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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숫돌을 읽다 / 허정진

 

고향 집 우물가에 등 굽은 검은 숫돌

지문이 없어지듯 닳고 닳은 오목가슴

그리움 피고 지는 듯 마른버짐 돋는다


대장간 불내 나는 조선낫 집어 들고

제 몸을 깎여가며 시퍼런 날 세우면

뽀얗게 쌀뜨물일 듯 삭여가는 등뼈들


새벽녘 고요 깨고 쓱싹대는 숫돌 소리

가만한 한숨처럼 은결든 울음처럼

짐 진 삶 견디어내는 낮고 느린 수리성


묵직한 중량감 든든한 무게중심

자식들 앞날 위해 새우잠 참아내며

평생을 여백으로 산 아버지를 읽는다





  <당선소감>


   "설레는 마음으로 시조 텃밭 일굴 것"


아버지 산소를 다녀왔다. 가을이 지나간 길섶 빈 가지에 울음처럼 맺힌 붉은 열매가 눈에 시렸다. 노송 숲 사이를 빠져나온 바람이 종굴박 같은 무덤 사이로 오래된 시간으로 흐른다. 제 몸을 닳고 닳아 등 굽은 숫돌이 된 것처럼 자식들에게 한없이 등받이가 되어준 사람이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동안거에 들어간 수도승처럼 오늘도 아무 말이 없다. 긴 겨울날 같았던 생을 낯설게 보낸 그리움의 허기가 그림자처럼 내려앉는다. 아버지란 이름은 그저 바라만 봐도 마음의 위안과 평온을 얻는다

정연한 내재율과 정돈된 함축미가 좋아 시조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 짧은 문장 속에서도 이치와 경우를 논하고 풍미와 격의를 다룬 것이 마음에 들었다. 자유분방에 앞서 절제와 규칙이 오히려 매력적이었다.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도 달고 단 무화과처럼 청안시를 갖춘 시조작품을 보면 그 명징함에 가슴이 울렁거린다. 삶의 보편적 가치를 탐구하고 농촌의 정서적 공감대를 소재로 작품활동을 하고 싶다. 다문다독다상량(多聞多讀多商量), 홀로 습작의 과정이 힘들었지만 늦깎이로서 설레고 두려운 마음으로 시조의 텃밭을 정성껏 일궈 나가겠다.

당선이 되어 기쁘기 그지없다. 아람 벌어져 굵다란 밤송이 하나 손에 쥔 것 같다. 한 편의 글이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연금술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부모님에 대한 효의 마음이나 공유(恭惟)를 가져오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경남신문 신춘문예가 참신하고 도전적인 작가 등용문인 것을 알기에 그 이름값을 하지 못할까봐 벌써 두려움이 앞선다. 코로나로 힘든 시기지만 관심과 격려를 북돋아 주는 사람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모든 분께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 1958년생
  ● 함양 출생, 창원 거주
  ● 단국대 사학과 졸업


  <심사평>


  숫돌서 읽어낸 아버지의 삶


경남신춘이 1987년 시작되었으니 33년이란 시간이 쌓여 사람으로 치자면 원숙한 장년기에 접어들었다. 연륜이 깊어지는 만큼 출신 문인들이 한국문단에 차지하는 비중도 높아가고 있다. 시조의 경우 한 해 뒤인 1988년에 시작돼 첫 당선자를 배출하기 시작하였고, 지금은 한국시조단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점증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심사위원들은 전국에서 응모한 작품들을 정독하기 시작했다. 올해의 응모작품은 예년에 비해 약간 적은 편이었다. 참여도가 다소 낮은 것은 괴질로 인해 마음이 움츠러든 탓은 아니었을까? 대작 혹은 수작에 대한 열망으로 읽어가는 동안 여전히 눈에 밟히는 것은 아직도 형식을 갖추지 못한 작품이 있다는 서글픔이었다. 아시다시피 시조는 언어의 절제와 형식미학을 전제로 하고 있다. 형식 속에서 자유를 구축해 내는 역량이 심사의 관점이기도 하다.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모국어에 대한 애착과 형식을 다스릴 줄 알아야 친해질 수 있는 전통 장르라는 것쯤은 신춘문예 응모자라면 다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마지막까지 심사위원의 손에 남은 작품은 ‘청자귀형수병’, ‘아침 대장간’, ‘숫돌을 읽다’ 등 3편이었다. 이들 3편은 모래밭에서 사금을 캐낸 기분이었다. ‘청자귀형수병’은 ‘천지사방에 구지가가 울리겠다’라는 넷째 수의 마무리 구절이 심사위원의 마음을 얻었지만 첫째, 둘째 수의 종결 처리가 눈에 거슬렸고, 전체적으로 완결미와 이미지 전개에 다소 아쉬운 점이 있었다. ‘아침 대장간’도 생동하는 이미지 전개가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다소 무리한 전개가 심사위원의 마음을 사지 못했다. 심사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숫돌을 읽다’였다. 닳고 닳은 숫돌에서 아버지의 삶을 읽어내는 안목이 높게 평가되었다. ‘평생을 여백으로 산 아버지’를 읽고 있는 시인의 눈이라면 앞날을 기대해도 좋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당선을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 김연동, 서일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