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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일인칭 컷 / 윤치규

 

도로는 꽉 막혀 있었다. 길 한복판에서 터번을 쓴 남자가 붉은 깃발을 흔들고 있었다. 앞쪽에서 사고가 난 것 같았다. 택시 기사는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상황을 살피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차량이 일차선으로 우회하기 시작했다. 그는 대열에 끼지 않고 운전대를 놓아버렸다. 앞지르는 차가 방향 지시등을 켜면 먼저 가라는 듯 느긋하게 손짓까지 보냈다. 내가 미터기를 가리키며 항의해도 방법이 없다는 듯 어깨만 으쓱거렸다.

“지금 바가지 씌우려고 이러는 거지?”

한국어로 말했는데 택시 기사가 뒤를 돌아봤다.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내게 뭐라고 변명 같은 말을 쏟아냈다. 그의 말은 빠르고 된소리가 많이 섞여 영어인지 말레이어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말을 할 때 습관처럼 오른손 검지를 펼쳐 흔들었다. 아주 길고 비쩍 마른 손가락이었다. 그 손가락은 ‘하나’를 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좌우로 흔들릴 때는 무언가를 부정하는 표시처럼 보였고, 위아래로 오르내릴 때는 하늘에 있는 신이나 제멋대로 비를 뿌리는 날씨를 탓하는 것 같기도 했다. 만약 그런 게 아니라면 어쩌면 천장에 붙어 있는 손도끼를 가리키는 것인지도 몰랐다.

도대체 택시 안에 손도끼가 왜 있는 걸까? 붉은색 페인트로 칠한 도끼 날은 아주 날카로웠다. 택시 기사는 내 시선을 눈치채고 플라스틱 고정 틀에서 손도끼를 떼어냈다. 나무로 된 손잡이를 붙잡고 자랑이라도 하듯 도끼날을 보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창문을 내리찍는 시늉을 했다.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이번에는 도끼 날을 자신의 목에 대면서 죽는 척을 했다. 그런 행동이 나를 안심시키려는 것인지 위협하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희주는 옆에서 웃음을 터뜨렸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어쨌든 그가 왜 그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고, 알 수가 없다는 것은 때때로 내게 두려움을 주었다.

희주가 비혼식을 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처음 느꼈던 감정도 두려움이었다.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 무섭고 끔찍하기까지 했다. 남자 친구가 있는데 비혼식을 하겠다니. 청첩장의 초안이라고 건넨 분홍색 봉투 겉면에는 오직 희주의 이름만 적혀있었다. 신랑 이름은 없었고 누군가의 장녀 같은 표현도 없었다. 종이를 펼치자 진녹색 웨딩드레스를 입은 희주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사진 옆에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는 결심과 자신을 온전히 더 사랑하겠다는 다짐이 쓰여 있었다.

희주와 나는 사내 커플이었다. 한 달 전에 희주가 직장을 그만뒀어도 여전히 부서 사람들은 내게 희주의 안부를 물었다. 실제로 희주가 웨딩드레스 입은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자 사람들이 나를 축하해주었다. 몇몇은 기프티콘까지 보내줄 정도였다. 날짜는 언제야? 장소는 어디야? 여름휴가 때 간다는 말레이시아가 사실은 신혼여행이야? 쏟아지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런 게 아니라고 해도 사람들은 믿지 않았고, 헤어진 것도 아니라서 딱히 헤어졌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결혼에 대해 캐묻는 사람 중에서 가장 집요했던 건 최 팀장이었다. 최 팀장은 진심으로 축하한다며 나를 불러내 손을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그냥 희주 혼자서 찍은 사진이라고 해도 말이 통하지 않았다. 왜 자신에게 결혼 사실을 숨기려고 하냐며 오히려 섭섭해하기까지 했다. 설명하려고 할수록 오해만 깊어졌다. 그렇게 며칠 지나자 어느새 내 호칭은 새신랑으로 바뀌었고 회사에는 희주가 임신했다는 소문마저 돌았다.

사실 누구보다도 이 모든 상황을 제일 믿기 어려운 사람은 나였다. 비혼식이라니. 차라리 나와 결혼하기 싫다는 것뿐이라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와 연애는 해도 결혼하지 않겠다는 거라면, 내가 남자 친구 이상의 지위를 가질 수 없다거나, 법이나 제도로 묶일 수 없는 문제라면 그래도 이해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사람들을 초대해서 비혼식을 하겠다니. 그것도 회사 동료들까지 부르겠다고? 아무리 지금까지 낸 축의금을 회수해야 한다고 해도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들과 함께 하객석에 앉아 손뼉이나 치고 있을 내 모습은 정말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

가까운 곳에서 나무 한 그루가 쓰러졌다. 가드레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숲이 있었다. 벌목꾼 몇 명이 장비를 챙기며 대화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벌목할 구역 같은 것을 확인하는 것 같았다. 한 명이 전기톱의 시동을 걸면 다른 한 명이 뒤로 돌아가 나무의 기둥을 붙잡았다. 키가 큰 나무는 날카로운 톱날이 닿자 맥없이 고꾸라졌다. 나무가 땅 위에 쓰러지면 장갑을 낀 인부가 달려들어 고기와 뼈를 발라내듯 열매를 따고 줄기에 붙은 가시를 긁어냈다. 육중한 나무 한 그루가 해체되는 데 걸린 시간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짧았다.

기초 작업이 끝나면 벌목꾼은 다른 나무로 향했다. 그러면 뒤에서 대기하던 크레인이 해체된 나무를 트럭으로 옮겼다. 크레인은 바닥에 철심을 고정해놓고 회전하면서 작업했다. 중량이 얼마나 무거운지 서 있는 자리가 움푹 파였다. 크레인은 긴 목과 그 끝에 매달린 쇠집게로 한 번에 여러 그루의 나무를 들어 올렸다. 나무는 대기하고 있는 트럭의 짐칸 위로 쏟아졌다. 트럭은 나무가 한가득 실리면 시동을 걸어 어딘가로 떠났다. 트럭이 출발한 자리에는 곧바로 다른 트럭이 들어왔다.

“저건 야자나무야? 팜나무야?”

막 쓰러진 나무를 가리키며 희주가 내게 물었다. 내가 대답하지 못하자 야자나무라고 알려주었다. 그런가 싶어 쳐다봐도 딱히 알 방법은 없었다. 내게는 전부 엇비슷한 모양의 열대 나무일 뿐이었다. 희주는 그것들을 각각 야자나무와 팜나무로 정확히 구별했다. 내가 어떻게 알 수 있냐고 묻자 야자나무에서는 코코넛 열매가 열리고 팜나무에서는 팜 열매가 열린다는 당연한 설명을 늘어놓더니 그 후로는 길을 걷다가 대뜸 아무 나무나 가리키며 그게 어떤 나무인지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야자나무라고 대답했던 것은 팜나무였고, 팜나무라고 확신했던 것은 야자나무였다. 희주는 바닥에 떨어진 열매를 직접 보여주면서 정답을 확인시켜주었다. 그 다음부터는 내가 열매를 먼저 보려고 하니까 그런 건 반칙이라면서 좋아하지 않았다.

“사진이나 좀 찍어줘. 저기 숲을 배경으로.”

희주는 내게서 등을 돌리고 시트에 몸을 모로 기댔다.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전원을 켜고 구도를 맞추는 동안 희주는 창밖에만 시선을 두었다. 희주가 원하는 사진을 찍으려면 내가 조금 더 뒤로 물러나야 했다. 창문 밖으로 펼쳐진 야자나무를 뷰파인더 안에 전부 담으면서도 희주의 뒷모습이 왼쪽 밑 프레임의 삼 분의 이 정도만 차지해야 했다. 그렇게 배경 한편에 희주를 고정하고 조리개를 천천히 돌려 렌즈의 초점을 멀리 두었다. 그러면 희주는 서서히 흐려지고 뒤쪽에 펼쳐진 숲이 점점 선명해졌다.

이런 구도로 찍은 사진은 인스타그램에서 괜찮은 반응을 얻었다. 매번 비슷한 사진만 올리는 데도 좋아하는 사람이 꽤 많았다. 희주는 이런 사진을 ‘일인칭 컷’이라고 불렀다. 사진은 인물보다 배경에 초점을 맞추고, 장소가 온전하게 담겨 있으면서도 카메라를 등지고 서 있는 희주의 뒷모습이 한쪽 구석에 반드시 놓여야 했다. 여행할 때면 희주는 자주 사진을 찍었다. 유명한 관광지뿐만 아니라 흔히 볼 수 있는 벽돌집이나 거리 위에서도 자연스럽게 사진을 찍었다. 그때마다 사진을 찍어주는 사람은 언제나 나였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사진 속에서 일인칭 시점은 바로 나였다. 카메라를 등지고 서 있는 희주는 정작 삼인칭 피사체에 불과했다.

사진을 찍는 동안 야자나무 한 그루가 또다시 쓰러졌다. 육중하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땅이 울렸다. 그 울림은 가드레일 넘어 택시까지 닿았고 뒷좌석에 앉아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내 손을 흔들었다. 셔터를 누르지 못하고 다시 렌즈의 초점을 맞췄다. 뷰파인더 안에 놓인 희주의 줄무늬 티셔츠가 선명해졌다가 다시 흐려졌다. 희주는 흰 바탕에 빨간색 줄무늬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처음에는 성조기를 본뜬 건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말레이시아 국기였다. 희주의 귓불 끝에는 그믐달 모양의 귀걸이가 매달려 있었다. 그건 말레이시아 국기에 그려진 그믐달과 똑같은 디자인이었다.

“그믐달이 아니라 초승달이야. 이슬람 국가는 달이 왼쪽부터 차오르거든.”

“그거 한국에서 산 거잖아. 그러면 그믐달인 거지.”

“초승달이라니까. 너는 왜 항상 네가 보고 싶은 대로만 봐?”

귀걸이 끝에는 동그란 고리가 뚫려 있고 그 밑으로 장식이 하나 더 달렸다. 모조 다이아몬드가 박힌 별 모양의 팬던트였다. 그 팬던트는 희주가 숨을 내쉴 때마다 아주 조금씩 흔들렸다. 그 무질서한 진동이 어떤 비언어적인 신호를 함축하고 있는 것 같았다. 희주는 손가락을 들어 숲을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사실 아까는 거짓말이었다고. 저건 야자나무가 아니라 다 팜나무라고. 그 말을 듣고 나니까 창밖에 펼쳐진 야자나무가 이번에는 전부 팜나무처럼 보였다.


*

돌이켜보면 최 팀장이 마케팅부에 온 이후로 희주는 계속 힘들어했다. 평소에 남의 험담을 거의 하지 않는 성격이었는데도 최 팀장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몸서리를 칠 정도였다. 최 팀장은 보고서의 문장을 지적할 때도 더 섹시하게 쓸 수 없냐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었다. 한번은 홈쇼핑 방송에 쓸 사은품 선정 때문에 희주와 크게 부딪힌 적이 있었다. 최 팀장은 사은품을 다양하게 준비하라고 했고, 희주는 질을 높이고 단가를 낮추기 위해 상품을 하나로 특정해 대량으로 구매하자고 제안했다. 그냥 아이디어를 나누는 차원에서 꺼낸 말인데도 최팀장은 정색하며 화를 냈다. 항상 똑같은 건 집에서 보는 마누라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평소 같았으면 희주도 그냥 넘어갔을 일이었다. 하지만 그날 따라 언성을 높이며 끝까지 언쟁을 벌였다. 그날 희주는 의견이 거절당한 것 때문에 화난 게 아니라, 말을 너무 함부로 내뱉는 걸 참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날 이후로 희주는 가능하면 최 팀장을 피해 다녔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고 엮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최 팀장은 희주를 더욱 괴롭혔다. 희주는 키가 작고 체구가 왜소해서 의자에 앉으면 원래 잘 보이지 않았다. 최 팀장은 일부러 숨어 있는 거냐면서 자주 칸막이 위로 얼굴을 들이밀어 희주를 내려다보곤 했다. 그런 일상이 반복될수록 희주는 점점 지쳐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주변에서 함부로 나설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직장이니까. 저런 상사는 어디든 있으니까. 문제 삼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면 참고 넘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사건이 터진 건 상반기 결산 후 회식 자리에서였다. 영업 실적이 좋지 않아 소갈비 집에서 냉면과 된장찌개로 배를 채워야 했다. 네 명씩 앉은 테이블에 소갈비가 삼인분밖에 올라오지 않았다. 추가로 주문하려고 해도 눈치가 보였다. 최 팀장은 소갈비가 다 구워지지도 전에 이미 공깃밥과 식사를 주문해버렸다. 희주는 고기를 구우면서 장난스럽게 배가 고프다는 말을 반복했다. 최 팀장은 그게 거슬렸는지 대뜸 그렇게 배가 고프냐고 물었다. 희주가 놀라서 고개를 끄덕이자 그렇게 배가 고프면 같이 이차나 가자고 말했다. 자기가 배부르게 해주겠다고. 배가 터질 정도로 부르면 육아휴직이나 들어가라고.

사실 처음에는 최 팀장의 말뜻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몇몇이 이차는 치맥이 좋을 것 같다고 맞장구치는 바람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희주가 웃고 있지 않았다. 얼굴이 빨개진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괜찮냐고 묻는데 어깨가 들썩거리고 주먹 쥔 손이 덜덜 떨렸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최 팀장의 멱살을 낚아챘다. 정확히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왜 이러냐고 소리치는 최 팀장의 멱살을 강하게 쥐고 흔들다가 결국 주먹을 한 대 날렸다. 테이블 위에 반찬 그릇이 엎어지고 최 팀장은 갈비 소스와 함께 바닥에 엎어졌다.

상황은 본부장까지 개입하고 나서야 겨우 수습되었다. 본부장은 일단 나를 말리며 자초지종을 물었다. 때린 사람은 분명히 나였지만 이유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옆에서 희주가 성희롱을 당했다고 말해줘서 그제야 최 팀장이 했던 말의 속뜻을 알게 되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본부장이 보는 앞에서 다시 한번 달려들었다. 최 팀장은 그런 게 아니라며 부인했다. 코피를 흘리면서도 오해라고.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너무나도 억울한 듯 두 손바닥을 펼쳐 허공에 몇 번이나 내저었다.


*

사고 수습이 늦어질수록 가드레일 옆에 차를 세우는 사람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택시는 겨우 일차선에 합류했지만 사고 현장과 가까워졌을 뿐 여전히 그곳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택시 기사는 가드레일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그러다가 갑자기 선반을 열어 메모지와 볼펜을 꺼냈다. 그는 볼펜 뚜껑을 입에 물고 메모지에 미터기 요금을 적었다. 그리고 종이를 내밀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는 내 허락도 받지 않고 미터기를 꺼버렸다. 핸들을 꺾어 차선을 벗어나 가드레일 옆에 택시를 세웠다. 내가 뭐 하는 거냐고 따지자 그는 또다시 대답 대신 검지를 들어 위를 가리켰다. 그리고는 차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우리도 복권이나 한 장 사자.”

희주가 불쑥 얘기했다. 복권이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사고가 난 차 번호로 복권을 사면 잘 맞는다잖아. 방금 못 들었어?”

“택시 기사가 하는 말을 알아들었어?”

“들으려고 하면 들려. 저 사람 처음부터 영어로만 말했어.”

희주의 말이 어쩐지 비난처럼 들렸다. 기분이 상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고개만 반대쪽으로 돌렸다. 차가 완전히 멈추자 눅진한 에어컨 냄새가 더 진해졌다. 창문을 내려 택시 기사 쪽을 바라봤다. 그는 사고 현장으로 걸어가 구경꾼 사이에 넉살 좋게 끼어들었다.

“시간도 늦어지는데 오늘은 바로 숙소로 돌아가자.”

“돌아가고 싶으면 먼저 가 있어. 난 오늘 메르데카 광장에 갈 거야.”

“너 혼자 어떻게 돌아다니려고.”

내 말에 희주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한쪽 뺨으로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으며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말실수라도 했나? 희주의 눈치를 살피며 시트 뒤로 몸을 더 기댔다. 여행하는 동안 될 수 있으면 희주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게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

“거기는 그렇게 중요한 곳도 아니잖아.”

“독립 선언이 이뤄진 곳이야.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국기 게양대도 있어.”

말레이시아에 도착한 이후로 많은 시간을 길 위에서 허비했다. 말레이시아는 어디를 가나 막혔지만 차 없이는 어디에도 갈 수 없었다. 말라카를 낮에 돌아보고 저녁때 메르데카 광장에 가는 일정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그걸 알면서도 희주는 계속 억지를 부렸다. 이번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다는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를 볼 때도. 프란시스 자비에르 신부의 유해가 안치된 세인트 폴 성당을 갈 때나, 가장 큰 힌두교 사원이라는 스리 마하마리아만 사원에서 기도를 올릴 때도. 원하지 않으면 따라오지 말라면서 자꾸만 일정을 늘려갔다.

여행지에서 이런 문제로 다투는 건 꽤 익숙한 일이었다. 재작년에 서유럽에 갔을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독일과 이탈리아에 가야 한다는 것은 서로 동의했지만 그다음 일정으로 나는 체코를, 희주는 프랑스를 원했다. 내가 체코를 빼고 프랑스로 가겠다고 하자 희주는 그것보다는 이탈리아로 들어가 독일을 여행한 후에 삼일 정도 각자 떨어져서 프랑스와 체코에 다녀오자고 제안했다. 그래도 어떻게 따로 다니나 싶어 내가 양보하겠다는데도 희주는 굳이 그렇게 하자고 고집을 부렸다.

그때 우리는 이탈리아로 들어가 함께 독일을 여행하고 체코와 프랑스에서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귀국하기 하루 전에 베를린에서 다시 만났다. 숙소도 일부러 트윈룸을 골라 섹스를 할 때는 한 침대를 썼고 잠이 들 때는 각자의 공간에 누웠다. 그날 호텔 방에서 희주는 내가 가보지 못한 프랑스 남부의 풍경을 들려주었고, 나는 체코의 헌책방 골목을 혼자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발견한 맥줏집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건 내게는 정말 기묘하고 낯선 경험이었지만 희주에게만큼은 즐거운 추억으로 남았다.

“나도 사진 좀 찍고 올게. 진짜로 복권에 당첨될지도 모르잖아.”

사고 현장의 맨 앞에는 도요타와 버스가 서 있었다. 아마도 차선을 변경하던 버스가 직진하던 도요타를 들이받은 것처럼 보였다. 그 후에 도요타는 쫓아오던 트럭과 한 번 더 부딪치고, 트럭은 뒤따라오던 폴크스바겐과 연쇄적으로 충돌한 것 같았다. 다행히 정체 구간이어서 다친 사람은 없었다. 다만 여러 대의 차가 휘말려서 수습이 오래 걸렸다. 네 명의 운전자는 현장에서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말소리까지 들리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차분한 분위기였다.

그들 중에서 유일하게 화가 난 사람은 도요타 주인이었다. 그는 이런저런 참견을 늘어놓으며 자신의 차를 구경하는 훼방꾼들을 이리저리 밀쳐냈다. 그의 짜증이 심해질수록 구경꾼들은 더욱 몰려들었다. 저마다 사고 현장을 논평하듯 즐거워하며 수다를 떨었다. 택시 기사는 그 도요타 주인 앞에서도 전혀 개의치 않고 번호판의 숫자를 적었다. 도요타 주인이 신경질을 부리며 애꿎은 바닥을 발로 굴러대도 택시 기사는 신경도 쓰지 않고 사람들에게 자신이 적은 숫자를 보여주며 자랑까지 했다.

“아무리 그래도 좀 그렇지 않아?”

사진을 찍으려고 택시 밖으로 나가려는 희주를 붙잡으며 물었다. 희주는 누가 다친 것도 아닌데 뭘 그러냐면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너는 꼭 그래 본 적 없는 것처럼 말하네.”

희주가 몸을 돌려 나를 바라봤는데 나도 모르게 그 시선을 피해버렸다. 희주는 그대로 택시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창문 밖으로 희주의 뒷모습이 내게서 조금씩 멀어졌다. 희주는 가장 먼저 도요타의 번호판부터 사진을 찍었다. 택시 기사가 반가운 듯 손을 뻗어 알은 체를 했다. 두 사람은 무슨 말을 조금 나누다가 곧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오케이를 그렸다. 희주는 카메라를 건네고 트럭 뒤에서 포즈를 잡았다. 사고가 난 곳을 바라보며 서자 곧 플래시가 터졌다. 택시 기사는 사진을 확인하고 한 번 더 찍겠다는 것처럼 검지를 펼쳐 허공 위에 흔들었다.


*

회식 다음 날 희주는 일주일 동안 휴가를 받았다. 개인 연차는 아니었고 청원 휴가였다. 본부장은 그사이 최 팀장과 나를 따로 불러 화해를 중재했다. 그 자리에서 최 팀장은 내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내가 희주와 사귀고 있는 사이인 줄 몰랐다고. 자신은 쭉 영업부 소속이어서 정말 모르고 있었다고. 최 팀장은 미안하다면서 앞으로 이런 일이 두 번 다시 없을 거라고 약속했다. 사과하는 표정이나 목소리의 떨림 같은 것을 봤을 때 어느 정도 진정성은 있어 보였다. 게다가 나보다 열 살도 넘게 나이가 많은 사람이 그렇게까지 머리를 조아리자 나도 뻣뻣하게 굴 수만은 없었다.

희주가 휴가에서 돌아왔을 때 최 팀장은 팀원 앞에서 다시 한번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본부장에게 받은 경고장을 자신의 책상 위에 걸어 놓고 희주 앞에서 허리를 숙였다. 그렇게 무거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최 팀장이 이번 일로 많은 것을 깨달았고 더욱 언행을 조심하겠다고 하자 주변에 있던 직원들이 앞으로 두고 보겠다며 장난스럽게 으름장을 놓았다. 그렇게 사건이 일단락되었다고 믿었다. 만족스럽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적어도 희주는 그랬다.

“왜 네가 나 대신 그 사람을 용서했어?”

낮에 말라카의 구도심을 돌아볼 때 희주가 내게 물었다. 때마침 광장에서 야외 결혼식이 열리고 있었다. 결혼식장에는 캐노피 천막을 여러 동 펼쳐 놓았다. 천막마다 신부 대기실과 무대, 뷔페를 차려놓은 피로연장 같은 공간이 준비되었다. 우리는 특별히 허락을 받고 신부 대기실을 구경했다. 천막에 흰 천을 매달고 그 앞에는 검은색 소파를 놓았다. 소파 위에는 꽃장식이 가득했다. 신부는 붉은색 드레스에 면사포를 쓴 채로 소파 위에 앉아 친구들과 사진을 찍었다. 친구들뿐만 아니라 희주와도 사진을 찍어주었다.

신랑이 모습을 드러낸 건 결혼식이 시작된 이후였다. 신랑은 눈이 파랗고 머리가 갈색이었다. 창이 없는 모자를 썼고 전통 의상으로 보이는 노란 옷을 입고 있었다. 신랑은 신부의 아버지와 함께 예식이 진행되는 천막으로 걸어왔다. 신부는 그곳에 먼저 도착해서 신랑을 기다렸다. 신랑이 천막 안으로 들어가려고 허리를 굽히자 사람들이 손사래를 치며 말렸다. 신랑이 당황하며 주변을 살피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남자 넷이 천막의 각 기둥을 붙잡아 높이 들어 올렸다. 그제야 박수와 함성이 터졌고 신랑은 당당히 허리를 세우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결혼식이 진행되는 걸 지켜보다가 여행 내내 미뤄두었던 말을 희주에게 꺼냈다. 도대체 왜 그러느냐고. 꼭 비혼식 같은 걸 해야만 하겠냐고. 희주는 내 말을 듣고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들어 나를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그러다 우리 사이로 굵은 빗방울이 몇 방울 떨어지더니 갑자기 스콜이 쏟아졌다. 사람들은 서둘러 지붕이 있는 곳을 찾아 뛰어다녔다. 천막 안은 이미 가득 차서 가까운 노점의 처마 밑으로 비를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희주는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비를 맞았다. 열대의 소나기는 빗줄기가 굵었고, 그 속에서 희주는 비를 맞는 게 아니라 심한 매질을 당하는 것처럼 보였다.

“난 그 사람을 용서한 적이 없는데 왜 네가 그 사람을 용서해준 거야?”

최 팀장과의 일을 정식으로 문제 삼을수록 우호적이었던 회사의 분위기가 점차 냉랭해졌다. 희주가 원한 것은 최 팀장의 인사 발령이었다. 하지만 본부장은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최 팀장을 다른 곳으로 내쫓을 수는 없다고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그 대신 희주에게 이동을 권했다. 희망 부서를 세 개 정도 알려주면 그룹장끼리 협의해서 최대한 배려해주겠다는 것이었다. 내 생각에는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하지만 희주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가해자가 남고 피해자가 떠나는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상황이 해결되지 않자 본부장은 수습을 위해 희주가 아닌 나를 불러들였다. 일이 너무 커지면 먼저 폭력을 저지른 내게도 책임을 져야 할 부분이 있을 거라며 은근히 압박을 주었다. 그러면서 어차피 결혼해서 아기를 낳으면 희주는 회사에 오래 다닐 수 없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최 팀장과 마주치면서 일할 사람은 희주가 아니라 바로 나라고. 희주가 당장 큰 상처를 받아 감정적으로 구는 건 이해하지만 곧 있으면 남편이 될 내가 중심을 못 잡으면 안 된다고. 본부장의 말에 설득된 것은 아니었지만 나도 이쯤에서 희주가 그만두기를 바랐다. 겉으로는 희주를 이해하는 척했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희주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왜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는지.


*

하늘에 먹구름이 다시 몰려들었다. 사위가 한층 더 어두워졌다. 희주는 여전히 바깥에 있었다. 택시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희주를 불렀지만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희주는 번호판의 숫자를 적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었다. 곧 비가 내릴지도 모른다는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앞차의 붉은 꼬리등 불빛이 점점 짙어졌다.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축축한 습기가 배었다. 계속 틀어놨던 에어컨이 갑자기 춥게 느껴졌다. 그러다가 먼 하늘에서 번쩍 하고 섬광이 빛났다.

소리 없는 번개가 어둑해진 하늘을 몇 갈래로 찢었다가 이내 사라졌다. 그 번쩍임이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 눈을 깜박이고 나면 모든 게 착각처럼 느껴졌다. 희주는 그 빛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면 알고 있으면서도 신경 쓰지 않는 것인지도 몰랐다. 당장 가까운 곳에서 떨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아직은 소리도 닿지 않을 정도로 멀리 있으니까.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으면 바깥의 풍경은 여전히 태평스러웠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몇 방울씩 산발적으로 떨어지다가 곧 폭우가 됐다. 말라카에서 내렸던 스콜보다 훨씬 세찬 비였다. 빗줄기는 택시 보닛을 흠씬 두드렸다. 둔탁한 드럼 연주가 시작된 것처럼 굉장한 소음이 택시 안에 가득 찼다. 구경꾼은 손등으로 머리를 가리고 서둘러 자신의 차로 돌아갔다. 조금 전까지도 사진을 찍고 있던 희주는 사람들과 이리저리 뒤엉키는 바람에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봐도 내가 앉은 곳에서는 전혀 보이지가 않았다.

그 사이 빗줄기는 더욱 굵어졌다. 와이퍼를 켜지 않은 앞 창에는 빗물이 차올랐다. 섣불리 나갔다가 희주와 엇갈리게 될 것 같았다. 택시 안에서 희주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앞문이 열리고 택시 기사가 들어왔다. 희주가 어디 있냐고 묻자 그는 대답 대신 희주의 카메라를 건넸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머리칼에 묻은 물기를 함부로 털어냈다. 내가 흥분해서 다시 한번 물어보니까 그는 웃으며 손가락으로 오케이를 그렸다. 괜찮다고. 모든 게 괜찮을 거라고. 이번만큼은 그의 영어를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조금 더 가까운 하늘에서 번개가 내렸다. 이번에는 새하얀 불빛이 순식간에 울창한 팜나무 숲 위로 떨어지는 게 선명하게 보였다. 그 빛이 너무 강렬해서 눈을 감아도 잔상이 사라지지 않았다. 더는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어 문을 열고 희주를 찾으러 나갔다. 어느새 사고 현장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붉은 깃발을 흔들던 남자는 트럭에 올라타 있고, 도요타 주인도 운전석으로 돌아가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들은 빗속에 우산도 없이 돌아다니는 나를 이상하게 보는 것 같았다. 내가 창문을 두드리며 동양인 여자를 못 봤냐고 묻자 모른다는 식으로 고개만 돌렸다.

버스에 올라탔을까 싶어서 버스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흑인 운전사는 문을 열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사람을 찾고 있다고 하니까 들어오라는 것처럼 검지를 까딱거렸다. 계단을 올라 운전석 옆에서 잠시 물기를 털었다. 고맙다고 인사하는데 선반 위에 붙어 있는 손도끼가 보였다. 내가 멍하니 바라보자 필요하냐는 듯 손도끼를 떼어내 내게 건넸다. 나는 손사래를 치고 버스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버스 안에는 손님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좌석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걷는데 승객 한 명이 창밖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곳은 가드레일 너머였다. 팜나무가 우거진 숲 바로 앞에 희주가 서 있었다.

당장 버스에서 내려 도로를 벗어나 가드레일로 향했다. 그동안 빗줄기가 조금 가늘어졌다. 난간 앞에서 희주를 크게 소리쳐 불렀다. 빗소리 때문에 내 목소리가 전혀 닿지 않는 것 같았다. 가드레일을 뛰어넘어 조심스레 경사로를 내려갔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했지만, 한순간 미끄러져 흙탕물 위로 굴러떨어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흙과 빗물로 범벅이 됐다. 몸 전체가 욱신거렸고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입에서는 모래가 씹히고 눈가에서 흙비가 흘렀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발이 진흙 속에 빠졌다. 네 발로 거의 기다시피 몸을 이끌고 겨우 희주에게 다가갔다.

햇볕에 그을린 희주의 어깨 너머로 아직 베어지지 않은 팜나무 숲을 올려다보았다. 팜나무는 밑에서 보니 높이가 더 장대했다. 길고 곧은 나무 기둥이 하늘 끝에 닿을 것 같았다. 그 꼭대기에는 날카롭고 커다란 잎사귀가 비를 맞으며 흔들렸다. 그리고 그 위로 또 한번 밝은 빛이 번쩍였다. 플래시가 터진 듯 주변이 환해졌다가 곧바로 다시 어두워졌다. 희주가 놀라서 어깨를 움츠렸다. 다시 굵어진 빗방울들이 희주의 어깨에 부딪혀 잘게 부서졌다. 어깨에 닿고 튀어 오르는 비의 파편 때문에 희주가 우는 것처럼 보였다. 그동안 수없이 희주의 뒷모습을 사진으로 찍었지만 희주의 눈에 보일 풍경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희주는 지금 울고 있을까? 어둠 속에서 나무는 키가 컸고, 숲의 더 깊은 안쪽에는 키가 큰 나무보다 더 키가 큰 나무가 수없이 자라나 있었다.

<끝>




  <당선소감>


   "소설만이 유일한 길… 오만하지 않게 쓸 것"


이번 소설을 쓰면서 제일 괴로웠던 건 제가 어쩔 수 없는 한국 남자, 줄여서 ‘어한남’ 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었습니다. 솔직히 나 정도면 괜찮지 않나 싶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한다고 착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소설을 쓸수록 내가 정말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해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예전에는 소설을 쓰면 무언가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유년의 상처라든지, 내 마음속의 복잡하고 양가적인 감정, 또는 타인이나 각종 사회문제 같은 것을 말이죠.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너무 많습니다. 제 소설은 대부분 무용하고, 저는 뭔가를 이해할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결국은 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소설을 쓰는 것만이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입니다.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그래도 끝까지 마주하며 이해해보려고 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부족한 제게 등단의 기회를 준 심사위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랜 시간 고독한 글쓰기를 함께 해준 문우들, 저 대신 등단의 꿈을 꾸어주신 장모님, 아버지가 되어주신 장인어른, 누구보다 뛰어난 소설적 재능을 갖고도 회사 일만 열심히 하는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먼 곳에서 응원해주는 형제들과 하늘에서 지켜보고 계신 부모님께 수상의 영광을 돌립니다. 끝으로 좋은 소설을 쓰려면 좋은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한다는 걸 깨닫게 해준 아름답고 동그란 하성란 선생님께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마움을 전합니다.


  ● 1987년 서울 출생
  ● 한국외대 노어과 중퇴, 육군3사관학교 졸업
  ● 은행원(IBK 기업은행)


 

  <심사평>


  한정된 공간·시간 활용하는 솜씨 돋보여… 결말의 배치도 신선했다


예심 통과작 총 13편은 대체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가진 인물들이 그것에서 벗어나거나 해결하려는 크고 작은 고군분투의 서사에 가까웠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의 그 간절한 개인적 행동이 때로 소설의 완성도나 형식의 아쉬운 점을 가리는 순간도 있었다.

‘선착장에는 미데가’는 섬, 선착장이라는 주 공간과 인물들 간의 관계가 흥미롭게 다가왔다. 그러나 미데는 왜 섬을 떠났고 언제부터 떠나려고 했었는가? 이 모녀는 어쩌다가 이런 관계가 되었을까? 하는 등등의, 소설을 이해할 수 있는 몇 가지 의문들이 끝내 풀리지 않았다. ‘나’라는 일인칭 시점 인물을 독자에게 소개하는 지점에 대한 생각을 더 해보기 바란다는 조언을 드리고 싶다. ‘론 포포’는 “도망친다는 건 무언가로부터 원치 않게 떨어지는 일이기도 하잖아” 등의 인상적인 문장들이 눈에 띄긴 했으나 또 그만큼의 비문들이 곳곳에서 보였다. 중국의 ‘빨간 모자’인 동화 ‘론 포포’로 십대의 임신과 낙태 문제를 연결한 지점이 효과적인가? 하는 질문 앞에서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당선작으로 결정한 ‘일인칭 컷’은 한정된 공간과 시간을 활용할 줄 아는 솜씨가 돋보였다. 희주라는 인물의 훼손당한 어떤 감정의 컷들을 보여주려고 시도한 점이나 그것을 내가 빗속에서 키가 큰 팜나무 숲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장면으로 배치한 결말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주에게 팜나무란 무엇인지, 마치 울고 있는 듯 팜나무를 올려다보는 희주를 지켜보는 나에게 그 컷은 “삼인칭 피사체에 불과”했던 그 이전과 어떤 변화를 느끼게 하는지 모호하다는 점들이 못내 마음에 남았다. ‘일인칭 컷’이 “인물보다는 배경에 초점”을 맞춘다고는 해도 희주라는 인물을 한번은 독자에게 정면으로 한 컷 정도 남겨주었다면 어땠을까. 이 작품이 당선자에게 더 설득력 있고 개성적인 ‘이야기의 컷’들을 독자에게 들려줄 수 있는 디딤돌이 되기 바란다.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모든 응모자께는 격려의 인사를 보낸다.

 

심사위원 : 권지예, 조경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