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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쉿! / 고은희

 

아득한 하늘을

날아온 새 한 마리

감나무 놀랠까봐 사뿐하게 내려앉자

노을이 하루의 끝을 말아 쥐고 번져간다

욕망이 부풀수록 생은 더욱 무거워져

한 알 홍시 붉디붉게 울음을 터트릴 듯

한 쪽 눈 질끈 감고서 가지 끝에 떨리고

쉬잇! 쉬 잠 못 드는 바람을 잠재우려

오래 전 친구처럼 깃털 펼쳐 허공 감싼다

무너져 내리고 싶은

맨발이 울컥,

따뜻하다




  <당선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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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이사를 했다. 실개천이 게으름을 부리며 저수지로 흘러드는 곳이다. 그 길 따라 개암나무와 인동덩굴이 뒤엉켜 산다. 이곳에서 나는 불교의 연기법칙을 생각했다. ‘존재를 믿는 사람은 소처럼 어리석다. 그러나 존재를 믿지 않는 삶은 이보다 더 어리석다.’ 이것은 곧, 자아는 우주 속의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내 시는 무한경쟁 시대를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자연과의 따뜻한 접목을 시도하고 싶은 내 바람에 다름 아니다. “움직이는 물은 그 물 속에 꽃의 두근거림을 지니고 있다”고 바슐라르는 말했다. 꽃 한 송이가 피어나는 것만으로도 냇물 전체가 술렁거리는 관계를 통한 근원의 관점으로, 세계를 새로운 눈으로 보고 새로운 언어로 말하며 새로운 표현에의 열정으로 늘 젊어지고 싶다.

  부족한 작품을 응원해주신 동아일보사와 심사위원들께 더디더라도 젊은 열정으로 쓰겠다는 다짐을 하며 감사드린다. 처음으로 시조를 쓰게 했던 윤금초 박영우 이지엽 교수님, 이밖에도 경기대 문예창작과와 국문과 교수님들, 친구들에게 고맙다는 말 전하고 싶다. 가슴 아린 사람들! 딸의 늦은 공부 뒷바라지로 손목 힘줄이 툭, 붉어져 나온 어머니, 묵묵히 응원해주는 남편과 아들 딸 재진 지혜에게 무엇보다 사랑을, 사랑을 보낸다.



  ● 1961년 경북 군위 출생.
  ● 경기대 문예창작과 재학.
  ● 2010년 중앙시조백일장 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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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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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감 찾기에서 틀 만들기까지 오늘의 시조는 잰 발걸음을 하고 있다. 신춘문예에 이르러서 그 촉각은 더욱 날을 세워 밀어내기를 하고 있음을 읽는 즐거움이 크다. 예년에 비해 응모작도 늘었거니와 기성시단의 눈금과 맞서거나 넘어서는 잘 구워진 작품들의 숫자도 불어나서 왜 시조인가에 대한 명료한 답을 듣기도 한다.

 송필국 씨의 ‘노래하는 돌’, 양해열 씨의 ‘사흘칠산’, 진수 씨의 ‘남해를 품다’, 하양수 씨의 ‘세한’, 송영일 씨의 ‘막사발 날개를 달다’, 고은희 씨의 ‘쉿!’을 당선권에 올려놓고 거듭 읽은 끝에 고은희 씨의 ‘쉿!’을 기릴 수 있었다. 위에 내놓은 작품들은 이미 시조의 익숙한 가락과 높은 시적 완성도를 보이고 있었으나 오래된 글감의 재구성, 혹은 사물의 일상성이나 시대성의 노출 등이 신선감을 떨어뜨렸다.

  당선작 ‘쉿!’은 언어와 사물을 포착하는 감각부터가 산뜻하다. 감나무에 내려앉는 새 한 마리의 동작과 시간성이 살아 움직이고 ‘욕망이 부풀수록 생은 더욱 무거워’ 같은 에피그램도 ‘한 알 홍시’에 얹혀 단맛을 낸다. 시조의 형식을 어김없이 지키면서 자유시의 그것보다 더 자유롭게 시를 끌어올리는 힘이 앞으로 큰 몫을 해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주었다.


심사위원 : 이근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