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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등고선 / 김정숙

 

기상캐스터는 한낮 온도가 35도까지 올라갈 거라고 말했다. 삼복이 지났어도 불볕더위가 당분간 이어질 거라고. 그렇게 보도하는 그녀의 긴소매 원피스는 더위와는 무관해 보였다. 나는 그녀의 스카프에 눈길이 머물렀다. 색채는 구원이라고 한 피카소의 말이 생각났다. 몽환적인 느낌의 보랏빛은 인공적인 합성염료로는 얻을 수 없었다. 자연에서 얻은 색에 강렬한 조명이 반사되면서 이색적인 색채를 만들었다. 다소 밋밋한 그녀의 원피스도 보랏빛 스카프로 인해 돋보였다.

길거리 행사는 날씨에 민감했다. 여름은 소나기가 흔한 계절이었다. 날마다 날씨를 확인하고 덮개를 준비해도 어느 순간 흙냄새가 코끝에 느껴지면 허둥대기부터 했다. 특히 실크는 습기를 잘 빨아들였고 다른 천들도 미세하게 구김이 지면서 형태가 일그러졌다. 행사 기간은 보름이었다. 이제 삼 일만 버티면 끝이었다. 행사장은 화랑과 화방, 표구점들이 밀집된 곳이었다. 오래된 공방 또한 많아서 언제부턴가 예술의 거리로 불렀다. 가게마다 인도 앞까지 내놓은 각양각색의 오래된 물건들은 인사동 거리를 연상케 했다. 몇 년 사이 도청 분수대를 중심으로 축제가 부활하자 사람들이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젊은 층을 겨냥한 소품 가게들이 하나둘 들어서면서 활기가 살아났다. 편승하듯 몇 번 기획 행사로 길거리 판매를 시도했다. 적어도 찌는 듯한 더위와는 무관했다. 한 달 전, 이사장이 공방에 찾아와 말했다.

“곧 가을이 올 테니 앞서서 스카프전을 합시다.”

예술이라는 장르에는 관심을 가지지만 예술품에는 관심이 없는 게 현실이라고, 이런 때일수록 일반인에게 친숙하게 다가가야 한다며 길거리 판매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했다. 생색내듯 햇빛예술촌 천막과 현수막도 지원하겠다고 했다.

“중요한 건 단가인데…….”

생각에 잠긴 듯 손으로 턱을 매만졌다. 저렴하게 일이 만원 대에서 오만 원을 넘지 말자고, 그러잖아도 튀어나온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그건 원가도 안 되는 금액이라고 하자 염색 재료가 얼마나 한다고 그러냐며 재고 떨이로 생각하라고 했다. 재고라는 말에 말문이 막혔다. 이사장은 잔뜩 일그러진 내 표정을 흘깃 보더니, 경제 논리는 생각하지 않고 예술가라고 자존심만 내세우니, 작가로 활동한 지가 십 년이 넘었는데 그 모양 그 꼴이 아니냐고……. 하고 싶을 말을 다 했다.

이사장이 나갔다. 나는 얼룩덜룩 염색물이 든 대야에 물을 채웠다. 복도 난간에 놓인 제라늄 화분에 냅다 부었다. 화분에서 넘쳐난 물이 아래로 쏟아졌다. 반지하 사무실로 내려가던 이사장이 위를 올려다보며 소리를 질렀다. 숨듯이 공방으로 들어왔다. CD 플레이어에「The Lost Opera」를 재생시켰다. 키메라의 높은 음색에 속이 뻥 뚫렸다. 그녀는 팝페라 창시자였다. 누구도 생각지 못한 클래식과 팝을 조화시켰다. 유독 정통을 중시하는 클래식계에서 틀을 깼다는 말까지 들었다. 선구자로서 힘든 시간을 보냈을 그녀를 떠올리자 왠지 모르게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행사장인 예술의 거리는 인도와 차도의 구분이 따로 없었다. 사람을 ?듯 바짝 붙어가는 자동차의 기척에도 길을 비켜주는 이가 없었다. 마음은 조급해도 방법이 없었다. 건물 벽에 바짝 붙여 주차했다. 밤새 천막 주위에 어질러진 쓰레기를 치웠다. 트렁크에서 매대를 꺼냈다. 이력이 붙을 만도 한데 손은 여전히 더뎠다. 땀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고무줄로 질끈 묶었다. 목이 선득했다. 깜짝 놀라 자라목을 하고 돌아보았다. 얼린 생수병을 흔들며 공 선생이 웃었다. 그는 생수병을 내게 건네고 한쪽 발만 겨우 세운 매대의 다리를 움켜잡았다. 로봇을 조립하듯 철커덕철커덕 순식간에 완성했다.

“괜찮아요?”

잘 견디는 중이라고 말하려는데 엄살 부리는 아이처럼 목이 멨다. 지금 상황이 전부는 아닐 거라며 위로의 말까지 건네는 그의 오지랖에 속절없이 눈물이 핑 돌았다. 공방으로 돌아가려던 그가 뭔가 생각난 듯 몸을 돌렸다. 고자질하는 아이처럼 입가에 웃음을 달고 말했다.

“아침에 한바탕 난리가 났다는 거 아닙니까.”

할머니랑 이사장이 결국 싸웠다는 것이다. 이사장이 고추 한 바구니를 사가면서 천 원을 준 게 발단이었다고 했다. 할머니는 삼천 원이라고 말했지만, 이사장은 천 원짜리가 한 장밖에 없다며 지갑을 꺼내 보였다. 지갑에서 오만 원 권을 발견한 할머니가 오백원짜리를 합쳐 사만 칠천 원의 거스름돈을 건네고 지폐를 받았다고 했다. 정당한 값을 요구하는 할머니의 당당함에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 소란에 하나둘 공방 문이 열리고 지나가던 사람들도 흘끔거리자 이사장이 도망치듯 사무실로 들어갔다고 했다. 그래서 할머니께 엄지를 척! 세워줬다며, 흉내 내듯 엄지를 내밀었다.

할머니는 이곳의 터줏대감이었다. 햇빛예술촌이 간판을 올리고 만국기를 늘어트리기 전부터 텃밭에서 거둔 푸성귀를 팔았다. 약을 치지 않아 농작물 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치를 알아보는 단골이 많았다. 이사장은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할머니를 무시하고 푸대접했다. 화장실 드나드는 걸 못하게 하라고 은근히 작가들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한 달이 지나자 할머니는 관리비라며 만 원을 내밀었다. 그때부터 당당하게 예술촌 일원이 되었다.

엄지를 세운 공 선생의 손에 눈이 머물렀다. 손등은 쇠에 긁히고 불꽃이 튀어 막일꾼 못지않았다.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물어도 흉터로 남았다. 그런 흉터들이 그 사람의 포트폴리오였다. 내 시선을 느낀 공 선생이 장난하듯 손을 쫙 펴더니 앞으로 내밀었다. 나도 따라서 손을 내밀었다. 손 매듭과 손톱 선까지 염료 물이 들어서 여자 손이라고 말하기도 창피했다. 할머니의 뭉툭하고 나뭇등걸이 된 손을 보태면 못난이 삼총사 손으로 손색이 없을 터였다. 공 선생이 휘파람을 불며 공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멜로디였다.

Dust in the wind, All they are is Dust in the wind……

바람 속의 먼지, 그것은 모두 바람 속의 먼지다……

공 선생이 되돌아서 난감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전시를 앞두고 정신없었다. 아이의 입술이 꽃잎처럼 붉어졌다. 내뱉는 숨에서 단내가 났다. 바쁜 마음에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겼다. 시간 맞춰 약을 먹여달라고 부탁하는 것으로 엄마의 책무를 다했다고 여겼다. 아이는 일주일을 못 버텼다. 작은 입김에도 날아가는 먼지처럼 사라져버렸다. 너무 순식간의 일이어서 마냥 안고 있을 수도, 보낼 수도 없었다. 아이의 감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주변에서 쉽게 위로의 말을 했다. 이 또한 지나갈 거라고. 나는 인정할 수 없었다. 내 아이, 내 분신, 내 살과 뼈였던 장미를 흐르는 세월에 묻어가듯 그냥 지나가게 할 수 없었다.

정오가 되었다. 햇볕은 쇠도 녹일 듯 뜨거웠다. 바짝 달궈진 지열이 올라오면서 체감온도는 더 상승했다. 냉방이 된 사무실에서 나온 직장인들은 긴 팔 차림으로 그늘진 천막 아래를 지나갔다. 사원 카드를 목걸이처럼 매단 그들은 매대에 놓인 스카프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바쁜 걸음들 사이에 멈춰 선 내가 역행하며 사는 사람 같았다.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았다. 매대 아래 처박아둔 피켓이 눈에 띄었다. 이사장이 건네준 피켓에는 내 프로필과 ‘천연염색 스카프 파격세일’이라고 인쇄되어 있었다. 지방 예술계에서 나름 유명 작가임을 내세우려는 이사장의 속셈이었다.

처음 예술촌에 입주하고 지방지에 실릴 때 만해도 내 모습은 빛이 났다. 서른, 열정을 표면에 내세워 질주하던 시기였다. 섬유 조형과 천연염색을 병행하면서 이 길로 들어선 지 어느덧 십 년이었다. 천을 여러 번 겹친 뒤 테두리를 두른 몰라 기법으로 입체적이고 자연스러운 무늬를 연출한 스카프가 호평을 받았다. 그런 호평에 한때는 우쭐했다. 하지만 그러한 호평이 예술적 가치를 인정하는 잣대는 될 수 없었다. 음식을 만들 때 정해진 레시피로 만들어도 조리 시간이나 불의 온도에 따라 맛이 달라지듯, 염색도 마찬가지였다. 천과 시간에 따라 염료의 농도와 작가의 컨디션에 따라 달랐다. 그런 생각을 염두에 두고 옷이나 소품에 응용했지만, 예술과 대중의 경계에 머물렀다. 천연염색을 지도했던 교수는 말했다. 스스로가 작가의식을 지니고 있을 때 남들도 예술적 가치를 인정한다고. 싼 염료를 들여 기계로 찍어낸 공산품들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인 만큼 실용성보다는 작품을 만들려는 장인의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고.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전시를 위한 예술 작품과 대중에게 팔기 위한 상품으로 나눌 수밖에 없었다.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해가 많이 짧아졌다. 입추가 코앞이었다. 어둠이 대기를 떠돌자 거리에 정적이 맴돌았다. 점심을 걸러서 등이 휠 것 같았다. 장을 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에도 없었다. 마트에 들러 저녁 찬거리를 사야겠다고 생각하며 서둘렀다. 매대를 접어 차 트렁크에 넣었다. 소품은 상자에 담아 조수석에 놓고 스카프는 구겨지지 않게 뒷자리에 펼쳐 놓았다.

마트는 한가했다. 마이크를 쥔 직원의 호객행위에 발을 멈췄다. 제주에서 막 올라온 은갈치 한 팩이 만원이라고 했다. 한 팩을 집었다. 조림에 넣을 감자와 양파를 찾다가 장미를 보았다. 오늘의 세일 품목이었다. 현수막 아래 색색의 장미꽃이 양동이마다 담겨 있었다. 열에 들뜬 아이의 입술처럼 선홍빛이었다. 망연한 내 눈빛에 눈치 빠른 직원이 장미꽃 한 다발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받아들었다.

흐르는 물에 갈치를 씻고 감자껍질을 벗겼다. 갈치와 감자가 양념장에 졸여지는 동안 장미꽃을 손질했다. 잎을 한두 개만 남기고 떼어냈다. 가느다란 광목천에 한 송이씩 엮어서 바람이 잘 통하는 창틀에 거꾸로 세웠다. 바람결에 느껴지는 장미 향에 코끝이 매웠다. 뭉근하게 졸여지는 갈치 냄새에 이끌려 주방으로 돌아왔다. 불을 끄고 냄비 채 식탁 위에 올렸다. 밥통을 열었다. 고소한 밥 냄새가 위를 자극했다. 아이를 보내고도 악착같이 살아나던 본능이었다. 밥을 입에 넣고 씹는데 목이 멨다. 소주를 꺼내 머그잔에 따랐다. 소주와 함께 갈치살에 밥 한 숟가락, 감자에 또 한 숟가락 먹다 보니 한 공기를 비웠다.

아이의 서랍장 앞으로 갔다. 미키 마우스가 웃고 있는 서랍장에는 아이의 필체가 유서처럼 남아 있었다. 그리듯이 쓴 제 이름 장미…… 서랍에서 잠옷을 꺼냈다. 식탁 의자를 바짝 끌어당겨 등받이에 입혔다. 아이의 웃음소리가 좁은 공간을 가득 메웠다. 식탁에 놓인 엽서가 이지러져 보이더니 점점 뭉개졌다. 나윤이 말했다. 선배는 생각이 너무 많다고. 그렇다고 삶이 나아지지도 않는데…… 그 말이 맞았다. 죽을 만큼 생각을 많이 해도 어떤 결정이 쉬운 적은 없었다. 오히려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한발 물러서서 결론이 나기를 기다리곤 했다. 장미가 내게 올 때도 그랬다. 하지만 장미를 품에 안았을 때 다짐했다. 앞으로는 그런 삶을 살지 않겠다고, 물러터졌다는 말도 듣지 않겠다고. 그러나 이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뙤약볕에서 치르는 이따위 세일 행사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색이 바랜 아이 잠옷을 종이 가방에 담으며 결심했다. 이틀 남은 거리 판매는 하지 않겠다고.

카페 조명이 지나치게 밝았다. 구석진 곳을 찾아 앉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커 보이는 쇼핑백을 테이블 밑으로 밀어놓았다. 세븐, 이름에 걸맞게 7명이 회원인 고등학교 동창 모임이었다. 거리 판매를 정리하고 이사장에게 곤욕을 치르느라 이차에 겨우 합류했다. 친구들이 소란스럽게 들어왔다. 진희가 앉으면서 쇼핑백을 흘끔 쳐다보았다. 음료 주문을 마친 친구들은 맥락 없는 수다를 이어갔다. 쇼핑백을 흘끔거리는 진희를 의식했기 때문일까? 의기소침해진 나는 친구들과 섞이지 못했다. 그때 허공에서 진희와 시선이 얽혔다. 무슨 말이 든 해야겠다는 조급함에 말을 건넸다.

“스카프 잘 어울린다.”


진희가 대답 대신 스카프를 매만졌다.

“비 예보는 없었어?”

나는 엉뚱한 질문을 하고 말았다.

“비는 무슨.”

“날이 너무 더워서.”

진희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스위치만 켜면 자동으로 말하는 인형처럼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사람들은 날씨 예보가 조금만 틀려도 전화를 해댄다고, 세금으로 운영되는 기상청이니 그 정도는 참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국민의식이 참으로 한심하다고 했다. 진희가 아무리 제 일에 대해 투정해도 안정된 직장을 가진 그녀가 부럽다는 듯 친구들은 쳐다만 보았다. 언제 짐을 빼게 될지, 불안증에 시달리는 비정규직과 인정받지 못하는 예술가 앞에서 할 말은 아닌 듯했지만, 아무도 진희의 말을 끊지 않았다. 진희가 가방에서 봉투를 꺼내 탁자 위로 던졌다.

“좀 늦었어. 우리 성의니까 받아.”

말을 마친 진희가 구두코로 쇼핑백을 톡, 톡, 찼다. 앞부리에 박힌 금색 징이 불빛에 반짝 빛났다. 진희의 태도는 몹시 불쾌했다. 그대로 일어나 나가고 싶었다. 그렇다고 탁자 위 봉투를 덥석 집어 들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전시 오픈 날, 진희가 보랏빛 스카프를 만지작거렸다. 이런 고혹적이고 몽환적인 색은 처음 봤다며 염색에 관해 물었다. 나는 약간 흥분했다.

오배자는 염색 입자가 거칠고 타닌 성분과 기름기가 있어 천에 침투가 쉽지 않다. 그래서 오래 주물러주고 자주 비틀듯 짜서 염액을 침투하게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오배자 2백 그램을 물에 가볍게 헹궈준다. 물 2천 시시를 90도 끓인 다음 삼십 분 담가서 색소를 추출한다. 고운체로 거른 다음 똑같은 방법을 두 번 거친다. 이때 물의 온도도 중요하다. 30도에 습윤 시켜둔 섬유를 넣고 천천히 온도를 올린다. 50도가 되면 불을 끄고 삼십 분간 잘 섞어줘야 원하는 색감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매번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고…….

진희는 이렇게 섬세하고 힘든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색이라는데 놀라는 눈치였다. 진희의 진지한 표정에 기분이 들떴다. 보랏빛을 내는데 중요한 매염제의 설명도 덧붙이려는데, 스카프를 목에 두르며 어울리냐고 물었다. 진희에게 다가갔다. 스카프를 굵은 리본 모양으로 묶은 다음 목 뒤로 엇갈리게 돌렸다. 스카프 양쪽 끝은 리본 매듭에 넣어 반대 방향으로 뺐다. 쉽고 간단했지만 예쁜 선물 상자를 장식한 리본 모양이 되었다. 진희가 거울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며칠 후 친구들이 스카프를 사겠다며 찾아 왔다. 언젠가부터 공방까지 오는 거 성가시다며 모임 때 가지고 나올 것을 요구했다. 갈수록 가격을 깎고 원+원으로 달라고 하는 친구도 있었지만, 그동안 내게 힘이 되어준 건 분명했다.

쇼핑백을 탁자 위로 올렸다. 스카프와 소품을 하나씩 포장했다. 친구들이 듣든 말든 염색 기법과 천의 소재, 그리고 질감에 관해 설명했다. 내 자존심이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골고루 건네며 말했다.

“선물이야.”

눈치 빠른 진희가 호들갑스럽게 분위기를 띄웠다. 봉투를 집어 들고 카페를 나왔다.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밤거리를 헤맸다. 극심한 무력감에 무릎이 꺾이고 발걸음이 뒤엉켰다. 이사장 말대로 재고떨이는 한 셈이었다. 하지만 차오르는 설움은 어쩔 수 없었다. 여행사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출입문에는 배낭 여행, 패키지 여행, 그룹 여행, 모든 여행 가능, 이라고 쓰여 있었다.

선배, 나 갠지스강에 왔어요. 강으로 가는 길. 꽃을 파는 행렬은 끝없이 이어졌어요. 사람들에 섞여 꽃을 샀어요. 강에 도착하자 살인적인 더위와 시체 태우는 열기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죠. 강가에는 배들이 늘어서 있었고 사람들도 줄지어 있었어요. 다비식을 보려는 사람들과 함께 배에 올랐어요. 강 가운데 도착하자 군데군데 쌓아 놓은 장작더미와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불꽃은 더 맹렬했어요. 그때 인솔자가 촛불을 나눠주면서 소원을 빌라고 하더군요. 죽은 자의 마지막 의식을 보면서 추모가 아닌, 산 자를 위한 소원을 빌라니…… 사람들이 하나둘 눈을 감았어요. 나도 합류하고 싶었어요. 그러자 거짓말처럼 내게 주어진 시간만은 잘 살고 싶다는 열망이 일었어요. 먼저 떠난 그 사람에게 이제는 살고 싶다고, 나 좀 살게 해달라며 꽃다발과 촛불을 강물에 띄워 보냈어요. 순간, 그동안 나를 잠식한 슬픔이 먼지처럼 사라지는데 나 자신도 믿을 수 없었어요. 인도는 그런 곳인가 봐요.

엽서를 읽은 후 나윤의 모습이 떠나지 않았다. 나윤은 나와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 때론 경쟁자이기도 했지만 서로 의지하며 힘이 되어주던 동지였다. 그림을 천직으로 여기던 애인이 극심한 생활고와 작품에 대한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살했다. 상실감을 견디지 못한 나윤도 손목을 그었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다. 언젠가 화가의 전시를 앞두고 나윤과 찾아갔다. 그가 유튜브 영상을 보고 있었다.

타는 듯 붉은 해가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맨발에 두건을 쓴 남루한 행색의 사람들이 끝도 없이 어딘가를 향해 몰려갔다. 뭔가에 홀린 듯 걸어 갠지스강에 도착한 그들은 몸을 씻고 북을 치며 죽은 영혼을 보내는 의식을 행했다. 삶과 죽음을 다르다고 생각지 않는 듯, 이승에서 수고했으니 잘 쉬길 바라는 마음으로 느껴질 뿐 슬픔은 없었다. 인도인과 행색이 별반 다르지 않던 그는 아, 나도 저곳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가슴속에 슬픔이 매설된 사람은 서로를 알아보는 법이었다. 나윤의 외모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비쩍 마른 몸피에 안색은 창백했고 눈빛만 형형했다. 그 모습에 불안해하며 물었다. 정말로 그들은 삶과 죽음을 하나라고 믿는 거냐고, 혹시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의연 하려는 필사적인 몸짓이 아니냐고. 그때 그들이 했던 대답은 뭐였을까? 기억나지 않았다.

행사 기간에 비워둔 공방은 먼지가 수북했다. 앞치마를 두르고 걸레에 물을 적셨다. 염색 매대를 닦고 돌아서다가 현기증에 풀썩 주저앉았다. 손에 닿는 뭔가를 잡고 몸을 일으켰다. 투박한 광목의 질감이 익숙했다. 긴 나뭇가지를 벽에 고정하고 광목을 색색으로 염색한 뒤 좁은 폭으로 접어 길게 늘어트린 소품이었다. 아이는 광목 뒤에 숨는 걸 좋아했다. 아이가 숨어들면 광목이 들썩거렸고 모른 척 고개를 돌리면 엄마를 부르며 제 위치를 알렸다. 아이의 흔적은 공방 곳곳에 남아 있었다. 염료 물이 담긴 대야에 천을 담그면 작고 오동통한 손도 함께 넣었다. 내 손놀림을 흉내 내듯 자박자박 누르며 나와 눈을 맞추고 웃었다. 할머니한테 산 고구마나 옥수수를 쪄서 아이와 마주 보고 앉으면 내 입에 먼저 넣어주고 까르르 웃던 아이. 염료를 손에 묻혀 공방 곳곳에 찍어놓은 손자국을 작품이라 우기던 모습까지…… 아이의 기억은 너무 생생했다.

싱크대 아래 밀쳐둔 대야를 꺼냈다. 코치닐을 덜어 망에 담았다. 깍지벌레라고도 불리는 코치닐은 선인장에 기생하는 벌레였다. 산란 전의 암컷을 쪄서 말린 후 사용했다. 농도에 따라 분홍에서 선홍색까지 얻을 수 있는 염색 재료였다. 코치닐에 물을 붓고 불에 올렸다. 물이 끓으면서 핏빛 같은 선홍색이 우러났다. 불을 끄고 찬물을 섞어가며 색을 조절했다. 아이의 잠옷을 꺼냈다. 염료 물에 담그고 얼룩이 생기지 않게 자박자박 눌렀다. 염료 물이 닿자 갈라진 손톱 밑이 아렸다.

딱…… 딱…… 반복적으로 벽을 치는 소리에 밖으로 나왔다. ‘2호 채정’, 입구에 달린 작은 아크릴 간판이 바람에 흔들리며 소리를 만들고 있었다. 철사로 얽어놓았던 게 어설퍼 한쪽이 풀린 모양이었다. ‘10호 공근’으로 발을 옮겼다. 작업 중이던 공 선생이 고글을 쓴 채 눈으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내가 간판을 가리키자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저었다. 쇠를 자르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고약했다. 나는 바닥에 널브러진 쇳조각을 물끄러미 보았다. 저렇게 잘린 조각들은 곧 어떤 형태로든 되살아났다. 공 선생의 손길에 숨이 불어 넣어지고 작품으로 탄생했다. 내 아이도 저 쇳조각처럼 분리되었다가 누군가의 손길에 의해 형태를 잡아가고 숨이 넣어져 다시 내 품으로 올 수만 있다면…… 공 선생이 다시 손을 내저었다. 떠밀리듯 공방으로 돌아왔다. 염료 향 때문인지 눈이 매웠다. 환기를 시키려고 창문을 열었다. 저만치 할머니가 펼쳐 놓은 보퉁이가 보였다. 밖으로 나갔다. 할머니는 환한 햇살 속에 앉아 호박잎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할머니의 투박한 손길에 맑은 쇳소리를 내며 하얀 실이 벗겨졌다. 나를 흘깃 본 할머니가 호박잎 한 줌과 청양고추를 봉지에 담아 내밀었다.

“밥만 잘 먹으면 살아지는 게여.”

나는 피식 웃었다. 앞치마에서 천 원짜리 두 장을 꺼내 내밀었다. 할머니가 마수라며 침을 뱉고 이마에 붙였다가 꽃무늬 앞치마에 넣었다. 할머니의 과한 행동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었다. 호박잎을 데치고 청양고추를 다져 넣은 매콤한 양념장에 밥을 먹으면 할머니 말대로 오늘도 살아질 것이다. 봉지를 들고 돌아서는데 햇빛예술촌 아치형 간판이 햇빛에 반짝였다. 폐교를 구청에서 인수하면서 햇빛예술촌은 문을 열었다. 교실 벽을 허물어서 도예 체험장으로 만들었고, 염색이나 공예 체험의 학습장과 주민을 위한 편의시설도 마련했다. 그리고 정문 옆에 기역 자 형태의 조립 건물을 지어 십여 개의 공방을 입주시켰다.

이곳 폐교는 아버지의 일터였다. 빗물이 고인 웅덩이에서 흙을 짓이겨 여러 형태의 모양을 만들고 수분이 증발하면서 색이 변하는 걸 지켜보며 아버지가 퇴근하기를 기다렸다. 얼마 전까지는 어린이집 버스에서 내린 장미가 나비처럼 팔랑거리며 다가와 내 품에 안기던 곳이기도 했다. 처음 입주하던 날, 휘날리는 만국기를 보며 아버지가 교문에 서서 손을 흔들어주는 모습을 상상했다. 살아계셨다면 나를 응원했을 아버지. 하나뿐인 딸이 이렇듯 가난하고 못난 작가로 남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이 선생!”

봉지를 들고 현관에 들어서는데 이사장이 불렀다.

“공방을 옮겨야겠어요!”

“네?”

잠시 뜸을 들이던 이사장이 규칙을 위반했다고 했다. 공방에 한 달에 삼 분의 이는 상주해야 하는 규정을 어겼다고 했다.

“행사 때문에 그런 거잖아요. 그리고 이 자리는 구청에서 정해준 제 자리예요.”

나도 모르게 말끝이 가팔라졌다. 이사장은 건물에서 나가라는 게 아니고 장소를 옮기라는 건데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구느냐고 했다. 어디로 옮겨도 곰팡내 나는 지하보단 낫지 않겠냐며 지하에 있는 본인의 사무실을 쳐다보았다.

“그럼, 누구와 바꾸라는 거예요?”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매듭 정이라고 말했다. 개량 한복에 올림머리가 잘 어울리는 매듭 정을 홀아비 이사장이 좋아한다는 걸 모르는 작가는 없었다. 얼마 전의 일이 생각났다. 공방으로 찾아온 이사장이 구청장 부인 생일이 곧 돌아온다며 전시할 때 메인으로 진열했던 스카프를 만지작거렸다. 말뜻을 가늠하느라 잠시 머뭇거렸지만, 관습처럼 이어지는 갈취에 동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선물할 거면 원가로 드리겠다고 했다. 이사장은 떫은 감을 씹은 얼굴로 나갔다. 나는 반박보다 침묵을 택했다. 부당함을 내세워 따지고 들면 손해였다. 내년에는 이 자리도 잃을 수 있었다. 공방에 소속되지 못하면 행사장은 물론이고 초등학교 방과 후 수업도, 유치원 염색 체험학습의 기회도 얻을 수 없었다. 이사장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공방을 옮기는 날 온종일 비가 내렸다. 이사장에게 하루나 이틀, 이삿날을 보류해 달라고 말해 볼까 하다가 구차해지기 싫어 그만두었다. 공 선생이 내 일처럼 나서서 도와줬다. 비는 그칠 듯하다가 이어졌다. 차양도 없는 계단을 오르내리며 짐을 옮기기는 쉽지 않았다. 대부분 원단이어서 비닐로 꽁꽁 싸매고 푸는 일까지 보태져 밤 열 시가 되어서야 짐 정리가 끝났다. 시장기를 달래기 위해 공 선생과 포장마차에 들렀다. 나는 잔치국수는 손도 대지 않고 소주만 마셨다. 허겁지겁 국수 그릇을 비워낸 공 선생이 내 손에서 소주병을 낚아챘다.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이 선생, 도시재생사업으로 달오름 동네에서 작가들을 모집한대요. 한쪽에 카페를 운영할 수 있는 공간도 제공한다는데 천연염색이나 뜨개방 퀼트 작가에게 우선권이 있대요. 여기야 관리비만 내면 되지만 생활에 보탬도 안 되잖아요. 대신 그곳은 보증금이 있나 봅디다.”

이사장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내게는 행사장 연결도 쉽지 않을 거였다. 무엇보다 낯선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이 층으로 옮긴 공방은 기역 자 형태로 꺾인 지점이었다. 그래서 온종일 햇볕이 들지 않았다. 작업하는 틈틈이 복도에 나가 해바라기 했다. 난간에 턱을 괴고 할머니를 내려다보았다. 위에서 보는 할머니는 당당하고 강건한 모습이 아니었다. 머리카락은 빠져서 숭숭 비었고 가녀린 몸피는 햇살에 말라 바스러질 낙엽 같았다. 그 모습에 따져 묻고 싶었다. 왜 그렇게 사느냐고, 자식들은 다 어디에 있느냐고. 하지만 그런 생각이 얼마나 경솔한 것인지 나 또한 장미를 보내고 깨달았다. 세상살이가 마음먹은 대로, 계획한 대로, 살아지는 게 아님을…….

할머니는 틈만 나면 졸았다. 고구마 줄기 껍질을 벗기면서도, 잘 익은 고추 꼭지를 따면서도. 햇살을 등지고 앉아 자울자울 졸 때면 고개와 구부정한 등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손님이 오자 등이 곧추 펴지며 할머니가 웃었다. 얼굴에 퍼지는 주름의 곡선에서 가팔랐던 삶을 옭아맨 단단함이 느껴졌다. 단단함은 아픔이었다. 오랜 세월 굴곡진 삶을 살아온 사람에게 생긴 옹이 같은 거. 그래서 단단함은 또 다른 거룩함이었다. 그렇게 푸성귀를 담는 할머니의 움직임이 땅의 높낮이를 나타내는 등고선 같았다. 그때 할머니 등에 노란 나비 한 마리가 사뿐히 내려앉았다. 나비는 한참을 머물다 느릿느릿 날아올랐다. 노란 원복을 입고 나비처럼 팔랑이며 차에서 내리던 장미였다. 수묵화처럼 무겁고 진중한 삶을 살아낸 가녀린 몸피의 노년과 나비처럼 팔랑이던 아이의 모습은 생명의 순환이었다. 순간 찌릿한 통증이 느껴지면서 섬광처럼 작품에 대한 구상이 떠올랐다. 작품 이름은 등고선이었다.

스케치북을 펼쳤다. 도안을 스케치했다. 천연염색이란 배경이 되는 색이라고 지도교수는 말했다. 천연염색과 섬유 조형을 접목한 작품을 만들 생각이었다. 옥사를 바탕색으로 하고, 울 린넨 명주로 등고선을 나타내고, 노방으로 나비를 만들어 회화적으로 표현하고……. 그러고 보니 「천년의 세월」공모전 마감이 일주일 남았다.

옥사를 가로 30센티 세로 80센티 길이로 네 개를, 그리고 울 린넨 명주는 각각 크기가 다른 등고선 모형으로 스케치했다. 천을 자르기 위해 나그참파 향에 불을 붙였다. 불꽃이 일면서 향이 퍼졌다. 백단향과 허브가 섞인 향이었다. 아이를 떠나보낸 뒤 나윤의 권유로 질리도록 피웠던 향이었다. 공모전에 작품을 보낸 뒤 갠지스강으로 떠날 생각이었다. 그곳에서 사람들에 섞여 몸을 씻고 북을 치며 아이의 잠옷을 태울 것이다. 그렇게 제대로 장미와 이별한 뒤 내 삶을 살아갈 것이었다.

옥사를 반으로 접었다. 스케치한 선을 따라 향의 끝에 대고 움직였다. 재를 태우듯 끝이 타들어 가면서 천이 나뉘었다. 향에서 나오는 열기와 긴장감에 손이 끈적였다. 먹을 꺼냈다. 먹을 가는 건 잡념을 몰아내는 일이기도 했다. 단조롭게 반복되는 움직임은 부질없는 생각들을 지우기에 좋았다. 미지근하게 열을 가한 뒤 옥사를 담갔다. 3시간이 지난 후 대야에 담아 옥상으로 갔다. 햇볕이 좋았다. 건조대를 펴고 널었다. 먹물이 떨어져 하얀 시멘트 바닥에 무늬를 만들곤 금세 사라졌다. 수묵화 느낌의 잿빛만 남았다.

공방으로 돌아왔다. 옥사가 마를 동안 오배자와 로그우드를 물에 헹궜다. 작은 먼지, 흙 한 톨, 꼼꼼하게 관리해야 순수한 색을 얻을 수 있었다. 울 린넨 명주를 염색물에 담갔다. 보라와 분홍, 그리고 중간색을 얻을 때까지 염색하고 그늘에서 말린 후 다시 담그기를 반복했다. 젖어있을 때와 말렸을 때 색의 간극은 예상을 벗어났다. 색이란 멈춤이었다. 색을 얻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건, 염색시간이나 건조 그리고 결과에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이었다. 삶도 마찬가지였다. 전시에 눈이 멀어 간만의 차이로 아이를 잃었다.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을 거였다. 명암과 곡선을 살리며 손바느질로 등고선을 이었다.

상자에서 메리골드를 꺼냈다. 물을 끓인 다음 미지근하게 식혀서 노방을 담갔다. 20분 후 물에 헹궈서 말리는 작업을 아홉 번 반복했다. 물속에 잠긴 노란색이 잔물결이 일렁일 때마다 드러났다 숨었다 했다. 몽환적 형광빛이었다. 천을 고정하고 향에 불을 붙였다. 향을 쥔 엄지와 검지의 힘 조절이 중요했다. 향을 가볍게 잡고 나비 모양으로 스케치한 선을 따라 움직였다. 날개의 완벽한 대칭에 집중하며 한 땀 한 땀 새기듯이 천을 태웠다. 날개 여덟 개가 만들어졌다. 한 쌍의 날개를 마주 보게 놓았다. 몸과 더듬이는 철사로 고정했다. 눈은 투명한 유리알을 붙였다. 첫 번째 등고선에 앉은 나비가 두 번째 세 번째를 지나 네 번째에 하늘로 날아오르도록 고정했다. 나비가 날아오르는 길은 금색 메탈사로 터치하여 섬세하게 표현했다. 반짝이는 은색 실을 헝클어 아련한 아지랑이도 형상화했다. 고리를 만들어 네 개의 작품을 봉에 연결했다.

광목이 걸린 나뭇가지에 작품을 걸었다. 어느새 서쪽 창가로 스며든 노을이 벽을 타고 올라왔다. 광목 위까지 그득하게 차오르자 등고선에 있던 나비가 날아올랐다. 내 머리 위를 아련하게 맴돌던 나비가 노을 속으로 천천히 사라졌다. 끝




  <당선소감>


   "이제 시작이다. 인생의 유턴 시점을 찾았다"


이제 시작이다. 인생의 유턴 시점을 찾았다. 밤마다 꿈속에서 소설을 썼다. 현실에서는 막히는 문맥이 술술 풀렸다. 꿈속에서의 글쓰기는 매번 만족스러웠다. 꿈은 꿈일 뿐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어도 깨어났을 때의 안타까움은 컸다.

2020년 2월, 오랫동안 하던 일을 접었다. 그리고 계획했다. 소설은 엉덩이 싸움이라는 말에 싸움을 걸었다. 전업 작가를 흉내 내듯 오전 9시에 시작하고 오후 5시에 마치는 글쓰기를 계획했고 실천했다. 그러는 동안 옆구리에 살이 붙고 엉덩이에 굳은살이 생기는 느낌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고통스럽고 힘들었지만, 삶은 지독하게 행복해졌다. 그리고 당선 소식을 들었다. 뭐든 열심히 하면 된다는 답을 얻은 셈이다. 그 답을 주신 광주일보사와 정지아 작가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좋은 스승과 문우들을 만났다. 소설의 기초를 가르쳐 주신 심영의 작가님, 그리고 미미한 나의 필력을 알아봐 주고 채찍질해준 장마리 작가님께 감사드린다. ‘생오지’ 문우들과 그곳에서 만나 언제까지나 함께 할 보석 같은 ‘길나힘’ 문우들, 끝없이 되풀이되는 합평에도 지루해하지 않고 질책해준 ‘돌소공’ 문우들께 감사를 전한다. 무엇보다 내 삶에 축복인 딸과 사위, 그리고 아들에게 내 아이들로 와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올해 94세인 엄마, 엄마! 라고 부르면 오야! 라고 오래오래 대답해 주길 간절히 소망한다.

당선 소식에 흥분된 며칠이 지나면 다시 엉덩이 싸움은 시작될 것이다. 이제는 똑같은 나날을 견디는데도 이전과는 다를 것을 안다. 자판을 누르는 손에 힘이 가해질 것이다.


  ● 1961년 여수출생
  ● 생오지 창작대학 3년 수료


 

  <심사평>


  할머니와 예술가의 손 묘사 장면이 아름다워


2020년은 우리 인류가 전례없는 위기에 맞닥뜨린 시기였다. 코로나라는 인류의 위기가 과연 문학 속에 어떻게 반영되었을지 궁금하기도 했고, 기대되기도 했다. 뜻밖에 단 한 편의 소설에도 이러한 시대상은 담겨져 있지 않았다. 코로나 시대가 즉자적으로 소설에 반영되었을 거라는 기대가 섣부른 것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거리두기의 시대가 내면으로의 침잠이라는, 문학의 핵심적 본질에 맞닿아 있는 게 아닌가 조심스럽게 짐작해본다.

본심에 오른 것은 김득진의 ‘장인의 길’, 범영의 ‘신발’, 김정의 ‘등고선’, 세 편이었다. 요리를 삶과 접목시킨 ‘장인의 길’은 스토리가 흥미로웠다. 다만 아버지의 서사가 전조 없이 너무 성급하게 끼어들고, 두 여자의 이야기가 요리만큼의 설득력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쉽게 탈락했다. ‘신발’은 소설의 얼개를 짜는 솜씨가 촘촘하고 신발이라는 상징 또한 신선했다. 나무랄 데 없는 작품이었으나 주제가 결국 남편으로부터의 탈출에 그치고 말았다는 점이 아쉽다.

염색을 소재로 한 ‘등고선’은 예술과 노동을 등고에 놓고 예술가로서의 삶을 반추하는 작품이다. 아이의 죽음이라는 상투적인 서브 플롯이 마음에 걸렸으나 평생 노동을 해온 나물 파는 할머니와 예술 노동자들의 손을 묘사한 한 장면의 아름다움이 당선작으로 선택하게 했다. 섣부른 낭만이나 예술적 허영에 빠지지 않은 점도 작가의 미덕이라 할 만하다.

자본이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절대적 기준이 된 요즘에도 많은 사람이 문학이라는, 인간과 삶에 대한 자기 반추를 멈추지 않고 있다는 점에 큰 위로를 얻는다. 당선에는 이르지 못했으나 문학에의 꿈을 가진 모든 투고자들께 감사와 함께 격려를 보낸다.

심사위원 : 정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