야.
  우리 때는 안 그랬는데.
  어허, 요즘은 그런 말 함부로 하면 큰일 나.

  세상은 참 이상한 곳입니다. 부단히 자신을 갈고 닦지 않으면 언제든 책상을 빼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한편으로 그런 당신에게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딱지를 붙입니다. 조직의 생리를 무시하는 개인주의자, 자기만 아는 파렴치범이 되는 건 한순간입니다. 어찌어찌 스터디 모임을 마친 뒤 당신이 주머니에 든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만지작거리며 Y마트에 들른 것은 그 때문입니다. 딱히 살 것도 없고 먹고 싶은 것도 없지만 당신은 이대로 혼자 사는 빈집으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종일 비어 있던 집 안에 고여 있을 적막과 침묵을 지금은 당장 대면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 같은 건 없습니다. 자신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무언가를 해소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저 어렴풋이 느낄 뿐입니다. 그렇게 당신은 매장 일층부터 삼층까지 빈 카트를 몰고 느릿느릿 걷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Y마트는 언제나 당신을 위해 문을 열어두고 있습니다. 당신의 외로움을 이해하며, 당신에게 결핍된 것을 채워주기 위해 오늘도 당신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또 쓸데없는 물건을 사고 말았다는, 거추장스러운 죄책감 따위는 내려놓으세요. 당신에게는 오늘 위로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구구절절 다 털어놓지 않아도 좋습니다. 이십일 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는 늘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지곤 하니까요. 지금 당신을 스쳐가는 저 무표정한 타인들 역시 비슷비슷한 고민과 모욕, 슬픔을 억누른 채 간신히 한 걸음을 옮기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당신에 대해 여전히 아는 것이 많지 않지만 당신이 위로를 받을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라는 것만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 충분히 괴로웠고 지나치게 소모당한 당신은 이 모든 것을 누릴 자격이 충분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소비의 공동체에 속함으로써 더 이상 혼자가 아님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Y마트는 어제도, 그리고 오늘도 당신에게 축복을 내리기 위해 한결같이 이 자리에 있습니다. 당신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8. 검증

  지금 나는 지하 보안실에서 CCTV로 1층 매장을 살펴보고 있다. 그중에서도 내 관심은 출입구 근처에 신설된 1인 패키지 코너에 집중되어 있었다. 지난달 처음 1인 패키지를 선보일 때만 해도 고객들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호기심에 한두 사람이 걸음을 멈추고 직원에게 진초록 포장 상자 안에 어떤 상품들이 들어 있는지 질문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에 좌절한 나는 취향과 식성에 맞춰 세 종류로 출시된 오만 원짜리 패키지를 삼만 원, 이만 원, 만 원짜리로 재조정해 내놓았는데 마침 이 상품이 한 인플루언서의 눈에 띄어 입소문을 조금 탔다.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내가 기획한 1인 패키지는 체면을 차리는 정도로 판매 실적을 올리고 있다.
  다만 주요 타깃층을 1인 가구 소비자로 설정한 것과는 달리 가족 단위로 마트를 방문한 고객들이 재미 삼아 두세 개씩 사간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실제 구매자는 얼마 되지 않는 데 비해 진열대를 둘러싼 동행자들로 북적이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 탓에 그나마 관심을 보였던 혼쇼핑족들은 붐비는 사람들을 피해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가 결국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한 사람당 구매할 수 있는 수량을 제한하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고민 중이긴 한데 아직 조 이사의 결재가 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K연구소에서 보내온 분석 결과는 스포츠 스타 P씨의 머그컵을 사은품으로 내놓는 선에서 정리되었다. 머그컵에 P씨의 사진을 새기는 건 인쇄 비용도 비용이거니와 초상권 문제가 걸려 있어서 그의 어록 중 비교적 문장이 짧은 두세 개를 골라 주문을 넣어두었다. 그러고는 별 기대 없이 시제품으로 나온 머그컵 몇 개를 P씨에게 보냈는데, P씨가 인스타그램에 그것을 사진으로 찍어 올리는 통에 벌써부터 고객센터로 문의가 많이 온다고 한다. 그 뜨거운 호응이 빅데이터의 분석 결과 덕분인지, 아니면 스포츠 스타 P씨가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력 덕분인지는 뚜렷이 알 수 없지만 어쨌든 Y마트로서는 반길 만한 일이었다.
  짧은 소설 형식으로 써낸 1인 가구 소비자의 프로파일은 한동안 Y마트의 홈페이지에 걸려있다가 곧 폐기되었다. 그 안에 담긴 내용을 참고해 마케팅 전략을 짠 뒤에는 서너 줄의 간략한 형태로 축약하여 Y마트 홈페이지와 마트 입구에 인사말 형식으로 내걸기도 했다. 물론 크리스마스 시즌과 연말의 흥성한 분위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눈여겨보지는 않았다. 단 한 사람, 그 글을 주목한 이가 있기는 했다. 언젠가 늦은 밤, 인터넷 웹사이트를 떠다니다가 나는 그 고객 프로파일 전문이 누군가의 블로그에 게시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 게시물 하단에는 '기분이 이상하다'는 소감 한 줄이 짤막하게 쓰여 있었다. 나 역시 그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 이상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기로 하자.
  Y마트는 진열대를 줄이고 매장의 통로를 넓혔다. 바닥에 화살표를 표시해 각 층의 출입구에서부터 매장 곳곳으로 이동하는 가상의 동선을 제시했다. 그러자 아무도 고객들에게 강제하지 않았는데도 동선이 뒤엉키는 일이 다소 줄어들었다. 그로 인해 한때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았던 혼쇼핑족들이 좀 더 쾌적한 환경을 누리고 있을지 어떨지 아직까지는 확인되 바 없다.
  오랜 시간에 걸친 Y마트의 마케팅 기획이 별 효과 없이 막을 내린 가운데 얼마 전 조 이사는 또 다른 카드를 꺼내 들었다. 이제 대세는 사물인터넷과 인공지능이라고 했다. 이번에 출현한 유령은 어디까지 Y마트와 같이 손을 잡고 가게 될지 알 수 없었지만 모쪼록 그들이 우리에게 장밋빛 미래를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지하 보안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층에 다다른다. 무전기를 든 김중남 씨가 1층 출입구 근처에 서 있다가 나를 보고 손을 들어 보인다. 나도 그를 향해 손을 들어 보이고는 걸음을 서두른다. 오늘은 금요일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읽어주어야 할 아이와 홀로 울기 위해 집을 나설 아내를 위해 나는 버스를 기다리며 휴대폰의 음악 앱을 켠다. 지난주, 지난달에 들었던 음악들이 일렬로 가지런하게 목록을 형성해 내 손 안에 들어왔다. 이른바 자주 듣는 음악 데이터를 반영해 재생목록을 만들어주는 큐레이션 서비스였다. 저들이 내 데이터를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모를 일이었다. 나 또한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어느 한때,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나열된 정보 수집 및 제공 동의 약관에 적어도 한 번은 동의한 적이 있을지도.
  "우리는 알고리즘이 추천해주는 음악과 영상을 감상하고 유용한 광고를 제공받습니다."
  나는 광고 박스 위쪽의 엑스 표시를 눌러 그것을 화면 저편으로 넘겨버리고 음악 앱을 껐다. 대신 오래 전 휴대폰에 다운받아 두었던 음악 파일들을 찾아 그것들을 재생시켰다. 이브라힘 페레르의 목소리가 쌀쌀한 날씨와 제법 잘 어울렸다. 꽃들이 시들까 봐 침묵으로 고통을 감추려 한다는 그의 노랫말을 새겨들으며 나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서서 신호를 기다렸다. 더러는 붉고 더러는 파란 제각각의 교통신호들이 어둠에 잠긴 도시 구석구석을 향해 어떤 메시지들을 쏘아올리고 있었다. (끝)


  <당선소감>

   "'-"

  보르헤스는 최종 원고라는 개념을 믿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에게 최종 원고란 단지 작가의 탈진으로 생기는 것이었지요. 서랍 속 원고들을 뒤적거리며 끝없이 고쳐 쓰던 시간들을 돌이켜봅니다. 당선 소식을 듣던 오후에는 저도 모르게 조금 울먹였던 것 같은데 이제 세상에 소설 한 편을 최종본으로 떠나보내자니 기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합니다.

  책이 좋아서, 책 곁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전공을 선택하고 직업을 선택해 왔습니다. 그러다 문득 흐려진 길을 다시 고쳐 가보기로 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만 앞으로도 크게 달라질 일은 없겠지요. 어제 그랬고 오늘 그랬던 것처럼 다만 내일도 꾸준히 목격하고 관찰하는 체력을 유지하고자 합니다. 이야기 속 인물들을 공정히 다루며 그들의 목소리에 울림을 담아낼 수 있다면 그만한 행복이 없을 테지요.

  새벽의 신앙을 물려주신 어머니, 아끼는 책에 그려넣은 숱한 낙서들을 눈감아 주셨던 아버지, 오랜 시간 한결같은 믿음으로 지지해 준 여동생 현주와 현미에게도 애틋한 마음을 전합니다. 멀리 K국에서 선교중인 남동생 성수와 그의 가족들, 그밖에 미처 인지하지 못한 곳에서 저를 기다리고 견뎌 주었던 벗들에게도 안부를 전합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첫 걸음을 떼려 합니다. 쓰는 자로서의 태도를 일깨우던 선배 작가들과 글만큼 삶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치던 세상의 모든 건강한 생활인들에게 새삼 존경의 마음을 바칩니다. 수없이 드나들었던 서울시와 고양시의 도서관들도 저처럼 홀로 걷는 이에게는 든든한 스승이었습니다.

  심사위원님들께 감사 인사를 드리기에 앞서 부족한 글이 먼저 떠올라 부끄럽습니다. 타인의 희망을 기만하지 않는 글로 오늘의 이 깊은 감사함을 겸허히 갚아 나가겠습니다.

  ● 1972년 강원 춘천 출생
  ● 숙명여대 문헌정보학과 및 동대학원 석사 졸업


  <심사평>

  "정확한 주제와 전문성 갖춘 디테일이 인상적

  본심에 오른 응모작은 ‘몸의 일들’, ‘졸업유예’, ‘자메이카 블루 마운틴’, ‘기생’, ‘영국정원’, ‘그늘의 가능성’, ‘사어’, ‘드라마터그’, ‘친구가 일베에요’, ‘밤에 지은 집’, ‘신호와 소음’까지 모두 11편이다. 읽은 소감을 일일이 언급할 수는 없더라도 좋은 평가를 받았던 작품들이었던 만큼 감사와 격려의 마음을 담아 호명하는 게 도리일 듯하다.

  이 중 비교적 길게 논의했던 작품은 세 편이다. ‘밤에 지은 집’은 인물이나 사건이나 배경을 ‘소설적’이라는 말에 어울리도록 그려내는 솜씨가 발군이다. 더할 나위가 없는데 그 좋은 재주로 하필 40여 년 전의 그런 익숙한 인물, 사건, 배경을 다루어야 했는지 소설은 끝내 답하지 않는다.

  ‘친구가 일베에요’는 묘하다. 답답한데 시원하고 거칠면서 애처롭다. 웃기면서 슬픈 건 덤이다. 결코 쉽지 않은 이 양날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며 오늘날 청춘의 문제를 가로지른다. 그런데 처음부터 품은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는다. 무엇을 ‘일베’라고 상정한 것인지.

  ‘신호와 소음’은 무엇보다 정확하다. 무슨 얘기를 하려는 것인지, 그에 필요한 소재는 어떠해야 하는지, 소재가 소재답기 위해서는 디테일이 얼마만큼의 분량과 전문성을 갖추어야 하는지를 알고 그 계량과 적용에 성공했다. 그러한 정확한 계측과 문장으로 도달하는 지점이 아이러니하게도 ‘정확’에 대한 비판과 회의라니, 이 또한 인상적이지 않을 수 없다.

  위에 호명된 제목의 응모자 모두에게 마음 돋우어 기운 내기를 다시 한번 응원하며 당선자에게 축하의 말을 전한다.

심사위원 : 구효서, 은희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