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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다시 슬도에 와서 / 설경미

 

얼마나 그리워야 소리로 젖어들까

떠나보낸 이름조차 이마를 두드리는

곰보섬 뚫린 바위 속 해무가 휘감긴다


아기 업은 돌고래 암각화 뛰쳐나와

바다와 맞닿은 곳 제 그림자 세우며

물살로 솟구치는 몸 허공을 겨냥한다


바다로 가는 길이 다시 사는 일이어서

견디며 삼킨 울음 앙금으로 남은 말

한겹씩 걷어낸 난간 간간이 말려놓고


구멍 난 살점마다 촘촘히 홈 메우듯

그제야 돌아앉아 거문고를 타는 섬

얼마나 그리워해야 소리로 젖어들까




  <당선소감>


   "힘든 글쓰기 견뎌 영광…가슴 따뜻한 시조 써나갈 것"


문밖에 겨울바람이 몰아치던 하오 무렵 농민신문사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몇가지 질문에 답할 때 머릿속이 하얘졌습니다. 그 뒤 이틀이 지나서야 당선됐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울컥 목이 메었습니다. 연말이면 늘 풀 죽어 절인 배추처럼 다녔던 때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5년은 가히 짧지 않았고, 그동안 시조라는 산은 벼랑도 꼭대기도 골고루 보여주며 내가 얼마나 버티고 견디는지를 시험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마스크를 쓰고 있느라 내색하지 못한 표정은 차라리 고마웠고 다행이었던 시간. 언제부턴가 횡단보도에서 빨간불이 바뀌기를 기다리며 허공에다 중얼거렸습니다. 글을 쓰며 살 수 있게 해달라고, 힘이 돼달라고. 그것은 내 가슴에 영원한 신앙 같은 어머니께 매달리는 소리였습니다. 간절함 끝에 볼을 타고 내리던 눈물이 고비마다 나를 일으켰고, 그렇게 견딘 시간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여기까지 오는 데 내 문학의 뿌리 역할을 해준 분이자 은사이신 정민호 선생님, 그리고 경주문예대학 교수님들 고맙습니다. 함께 수학했던 문우들, 내 인생의 영원한 지지자인 딸에게도 정말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아마도 이분들과 함께여서 오늘의 영광이 내게 찾아왔나 봅니다.

뽕잎을 먹고 자라던 애벌레가 여러번 허물을 벗고 나면 고치를 짓기 시작하지요. 이때쯤 솔가지나 종이·짚 따위로 섶을 올려주면 실을 뿜기 시작합니다.

저는 농민신문사와 고맙기 이를 데 없는 심사위원님으로부터 견고한 섶 하나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제 그 위에서 시조라는 실을 열심히 뽑아내겠습니다. 허한 가슴을 데우는 따뜻한 소재의 실을 말입니다.

짬을 내 슬도에 다녀와야겠습니다.

큰일을 해낸 슬도를 부둥켜안아주고 싶네요, 문득.



  ● 경주문예대학 연구반 회원 
  ● 2018년 5월 중앙시조백일장 입상  
  ● 2018년 제21회 대구시조 공모전 장원 
  ● 2019년 10월 중앙시조백일장 장원


 

  <심사평>


  거문고 타는 섬의 그리움, 수미쌍관 형식으로 잘 갈무리


올해 <농민신문> 신춘문예 응모작들은 예년에 비해 시조 본연의 장점에 중심을 두고 창작한 작품이 많아 좋았다.

우리는 두가지 관점에 중점을 두면서 심사에 임했다. 첫째는 신인다운 패기와 참신함, 둘째는 시조적 정체성을 얼마나 잘 지켜냈는가로 초점이 맞춰졌다.

신인의 경우 현대성에 치중하면 안정된 보법에 문제를 드러내고, 안정감에 기대다보면 이미지의 참신함을 잃게 되는 문제에 봉착한다. 현대시조는 이 두가지를 적절히 조화시킬 때 완성도가 높아진다. 마지막까지 논의된 작품은 다행히도 이런 균형을 갖고 있어 든든했다.

최종에 오른 작품은 <인공수정> <독무> <다시 슬도에 와서> 세편이었다. <인공수정>은 현대의술을 이용해 생명 탄생의 과정을 그려내고 있어 현대적 감각이 물씬 풍긴다. 하지만 이런 작품일수록 시어 선택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데 ‘정액’ ‘관능’ ‘체위’ ‘고난주간’ 등 차용된 시어들이 직접적 진술에 의존하고 있어 감점 요인이 됐다. <독무>는 무용수의 무대를 통해 비극이 아닌 희극을 기다리는 자신과 이웃의 여망을 대변하는 시적 의도를 보여줬고, 넷째 수의 탄력적인 리듬 처리도 높이 살 만했다. 그러나 함께 보내온 다른 작품들에서 감정의 절제를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그에 비해 <다시 슬도에 와서>는 갯바람과 파도 소리가 거문고 소리로 들린다는 섬 이름에 기인한 사연들을 기승전결 4수로 잘 갈무리한 수작이다.

구와 구의 마디도 안정감이 있고, 장과 장의 알맞은 매듭 처리로 인해 여운도 깊다. 또한 거문고 소리를 애절한 그리움으로 보고 수미쌍관 형식으로 처리한 것도 탄탄한 습작의 시간이 엿보여 당당히 당선의 영예를 차지했다.

응모작들을 통해 시조의 외연이 확대되는 것을 보면서 한국 시조의 내일을 가늠해볼 기회가 됐다. 당선자에게는 축하의 박수를 보내고, 아쉽게 선에 들지 못한 분들에게는 가열한 정진을 바란다.

 

심사위원 : 이정환, 이달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