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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오랜 세월이 흘러도 잊을 수 없는 존재에 대하여, <윤희에게> / 김명진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삶을 살아가면서 시간이 결코 해결해주지 못하는 순간을 마주할 수도 있다. 영화 <윤희에게>는 그 지점을 건드린다.


퀴어 영화가 그려내는 사랑

최근 영화 제작 동향을 살펴보면 여성 서사를 담은 영화들이 저력을 입증하고 있다. 페미니즘을 다룬 <82년생 김지영>, 여성 노동 환경에 대한 문제의식을 제기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여성 중심 스릴러 <콜>과 같이 주체적 여성을 그린 작품들이 빛을 발하고 있다. 오랫동안 남성 캐릭터 중심의 영화를 비중 있게 다루었으나 몇 년 사이에 여성 캐릭터 중심의 영화가 연속적으로 흥행에 성공하면서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 바탕에는 과거 가부장적 분위기에서 억압받던 여성들의 사회적 위치가 올라감에 따라 목소리를 높이려는 여성들의 시대적 요구가 반영되어 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여성 서사 중에서도 ‘퀴어’ 장르가 영화계를 넘어서 하나의 새로운 예술 경향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점이다. 근래 출판계에서는 퀴어 소설의 판매량이 급증했는데 이 또한 현재 퀴어 자체를 갈망하는 대중문화 소비자들이 많음을 증명하는 셈이다. 달리 말하면 퀴어는 이제 더 이상 소수만이 향유하는 문화의 패턴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대중성을 확보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국내외에서 대중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은 여성 퀴어 영화를 꼽으라면 <가장 따뜻한 색, 블루>, <캐롤>, <아가씨>,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윤희에게>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이들의 공통점은 감각적이고 아름다운 영상미를 구현한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동성애에 대한 거부감을 느끼지 않기를 바라는 감독의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그렇다면 앞에 언급한 퀴어 영화들과는 차별화되는 <윤희에게>만의 특색이 있는데 그것은 무엇일까? <윤희에게>에는 성적 욕망을 표출하는 장면이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흔히 퀴어 영화라면 노골적 시선이나 육체적 접촉은 자연스러운 요소라고 여겨지는데 <윤희에게>에는 이것이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는 관객들의 상상이나 기대를 벗어나는 지점일 수도 있겠지만 <윤희에게>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주인공인 윤희와 쥰은 20년이라는 시간 동안 서로를 보지 못한 채, 그리워하기만 한 인물들이다. 오랜 세월의 공백 끝에 만난 두 사람이 원하는 것은 함께 있는 순간일 테지, 성(性)적인 욕구는 아닐 테다. 실제로 쥰 역을 맡은 나카무라 유코 배우는 촬영 전, 윤희 역을 맡은 김희애 배우의 고교 시절 사진을 핸드폰에 저장하여 매일 바라봤다고 한다. 찰나의 순간,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 세월의 공백을 온전히 담기 위함이다. 그 결과, 윤희와 쥰이 20년 만에 처음 재회하여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는 장면에는 그리워했던 시간과 애틋한 감정이 그대로 스며들어 있다. 이처럼 <윤희에게>는 비록 퀴어 소재를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퀴어적 시선에만 국한되어 바라볼 영화는 아니다. 성별에만 초점을 맞추기보다 사람에 초점을 두고 영화를 본다면 영화가 내포하는 의미 혹은 영화가 관객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바를 더욱 잘 느낄 수 있다. 살면서 누군가를 한 번이라도 그리워했던 적이 있다면 아마 윤희와 쥰의 감정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윤희의 세계는 쥰의 세계와 만나 하나의 교집합을 이루고 있으며 이곳은 감히 타자가 침범할 수 없는 둘만의 비밀스러운 영역에 속한다.


느림의 미학

영화 <윤희에게>의 시간은 느리게 흘러간다. 영화 속 눈 내리는 겨울 풍경은 지쳤던 일상에서 벗어나 주위를 돌아보게 한다. 영화는 극에서 중요한 소재인 편지와 필름 카메라를 통해 관객들에게 느림의 미학을 선사한다. 쥰은 볼 수도 없는 사람의 행복을 바라고 부치지도 않을 편지를 쓰는 사람이다. 어느 날, 그녀의 책상 위에 있던 편지를 마사코 고모가 발견하고 우체통에 넣어버림으로써 영화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일본에서 출발한 쥰의 편지는 수신자 윤희가 있는 한국으로 이동하는데 여기서 편지는 디지털에 익숙한 관객들의 아날로그 감성을 자극한다. 메일이나 전화와 같은 소재는 즉각적으로 확인하고 반응할 수 있지만 이에 비해 편지라는 소재는 전달되기까지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다. 편지는 영화가 잔잔하고 느린 템포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한다. 쥰의 편지와 그에 대한 윤희의 답장은 덤덤한 독백으로 읊어지면서 두 사람의 진심을 느낄 수 있는데 이는 묵직한 울림을 자아낸다.

하물며 윤희와 쥰은 20년 동안이나 서로의 추억이 담긴 사진을 사진첩 혹은 액자에 넣어두며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흘러가는 세월을 포착하려 했다. 윤희의 딸 새봄은 필름 카메라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가진 인물이다. 아름다운 것만 찍는다고 했던 새봄은 땅에 버려져 흙이 묻어있고 다 찢어진 장갑을 향해 셔터를 누른다.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것에도 시선을 주고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치는 것들을 카메라에 담아낸다. 영화에 잔잔한 감성을 더하는 필름 카메라는 디지털의 선명함과는 확연히 다른 차원의 느낌을 준다. 필름 카메라는 필름을 현상하기 전까지 찍은 사진을 확인할 수 없다는 점에서 기록적인 가치가 있다. 당장 겉으로 보이는 결과물이 아니라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에 의미를 두는 필름 카메라에는 느림의 미학이 깃들여져 있다. 때로는 편지처럼, 때로는 필름 카메라처럼 기다리는 즐거움을 소중히 여기는 영화라서 더욱 애틋하다.


겨울 배경이 주는 따뜻함

임대형 감독이 겨울을 바라보는 시선은 기본적으로 따뜻하다. 임대형 감독의 전작인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와 <윤희에게>의 시간적 배경은 둘 다 겨울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에서 겨울은 어떻게 기능하는가. 모금산은 암 선고를 받은 후, 크리스마스에 개봉하는 영화 한 편을 만들겠노라 결심하는데 거기서 자신은 주연인 찰리 채플린 역할이다. 아들 도움으로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자신의 영화 시사회에 결국 가지 못하나, 그와 가까운 사이였던 관객들은 영화를 보며 각자 그를 기억한다.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의 주인공이 자신의 영화 시사회 날짜를 크리스마스로 설정한 이유는 죽은 아내의 기일이기 때문이다. 가장 소중한 날, 자신의 영화를 세상 밖으로 꺼내고 싶었을 것이다. 암이라는 최악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찰리 채플린처럼 세상에 웃음을 선사하려는 그의 모습은 따뜻한 감동을 준다. 역설적이게도 절망으로부터 희망을 꺼내놓고 있다. 전체적으로 이 영화는 액자식 구성을 띤다. 영화 속에 또 하나의 영화가 존재하는 모습이다. 이를 통해 삶은 액자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삶은 곧 영화 그 자체임을 역설하고 있다. 미스터 모는 영화 안의 관객들에게도, 영화 밖의 관객들에게도 따뜻한 겨울을 선물한다.

다음으로 <윤희에게>에서 겨울은 어떻게 기능하는가. 이 영화는 겨울을 더욱 낭만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공간적 배경으로 일본 훗카이도의 소도시 ‘오타루’를 설정했다. 오타루의 하얀 설원 풍경은 겨울의 환상적 분위기를 느끼게 해준다. 겨울과 오타루는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듯이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마치 윤희와 쥰처럼. 그녀들의 겨울은 따뜻했을까. 영화에서 윤희와 쥰이 재회할 것이라는 사실을 관객들은 모두가 알고 있지만 정작 재회 당사자들은 그러한 사실을 끝까지 알지 못한다. 이러한 극적 아이러니는 극 중 인물들이 알고 있는 것과 관객들이 아는 것 사이에 약간의 틈이 생기게 하면서 관객들의 흥미를 유발하는 동시에 윤희와 쥰에 대해 연민의 감정을 품게 하는 장치인 것이다. 두 사람은 하늘에서 눈이 내리던 날, 마침내 극적으로 재회하게 된다. 함께 길을 걸어가는 윤희와 쥰의 뒷모습은 프레임을 가득 채우며 관객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영화는 곧 페이드 아웃(fade-out)으로 처리하면서 검정색 화면 안에는 두 사람의 발소리만 들리는데 이 청각적 효과는 낭만적 분위기를 조성하며 깊은 여운을 남긴다. 쥰의 고모는 “눈이 언제 그치려나.”라는 대사를 툭 내뱉는다. 흔히 ‘눈’이란 소재는 문학 작품에서 순수함을 상징하는데 영화 안에서 이야기의 흐름을 볼 때, 순수함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그리움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시간이 지나도 도저히 무뎌지지 않는 그리움에 대하여 언제쯤이면 잊을 수 있을지 근원적인 물음을 던진다. 감독은 겨울을 그리움에 대한 감정을 복합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고 영화를 겨울에만 머무르게 하지는 않았다. 윤희는 겨울과 잘 어울리는 인물이지만 윤희의 딸 새봄은 이름 그대로 봄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후반부에는 윤희가 새봄과 함께 이사 가서 새 출발을 하는 것처럼 영화는 윤희의 인생도 새로운 봄을 맞이하는 것으로 그 의미를 확장하고 있다.

추운 겨울에서 따뜻함을 찾아내고야 마는 임대형 감독의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와 <윤희에게>에서 제목은 그 자체로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주어진 삶을 살아오면서 정작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던 존재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 이름을 불러준다. 작금의 시대는 시국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이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의 마음에 돋친 뾰족한 가시는 서로에게로 향한다. 저마다 아픔이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위로해주지는 못할망정 아픔의 크기를 저울질한다. 어느새 상처 주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린 사람들 속에서 임대형 감독의 두 작품은 세상 모든 존재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동시에 모두를 위로하고 있다.


이 땅이 낯선 이방인들

가장 완전한 모습으로 태어나 시간이 지날수록 불완전해지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다. 영화 <윤희에게>는 어른도 끝없이 흔들리는 위치에 있으며 성장통을 겪는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윤희에게 한국은 어떤 공간적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윤희에게는 태어나고 자라온 공간인 한국은 어쩐지 안 맞는 옷을 억지로 걸치고 있는 것처럼 불편해 보인다. 오히려 윤희는 딸 새봄과 함께 떠난 오타루라는 낯선 공간에서 가장 편안해 보였다. 늘 어둡고 무기력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윤희의 모습은 그녀가 과거에 어떤 시간을 살아왔는지 짐작하게 한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사회적 존재이기에 타인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건 쉽지 않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사회적으로 구축된 이미지 또는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하여 내면에 있는 또 다른 자아들을 억누르곤 한다. 사회는 개인이 사랑하고 사랑받을 자격에 대하여 간섭할 권리가 있는가. 윤희는 이 땅에서 이방인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동성애자라서, 또 이혼한 중년여성이라서 남들과는 다른 시선을 받고 소외되었던 윤희는 오랜 세월 동안 그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하고 겉돌아야 했다. 극 중에서 엄마랑 왜 헤어졌냐는 딸 새봄의 질문에 아빠는 “너네 엄마는 뭐랄까. 사람을 좀 외롭게 하는 사람이야.”라고 답한다. 윤희는 처음부터 다른 사람을 외롭게 하는 사람이었을까? 결국에 사회가 윤희를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갔을 뿐, 윤희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다.

윤희는 사회적 통념의 굴레에 갇혀 쳇바퀴 도는 삶으로부터 늘 도망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하는 윤희가 허물어야 할 벽은 너무도 두껍고 단단했을 것이다. 어떤 형태의 사랑이 이상적일까? 사회적 기준에서 보편적 사랑이라 불리는 남녀 간의 사랑만이 정답일까? 사회가 정한 테두리 안에 들어오기 위해 안간힘을 썼을 윤희. 오욕의 세월과 강요된 삶 앞에서 무력했을 윤희의 시간은 그 어떤 것으로도 보상될 수 없다. 극 중에 나오는 ‘담배’는 윤희의 삶을 표상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예전보다 남녀를 바라보는 사회적 차별의 시선이 나아지고는 있다지만 담배 피우는 남자는 자연스럽고 담배 피우는 여자는 부자연스럽다고 보는 시선은 아직도 존재한다. <윤희에게>에서 아름다운 것만 찍는다던 새봄의 카메라는 담배를 피우는 윤희에게로 향한다. 이 장면을 통해 윤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으며 여기서 담배는 윤희를 둘러싼 억압과 편견에 대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기능을 한다. 여분의 인생을 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윤희가 지고 있던 마음의 짐을 덜어내고 홀가분해지는 날이 오기를 바라며. 또 그저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가 아닌 ‘윤희’라는 이름을 찾아가기를 바라며. 오랜 세월 동안 흑백의 삶을 살았던 윤희가 이제는 색칠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이 땅이 낯선 이방인들에 대한 환대가 필요하다.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다.” 프랑스의 철학자인 사르트르의 명언처럼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고 그러한 선택들이 모여 현재의 ‘나’를 만든다. 대학을 갈지 말지, 결혼할지 말지,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갈지 등등... 이 모든 것들은 개인의 선택이어야 하고 혹여나 그 선택이 잘못된 선택이었을 지라도 그것 또한 본인이 마땅히 감당할 몫이다. 인간은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선택받은 존재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선택할 권리를 박탈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 행위와 다름없다. 영화 <윤희에게>는 보는 이로 하여금 지금까지 살면서 세상을 바라보았던 두 눈에 편협한 시각은 없었는지 사색에 잠기게 한다.


꿈에서라도 만나고 싶은 사람

프로이트에 의하면 ‘꿈’은 소망 충족의 수단이므로 꿈을 해석하는 것은 인간의 내면에 숨겨져 있는 욕망을 들여다보는 것을 의미한다. 꿈을 꾼다는 것은 우연성보다 인과성이 더 크게 작용한 결과이다. 좋은 꿈이든 나쁜 꿈이든 어떠한 원인이 있기에 그것이 꿈으로 나타난다. 잠재된 무의식은 생각 이상으로 큰 힘을 가졌고 그것은 꿈이라는 시각적 발현으로 이어지며 그 존재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쥰: 요즘 꿈에 자꾸 윤희가 보이네

고모: 무슨 꿈을 꿨니?

쥰: 그냥 같이 있어. 꿈에서.

이는 영화 <윤희에게>에서 쥰과 마사코 고모의 대화 중 일부이며, 쥰이 윤희와 같이 있는 순간을 얼마나 간절히 소망하는지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꿈이라는 공간은 누구도 관여할 수 없는 자신만의 공간이다. 사회적 시선에서부터 벗어나 자신의 소망을 이룰 수도 있고, 자신이 그리워하던 대상을 마음껏 그리워할 수도 있는 곳이다. 그렇기에 만일 영화의 제목 ‘윤희에게’에 부제를 붙인다면 ‘꿈에서라도 만나고 싶은 사람’ 정도가 좋겠다. 윤희의 대사를 통해서도 꿈의 속성은 여실히 드러난다. “추신. 나도 가끔 네 꿈을 꿔.”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윤희의 독백은 관객들이 영화를 보는 내내 차곡차곡 쌓아온 감정을 한꺼번에 터트린다. 마지막 대사 한 마디 안에 수많은 감정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관객들의 마음이 동요되는 이유는 윤희가 보여준 성격 때문이기도 하다. 윤희는 무뚝뚝하고 진심을 숨기는 것에 익숙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그런 윤희의 진심 어린 독백은 쥰을 아주 많이 그리워했음을 보여준다. 윤희의 독백은 중의적 해석이 가능하다. 윤희의 꿈에 등장하는 쥰의 모습은 20년 전에 함께 추억을 쌓았던 과거의 쥰일까? 아니면 같이 있고 싶은 현재의 쥰일까?

영화는 해피엔딩도 새드엔딩도 아니다. 윤희와 쥰은 오랜만에 재회했으나 두 사람이 앞으로 연인으로서의 관계를 이어갈지에 대한 향방은 불투명하다. 하지만 꿈에서라도 만나고 싶은 사람과 현실에서 재회하여 같이 있는 순간을 간직했단 이유 하나만으로 그녀들은 삶을 살아갈 용기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윤희와 쥰 각자의 가슴 속에 맺힌 응어리가 조금은 풀리지 않았을까.


그녀들의 연대

영화 <윤희에게>는 모든 인물을 입체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점이 있다면 인물들 사이의 섬세한 관계성이다. 먼저 윤희와 딸 새봄의 관계성을 탐색해보면 흥미로운 지점이 많다. 필름 카메라의 주인이 윤희에서 딸 새봄으로 자연스럽게 바뀌는 부분에서 윤희와 새봄 사이의 연결고리는 강화된다. 관객들은 새봄의 젊음을 통해서 윤희의 청춘을 떠올려볼 수 있다. 사회적 편견이나 고정관념이 없었더라면 윤희의 청춘은 더욱 빛날 수 있었을 텐데. 영화 초반부에서 새봄의 남자친구 경수는 새봄에게 다 찢어진 장갑을 리폼하여 선물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의 복선으로 깔아놓은 것이다. 실제로 새봄은 자신의 엄마인 윤희의 상처받은 마음을 꿰매어주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새봄은 윤희가 과거로부터 받은 기억의 상처들을 봉합하고 가장 가까이서 윤희의 삶을 응원한다. 새봄은 자식으로서 부모의 이혼이라는 커다란 사건을 겪으면서 그것을 최대한 덤덤하게 받아들인다. 각자의 상황과 마음을 이해하는 속 깊은 딸의 모습이다. 윤희와 딸 새봄은 얼핏 서로 무심한 듯 보이지만 실은 서로를 향한 관심 가지기를 멈추지 않는 사이이다. 윤희는 새봄의 남자친구 경수의 존재를 알고, 새봄이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을 알면서 모른 척 해왔다. 윤희는 딸이 자신에게 먼저 말해주기를 기다린 것이다. 영화에서 새봄의 역할은 상당히 중요하다. 새봄은 윤희의 딸이면서 윤희의 관찰자이고, 또 윤희와 새로운 여정을 떠나는 동행자인 동시에 윤희가 첫사랑 쥰과 만날 수 있도록 돕는 조력자이다. 자칫 무겁고 슬픔으로 가득할 수 있는 영화에 새봄이 개입함으로써 순간순간마다 환기하고 있다. 애초에 쥰이 윤희에게 쓴 편지를 받은 사람이 윤희가 아니라 새봄인 것은 너무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행여나 윤희가 쥰의 편지를 새봄보다 먼저 봤더라면 윤희와 쥰의 재회는 일어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윤희와 새봄의 성격에 차이점이 있다면 윤희는 항상 머뭇거리고 생각이 많은데, 새봄은 생각에서 멈추지 않고 행동으로 바로 이어가는 실행력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러한 새봄의 성격은 윤희와 쥰이 재회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한 통의 편지로부터 시작된 윤희와 새봄의 오타루 여행은 모녀간의 추억을 쌓으면서 서로에 대해 더 많은 것들을 알아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그 속에서 두 사람이 느끼는 연대를 그리고 있다.

다음은 쥰과 마사코 고모의 관계성이다. 쥰과 고모는 서로에게 각별한 존재이다. 비록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아니나, 그 이상의 유대감을 가지고 있다. 두 사람은 그리운 존재에 대한 감정을 공유하는 사이이다. 20년이라는 시간 동안 윤희를 그리워한 쥰의 모습과 “가끔 그 사람 생각이 나. 겨우 6개월인가 만났는데 이제 나는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평생 잊지 않은 셈이 되겠네.”라며 옛 연인을 그리워하는 고모의 모습은 묘하게 겹쳐 보인다. 누군가와 같은 감정을 공유한다는 것만으로 서로에게 큰 위안을 얻기도 한다. 쥰과 고모 사이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은 위로의 방식이다. 쥰에게 위로가 필요했던 날, 고모는 쥰에게 다가가서 직접 안아주는 것이 아니라, 쥰이 안길 때까지 두 팔을 벌린 채 그 자리에서 가만히 기다리는 방식으로 쥰을 위로한다. 상대방을 섣불리 위로하지 않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공감해주는 따뜻한 위로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더욱이 쥰과 고모는 서로의 취향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해준다. 동성애자 쥰과 SF 장르 소설을 좋아하는 고모가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은 유별나거나 낯설지 않고 늘 똑같다. 공감을 바탕으로 숨김없이 자신의 내면적 고유성을 드러내는 두 사람의 관계는 그 무엇보다 견고하고 호혜적이다.

마지막으로 윤희와 쥰의 관계성을 탐색해보자. 윤희와 쥰은 서로의 첫사랑이다. 그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지극히 평범한 일이었을 뿐인데, 두 사람의 사랑은 금단의 사랑으로 치부된다. 둘 사이에는 20년이라는 오랜 세월의 공백이 있었지만 사실 그 공백기마저도 같은 아픔을 겪고 공유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두 사람의 사이는 여전히 애틋할 수밖에 없다. 공장 조리사이자 엄마가 된 윤희와 동물병원 수의사이자 미혼인 쥰. 두 사람이 걸어온 각자의 삶은 너무도 다를 테지만 이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과 관계는 수평적이다. 윤희는 용기를 내고 싶었지만 끝내 쥰에게 편지를 부치지 못한다. 윤희가 쓴 편지에는 진심이 꾹꾹 눌러 담겨 있으며 그 편지에서도 윤희와 쥰 사이의 관계성은 잘 드러난다. ‘너와 만났던 시절에 나는 진정한 행복을 느꼈어. 그렇게 충만했던 시절은 또 오지 못할 거야.’라는 부분에서 두 사람이 함께했던 그때 그 시절은 어리고 미숙했지만, 두 사람이 쌓아온 감정과 사랑의 깊이는 어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영화 <윤희에게>를 보고 나면 잔잔한 소설 한 편을 읽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흘러간 세월을 포착하는 영화이면서도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은 단 한 곳에도 나오지 않고 있다. 대신 윤희와 쥰의 과거에 대한 흔적을 영화 곳곳에 배치해둔다. 친절하지 않은데 이상하게 다정한 느낌이 나는 영화이다. 그 이유는 인물들의 미묘한 감정선을 놓치지 않은 채 극이 전개되고 과장된 부분이 없으며 전반적으로 모든 인물이 영화 속에 따뜻하게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버릴 대사가 하나도 없다. 불필요한 대사를 생략한 여백의 미는 관객들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다. 짧고 간결한 대사에 의미를 함축하여 겉멋을 최대한 덜어내고 속을 채운 영화의 진수를 보여준다.

시대와 영화, 관객과 감독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세상 밖으로 나오고 있다. 점점 주체적 여성에 대한 시대적 요구가 늘어가는 시점에서 여성들의 연대와 성장을 다룬 영화는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꼭 여성에 초점을 맞추지 않더라도 다양한 삶의 가치를 담아 현대사회의 인간군상을 그려낸 영화는 언제라도 관객들에게 사랑받는다.

추신. 좋은 영화를 발견하는 것은 온전한 행복을 느끼게 한다.

-영화 <윤희에게>의 관객이-




  <당선소감>


   "영화에 대한 사랑 멈추지 말라는 의미"


그저 영화가 좋았고 글이 좋았다. 돌이켜보면 대학교 시험과 과제로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늘 마음 한구석에 영화를 위한 자리만은 남겨두었다. 마음이 지칠 때면 걸음을 멈추고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곳. 나에게 영화는 그런 존재였다.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으로서 글을 썼을 뿐인데 당선이라는 은덕을 입어 얼떨떨하기만 하다. 어떤 방향으로든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을 멈추지 말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더욱 정진할 것이다.

변함없이 묵묵히 나를 응원해주는 가족에게 진심으로 고맙다고, 또 사랑한다고 전하고 싶다. 항상 곁에서 용기를 주는 사랑스러운 친구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무료한 일상 속 영화를 통해서 활력을 얻는 날들이 참 많다. 좋은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것은 너무도 큰 행운이다. 영화를 만드는 일에 동참하시는 모든 이들에게도 이 자리를 빌려 감사를 표한다. 2020년은 코로나로 인해 영화계뿐만 아니라 사회가 전반적으로 침체에 빠져있었다. 2021년에는 영화계에도, 우리 사회에도 봄이 오기를 소망한다.



  ● 1997년 대구 출생
  ● 부경대 국어국문학과 재학


 

  <심사평>


  연출자와 관객의 성장 가능성 이뤄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영화산업이 얼어붙은 작금의 상황에도 영화평론가를 지망하는 문학청년들의 글을 마주하니 뜨거움이 가슴으로부터 솟아올랐다. 소중한 글 뭉치 한 편 한 편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다.

심사하며 적잖이 안타까웠던 것은 ‘단평(短評)’에 관한 부분이었다. 단평은 짧은 글이지만 스스로 당당한 평론 한 편이다. ‘장평(長評)’을 요약하거나 작품 줄거리를 늘어놓은 글, 리뷰를 간단히 적은 응모작이 많아 안타까웠다.

세 편까지 줄여 가며 후보작을 골랐다. 일반 독자와 관객이 읽고 이해하기 쉬운 것에 중점을 뒀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잊을 수 없는 존재에 대하여’ ‘영화적 파동의 중첩’ ‘영화 한 편이 우리 삶에 조용히 던지는 질문’이 깊은 고민과 자성을 불러일으키며 마지막까지 놓여 있었다.

당선작 ‘오랜 세월이 흘러도 잊을 수 없는 존재에 대하여’는 영화 ‘윤희에게’를 퀴어 영화로 보고 관객의 연대, 겨울의 따스함과 느림의 미학으로 분석했다. 또한 사회적 통념에 갇혀 버린 현대사회 인간 군상으로서 이 땅의 관객을 비판하며 연출자와 관객의 성장 가능성을 작품 분석을 통해 이뤄냈다. 단평 ‘테러 현장으로부터 바라본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호텔 뭄바이’는 휴머니즘으로 본 영화적 해석을 간결하게 잘 정리했다.

당분간 코로나 상황으로 온 세상이 무겁게 침잠할 것 같다. 하지만 날카로운 분석 뒤에 감춰진 밝은 희망과 세상을 향한 따스한 어루만짐은 평론가의 소명이고, 지속적인 작품 제작은 영화인의 운명일 것이다.

심사위원 : 정지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