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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백신이 되는 증언과 이야기 유물론 - 김숨론 / 강희정

 

1. 각오하라

다시 쓰기 위해서는 각오가 필요하다. 양피지나 화선지, 종이가 아니어도, 커서를 움직여 타이핑된 문자들을 삭제하거나 변형하고 대체하는 데도 그렇다. 기록된 것에 일정한 변형을 가하는 것은 기록된 것을 왜곡할 위험이 있고 힘겹게 희미한 언어로 나타날 수 있었던 문자를 어둠의 장막으로 가려버리는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만큼 이미 진술된 것을 다시 쓰는 데에는 그 기록이 다루는 역사 그리고 그것이 작성된 시공간과 다시 쓰이는 동시대를 모두 아울러야 하는 부담을 다시 쓰는 존재가 감당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설령 다시 쓰여야 할 기록이 고쳐 쓰고자 하는 ‘나’에 의해 작성된 것이라 해도, 단순한 자구 수정이나 오탈자, 비문을 바로 잡는 수준을 넘어서 있는 것이라면 기록된 것을 다시 쓰는 일은 제도적, 미학적, 정치적 차원에서 심대한 파문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한 소설 텍스트를 다시 고쳐 쓰는 일은 그것이 원래 처해 있던 물질적 조건들에 동요를 일으킨다. 만약 그 텍스트가 ‘책’으로 출간된 것이라면, 다시 고쳐 쓰기 이전에 출간된 것과 고쳐 써서 출간된 것 사이를 구분하는 것은 결코 손쉬운 일이 아니다. 저 텍스트를 동일한 것으로 다룰 수 있는지의 문제에서부터 출판시장 등 자본과 결부된 제도적 균열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이는 확정된 원본에 대한 동의 체계를 흔들게 되며, 작가의 분열이나 작가의 위치를 심문하도록 이끌기까지 한다. 달리 말해, 어떤 시기의 작가가 더 확실한 ‘작가’가 될 수 있는지와 같은 미학적 문제들을 산출한다. 지배적 서술자/발화자가 불투명한 ‘문제’가 될 때, 고쳐 쓰인 텍스트는 수정이나 왜곡의 차원이 아니라 주체의 생산/구성이라는 차원으로 확장된다는 점에서 간단하게 정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다시 고쳐 쓰기가 연루되어 있는 제도적, 미학적, 정치적 차원은 고정된 텍스트를 뛰어 넘어, 서로 다른 신체적 연결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다시 고쳐 쓰기가 ‘흔적’을 남기는 행위라면, 비록 그것이 ‘나’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해도 텍스트에는 서로 다른 신체가 교접한 ‘자국’을 남기기 마련이다. 하물며 서로 다른 텍스트를 고쳐 쓰는 일이라면 두말할 필요가 없다. 물론 연결된 신체는 서로를 알아볼 수도 있고 서로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지만, 이들은 하나의 텍스트에 여럿으로 존재하면서 이웃들로 어우러진다. 즉 소설에서의 다시 고쳐 쓰기는 텍스트를 신체와 언어의 누적 그리고 이 양자를 상호적 연속체로 조직하는 일과 다르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을 통해, 증언을 통해, 보태지고 이어지는 텍스트, 나의 자리에 초대함과 동시에 너와 연루된다는 이중화된 감각이 한 몸으로 이루어지는 순간, 그곳은 그간 특수하고 고착화된 ‘증언’이 새로운 몸으로 펼쳐지는 장소로 고안된다.

김숨의 소설을 읽는 일에 각오가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김숨이 전하는 ‘각오’는 ‘나’의 확실성과는 상관 없다. 오히려 나의 취약성을 감각하는 것에 가깝다. 다시 고쳐 쓰기가 텍스트의 고정성과 완전무결함에 도전하는 것이 듯이, 다시 고쳐 쓰기를 통해서 ‘나’는 수없는 ‘너’를 초대하고 환대하는 역량인 ‘취약성’을 선물로 할당받는다는 것이다. 김숨의 소설이 동시대적일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서로의 불완전함을 밑천으로, 서로의 신체를 의지 삼아, 너의 고통과 아픔을 나의 성대에 허용하고, 너의 목소리를 통해서 나의 생존과 삶의 오솔길을 감각하는 기회는 흔치 않은 것이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대리’하는 것을 넘어서, 증언과 증언의 옆자리에서 증언을 잇고 연결하는 해시태그 신체이자 언어인 김숨 혹은 김숨 소설에 적극적으로 연루되어야 한다.


2. 착근되지 않는 삶이 변용적인 것을 만든다

김숨은 이상문학상과 두 등단작을 개작한 <나는 나무를 만질 수 있을까>(2019)를 출간함으로써, 자기완결적인 자아병(=유전병)이 일으키는 제도적, 미학적, 정치적 질환의 백신을 제공하는 데 이른다. 근대 이후 삽시간에 활성화된 자기완결적 자아가 무한증식하는 자본주의 체제와 짝패로 묶인 이상, 이러한 자아가 외부세계를 잠식해 쌍생아를 생산하는 근친교배의 고리를 끊어내는 백신으로 주어진 텍스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김숨 이전에, 요산 김정한이 아주 희미하게나마, 윤정모가 절절하게 가시화함으로써, 이들의 텍스트는 (후)식민화에 정박된 한국사회의 환부를 드러내는 진단시약으로 제시된 바 있다. 달리 말해 이들 소설은 일본군 위안부와 미군 위안부라는 두 가지 전쟁범죄에 대한 소설적 증언을 남겨둠으로써, 탈역사―바이러스로부터 면역될 수 있는 길을 마련해둔 것이었다.

그러나 우선 김숨은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를 도모한다. 김숨의 ‘개작’은 자신의 텍스트를 ‘증언’의 자리에 두는 방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실제로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지만 살리고 싶고, 살려야 한다”는 김숨의 후기는 말 그대로 증언이 이루어지는 현장에서 종종 나타나는 ‘수치심’과 구분되지 않는다. 텍스트에 대한 부끄러움 혹은 수치심을 드러내는 글쓰기는 원래 비평의 자리였다. 그럼에도 김숨은 다시 고쳐 쓰기를 통해 시효가 만료되었다고 간주하는 확정된 텍스트에 대한 법적, 제도적 규정을 넘어 자신의 텍스트를 증언대로 올리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즉 김숨에게 다시 고쳐 쓰기는 증언과 식별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김숨은 수치를 무릅쓰고, 아니 수치를 반복하면서, 다시 고쳐 쓰기를 수행한다. 요컨대 다시 고쳐 쓰는 과정이 증언의 불안정성을 강조하는 게 아니라, 증언과 연루된다는 것을 강조하게 된다는 것이다.

증언이 어떤 시효만료가 선고된 것을 되살리는 호흡장치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 텍스트에 대한 부끄러움 혹은 수치는 텍스트에 기록된 것만을 살리는 데 머물지 않는다. 외려 다시 고쳐 쓰기로서 증언은 텍스트에 기록되지 않은 ‘말’을 텍스트로 불러온다는 점에서, 증언으로 ‘규정’되지 않은 말들을 텍스트 사이에 잠복시킨다. 그런 점에서 차라리 김숨의 텍스트에 등장하는 증언은 텍스트로 ‘기술’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증언에 잠복해 있는 침묵하는 ‘증언들’을 살리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김숨이 수치를 거듭하면서 채택한 다시 고쳐 쓰기의 서사 전략은 ‘창작’이라는 문학제도의 규범이나 규칙보다는 지배적 역사 인식 내부에 주어진 적이 없는 일본군 성노예 여성들의 목소리가 펼쳐지거나 잠재할 수 있도록 한 원리이다. 소설적 ‘허구’가 역사로 ‘활동’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김숨의 서사 전략에 있는 셈이다. 따라서 <나는 나무를 만질 수 있을까>는 김숨 자신을 역사화하고 동시에 소설에 기입되지 않았던 목소리를 들이도록 만드는 방식으로 이야기된 것이다. 달리 말해, 소설에 대한 증인으로서 김숨 자신과 텍스트에 대한 증언으로서 다시 고쳐 쓰기가 이루어진 것이다.

다시 고쳐 쓰기는 원본에 수정 혹은 변형을 가함으로써 제2의 텍스트를 만들어 내고, 이때 새롭게 생성된 텍스트와 원본 사이에는 반드시 시차가 발생하게 되므로 원본은 이미 그 자체로 ‘역사’이다. 문제는 이러한 개작 과정은 원본을 기원으로 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일 터이다. 편의상 앞서 출판된 것이 있다고 해도, 최종적인 텍스트를 기원으로 삼아야 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러한 사정은 기원의 자리를 불투명하게 만든다. 오히려 주목해야 하는 것은 동일하다고 간주되는 텍스트 사이의 ‘시차’가 더욱 중요하다. 시간적 낙차 속에서 이루어진 다시 고쳐 쓰기는 기원의 자리를 불식시켜, 계기적 시간이라는 인식론에 함몰되는 대신 역사를 동시대적인 것으로 전환하는 전략으로 활용된다. 달리 말해, 텍스트로 먼저 출간된 소설에서 인물의 정체성이 할당되었다가 다시 고쳐 쓰게 되면서 그 정체성을 지웠다면, 역사에 대한 감각을 다르게 전환할 것을 요청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가령, 2015년에 발표한 ‘뿌리 이야기’에 등장하는 ‘나’의 고모할머니인 “남귀덕”이 “종군위안부”였다는 사실이 2019년의 개작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또 ‘나’의 애인이 2015년에는 “입양아”로 제시되지만, 2019년에는 이러한 사실이 나타나지 않는다. 다시 고쳐 쓰면서, 인물을 상징하는 명명법을 지우는 대신, 재일조선인 여행가이드 “사마코”를 내세움으로써 역사의 폭력으로부터 강제되는 ‘피해자 정체성’의 구조를 비켜나간다. 왜냐하면 북해도 료칸에서 목숨을 끊는 사마코는 역사로부터 이루어진 폭력의 구조가 정체성을 통해 반복 강화된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그 모든 폭력이 명명법의 ‘표지’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날카롭게 들여다보았기 때문이다. 개작의 과정에서 피해자들의 이름을 지운 건 은폐가 아니라, 폭력을 드러내기 위함인 것이다.

김숨은 ‘뿌리 이야기’(2015)를 고쳐 쓰면서 귀덕이 정부에 공식적으로 등록되지 않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이들에게 제도적으로 주어진 이름을 호명하지 않는 것에서 더 나아가 이름을 거부하도록 한다. 이들에게 이름은 “알고 싶지 않”은 것일뿐더러 이름을 통해 반복되는 역사적 폭력을 문제적인 것으로 삼는다고 할 수 있다. 대신 김숨은 이들에게 이름 대신 ‘착근 불가능’이라는 속성을 부여한다. 어디에도 뿌리내릴 수 없다는 착근 불가능의 감각은 살아있는 모든 생명이 공유하는 ‘취약성’과 같은 것이며, 동시에 ‘뿌리 이야기’(2015, 2019)에서 뿐만이 아니라 김숨이 등단 이후부터 지금까지 작품 속에서 주요하게 다루고 있는 인물들의 공통된 특성이기도 하다. 착근 불가능이라는 생명 공통의 취약성은 더욱 다양한 인물과 삶의 양식들을 불러 모은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외에도 입양아, 재일교포, 그리고 “살면서 이사라는 걸 한 적이 한 번도 없”는 ‘나’ 역시도 스스로를 단순하고 깊숙이 뿌리내리는 ‘심근성’이 아니라 태생적으로 뿌리 뻗음이 얕은 ‘천근성’이라 지각함으로써 착근 불가능성을, 곧 취약성을 공유하는 주체로 제시된다.

편의적 명명을 거부하고 자발적으로 착근 불가능이라는 취약성을 감싸 안음으로써 공백으로 남은 이름의 자리를 대신해서 채우는 것은 차마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불분명하고도 무수한 목소리들이다. <한 명>(2016)의 ‘그녀’는 316개의 증언하는 목소리들이 포개지고 이어져 만들어진 것이다. 316개의 목소리와 말들은 모이고 이어져 마침내 ‘풍길’이라는 한 사람의 서사를 구성한다. ‘풍길’은 <한 명>이라는 작품 속, 살아남은 ‘또 다른 한 명’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역사 수정주의가 횡행하는 동아시아 신냉전의 구도 위에서 위태롭게 자리잡은 목소리라고 할 수 있다. 즉 김숨에게 역사는 무수하면서도 상이한 기억들의 ‘집합적 쓰기’를 통해 성립되는 것임을 의미한다.


3. 백신(Vaccin) 개발자들 : 증언이 세계를 구한다

<한 명>에서 나타나는 목소리는 각각의 파장 위에 겹쳐지고 덧씌워질지언정 결코 하나의 동일자적 음성으로 합쳐지지는 않는다. 각각의 목소리는 고유의 진동수를 유지한 채 공존하며 흡수되거나 포획되지 않고 평행선을 그리며 뻗어나간다. 이들은 저마다의 경험을 끄집어내 발화하고 증언함으로써 비워진 ‘그녀’의 이름 자리에 스스로를 위치시킨다. 그 결과 ‘그녀’의 이름은 시시각각으로 바뀌며 그의 성대를 타고 흘러나오는 무수한 목소리로 변용된다. 목소리에 따라 이름뿐만 아니라 일시적으로나마 몸의 주인까지 달라진다는 점에서 ‘그녀’는 무규정적인 것이라기보다 ‘변용적인 것’으로서 신체가 된다. 목소리의 주인에 따라,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변용태로서의 주체는 한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매 순간 모습을 바꾸며 경계를 넘나든다. 변용적인 것이 되는 삶은 그동안 당연하게 주어진 ‘나’를 이루는 모든 것을 의심하게 한다는 점에서 위협감과 공포감을 야기할뿐더러, 스스로를 취약하고 불안정한 존재로 내모는 위험성도 감수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이 소설에서는 변용적인 것이 고립을 벗어날 수 있는 힘으로 감지되도록 만든다.

이 감지조차도 은유적인 것이 아니라 신체적으로 엄습한다. 왜냐하면 그저 의미 없는 바람 소리에 불과하던 공기의 흐름이 하나의 ‘목소리’가 되기 위해 진동하는 성대의 신체적 작용을 반드시 거쳐야만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목소리 역시 엄밀한 의미에서 신체의 일부인 것이다. 이 소설에서 인용된 각각의 말 위에 새겨진 ‘미주들’은 말의 출처를 밝히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의 텍스트를 이루는 316개의 증언들이 각기 다른 목소리이자 신체들이라는 사실을 드러내 보여준다. 몸들은 서로 이웃하고 부대끼면서 서로를 의지하고 지탱하는 지지대가 되고,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순간”에 “잡아 끌어올리는 손”들이 되어준다.


①이렇게 죽는구나 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순간에 격양된 소리가 들려왔다.

“잡았다!”

그녀의 머리끄덩이를 잡아 끌어올리는 손들이 있었다.

―<한 명>, 255쪽.


②그녀는 그이를 만나러 가는 것이 금복 언니를 만나러 가는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해금을, 동숙 언니를, 한옥 언니를, 후남 언니를, 기숙 언니를…….

그이를 만나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하나? 보고 싶었다는 말부터 해야 하나? 아니면 나도 만주 갔다 왔다는 말부터…….

―<한 명>, 256쪽.


③그이가 입원해 있는 병원은 우연히도 여자가 정기검진을 다니는 대학병원이었다. 그녀는 그이가 자신과 다른 도시에 살고 있는 줄 알았다. 그이가 입원한 병원 또한 다른 도시에 있는 줄 알았다. 그렇게 가까이에 그이가 살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했던 탓에 허탈감마저 들었다.

―<한 명>, 256쪽.


위의 세 가지 인용문에 따르면, 단일적인 존재로 고정되거나 환원되지 않고 공존하는 목소리들은 발화하고 증언하는 행위를 통해 몸의 주인을 바꾸고, 몸이 자리한 위치를 옮기며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다양한 몸을 만드는 것을 보여준다. 첫 번째 인용문은 ‘나’ 혹은 ‘그녀’의 삶과 죽음이 홀로 내동댕이쳐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그녀들의 삶과 죽음에 연루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취약한 생명을 유지하고 지속시키는 것은 ‘나’ 혹은 ‘그녀’가 아니라 또 다른 ‘그녀들’을 폐기하지 않고 신체화된 기억을 함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된다. 두 번째 인용은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이 삶으로 펼쳐지기 위해선, 자신의 또 다른 신체들을 만나야 가능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마지막 남은 일본군 위안부 “그이”를 만나는 일이 다른 모든 ‘언니들’과 더불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세 번째 인용은 나 혹은 그녀에게 “그이”가 아주 먼 곳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바로 이웃한 곳에 있었음을 보여줌으로써, 그녀의 몸과 그이의 몸이 서로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감각하도록 만든다.

그녀와 그이 혹은 언니들의 몸은 외부적 조건에 의해 구획되거나 분류되는 것이 아닌, 자발적으로 변화하는 양태의 몸들이다. 말 그대로 어느 한 자리에 지속해서 머물거나 소속되지 않기 때문에 ‘착근 불가능’하고 변용적이다. 이는 실존적 불안을 영원히 떠안고 살아야 한다는 위험을 동반하지만, 동시에 기존의 관습적 체제로는 포용할 수 없었던 존재들도 ‘주체’로서 스스로 삶의 양식을 생성하고 고안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대안적이다. 더욱이 불안을 공통분모로 하여 각각은 모두 개별적이고 독립적이지만 이들과 관계되지 않고서는 ‘나’ 역시도 있을 수 없음을 감지함으로써 책임과 의무의 범주를 보다 포괄적으로 확장하는 윤리적인 신체성을 획득한다. 나 혹은 그녀의 수많은 변용들 혹은 수많은 언니들의 변용으로서 나 혹은 그녀의 신체성이야말로 역사적 폭력과 동시대적 폭력의 구조를 비켜서는 방식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증언 신체는 여럿으로 엮이고 휘말리되 하나의 목소리를 보존할 수 있는 변용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즉, 현실적인 상황에서 동아시아의 역사 반성을 지탱하는 것은 이러한 증언이 수정주의의 전횡을 저지하는 마지노선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동아시아의 문제로 한정되는 게 아니라,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연루되어 회피할 수 없는 윤리적 명령 앞에 서도록 만든다. 달리 말해, 명문화되지 않은 윤리적 법정으로 안내하는 김숨의 서사에서 확인되는 증언 신체의 구성과 확장은 세계가 완전히 파멸하도록 내버려두는 대신, 마지막까지 삶을 구하고, 지지하고 응원하는 (비언어적) 언어를 조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법적 효력을 갖지 않는 증언이, 거꾸로 세계를 되살리는 백신으로 자리하도록 구성하는 셈이다.


4. 비언어적 신체발화와 이야기 유물론의 한 지형

뿌리 뽑혀 삶의 거처를 송두리째 빼앗긴 이들은 김숨의 작품 속에서 다시 고쳐 쓰임으로써 잃었던 목소리를 되찾고, 말을 하기 시작한다. 이들이 말하는 것은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간 “먼 땅”에서의 기억들이다. 만주의 위안소까지 어떻게 가게 되었는지, 끌려가는 동안, 그리고 위안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로부터 약 70여 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 버렸으나 이들은 모든 일을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히 기억하고 말한다. 하지만 모든 것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어떠한 말로도 자신의 고통을 설명할 수가 없다.” 경험한 내용이나 기억을 떠올리면서도 자신이 겪었던 일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모순적인 상태는, 참혹한 폭력의 현장에서 살아 돌아온 생존자/피해자들에게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증상 중 하나이다.

이들이 어떠한 말로도 고통을 설명할 수 없는 이유는 고통이 언어라는 틀로 해소되지 않기 때문이다. 폭력의 생존자/피해자들에게 있어 과거의 기억은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당사자에게 수치와 모멸과 같은 괴로움을 부과한다. 그저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막중한 압박감과 힘겨움이 수반되는데, 일상이 뿌리째 뽑혀 버리는 경험을 구체적이고 적확하며, 무엇보다도 일상적인 언어로 전달하는 일이 가능할 리 없다. 이들이 그러한 자신들의 상태에 대해 스스로 “벗지 않고는 말을 할 수 없다”고 진단하는 것은 당연하다. 고통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뿐더러, 설사 언어화된다고 하더라도 논리적이고 수사학적인 구조를 갖추기가 어렵다. 어떤 방법으로도 표현할 수 없어 말로 덜어내지 못한 고통의 잔여물들은 고스란히 ‘그녀’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 되고 만다.


침묵하던 그이는 갑자기 블라우스 단추를 끄르기 시작했다. 벗지 않고는 말을 할 수 없다면서. 맨몸뚱이를 보여주지 않고서는.

그이는 블라우스 안에 입은 속옷마저 훌렁 벗더니 배 한복판에 녹슨 지퍼처럼 박힌 수술 자국을 보여주었다.

―<한 명>, 15쪽.


고통스러운 기억을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지만, 긴 세월이 흐른 현재까지도 그들의 삶 속에서 생생히 반복되는 과거의 기억들은 그들의 신체에 오롯이 각인되어 있다. “벗지 않고는 말을 할 수 없다”며 보여준 맨몸뚱이 위에는 “배 한복판에 녹슨 지퍼처럼 박힌 수술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요코네 수술로 양쪽 나팔관을 막아놓은 탓에 자궁을 전부 들어내야 해서 시집가서도 아이를 낳을 수 없었고, 자신의 정액을 삼키라고 하던 일본군이 떠올라 우유를 잘 마시지도 못하며, 질 안에 손가락을 넣으면 만져지는 배꼽 같은 것은 아흔이 되어서야 사라졌다. 그들의 신체 곳곳에 새겨진 과거의 상흔들은, 비록 언어화되지는 않았어도 어떤 말들보다 정교한 감각으로 다가온다. 이처럼 시간이 지나도 아물지 않고 그녀들의 몸에 여전히 남아 있는 폭력의 잔해들은 ‘증언’의 영역이 반드시 언어적 차원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김숨은 증언을 인용함으로써, 이야기의 신체성을 서술자의 권능으로 제압하지 않는다. 제도적 소설이 갖는 ‘저자’의 지위를 양도하면서(저자로 자리하기는 하지만), 오히려 저자야말로 성대로 기입해 들어오는 목소리들에 빚지고 있다고 감각하면서, 인용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수락하는 것이다. 인용이나 미주와 같은 형식이 텍스트의 이질적 신체성을 구성하고 조직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김숨의 텍스트는 하나의 유기체적 몸으로 조직되는 게 아니라, 하나이되 다양한 신체성을 갖는다고 해도 좋다. 인용의 목소리를 허락함으로써, 곧 그의 성대로 인용된 말들은 그의 몸과 생존자/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완전히 결합하도록 만든다고 할 수 있다. 비극적인 폭력의 고통과 기억들이 신체에 체현되어 신체적 형태로 증언되고 있는 현상은 故김복동 님과 길원옥 님의 회고를 바탕으로 쓰인 두 편의 증언 소설집(<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2018),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2018))에서 더욱 강화된다.

두 소설에서 증언은 반드시 시간적 순서에 따라 일관성과 객관성을 가지지 않고,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생각, 감정, 그리고 느낌 위주로 흘러간다. 그래서 맥락에 맞지 않는 말이 반복적으로 삽입되기도 하고, 떠오르거나 눈에 보이는 것, 느낌 등이 단편적으로 제시되는 형태를 취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전에 이야기했던 말의 내용을 시간이 지난 후 다르게 기억해서 말하기도 하며 말을 하는 도중 번번이 “나 말 안 할래”라며 말하기를 주저하기도 하는 모습도 보인다. 실제로 증언의 내용에 객관성과 일관성이 없다거나, 불분명한 표현, 급기야 증언 자체를 거부하는 증상들은 실제로 폭력의 생존자/피해자들이 증언하는 과정에서 숱하게 겪는 어려움들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상 자체를 서술자가 가다듬고 제어하고 통일성과 규칙을 할당하여, 고통을 현실적으로 ‘지각’할 수 있도록 만드는 방식을 김숨이 채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일종의 트라우마라고도 해석할 수 있는 이러한 증상들은 이들이 “어떠한 말로도 자신의 고통을 설명할 수가 없”는 상태를 경험하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이다. 엄밀히 말해 이 역시도 생존자/피해자가 겪는 피해 중 일부인 것이다. 하지만 말의 내용에 일관성과 객관성이 없다거나 표현이 불분명하다는 점은 오히려 ‘결함’으로 치부되어 오랫동안 가해자들에게 증언의 진위를 부인/부정하는 논리로 전유되어 왔다. 그로 인해 생존자/피해자들은 떠올리는 것만으로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되풀이해서 상기하고, 그 기억을 일관성 있고 객관적으로 말하도록 강요받는 이중의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던 것이다. 따라서 생존자/피해자가 겪은 경험과 이를 두서없이, 맥락이 틀리더라도, 하나의 일관된 서사적 흐름으로 묶어내지 않는 방식으로 고스란히 보여주는 ‘이야기’ 곧 목소리들의 신체성에 대한 감각을 갖게 하는 일이야말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생존자/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자신의 몸으로 불러 들여와 이들의 말뿐만 아니라 언어화될 수 없는 영역의 것들까지도 증언으로 간주하는 김숨의 텍스트는 일반적인 ‘소설’과는 거리가 멀다. 그의 텍스트에서 언어는 단순히 말이나 기호의 차원에서 머무르지 않고 신체적 영역으로까지 확장되는데, 이는 곧 그가 언어를 신체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동시에 정신적인 것과 신체적인 것을 동일선상에서 받아들이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이미 너무도 익숙해져 버린 언어의 보편적인 역할을 지우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다시 말해 그에게서 언어는 무언가를 표현하고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나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하는 사물과도 같은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텍스트에서는 몸 위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상처 자국, 중얼거림, 한숨, 머뭇거리는 몸짓, 목소리의 떨림, 하물며 침묵까지도 증언이 될 수 있다. 보편적인 언어의 개념을 지우고 그 자리에 무수한 목소리들을 둠으로써 인식의 세계를 넓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김숨의 언어는 증언을 신체로 보살피는 이야기인 셈이다. 이는 기존의 산문과 운문의 분류에 명백하게 소속되기 어려운 텍스트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김숨은 이야기가 단순히 ‘정신’의 영역에 한정되어 있는 문화적 산물이라는 통상적인 이해를 넘어서 이야기를 일종의 물질로 조직하는 방식을 제안하는, 이야기 유물론의 한 방향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역사와 동시대를 향해 일으킨 이야기 유물론은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기획이 강탈해가는 ‘정념’이나 ‘정서’ 그리고 ‘정동’과 같은 비물질적인 것의 물질화의 맥락 역시도 비판적으로 바라보도록 만드는 효과를 가진다. 모든 것을 ‘즐거움’으로 대체해버리는 신자유주의적 정동을 통해 수탈과 착취를 거듭하는 와중에 역사적이고 동시대적인 고통의 언어를 물질적으로, 즉 신체적으로 조직하고 또 감응하도록 만듦으로써 우리 삶에 전혀 다른 방식의 기념비를 제공해주는 것이다.


5. 감행하라

김숨은 신체/물질로서 언어와 몸을 섞게 되면서, 그가 기존에 써두었던 텍스트에도 수정을 요구하는 문제 역시 산출해내는데, 이는 바로 그가 역사뿐만 아니라 자신의 텍스트마저도 다시 고쳐 쓰기를 감행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다. 기존의 소설 언어의 한계를 체감하며 그는 이전에 쓰인 자신의 텍스트들도 다시 고쳐 쓰지 않을 수 없다는 윤리적 부름에 응답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그의 작품은 말하려 해도 도무지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고, 또 이를 위해 다시 고쳐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무와 책임이 반영된 결과이다.

이미 오랜 시간 누적된 근대성의 산물들은 오늘날에도 영향을 미치며 생생히 살아 숨 쉬는 다양한 존재들을 지우거나 통합하는 방식으로 삶을 통제하고 제도적 틀을 견고하게 다져왔다. 이러한 체제는 다른 누군가를 배제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할 수 있도록 철저하게 조직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확실성을 증명하는 일은 곧, 더 많은 타자를 양산해 내는 일과도 같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는 근대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문학에서 주체를 그려내는 방식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 왔다. 다시 말해 김숨이 증언의 언어가 지닌 물질성과 신체성을 절감하게 되면서 자신의 텍스트를 다시 고쳐 쓰는 작업이 자발적인 요구로 이루어진 것인 동시에 시대적 요구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아에 대한 이상과 자기보전의 욕망은 흐려지기는커녕 더욱 증폭되어가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시점에서 물질적이고 신체적인 언어를 통해 개진되는 김숨의 텍스트는 작품 내의 활자뿐만 아니라 작품 밖의 독자들에게도 텍스트와 신체적으로 연루되어 있음을 감각하고 감지할 수 있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야기를 읽고 정신적인 의식의 차원에서 감화되고 그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이웃하고 있는 무수한 타자들의 몸을 신체적으로 받아들이며 이들이 결코 자신과 무관하지 않음을 인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떠한 언어보다 분명하게 자신의 위치를 드러내는 표지로서의 신체적 텍스트는 진정으로 “남 같지 않다” 는 인식을 내재함으로써 ‘나’에게로 치우쳐져 있던 보살핌의 시야를 타인에게로 넓혀나가는 단초가 된다. 결국 마주한 몸 사이에 빠르게 확산되는 것은 비단, 취약성이나 불완전함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누군가를 지움으로써가 아닌, 덧대고 엇갈린 몸들을 경유해야 비로소 자신의 자리 역시 할당받게 된다는 윤리적 신체성 역시 습득된다. 그리고 이 신체성이 실현되기 위해 반드시 대단한 노력이 필요치는 않다. 그저 그의 작품을 읽음으로써 김숨의 텍스트 신체 위에 나의 신체를 덧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당선소감>


   "미약한 목소리 위에 내 목소리 덧대어 글 쓸 것"


당선 연락을 받은 날 다른 사람의 당선을 확인하는 꿈을 꿨었다. 마음껏 기뻐할 수 없었다. 돌이켜 보면, 지나온 모든 날을 의심 속에 살았다. 중대한 일들은 보잘것없는 나의 몫이 아니라 생각했다. 좋게 말하면 겸손이고, 냉정히 말하면 비겁한 회피였다. 하지만 이 글을 쓰며 겸양이라 여겼던 내 태도가 다른 이에게 상처가 될 수 있음을, 그래서 글 쓰는 이에게 겸양이 언제나 미덕인 것만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제 겸손이라는 말로 포장한 불신을 걷어 내고, 여전히 두렵긴 하지만 나 역시 새로운 각오를 다져보고자 한다. 이런 각오를 얻기까지 귀중한 가르침을 주신 분들이 많다. 태어나고 자란, 좋아하는 곳을 떠나지 않고도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 주신 권명아 선생님. 흐트러지는 순간마다 자애와 인내로 끝까지 이끌어 주신 김만석 선생님. 늘 당신들의 바람과 엇나가는 딸을 누구보다 가슴 졸이며 지켜보셨을 부모님. 그리고 함께 공부하는 기쁨이 무엇인지 알려주신 젠더·어펙트연구소의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아직 군데군데 서투름이 묻어난 글을 따뜻한 시선으로 보듬어 주신 김경복 심사위원님께도 머리 숙여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당선 소식을 전해 들은 날, 많은 분들께 너무 큰 축하를 받았다. 그 격려와 응원이 헛되지 않도록, 앞으로도 소란한 세상 속 미약하게나마 목소리를 내는 존재들을 감지하며 그들의 목소리 위에 내 목소리를 덧대어 글을 써 나가고 싶다.



  ● 1996년 부산 출생.
  ● 동아대학교 한국어문학과 졸업.


 

  <심사평>


  ‘이야기 유물론’ 참신한 용어와 발상으로 풀어내


올해 평론 부분 최종심에 오른 후보작은 최진아의 ‘봉준호의 ‘사이-공간들’’, 김유태의 ‘애도 중인 피에타들’, 조현준의 ‘데페이즈망적 주체성을 표현하는 어느 광대의 춤’, 강희정의 ‘백신이 되는 증언과 이야기 유물론’ 등이다.

‘봉준호의 ‘사이-공간들’’은 봉준호 영화에서 공간이 갖는 상징적 의미를 포착하여 봉준호 영화의 특성과 가치를 잘 해명하고 있지만 이러한 관점은 문학론에서 익숙한 것들이라 새로움을 주기에는 미흡하다는 느낌이다. ‘애도 중인 피에타들’은 한국 오컬트 영화에 나타난 트라우마와 애도의 특징을 이 시대의 한 경향성으로 잘 분석하고 있지만 영상미학과의 결합이 없다는 점이 한계로 보인다. ‘데페이즈망적 주체성을 표현하는 어느 광대의 춤’은 영화 ‘조커’에 나오는 조커의 광기가 어떻게 이 시대의 문제성을 갖는가 하는 점을 이론과 영상 기법을 통해 잘 설명해 내고 있지만 광기의 역사성에 대한 분석의 결여가 아쉬움으로 남는다.

‘백신이 되는 증언과 이야기 유물론’은 김숨 작가의 위안부 대상 소설이 갖는 ‘증언’의 성격이 어떻게 사회를 되살리는 ‘백신’의 구실을 하는가 하는 점과 이것이 결국 정신의 차원에서 현실에 개입하는 ‘이야기 유물론’이 됨을 참신한 용어와 발상으로 잘 풀어내고 있다. 이에 강희정의 ‘백신이 되는 증언과 이야기 유물론’을 당선작으로 선정한다. 수상자는 더욱 정진하여 한국 비평계에 큰 별이 되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 김경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