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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역사의 잔해와 무덤 순례자 - 오종태론 / 김서라

 

저것을 어떻게 한다냐

다만 하얀 것 위에 하얀 것

역사도 전쟁도 파묻어 버린

백 년 같은 저 작은 별들을 어떻게 한다냐

―범대순, ‘무등산 눈꽃’, 『무등산』, 문학들, 2013년 부분 인용



1. 도무지 전할 수 없는 이미지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대상이 사라졌을 때, 그것을 말하는 것은 어렵다. 하물며 그것이 사라졌을 때, 이미지로 전하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다. 사실 상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며 설령 전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왜곡이나 굴절을 피할 수 없고 심지어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가령, 어떤 사진가가 이미 사라져버린 세계를 사진으로 보여주려고 할 때, 좀체 이미지로 나타낼 수 없는 것을 드러낼 수밖에 없게 ‘되었다’면 그것이 어떠한 조건 위에서 이루어진 것인지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이를테면, 무수한 시체 더미와 잔해들을 자신의 눈으로 오랜 시간 마주한 사진가에게 그 순간이 종결되었다고 해도, 시신들로 가득한 전할 수 없는 풍경은 유실될 수 없는 풍경으로 신체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사진가의 신체화된 풍경은 누구도 볼 수 없는 풍경이므로, 풍경일 수 없는 풍경이라고 해야 옳을 터이다.


이런 풍경 속에서 ‘사유’를 시작한 도미야마 이치로(『폭력의 예감』, 김우자 외 옮김, 그린비, 2009)는 시신의 눈을 통해서 죽음을 예감하는 오키나와 사람들을 포착한 바 있다. 죽은 자들 옆에서, 자기에게 엄습할 죽음을 진저리치면서 받아들이는 산 자들의 위치는 죽은 자들의 옆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방식으로 조직된다. 사진가가 죽은 자들의 반복적으로 혹은 강제적으로 집요하게 찍어야 했다면 시신들의 정면에서, 좌우에서, 위아래에서 들여다볼 때, 그는 죽음을 경유해서만 살아 있을 수 있다는 감각을 가졌을 터이니, 이 풍경을 아로새긴 사진가의 신체적 풍경이란 보여서는 안 될 성질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은 자들이 아니라면 자신의 존재가 무의미하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역설적이지만 아무리 전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 사진가는 죽음과 시신의 이미지를 무심결에 드러낼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오종태(1917~2008)는 누구나 흔히 볼 수 있는 광주의 풍경들을 찍었지만, 누구나 그 사진들을 더 이상 되새김질하지 않는 사진을 남긴 광주의 역사와 풍경을 기록한 작가로 알려져 있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사실상 거의 아무도 모르는 사진을 남긴 작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에 대한 이해는 거의 전무한 실정이기도 하다. 달리 말해, 지방 작가나 광주의 초기 사진가 혹은 단체 설립자 정도로 ‘기억’ 되는 그의 사진은 광주의 역사적 풍경을 드러내는 기록 정도로 취급되는 게 일반적이라는 의미이다. 이 때문에 그의 사진은 역사 아카이브로 광주 풍속을 이해하는 ‘자료’ 정도로 제한적으로 여겨져 사진가가 이를 찍어 놓은 까닭과 이유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았다. 아니, 차라리 질문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의 사진 작업 가운데 질문을 촉발하고 이를 도저히 외면할 수 없도록 만드는 기묘한 이미지가 그의 사진 작업 전체와 생애사를 추적하도록 유도하고 있다면, 그의 사진이 갖는 생명력은 사진의 형상으로 보이는 것과는 다른 맥락 아래에서 감지되도록 만든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으로 포착한 것과는 다른 세계를 지속적으로 읽어내도록 요구하는 오종태의 두 사진(혹은 세 장의 사진)에 붙은 제목은 “아우슈비츠의 잔해”(1, 2) 혹은 “Grave”다. 즉, 해방 이전부터 사진을 찍었던 오종태에게 ‘아우슈비츠의 잔해’와 ‘무덤’이라는 제목은 단순한 ‘기억’의 차원일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궁극적으로 그가 해방 이전에 숱하게 목격하고 찍었던 시신들, 시취들 그리고 향냄새로부터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오종태의 사진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중요한 이미지이며 이를 경유할 때, 사진의 새로운 지평들을 숙고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우선 오종태의 사진 이미지를 좀더 꼼꼼하게 검토해야 할 필요가 있다.



2. 흑백사진의 음영 : 아무것도 아닌 이미지


오종태는 『눈(雪)』(1987)에서 「조형 6 墓 (Grave)Ⅲ」와 「조형 15」로 붙였던 사진 제목을 『오종태사진집』(1995)에서 「아우슈비츠의 잔해1」, 「아우슈비츠의 잔해2」라고 바꾸어 남긴다. “조형” 연작 사진이 뜬금없이 “아우슈비츠의 잔해”라는 제목으로 바뀐 것은 작가의 변덕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단순한 변심이나 착상을 넘어서는 이미지에 대한 사유가 깃들어 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그의 “눈” 작품집 출간 인터뷰를 경유하는 것이 필요하다. 적어도 이 두 사진에 은밀하게 중첩된 역사적 이미지, 그리고 그가 십여 년이 지난 뒤, 제목을 변경한 까닭을 추적하기 위한 하나의 단서가 놓여 있다고 해 두자.


흑백사진은 마치 동양화에서 남화(南畵)처럼 다양하고 깊이 있는 맛이 있고 끝도 없는 다양한 기법이 요구되지요.

(중략)

일본군을 따라다니며 1년간 시체사진만 찍었더니 사진에 넌더리가 나더군요.

―「노익장 사진작가 7순에 작품집」,<<조선일보>> 1987. 1. 21. 7면


그의 직접 발언만을 옮긴 위의 인용에는 사진과 그의 작업이 갖는 중요한 문제의식이 들어 있다. 오종태는 남화를 방법적으로 차용하여 사진 작업을 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방법을 고안해야 했던 것은 만주에서 1년 동안 찍었던 사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가 남화의 방법을 무엇으로 이해했는지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여백’을 흑백사진이 갖는 음영으로 받아들였던 것으로 판단해볼 수 있다. 달리 말해, 흑백사진은 형상을 여백을 통해서 조직하는 표현방식이고 여백이야말로 이미지가 서식하는 중요한 원천이라는 발상을 가졌던 셈이다.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방법을 고안해야만 했던 이유가 일제 강점기의 그의 행보에서 기인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즉 오종태가 『눈』 작품집의 사진을 찍었던 1960년 말에서 1961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의 시점은 해방과 더불어 더 이상 “시체 사진”을 찍을 수 없다는 자각이 이루어진 시기로, 이 자의식은 역설적으로 그는 역사적 경험을 사진 속에 기입하는 효과를 발생시킨다. 설경을 찍으면서도 그가 정작 “무덤”을 조형하게 되는, 곧 애써 외면하고 지우려고 했던 ‘역사’와 반복해서 마주하게 되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1987년의 사진집 인터뷰에서 “책을 보고 있으면 지난날이 환히 떠오르고, 족적을 남긴 것 같아 뿌듯하다”(위의 신문)고 한 진술은 예사로운 노인의 낭만적 회고일 수 없다. 그의 사진적 방법에 따르면 형상은 고통스러운 역사적 경험의 자리인 여백에서 나타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오종태에게 동시대의 향방은 긍정적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그에게 “근대화”는 전쟁과 분별되지 않는 경험으로 주어진다. 달리 말해, 전쟁의 잔해를 찍었던 그는 동시대를 장악해가는 근대화의 폭력으로부터 밀려난 잔해들을 외면할 수 없다. 『눈』 사진집에 실린 사진을 찍었던 시기에 촬영한 그의 첫 사진집 『홍도와 흑산도』에서 이를 살펴볼 수 있다. 가령, 고래 아가미뼈를 찍은 사진 곁에 정성스레 붙인 캡션의 내용은, 사진 찍은 대상을 사진 내부가 아닌 그 밖의 다른 차원에서 구성하고 있다. 사진 내부의 대상으로서 고래 아가미 뼈는 기록의 대상으로서 어떤 의미도 없다.(「높이 12척의 고래 아가미뼈」) 오종태가 끊임없이 하고자 한 말은 단지 고래 뼈의 위용이 아니라, 근대화라는 재난으로 급속도로 폐허가 되는 세계를 찍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치 만주에서 넌더리가 나도록 시체 사진을 반복해 찍은 것처럼 말이다.


“홍도와 흑산도”에 따르면, 이 군도에 사는 어린 딸들은 어머니처럼 해녀로 살고 싶지 않고, 고생으로 삶을 다 보낸 늙은 해녀들의 얼굴은 주름살이 그득하고 그들에게 미래는 없으며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과거 따윈 없다. 오직 스쳐 지나갈 그 순간만이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이다.(‘해녀’, 1960) 해녀의 어린 딸들은 팔뚝시계를 갖고 싶고(「홍도의 소녀」, 1960), 섬에는 양주 파는 가게와(『흑산도와 홍도』 수록, 제목 없음), 서양식으로 지어진 공공기관 건축물과 등대(『흑산도와 홍도』 수록, 제목 없음)도 생기지만, 오종태는 이를 진보와 발전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외려 이러한 근대화=재난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음을 알고 있고, 그는 재난의 여파와 함께 사라지기 시작한 것들을 오직 보는 데에만 집중한다. 그가 보고 있는 모든 동시대적인 풍경은 죽은 것들의 바로 옆에서 소멸하기 바로 직전에 놓인 것일 따름이다.


이처럼 오종태의 카메라는 그의 기억과 역사적 맥락에서가 아니면 말할 수 없다. 기억과 역사가 겹치는 구간에서 움직였기에 그는 사진을 설명해야 했다. 그의 설명들은 역사적 층위에서 사진의 대상이 부재함을 말한다. ‘아무것도 아닌 이미지’와 그것을 에워싼 사진에 제목을 달고 캡션을 다는 오종태의 행위는 어떻게든 사라진 잔해들 앞에서 말하는 시도이자, 사라진 대상을 향한 애도(불가능성)의 방식이라 해도 좋다. 벤야민이 말한 대로, 사진에 설명과 제목을 달면서 혁명적 사용가치를 부여하는 것까지가 사진가의 능력이라 할 수 있다면, 오종태는 그런 사진가 중 한 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오종태의 사진집들과 「아우슈비츠의 잔해」라는 명명은 역사를 추켜세우거나 상업적 유행에 맞추는 사진이 아니라, 도리어 역사의 잔해들을 애도하는 비문(碑文)이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이를 사진가의 ‘능력’(Fahigkeit)이라고 말했지만, 오종태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능력이라 할 수 없고, 그의 신체에 각인된 기억이 반복된 결과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신체가 습관을 반복하는 것처럼 반복되는 역사적 재난 속에서 되살아나는 트라우마와 환각은 사람을 항상 그 재난의 현장으로 되돌려놓는다. 시신들의 이미지가 그가 마지막 사진집을 출간할 때까지도 남아서 사진에서도 ‘말할 수 없는 무엇’으로 인화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의 증언은 전할 방도가 없지만, 그럼에도 뱉어낼 수밖에 없는 말이기 때문에 파괴된 시대에 대한 이미지이다. 그래서 그의 이미지는 아무것도 아니면서 동시에 그 시대를 가장 잘 인화한 이미지이다. 오종태의 증언은 모든 것이 종말 바로 앞으로 내몰린 시대에서 사진의 이미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기도 할 것이다.


사진 1) 조형 6 墓(Grave) Ⅲ

3. 모든 것의 무덤 : 무등산


오종태의 사진에 관한 짧은 고백은 사진 찍는 신체에 대해 숙고하게 만든다. 보도사진가가 되고자 했던 열망은 ‘시체 사진’을 1년간이나 반복해서 찍으면서, 일종의 트라우마로 받아들여진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식민지 조선인으로, 같은 피해자의 시신을 반복해서 촬영하는 사진가의 눈은 저 죽음이 다만 타인의 죽음으로 치환되는 게 아니라, 즉각적으로 자신의 죽음이나 소멸과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오종태는 시체 사진의 촬영이 자신의 죽음을 반복해서 목격하는 일과 구분되기 어려웠으며 헤아릴 수 없는 죽음 속에서 자신의 생명을 가늠해야만 했을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미 소멸한 존재를 반복해서 촬영하는 그의 ‘신체 감각’은 존재하는 것을 기록하고 회화주의적 프레임을 통해서 표현하는 방식과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종태의 카메라와 신체가 움직이는 것은 이미 무덤을 확보하는 일과 구별되지 않는다. 그가 찍은 모든 것들은 무덤이 된다. 오종태가 잔해와 무덤의 연속 선상에서 사진을 촬영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택한 ‘산악인’으로서의 또 다른 인생의 경로에서도 찾을 수 있다. 오종태는 사진가이기도 했지만, 산악인이기도 했으며, 그가 이후에 「아우슈비츠의 잔해」로 재명명한 눈 조형 사진을 찍었던 곳은 무등산 일대였다. 그는 무등산, 월출산 일대의 풍광들과 조형사진들을 모아 『눈』 사진집을 출간했으며, 이 중 세 장의 사진에는 ‘Grave’라는 부제를 단다. 그의 렌즈가 산에서 무얼 담든 증언 그 이외의 것이 아니었는데, 그런 사진을 시대가 조형 사진으로만 규정했을 때, 『눈』에 담긴 사진 세 장의 부제이기도 했던 ‘Grave’는 산속에 뜬금없이 놓인 아무도 찾지 않는 신원불명 묘소가 된다. 그러므로 세 장의 사진들에 있는 조형적 유사성을 찾는 것보다, 그가 조형사진들을 찍었던 그 장소의 의미와 그토록 산행을 번복했던 까닭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가 ‘산악사진가’였다는 것은 곧 그에게 산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는 말과 같다. 직접 광주의 산악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자신이 만든 ‘나하나경양식’점에서 창립총회를 했을 정도이니, 산은 그의 삶을 추적할 때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오종태는 그토록 산에 빠져 살았는데, 그곳에서 찍은 사진들은 사물을 가까이서 포착한 조형사진에서부터 산의 기암괴석을 원경에서 담은 것까지 다양하다. 따라서 그의 사진들을 말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분류에 끼워 맞추기보다, 그의 산 사진들을 관통하는 줄기를 찾는 것이 적절하다. 그가 산을 사진 찍는 장소이자 활동하는 장소로 삼고자 했던 이유는 그 줄기를 추적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이때 산은 곧 그에게 단지 조형사진을 찍기 위한 공간이거나, 산을 배경으로 한 삶의 기록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서 포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근대화가 곧 재난이라고 보았던 오종태에게서 산은 재난들의 잔해가 오랜 시간 모이고 침식된 곳이다. 내부와 외부의 경계선이었던 산은, 오종태의 렌즈에서 간신히 생동하는 역사적 잔해로서 비추어진다. 재난을 통해 파괴가 이루어지는 도시보다 그 경계에 있는 산과 그 기슭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은 재난의 경계에서 오롯이 남은 사람들은 오종태에게 잔해였고, 그런 장소에서 드러나는 조형적 이미지는 흑백의 여백을 통해서 역사적 잔해의 단면을 비춘다. 산은 오종태에게서 무엇을 찍든 역사적 잔해였던 그의 렌즈와 가장 잘 부합하는 장소였을 터다. 적어도 도시는 그에게 증언의 장소는 아니었다.


근대화에 몰입하는 도시에는 죽음과 무덤을 증언할 수 있는 곳이 없다. 높은 시멘트 건축물과 가로가 넓혀지는 도로는 지금의 착취를 거쳐 창창해질 미래를 약속한다. 도로를 넓히고 다리를 건설하느라 판잣집을 허물고 강바닥은 뒤집히는데 그건 도시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 된다. 빼앗고 또 빼앗는 통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한 사람들이 산으로 피난 간다. 도시에서 허용되는 사진은 아직 오지 않은 것에 대한 약속을 유행을 덧입혀 상품으로 둔갑시키는 것뿐이어서, 소멸되어야 했던 자들을 찍어야 했던 오종태에게 도시라는 공간은 자신의 증언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도시는 애도와는 상관없는 곳인 까닭이다. 도시는 지나온 것들을 게걸스레 먹어치우며 앞질러가기 바쁘다. 근대화가 지나온 자리에는 마치 달리는 차에 쓸려 짓이겨진 개처럼, 전사자들이 내팽개쳐져 있다. 항구 앞바다에 수장되거나, 용광로 철물에 녹아버린 자들은 면포 덮을 시신조차 없다.


거대한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야 오종태는 셔터를 누를 수 있는 순간들을 만난다. 무등산 계곡을 바라보는 댕기머리의 소녀들(「원효사 앞뜰에서 무등산을 바라보는 두 소녀」, 1957), 땔감을 짊어진 모녀(「땔감... 삶」, 1957)은 산에 기대어 살고 있는 사람들의 연약한 순간들이다. 오종태는 역사가 사라진 시대의 잔해와 같은 무덤이며, 피난 온 사람들의 마지막 삶의 자리로서 산을 찍는다. 쑥을 캐러 왔다가 원효사 앞뜰에서 무등산 계곡을 바라보고 선 두 소녀들의 뒷모습은 역사가 마지막으로 남긴 작은 씨앗처럼 연약하고 시름없다. 무등산 기슭의 마을은 이미 겪은 착취의 상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도 못했는데, 다시 또 닥칠 시대적 재난을 벌거벗은 채 맞이해야 했다.(「방림동 변방에서 본 무등산」, 1956) 근대화의 재난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기 전, 찍었던 이 산을, 오종태는 자신의 마지막 사진집에나마 남겨두고 있다.


1995년 오종태의 마지막 사진집은 역사적 재난들을 끌어안은 한 권의 묘비처럼 잘 정리되어있다. 1980년 광주의 오월은 근대적 도시가 곧 수용소였으며 그 종말은 집단적 학살이라는 것을 여실히 드러냈다. 오종태가 본 오월은 도시라는 수용소는 집단 학살을 위한 예비단계라는 것, 전쟁의 예외상태는 도시에 현재한다는 선고 아닌 다른 것이었을까. 다 늙어버린 사진가 오종태는 광주를 지켜보면서 다시 한번 자기 기억들이 끄집어지는 것을 강제로 확인해야 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지나간 사진집을 펼친다. 자신의 두 번째 사진집 『눈』의 조형적 이미지 중 두 사진은 다시 한번 그가 증언하게 되는 장소가 된다. 그는 사진의 이름을 다시 붙이고, 다시 말했다. 산에서 떠오른 이미지는 오월 이후에 다시 재생된다. 그제야 그가 어렴풋이 감지한 것은, 아우슈비츠의 잔해라는 이미지가 무등산에 올랐던 1960년에도, 지금도 신체에 깃들어 언제든지 되풀이되고 있다는 것이다. 오종태 그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할지 몰라도, 그의 신체가 기억하는 아우슈비츠는 결국은 오종태를 도시의 무덤인 산으로 이끌었다.




사진 2) 조형 15

4. 아우슈비츠 이후의 아우슈비츠


오종태의 사진들은 근대적 맥락 위에서가 아니라 그에게 남겨진 신체적 기억과 역사를 동원하여 인화되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사진이 「아우슈비츠의 잔해」라는 제목으로 재명명되었다는 것은, 「아우슈비츠의 잔해」를 통해서, 그의 사진 전체를 재설정하게 만든다. 오종태의 사진에 기입된 이미지는 실제로 ‘그런 이미지’를 제시하지 않는다고 해도, 근대화의 재난과 만주경험과 여순항쟁, 5·18로 되새김질되어야 할 것으로 주어진다. 심지어 무등산을 그저 찍었다고 해도, 미치도록 무등산을 오르내렸던 연유도 마찬가지다. 「아우슈비츠의 잔해」로 자신의 사진을 달리 명명할 때, 한국근현대사의 둔중한 망각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출현하게 되며 그의 사진에 갖은 통증들이 잠재적으로 주어져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아우슈비츠의 잔해」는 그가 87년 6월항쟁을 말하는 와중에도 캡션으로도 발화되지 않은 경험을 잠재적으로 함축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달리 말해, 재난이 우리사회에서 소거되지 않는다면, 그가 만약 사진집을 다시 발간한다면, 그러한 ‘재난’이나 ‘참사’에 따라 달리 명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우슈비츠의 잔해」가 5·18에 관한 직접적 사진과 무관해 보이는 조건에도 불구하고 이 사진은 불변하는 ‘작품’의 위상과는 아무 상관 없이 참혹한 역사를 수용하는데 전혀 무리가 없게 된다.


전쟁과 재난이 언제 일어났는지를 기록하고 이를 남기는 일이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적어도 아우슈비츠가 현재한다는 것에 대한 감각, 곧 신체 반응(이 반응은 수동적인 수용이 아니라 능동적인 해석적 행위이다)이 일으키는 ‘행위’가 기존에 확정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이나 세계를 다르게 명명하도록 추동한다면, 사진 기록의 ‘고정성’은 역사를 통해서 변주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오종태에게 사진은 고정된 시공간이 아니라 유동하는 이미지이자 역사적 이미지이고 파괴와 소멸 바로 직전에 놓인 동시대적 시공간적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해방 이후 한국사회에 펼쳐진 갖은 재난들에서 상실되는 세계를 아무것도 아닌 이미지로 제시하면서 카메라의 무자비한 ‘수렵’과 ‘채집’의 원리와 달리, 근대화가 사상한 것들이 기입될 수 있는 여백을 제공하고 남은 잔해를 그러모아 무덤을 만들고 묘비를 쓰는 역할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있다. 그 역할은 그가 겪은 역사적 당사자로서의 경험 없이 떠맡을 수 없었던 것이며, 그의 역사적 신체가 만들어낸 반응과도 같은 것이다.


오종태는 이론적이기보다 경험, 신체적 사진을 무의식적으로 구상했다. 오종태의 그 무엇도 아닌 이미지는, 역사적 신체와 비가시적인 세계가 어떤 방식으로든 출현할 수 있다는 것 또한 드러낸다. 역사적 신체 그리고 동시대적 삶이 여전히 지금도 신음하고 있다면, 오종태의 사진은 그 신음을 함께 듣기를 안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모두가 역사적 당사자이며, 도시는 물론이며 더 이상 무등산과 같은 자연조차 근대화의 문턱의 역할을 할 수 없는 지금은 또 다른 형태의 아우슈비츠로 삶과 세계를 조직하며 비가시화된 존재들을 양산하고 있다. 이른바 “셀카”가 디지털 사진의 주요한 현상이 된 것이, 그저 나르시즘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고 유지하는 하나의 방식이 된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그러므로 “셀카”의 광범위한 확산은 우리가 완결적이고 자족적인 것이 아니라, 타자의 시선 혹은 신체와 결합되어야만 겨우 존재를 유지할 정도로 취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취약한 자기 이미지로부터 공통 신체를 조직하는 방식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듯이, 오종태의 신체적 사진은 우리를 그의 사진에 연결시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사진이 우리를 엮고 묶어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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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사진은 ‘별첨’으로 첨부한다.


1) 오종태의 사진에 대한 정교한 비교와 추적은 유일하게 김만석에 의해 이루어진 바 있다. <광주영화포럼1-비평강좌>의 일환으로 (사)광주영화영상인연대에서 개최<반딧불 영화들은 소멸했는가?>에서 김만석은 「항아리필름과 신체카메라」(2020. 6. 23 발표)에서 오종태의 사진이 처해 있는 불안정성을 밝힌 바 있다. 여기에서 「아우슈비츠의 잔해1」과 「아우슈비츠의 잔해2」는 역사적 과정에서 다르게 표기되었고 이 때문에 지금도 공식적인 기관(광주시립미술관)과 기구(광주시청각자료실)에서는 작품의 생산년도와 제목을 상이하게 표기하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원래 이 두 작품의 제작연도는 1960년 혹은 1961년으로 보이고, 처음 작품이 선보인 것은 배동신과 함께 순천에서 개최한 2인전을 통해 선보였다. 1964년에 서울 신문회관에서 개최한 <눈 작품 개인전>을 통해 정리되었다가 1987년 두 번째 작품집에서 「조형6-墓(GRAVE)Ⅲ」, 「조형15」로 기록되었으며 1995년 네 번째 사진집에서 「아우슈비츠의 잔해1」과 「아우슈비츠의 잔해2」로 제목이 바뀌어 출간되었다. 1987년 이전에 붙었던 제목은 확인되지 않지만, 1987년 1월에 출판된 사진집의 제목이 6월 항쟁을 거쳐, 1995년 광주학살자 처벌에 대한 염원이 이루어지고 있던 시기(7월 7일 공소권 없음으로 결정된 후 이 사진집은 8월 20일 인쇄에 들어간다)에, ‘아우슈비츠의 잔해’라는 명명으로 출판되었다. 물론 이러한 한국현대사와의 계기는 우연적이지만, 이 속에서 그의 역사적 감각이 사진을 통해서 드러났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2) 이 사진집은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의 봉사활동 과정에 오종태가 참여하게 되면서 찍은 것으로, 원래 보고용으로 만들었던 것이지만, 실제 사진을 붙이고 캡션을 달아 출간한 것이다. 현재 전남대학교 도서관에 한권이 보관되어 있다. 이 사진집에 대해 오종태는 자신의 이력에 첫 번째 사진집으로 기록하고 있다. 중요한 사실은 홍도와 흑산도를 촬영한 사진들이 「조형6-묘(GRAVE)Ⅲ」, 「조형15」 등의 조형 연작을 찍었던 시기와 겹쳐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오종태의 사진을 풍경 혹은 기록/보도 사진과 회화주의 사진으로 구분한 이 당시의 사진계의 구도 어느 쪽에도 위치시킬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해주는 근거가 된다. 왜냐하면, 그의 풍경사진은 풍경에 기입되는 파국적 원리를 파악하도록 만들고, 회화주의 사진은 풍경의 여백을 보도록 만드는 방식으로 촬영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사진사에 제대로 기록되지 못했던 여겨진다. 즉, 그의 사진이 갖는 의미를 적어도 당대에는 ‘언어’로 다룰 수 있는 방식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오종태의 사진은 그 당시를 찍은 것이 아니라, 역사적 폐허를 시각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동료를 기다리는 ‘잠재성의 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3) “12척의 고래 아가미뼈를 동리 입구에 세워놓은 것은 언젠가는 우리도 이런 큰 고래를 잡은 적이 있었다는 지난날의 힘의 자랑인가. 이 뼈에는 그들 자신의 또는 조상의 불굴의 의지가 숨어있는 듯도 하다. 섬 밖은 나가보지 못하여 자전차도 본 일이 없다는 이 윗통벗은 노인에게는 그런 섬 사람의 의지가 숨어 있을게다.” 『홍도와 흑산도』(1961)에서 인용.


4) “우리가 사진작가에게 요구해야 할 것은 사진을 유행적 소비품으로 빼내어 그 사진에 혁명적 사용가치를 부여해줄 그런 제목을 달 줄 아는 능력이다.” 발터 벤야민, 「생산자로서의 작가」, 윤미애·최성만 옮김, 『브레히트와 유물론』, 도서출판 길, 2020. 384쪽.


5) 당시 만주의 사진계는 제국 일본의 오족협화 원리에 충실히 복무하는 사진들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주로 다양한 민족들의 민속지적 기록에서부터 만주의 계절, 일상 풍경 그리고 이른 바 신생 만주국의 발전상을 촬영한 사진들이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오종태는 이런 기록과 회화주의적 사진의 구도에서 절대로 포착되지 않는 ‘시신’ 사진을 찍고 있었던 셈이다. 만주의 공식적 사진계의 사진들은 바로 이 시신 더미 위에서 이루어진 기록물이라고 할 수 있다. 만주 관련 사진은 만주제국정부가 간행한 『若き滿洲 : 寫眞に觀る』, 1938년을 보라.


6) 60대산회, 『1960년대 한국의 산악운동』, 조선일보사, 2003. 이 책의 광주편 저자 정순택은 오종태를 산악사진가로 소개하면서 그가 광주에서 했던 산악운동활동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오종태는 무등산악회의 창립멤버이자 부회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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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오종태 작가 이미지 출처: 오종태, “향토 담양-사진과 기록”, 전일실업출판국, 1993


사진1)과 2)의 출처 :오종태 사진집 “눈(雪)”, 아방가르드, 1987





  <당선소감>


   "역사적 경험치 투영…사진 위 맥락 재구성"


오종태 작가의 첫 번째 사진집 ‘흑산도와 홍도’(1961)를 우연히 전남대학교 도서관에서 발견하고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로 놀라웠던 기억이 있다. 현재 이 사진집은 전남대학교 도서관에서만 찾을 수 있는 유일본으로서, 오종태 작가가 손수 사진을 붙이고 캡션을 달아 제작한 것이었다. 유물을 넘어 하나의 예술작품이라 해도 좋을 사진집인데, 안타깝게도 보관상태가 좋지 않아 절반 이상의 사진들이 소실되고 책장들은 바스러져 있었다. 약 60년 동안 잠들어 있었던 이 사진집은 폐허의 모습 자체였다. 놀라운 ‘발굴’이면서도 이 사진집이 여기 이대로 있어도 되는지 안타까웠다. (부디 ‘흑산도와 홍도’가 어서 더 나은 환경에서 보관되기를 바랍니다.)

광주의 오종태 작가도 이 사진집의 처지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그의 무등산 사진들은 어느 정도 익숙할지라도, 그와 시절을 함께 했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그를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이 드물다. 광주와 담양의 예전 모습을 단지 ‘기록’했다던 사진가로 남겨져 있었던 이 작가는 역사적 경험들을 재난으로서 겪었던 사람이다. 그가 사진으로 남긴 증언들은 지금의 우리도 역사적 재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 그리고 상처를 겪어버렸다면 다시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 또한 알려준다.

글을 써가는 과정을 돌이켜보니 노트북 앞에서 끙끙거렸던 시간이 반 이상이었다. 오종태 작가의 역사적 경험치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이 사진들을 그저 잘 감상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되었기에, 사진 위에 떠도는 맥락들을 다시 구성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확신을 가졌던 순간들이 있었지만 쓰면서 다시 갈팡질팡 휘청거리기 일쑤였다. 주변의 도움, 우연한 순간과 만남이 없었다면 글의 맥락을 지속적으로 잡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글쓰기는 오로지 홀로 하는 일임은 틀림없지만, 만남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만남이 귀한 시절에, 엄청난 지지를 보내주신 연구자 선생님들과 또래의 유승, 지수 작가님과 하얀 기획자님, 철학과 태준 샘을 비롯한 선배님들과 동료 찬혁, 난주 모두 앞으로도 계속 만나고 싶은 소중한 사람들이다.

앞으로는 평론이라는 무게 아래서 글을 생산해야 하는 처지구나, 무섭고 두렵다. 그렇지만 굉장한 행운이다. 주어진 행운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앞으로 광주의 여성 연구자로서 해야 할 일을 하고자 한다. 지역의 여성으로서 작가 혹은 연구자로 살면 생존이 위협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서로 보살피고 연대하면, 살아남는 일이 곤욕이 되지 않고 조금 더 즐거울 것이라 믿는다. 광주의 많은 작가들, 연구자들이 분투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간신히 걸음마를 뗀다. 거친 문장들을 헤치고 글을 주의 깊게 살펴주신 심사위원님께 정말 감사드린다. 그리고 항상 도움과 응원을 보내주신 심종식 외할아버지, 부모님과 여동생 사라, 전남대학교 철학과의 박구용 지도교수님, 태백미술연구소 선생님들, 그리고 가장 큰 지지자이자 조력자이신 김만석 선생님을 비롯한 ‘광주모더니즘’ 세미나 멤버들께 특별한 감사를 보낸다.




  ● 1991년 광주 출생
  ● 2014년 전남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심사평>


  강한 필연성의 힘…읽는 이의 내면 긴장시킨다


비평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려주는 마땅한 교과서가 없다. 비평이론 운운하는 책도 인문사회과학 이론을 정리해 놓은 것이 대부분이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우선 이해해야 할 것은 단순한 감상문과 본격적인 비평문의 차이다. 내가 어떤 작품을 보았는데, 그 작품은 이런저런 내용이고,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해봤다, 라는 식으로 쓰인 글들을 감상문이라고 한다. 이런 글이 담을 수 있는 가치는 무엇일까. 기껏해야 작품에 대한 1차 정보이거나 글쓴이의 취향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정보는 검색만 하면 금방 알 수 있고, 낯선 필자의 취향을 궁금해 할 독자는 거의 없다. 응모작 중에 절반 정도는 이런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본격적인 비평문은 대체로 하나의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어디서 온 질문인가. 어떤 작품이 내게 건넨 질문이다. 좀 과장하면 이렇게 한 작품과의 만남은 운명적이다. 답은 어디 있는가. 그것도 작품 속에 있다. 그러니 작품을 열심히 들여다 볼 수밖에 없다. 답을 찾으면 어떻게 하는가. 이 작품 속에 중요한 질문과 답이 담겨 있다고 세상에 알려야 한다. 그때 글이 시작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런 글은 강한 필연성(‘왜 이 작품이어야만 하는가’)의 힘으로 전진해 나간다. 이런 글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질문과 답이 작품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다른 인문사회과학 공부에서 먼저 오면, 작품은 이미 정해진 이야기를 하기 위한 도구로 동원되고 만다.

그렇지 않은 한 편의 글이 있었다. 거의 잊힌 사진작가 오종태, 광주의 풍경을 주로 찍은 그가 뜻밖에도 ‘아우슈비츠의 잔해’라는 제목의 사진을 수수께끼처럼 남겨 놓았다. 이 사진을 발견한 비평가는 저 기이한 간극 앞에서 생각에 잠긴다. 작품으로부터 질문을 건네받은 것이다. 그리고 답을 오종태의 다른 작품 안에서 찾아 나선다. 이 모든 과정은 필연적인 것으로 보이고, 그렇기 때문에 읽는 이의 내면을 긴장시킨다. 이런 경우 설사 답을 못 찾아도 된다. 답을 찾는 과정 자체의 치열함이 답이 되기도 하므로. 오랜만에 경험하는 이 비평적 드라마의 힘 앞에서 나는 내 글쓰기를 돌아보게 됐다.

당선작이 되진 못했지만, 양안다 시인을 대상으로 ‘아포칼립스 시대의 연인들’의 징후를 발견해낸 글, 김애란 최은영 등의 작가와 함께 ‘죄책감의 알레고리와 여성-노동의 주체성’을 사유한 글, 신화의 프레임으로 한강 작품을 비판적으로 성찰한 글 등은 비평문의 기본 형태를 갖추고 있는 사례들이었다. 이분들은 이론을 더 정확하게 적용하는 연습, 작품의 표면이 아니라 심층으로 들어가는 연습, 정확하고 힘 있는 문장을 쓰는 연습 등도 더 해야 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 즉 ‘강한 필연성의 힘’이 무엇인지를 숙고했으면 싶다. 나와 함께, 이번 당선작으로부터 배우기로 하자.


심사위원 : 신형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