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당선작>

 

   폐교 / 김규학

 

한때, 천 명도 넘던 전교생들 사라지고

그 많던 선생님들 뿔뿔이 흩어지고

궂은일

도맡아 하던

순이 아버지도 가버렸다.


모두 다 떠나버려 적막하고 스산한데

집 나간 아들 기다리는 어머니 심정으로

검버섯

창궐한 학교만

그 자리에 붙박여 있다.


나팔꽃이 휘청대며 국기 봉을 부여잡고

그늘만 넓혀가던 플라타너스 나무도

밤사이

떠나버릴까

까치둥지가 짓누른다.


좀이 쑤신 학교도 툭툭 털고 일어나

하루빨리 이 산골을 벗어나고 싶겠지만

날마다

담쟁이덩굴이

친친 주저앉힌다.




  <당선소감>


   "동시에서 시조로, 드디어 문이 열렸다"


나는 신춘문예에 한이 맺힌 사람이다. 나에게 신춘문예란 난공불락의 요새 같은 것이었다. 1997년 노랫말을 쓰려다 시에 입문하게 되었고, 이듬해부터 자유시라는 무딘 도끼로 10여 년을 두드렸지만 그 성은 좀처럼 함락되지 않았다. 동시라는 새로운 무기를 장착하고 또다시 도전해서 본심에 일곱 번을 올랐지만 열릴 듯 열릴 듯 성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2013년 12월 23일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 모 신문사 문화부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그녀는 이번 신춘문예에 응모한 적 있느냐 다른 신문사에 중복 투고하지 않았느냐 인터넷 매체 같은 곳에 발표한 적 없느냐 혹시 표절한 것은 아니냐며 수사관처럼 꼬치꼬치 묻기 시작했다. 나에게도 이제 올 것이 왔구나 하며 쾌재를 부르는데 김민수가 본명이 맞느냐 다그쳐 물었고, 김민수는 아들이고 저는 그의 아비이자 시를 쓴 김규학이라는 사람이라고 했더니 잠시만요 하며 그분은 전화를 끊었다. 10여 분 뒤 다시 전화가 와서 아르코 창작 기금도 받았고 동시집도 내셨네요? 네…….

그렇게 신춘문예 당선은 또다시 루비콘 강을 건너가고 말았다. 그날 이후로 신춘문예와는 아주 담을 쌓고 살다가 작년 겨울에 시조를 쓰게 되었고, 두 번째로 투고한 작품이 올해 당선이라는 낭보로 돌아온 것이다. 제 허접한 시에 깃발을 꽂아 주시고, 이 생에서의 한을 풀어주신 두 분 심사위원님과 한라일보사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 1959년 경북 안동 출생 
  ● 2009년 아르코 창작기금 수혜 
  ● 2010년 천강문학상 수상하며 작품 활동 
  ● 불교신인문학상 수상, 황금펜아동문학상 수상. 
  ● 동시집 '털실뭉치', '방귀 뀌기 좋은 계절', '서로가 좋은지'.

 

  <심사평>


  서정·서사 조화로 시대 한 단면 구체화


예심을 거쳐 본선에 올라온 작품들 대부분이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시대적 체험과 아픔에 기조를 두고 있었다. 그중에서 강현수의 '아버지의 삽', 김정애의 '달의 화법', 장수남의 '25시 편의점', 오은기의 '가시리', 김규학의 '폐교' 등이 눈에 띄었다. 이들 한 편 한 편의 작품에서는 시대감각에 맞는 소재들과 시어선택 등이 이미 시조시인의 바탕을 갖추고 있었다. 더구나 입과 코가 가려진 그들 마스크 위로 저마다 촉망되는 눈빛들이 반짝반짝 감지되기엔 충분한 내용들이어서 기뻤다.

그 맨 끝자리에 김규학의 '폐교'가 또렷한 색채를 띠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서정과 서사가 알맞게 조화를 이루면서, 시대의 한 단면을 시조라는 장르 속에 구체화시켜놓고 있었다.

이 작품은 "궂은 일 도맡아 하던 순이 아버지", "검버섯 창궐한 학교", "밤사이 떠나버릴 것 같은 프라타나스 나무의 까치둥지" 그리고 학교 건물 전체를 "친친 감아 주저앉히"는 담쟁이의 형상 등을 단순한 나열의 단계를 뛰어넘어 초, 중, 종장의 유기적 관계를 완벽하게 이어놓고 있다. 거기에다, 시조란 관찰해야 할 외적 대상과 드러내야할 내적풍경을 시대상황에 알맞게 적용시키는 일이라 했을 때, 시인이 갖추어야 할 시력, 어휘력, 상상력은 물론 그 어떤 서사적 울림과 내용 전개가 읽는 이에게 긴장과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었다. 결국 우리 심사위원 두 사람은 체험과 시대인식에 바탕을 둔 김규학의 작품 '폐교' 앞에 당선의 꽃다발을 놓아드리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시인이 시를 쓰는 목적은 곧바로 삶의 목적과 같다. '목적'이란 말이 '목표'라는 말에 지배당하고 있는 이 시대에, 시조시인들은 좀 더 과감히 사회적 체온기 역할을 해야 할 당위 앞에 서 있을 수밖엔 없다. 코로나19 창궐의 어려움 속에서도 올해 응모자가 많았다는 신춘문예 담당자의 전언이다. 그들 응모자들과 함께 마스크 벗은 얼굴로 시조광장에서 활짝 편 얼굴로 인사 나눌 수 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심사위원 : 김영기, 고정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