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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착란의 시간, 착상의 언어 / 김진석

 

- 김민정 시세계의 변모 과정


시인의 술래잡기 양상은 환영으로서의 ‘나’에게 쫓기는 과정이자

실재하는 ‘나’를 추적하는 악순환적인 꼬리잡기의 과정이다.

그러나 실재의 ‘나’는 거울 밖의 외부에 존재하며, 따라서 시/내부의 모습에 드러나는

화자의 역할은 언제나 도망자의 역할로 규정된다.


시인은 “고통에서 고통으로 고통이 전해질 수 있는 거니까”

라고 말하며 산 자에게는 죽은 자의 아픔을,

죽은 자에게는 산 자의 슬픔을 전달하고 있다.

이러한 시인의 행동은 매개자로서의 무당의 역할에 다름 아니며,

시인은 아픔의 상호교류를 가능하게 만드는 ‘고통의 전달자’이다.


1. 술래잡기의 악몽


시는 자꾸만 달아나려고 한다. 자신을 둘러싼 형식으로부터, 시가 갖추어야 할 당위적 개념으로부터 시는 결별을 선언한 채 시가 아닌 곳으로 이탈하여, 시가 아닌 것을 시로 피어나게 한다. 도주하는 시, 다시 말해 모호하고 추상적인 모종의 형상을 언어로 재단하여 구체화된 텍스트로 발화시키는 것이 시인에게 주어진 지상과제라면, 시인은 필연적으로 시를 쫓는 술래의 책무를 지니게 된다.

그러나 김민정이 자신의 첫 번째 시집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열림원, 2005)를 통해 보여준 모습은 쫓는 자/발견하는 자의 모습이 아니다. 시인의 시에 드러난 화자는 “대머리 물미역 장수가 나를 쫓아”(「엄마,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안 닮고 나를 닮은 검은 나나들 3」)오는 상황이거나, 때로는 “오리발 같은 손바닥을 펼쳐 따박따박 도망치”(「자…살…자」)는 자이다. 술래여야 할 시인이 도망자가 된 역전된 상황은 인용한 다음 시에서 보다 면밀히 드러난다.


한 발에는 침실용 슬리퍼

한 발에는 은비늘색 하이힐을 신고서 여태 나는

도망치고 있어요

새끼발가락에 박힌 티눈 하나가 줄곧

내 뿌리를 노리고 있었거든요 그래도 나는

넘어지지 않아요 아직 내 사타구니에 머리 박은

옷솔 같은 털들이 쑥쑥 자라

날 숨겨주고 있거든요

아직까지는……

―「잠들어 거울 속에서 눈 뜬 검은 나나」 부분


도주 행위는 그것이 발각되었을 경우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화자가 당면한 위험은 “뿌리”가 노려지는 위험, 즉 존재론적 근원에 위협이 가해지는 상황이며 이러한 위협을 주는 대상은 다름 아닌 자신의 “새끼발가락에 박힌 티눈 하나”이다. 신체의 일부가 존재에 위협을 가하는 상황에서 화자를 “숨겨주고 있”는 것도 신체의 다른 부분, “사타구니에 머리 박은 옷솔 같은 털”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는……”이란 말미의 한탄을 통해 화자의 은폐가 한시적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술래잡기에서 영원한 도주는 없으며, 은폐는 항상 한시적이어야 한다. 그 이유는 술래가 아닌 자의 본령이 쉽게 발견되지 않는 것, 뒤집어 말하면 어렵게 발견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철저히 은폐된 존재와의 술래잡기에서 술래는 망연한 공간을 표류하는 방랑자에 지나지 않으며, 발견되지 않는 자 역시 광막한 공간에 홀로 남겨진 미아와 다르지 않다. 아득한 상실의 시간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 즉 술래잡기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두 존재는 서로를 찾아 나서게 된다.

그러나 술래잡기의 관계 양상이 발견하는 자(주체)-발견되는 자(객체)의 관계에서 발견하는 자(주체)-발견하는 자(주체)의 관계로 변모되면, 지체된 술래잡기의 결말은 혼돈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찾아 헤매는 무연한 외침으로 귀결된다. 주체가 객체가 되고, 객체가 주체가 되는 방랑의 과정 속에서 당연히 술래잡기의 승자와 패자를 구분 짓는 이분법적 구별은 불가능하다. 「잠들어 거울 속에서 눈 뜬 검은 나나」속의 술래잡기 역시 승자와 패자가 불분명하다. 발견되었으므로, 시의 화자는 패자의 위치에 규정되는 것이 마땅하지만 발견한 자 역시 화자의 일부인 “새끼발가락에 박힌 티눈 하나”이다. 숨는 자, 숨겨주는 자, 발견하는 자가 모두 ‘나’의 일부라는 점에서, 시에서 드러난 술래잡기는 ‘나’를 찾는 탐색의 과정이자 ‘나’로부터의 도주의 과정으로 이해가 가능하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시에서 드러나는 술래잡기의 양상은 탐색자로서의 ‘나’의 모습이 배제된, 은폐자로서의 ‘나’의 모습뿐이다. 그 이유를 찾기 위해서 우리는 인용된 시의 제목과 다른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셀로판지같이 얇은 스킨으로 몸을 도배한 공 하나가, 공 두 개가, 나를 닮은 제각각의 공 하나하나들이 우당탕 입 밖으로 굴러나왔다 너 여기 있었구나, 나도 여기 있었는데…… 그럼 쟤는, 그럼 그 옆에 쟤는, 그럼 그 옆에 옆에 쟤는, 그럼 옆에 옆에 옆에 쟤들은 다……누구세요?

―「잠들어 거울 속에서 눈 뜬 검은 나나」 부분


“셀로판지같이 얇은 스킨으로 몸을 도배한 공”은 “나를 닮”아 있다. 공들은 “너 여기 있었구나, 나도 여기 있었는데……”라며 서로를 알아보지만, 공의 개수가 늘어남에 따라 서로를 알아볼 수 없게 되며 결국에는 “누구세요?”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은 「잠들어 거울 속에서 눈 뜬 검은 나나」라는 제목이 시사하듯 “거울 속에서” 벌어진다.

거울은 실재하는 존재를 비춤으로써 존재의 현상을 만들어낸다. 거울 속에서 ‘나’는 무한히 증식할 수 있지만, ‘나’-실재와 구분되지 않는 ‘나’-현상의 무한한 증식은 역설적으로 ‘나’-실재의 존재를 모호하고 불분명하게 만든다. 이러한 자기 복제의 혼돈 속에서 독자는 물론 “공”들 또한 서로가 서로의 실재인지, 혹은 현상인지를 명확히 구분해내지 못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서로는 “누구세요?”라는 질문을 던질 만큼 서로에게 타자에 다름 아닌 존재이며, 이러한 상황에서 존재들은 서로의 외형적 닮음과 맞물리며 시의 세계를 친숙함과 낯섦의 기이한 공존 상태로 만들어낸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자가 증식의 기이한 현장 속에는 시인이 찾는 ‘나’, 실재하는 ‘나’는 부재한다. 복제의 장소는 어디까지나 “거울 속”의 공간이며, 실재하는 ‘나’는 거울 밖 외부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잠들어 거울 속에서 눈 뜬 검은 나나」를 통해 알 수 있는 시인의 술래잡기 양상은 환영으로서의 ‘나’에게 쫓기는 과정이자 실재하는 ‘나’를 추적하는 악순환적인 꼬리잡기의 과정이다. 그러나 실재의 ‘나’는 거울 밖의 외부에 존재하며, 따라서 시/내부의 모습에 드러나는 화자의 역할은 언제나 도망자의 역할로 규정된다. 이를 통해 두 가지 사실을 유추해낼 수 있다. 하나는 시인의 술래잡기가 주체와 객체, 승자와 패자의 구분이 불가능한 양상에 도달하기까지 방랑자/미아로서의 지난한 과정을 겪어왔다는 점이며, 또 다른 하나는 실재하는 ‘나’가 거울 밖의 외부에 존재하는 한 내부에서의 ‘나’를 발견한다고 해도, 이는 결국 방랑자/미아로서의 나의 역할을 자각하는 데 불과하다는 것이다.

포획의 가능성이 없는 추격과, 탈출의 가능성이 없는 도주는 “도돌이표 도돌이표로 다시 밤마다”(「고통에 찬 빨래 되기―나는 안 닮고 나를 닮은 검은 나나들 3」) 재현되며 이는 무한한 궤도를 그리는 악몽의 연속과 다르지 않다. 악몽 속에서 시인은 끊임없이 분화/미립화되고 이는 “눈알”로 묘사된 탈중심화된 기관이 “눈알나무”라는 유기체를 거부하는 풍경으로 연출된다.


2. 생성의 시간


나는 한 그루의 거대한 눈알나무, 밤마다 내 몸에서는 사랑스런 난자 대신 눈알들이 자라났다 걔중 뼈가 휘도록 탱탱하게 살찐 녀석들은 고무공처럼 이리 팅 저리 팅 튀겨다니더니 나만 모르게 꼭꼭 숨어버리곤 했다 어디 갔을까, 어디로 사라져버렸을까 어느 날 맞아 죽은 개의 악다문 입속에서 말똥말똥 눈동자를 굴리고 있는 눈알 한 개를 찾아냈다 하지만 망치로 개의 이빨을 깨부수는 동안 부풀 대로 부푼 눈알은 오히려 죽은 개를 한입에 삼켜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멀리 개 짖는 소리 들리더니」 전문


시의 화자는 “난자 대신 눈알들이 자라나”는 “거대한 눈알나무”이다. 화자는 “꼭꼭 숨어버린” “눈알”을 찾다가 “맞아 죽은 개의 악다문 입속”에서 “눈알 한 개”를 발견해낸다. 그러나 개의 입속에서 눈알을 꺼내려는 화자의 의지와 무관하게 “눈알은 오히려 죽은 개를 한입에 삼켜버리고”만다. 이러한 시의 풍경은 눈알나무-눈알의 관계가 통념적인 나무-열매의 개념으로 도식화되지 않으며, 눈알이 자신의 생의 발원지인 눈알나무로부터 도주/탈주를 선포했음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시인-유기체의 기관은 더 이상 중심에 종속된 대상이 아니며, 눈알나무와 눈알이 내포하고 있는 강밀도(intensity)의 역전된 상황은 오히려 기관에 의해 신체가 위협에 처할 가능성을 함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화자가 미립화된 분신에게 느끼는 공포의 발화이며 이는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을 빌려 말하자면, 기관 없는 신체(corps sans organs)가 꾸는 악몽의 현현이다.

기관 없는 신체가 ‘-되기(devenir)’의 바탕이자 궁극적 목표임을 고려해본다면 시인은 “티눈 하나가 줄곧/내 뿌리를 노”릴 때까지, 그리고 눈알이 “오히려 죽은 개를 한입에 삼켜버리”기 전까지 무수한 ‘-되기’의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실제로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의 1부, ‘그녀들의 메르헨’에서 시인은 “거북이를 찾아나”선다. 그리고 “불가사리처럼 내 안에 포복해 있는 붉은 네 그림자”(「거북 속의 내 거북이」)를 발견해냄으로써 ‘거북-되기’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뿐만 아니라 “길고 긴 입맞춤으로/두꺼비 왕자의 감추었던 물갈퀴를 찾아”내며 (「두꺼비 왕자는 냄새나서 슬퍼」) ‘두꺼비-되기’의 가능성 또한 보여준다. 이렇듯 시인의 강밀도는 시인 자신-중심을 제외한 모든 것에 가담하며 리좀(rizhome)적인 탈주와 생성의 곡선을 그린다.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김재인 옮김, 새물결, 2001)


자물쇠 단단한 철창 안에서만 잠들 줄 아는 날 내다 팔기 위해 오늘도 아빠는 포수로 그림자를 갈아입는다 나는 도망치지만 발빠르게 헛돌아가는 외발자전거는 땅속 깊이 층층 계단으로 쌓아 내린 뼈 마디마디를 뭉그러뜨리며 또 다른 사각의 메인 스타디움 안에 발 빠진다 끝도 없이 페달을 감아대는 레이스 끝에 홈스트레치에 접어들자 관중석마다 빽빽이 들어차 있던 나들이 일제히 일어나 박수로 내 나침반을 겨냥한다 (중략) 아빠가 나눠준 족집게로 오뚝이들 차례차례 내 머리칼을 뽑아댄다 나이스 풀러, 예 좋아요, 좋아 그치만 한 번에 딱 한 가닥씩이오 머리칼이 뽑혀 나가 입 벌어진 모공 속에다 엄마는 색색의 셀로판지로 깃대 단 이쑤시개를 꽂아 넣는다 쑥쑥 잘 크거라 내 나무야 엄마가 물 조리개로 물을 뿌려주자 나는 화살이었다가 우산이었다가 낚싯대였다가 장대높이뛰기용 장대로 키 자라는 한 마리의 거대한 고슴도치가 되어 쀼쭉쀼쭉한 털들을 비벼대기 시작한다 울울창창한 가시 숲에서 색색의 단풍이 물들어 나리자 여기저기 날아든 담뱃불로 지져진 내가 폭죽처럼 하늘을 향해 쏘여진다 색색의 꽃방석을 뒤집어쓴 채 날으는 고슴도치 한 마리, 사방팔방 불붙은 가시를 발사한다.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부분


1부, ‘그녀들의 메르헨’에 마지막으로 수록되어 있는 위 시는 시인의 초기 시세계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다. 인용한 시에서 “아빠”와 “엄마”는 화자가 자신의 원류(源流)로서, 자신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무정형으로 분열된 화자의 분신이, 악몽 속에서 ‘아빠’와 ‘엄마’의 형상으로 현현한 결과물에 더욱 가깝다. 타자화된 ‘나’-“아빠”는 “날 내다 팔기 위해” “포수로 그림자를 갈아입”으며, 화자는 이로부터 “도망치지만” 결국 “또 다른 사각의 메인 스타디움 안에 발”이 빠져서 도주에 실패하고 만다. 화자가 뒤이어 맞이한 국면은, “관중석마다 빽빽이 들어차 있던 나”의 발견이다. 관중석에서 술래잡기를 조망하는 인물들 역시 ‘나’의 분화이며 분열된 주체들이다. 「잠들어 거울 속에서 눈 뜬 검은 나나」에서 우리가 “입 밖으로 굴러나”오던 “공”들을 구분할 수 없었듯이, 위 시에서도 마찬가지로 도망치는 ‘나’와 관중석에 있는 ‘나’들은 구분될 수 없다. 따라서 도망치는 화자 역시 실재의 공간-외부로부터 허구의 공간-내부로 파생된 분신이란 유추가 가능해지며, 이는 관중석의 수많은 ‘나’들 역시 도주의 과정을 후험적으로 겪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정리하자면,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라는 발랄한 제목의 시 속 공간은 사실, 증식과 분열의 지옥도이자 ‘나’와 ‘나의 분열’이 서로 쫓고 쫓기며 착종되는 착란적인 술래잡기의 장이며, 이 모든 악몽이 공전(公轉)하고 공전(空轉)하는 윤회의 수레바퀴이다.

덧없는 윤회 속에서 화자의 방향성, “나침반”은 “겨냥”당한다. 화자는 “아빠가 나눠준 족집게”에 “머리칼”이 뽑히고, 그런 화자의 몸에 “엄마”는 “색색의 셀로판지로 깃대 단 이쑤시개”를 박는다. 폭력적 행위와 탈구된 이미지의 연속에서 화자는 “화살, 우산, 낚싯대, 장대높이뛰기용 장대”와 같은 사물로 변주되며 첨예화 과정을 거친 뒤, 마침내 “쀼쭉쀼쭉한 털”을 가진 고슴도치로 거듭난다.

장미의 가시가 그렇듯, 가시의 임무는 대상에 대한 공격성이 아닌 대상으로부터의 접근 불가능을 의미한다. 가시를 지니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를 술래잡기에서 백기를 흔드는 행위, 혹은 자기방어의 일환으로 볼 수도 있으나 가시를 지닌 주체가 “날으는 고슴도치”이고 그 고슴도치가 지니고 있는 가시가 “불붙은 가시”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날개를 지니지 않은 존재가 비행하기 위해서는 내재되어 있는 힘의 발산이 필요하며, “폭죽처럼 하늘을 향해 쏘여진다”는 점에서 그것은 내부에 응축된 힘의 폭발이다.

그 힘은 “사방팔방”으로 퍼져 나간다. 시인이 보여주었던 세계가 ‘나’의 증폭과 복제가 반복되는 내부의 공간이었다면, 그 공간의 밀도가 포화상태에 이르렀을 때 내부의 존재들이 외부로 터져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이제 내가 불신하는 건 나의 지문, 나의 배내똥

이제 내가 머리 두는 땅은 피 끓는 너의 단속곳

다시 무정란 속으로 역류하여 들이차는


이 달짝지근한 액취……


오오 버려짐의 축복이여!

―「다시 무정란 속으로」 부분


흔히 알은 세계에 비유된다. 그것은 인류가 오래전부터 상상해온 우주란(宇宙卵)의 연장이며 내부에 무엇을 내재하고 있을지 모르는 가능성의 세계이자, 내재된 무언가에 의해 깨진다는 점에서 새로운 세계의 출현을 예고하는 상징이다. 그런데 「다시 무정란 속으로」제목이 드러내듯이 시인의 세계는 무정란이다. 무정란은 정자와 수정하지 못한 난자의 세계이며, 존재생성의 가능성이 없는 불완전한 세계이다. “지문”과 “배내똥”이란 존재의 증거가 “불신”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시 무정란 속으로」란 제목은 시의 화자가 존재의 존재 없음을 지향하거나, 혹은 무정란 속으로의 침잠을 간구하는 것으로 이해되기 쉽다.

그러나 시에서 주목을 요하는 부분은 “다시 무정란 속으로 역류하여 들이차는/이 달짝지근한 액취”이다. 알이 세계로 환원된다면, 무정란은 시인의 세계이다.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에서 시인이 보여준 세계가 ‘나’의 증식이 반복되는 생성의 세계였다면, 무정란은 빼곡히 밀집된 난자들이 자기 복제를 이어가는 증폭의 공간으로 이해 가능하다. 이는 고슴도치가 “불붙은 가시”처럼 “사방팔방”(「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발산되는 동력이 무엇인지 암시한다. 즉, ‘나’의 부단한 증식으로 인해 내부의 공간이 포화상태에 이르러, “역류하여 들이차는/이 달짝지근한 액취”가 마침내 무정란 속을 가득 채우게 되면서 내부에 응축되어 있던 힘이 발산하게 되는 것이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와 땅을 밟듯이 한 세계로부터의 탈출이 다른 세계로의 진입을 이끌어낸다면, “역류하여 들이차는” 힘에 의한 무정란 내부의 진동은 시인의 시작(詩作)의 방향이 기존의 세계에서 또 다른 세계로 진입하리란 암시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자와 수정되지 못한 불완전한 난자의 세계에서 온전한 생산의 결과물-병아리가 나올 리 없다. 그렇다고 해서 무정란이 아무것도 생성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김민정의 무정란에서 나오는 것은 당위적인 가치체계 속에 포함되지 못한 결여들이 탄생한다. 결여된 존재의 자리는 언제나 변두리에 지정된다는 점에서 이들은 시인의 시에서 중심으로 귀속되지 못한 잉여의 형상, 즉 ‘똥’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3. 표류하는 똥


응축된 존재들의 발산이 시인이 지향하는 시세계의 향방과 연관된다면, 발산의 양상이 변모해가는 과정을 추적함으로써 시인이 도달해가는 시세계의 면모를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에서 인용한 「숨은 집 찾기 놀이」와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인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문학과지성사, 2009) 속에 수록된 「별의별」, 마지막으로 세 번째 시집인 『아름답고 쓸모없기를』(문학동네, 2016)의 「소서라 치자」까지 총 세 편의 시는 내부의 ‘나’-똥을 내보내는 시인의 태도가 시간차를 두고 점진적으로 변화해왔음을 면밀히 드러낸다.


1) 자다 똥독이 올라 죽었다는 내 묘비명을 읽고 벌써부터

내 손자란 놈이 저만치에서 달려오고 있다

―「숨은 집 찾기 놀이」 부분


2) 오줌을 누고 밑을 닦은 휴지에 빨간 고춧가루 한 점 하마터면 별인가, 콕 집을 만큼 반짝거렸습니다 변비에는 역시 비코그린보다 알알이 다시마 환이 최고라는 생각입니다

―「별의별」 부분


3) 내가 손으로 그랬듯 그들 또한

날달걀에 비빈 밥을 더는 비려 하지 않을 나이 마흔이면

모르긴 몰라도 똥 하나는 기차게 싸게 될 거야

―「소서라 치자」 부분


1)의 화자는 “똥독이 올라 죽었다는” 자신의 묘비명을 읽고 있다. 여기서 “똥독”이라는 사인(死因)은 내보내야 할 것을 내보내지 못해서 생긴 결과, 즉 분열과 복제를 이어나가던 ‘나’의 분신들이 끝내 밀폐된 공간 속에서 배출되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내 묘비명”을 화자 자신이 읽고 있다는 점에서 화자의 죽음은 실제로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머지않아 일어날 일에 대한 예견에 가깝다. 따라서 1)의 시가 드러내고 있는 것은 화자 자신이 똥을 누지 못하는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있다는 뜻이며, 방치가 빚어낼 끔찍한 결말을 예지한 시인이 그 결과를 회피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이 몸부림은 2)에서 “비코그린”과 “다시마 환”이란 치료책을 강구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다시마 환”의 덕택인지, “날달걀에 비빈 밥을 더는 비려 하지 않을 나이 마흔”에 이르러서인지 “똥 하나는 기차게” 싸는 걸로 보아 3)의 화자에게 배출의 과정은 더 이상 지난한 고행의 과정이 아니다.

질병-치료-극복으로 이어지는 병리학적 치료과정을 떠올리게 하는 세 편의 시를 통해서 우리는 시인이 내재된 존재를 발산하는 양상이 변화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내부의 공간이 포화상태에 이르기까지 인고의 시간을 거친 뒤 가까스로 터트리는 단속적인 발산의 모습에서 자연스럽고 주기적인 순환의 단계로 접어든 것이다. 발산의 빈도가 증가함과 더불어 “날달걀에 비빈 밥”이라는 외부의 실재를 체내화(incorporation)하고 결과물을 생산하는 데 소모되는 힘의 수치가 낮아졌다는 점에서, 시인의 세계가 거울 속과 무정란 속의 세계에서 외부의 세계로 성공적으로 진입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세계에 진입한 똥의 실체는 무엇인가? 포획의 가능성이 없는 추격과 탈출의 가능성이 없는 도주 끝에 가시를 세운 무정란 속에서 증식하던 ‘나’들이 그 밀도를 이기지 못하고 터져 나온 생성물이 아니던가. 따라서 성공적인 진입이 외부와의 합일, 혹은 외부와의 완전한 동화를 이루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똥은 자연의 측면에서는 분명 순환의 일원이지만 신체의 측면에서는 버려진 잉여의 총체에 불과하다. 또한 똥은 내부로부터 발화된 ‘나’들의 집적물이 외부로 배출된 것이라는 점에서, 생산의 결과물이자 동시에 ‘나’가 세계에 거주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이해된다. 그리하여 나-똥은 세계 내에 자리 잡게 됨으로써 환경 속에 포함된 환경의 일부로서 또 다른 일부를 담당하는 타자들과 관계맺음을 이어나가지만, 타자들 또한 시인과 마찬가지로 당위적 가치체계 속에 포함되지 못하고 버려진 결여되고 불완전한 존재들이다. 비규범과 비도덕에 속한 자들의 관계는 대체적으로 “순종하지 않는 년은 바로 죽인다”(「아내라는 이름의 아, 네」)라는 협박과 “뭘 째려 이 쌍년아, 너도 인하대 나가요지?”(「미혼과 마흔」)라는 욕설 섞인 비아냥을 발생시키지만, 그악스럽고 조야한 양자의 관계 속에서 시인은 “하마터면 별인가, 콕 집을 만큼 반짝거”리는 순간을 발견해내기도 한다.


천안역이었다

연착된 막차를 홀로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플랫폼 위에서 한 노숙자가 발톱을 깎고 있었다

해진 군용 점퍼 그 아래로는 팬티 바람이었다

가랑이 새로 굽슬 삐져나온 털이 더럽게도 까맸다

아가씨, 나 삼백 원만 너무 추워서 그래

육백 원짜리 네스카페를 뽑아 그 앞에 놓았다

이거 말고 자판기 커피 말이야 거 달달한 거

삼백 원짜리 밀크 커피를 뽑아 그 앞에 놓았다

서울행 열차가 10분 더 연착될 예정이라는 문구가

전광판 속에서 빠르게 흘러갔다 천안두리인력파출소

안내시스템 여성부 대표전화 041-566-1989

순간 다급하게 펜을 찾는 손이 있어

코트 주머니를 뒤적거리는데

게서 따뜻한 커피 캔이 만져졌다

기다리지 않아도 봄이 온다던 그 시였던가

여성부를 이성부로 읽던 밤이었다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전문


인용한 시에 등장하는 타자 역시 갈취라는 이름의 폭력을 행하는 부정적인 타자의 모습으로 보인다. 생을 이어나간다는 점에서 그는 자연의 순환구조 속에 가담한 인물이지만,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체계 속에서 누락된 “노숙자”라는 점에서 화자와 마찬가지로 똥에 다름 아닌 존재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코트 주머니를 뒤적거리는데/게서 따뜻한 커피 캔이 만져졌다”라는 화자의 말을 통해 기존의 부정적인 타자들과 차이를 가지게 된다. 돌려받은 “육백 원짜리 네스카페”는 불화의 시간 속에서 타자가 내민 화해의 손이며, 그 체온은 흡사 봄의 온도와 닮아 있다. 이 온기의 감지는 지상의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미천한 존재로 현현한 천상의 가장 높은 가치-별을 발견해낸 것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시인의 시를 통해 드러난 가치가 천상의 숭고함을 닮았다 해도, 그것이 현현한 장소가 하수구와 다를 바 없는 똥들의 세계임을 고려해본다면 그 현현은 영원불멸의 상태로 남을 수 없다. 다시 말해, “빨간 고춧가루 한 점”에서 별을 발견한다고 한들 발견의 순간은 찰나에 불과하며 고춧가루는 어디까지나 “오줌을 누고 밑을 닦은 휴지”에 귀속된 비천한 존재라는 의미이다.

시인은 이러한 찰나의 순간을 발견해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지 않는다. 이는 시인이 시세계를 통해 태양이 존재하는 천상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태양을 하수구 속에 끌어들이는 노력 또한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시인의 시는 인위적이지 않으며 또한 가식적이지 않다. 정리하자면, “육백 원짜리 네스카페”를 돌려받는 순간은 하수(下水)에서 상수(上水)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이탈의 가능성이 아니라 하수구 속에서 흘러다니는 똥들의 절절한 사연이자, 그 속을 표류해나갈 수 있는 추동의 힘인 것이다.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의 세계가 ‘나’의 허상이 갖가지 형상으로 변주되고 증식하는 만화경 속의 술래잡기였다면,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는 증식체들이 외부로 발산됨으로써, 외부의 존재들과 결탁해나가는 세계이다. 그러나 시인의 시세계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시인의 시는 하수를 표류하는 다른 똥들과의 관계 맺음을 넘어, 이제 하수구 속에서마저 이탈해버린 똥들에 대한 위무(慰撫)의 세계에 다다른다.


4. 진혼의 언어와 고통의 전달자


검은 침대보 위에

희고 마른 부스러기

그건 빵가루가 아니라고 노인이 말했다

소금은 역사 속에

설탕은 커피 크림 옆에

건선으로

반평생 몸을 긁던 노인이 말했다

(중략)

노인은 대접에 밥을 푼다

끓인 물을 붓는다

그후로

오래

그렇게

꽂혀 있던 숟가락 하나

―「놋」 부분


가장자리는 쉽게 떨어져 나간다. 중심에서 가장 먼 곳에 위치하며 내부에 결속되지 못했기 때문에, 가장자리는 외부의 자극에 기다렸다는 듯이 이탈의 행정(行程)을 걷는다. 닿아 있는 접점이 적었으므로, 그리고 차지했던 면적이 좁았으므로 가장자리의 공백은 빠르게 잊히며 쉽게 메워진다. 인용한 시에 등장하는 노인 역시 가장자리의 존재이다. 미식(美食)이 주는 즐거움을 아는 중심의 존재들과는 달리, 그에게 식(食)은 살기 위한 최소한의 몸부림으로 보인다. “소금은 역사 속에” “설탕은 커피 크림 옆에” 있으며 자신의 옆에 있는 건 “건선으로” “반평생 몸을 긁”어 생긴 “희고 마른” 각질뿐이다. 맨밥에 “끓인 물”을 붓는 게 식사의 전부지만, 노인은 그 식사마저도 끝마치지 못한 채, 황망히 생을 이탈해 버린 듯하다.

화자의 시선은 “그후로/오래/그렇게/꽂혀 있던 숟가락 하나”에 멈춰 있다. 살아있던 자가 죽음의 경계를 넘었으므로, 물을 만 밥은 더 이상 산 자의 양식이 아니라 죽은 자의 양식이 된다. 다시 말해 “꽂혀 있던 숟가락 하나”는 식사의 방식이 아니라 제의(祭儀)의 방식인 삽시정저(揷匙正箸)로 보는 게 마땅하다. 시인이 “숟가락 하나”에 시의 초점을 집요하게 맞추면서 식의 의미를 전복시키고 있다면, 시 전체의 의미를 축약하고 있는 시의 제목 또한 “숟가락 하나”와 연관 지어 볼 수 있다. 즉, 시에서 등장하는 “숟가락 하나”는 제의에 사용하는 ‘놋숟가락’. 제구(祭具)의 의미를 가진다. 정리하자면, 물을 만 밥은 노인이 준비하던 생에서의 마지막 음식이자 동시에 스스로 차린 단출한 제사상이며, 시인은 제삿밥에 꽂혀 있는 숟가락을 오래 조명함으로써 시에 제사의 현장을 담아내고 있다. 이는 이탈한 가장자리의 공백을 기억해내고 세상에 알리기 위한 시인의 노력이며, 떨어져 나간 가장자리에게 건네는 위로와 안타까움이다.

죽은 자를 위로하는 진혼(鎭魂)은 사실 사제(司祭)들의 오래된 책무 중 하나이다. 그들은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매개자로서 생과 사의 지점에 가교를 놓아 대면할 수 없는 두 세계의 접점을 구현해낸다. 그리하여 사제들은 이승에서 부르는 위로의 목소리를 저승에 위치한 망자들에게 전달한다.

『아름답고 쓸모없기를』의 시세계에 이르러 시인은 ‘지금-여기’에 부재한 자들을 조명하고, 또 호명한다. “영정사진 속”에 있어 “여태 안 돌아오는” “그녀”의 흔적을 찾아 나서듯(「밤에 뜨는 여인들」), 시인은 찬찬히 사제의 영역으로 나아간다.


편집자 황예인과의 채팅


―나 <대감놀이> 듣는다

―언니 대감 복장도 어쩐지 어울리심

―굿 듣고 싶어 미치겠다 밤새 틀어놔

―무당 기운이 흐르나봐요 옆집에서 안 무서워하게 살살 틀어놔요

―요령 흔들고 싶고 장구도 치고 싶고

―요령 어서 구할 수 있지? 뭔가 해소해보아요

―요령 사고 싶다 진짜

―뒤져보니 방울처럼 생긴 건 안 나오고 종처럼 생긴 것만 나오네요

―엥? 어디서 파냐 이러다 작두도 사겠어, 나

―쥐마켓과 11번가에서 요령 파는 세상

―나 이 구절 시로 써도 되냐

―언니와 나눈 대화…… 언니 다 가져요……

―「수단과 방법으로 배워갑니다」 부분


위 시는 시인이 편집자와 나눈 “채팅”의 기록을 옮긴 것이다. “―쥐마켓과 11번가에서 요령 파는 세상”이라는 구절에 주목해보자. ‘무당방울’이라고도 불리는 “요령”은 무당이 굿을 할 때 사용하는 무구(巫具)이다. 무당은 무교(巫敎)의 사제이며 그들 역시 신과 인간의 매개자 역할을 수임하는 존재들이다. 죽은 자의 영혼을 위무하기 위한 신물(神物)인 “요령”을 “사고 싶다 진짜”라고 말하며, 더불어 “<대감놀이> 듣는다” “굿 듣고 싶어 미치겠다” “장구도 치고 싶고” “이러다 작두도 사겠어, 나”라는 시인의 발언에서 우리는 그녀에게 무당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제에게 성역(聖域)에 발을 들이기 위해 통과해야 할 의례로서 서품식(敍品式)이 존재한다면, 무당에게도 마찬가지로 신령을 받아들이기 위한 의례인 ‘내림굿’이 존재한다. 그리고 내림굿을 받기 전에 무당 후보자들은 원인 없이 앓는 병인 신병(神病)을 겪어내야만 한다. 육체적인 고통과 환시(幻視), 환청(幻聽)을 수반하는 형극의 과정은 무당을 속인(俗人)과는 구분되는 성스러운 존재로 거듭나게 만든다. 저승으로 가 아버지의 약을 구해 와 무당의 조상이 된 바리공주의 이야기가 말해주듯이 지상의 존재에서 천상의 존재로 환골탈태(換骨奪胎)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난처한 과업을 수임하고 인내하며 마침내 해결해야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시인이 세 번째 시집에서 자신에게 샤먼의 기운이 들끓고 있음을 밝혔다면, 이전의 시집에서 무당-매개자로 거듭나기까지의 시인이 인내한 형극의 과정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무당이 겪어야 하는 고난이 신병이며, 그것이 환청과 환시, 악몽의 증상을 통해 드러남을 고려해본다면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의 시세계는 시인이 무당으로 거듭나기 위해 신병을 앓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포획의 가능성이 없는 추격과, 탈출의 가능성이 없는 도주 속에서 ‘나’에게 쫓고 쫓기는 술래잡기는 분명 놀이의 과정이 아니라 악몽을 꾸는 과정이다.

신병은 속인에게 고통을 부여하여 그의 속된 영혼을 정화하고 속세를 초월한 자로 거듭나게 만든다. 그러나 무당은 전능한 신이 아니라 인간, 즉 반성인적(半聖人的)인 존재이므로 하늘의 뜻을 지상에 전달하는 일뿐만 아니라 인간의 뜻을 하늘에 전달할 필요도 있다. 대체로 하늘의 뜻을 묻거나 자신의 뜻을 전달하려고 하는 자들은 현세의 고통과 어려움으로 인해 무당을 찾는 경우가 많다. 이 점이 바로 무당이 신병의 고통을 견뎌내야 하는 또 다른 이유이다. 무당은 고통에 내성(耐性)이 있어야 한다. 타자의 고통을 감수하기 위해서 그들은 고통을 들이마실 줄 알아야만 한다. 신병의 역할과 필요성에 관한 서술은 최준식의 『무교-권력에 밀린 한국인의 근본신앙』(모시는사람들, 2009)을 참고했다.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에서 드러난 시세계는 악몽 속에서 증식하던 시인의 자아가 외부로 분출되고, 그곳에 존재하던 타자들과 관계를 맺어가는 곳이었다. 이를테면, “이미 죽은 내가 엄마 아빠의 살을 조근조근 손톱깎이로 뜯어 홈을 판다”(「살수제비 끓이는 아이」)라고 말하던 시인이 “나 삼백 원만 너무 추워서 그래”라고 말하는 “노숙자”에게 “육백 원짜리 네스카페를 뽑아 그 앞에 놓”(「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을 수 있게 된 곳이다. 시인의 시세계가 “요령”을 들기까지의 과정이라면, 이러한 태도의 변모 양상은 신병을 겪고 고통을 체득한 시인이 마침내 타자의 고통을 이해하고 도울 수 있게 된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다.


4월 16일

네 생일인데 네가 없구나

그리움을 드리움이라 썼다가

유치해서 빡빡 지운다지만

네가 없구나 얘야,

네 생일인데 나만 있는 건 성가심이니 대략

아주 착한 나쁜 사람들이라 해두자

늙은 곡예사가 기괴하게 휘두르던 채찍에

매일같이 맞던 아기 코끼리가 너라고 해두자

어미 코끼리가 되어서도 잊지는 말자

지폐를 줍느라 등 구부린 곡예사의 척추를

보란 듯이 밟고 지나간대도 그건 너만의 재주니까

보무도 당당하게 당연한 일이라고 해두자

뼈가 내는 아작 소리를 아삭하게 묘사해야

고통에서 고통으로 고통이 전해질 수 있는 거니까

―「엊그제 곡우」 부분


시인-시의 관계가 무당-요령의 관계와 견주어지고 나아가 관계 양상이 시인-요령의 관계로 치환됨에 따라서, 시인의 시는 요령방울이 흔들리고 장구 소리가 낭자한 씻김굿의 현장이 된다.

2014년에 있었던 안타까운 참사를 조명한 「엊그제 곡우」는 ‘너’의 부재로 인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의 정서를 전달하고 있다. 『아름답고 쓸모없기를』의 발문을 쓴 이원의 말마따나 시인이 말하고 있는 곡우는 곡식이 윤택해지는 절기인 곡우(穀雨)가 아니라 곡소리를 내는 비, 곡우(哭雨)로 읽어진다. 이원 발문 「시집 김민정」, 김민정 『아름답고 쓸모없기를』(문학동네, 2016)

무당이 고통에 내성을 지닌 존재이며 단절된 두 세계의 가교로써 기능한다면, 요령방울을 든 시인 역시 무당의 특성과 책무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시인은 “고통에서 고통으로 고통이 전해질 수 있는 거니까”라고 말하며 산 자에게는 죽은 자의 아픔을, 죽은 자에게는 산 자의 슬픔을 전달하고 있다. 이러한 시인의 행동은 매개자로서의 무당의 역할에 다름 아니며, 시인은 아픔의 상호교류를 가능하게 만드는 ‘고통의 전달자’이다.

「엊그제 곡우」가 텍스트로 펼쳐진 진혼의 장이며, 시인이 무당의 역할을 자처하고 있더라도 시인이 양자에게 고통을 전달하는 방식은 기존의 무당과 구별된다. 시인은 “뼈가 내는 아작 소리를 아삭하게 묘사해야” 고통의 전달이 원활하다고 말한다. 이는 시인의 전달법이 아픔으로 인해서 내지르는 비명을, 과일이나 채소를 베어 물 때의 청량한 소리로 변주하는 방식임을 말해준다.


<동물의 왕국>을 보는 일요일 오후

톰슨가젤의 목덜미를 물고 늘어진 사자처럼

내 위에 올라탄 네가

어떤 여유도 없이 그만

한쪽 다리를 들어 방귀를 뀐다

(중략)

언젠가 자다 깼을 때

등에 배긴 그 물컹이

갓 낳은 새끼 강아지였다며

너는 이제 와 소용없는 일을

오늘의 근심처럼 말한다

쓸데없다

비는 요통처럼 절구 찧는데

―「엊그제 곡우」 부분


“일요일 오후”의 나른함과 “내 위에 올라탄 네가” “방귀”를 뀌어버리는 실수는 ‘아삭’소리가 날 만큼 안온하다. 그러나 ‘아삭’소리가 실은 ‘아작’소리의 묘사이므로 위 시에는 여지없이 고통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김민정은 호들갑 떨지 않는다. “갓 낳은 새끼 강아지”의 죽음에 대성통곡하지 않고 “이제 와 소용없는 일”이며 “쓸데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요통”처럼 은근한 아픔을 느낄 수 있다.

이는 시인이 대면하기도 힘든 고통의 총체를 여과 없이 드러내어 사람들을 심연 속으로 몰아넣기보다는 “형부는 세상 빨고 빠는 일 중에/좆 빠는 일이 가장 쉽고/브라자 빠는 일이 가장 어렵다 하셨어”(「엊그제 곡우」)라던가, “시고 나발이고 일단 양파나 좀 까라고”(「시를 재는 열두 시간」) 말하는 재치와 말장난을 통하여 고통 대신, 그 뒤꼍에 머물고 있는 씁쓸함을 상기시키는 방식을 채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마 이러한 방식이 “쥐마켓과 11번가에서 요령 파는 세상”(「수단과 방법으로 배워갑니다」)에서 시인이 선택한 매개의 방법론이 아닐까.

악몽 같은 술래잡기의 과정을 거치고 발산과 발견의 시간을 지나서, 진혼의 언어를 낳기까지 시인은 지난한 여정을 거쳐 왔다.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에서 시인이 보여준 세계는 속박되지 않은 언어를 자유롭게 접합하고 증식시킴으로써 시가 보여줄 수 있는 상상력의 극한을 드러내주었다. 그리고 두 번째 시집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에서 시인은 특유의 상상력과 고유의 직설적 화법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일상을 시로 발화시켰으며, 나아가 『아름답고 쓸모없기를』에 이르러 포장이나 미화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생생한 언어로 일상에서 이탈한 존재들이 위치하는 곳, 그러니까 우리의 이해가 닿지 못한 부분까지 어루만져내는 데 성공했다. 이처럼 시인의 시세계는 내부에서 외부로, 그 너머의 지점으로 끊임없이 확장된다. 그리고 도달한 세계를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은 언제나 쓸모없는 것에 머물러 있으며, 이는 불경의 언어로 우리들 앞에 현시된다. “쀼쭉쀼쭉한”(「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털을 세운 고슴도치 아가씨에서 “찌른다고 해서 죄다 무기가 되는 게 아니란 걸/이미 알아버린 마흔”(「시집 세계의 파편들」)에 이른 시인이 향해가는 또 다른 시의 세계를 기다려 본다.




  <당선소감>


   "의자 차지하는 승객처럼 남의 글 옆에 앉아있을것"


내가 쓰지 않은 글들이 좋았다. 이해되지 않는 문장들은 위험하지 않아서 오랫동안 테두리를 만지기가 편했다. 소설집보다는 시집을 많이 쌓아둔 이유도 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와는 무관한 언어를 가깝지 않게 붙잡아두고 싶었다. 시 평론을 쓸 바에 차라리 시를 쓰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글쎄’라고 답했지만 사실은 ‘겁이 많아서’라고 답하고 싶었다. 아무도 상처 줄 수 없으나 나만을 찌를 수 있는 칼을 만드는 것 같아 무서웠다. 뭔가를 써야겠다 싶은 날이면 내가 쓰지 않은 글들에 대해 썼다.

테두리를 만지다 생각지도 못하게 베이는 순간에는 날카로운 면을 반대로 돌렸다. 시로 인해서 나는 적당히 아프고 다른 사람들은 많이 아팠으면 좋겠다. 느낌표를 잘 쓰지 않는 이유는 자존심 때문이었다.

남의 글을 고치는 낮과 남의 글에 대해 쓰는 밤을 살고 있다. 의자를 오랫동안 차지하는 승객처럼, 나는 내가 말하지 않은 문장들 옆에 부디 계속 앉아 있고 싶다.

문학 옆에서 꾸준히 앉아 있을 방법을 가르쳐 주신 전동균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생각해보면 벽을 마주하는 느낌이 들 때마다 교수님을 찾아뵈었던 것 같다. 이제는 항상 좋은 소식으로 연락을 드리고 싶다. 윤지영 교수님께도 감사를 전한다. 교수님과의 두 시간 남짓한 대화가 없었더라면 이렇게까지 평론을 사랑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평론가의 자세를 가르쳐주신 하상일 교수님, 나의 가능성을 발견해 준 문화일보와 심사위원분, 긴 시간 붙잡았던 김민정 시인께도 감사를 전한다. 언제나 나를 믿어주는 엄마와 언제나 나를 의심하는 동생에게도 고맙다고 전하며, 마지막으로 남의 축하를 싣고 나른다고 당신의 축하는 미뤄두시는 아빠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 1994년 부산 출생
  ● 동의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 현재 출판사 근무


 

  <심사평>


  시인의 언어와 이미지, 다시쓰기 하듯 자신의 문장으로 옮겨와


좋은 평론은 텍스트의 선택에서 시작된다. 다룰 만한, 혹은 다뤄야만 하는 작품을 선별할 줄 아는 시야, 그것이 평론가의 기본이다. 그다음은 문장력이다. 평론에도 구성이 있고 스타일이 있기 때문이다. 두 기준에 부합한다 싶은 글들을 골라놓고 보니, 열 편이 남았다. 재독했다. 결국 세 편을 두고 오래 망설였다.

‘외계인들의 기억방식-김초엽 소설세계의 존재론’ ‘소설의 존재론, 독자의 플레이-이상우론’ ‘착란의 시간, 착상의 언어-김민정 시세계의 변모 과정’이 그 글들이다.

김초엽론은 신선했다. ‘장소 없음’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김초엽의 과학소설(SF)들을 요모조모 분석한 전반부, 그리고 후반부는 한국 문학장 내에서 김초엽이 자리하는 장소에 대한 이야기다. 흥미로운 문제제기와 아이디어가 많았다. 그러나 구성이 매끄럽지 못해 전·후반부가 단절적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었다. 문체에 대한 고민도 더 필요해 보였다.

이상우론은 깔끔했다. 되블린의 ‘영화적 글쓰기’로부터 논의를 시작해서, 얼핏 그와 유사해 보이는 이상우의 소설이 어떻게 그런 식의 글쓰기를 교란하고 넘어서는지를 분석한다. 분석은 형태론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치밀하다. 오래 눈이 가는 평론이었으나 끝내 이 글을 선택하지 못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일관된 논지 탓이었다. ‘독자가 플레이하는 소설’이라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이 글은 전혀 한눈팔지 않는다. 그러나 과하게 일관된 전개가 글쓴이의 시야를 제한한다.

반면 김민정론은 풍성했다. 평론은 이론적 재단을 가급적 줄이고, 작품과의 접면을 최대한 늘릴 때 풍성해진다. 김민정의 중요한 시어와 이미지들을 마치 다시 쓰기 하듯 자신의 문장들 속으로 옮겨 오는 솜씨에서 대상에 대한 글쓴이의 애정이 느껴졌다. 김민정의 전체 시세계를 비평적으로 서사화해내는 통시적 안목도 탁월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이 글이 한국 문학장의 최근 흐름과 어떻게 연동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런 아쉬움은 단 한 편의 글만을 세상에 내놓은 신인에게는 과한 것이리라. 당선자에게 축하의 말을 전한다.

심사위원 : 김형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