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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삼대 / 임규연

 

등장인물


동만 80. 남. 안락사 대상자인 할아버지.

호희 58. 남. 동만을 위해 방공호를 만든 아들.

규범 26. 남. 동만의 안락사 집행관인 손자.

윤희 49. 여. 호희의 전처.


시간 여름. 자정 무렵에서 동틀 녘까지.

장소 오래되고 허름한 단독주택.

무대 중앙에 앉은뱅이 식탁이 있다. 그 위에는 시계가 있다. 좌편에는 좁은 방공호가 있다. 방공호의 문은 커튼으로 가려져 있다. 방공호 구석에는 오래된 라디오와 물이 나오지 않는 변기가 있다. 우편에는 미닫이식 현관문이 있다.

암전 상태에서 망치질하는 소리. 조명 켜지면, 호희가 방공호 안에서 변기를 수리하고 있다. 문 닫힌 방공호 밖에서 동만은 휑한 식탁 앞에 앉아 시계를 노려보고 있다. 옷소매로 땀이 나는 이마를 문지른 호희가 변기 레버를 누른다. 변기의 물은 차오르지 않는다. 호희는 레버를 몇 번 더 누르다 포기하고 망치를 내려놓는다.

호희 (라디오를 들어 이곳저곳 살피다 한숨) 티브이라도 놔드릴 걸 그랬나… (후회하다 고개를 세차게 젓는다) 아냐. 괜히 주변에 의심만 살 거야. (라디오를 켜서 신호를 잡는다) 좋기만 하네, 뭐…

호희, 웃으며 라디오 채널을 바꾼다.

DJ (목소리만) 지난 새벽, 80세 노인 안락사 법안이 노인의 인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한 인권단체가 국회를 무단 점거하는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호희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진다) 그러나 지난봄 실시했던 관련 통계에 의하면 국민 다수가 법안 유지에 찬성하여 한동안 법안 폐지는 거론되지 않을 전망입니다.

호희, 홀린 듯 라디오의 음량을 키운다.

DJ (목소리만) 이 법안은 2020년 코로나 사태 이후 환경오염으로 말미암은 식량난 때문에 청년들의 부양 부담이 과중하여 마련된 정부의 대처 방안인데요. 80세의 노인을 안락사하는 것이 법안의 주요 내용입니다. 이를 통해 안락사 집행관이라는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되었으며 법안 실시 이전보다 청년들의 자살률은 낮아지고 행복도는 상승했음을 여러 통계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활발하게) 우리 청취자 여러분은 이 상황을 어떻게 보시나요? (웃으며) 네, 4028님이 의견을 보내주셨는데요. 저 또한 노인 부양은 청년의 의무가 아니란 것에 동의합니다.

호희가 라디오를 확 끈다.

호희 염병하네…

호희, 망치 넣은 공구함 들고 방공호 밖으로 나온다. 동만은 여전히 시계를 노려보고 있다.

호희 (공구함을 구석에 내려놓고) 아버지, 시장하시죠?

동만 (고개를 젓는다)

호희 에이, (밝은 척하며) 그래도 생일상은 받으셔야지. 조금만 기다리세요.

동만 (호희를 바라본다)

호희 (개의치 않고 바쁘게 음식들을 나른다)

동만 (한숨)

호희가 몇 번 왔다 갔다 하자 식탁 위는 곧 음식들로 가득 찬다. 동만은 음식들을 외면한 채 보리차만 벌컥벌컥 마신다.

동만 (끊임없이 음식을 나르는 호희를 바라본다) 그만 가져와라.

호희 (외면한다)

동만 (한숨) 다 못 먹는다.

호희 (고구마 케이크를 들고 온다) 이것만요.

동만 (호희를 바라본다)

호희 (동만을 바라보다 외면하고) 내일은 꽃게 매운탕 할게요.

동만 (시계를 바라보며) 내일…

호희가 식탁 앞에 앉는다. 동만은 육전이 담긴 그릇을 빤히 바라보다 바닥에 내려놓는다.

동만 이건 아껴뒀다가 너 먹어라.

호희 (외면하고 육전을 식탁 위에 올려놓는다)

동만 (다시 육전과 함께 여러 반찬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그럼 규범이한테라도 줘라. (씁쓸하게 웃으며) 그 애가 이걸 참 좋아했는데… 네 엄만 너희가 올 때마다 이걸 한 소쿠리씩 해놓았어. 매번 지겹지도 않았는지… 고 기름 냄새만 맡아도 뿌듯하다면서…

호희 (동만을 바라본다)

동만 할머니 보내자마자 부모가 이혼하고… 네 아들 참 힘들었을 게야. (숟가락 들며) 너무 나무랄 생각 마라. 험한 세상이잖니.

호희, 자기 국그릇에서 고기를 가득 퍼다 동만의 숟가락에 놓는다. 동만이 그것을 우적우적 씹어 삼킨다.

호희 아무리 그래도 저는 그놈 이해 못 해요. 말이 공무원이지, 사실 아버지 같은 사람들 골라 죽이는 저승사자 아니냐고요. (실소) 안락사 집행관? 다 저들 좋자고 하는 헛소리예요.

동만 더 말하지 마라. 걔 속도 말이 아닐 게다.

동만, 밥을 국에 말아 푹푹 떠먹는다.

호희 체하시겠네. 천천히 드세요.

호희가 김치를 손으로 쭉 찢어 동만의 숟가락 위에 놔준다. 김치 국물이 묻은 손가락을 쪽쪽 빤 호희는 밥을 한술 떠먹는다. 동만은 호희를 바라보다가 급하게 그릇을 비운다.

동만 (시계를 바라본다) 이제 오 분…

호희 (숟가락을 내려놓고 케이크에 긴 초를 여덟 개 꽂는다)

동만 사람은 세상 흘러가는 대로 산다. 그게 잘못인 줄 모르고 남들이 하니까 거기에 스며가는 거야. 안쓰럽고 딱한 거지.

호희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초에 불을 붙인다) 아버지는… 그 애가 밉지 않아요?

동만 (외면한다)

호희,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른다. 동만은 노래가 끝나길 기다렸다가 초를 불어 끈다. 호희는 큰절을 한 번 하고 케이크를 잘라 동만의 밥그릇에 옮겨준다.

호희 아버지 좋아하시는 고구마 맛이에요. 어젯밤에 사 온 거라 조금 굳었어.

동만 (미소 지으며 케이크를 떠먹는다) 괜찮아.

호희 (동만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동만 입맛이 없어?

호희 (고개를 젓는다)

동만 그럼 왜 안 먹어.

호희 (고개를 푹 수그린다)

동만 근데 왜 그래?

호희, 눈물을 삼키기 위해 입안 가득 케이크를 욱여넣는다.

동만 말 좀 해보래도.

호희 아버지가… 불쌍해서……

동만 (괜찮은 척하며) 내가 왜? 뭐? 나는 아무렇지 않다. 그러니까 너도 울든지 웃든지 하나만 해.

동만, 케이크를 숟가락으로 푹푹 떠먹는다. 호희는 한 조각을 더 크게 잘라 동만의 밥그릇에 놓는다.

동만 (도로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지금 아비를 배 터져 죽게 하려는 거야? 됐어, 네가 더 먹어라. 난 그만 먹으련다.

호희 (케이크를 한 입 크게 떠먹는다) 맛있네요.

동만 (호희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는다)

호희 (숟가락을 내려놓고 시계를 본다) 이제… 들어가요.

동만 (시계를 본다)

시계 초침이 57, 58, 59의 눈금을 가리키다 숫자 12에 멈춘다. 시침과 초침 모두 12를 가리키고 있다. 자정을 알리는 알람이 울리고, 호희가 반사적으로 알람을 끈다.

동만 (힘겹게 일어난다)

호희 (먹먹하게) 아버지…

동만 문 열어라. 가자.

호희 (손등으로 눈가를 쓱 문지른다)

동만 울기는.

벌떡 일어난 호희가 방공호로 다가간다. 비밀번호를 치고 방공호의 문을 연다. 동만이 그 뒤를 따른다.

호희 아버지, 들어오세요.

동만 (얼마간 안방을 둘러본다) 여길 또 나와볼 날이 있을까?

호희, 고개를 푹 숙인 채 외면한다. 동만은 허탈하게 웃는다.

동만 그래, 가자.

동만, 방공호로 다가간다. 호희가 방공호의 문을 닫고 그 위에 커튼을 친다. 호희가 문 앞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린다. 동만은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침구를 힘겹게 편다. 눕기 전 라디오를 틀어 이곳저곳의 버튼을 누른다. 라디오에서 강진의 ‘땡벌’ 후렴구가 흘러나온다. 동만은 좁은 방공호를 둘러보며 노래를 따라 부른다.

동만 (쉰 목소리로) 난 이제 지쳤어요… 땡벌땡벌…… 기다리다 지쳤어요 땡벌땡벌……

방공호 바깥에 있는 호희에겐 동만의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울던 호희는 핸드폰이 진동하자 안락사 카운트다운 애플리케이션의 팝업 알람을 확인하고 진정한다.

호희 한 시간 안에 아버지를 구청에 신고하라고? 흥, 웃기는 소리. 우리 아버지는… (커튼으로 가려진 방공호를 흘깃 본다) 더 오래 사실 거야.

방공호 안, 동만은 덩실덩실 춤까지 추고 있다. 노래는 어느새 끊겨있다. 동만은 개의치 않고 계속 땡벌을 부른다.

동만 (흥이 나서) 혼자서는 이 밤이 너무너무 길어요…

노래를 다 부르자 호탕하게 웃던 동만은 곧 침묵한다. 라디오는 동만이 모르는 유행곡을 송출한다. 동만은 라디오를 끄고 바닥에 누워 잠을 청한다. 호희는 한참을 울다가 힘겹게 일어나 차렸던 상을 치우기 시작한다. 초인종이 울린다. 호희, 경계하며 문을 연다.

호희 (깜짝 놀라며) 당신…

윤희 오랜만이지? (호희 뒤를 슬쩍 본다) 들어가도 돼?

호희 (옆으로 비킨다)

윤희 (조심스럽게 신발을 벗고 안쪽으로 들어가 식탁 앞에 앉는다)

호희 (눈치 보다 윤희와 멀찍이 떨어져 앉는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윤희 오늘 아버님 팔순 아냐? (들고 온 쇼핑백을 호희 쪽으로 쓱 민다) 난 그런 줄 알고 왔는데.

호희 (쇼핑백을 외면하고 윤희를 바라본다) 알았어?

윤희 같이 산 세월이 얼만데 그걸 잊겠어. (시큰둥하게) 뭐, 이젠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긴 하지.

호희, 먹다 남은 음식들과 식기를 치운다. 윤희는 호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윤희 당신한텐 잘된 일이라고 생각해.

호희 뭐?

윤희 당신, 아버님이랑 사이 안 좋았잖아. 어렸을 때 어머님께 몹쓸 짓 많이 해서… 고생하고 괴로웠다고.

호희 (고개를 푹 숙인다)

윤희 애초에 우리 이혼하고 여기 들어와 산대서, 난 조금 걱정했어. 명절에 가끔 보는 것도 싫어서 자주 와보지도 않던 사람이… (온화하게 웃으며) 이제 다 컸나 싶고.

호희, 동만의 식기를 치울 생각을 못 하고 윤희의 맞은편에 앉아 케이크를 잘라 내민다.

윤희 (한 입 떠먹고 깨달은 듯이) 이거 설마 아버님 생일상이었어?

호희, 고개를 끄덕이고는 케이크를 한 입 떠먹는다.

윤희 당신 참 아버님 취향 모른다. 아버님 고구마 안 좋아해. 자기가 고구마 좋아했지.

호희 아니야. 아버지 고구마 좋아한댔어.

윤희 그건 당신이 고구마 좋아하니까 하는 소리지.

윤희는 케이크를 먹지 않는다. 호희, 커튼으로 가려진 방공호를 슬쩍 본다.

윤희 나랑 규범이 생일 케이크 할 때도 당신이 졸라서 고구마만 했잖아. 나랑 규범이는 생크림 케이크가 더 좋았어. 아버님도 빵보다는 아이스크림 취향이셨고.

호희 아이스크림?

윤희 아이스크림 케이크 말이야.

호희 (고개 푹 숙이고) 아버지가 아이스크림 좋아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

윤희 됐어. 내년에… (아차 한다) 지금이라도 나가서 사오던지.

호희 (고개를 젓는다) 내가 왜 그랬을까?

윤희 (질린 듯) 말을 안 해주는데 누가 당신 속을 알겠어. 하여튼. 저 쇼핑백, 아버님 생일 선물이야. 겨울 내복인데 아버님 M 맞나?

호희 겨울 내복?

윤희 (옅게 웃는다)

호희 (쇼핑백을 열어본다)

윤희, 케이크를 한 입 떠먹으며 호희의 눈치를 살핀다.

호희 이거 명품이네? 비싼데 왜 이런 거까지 사 왔어.

윤희 아버님은 나한테 잘해주셨거든.

호희 (내복을 개켜서 쇼핑백 안에 도로 넣는다)

윤희 (눈치 보다가 결연하게) 나 재혼해.

호희 …그래?

윤희 어. (반지를 끼운 손가락을 보여주며 웃는다) 내달 중순에. 아버님께 알려는 드려야 할 거 같아서.

호희 (윤희를 보다) 행복해 보인다.

윤희 응. 너도 좋은 사람 만나.

호희 난 그런 거에 관심 없어.

윤희 그래서 우리가 이혼했나 봐.

호희 (윤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윤희, 시계를 힐끔 보곤 일어선다.

윤희 이제 가봐야겠다. 신랑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호희 (윤희를 따라 일어난다) 저기….

윤희 (미닫이문을 열고 나가려다 멈춰 선다)

호희 규범이랑 같이 살아?

윤희 걔 독립한 지가 몇 년인데. 가끔 전화만 하는 거지, 뭐.

호희 (아쉽다는 듯) 윤희야.

윤희 왜 또.

호희 고맙다고. 결혼 축하해.

윤희 (웃는다) 너 이제 다 컸구나. (문을 닫으며) 잘 살아.

호희, 식탁 옆에 세워둔 쇼핑백을 들고 방공호 문의 비밀번호를 누른다.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리자 자고 있던 동만이 부스스한 모습으로 일어난다. 문을 열고 호희가 들어온다.

호희 (동만의 몰골을 보고) 주무시는 줄도 모르고. 죄송해요.

동만 (잠긴 목소리로) 아니다. 뭐 잊은 거라도 있냐?

호희 그건 아니고요. (동만의 앞에 앉아 쇼핑백을 내민다) 아까 규범 엄마가 왔다 갔어요. 아버지 선물이래요. 한번 꺼내 보세요.

동만 참, 늙은이 뭐가 이쁘다고 이런 걸 사 와. (내복을 꺼내 상의를 입어본다) 잘 맞고 예쁘네. 고맙다고 전해줘라.

호희 윤희, 재혼한대요.

동만 그래? (옅게 웃으며) 그 앤 속이 야무져서 어떻게든 잘 살 거다. 누군진 몰라도 횡재했네, 그놈.

호희 (동만을 바라보다) 아버지.

동만 (호희를 바라본다)

호희 (망설이다) 아이스크림 케이크 좋아하신다면서요. 왜 제가 고구마 케이크 사 왔을 때 뭐라 안 하셨어요?

동만 규범이 어멈이 말해줬냐?

호희 (고개를 끄덕인다)

동만 그야… 네가 고구마 좋아하니깐.

동만이 호희의 손을 다정하게 잡는다.

동만 너 어렸을 때 못 먹인 게 한이지. 언제 이렇게 컸는지…

호희 (우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벌떡 일어나 변기로 향한다) 주무세요. 변기 공사가 아직 안 끝났어요. 아버지 새벽마다 화장실 가시잖아. 얼른 끝내야 하는데 나 혼자 하려니 시간이 너무 걸려요.

동만 (호희의 등을 보다 돌아눕는다) 그래. 얼른 손봐라.

호희, 변기 앞에 쪼그려 앉아 동만의 야윈 등허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호희 앞으론 아버지 드시고 싶은 거, 많이 해드릴게.

동만 그래. 좋다.

호희가 변기 이곳저곳을 만진다. 좀처럼 차오르지 않는 물에 호희가 수도 장치를 확인한다. 그러는 동안에도 호희의 핸드폰은 계속해서 진동한다. 하지만 호희는 변기를 조금 더 거세게 두드리며 핸드폰을 확인하지 않는다. 결국은 동만이 잠에서 깬다.

동만 왜 안 봐. 핸드폰이 자꾸 울리는데.

호희 (애먼 변기를 자꾸 두드린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주무셔요.

동만 이렇게 시끄러운데 어떻게 자냐, 이놈아.

동만, 힘겹게 일어나 호희의 핸드폰을 대신 확인한다. 호희는 동만을 밀어내지 않고 체념한 듯 우두커니 서 있다. 동만이 애플리케이션의 팝업 알람을 확인하고 체념한 듯 웃는다.

동만 그냥 그만할까?

호희, 어느새 울고 있다.

동만 난 참 복 받은 놈이야. 요즘 세상에 늙은이 죽는다고 우는 사람이 어디 있냐. 그러니까… 난 너랑 같이 산 것만으로도 여한이 없어.

호희 (고개를 젓는다)

동만 너 혼자 날 어떻게 숨기려고. 매년, 매달 찾아와서 온 집구석 들쑤셔 놓을 텐데. 마음 편히 살 수 있겠어? 나는 이만하면 됐다. 내 아들 고생하는 거 보고 싶지 않아.

호희 (고개를 젓는다) 안 돼요. 안 돼….

동만, 핸드폰에 뜬 새로운 알람을 확인한다.

호희 저한텐 이제 아버지밖에 없어요. 같이 밥 먹을 가족이 아버지뿐이라고요. (동만의 손을 간절하게 잡는다) 아버지 가시면 저한텐 아무도 없어요.

동만은 넋이 나간 얼굴로 핸드폰을 건네준다.

동만 아범아. (헛웃음) 규범이가 온다네.

호희 예? (핸드폰을 받아들고 알람을 확인한다)

화면에는 안락사 집행관이 오고 있다는 문자와 안락사 집행관의 번호가 떠 있다. 규범의 전화번호다.

동만 내가 저 번호를 어떻게 잊겠어. 먼저 전화하면 닳을까 해서 누르고 지우기만 했던 저 번호를.

호희 아버지. 이건 기회예요.

동만 (호희를 본다)

호희 아무리 일이라도, 제 할아버지를 죽일 순 없어요. 규범이가 담당 집행관이라면, 눈감아달라고 부탁해봐요.

동만 (불안한 목소리로) 그 애가 그래 줄까?

호희 당연하죠.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 보러 간다고만 하면 그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애예요. (불안함을 감추며) 분명 도와줄 거예요.

동만 (지친 듯) 그래, 네 말대로 하자. 나도 차마 규범이 손에 갈 순 없어. 제 할아비 죽여놓고 그 마음 여린 애가 어떻게 살꼬.

호희가 동만을 꽉 안아주고 방공호 밖으로 나온다. 동만은 좁은 방공호 안에 우두커니 서 있다. 동만이 고개를 푹 떨군다.

동만 (허공을 보며 하소연하듯) 호희 태어나고 내가 스물둘이었나 그랬어. 아버지 노릇 하기보다는 술 먹고 노는 게 좋았지. 내가 참 철이 없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렸는데 이미 날 너무 미워하더라고. 그래서 자주 보지도 못했어. 갑자기 이혼했다고 찾아왔을 땐 정말 놀랐는데. 내가 아버지 노릇 좀 해보려고 곁에 둔 게, 사실은 쟤가 날 지켜주려고 한 거였어. 내가 너무 늦은 거야. 이미 아버지가 필요한 애가 아닌걸. 알고는 있었는데…

동만이 지친 듯 침구에 눕는다.

호희 (방공호 문을 커튼으로 꼼꼼히 가린다) 케이크는 버리기 아까운데. (망설이다 케이크도 치운다)

초인종 알람 소리. 깜짝 놀란 호희가 들고 가던 케이크를 떨어뜨린다. 식탁에는 육전과 동만의 밥그릇이 남아있다. 호희가 급하게 걸레를 가져와 바닥을 닦는다. 초인종 알람이 한 번 더 울린다.

규범 아빠? 나야.

호희는 문을 열지 케이크를 치울지 갈팡질팡하다 결국 케이크를 마저 치운다. 당혹감에 동만의 밥그릇을 가져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호희가 문을 연다.

호희 (가쁜 숨을 몰아쉬며) 들어와라.

규범 (호희를 의심스럽게 쳐다본다)

까만 정장을 차려입은 규범이 커다란 가방을 멘 채 호희의 뒤를 따라 들어오며 미닫이문을 쾅 닫는다. 식탁을 흘긋 본 규범이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호희 (뒤늦게 동만의 밥그릇을 발견하고 태연한 척 그것을 치운다)

규범 (바닥에 앉아 육전을 맨손으로 집어 먹는다) 이거 아빠가 한 거 아니지? 맛있네.

호희 갑자기 와서 정신이 없네. (규범의 눈치를 살핀다) 연락도 없이, 왜 왔어?

규범 (기름기가 묻은 손가락을 쪽쪽 빤다) 임동만 씨는?

호희 뭐?

규범 안 들려? 임동만 씨 어디 갔냐고.

호희 (헛기침하며) 글쎄? 저녁부터 안 보이셨어.

규범, 못 믿겠다는 듯 벌떡 일어나 집 안 곳곳을 이리저리 살핀다. 호희가 규범을 멈추기 위해 일어서다 발을 헛디뎌 대자로 넘어진다.

규범 (호희를 일으켜준다) 왜 그래, 여기 뭐 흘렸어?

호희 (아픈 것을 참으며) 아냐. 과일 좀 먹을래?

규범 됐어. 배 안 고파. (호희를 슬쩍 보며) 엄마 왔다 갔다며?

호희 …어.

규범 엄마가 얘기했어?

호희 ……

규범 했구나. (기지개 켜며) 아저씨, 좋은 사람이야. 아빤 아니었지만.

호희 그래.

규범이 가방을 뒤적인다. 호희, 가방을 보려고 한다.

규범 건들지 마. 이거 나름 공적인 물건이야.

호희 뭐?

규범이 가방의 지퍼를 열어 작은 상자를 꺼낸다.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약통 여러 개와 일회용 주사기 묶음이 들어있다.

규범 (천연덕스럽게) 오늘 임동만 씨 팔순 아냐? 그럼 당연히 안락사 집행해야지. 나도 공무원이야, 아빠. 공무원이 직무 유기하면 어떡해.

호희 임동만 씨가 아니라, 네 할아버지야.

규범 (한숨) 가족이라고 봐주면 나 잘려. 내가 어떻게 공부해서 공무원 됐는데.

호희 넌 할아버지가 불쌍하지도 않아?

규범 그럼 나는? 고생만 죽어라 하다 겨우 여기 올라온 난 안 불쌍해? 이게 다 아빠한테 효도하려고 이러는 거잖아. 근데 아빠가 이러면 어떡해.

호희 애초에 나이 들었다고 사람을 죽여? 그게 법이야?

규범 그럼 어떡해?

호희 뭐?

규범 아빠가 어떻게 할 거냐고.

규범이 상자를 닫는다.

규범 코로나 겪으면서 플라스틱 사용 많아지니까 환경오염 심해졌지, 환경오염 심해지니까 먹을 것도 줄어들지. 작년에도 우리나라에서 오백 명이 굶어 죽었어. 근데 그거 다 어른들이 한 일이잖아. 근데 책임은 나 같은 젊은 애들이 지고 있어. 그게 맞아? 젊은 사람 위해서 살 만큼 산 노인들 편하게 보내주자는 게 뭐가 나빠. 이 방법 아니면 무슨 뾰족한 수라도 있어?

호희 너는 슬프지도 않아? 이제는 네 할아버지 일이야.

규범 그게 중요해? 다들 그렇게 살아.

호희 (말문이 막힌다)

규범 임동만 씨? 여기 계신 거 알아요. (호희를 흘긋 보고) 어디 계셔?

호희는 식탁 앞에 앉아 시계를 본다.

호희 나도, 너도 언젠간 이렇게 죽게 될 거야.

규범 그렇겠지. 그게 세상을 위해서 옳은 거니까.

호희 막상 네 일이 되면, 넌 이렇게 뻔뻔하지 못할 거야.

규범 (커튼을 걷자 방공호의 문이 보인다) 이게 뭐야?

규범이 방공호 문의 손잡이를 돌린다. 문은 열리지 않는다. 방공호 안에서 잠을 자고 있던 동만은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깬다. 동만이 집에 규범이 왔음을 감지하고 긴장한 채 이불을 정리한다. 체한 듯 배를 부여잡고 헛구역질하던 동만이 변기로 향한다. 물은 여전히 차오르지 않는다. 동만이 핸드폰을 꺼내 든다.

호희 (벌떡 일어나) 거기서 떨어져.

규범 문이나 열라니까?

호희의 핸드폰에서 전화 알람 소리가 들린다. 동만의 전화. 호희가 전화를 받는다.

동만 (끙끙대며) 아범아. 밖에 누구 있냐?

규범이 전화를 받는 호희를 보고 비밀번호를 마구잡이로 누른다.

호희 (규범을 노려본다) 예.

동만 (덜컹거리는 문을 바라보다) 규범이냐?

호희 (고민하다) 예.

규범 이거 열라니까?

동만 (호희의 목소리 사이로 작게 들리는 규범의 목소리에 문으로 다가간다) 문을 열어다오.

호희 안 돼요.

동만 나 화장실이 급해. 여긴 변기도 말썽이고, 너무 춥다.

호희 (망설인다)

규범이 계속 문을 두드린다.

규범 임동만 씨! 지금 안 나오시면 괜히 아빠만 과징금 물어요.

동만 (문에 손바닥을 가져다 댄다) 어차피 이렇게 될 일이었어.

호희 (규범을 밀쳐내고 문을 가로막는다) 절대 안 돼요. 전 포기 못 해요.

호희가 먼저 전화를 끊어버린다. 화가 난 규범이 벌떡 일어나 호희에게 달려든다.

규범 (버럭) 아니, 도대체 왜 이래? 안 아프게 죽는 약이라니까! 아빠가 이러면 나도 곤란해. (문을 강제로 열려고 하며) 임동만 씨!

호희, 규범의 뺨을 때린다.

호희 네 할아버지야. 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입학식 졸업식 모두 오셔서 축하해주셨어. 그게 쉬웠을까? 너 초등학생 때 천안으로 소풍 가는 거 아시고 떡집에서 떡 삼십 인분 해오신 거, 기억나? 그거 애들이랑 나눠 먹으면서 네 할아버지라고 자랑했다며. 아버지가 너를 얼마나 예뻐하셨는데. 네가 어떻게 이래!

규범 (주춤한다)

호희 나한테 다 방법이 있어. 너만 살짝 눈감아주면, 네 할아버지 구할 수 있다고!

규범 아버지… 나는…… (의문스럽게) 옳은 일을 하는 게 아니야?

방공호 안에서 동만은 아픈 배를 부여잡는다. 고민하던 동만이 문 쪽으로 다가온다.

동만 (문 손잡이를 잡고) 난 죽는 게 무섭지 않아.

동만이 흐느낀다. 방공호 밖에선 호희와 규범이 엉켜 싸우고 있다.

동만 내가 죽으면, 누가 저 애 곁에 있어 줄까?

동만은 고민하다 문고리를 돌린다. 방공호 문이 열린다. 호희는 아연실색한 얼굴로 동만을 바라본다. 갈등하던 규범이 우발적으로 호희를 방공호 안에 밀어 넣고 문을 닫는다. 규범은 급하게 앉은뱅이 식탁으로 문을 막는다.

호희 (문을 열려고 애쓰며) 문 열어! 야!

규범, 숨이 가빠 헉헉댄다. 동만은 울부짖는 호희를 보다가 규범의 등을 쓸어준다. 규범은 소스라치게 놀라 동만을 밀쳐내고는 상자에서 약통과 주사기를 꺼낸다. 호희가 비명을 지른다. 동만이 식탁 앞에 앉는다.

동만 (식탁 위에 가득한 육전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규범 (동만을 흘깃 본다) 왜… 할 말 있으세요?

동만 왜 다 안 먹었냐. 굶고 다니지 말라니까는.

규범 (입술을 꾹 깨문다)

규범, 망설인다. 동만이 규범의 모습을 보며 옅게 웃는다.

동만 네가 이렇게 나랏일을 하다니. 네 할미가 보면 좋아했을 텐데….

방공호 문에 달라붙어 쾅쾅 두드리던 호희는 문틈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는 애걸하며 부르짖는다. 규범이 호희를 보다가 이내 고개를 세차게 젓는다. 동만이 그런 규범에게 손목을 내민다.

동만 (고개를 떨군다) 난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

규범이 상자를 열어 주사기와 약통을 꺼낸다. 동만은 그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다. 규범, 주사기로 약통의 약물을 빨아들인다. 규범의 손이 떨리고 있다.

동만 (규범의 손을 간절하다는 듯 꽉 잡는다) 얘야.

규범 (동만을 본다)

동만 나는 괜찮다만 훗날 네 아비는 지켜다오. 내 마지막 부탁이야. 또 네가 여든이 되면, 네 가족이 널 기어코 해치려 들면 말이다. (방공호를 가리키며) 저곳에 들어가 몰래 숨어라. 그렇게 너흰 행복하게 살아. 나는 너흴 행복하게 해주련다.

동만이 눈을 꾹 감는다. 규범은 그런 동만을 보다가 주사기를 식탁 아래로 떨군다.

규범 할아버지.

동만 아이고, 내 똥강아지. 울긴 왜 울어…

규범이 벌떡 일어나 주사기를 발로 차 버린다. 주사기가 구석으로 떨어진다. 어안이 벙벙한 동만을 규범이 오랫동안 바라본다.

규범 (정신이 번쩍 든 듯) 못하겠어요.

동만 (규범을 바라본다)

규범 (방공호 문을 막았던 식탁을 옆으로 치운다) 이건… 이건 아니야.

방공호에서 나온 호희는 헉헉대면서 규범의 멱살을 잡는다. 그러다 멀쩡히 살아서 식탁 앞에 앉아있는 동만을 보곤 규범을 껴안는다.

규범 (결연하게) 나도 도울게.

규범이 방공호로 들어가면, 호희가 공구함을 들고 그 뒤를 따른다. 변기를 손보는 부자. 망치질하는 소리. 동만은 시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탁 엎어둔다.

막.




  <당선소감>


   "오늘을 망설이던 내가 내일을 꿈꾸게 되었죠"


누군가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네 인생은 걱정이 안 돼, 넌 뭐든 할 거 같아. 하지만 저는 그 뒤로 숱한 밤을 자기 혐오에 허덕였습니다. 내가 무언가를 해내야만 했나? 지금껏 나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였나? 끝없는 공상에 묻혀 몸서리치던 밤마다, 나의 잠재력은 폐쇄된 내 안에 갇혀 영영 빛을 보지 못할 거라고 두려워하던 순간을 기억합니다.

그 시간에 저는 모래성처럼 존재했습니다. 견고하지만 나약하고 거대하지만 허전한 채로, 눈물을 닦아낸 휴지 뭉텅이를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사람을 위로하는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최선을 다해도 최악의 결과가 기다리던 때였습니다. 저는 강한 사람이 아니라 잘 참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다치고 부서져도 티 내지 않고 묵묵히 견뎌내곤 했습니다. 그래서 혼자만의 싸움이라고 하던 글을 쓰면서도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괜찮을 수 있었습니다.

우연처럼 만나게 된 수민, 세린, 미연, 희원은 오늘을 망설이던 제가 내일을 기대하게 했습니다. 소중한 친구 정원에게도 감사를 표합니다. 또 저에게 이 길이 어울린다고 하셨던 정일 선생님께 특히 감사드립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선생님께 배웠던 것이 제 안에 보석처럼 남아 여전히 반짝거립니다. 저의 변덕을 이해하고 기다려주신 부모님과 동생, 고양이 동생들에게 자랑스러운 가족이 되어 기쁩니다.

‘작가’는 저의 하나뿐인 꿈입니다. 초등학생 시절 도서관에 틀어박혀 한 학기에 삼백 권의 책을 읽어낼 때도, 당선 소식을 들은 지금도 변함없이 같은 꿈을 꿉니다. 이번의 기쁨이 일회성으로 휘발되지 않도록 앞으로 더 노력하는 작가가 되겠습니다.야.’


  ● 2000년 출생
  ● 백석예술대 1학년 재학 중


 

  <심사평>


  기발한 상황 설정에 눈길, 완성도까지 높아


101편의 응모작에 나타난 세상은 암울했다. 소재는 다양했지만, 현실을 비판하고 불합리, 불공정, 불안정, 부조리가 만연한 세상을 표면적으로 그리는 데 그친 작품이 다수를 차지했다. 기발한 상황 설정이 돋보이는 몇 작품이 있었으나 설정을 이끄는 캐릭터 구축이 미약했고, 어설픈 문제 제기와 감상적 마무리로 끝맺는 작품이 많았다.

본심에는 4편이 올랐다. ‘쇼윈도법’은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삼포시대의 청년이 부조금을 얻기 위해 신부 없는 결혼식을 치르려다 재판에 회부되고 장례까지 치르게 되는 과정을 판소리 형식을 차용해 전개한 해학미가 돋보였으나 급히 마무리되는 결말이 아쉬웠다. ’1022′는 정치인 가족을 중심으로 지적장애가 있는 아들까지 이용하는 인간의 탐욕과 위선을 비판하며 안정적인 극 구성과 전개력을 보였지만 내용이 익숙했고 새로움이 없었다. ‘김창식이 오고 있다’는 로또 당첨을 둘러싼 삶의 민낯을 적나라하고 리얼하게 그려내며 비루하고 피폐한 삶의 풍경을 보여주는 것엔 성공했지만 문제의식의 확장 없이 씁쓸함만 남겼다. 최종까지 논의가 집중된 ‘삼대’는 할아버지의 안락사를 집행하려는 손자와 막으려는 아들 삼대를 통해 섬뜩한 상황을 보여주며 현실의 문제를 제기했다. 상황 설정의 창의성과 각 인물의 딜레마가 사건 진행의 추진력을 적절히 제공해 돋보였다. 손자 캐릭터의 피상적 묘사와 예측 가능하고 진부한 결말이 아쉬웠지만 타 작품들보다 구성의 밀도감과 전반적인 완성도가 높다고 판단하여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 당선을 축하하며 앞으로 더욱 좋은 작품으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 오경택, 임선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