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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아주 흔한 꽃 / 변희수

 

갈 데까지 갔다는 말을

안녕이란 말 대신 쓰고 싶어질 때

쓰레기통 옆 구두 한 켤레

말랑한 기억의 밑창을 덧대고 있다

달릴수록 뒷걸음 치는 배경 박음질 해나가듯

나란히 하나의 길을 꿰고 갔을 텐데

서로 다른 기울기를 가진 한 짝

축을 둥글게 깎고 고르는 순간

길은 저마다 제 발에 꼭 맞는 문수로

열려 있었을 것이지만 떠날 때는

모두, 안개를 배경으로 걸었을 것이다

가파른 직선 혹은 곡선의 에움길을

밀어 넣을 때마다 팽팽하게 긴장하던 구둣볼

끈을 고쳐 매고도매듭 없이

결의만 다지던 저녁이 온 것처럼

코끝을 돌려놓고 자도

늘 잘 못 든 길처럼 헛갈리는 아침

이정표 없는 허방에도 덜컹, 꽃피는 길 있었는지

밑창에 찍힌 발가락 모양이 꾹꾹 눌러놓은

압화처럼 선명하게 피어 있다

어느 고대국가의 지층에 새겨진 족적처럼

누구나, 뒤축이 닿는 순간 스스로의 삶을

탁본하게 되는 것이므로

몫의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어놓고

서늘하게 빠져나간 맨발

얼룩도 꽃의 흔적을 닮을 수 있는지

헐렁한 구두 속의 여백이 꽉 찬다


 


  <당선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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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도 좋다는 듯, 모월 모일 일요일 오전 열시는 맑고 고요하다.

  오랜만에 들른 옛집, 아흔에 접어든 아버지의 숨소리도 깃털처럼 가볍다. 나는 지금 애벌레처럼 잠든 아버지 옆에서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할머니의 필사본 가사집을 들여다보고 있다. 낡고 바랜 책갈피를 넘길 때마다 바스라질 것 같던 초서체의 글씨들이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다. 흘림체 글씨들이 어찌나 단정한지 풀어져 있던 마음들이 다 숙연해진다. 한 세기도 더 지난 어떤 열정이 내 피돌기 속으로 주저 없이 걸어들어 옴을 느낀다.

  돌아보니 투고를 끝내고 소홀했다 싶었던 며칠이 후딱 지나갔다. 왜 그런지 다시금 목이 말라온다. 문 밖을 나서면 과수원이 있고 과수원을 지나면 동네 어귀에 자그만 예배당이 있다.

  꿈결일까, 동짓달 카랑한 하늘을 가르고 내 귓가에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종소리가 댕댕거린다. 어떤 통보를 내가 받았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감출 수 없는 설렘에 문을 나선다. 우듬지마다 목마른 새를 기다리는 몇 알의 사과에 눈물이 핑 돈다. 내 시가 딱 저랬으면 좋겠다. 잎사귀들이 푸르게 태질 하는 시간을 지나 눈먼 새까지 달게 목을 축이고 갈 수 있는 그런 나무였으면 싶다.

  늘 변함없는 미소로 잔잔한 격려를 보태주신 영남대 이기철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청도까지 오르던 먼 길이 오늘에 이르렀음을 잘 안다. 그리고 내 망설임에 참 언어의 결을 환하게 열어 보여주신 경주대 손진은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끓어오르던 시어들을 담금질하던 교수님의 열정이 미흡한 내 시의 깊은 뿌리가 되었음을 고백한다. 늘 따뜻했던 경주대, 영남대 사회교육원 문창반 문우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후원자인 나의 남편과 가족에게도 고마운 마음 전한다.

  영광과 두려움을 함께 안겨준 영남일보와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를 표하며 문 밖에 지천인 저 시의 몸들, 감히 찾아 나서라는 뜻 헤아릴 것을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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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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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년에 비추어 특별히 뛰어나다 할 수 없는 올해의 응모작품들을 두고, 심사위원들이 숙고 끝에 마지막으로 간추려보았던 시편은 변희수, 황제윤, 권명호 제씨의 것이었다. 위의 세 분은 균제미가 고루 돋보이는 시적 성취들을 함께 선보이고 있었다.

  권명호씨의 시는 생활의 이면들을 어느 정도 생생한 시화로 구체화시킬 줄 아는 응모자의 절제된 구상력을 엿보게 했다.

  혈육의 애틋한 정을 일깨운 '아버지의 발등'과 같은 시가 일례일 것이다. 그러나 일상성을 뚫고 솟아오르는 이런 감동이 역설적으로 신인다운 상상력과 개성을 희석시키는 것이 아닐까 판단되었다.

  황제윤씨의 시편에는 풍경을 해석하고 감싸 안는 시선의 깊이가 느껴졌다.

  웅장하게 세워지는 대불보다 환하게 꽃피운 해당화의 생명력에 주목한 '꽃불'이나,눈발들의 시각화로 차창 밖의 풍경을 문면 가득 흘러넘치게 한 '운주사, 덜컹거리는' 등은 응모자의 패기와 시적 자질을 충분히 읽어내게 하였다.

  변희수씨는 전체적으로 사물과 세계를 적절히 통제해 시적 긴장을 부여할 줄 아는 응모자로 여겨졌다.

  범상한 소재들로 삶의 미묘한 국면들을 저울질하고, 그만한 짜임새의 시로 격상시킨 것은 그의 수련이 어느 정도의 성취를 아우를 만한 수준에 이르지 않았을까 기대하게 하였다.

  그런 기시감이 황제윤씨의 앞자리에 그를 내세우게 한 까닭이다.

  심사위원들은 변희수씨의 응모작 중에서 '아주 흔한 꽃'이 고단하게 걸어온 삶의 내력을 행간과 행간 사이로 더욱 섬세하고 선명하게 부조(浮彫)해 보인다고 평가했다.

심사위원 : 이하석, 김명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