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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까마귀 / 이수현

 

물이 펄펄 끓는다. 그저 멍하니 주전자를 바라본다. 부글부글하던 주전자는 이내 뚜껑을 들썩인다. 불은 노랗게, 파랗게, 빨갛게 시시때때로 변하며 물이 다 끓었음을 온몸으로 알리고 있다. 굉음을 내며 금방이라도 뭔가가 터질 것 같은 느낌이다. 이글거리는 불꽃을 한참 바라보다 나는 힘없이 보리차 티백 하나를 주전자에 넣었다. 터덜터덜 소파로 가 앉은 나는 생각에 잠긴다. 영채가 태어난 뒤로는 한 시도 고요할 틈이 없던 우리 집이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고독이 소름 끼치도록 밉다. 눈이 제 아빠를 닮아 서글서글하고, 눈동자는 나를 닮아 투명한 갈색을 띤 애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애였다. 금방이라도 그 애가 엄마 하며 뛰어올 것 같다. 하지만 정말 이상하게도 난 영채를 보낸 날에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울어버리면 정말 그 애가 세상을 떠났음을 인정하는 꼴이 될까 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아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자연스레 널브러져 있는 아이의 장난감과 앨범, 그리고 옆에 둔 술병을 하나씩 정리했다. 어제의 나의 우울감, 잔해를 하나하나 담다 보니 쉬이 사라지지 않는 그 날의 감정이 또 파도처럼 밀려온다. 소파에 깊숙이 몸을 밀어 넣는다. 마치 이대로 어디론가 빨려 들어갔으면 좋겠다. 소파 안쪽 누구도 나를 볼 수 없는 곳으로 내 몸을 밀어 넣어, 끝없는 죽음으로 내 몸을 밀어 넣고 싶다. 덜커덕.


회사에서 돌아온 남편은 소파에 앉아있는 나를 발견한 뒤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 오늘은 뭘 좀 먹었어?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들을 잃은 지 이 년이 다되어가지만, 나는 여전히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고, 음식을 먹지도 못한다. 해골처럼 비쩍 말라가는 나를 보며, 처음엔 함께 아파하고 위로하던 남편도 몇 개월이 지나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이는 벌써 영채를 잊어가는 듯 보였다. 여보. 영채를 그렇게 떠나보낸 건, 나도 정말 마음이 무너지는 일이야. 하지만 남은 우리라도 잘사는 게 먼저 간 영채가 바라는 일일 거야. 남편은 이젠 그만 아이를 놓아주자고, 그래야 살 수 있다며 나를 다독였다.


하지만, 마음처럼 그 일이 쉽지 않다. 임신이 쉽지 않았던 우리가, 시험관 시술을 통해 어렵사리 성공해, 열 달 동안 품어 여섯 해까지 키워낸 아이였다. 원래였다면 나도 이제 초등학생 형아라며 기쁜 마음에 집 안을 방방 뛰어다녔을 텐데. 시간은 가는데, 아이는 여전히 내 기억 속의 여섯 살 꼬마애에 멈추어 있었다. 이젠 남편 앞에서 쉬이 울 수도 없다. 온종일 회사에서 상사의 명령과 잔업으로 힘이 들 텐데, 나까지 징징거리면 그 역시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테니까. 무너져 제 몸을 일으킬 수 없을 테니까.


까악까악. 베란다 밖에서 까마귀 소리가 들려왔다. 베란다에 기대어 담배를 한 대 태우던 남편이 재를 이리저리 비빈 뒤, 탁하고 문을 닫는다. 재수 없게 까마귀가 우네. 재수 없게. 재수 없게. 남편의 말을 토막 낸 몇 마디가 공허하게 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렇다면 그날 역시 까마귀가 울었을까? 십이 월 이십 사 일.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이해, 유치원에서 작은 트리 엽서를 만들어 돌아오던 길이었다. 나와 남편이 맞벌이를 했던 지라 아이는 늘상 종일반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저녁 여덟 시, 유치원 버스가 하차한 뒤 약 삼 백 미터 정도 홀로 걸어갔을까? 아파트 단지에 들어오려던 아이는 역주행하는 음주 차량에 치여 끝내 숨지고 말았다. 그날 역시 까마귀가 까악까악 울어 우리 영채에게 그런 일이 생겼던 것일까. 그렇다면 팔팔 끓는 저 물에 까마귀를 잡아 처넣고 싶었다. 다시는 울지 못하도록, 끓는 물에 식도가 다 녹아 제대로 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그래서 그 재수 없는 아니 끔찍했던 하루의 시초조차도 만들고 싶지 않은 싶은 심정이었다.


아파트 단지를 나설 때면 모두가 나를 쳐다보며 질책하는 것 같았다. 과일 가게에 단지 아줌마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자연스레 눈을 피했다. 저 집 엄마는 그렇게 일. 일거리다가 결국, 하원하는 애를 차에 치여 먼저 보내고 말았대. 엄마가 제대로 돌봐야 말썽이 안 생기지. 돈 몇 푼 더 벌겠다고 어린 애가 불쌍하지 뭐야. 괜히 내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말들은 서로 웅성거리고 소란거리며 나를 못살게 만들었다. 자주 가는 정육점 아저씨도, 오며 가며 인사를 나누었던 구두 수선집 할아버지도 연민의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불의의 사고로 자식을 먼저 보낸 젊은 엄마, 불쌍한 301호 엄마.


영채를 그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주셨던 시부모님과 친정 부모님 모두 한참 동안 고통 속에 살아야만 했다. 한동안 너무 죄스러워 안부 전화도 제대로 드릴 수 없었다. 말은 제대로 안 하지만, 그러게 내가 뭐랬니. 일 그만두고 그저 여자는 집에서 애나 돌보고 남편 따뜻한 밥 세 끼 차려주는 것이 제일이라 말하고 싶어 하시는 눈치셨다. 모두에게 미안해서라도 내가 잘 먹고, 잘 살면 왠지 안 될 것 같았다. 눈물도 제대로 보일 수 없었다. 눈물조차도 치졸한 변명이니까. 제대로 아이를 돌보지 못한 내 잘못이니까. 모두가 잠든 밤, 혼자서 울음을 삼키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비쩍 마르고 볼품없어져도, 머리숱이 빠지고 생기가 없어져도 아 그래도 저 엄마는 먼저 떠나보낸 아이에 대한 최소한의 일말의 양심과 죄책감이라도 남아있는 사람이구나, 그래서 저렇게 힘들어하는구나. 라고 생각할 것 같았다.


놀이터 앞 벤치에 앉아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까악까악. 깍깍. 어디선가 또 까마귀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가 심장을 쿡쿡 찔러왔다. 까마귀는 어디선가 푸드득 하고 날아오더니 아이들이 있는 미끄럼틀 난간 사이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인상이 찌푸려졌다. 저러다 날카로운 부리로 아이들을 고운 살결을 콕콕 쪼아대기라도 하면 어쩌지. 자연스레 떠오르는 까마귀에 대한 거부감으로 나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때 손으로 모래성을 쌓고 있던 한 아이가 그쪽으로 다가왔다. 영채 또래 같아 보였다.


까마귀야. 너도 우리랑 놀고 싶어서 왔구나. 까악까악. 까마귀는 말을 알아들었는지 목청 좋게 울었다. 시소와 정글짐에서 놀던 아이들도 다가와 까마귀를 구경했다. 와아. 얘는 이름처럼 정말 까악까악 하고 우는구나. 목소리가 진짜 우렁차다. 아이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까마귀를 구경하고 있었다. 까마귀야. 무슨 말을 하고 있니. 말해봐. 들어줄게. 어디선가 까마귀 두 마리가 푸드덕하고 더 날아와 앉았다. 까마귀 가족은 종종거리며 아이들에게 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까악까악.


나는 잠시 멈추어 섰다. 모두가 흉조라고 생각하는 까마귀의 울음소리를, 아이들은 편견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까악까악. 그 울음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말이다. 그동안 나는 애써 내 슬픔을 혼자서 묵히고, 내보이지 않으려 했다. 그러면 정말 무너질 것만 같아서, 내 슬픔이 다른 이에게 더 큰 짐이 될까 봐 말이다.


집에 돌아와 오랜만에 뽀얗게 먼지가 쌓인 노트북을 열고, 까마귀의 습성을 찾아보았다. 기존에 우리가 알던 까마귀의 불길한 울음과는 달리, 까마귀는 다른 새에 비해 대뇌가 발달되어 학습능력, 또한 기억력까지 뛰어난 영리한 새라고 한다. 우는 이유 역시, 불길함을 감지하고 우는 것이 아니라 저희들끼리 대화를 하기 위해 일정한 신호로 소리를 내는 것이라고 한다.


그 소리 흐름에 따라 반갑다고 인사하며, 먹이가 여기에 있음을 알려주기도 하고, 천적이 왔으니 도망가자는 뜻이 되기도 한다. 이제껏 우리만의 잣대로 상대를 판단해왔던 것은 아닐까. 그렇게 사리판단이 분명하고 똑똑할뿐더러 가족과 무리를 소중히 여기는 까마귀를 흉조로 생각하고 꺼리며, 배척해왔으니 말이다.


까악까악. 어쩌면 그날 까마귀는 영채에게 알려주려 했던 것이 아닐까. 바빴던 엄마를 대신해, 보호자로서 어린 내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위험을 알리기 위해 그토록 우렁차게 울어댔던 것이 아닐까. 나는 억눌러왔던 울음을 끅끅대며 토해냈다. 그동안 미안함과 죄책감에 애써 털어내지 못했던 내 울음을 시원하게 풀어내었다. 남편은 내 울음소리를 들었는지 조용히 서재로 들어왔다. 나는 말했다.


그동안, 당신을 답답하게 해서 미안해. 제대로 내 마음을 말하지 못해 미안해. 내가 울고, 무너져 버리면 정말 영채가 없다는 걸 시인하는 것 같아서 그랬어. 정말 미안해. 남편은 잠자코 내 몸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토닥였다.


그래. 그래. 울어도 돼. 당신, 다 털어 버리자. 그래. 마음껏 울어. 그날 밤, 나는 내 감정을 모두 쏟아놓고, 한결 후련해졌다. 저녁 무렵, 남편과 함께 소파에 앉아 영채의 사진첩과 장난감을 박스에 정리했다. 띠리링. 그때 핸드폰 문자 알림이 울렸다. 변호사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사건이 잘 해결되었고, 보상금과 사후 처리는 천천히 진행될 예정이라는 말을 전했다. 그간 사모님과 사장님 모두 고생하셨다고, 그리고 이젠 마음 정리 후 새로운 출발을 하시라는 내용이었다. 지난 이 년간, 음주운전 차량에 대한 판결이 제대로 나지 않아 속만 태우고 있던 우리였다. 몇 번의 판결을 거친 뒤, 사고 정황이 인정되어 가해자에 대한 마땅한 처벌이 이루어진 것이다. 끙끙 속만 태우던 우리 부부가 이제 새로운 길을 걸어갈 수 있겠구나. 영채에 대한 미안함, 죄책감을 이젠 덜고, 우리 둘 부부가 이젠 영채의 목숨을 대신 짊어지고 가야겠구나, 생각했다. 저 멀리서 밝은 불빛이 깜빡거렸다.





  <당선소감>


   "글이 자라나는 시간"


글은 기다림입니다. 소재가 생각나기를, 문장이 이어지기를, 새로운 세계를 마주하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립니다. 퇴근 후 밤늦도록 글을 쓰고 있으면 가끔 왜 나는 이토록 불확실한 무언가에 매달려, 기다리고만 있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내 골똘해집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세계 속에서, 글을 쓰는 일만이 내 자신이 확실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요. 이 속에서 점점 나는 확실해집니다. 글은 우리가 사는 세상 그 자체입니다. 물결처럼 일렁였던 무수한 일과 사람들, 그리고 사건은 글 안에서 굽어집니다. 항해를 나간 선장처럼, 문장을 시작할 때부터 끝마칠 때까지 매 순간 나는 그 안에서 살아 숨 쉽니다.

올해 첫눈이 오는 날, 당선 전화를 받았습니다. 세상이 온통 하얗게 물들었던 그 날은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조금은 지치고, 버겁고, 견디기 힘든 날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 생각했습니다. 눈이 닿지 않는 곳까지 제 글이 가 닿기를요. 눈에 보이지 않아도 누군가의 마음속에 자리 잡아 맹렬히 피어나는 문장을 쓰고 싶습니다. 이젠 조금은 기쁜 마음으로, 글이 자라나는 시간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참 행운입니다. 부모님. 사랑하는 남동생. 당신들이 있어 나는 언제고 돌아올 수 있습니다. 글을 통해 새 삶의 기쁨을 알게 해주신 영원한 나의 은사님. 노은희 선생님. 존경하는 문우 정현우, 경은. 주현. 지호. 태완. 세현. 제 꿈을 마음 깊이 응원해준 소중한 친구 수진. 선아. 해찬. 지민. 고맙습니다. 유익한 글쓰기를 지도해주신 박형서 교수님. 제자에 대한 깊은 사랑과 믿음을 보여주신 이혜원 교수님. 시의 진정성을 알려주신 이영광 교수님. 감사합니다. 그대들과 함께 걷던 안암 오거리를 기억합니다. 심리학도 나연. 성욱. 석영. 감상실 친구들. 지예. 임태. 상현. 예령. 우리가 같이 듣던 음악이 지금까지 제 마음속에 남아 흐릅니다. 막내라는 이유만으로, 따스한 눈빛과 토닥임으로 안아주는 충북작가 회원님들. 여러분 덕에 제 세상이 더욱 커졌습니다.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동양일보 심사위원님들. 감사합니다. 이제 보니 제가 글을 기다린 것이 아닌 글이 제가 오기를 기다려준 것이었습니다. 글이 자라나도록, 앞으로 정진하겠습니다.




  ● 1995년 서울 송파 출생. 
  ● 고려대 졸업. 
  ● 2020 세명일보 신춘문예 시조 선외 가작 당선. 
  ● 2020 충북작가 신인상 당선. 
  ● 근로문학제, DMZ 문학상, 민촌백일장 등 수상


 

  <심사평>


  탄탄한 문장 실력 돋보여


응모작 121편엔 가족사, 유년시절의 친구들, 그 지방의 특수어, 자식사랑, 코로나19 이야기 등 등 다양했다. 일부 작품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수필의 기본기를 갖춘 수준 높은 작품들이었다. 그러나 일상 신변잡기류의 글이 눈에 띄어 이들을 먼저 제외하고 숙독을 거쳐 이중 최종심으로 3편을 골랐다.

그 중 하나가 ‘도덕산 바우’다. 마을을 내려다보는 산의 바위를 ‘큰 바위 얼굴’에 비유한 것으로, 나중에 제일 잘된 진구에게 이 이름을 붙여주자 하고 그 계까지 만들었다. 이들은 각각 고향의 마을을 떠났고 석수라는 친구만 마을을 지켰는데 불의의 사고로 죽는다. 하여 옛 친구들이 문상을 왔는데 유독 제일 성공한 기필이만 돈만 부탁하고 오지 않았다. 매번 불상사에 그 비서를 통해 못 간다는 말만 전달했던 기필이를 배제하고 고향과 친구와 그 부모들을 보살피며 궂을 일을 해준 석수에게 그들이 약속한 대로 “도덕산 바우‘의 칭호를 달기로 했다는 이야기다.

또 하나는 ‘쳇불’이다. 액체나 가루를 거르는 그물을 ‘쳇불’이라 한다. 쳇불구멍의 크기에 따라 어레미, 도드미, 가루체 등으로 나뉘는데 살면서 각종의 어려움을 이 쳇불을 통과하는 것에 비유하며, 앞으로의 삶에 약간 느슨하고 부드러운 쳇불로 걸러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내용이다.

그리고 ‘까마귀’다. 어렵사리 얻은 아이를 잃고 그 책임감으로 나날을 우울하게 살다가 불길하다는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아이를 데려간 것 같아 그 소리를 증오하던 중 놀이터에서 까마귀와 친하게 노는 이이들을 보고 노트북을 보니 까마귀 소리는 불길한 것이 아니라 끼리끼리의 소통방법으로 불길한 일을 예고해준다는 걸 알고 자식의 불길함을 일러준 소리를 모르고 내 일에 매달리느라 참변을 당했다는 죄책감에 마음껏 울면서 아들을 대신해 밝은 날을 살아야겠다는 내용이다.

셋 다 그 줄거리를 이어나가는 내용이 나무랄 데 없고 할 말을 나타내고 있었다. ‘까마귀’를 쓴 이수현 씨의 또 다른 작품 ‘둥지’는 코로나19의 현 세태를 구구절절하게 표현한 훌륭한 작품으로 두 작품 모두 탄탄한 문장실력이 돋보여 이수현씨의 ‘까마귀’를 당선작으로 뽑는다.

더욱 정진하기 바라며 선외 작품에도 격려를 보낸다.

 

심사위원 : 박희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