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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공감과 자기반성의 공동체 -최은영론- / 진기환

 

1. 공감의 힘

문학이 힘을 잃은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여기서 문학이 힘을 잃었다는 건 사회 전체의 문제를 떠맡던 ‘근대문학’으로서의 힘을 잃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변화는 우리 사회경제적 변화와 정확하게 맞물려 있는 것으로서 필연적인 것이다. 변화가 필연적인 것이라면 문제는 변화 이후의 문학이 어떠한 방법을 선택했는가이다.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달은 문학이 택한 것은 미시적이고 개인적인 영역을 깊게 파고드는 “내시경”(신형철)의 역할이다. 거대담론이 몰락한 지점에서 문학은 그것에 짓눌려있던 개인들을 호출했고, 그들의 삶을 보듬음으로써 새로운 문학적 주체들을 세우고자 했다. 이른바 ‘억압된 것들의 귀환’이라 불리는 것들인데, 문제는 이러한 움직임이 과연 얼마만큼의 성과를 거뒀는가에 있다.

문학이 사회의 아틀라스이기를 포기한 만큼 개인의 확실한 유희거리 혹은 위로와 치유의 영역으로 자리 잡았어야 했는데, 문학은 그렇지 못했다. 억압된 것들이 귀환했지만 ‘개인들’은 그들의 귀환에 주목하지 않았다. ‘개인들’은 영화와 게임을 자신의 유희거리 삼았고, 자기계발서를 위시한 각종 에세이를 통해 치유받고 위로받고자 했다. 어떠한 위치도 확보하지 못한 문학은 과거 ‘근대문학’으로서의 가치, 유희거리, 치유와 위로의 영역이 어정쩡하게 혼재된 채로 버림받았다. ‘개인들’에게 버림받은 문학은 일부 지식인들만이 읽고 소비하는 지적담론의 매개체로서 소위 ‘그들만의 리그’를 운영하는 것으로 치부되었다. 문단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어도 대중들은 작품을 읽지 않았고, 대중들이 관심을 가진 작품에는 평단이 소홀했다. 이처럼 한국문학은 다소 기형적인 위치에 놓여있다.

이 글에서 최은영을 주목하고자 하는 이유는 그의 작품이 이러한 기형적인 한국문학을 돌파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최은영처럼 평단과 독자들의 관심을 한꺼번에 받은 작가는 찾기 힘들다. 이 작가가 가진 무언가가 우리들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소리인데, 그것은 많은 평자들이 지적하듯 이 작가의 공감하는 능력에 기인한다. 최은영이 개인의 삶을 조망한다는 점은 여타의 한국문학과 같다. 그럼에도 최은영이 특별한 이유는 정서적인 공감력을 계몽의 양식삼아 분열된 개인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이어주려 하기 때문이다. 최은영은 누구보다 개인의 삶에 깊이 침투하여, 개인의 삶을 사회 속의 개인으로 환원시킨다. 이를 통해 최은영은 개인의 아픔이 개인의 영역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는 사실, 더 나아가 누군가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최은영 소설의 이런 특징은 물리적인 거리, 국적, 시대를 초월하여 다양한 양상으로 변주된다.

이런 특징에 대해 말해본다면 최은영이라는 작가에 대해, 더 나아가 우리 시대 소설의 역할에 대해서도 논할 수 있으리라. 또한 “공허한 대문자주의와, 소인주의와 쾌락주의의 미시세계에 자족하는 자폐적 소문자주의로 나뉘어 오래도록 정체”되어 있었던 우리 문학이 나아갈 길에 대해서도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갖춰져 있는지를 살펴보자.


2. 우울증의 세계에서 앓는 ‘여성’들

서영채가 『쇼코의 미소』의 해설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최은영의 소설은 우울증의 현실에 기초해있으며, 그 세계 안에 거친 남자 어른들을 위한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자리를 대신 채우고 있는 것은 여성들인데, 여기에서 여성은 물리적인 성별로서의 여성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성별과는 상관없이 남성중심 사회 혹은 주류적 질서에서 배제된 사람을 뜻한다. 라캉의 성차공식을 빌린다면 최은영 소설의 ‘여성’들에 대해 자세히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

라캉의 성차공식에 따르면 남성은 ‘모든 사람은 거세되어 있다(전체)/어떤 사람은 거세되어 있지 않다(예외)’의 짝으로 구성되어 있고, 여성은 ‘누구도 거세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없다(개별)/모두가 거세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비-전체)’의 짝으로 이뤄져있다. 이런 성별의 차이는 언어의 수행차원, 즉 발화의 방식에서 차이를 드러낸다. 우선 남성발화는 전체를 규정하고 나머지를 예외로 돌리는 형태로 진행된다. 전체에 포함되지 않은 예외들은 질서를 장악하고 있는 주체들의 완전성을 위해 배제된다. 그것이 배제됨으로 인해 주체들은 예외가 존재하지 않는 절대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남성발화는 절대적인 담론이나 질서의 유지를 위해 소수자나 예외적 존재들을 배제하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예외 없이는 전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예외는 전체를 보완해주기 위해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마치 “검정”이라는 단어가 의미를 갖기 위해서 “하양”을 비롯한 여타 다른 색들과의 대립이 있어야만 하는 것처럼 말이다.

여성발화는 전체를 규정짓고 나머지를 예외로 돌리는 남성발화와 달리 개별에서부터 시작한다. 전체를 확정하지 않은 채 개별적인 단수주어들이 확산되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들 개별은 언제나 전체가 되지 못한 ‘비-전체’로 남아있다. 이들은 상징적으로 거세되지 않아 상징적 질서에 제대로 편입되지 못한 개별주어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완전히 거세되어 있지는 않더라도 존재하는 한 상징적 질서의 어딘가에는 놓여있는 것이다. 여성발화는 상징적 질서의 어딘가에서 개별주어의 이름으로 전체에 균열을 가하고 거부감을 표시하는 발화라 할 수 있다. 전체와 개별에 대한 입장차이에서 시작되는 성차는, 남성적 길은 욕망의 길로 여성적 길은 사랑의 길에 도달하게 된다. 이는 주체의 완전성을 추구하는 남성발화와 개별의 고유성을 통해 유지되는 여성발화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최은영의 소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여성발화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남성발화가 지배적인 구조에서 그것에 대항하고 저항하는 형태로 여성발화가 나타난다. 아래와 같은 대목이 대표적이다.


“너도, 우리 후배라면 그런 여성적인 태도는 좀 버려야 할 것 같다? 말투도 그렇고 옷차림도 그렇고······ 나도 여자지만, 사회에 나와보면 참 융화가 안 되는 여자들이 많아. 툭하면 삐지고, 불평불만에. 남자들은 안 그러거든. 우리 대학 여자들이 좋다는 게 뭐야. 제3의 성이잖아. 여자지만 다른 여자들의 열등함은 지양해야지. 네 선배니까 말해주는 거지 누가 너한테 이런 말 해주겠니?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 없으면 사회 나가서 욕먹는다, 너.”

(중략)

“김연숙씨나 잘하세요. 여자인 게 그렇게 부끄럽고 괴로운 일이었어요? 여자들은 감정적이고, 분란 일으키고, 이기적이어서 조직 배반하기 쉽고, 여자의 적은 여자고. 그런 자기부정이 김연숙씨가 말하는 건강함이었습니까? 여자 후배들 앞에서 부끄러운 줄 아세요.”

- 「먼 곳에서 온 노래」, 197쪽-


해부학적인 의미에서의 여성은 우리 사회에서 주류질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 여성이 포기해야 하는 것 중 가장 큰 것은 바로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이다. 주로 남성집단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사회에서 예외적 위치로 벗어나지 않으려면,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버린 채 남성이라는 탈을 써야 한다. 이 사회에서는 오빠를 ‘형’이라고 불러야 하고, 매니큐어를 칠한 손톱과 가는 목소리, 그리고 내성적인 성격까지 부정당해야지만 주류적 질서에 편입할 수 있다. 미진은 그런 것에 반감을 품은 인물이다. 그녀는 노래패에서 전해 내려오는 “엄격한 선후배 문화, 남학생 중심으로 운영되는 집행부, 상명하복식 문화”에 하나하나 문제를 제기하며, 그 자리를 “개인의 자율적 선택과 평등한 관계맺음, 여성주의 교육”으로 채우고자 했다. 그러나 그것은 뜻대로 되지 않았고, 노래패는 미진이 러시아로 떠난 지 세 달 뒤에 문을 닫게 된다. 미진이 노래패에서의 실패를 맛본 후 러시아로 도피를 떠난 형국인데, 그녀의 러시아행을 도피라고만 단정지을 수는 없다. 소은이라는 인물이 있기 때문이다.

여성발화는 개별주어의 발화라는 특성상 독단적인 힘으로 세계에 균열을 가하기는 힘들다. 그것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개별주어들이 확산되며 하나의 서사를 이루어야 한다. 전체에 포함되지 않는 여러 개별주어들이 계속해서 호명될 때, 우리는 전체만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마치 미진의 사랑이 소은을 러시아로 호출하고, 율라와의 관계를 싹트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미진이라는 사람의 삶은 소은에게로, 율라에게로 옮겨가 새로운 관계를 형성시킨다. 이들은 서로 아프게 하고 많이 다퉜지만 결국 사랑으로 통하게 된다. 사랑은 이들을 이어지게 만들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까지 눈을 돌리게 만든다. 소설이 대체로 개별주어들을 통해 접근한다는 사실을 상기해본다면, 여성발화를 소설적 발화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소설적 발화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최은영의 소설은 그 자체로 서사의 힘이며, 우울증의 세계 안에 마련해놓은 위안의 공간이다. 이 위안의 공간 안에서 쇼코와 소유는 서로 가까워질 수 있었고(「쇼코의 미소」), 우드스탁은 투이에게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었으며(「씬짜오, 씬짜오」), 엄마는 죽은 이모의 영혼을 만날 수 있었다(「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또한 주희와 윤희는 서로 그리워했고(「지나가는 밤」) 이경과 수이는 서로를 마음껏 안을 수 있었다(「그 여름」). 우리는 그들이 서로를 위로하는 것을 통해, ‘개인’의 공감이 사회를 움직이는 하나의 힘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3. 자기반성의 서사

최은영의 소설에는 베트남 전쟁, 간첩조작사건 등 역사적으로 특수한 사건들이 자주 등장한다. 소설가가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 일은 특이한 일은 아니다. 문제는 역사를 다루는 방식에 있다. 최은영은 역사적 사건을 거대담론의 차원이나 거시적인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는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바로 개인이다. 최은영은 그들은 통해 상징적 질서에 편입되지 못한 개별주어인줄 알았던 ‘나’가 혹시나 상징적 질서가 유지되는데 일조하지 않았을까라는 자기반성의 이야기를 이끌어낸다. 역사를 비판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을 점검하는 것인데, 이러한 자기반성은 역설적으로 ‘역사’라는 남성발화에 균열을 가한다. 「씬짜오 씬짜오」를 살펴보자.


소설의 주인공 ‘나’는 독일의 한 마을에서 유년을 보낸다. 거기서 한 베트남 가족들과 각별한 관계를 맺었다. ‘나’의 부모는 평소에 “서로를 투명 인간처럼 대”하다가도 그들과 식사를 할 때는 자연스레 웃기도 하고 대화를 나누며 좋은 시간을 보냈다. ‘나’ 또한 친구인 투이와 상당히 좋은 관계를 맺고, 응웬아줌마와 호아저씨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 이들의 좋은 관계가 깨진 것은 식사자리에서 우연히 언급된 베트남 전쟁 때문이다.

일본의 식민 통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어른들의 말에 동요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드디어 나도 한마디 할 수 있는 기화가 왔다고 생각했다. 한국의 역사에 대해서라면 투이네 식구들보다 내가 더 잘 아니까, 아는 척을 한다면 엄마 아빠가 꽤나 뿌듯하게 생각해줄 것 같았다.

“한국은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 없어요.” 나는 그 말을 하고 동의를 구하기 위해 엄마 아빠를 쳐다봤다. 아빠는 아무 얘기도 못들었다는 듯이 내 쪽으로 눈을 돌리지 않았고, 엄마는 조용히 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국물이 짜지는 않은지 모르겠네.” 호 아저씨가 말을 돌렸다. 모두들 내 말을 무시하는 것 같아 서운했다. “정말이에요. 우린 아무도 해치지 않았어요.” 내가 말했다. 한국은 선한 나라라는 인상을 남기고 싶었고, 어른들의 대화에 자연스레 참여해 칭찬받고 싶었다.

(중략)

나는 마지막 용기를 쥐어짜서 독일어로 말했다. “한국에서 그렇게 배웠는데. 우린 아무에게도 잘못한 게 없다고. 우린 당하기만 했다고.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했는데……”

-「씬짜오 씬짜오」, 79쪽-


‘나’는 어른들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로, 한국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고 싶다는 선한 의도로 “한국은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 없”다고 말했다. 학교에서 배운 것이 지식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어린 학생입장에서는 한국을 “당하기만” 한 나라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한국군에게 가족을 잃은 응웬아줌마의 입장에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주인공의 삼촌 또한 전쟁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참전 군인의 신분으로. 아버지는 전쟁을 기억하는 방식이 응웬아줌마와는 달랐다. 응웬아줌마가 베트남 전쟁을 “구역질나는 학살”이라고 기억한다면, 아버지는 “누가 베트콩인지 누가 민간인인지 알아볼 수 없는 상황”이었을 거라며 학살을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한다. 아버지는 더 나아가 “이미 끝난 일”이라며 더 이상은 잘못을 빌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사실상 두 가족의 유대관계는 여기서 끝나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나’의 태도다. ‘나’는 베트남 전쟁을 단지 “미국 정부의 실책이었고, 미국으로서는 아무런 득도 보지 못한 전쟁”이라고 설명하는 것에 대해 “그런 식의 설명을 하는 건 가슴 아픈 일”이라 생각하며 어렴풋이 문제점을 느낀다. ‘나’가 그것을 감지한 것은 우연히 응웬아줌마의 가족사진을 본 후부터다. ‘나’는 “내 또래의 여자아이, 다연이 또래의 아기 사진”을 본 후로 “그 사람들의 얼굴이 내 등 뒤에 달라붙기라도 한 것”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 이상한 느낌은 이내 “막연한 두려움”으로 바뀌는데, 그것은 그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을 막아 사건의 진실에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사건의 진실에 접근하는 것을 막는 “막연한 두려움”의 기저에는 자신이 혹시 그 일에 연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개별주어의 고통을 “이백만 명”이라는 숫자로 치환하는 질서를 유지하지는 않았는가라는 생각이 깔려있다.

‘나’가 투이에게 “아무것도 몰랐던 거, 미안해.”라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생각 때문이다. 기실 “아무것도 몰랐던 거”의 이면에는 “알려고 하지 않았던 거”라는 말이 숨어있다. 알려고만 했다면 알 기회는 많이 있었을 것이다. 삼촌의 죽음에 대한 것을 아버지에게 물었을 수도 있고, 응웬아줌마의 가족사진을 보고 물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막연한 두려움”을 무서워한 나머지 진실에 접근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이런 행동이 오히려 사건의 진실을 뒤덮는 행동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미안하다는 말이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사과를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자기반성을 통해 우리는 주류질서에 균열을 가할 수 있게 된다.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또한 비슷한 양상을 지닌 소설이다. 이 소설은 순애언니와 끝까지 함께 하지 못했던 죄책감을 담은 회고록 형태의 소설이다. 화자로 선택된 사람이 당사자가 아니라 딸이라는 점에서 대신 써준 회고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에서 회고하는 것은 박정희 정권시기의 간첩조작 사건이다. 엄마는 먼 친척이자 말벗인 순애언니는 엄마 친구의 오빠와 결혼한다. 너무나 행복한 순애언니의 결혼생활은 그리고 오래가지 못하는데, 언니의 남편이 간첩조작 사건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너무나 순진했던 엄마는 대통령이 형부의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에게 편지를 보내는 등 형부를 구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한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세상의 조소와 변하지 않은 1심 결과였다. “나라에서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눈도 막고 귀도 막고 그렇게 믿”어야 하는 세상이었으니, “아무리 애써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부장의 말처럼 엄마의 노력은 헛된 것이었다. 엄마가 그토록 노력했으나 사형수들은 가족들을 만나보지도 못하고 사형되었고, 형부는 불구가 되어 처제 앞에서 오줌을 지리는 사람이 되었다. 그에 반해 엄마의 생활은 날로 안정되어갔다. 엄마와 순애언니의 거리감은 이때부터 생긴다.


엄마의 생활이 안정되어갈수록 이모는 부담스러운 사람이 되었다. 엄마는 이모가 불편했다. 화장기 없는 푸석푸석한 얼굴, 싸구려 샌들 바깥으로 삐져나온 새끼발가락, 자신없는 표정과 목소리, 관심의 전부를 아이에게 두고 있는 모습, 안경알에 묻어 있는 눈물 마른 자국, 돈이 부족하면서도 매번 밥을 사주려는 모습, 마치 자기는 어떤 도움도 필요 없는 사람이라는 듯이 태연한 척하는 모습, 형부의 억울함에 대해서 큰 소리로 말도 못하는 모습. 언니, 언니의 그런 태도는 형부에게 죄가 있다는 사람들의 말을 증명할 뿐이라고 생각했던 엄마. 차가운 얼굴의 엄마에게 어떻게든 따뜻한 태도로 대하려고 노력하면서 나는 네가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에둘러 말하는 이모. 어쩌다 서울에 올라와서 땀에 젖은 얼굴로 엄마의 아들을 안고 슬픈 표정으로 그 애를 보던 이모의 얼굴. 그 눈. 죽은 개에 대한 지겨운 레퍼토리.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114~115쪽-


순애언니의 고통을 외면하는 엄마의 태도는 “상대의 고통을 나눠 질 수 없다면, 상대의 삶을 일정 부분 같이 살아낼 용기가 없다면 어설픈 애정보다는 무정함을 택하는 것이” 낫다는 할머니의 태도와 궤를 같이한다. 질서에서 배제된 순애언니의 삶을 품어줄 자신이 없었던 엄마는 순애언니를 뭍에 버려둔 채 혼자 세상이라는 호수로 나아갔다.

그렇게 순애언니를 잊은 엄마는 병실에서 순애 이모의 영혼을 만난다. 그 만남을 통해 순애언니에게 어렴풋이 용서받았다고 느끼는데, 실상 순애언니에게 용서받았다는 감각은 죄의식으로 인한 희망사항이었을 것이다. 언니의 삶을 고독하게 만들었던 것이 세상의 멸시와 조롱이 아니라 언니를 “스쳐간 사람으로 기록”한 자신 때문이라는 죄의식. 만일 엄마가 순애언니의 지갑 속에 있는 사진을 조금만 더 일찍 기억했더라면 그들의 삶은 조금 더 행복했을까. 최은영이 만들어 놓은 자기반성의 서사 속에서 우리는 그들의 삶에 대해, 우리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우리를 ‘개인’을 넘어선 공동체의 가능성으로 이끈다.

 

4. ‘비밀’의 공동체

「비밀」은 손녀인 지민을 그리워하는 말자의 이야기다. 지민은 표면상으로는 “중국 시골에서 선생님 한다구”중국에 간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이 소설의 비밀이 숨어있다. 말자의 가족들은 고령에다가 암까지 걸린 말자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충격을 크게 받을까봐, 말자에게 그 비밀을 전하지 않는다. 독자들은 소설을 끝까지 읽어야 이 비밀을 겨우 눈치 챌 수 있다. 단순한 가족이야기 인줄만 알았던 소설에서, 우리 시대의 공공연한 비밀인 세월호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끝까지 읽은 독자라면, 지민이 중국에 간 것이 아니라 세월호 참사로 희생당한 기간제 교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에서 말자는 사건의 외부에 있는 사람이다. 지민이 중국에 간 이후부터 “허리와 허벅지가 가늘어”져서 “몸집이 작아진” 박 서방과 “작은 일에도 매번 미안하다고 말하는”딸을 보면서도, 사건의 진실에 대해 깨닫지 못한다. 누구보다 사건에 가까운 위치에 놓여 있지만 그것이 자신의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알지 못한다. 독자가 말자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말자의 위치가 우리의 위치와 같기 때문이다. 말자가 지민의 고통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그 사건에 깊이 연루되어 있듯, 우리 또한 고통의 크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사건에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 세월호라는 사건이 우리에게 집단적 죄의식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들의 고통이 언젠가는 우리가 겪어야 할 고통일지도 모른다는 점, 그리고 누군가의 고통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 최은영은 이 지점을 포착함으로써 ‘개인’을 공동체의 영역으로 이끈다. 「비밀」에서는 말자의 편지를 통해 공공연한 ‘비밀’인 지민의 죽음을 공유한다. 이 비밀을 공유함으로써 우리는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 이처럼 최은영의 소설엔 등장인물들의 죄 혹은 비밀들이 고백되며, 그 고백을 통해 화자와 청자 사이는 연대감이 조성된다.

「고백」을 살펴보자. 이 소설은 미주가 여고생 시절에 겪었던 일을 ‘나’에게 고백하는 형태의 소설이다. 미주는 여고생 시절 자신의 단짝이었던 진희의 자살에 자신이 연루되어 있음을 고백한다. 진희는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미주와 주나에게 고백하는데, 그 둘은 매우 혐오스러운 반응을 보인다. 그들의 반응에 충격 받은 진희는 자살을 했고, 미주와 주나는 심한 죄의식을 느낀다. 진희의 자살 이후, 미주와 주나는 점점 사이가 멀어지는데, 이는 자신들이 진희의 자살에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기 위함이다. 시간이 흘러 그들은 다시 조우하는데, 만나면 만날수록 짙어지는 진희의 흔적 때문에 그들은 괴로워한다.


진희에 대해 말하지 않고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은 없었다. ‘우리’라는 말에는 늘 진희가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결국 미주와 주나가 함께했던 시간은 없던 일이 됐다. 주나는 달라진 표정과 말투로 진희가 있던 시간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이 다른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려는 것 같았다. 그렇게 애쓰는 주나의 모습을 보며 미주는 입술을 깨물었다. 우리는 솔직해질 수 없구나. 아무것도 터놓고 나눌 수가 없어.

-「고백」, 204쪽-


아무것도 터놓을 수 없다고 절망하던 이들은 끝내 자신들의 치부를 서로 공격한다. 그것은 바로 진희가 레즈비언임을 고백할 때, “정말 역겹다.”며 폭언을 퍼부었던 것과 “사람도 아닌 것처럼 경멸하듯 봤”다는 사실이다. 서로의 치부를 모두 드러낸 그들은 이후 관계를 끊고, 미주는 진희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이 사연을 사제인 ‘나’에게 털어놓는다. ‘나’는 미주의 고백을 듣고 미주와 연인이었을 때, 미주가 흘렸던 눈물을 떠올린다. 그리고 “미주의 몸에 갇혀있던 이야기”가 바로 진희의 죽음이었음을 깨달으며, 미주의 내면과 미주라는 사람의 삶을 깊이 이해하게 된다.

이처럼 고백을 통한 자기반성은 한 개인을 개인의 영역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연대를 이루게 한다. 죄와 부채는 혼자서 짊어져야 하는 것이지만, 타인과 나눌 때 심리적 무게감은 한결 줄어든다. 「지나가는 밤」의 주희와 윤희, 「601, 602」의 효진과 나, 「손길」의 혜인과 숙모는 죄와 부채를 함께 나누는 모습을 통해 하나의 심리적 집단을 형성한다. 최은영의 인물들은 이 안에서 서로 아파하고 울고 절망하지만, 결코 주저앉지는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 ‘개인’이 하나의 집단으로서 연결되어 있음을, 그 안에서 함께 슬퍼하고 아파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그들은 ‘전체’와 ‘비-전체’의 경계를 허무는 공동체를 형성한다.


5. 2010년대 작가 최은영

발터 벤야민은 소설에 대해 “제3자의 운명을 우리들에게 제시해주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이러한 제3자의 운명이, 그 운명을 불태우는 불꽃을 통해서 우리들 스스로의 운명으로부터는 결코 얻을 수 없는 따듯함을 우리들에게 안겨주고 있기 때문”이라 정의했다. 마치 최은영의 소설에 대한 정의로 읽히는 이 문장은 우리에게 한 가지 시사점을 제공한다. 소설을 통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라는 점이다. 소설은 타자를 이해하는 일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자신을 이해하는 일이다. 쇼코의 미소를 확인하는 과정은 자기 자신을 탐색하는 길이라는 양재훈의 적절한 지적처럼, 우리 주변의 쇼코와 투이, 미진을 비롯한 ‘여성’들의 삶을 통해 ‘나’를 돌아볼 때, 비로소 우리는 ‘여성’의 위치에 자신이 놓여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최은영은 이러한 ‘여성’의 삶을 자기반성과 공동체라는 측면에서 차분히 성찰하였다. 최은영의 성찰이 낯선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매우 익숙한 형태이며 2000년대 이후의 우리 문학이 지금껏 주력으로 삼은 형태이다. 그럼에도 최은영의 소설이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지 않은 형태로 다가온 이유는, ‘나’가 자폐적 개인이 아니라 사회의 일부임을 제대로 조망해주었기 때문이다. 이는 2000년대 이후의 한국문학이 놓쳐온 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 최근의 한국문학이 외쳐온 공동체의 가능성이 최은영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제대로 구현되는 것으로 보인다. 최은영이 보여주는 이러한 가능성이 보다 넓고 깊어지기를, 최은영을 통해 우리의 삶이 조금 더 풍성해지기를 바라는 맘을 담아, 그의 소설을 한 대목 인용하며 글을 맺는다.


그런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기대고 싶은 밤. 나를 오해하고 조롱하고 비난하고 이용할지도 모를, 그리하여 나를 낙담하게 하고 상처 입힐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피조물에게 나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고 싶은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만 구할 수 있는 마음이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나의 신에게 조용히 털어놓았던 밤이 있었다.

-「고백」, 209쪽-



  <당선소감>


   "문학으로 위로받는 순간 기록할것"


문학같은 거 읽어서 뭐하냐는 사람들이 있다. 그 시간에 생산적인 일을 하라고. 그런데 세상에는 여전히 문학을 통해서 위로받고, 치유받고, 마음을 성장시키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는 게 가장 위대한 일이며, 가장 생산적인 일이라 믿는다. 그리고 비평은 그 순간을 논리적으로 성실하게 기록하는 일이라 믿는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글을 써왔다. 믿음이 헛되지 않았던 거 같아 기쁘다.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한신대와 인하대에서 나를 가르쳐주신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특히 문학비평이라는 장르가 가진 매력을 가르쳐주신 서영채 선생님, 부족한 학생을 제자로 받아주시고 격려해주신 김동식 선생님. 두 분을 만났기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다. 너무나 감사하다.

당선 소식을 듣고 자기 일처럼 기뻐해 준 친구들, 선배들에게도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10년째 우정을 이어가고 있는 (구)파피루스 멤버들과 한신팸 친구들, 인하대 학우들. 이들과는 앞으로도 같이 읽고 쓰고 대화하며 삶의 소중한 부분들을 함께 나누고 싶다.

군복무중인 내가 글을 쓸 수 있도록 배려해주신 김복찬 중령님, 김다운 대위님, 고석순 상사님. 이분들의 격려 덕분에 읽고 쓰는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 훌륭한 지휘관 밑에서 복무할 수 있어 기쁘다.

이처럼 소중한 인연들을 만들어주시고 기적같은 선물을 주신 하느님께도 감사하다. 마지막으로 엄마와 하나밖에 없는 내 동생. 특히나 글쓰고 공부하는 아들 뒷바라지를 위해 많은 부분을 희생한 우리 엄마. 앞으로 당신의 삶을 생각하며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는 평론가가 되겠습니다.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 1992년 인천 출생
  ● 한신대 문창과 졸업
  ●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석사, 동대학원 박사과정 재학 중


 

  <심사평>


  개인서 공동체로의 연결 과정 잘 짚어


매년 신춘문예에 응모된 신인들의 작품을 보면서 현재의 우리 문학을 가늠해 보는 일은 즐거운 연례행사이다. 관문에 들어선 이들의 글은 한편으로는 동시대 독자들의 우리 문학에 대한 자연스러운 감각과 관심의 표현이며, 또 한편으로 그 감각이 의미와 가치를 획득해 가는 논리의 경로이기 때문이다.

응모된 작품들을 읽으면서 우리 시대의 문학에 대한 독자들의 평균적 감각이나, 혹은 문학을 이해해가는 논리의 경향성을 쉽게 찾을 수 없어서 아쉬웠다. 이 역시 하나의 경향이라면, 우리 시대의 문학이 동시대의 삶과 영향을 주고받는 밀도가 약해졌다는 징후라고도 할 수 있겠다. 작품 해석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이론의 불필요한 인용이나 독자를 설득하지 못하는 주관적 단언들이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글들도 적지 않았다.

숙고 끝에 “공감과 자기반성의 공동체-최은영 론”을 최종 당선작으로 결정한 이유는 최은영의 개성을 차분히 밝혀가면서 개인으로부터 출발한 소설이 공동체로 연결되는 과정을 적절히 짚어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좋은 평론은 잘 읽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독자들이 함께 그 작품을 잘 읽어야 할 이유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독자들이 작품에서 얻은 감동과 공감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당선작은 그 덕목을 갖추고 있다. 첨언하자면 이론에 기댄 앞부분보다 작품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해 나간 뒷부분이 더 설득력 있게 읽혔다. 그 설득력이 더욱 풍부하고 섬세해지기를 기대한다.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 정과리, 서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