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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고주박이 / 김순경

 

봄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고즈넉한 산길을 걷다가 죽 늘어선 아름드리 고목을 만난다. 빗물이 천천히 몸피를 적시자 늙은 산벚나무가 까맣게 변한다. 겨우내 봄을 기다리던 꽃망울들이 가지마다 터질 듯 부풀어 있다. 세상이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어도 때맞춰 꽃을 터뜨리려는지 마지막 기운을 모은다.

봄을 알려주는 노거수 사이에 그루터기 하나가 눈길을 끈다. 초라한 몰골이 지난 세월을 말해준다. 살점이 뜯겨나간 조장鳥葬처럼 곳곳에 응어리진 뼈마디가 드러난다. 상주도 백관도 보이지 않는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썩어간다. 껍질이 벗겨지고 없는 거무스름한 속살이 조금씩 삭아 내렸다. 억센 뿌리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고 하늘을 향해 올라가던 우듬지도 기억 속에만 남아 있다. 당당하던 자세는 어디에도 없고 썩은 뿌리 하나가 겨우 몸뚱이를 받치고 있다. 날마다 들락거리던 다람쥐도 밤마다 찾아오던 부엉이도 발길을 끊은 지 오래다. 아직도 누구를 기다리는지 쓰러질 듯 서 있다.

고주박은 땅에 박힌 채 죽은 나무 그루터기이다. 얼핏 보면 한때 나무였는지도 모를 만큼 거친 수피마저 벗어버린 짧은 몸통을 땅에 의지하고 있다. 사방으로 뻗어가던 잔가지는 삭정이가 되어 부러지고 물기 하나 없이 깡마른 몸뚱이마저 떠나고 없는 나무의 밑둥치이다. 비바람에 깎이고 쓸려나간 몸피에는 지나온 세월만큼이나 능선과 골짜기가 새겨져 있다. 흙이 붙잡지 않았으면 벌써 쓰러져 진토가 되었을 썩은 밑둥치에 고통과 속박의 사연들이 물결처럼 새겨져 있다.

형체가 기묘하다. 에밀레종의 비천상이 온몸을 비틀며 승천하는 용의 형체가 되었다가 물결에 씻겨나간 듯한 잔주름이 치솟는 불꽃의 형상이 되기도 한다. 겉옷 같은 껍질을 벗기고 두툼한 살을 걷어내면 진정한 속살이 드러난다. 속이 까맣게 변한 것만 봐도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 질곡의 역정이 짐작된다. 썩을 대로 썩고 버릴 것은 버려야 비로소 본래의 모습이 나타난다.

마른 버섯을 둘러쓰고 비를 맞는다. 벌집 같은 몸통이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물기를 단숨에 빨아들인다. 찬찬히 들여다보니 송진이 뭉쳐진 관솔도 없고 밤나무처럼 단단하고 억센 심재도 없다. 살면서 응어리진 것이 하나도 없었을까. 삶이 힘들어도 사리를 만들지 않고 바람에 흔들려도 뼈대를 만들지 않았다. 산새가 둥지를 틀었던 작은 구멍에 빗물이 고이기 시작한다. 마지막 남은 육신마저 버섯과 벌레들에게 내주고 비에 젖어간다.

봄날이 사라진 계곡에 나무토막 하나가 흙덩어리처럼 나뒹군다. 화목도 될 수 없을 정도로 썩었다. 죽어도 불길 속에는 들어가지 않겠다는 듯이 건드리기만 해도 바스러진다. 바람결에 왔다가 바람을 타고 돌아가려는지 풍장을 택한다. 둥치의 뿌리는 이미 흙이 되고 남은 것이 없다. 가슴속에 응집된 수액마저도 다 날려 보내고 마지막 남은 육신이 진토가 되기만을 조용히 기다린다. 남겨본들 소용없고 그 또한 부질없다는 것을 아는지 아예 흔적마저 지우려고 한다.

구부정한 형상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니 할머니의 굽은 등이 생각난다. 둔각의 허리가 점점 굽어가자 능선처럼 등뼈가 도드라졌다. 한 줌의 흙마저도 다 씻겨 내린 설악산 공룡 능선의 바위처럼 튀어나온 뼈마디마다 굴곡진 삶이 드러났다. 썩어가는 나무둥치처럼 마른 가슴과 핏기없는 얼굴에는 골과 능선이 선명하게 나타났지만,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전하려 했다. 비록 형상이 왜소하고 초라해도 자리를 떠나지 않는 고주박이처럼 맺혀있던 사연들을 말하려는 듯 온몸을 뒤척였다.

고향 집 뒤란에 늙은 홰나무가 있었다. 수형이 웅장하고 모양이 단정한 품위 있는 나무였다. 수피가 유난히 검었지만 그렇게 두껍지는 않았다. 이 나무를 심으면 집안에 학자가 나고 큰 인물이 나오며 화목한 가정이 된다 하여 할아버지께서 심은 나무였다. 자손 대대로 경사가 이어지기를 바라며 심은 나무도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알살을 드러냈다. 언제부턴가 바람이 불 때마다 곰삭은 육신을 조금씩 날려 보내더니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그루터기가 되었다.

고주박이도 푸른 시절이 있었다. 큰채와 아래채가 지어지기도 전에 희망과 꿈이 응축된 축복의 땅에 뿌리를 내렸다. 넉넉한 구덩이에 발을 담그고 보호대에 의지하며 하루가 다르게 몸집을 불렸다. 찬바람이 불 때마다 노랗게 물든 단풍이 나비처럼 흩날리고 나면 잠시 숨을 고르기도 했다. 넓은 마당이 만들어지고 흙담이 경계를 분명히 할 때 집 안은 온통 젊음이 넘쳐났다. 자라나는 아이들을 지켜보며 올망졸망 모여있는 공부방도 곁눈질했다. 가끔 황백색 잔꽃을 서창書窓으로 날려 보내면 기다렸다는 듯이 창밖을 내다보며 탄성을 질렀다. 천지가 청춘이고 봄날이었다.

까만 그루터기 하나가 빈집을 지킨다. 둘레를 가늠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썩은 밑둥치만 남아 있다. 종양 같은 혹이 곳곳에 튀어나온 밑둥치는 불에 탄 것처럼 속이 텅 비어 있다. 잎을 내고 열매를 맺을 잔가지도 하나 없지만 쉽게 떠나지 못한다. 아쉬움이 남아 이승에서 머뭇거리는 영혼처럼 어렴풋한 형상으로 자리를 지킨다. 가지도 뿌리도 없는 노쇠한 몸이 누구를 기다리는지 골목을 내다본다.

담 모퉁이에도 늙은 홰나무를 베어낸 그루터기가 있었다. 옆집도 자식들이 흙에 묻혀 살지 않기를 바라며 심었다. 무섭게 자란 나뭇가지가 아래채를 덮어 그늘을 만들고 좁은 골목을 막아서자 어쩔 수 없이 베어냈다. 그래도 의자 높이의 밑둥치만은 남겨두었다. 지팡이를 짚은 할머니들은 꼭 그곳에 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나도 물을 길어 오거나 술 심부름을 갔다 올 때면 그곳에다 큰 주전자를 올려놓고 한참을 쉬었다. 동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목이라 쉬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세월이 가자 할머니의 등같이 여위어 가더니 어느 날 뿌리째 뽑혀나가고 없었다.

그루터기가 되어도 썩을 겨를이 없었다. 나무를 베자마자 바로 뿌리를 캐내 화목으로 사용했다. 나이테가 선명하고 물기가 촉촉한 나무뿌리를 칡 캐듯이 잔뿌리가 나올 때까지 땅을 팠다. 때로는 바위나 굵은 돌이 괭이 날을 무디게 해도 심마니가 되어 끝까지 캐냈다. 문어발처럼 사방으로 뻗은 다리로 버티고 있어도 소용없었다. 적당한 부분에서 자르고 끊어 통째로 뽑으면 잔뿌리들이 붉은 황토를 한 움큼씩 움켜잡은 채 딸려왔다. 도끼질도 힘들고 나뭇가리 만들기도 어렵지만, 화력만큼은 장작보다 좋을 때가 많았다.

어느 산을 가도 고주박이가 지천으로 널려 있다. 기후변화 때문인지 베지 않아도 저절로 쓰러지고 부러지고 썩어간다. 주변 나무들과 경쟁하다 넘어졌는지 태풍에 굵은 둥치가 부러졌는지 알 수 없지만, 곳곳에 널브러져 있다. 어쩌면 돌아갈 날을 알고 육신을 거두어들이는지도 모른다. 속절없이 늘어나는 가지를 건사하느라 허리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살다 보니 남은 것은 노쇠한 몸뚱이뿐이다. 사막에 널브러진 낙타의 등뼈처럼 앙상한 몸뚱이가 되어도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허덕이는 숨비소리가 끊어질 날이 없어도 자손을 돌보고 늘리는 일만큼은 게을리하지 않았다.

망백을 훨씬 넘긴 어머니가 아직도 자식들을 챙긴다. 검버섯이 가득한 핏기 없는 얼굴이 속은 다 타고 겉만 남았다고 말한다. 외우지 않으면 떠날 것만 같은지 날마다 육 남매의 이름만 되새김질한다. 한창나이의 큰아들을 가슴에 묻고 둘째 아들마저 갑자기 먼 곳으로 떠나자 한동안 시력이 떨어져 앞을 잘 보지 못하고 음식도 삼키지 못했다. 날마다 밭에서 살았다. 곳곳에다 뭔가를 심고 또 심었다. 풀도 없는 밭을 호미로 파고 덮기를 반복했다. 틈만 나면 가슴을 쥐어뜯으며 토해내던 넋두리가 어느 날 흐릿한 정신마저 데려갔다. 두 번이나 경험한 참척의 아픔을 기억에서 지웠는지 지금도 현관을 내다보며 없는 아들의 안부를 묻고 또 묻는다.

평생 하늘만 바라보고 우듬지를 뻗었다. 누가 뭐라 해도 근육질의 몸통을 키우고 팔을 벌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다. 수많은 가지만큼이나 뿌리도 황무지나 돌밭을 가리지 않고 땅속을 파고들었다. 때로는 기근을 앞세워 바위도 밀어내며 거세게 밀고 나갔지만, 지금은 제 몸도 지탱하지 못한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혈기 왕성한 청춘은 길지가 않다. 돌아보면 늙고 병드는 것도 순간이다. 마지막 남은 육신을 내려놓고 열반에 드는 노승처럼 고주박이도 낡고 삭은 영혼마저 바람에 날려 보낸다.




  <당선소감>


   "이제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


더는 묵혀둘 수 없어 글쓰기를 시작했습니다. 옹이처럼 단단해진 응어리를 녹이고 난마처럼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푸는 일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급한 마음에 서두르다 보면 생각이 달아나고 너무 달래면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날마다 씨름하듯 뒹굴다 보니 다져두고 눌러두었던 사연들이 하나둘 바깥세상으로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언제부턴가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 가슴을 짓눌렀던 단단한 덩어리들을 명주실처럼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풀어냅니다.

지금은 종심소욕(從心所欲)을 화두로 삼고 있습니다. 아직은 하고 싶다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지만,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려고 노력합니다. 현실의 벽에 막혀 추스르고 눌러두었던 일들을 이순을 넘기고서야 하나씩 시작하고 있습니다. 혼자서 할 수 없을 때는 누군가에게 묻고 답을 기다립니다. 세상일이 내 마음 같지 않아도 크게 상심하거나 아쉬워하지 않고 사람과의 관계가 잘 풀리지 않아도 상처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기억의 고리가 붙어 있을 때 가고 싶은 길을 가려고 합니다. 그곳이 어디든 더 늦기 전에 많은 것을 즐기려고 오늘도 자판을 두드리고 소리를 배웁니다.

끝으로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과 경남신문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리고, 글의 영역을 넓혀주신 분들께도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늘 곁에서 힘이 되어준 가족들과 저를 아는 모든 분과 함께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 1958년생
  ● 울산 출생, 부산 거주
  ● 공학박사·동의과학대 자동차과 교수


 

  <심사평>


  고른 호흡·어휘 선택 돋보여


천둥 같은 울림과 번개 같은 번쩍임에도 놀라지 않을 준비를 하고 응모작들을 만났다. 작품들은 대체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 잊히지 않는 지난날을 회억하는 내용 등이 많았다. 또한 시대 상황을 반영이라도 하듯 작품 곳곳에 ‘코로나’와 ‘마스크’도 등장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문장의 정확성, 명료성, 논리성, 그리고 통일성을 염두에 두고 고른 작품은 ‘맹지’, ‘무쇠 꽃’, 고주박이’ 등 세 편이었다.

자기 땅인데도 출입구가 없는, 사방이 남의 땅으로 막혀서 갇혀버린 맹지를 보며 문득 사람들과 대체로 소통을 원활히 못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설득력과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은 있었으나 뒷부분에 긴 휴대폰 이야기가 걸림돌이었다.

‘좁은 베란다에 무쇠 꽃 한 송이가 자라고 있다.’로 참신하게 시작되는 작품 ‘무쇠 꽃’은 무쇠 솥 뚜껑으로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주시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내용이다. 문장의 끝 부분 ‘소리’, ‘쇳덩어리’ 등을 명사형으로 처리한 점이 아쉬웠다.

수필 ‘고주박이’는 우선 호흡이 고르다. 문장 속에서 서로 연관되는 요소들의 맥락화가 잘 이뤄져 있어 문장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현학도 멋부림의 기교도 없다. 상황 묘사에 꼭 맞는 어휘 선택 능력이 돋보인다.

글쓴이는 산길을 걷다가 땅에 박힌 채 죽은 나무 그루터기인 고주박을 만난다. 그리고 고주박에 생명을 불어넣어 사람으로 환치시켜, 늙고 병든 우리의 미래 모습을 보여주면서 깊은 상념에 젖게 한다. 문장 곳곳에 언어 고르기를 잘하였다. 관찰력도 뛰어나, 나비 한 마리 그리려고 십 리 길을 따라가면서 관찰한 조선 후기 문인화가 남계우가 생각난다.

심사위원은 고심한 끝에 작품 ‘고주박이’를 당선작으로 선했다. 당선자에게 축하드리며 더 큰 성취를 위한 고뇌의 시간이 이어지기를 빈다.

심사위원 : 강현순, 양미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