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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우리가 아는 우리의 모든 것 / 이지은

 

폭염이 나흘째 이어지고 있는 대낮이었다. 모니터의 작은 창에 나타난 것은 5인 분은 넘어 보이는 양의 칼국수였다. 김치 속을 버무릴 때나 쓸 법한 커다랗고 붉은 고무 대야에 가득 담긴 칼국수에는 어떤 고명이나 양념장도 없었다. 배추나 애호박조차 들어있지 않았다. 희끄무레한 면발만으로 채워진 고무 대야만이 화면의 절반을 차지했다. 자, 오늘은 칼국수로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안녕하셨죠? 나무젓가락을 든 명이 대야를 마주하고 자리에 앉았다.

명은 몰라보게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머리카락을 모두 밀어버렸고 군더더기 없던 몸에 살이 제법 붙어 이제 막 출소한 조직 두목처럼 보이기도 했다. 명은 대야에 든 칼국수를 한 가닥도 남기지 않고 모두 먹은 뒤에 널찍한 접시에 쌓아올린 두부 부침을 다섯 접시 내리 먹었다. 양념되지 않은 음식만을 공략하는 콘셉트인 모양이었다. 명의 입가는 깨끗했고 표정도 담담했다. 다정한 목소리로 칼국수의 역사나 맛에 대해 설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방송을 보는 내내 나는 명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온통 흰색일 뿐인 음식들이 그의 입 속으로 천천히 들어가 사라지는 것은 마치 설산을 한 걸음씩 디디며 올라가는 행위나 하나의 정성스런 제례 같으면서도, 멈출 수 없는 폭력처럼 보였다. 명이 디저트라며 삶은 메추리알이 가득한 냄비를 들고 앉았을 때 나는 눈을 감았다. 명의 부고를 들었을 때, 그때 그 영상을 끝까지 볼 걸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기차는 연착으로 밤 열한 시를 넘겨 간이역에 섰다. 눈이 내리는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거리가 가늠되지 않는 곳에 겹겹이 산이 있는지 그림자들이 마구 포개어진 것처럼 보였다. 역 맞은편으로 곧게 뻗은 길을 따라 가다 보면 강이 나오고 그 강을 가로지르는 긴 다리를 건너면 곧 장례식장이 나타날 것이다.

눈발이 붓꽃을 싼 포장지를 톡톡 건드렸다. 붓꽃을 살 때, 역 앞 꽃집에서 틀어놓은 라디오로 닷새 뒤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될 것이라는 예보가 들려왔다. 그러나 눈은 한참 전부터 내리고 있었다. 플로리스트는 그가 먹던 딸기를 플라스틱 팩에 내려놓으며 리본은 무슨 색으로 달아드릴까요? 하고 물었다. 근조 리본을 달아달라고 하자 그가 전지가위를 든 채로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이거 꽃말이 ‘기쁜 소식’인데요? 나는 그런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듯이 웃어보였다. 명이 옆에 있었다면 그딴 거 알 게 뭐야 하고 말했을지도 몰랐다. 플로리스트는 물소처럼 무심한 얼굴로, 가지런하지 못한 줄기들을 뚝뚝 분질렀다. 그가 줄기와 잎들을 서걱서걱 잘라내는 소리가 자꾸 거슬렸다.

명은 어릴 때를 떠올리면 교회 앞 개울가에 수북하게 핀 붓꽃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고 했다. 그 풍경만이 유일하게 아름다웠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명의 목소리는 기이할 정도로 화창한 날씨와 함께 떠올랐다. 피부에 닿던 뜨거운 빛이 마치 질감을 가졌던 것처럼 기억나 자꾸만 외투를 걷어 팔을 쓰다듬어 보았다. 그러자 그의 거뭇거뭇하게 그을린 곧은 등과 히피처럼 부스스하게 기른 머리카락을 한 줌으로 묶고 있던 질긴 풀의 냄새, 평화롭게 헤엄치던 개들의 모습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나는 그때의 우리가 가장 좋았다.

그 시절 스물두 살의 나는 명을 찾아서 훌쩍 떠났다. 일 년이 넘도록 홀로 여행 중이었던 명이 블로그에 기록하던 일기를 읽었기 때문이었다. 명은 다른 남자애들과 달라 보였다. 나는 명이 세상을 이해할 줄 안다고 믿었다. 그저 어렸기 때문에 모든 것이 촉매였고 폭발이었다. 서른이 되면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던 우리에게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어떻게든 흥미롭게 청춘을 살아내고자 노력했던 때였다.

‘내가 나로 살아가는 게 제일 어렵더라.’

명이 어느 절벽에서 찍은 사진 아래 써둔 글귀가 기억났다. 그 사진에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절벽의 끄트머리가 아슬아슬하게 찍혀 있었다. 그 구절을 손바닥에 옮기는 시늉을 해 보았다. 서른이 된 내 손에 적힌 명의 투명한 글은 이제 묘비명처럼 그늘을 닮았고 조금은 치기 어려 보이기도 했다. 어째서 같은 문장이라도 시간에 따라 마음의 다른 지점에 도달하는 것일까. 오래전에 출발한 별빛이 이제야 눈에 부딪히듯 스물두 살의 우리가 이제 와 선명하게 그려졌다.

명의 부고는 자연스러웠다. 나는 명이 보편의 수명보다 훨씬 일찍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확고함에 가까운 생각이어서, 그 생각을 끄집어 내 구체적인 형태로 만져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명이 죽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대학 시절에 함께 다녔던 모임의 선배로부터 들었다. 우리 중 서른을 넘기지 못하고 죽은 사람은 둘이 더 있었다. 하지만 사인(死因)이 동사(凍死)일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며 선배는 황당해 했다. 무슨 산이라더라,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는데. 혼자 올라갔다가 길을 잃었나 보더라. 장례식 갈 사람이 없는 것 같은데. 넌 요새 많이 바쁘냐? 애들이 네가 명이랑 가장 친했다고 하던데. 나는 한꺼번에 쏟아지는 말들을 들으며 마치 선배가 앞에 있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아뇨, 안 바빠요. 제가 가볼게요 하고 급히 대답했다.

출판사 일은 그다지 바쁘지 않았다. 간판에 ‘융 출판사―각종 문서 업무 대행’이라 적혀 있는 스무 평 규모의 작은 사무실에서 일을 했다. 세 명의 직원이 기획과 섭외, 집필과 교정에 인쇄소 관리 업무까지 돌아가며 맡았다. 대학 때 전공한 도서관학이 아무 쓸모가 없는 일이었다. 출판사 이름이 거창해서 매일 조금씩 내가 사라지고 있는 기분마저 들었다.

우리가 주로 하는 일은 인문학과의 논문을 교정해주거나 누군가의 자서전을 대필하는 것이었다. 간간이 대입이나 입사용 자기소개서 의뢰가 들어오기도 했고, 신년사나 고소장, 탄원서를 대신 써준 적도 있었다. 사장이 여러모로 발이 넓었던 덕에 일감은 끊이지 않았고 알음알음 소개를 받아 찾아오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하지만 바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 글들은 일종의 방향과 성격이 모두 정해진 것들이었다. 그래서 의뢰 받은 글을 쓰는 일은 마치 삼각 김밥을 만드는 틀에 재료만 조금씩 다르게 넣을 때처럼 모양과 형식이 같은 글을 복제하는 행위일 뿐이었다. 다들 종잇장처럼 창백한 얼굴을 하고, 소리 지르는 일도 결재 서류를 집어던지는 일도 없이 지냈다. 그런 절정이 없는 일을 하며 아무 무늬 없이 살았다. 내가 세상과 타협한 지점은 과녁으로 치자면 1점짜리 흰 색 선이었다. 아슬아슬하지만 허공을 짚는 일은 아닌.

하지만 가끔은 소리 지르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런 순간은 불현듯 찾아왔다. 명치 아래를 누군가 주먹으로 꽉 누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럴 때 명이 가르쳐 준 방법을 썼다. 조그만 크기의 현수막을 주문해서 새벽에 거리 아무 곳에나 붙이는 것이었다. 나는 골목 어디든 상관없으니 게릴라 형태로 걸어 달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한 번도 확인한 적은 없었다. 현수막 업체에서는 입금만 제때 해 주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들은 외침이 닿는 곳이 어디여야 하는지는 물어도 외침의 종류나 성격에 대해서는 궁금해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청부업자 같기도 했다.

내가 처음으로 주문한 현수막은 ‘K, 난 당신이 누군지 안다’였다. K는 자서전 의뢰를 한 고객이었는데 경기도 소재의 모 대학에서 법학을 강의하고 있다는 50대 교수였다. 그는 출판사 사장과 골프를 치면서 잘 알게 된 사이라며 찾아왔다. 그는 자료 수집을 위한 면담을 시작하자마자 어린 시절 외국에서 생활하던 때의 추억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자신을 유난히 예뻐해 어설픈 솜씨로 불고기나 김밥 따위의 한식 도시락을 싸주시던 독일인 담임에 관한 일화를 꼭 넣어달라고 주문했다. 스웨덴의 국제학교에서 중등 교육을 마치고 미국으로 진학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한 것과 국적을 불문한 여성들로부터 일방적으로 사랑을 받았던 화려한 에피소드를 덧붙였다. 특히 미국 고등학교에서 프롬킹으로 선출된 뒤 학교 전통에 따라 프롬퀸과 함께 블루스를 추었던 기억을 이야기할 때는, 제 손을 잡아보세요 하며 갑자기 나를 일으켜 춤을 추려고 했다. 내가 곤란한 표정을 짓자 다시 가죽소파에 깊숙이 몸을 기대고는 권위적인 표정으로 돌아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러나 자료 조사를 하면서 보니 어느 것도 K의 말과 일치하는 것이 없었다. 스웨덴의 국제학교에는 당시 한국인 재학생이 한 사람도 없었고 프롬킹으로 선발되었던 당시의 사진도 남아 있지 않았다. 무엇보다 한 사람의 자서전에 넣기에는 그가 들려준 일화들이 너무나 사소하고 흐릿했다. 그는 계약금을 냈고 일주일에 한 번씩 나는 그와 면담을 계속해야 했다. 그가 말을 멈추는 경우는 물을 마실 때와 내가 제대로 메모하고 있는지 내용을 확인할 때뿐이었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그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사장은 골프장에서 그런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나는 K가 법학과 교수가 아니라 야간 수업에서 사회복지학을 가르치는 강사라는 걸 알았지만 그 얘기는 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진실이나 객관이 아니야. 고객이 그런 인생을 살았다고 하면 우리는 무조건 믿어주는 거지. 고객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 그래서 이윤을 창출하는 것. 이 두 가지만 기억하도록. 사장은 어린이집 원장 같은 말투로 다정하면서도 확고하게 가르쳐주었다.

그동안 내가 대필해 온 것들은 모두 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곳을 찾아오는 대부분의 고객들은 거짓 인생을 살았고 거짓 학위를 받았다. 내 몸에서 나온 문장들로 그들의 과거와 학력을 부풀려 왔다는 것은 내 자신이 더 잘 알았다. 손끝이 떨리도록 기묘한 삶, 성찰의 단단한 덩어리가 녹아든 종이를 넘기면서 오랜 시간이 지나도 살아남는 고전을 남기는 것은 내 일이 될 수 없었다. K 교수의 자서전 제목은 ‘나의 진실한 삶’으로 정해졌다. 그가 그 제목을 고집했다. 나는 최종 교정을 본 뒤 파일을 인쇄소로 보냈다.

명에게 그의 이야기를 하자, 그는 타인을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들 때 현수막을 한번 걸어보라고 했던 것이다. 나는 이제 와 K를 견딜 수 없는 건 아니라고 말했다. 견딜 수 없는 것은 따로 있는 것 같았는데, 그게 무엇인지 모호했다. 내 안에서 뭐가 자꾸 소멸되고 있는 느낌만이 지속될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명의 말대로 현수막을 주문해 보았다. 잃어버린 누군가를 찾거나 특수학교 건립에 반대하는 게릴라 현수막들 사이에서 내 목소리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숨을 쉬고 밥을 넘겼다. 그러나 편안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명은 내게 결국은 엄마에 대해 써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엄마는 시골의 텅 빈 집에서 홀로 죽었다. 그래서 그녀에 대해 어떤 말을 써 공중에 걸어도 흰 색 룽따들이 펄럭이는 사원의 마당에 나 혼자 서 있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고독한 추모제를 지낼 생각은 없었다. 나는 그녀를 기리지 않음으로써 상실하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의 죽음은 소화되지 않았고, 나는 아무 말도 허공으로 던지지 못했다.

명은 투고를 거절당한 시의 한 구절씩을 공중에 내던지는 마음으로 현수막을 걸기 시작했다고 했다. 명은 출판사가 아니라 한 사람에게만 투고했다. 그가 매달렸던 대상이 누군지 나는 알고 있었다. 명이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뒤부터 오랜 시간 시를 주고받으며 문학 공부를 하던, 다정하고 속 깊은 사람이었다. 명이 그 사람 집 앞 놀이터에서 밤을 새울 때면 가끔 내가 옆에 있어 주었다. 그네에 앉아 그 집 대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창문에서 불이 꺼지는 걸 바라본 뒤에도 명은 일어서지 않았다. 어느 날부터 명은 그가 가는 곳마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녔고 수십 통씩 편지를 부쳤다. SNS에 나온 모든 일상을 캡처하고 그걸 출력해서 가방에 넣어 다녔다. 그 사람은 명을 ‘아날로그적 스토커’라고 명명하며 거리를 두었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명을 내버려두었다.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맹목도 삶을 이어갈 동기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착각했기 때문이었다.

명은 그 남자의 집 우편함과 대문과 담장 벽돌, 담장 너머로 떨어진 목련꽃 이파리에도 글을 남겼다. 그러다가 그에게 보냈지만 되돌아온 시들 한 편, 한 편을 잘게 쪼개어 그 집 주변에 걸도록 현수막을 주문하기도 했다. 그런 뒤 자신의 현수막들을 찾아 사진을 찍어 남겼고 그걸 일종의 여행처럼 여겼다. 나는 명이 보내준 사진들을 퍼즐처럼 맞추며 구절을 연결해 읽는 시간이 좋았다.

‘빈 우주를 홀로 메고, 론리비치로 걸어왔네, 예수가 씻겨주는 발처럼, 가난했던 마음, 바다로 뛰어내릴까 말까, 바람은 나를 떠다미는데, 숨죽여 나를 밀어 올리는, 모래의 힘’.

이 시의 제목이 무엇이냐고 물었지만 명은 답이 없었다. 답이 없을 때는 두 번 묻지 않았다. 아마 명도 마음 안에서 무엇인가가 들끓고 가라앉으며 역동의 계절을 앓고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저, 이십대의 명이 그 계절 속을 무사히 통과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계절이 지나갈 즈음마다 만나서 밥을 먹었다. 나는 명의 담백한 말투를 좋아했다. 그토록 치열하게 아파하면서도 정작 말투에는 고통의 무게를 담지 않았다. 명이 말없이 밥을 먹는 모습도 마음에 들었다. 그는 고요의 정점에 이른 사람처럼 보였다. 어느 날부터 명은 더 이상 시를 쓰지도, 그를 사랑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시인이 될 생각도 없다고 했다. 그저 자기 안의 바닥까지 미끄러지듯 천천히 내려가고 있는 중이라고, 수수께끼처럼 뱉었다. 명은 더 이상 현수막을 주문하지 않았지만 나는 거리를 걷다가 출처가 적히지 않은 현수막을 볼 때마다 명을 생각했다.

그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사는 사람이 되었다는 걸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 그는 이제 안으로 뱉는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명이 가진 모든 언어와 맹목의 에너지는 그의 몸 안으로, 풍선을 부풀어 오르게 하는 호흡처럼 들어갔다는 걸 나는 몰랐다.

꽃을 싼 비닐 포장에 눈이 내리는 소리와 부츠 굽이 바닥을 치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바람은 가라앉았고 눈송이가 굵어졌다. 직선의 2차선 도로 주변에는 편의점이나 식당, 여인숙 같은 건물이 하나도 없었다. 도로 양쪽으로 벚꽃나무들이 줄지어 있고 그 바깥으로는 눈에 표백되고 있는 논밭뿐이었다. 드문드문 서 있는 가로등 불빛마저 빛이 바래 오히려 눈빛이 밝았다. 멸망한 세계처럼 사위가 내내 고요했다.

얼어붙은 붓꽃 다발은 작은 짐승의 사체처럼 느껴졌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일까. 한 송이를 꺼내 눈 위로 던졌다. 그 위로 뜬 눈을 감기듯 소복이 눈이 내렸다. 도로의 점선과 모든 경계는 눈 속으로 사라져 규칙적인 간격의 벚꽃나무들만 아니었다면 사방의 방향을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더는 누구의 부고도 없는지 같은 방향으로 가는 차가 한 대도 없었다. 울 코트에 달라붙은 눈은 전기밥솥에 오래 남아 있던 밥찌꺼기처럼 보였다. 꽃 한 송이를 더 버렸다. 손은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위를 올려다보았다. 어두운 허공에서 베개의 솜이 터지듯 갑자기 눈송이들이 나타나는 것 같았다. 꽃 한 송이를 버리고 또 버리며 걸었다. 명의 얼굴이 떠올라 마음이 자꾸 무거워졌다.

명이 머물고 있던 곳은 ‘꼬따오’라는 섬에서도 인적이 드문 아오륵 비치였다. 공항에서 그곳까지 버스와 페리, 썽태우를 번갈아 타며 가니 꼬박 열다섯 시간이 걸렸다. 그곳으로 가겠다고 적은 내 메일을 읽었는지 확인하지도 못했다. 다만 그의 블로그에 있던 매일 매일의 일기에서 찾아낸 여정이 그곳에서 바뀌지 않은 지 한 달이 넘었기 때문에 여전히 그 섬에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명은 한 곳에서 오래 머무는 방식의 여행을 했다. 일 년 동안 그가 간 나라는 채 다섯 곳을 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공동욕실이 딸린 가장 싼 도미토리에 묵었고 현지인이 만드는 거리의 음식을 먹었으며 꽃이 핀 담 아래 앉아 동네 사람들과 담배를 피우며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나는 에어컨 대신 천장에 굵고 긴 팬이 돌아가며 바람을 일으키는 덥고 작은 방갈로를 구했다. 나무를 덧대어 만든 삐걱대는 발코니에는 낡은 해먹이 하나 걸려 있었다. 오른쪽으로 몇 걸음 떨어진 방갈로에는 영국에서 온 남자 두 명이 묵었다. 커튼을 치지 않은 그 방의 창문으로 그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그윽한 눈길이 고스란히 보였다.

명을 마주친 건 다음날 낮이었다. 아주 작은 비치였기 때문에 머무는 사람들의 얼굴은 금세 눈에 익었다. 여행자들과 말을 섞지는 않았다. 내 표정이나 몸짓이나 말투 어딘가에 내게 찍혀 있던 낙인이 타인들에게 보여서 그들이 흘리는 냉소에 얼어붙을까봐 주저하던 때였다. 그저 명을 보고 나면 마음이 좀 환해질 것 같다는 생각만으로 걸었다. 경사진 내리막길의 좁은 골목 끝에 탁 트인 바다와 이백 미터 남짓 이어진 모래밭이 비치의 전부였다. 양쪽 끝은 바위가 포개어져 벼랑을 이루고 그 위에 작은 레스토랑과 카페가 있었다. 명은 비치파라솔이 드리운 그늘 아래에서 몸이 여윈 개들과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을린 얼굴과 자연스러운 몸짓이 현지인처럼 보여 그를 지나칠 뻔 했다. 나는 한 쌍의 비치 체어 중 그의 옆에 놓인 빈자리에 앉았다. 세 마리의 개들 중 갈비뼈가 도드라진 한 마리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기어코 왔네. 명이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모임의 소식을 전했다. 준영이는 죽었어. 철학과 애? 응. 결국 죽었구나. 결국 죽었지. 극복하지 못했어. 명이 아무것도 더 묻지 않아 나는 모임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무심하고 길게 얘기했다. 명은 그저 먼 바다를 바라보며 내 말을 듣고 있었다.

모임에서 우리는 그저 하루하루, 존재의 당위성을 확신해야 하는 처지였고 서로의 비슷함에 기대려는 마음으로 만났지만 서로에게 절박하지는 않았다. 사실 그 무엇에도, 절박할 수 없었다. 우리는 모여서 상처에 대해 이야기하던 사람들이었다. 서른 이후의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우리만의 세계가 있었다. 사람들은 젊음을 화사함, 가능성, 아름다움과 등가로 쳤다. 이 시기를 지나가면 그때가 그저 좋았던 줄 알 거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 말들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담담하게 모든 어두운 것들을 다루는 용기 같은 것을 품었다. 타인의 상처를 상처로 덮다 보면 슬픔이 모호해지는 지점이 보였다. 명과 나는 그 지점 안에 몸을 구기고 들어가 겨우 숨을 쉬었다.

명은 신학과 학생이었다. 싸우려고 들어갔어. 왜 신학을 택했느냐고 묻는 내게 명은 그렇게 말했다. 명은 종교 단체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며 유년기를 보냈다. 부모는 그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성경 바깥의 것을 배우면 악마의 물이 든다고 했다. 그는 열세 살 때 성탄절 이브 행사에 쓰일 소품들 중에 여성 가발을 하나 훔친 적이 있었다. 예배를 알리는 종이 울리고 폭설이 퍼붓는 밤이었다고 했다. 창밖으로 교회 지붕에 달아놓은 색색의 전구들이 발하는 빛이 고스란히 들어오는 다락방이었지. 가발을 쓰고 거울에 나를 비춰 보는 순간 나는 그게 내 진짜 삶이라는 걸 확신했어.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터득하게 되는 거더라, 그런 건.

명은 교회의 불빛이 멀어지고 합숙하는 작은 집들의 지붕이 어두운 테두리로 남을 때까지 무작정 뛰었다. 가슴 안에서 어떤 바람이, 자꾸 도망가라고 외치더라. 명은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 바람이 된 기분으로 명의 이야기를 들었다. 명이 기억하는 다음 순간은 아득하게 컴컴한 어둠 속에서 웅얼거리는 기도 소리와 울음, 분노의 목소리가 뒤엉켜 한꺼번에 귓속으로 파고 들던 시간이었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아버지의 기도 소리가 유독 선명하게 들려왔지. 내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고 있었어. 악마에 물든 아들을 구원해 달라고. 그 기도들은, 내 마음에 구멍을 하나 냈지. 작고 깊은 구멍이야. 보여? 하고 명은 가지런한 갈비뼈들 사이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새까맣고 50원짜리 동전 크기만 한 점이 있었다. 그건 정말 구멍처럼 보여서 나는 손가락으로 몇 번 꾹 눌러보기도 했었다.

명은 그때부터 기도를 열심히 하며 어떤 장난도 치지 않았다고 말했다. 공동체 안의 여자아이에게 보란 듯이 사랑 고백을 해서 모두를 안심하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혼자 있는 시간에는 마음에 난 작고 깊은 구멍을 통해 자기 안의 다른 소년을 가만히 끄집어내어 어루만졌다. 명은 그 소년이 때가 되어 자신을 찢고 튀어나오는 날을 기다렸다. 그리고 몇 년이 흐른 뒤 모두가 평화롭게 잠든 밤에 공동체에서 홀로 도망쳤다.

그 뒤로 명은 원하는 대로 살았다. 머리를 길게 기르고, 곱게 화장을 하고, 하이힐을 신었다. 경멸당하면서도 사내들을 사랑하고 고백했다. 나는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몇몇 남자 선배들의 표정을 잊지 못했다. 그 표정들은 내게도 간접적인 상처가 되었다. 개인의 간절한 마음이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일에 예민했기 때문이었다. 사랑받지 못하는 것은 모두 내 이야기 같았다.

솔직하게 살지 않는 게 더 비루한 거 아니야? 명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명의 사랑 이야기를 아오륵 비치의 파라솔 그늘 아래에서 들었다. 햇빛이 파도 위로 잘게 부서지며 반짝이는 오후에 들은 이야기였기 때문에 사실 우리는 더욱 쓸쓸해졌다. 명은 마치 내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그 모든 말들을 아껴온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많은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다시 들었고, 또 들려달라고 졸랐다. 명의 차분한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심심할 때마다 바다로 들어갔다. 바닷물은 볕에 데워져 미지근하고 눈이 아리도록 빛났다. 개들이 따라 들어와 헤엄을 쳤다. 새파란 물고기 떼가 일렁이며 어지러이 물러났다. 나는 두 달 동안 매일 명을 찾아갔다. 그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우리는 수박주스를 마시고 볶음면을 먹고 담배를 피웠다. 개들은 파라솔이 드리운 그늘 아래 우리와 함께 낮잠을 잤고 함께 바다에서 헤엄을 쳤다. 나는 헤엄을 치다가 힘이 빠질 때면 개들 중 한 마리의 등에 머리를 대고 누워 바다 위를 둥둥 떠다녔다. 머릿속에 아득하게 그리운 것들이 형체 없이 떠올랐다가 흩어지곤 했다.

명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긴 머리를 바닷바람에 말리는 동안 시를 썼다. 시에는 개와 파도와 바람과 이방인들이 등장했다. 이렇게 매일을 살면 무엇에도 날이 서지 않겠구나, 그런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 날로 자신을 베고 타인을 벨까 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때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나는 내가 이해하고 싶은 사람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을 맞으며 아름다운 풍경에 저항하려는 마음을 내버려 둔 채로.

나는 엄마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몸으로 깨달았다. 그녀가 남들 앞에서만 선심 쓰듯이 안아주는 품에는 언제나 주먹이 서너 개 들어갈 만큼의 빈 공간이 존재했다. 내가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엄마에게 군더더기라는 걸 나는 받아들였다. 엄마가 나를 버리고 혼자 집으로 돌아갈까 봐 외출할 때마다 모든 촉을 세우고 살았다. 외할머니 댁이 있는 먼 지방에 도착하면 나는 언제나 엄마의 자동차 열쇠를 주머니에 넣었다. 외할머니는 우리를 반가워하지 않았다. 고추장이나 된장, 텃밭의 채소 따위를 챙겨주는 일도 없었다.

나는 입양아가 아니었고 엄마도 계모가 아니었으므로, 나는 모녀 사이의 거리감을 보편적인 편견으로도 해석하지 못했다. 그것은 모성의 문제가 아니었다. 경계의 문제였다. 나는 타인을 바라보듯 나를 보는 그녀의 교묘한 방임과 냉대 아래에서 묵묵히 싸웠고 내 균열을 목도하며 자랐다. 차라리 맞아서 멍이 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친구 중에는 엄마에게 자주 맞는 아이가 있었다. 트로피나 옷걸이, 신발주걱으로 맞은 자국은 모두 크기와 깊이가 달랐고 우리는 그걸 구별할 줄 알았다. 그 친구는 엄마에게 맞고 싶어 하는 나를 때리며 울었다.

어린 내가 칭찬 받으려고 수건을 개어 놓거나 설거지를 해 두면 외출에서 돌아온 엄마가 수건을 다시 펼쳤다가 접고 그릇을 소리 내어 닦았다. 볶음밥이나 계란말이를 만들면 엄마가 밤에 그것을 프라이팬에서 긁어내 버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 일기를 읽지 않았고 첫 생리를 축하하지 않았다. 나는 엄마를 포함한 세계로부터 멀어졌다. 그 세계를 신뢰할 수 없어 책 속으로 파고들었다. 가상의 세계에서는 아이가 홀로 세상과 맞서는 것이 가능했고, 이야기의 시작과 끝이 분명하게 존재해서 인과관계도 뚜렷했다. 마법사들은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를 알아주었다. 명랑하고 밝은 세상으로 가는 티켓은 언제나 마음이 외롭고 홀로 지내는 아이에게 우선적으로 주어졌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까지 매일매일 엄마 얘기를 했다. 아주 가까이에 있었지만 가장 먼 곳에 있었던 엄마에 대해 혀에서 쓴 냄새가 날 때까지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명은 푸르게 빛나는 바다의 먼 끝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마치 문장의 무게를 재고 있는 것처럼. 같이 헤엄치기를 기다리던 개들이 지친 표정으로 발목을 바닷물에 먼저 적시며 우리를 바라볼 때까지 오랫동안. 명은 그 시절의 시간이 자신을 밀어올리는 힘으로 좀 더 오래 살아갈 수 있겠다고 말했다.

명을 떠올리면 그때의 표정이 먼저 생각난다. 결이 없는 두부처럼 무심하고 고요하던. ‘먹방’에서조차 명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나는 명이 바다를 바라보던 방식으로 화면 너머에 있는 명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내가 동경하던 명이 아니었다.

우리는 우리가 알던 그 누구도 아니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몇 년 만에 엄마를 보러 가는 것이었다. 엄마는 내가 성인이 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아빠와 이혼하고 시골에 내려가 살았다. 그들이 내게 한 마디 상의도 없이 헤어졌다는 사실보다 엄마가 그토록 대하기 어려워하던 외할머니 곁에 살기로 한 결정이 더 놀라웠다. 엄마는 외할머니 댁 뒷집에 세를 얻어 살았다. 마루에 앉아 있으면 외할머니 댁 담장 너머로 주홍빛 불이 켜지는 순간이 다 보였다. 끼니 때마다 밥 짓는 냄새가 흘러나왔다. 어떤 프로그램을 보고 있고 언제 코를 골며 잠이 드는지도 모두 알 수 있을 만큼 지척이었다. 엄마는 그 집에 들어가지는 않으면서 온종일 마루에 앉아 멍하게 그곳을 바라보았다.

며칠을 데면데면하게 머문 뒤 떠나던 날, 나는 엄마에게 가만히 물어 보았다. 나한테 왜 그렇게 차가웠어요? 라고. 진심이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반전 같은 걸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저 그 순간에는 어쩌면 엄마가 말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엄마에게 설득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내가 어떤 기분일지 엄마는 알 수도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그러면 납득이 가능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엄마는 잘못 사온 장난감을 바라보듯 나를 힐긋 바라보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그런 적 없다, 라고. 내가 줄 수 있는 사랑은 다 주었다. 엄마는 그렇게 믿었고, 그 집에서 몇 년을 더 살다가 홀로 죽었다.

꽃들은 존재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눈이 덩어리째 쏟아졌다. 바람이 누운 채로 불어 수평으로 흰 벽을 쌓아올리는 것 같았다.

벚꽃 나무가 늘어선 길이 끝나고 시야가 트이면서 폭이 넓고 검은 강이 나타났다. 강 너머에서 건물의 노란 불빛 하나가 눈발 사이로 희미하게 빛났다.

명과 내가 가장 환했던 순간은 오래전에 지나가버렸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상실될 것들뿐이다. 타인을 이해하는 일, 사랑 받고자 애쓰는 일들로부터 나는 이미 멀리 와 버렸다. 그저 묘비처럼 오래도록 서서 빈손으로 눈을 맞는 것만이 내게 어울리는 위로처럼 여겨졌다.

눈송이들이 자꾸만 덧없이 강으로 몸을 던지는데도, 밤은 새까맣게 깊었다. -끝-




  <당선소감>


   "쥐어짜지 않고도 좋은 글 쓰는 작가로 남고 싶어"


좀비 드라마를 보다가 문득, 그 좀비들 중 한 명을 집에 데려오고 싶다고 생각했다. 물을 데우고 컨디셔너를 듬뿍 써 머리를 박박 감긴 뒤 보송한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면, 크럼프 댄스를 추듯 꺾인 관절과 악의만 남은 표정이 풀어지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면 달이 환한 밤에 왠지 부드럽게 몸을 꺾는 그를 발견하고 옥상에서 손을 흔들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서로의 세계를 건너가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늘 드러난 표정 뒤의 이야기가 궁금한 사람이라서 이방의 세계 속으로 뛰어들 준비를 하고 살아간다.

글을 쓰는 일은 아직 희열도 고통도 없다. 자연스러운 노동으로 여기고 있다. 내가 쥐어짜서 쓰면 독자도 쥐어짜며 읽을 것 같다. 언젠가는 뼛속 칼슘까지 탈탈 털어 문장을 쓰는 날이 오겠지만, 주변 사람들의 얼굴과 감정을 훔치지 않고 스스로 내공을 쌓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천재나 영재로 불릴 나이는 넘었지만 노력하고 성장하는 사람으로 불릴 기회는 내게도 있어 다행이다.

이 수상 소감을 읽으며 씁쓸하게 다시 여백의 종이를 마주할, 나처럼 방구석에서 홀로 글을 써 온 모든 이들에게, 감히 안부를 묻는다. 곧 함께 걸어요. 힘내요. 제 글을 믿어 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내면이 건강한 작가가 되겠습니다.



  ● 1982년 경북 청송 출생.
  ● 안동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현대문학 석사. 
  ● 2019년 제6회 한낙원과학소설상 당선.


 

  <심사평>


  안정된 문장·긴밀한 서사에 좋은 점수


예심을 거친 9편 가운데 남겨진 작품은 4편이다. 모두 일정한 수준의 문장력과 구성력을 보였다. ‘모나리자’(신나리)는 인공지능 시대 화가의 운명을 예견한 SF로 인물과 사건 서술에 있어서 밀도가 다소 떨어졌다. 사회 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청년의 꿈과 좌절을 우주에 대한 공상과 병치한 ‘플라이 바이’(배은정)는 소설적 발상의 참신함이 돋보였으나 처음과 끝의 서술을 더 단단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사프나’(김호)는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라다크 히말라야에 이르는 여로를 구체적인 과정을 통해 서술하였으나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죽은 이주여성의 삶이 다소 모호하게 처리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우리가 아는 우리의 모든 것’(이지은)은 다른 3편의 작품에 비하여 안정된 서술을 주목하게 하였다. 등장인물들이 상처와 고통을 서로 이해하고 감응하는 과정이 구체적인 세목을 통해 잘 그려졌고, 성 정체성을 고뇌하는 인물 창조라는 측면에서도 강점을 보였다. 글쓴이가 서사를 장악하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우리는 소재나 기법의 새로움에 이끌리기보다 안정된 문장과 긴밀한 서사에 좋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었다. 가열찬 정진을 기대한다.

 

심사위원 : 정찬, 구모룡, 정영선, 김경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