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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나주에 대하여 / 김화진

 

나는 너를 안다. 사실은 네가 이 회사에 지원한 두 달 전보다 훨씬 전부터.

네가 입사하기 전부터 입사할 때까지 빠짐없이 너를 알고 있다.

그러니까 네가 SNS를 그만두지 않는 한 나는 너를 추적한다. 그것은

너무나 쉽고, 하나도 어렵지 않고, 그러니까 일도 아니다. 그건 내 삶이다.


손으로 광대뼈를 가린 너의 사진과 손만 가린 내 사진을 번갈아 보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참 다르네. 다른 사람이네.

너는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내가 사랑하는 동시에 미워하는 사람은 둘이다. 나 자신, 그리고 규희.

규희는 죽고 없으므로 이젠 나 하나뿐. 너는 나 같았다.


너를 처음 봤을 때 들었던 생각은 어리다, 였다. 어리구나. 한눈에 봐도 알 만큼 어리다. 매끄러운 볼과 초조한 눈에서, 붉은 손끝에서 알 수 있었다. 아직 빛이 죽지 않은 가방과 닳지 않은 로퍼에서 알아봤던 것 같기도 하다. 코트 역시 낡은 데 없이 깨끗했다. 정돈하는 습관, 깔끔한 성격. 이어 생각했다. 나와는 다르구나. 옷을 함부로 던져 놓고 신발을 험하게 신는 나와는, 너는 다르다.

너는 나와 파티션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는다. 네가 두드리는 키보드 소리, 작게 내쉬는 한숨 소리, 손끝으로 톡톡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는다. 가끔 기지개를 켜는 너의 꼭 쥔 손끝이 보이기도 한다. 나는 네가 놀랄 걸 알아서, 언제나 자리에서 너무 벌떡 일어서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너는 두 달쯤 전에 그 자리로 왔다. 프린터에 토너를 채워 넣는 일, 사무실의 비품을 주문하는 일, 냉장고를 청소하는 일이 너의 몫이 되었다. 줄기차게 오는 문의 전화는 나누어 받는다. 네 덕에 나는 끝없이 제안 메일을 쓰고 끝없이 제안 메일을 받는 일에 조금 더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여전히 내 담당인 일은 사이즈별로 박스와 봉투를 주문하는 일, 서고에서 출고 받은 책들을 사무실로 가지고 올라오는 일, 커피머신의 원두와 물을 채우는 일이다. 너는 아슬아슬하게 이 회사에서 가장 어리다. 네가 오기 전까지는 내가 가장 어렸다.

싹싹하고 겸손한 너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너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이를테면 홍보팀의 K는. 걔 재미없어. 착한 척하는 건지 착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뻔한 소리만 하고 같이 얘기하면 재미가 없어.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런 논평도 귀찮다는 듯. K의 말에 내가 뭐라고 했을까. 좋은 사람 같던데. 잘할 거 같던데. 그렇게 우물거렸을 것이다.

너에 대한 K와 나의 평가는 상반되었지만 완벽히 다른 말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너는 착하다. 늘 오래 생각하고 살피려는 태도가 배어 있다. 함부로 말을 하지 않고 대답하기 전엔 항상 활짝 웃는다. 무례하고 기분 나쁜 문의 전화도 최선을 다해 상냥하게 받는다. K는 그런 너의 모습을 두고 1년도 안 돼서 긴장 풀릴 거야, 어떻게 평생 저렇게 받아? 하고 퉁명스럽게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아닐 것이다. 1년이 지나도, 2년이 지나도 너는 상냥할 것 같다. 아주 가끔 울거나 짜증을 내겠지만 그것마저 전화를 끊은 후에 내색할 것이다. 그러나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서도 네가 이곳에 계속 다니고 있을까? 이 작고 구질구질한 곳에. 너는 아마 6개월 만에 이 회사에서 네 능력만큼 대우받고 있지 못하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나는 너의 모든 행동이 부드럽고 나긋하다고 느끼지만 그 안까지 부드럽지만은 않다고 여긴다. 의외로 뾰족한 구석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바깥을 향하는 게 아니라 너의 안쪽을 향한다. 너는 외모에 콤플렉스가 있다. 거래처 강 부장은 새로 들어온 네가 인사를 하자 “시집 좋은 데로 가게 생겼네”라고 말했다. 강 부장은 자신이 그런 말을 하면 듣는 아가씨가 아니에요랄지 감사합니다랄지 인사를 하며 수줍게 웃는 훈훈한 광경을 연출하고 싶었을 테지만 너는 그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다. 대신 입술을 한 번 오므린 뒤 천천히 말했다. “그런 건 외모 지적이 아닐까요.” 하고 조용히. 너는 그 말을 끝내고 다시 입을 오므린다. 외모 지적이 아니라 성희롱, 이라고 말하려다가 내뱉는 찰나에 바꾼 것 같다. 나는 네가 솟아오른 광대뼈와 낮은 코에 콤플렉스가 있다는 걸 안다. 너는 고민하거나 생각에 잠길 때면 너도 모르게 두 손바닥으로 뺨을 가리는 척하면서 광대뼈를 누른다. 완벽히 가리고 싶다는 듯 지그시, 오래.

네가 생각보다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쓴다고 느끼게 된 것은 내가 너를 일주일에 다섯 번이나 보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다섯 번을 봐야만 하는 사이는 생각보다 시시콜콜한 걸 (싫어도) 알게 되는 사이다. 처음 2주 동안에는 눈치채지 못했다. 처음에 나는 네가 집착하듯 관리하지 않아도 원래부터 세련되게 빛나는 사람이라고 느꼈는데, 일련의 종종거림을 파악하게 된 건 3주째부터다. 너는 생각보다 너의 외모에 닿을 타인의 시선에 민감하다. 나는 내가 원하지 않아도 네가 아침마다 공들여 눈썹을 그리고 광대뼈 옆에 음영을 넣는 걸 알게 된다. 그렇게 한 화장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시간을 덜 들여 좀 부족하다고 느낄 때 네가 끊임없이 바지 주머니에서 조그마한 손거울을 꺼내 얼굴을 비춰 보는 걸 알게 된다. 그러나, 그날 너의 화장이 잘되었건 잘되지 않았건 너는 세련됐다. 나는 눈썹 정리든 기초화장이든 아이라인이든 립스틱이든 완벽하게 해내는 날이 별로 없으며, 자주 부스스한 꼴로 회사에 오는 나를 네가 가끔 부러워하는 동시에 가끔 이해하지 못하는 눈으로 본다는 걸 알고 있다.

너의 머리 모양은 가장 긴 머리카락이 턱 끝까지 오고, 뒤통수로 갈수록 짧아지는 쇼트커트다. 어쩐지 결연하게 자른 것 같지만, 동그랗게 컬을 넣은 뒤통수 쪽 때문인지 그 모양은 의외로 너를 좀 더 유해 보이게 만든다. 언젠가 내가 머리 잘 어울려요, 라고 말을 건네자 너는 어릴 때는 머리 자르면 큰일 나는 줄 알았어요, 맨날 자를까 말까 고민하고, 치렁치렁 기르고만 있고, 하며 웃었다. 그 말에 나는 자를 때가 지난 앞머리를 대충 쓸어 넘기며 생각했다.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구나. 저렇게 짧게 머리를 자르는 일이 네 인생에서 여전히 큰일이구나. 너는 덧붙인다. 페미니스트가 되려면 멀었죠.

나는 네가 양치질을 하며 다른 한 손으로 종종 콧대를 높이려는 듯 코를 쥐고 있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다. 내가 컵을 들고 화장실에 들어서자 너는 화들짝 놀라서 가장 먼저, 코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입안 가득 치약 거품 탓에 소리는 내지 못하지만 네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선배, 안녕하세요.

매일매일 점심을 함께 먹으며 너와는 거의 이야기할 일이 없었다. 질문은 주로 다른 사람이 했다. 편집부장님이나 관리부장님 같은 분들이. 어디에 사느냐, 출퇴근은 힘들지 않으냐, 전 직장은 어땠냐, 거기에 근무하는 누구를 아느냐. 질문이 슬슬 떨어지기 시작했을 때, 그러니까 출근한 지 2주가 지나자 너는 일주일에 며칠은 점심에 운동을 한다고 했다. 무척이나 송구한 표정으로 점심을 따로 먹게 되어 죄송하다고, 수영을 시작했다고. 그게 놀라워 계속 감탄하고 있는 나에게 너는 몇 번이고 아니에요, 아니에요, 했다. 그 덕분에 너와 함께 점심을 먹는 날이 일주일에 두 번 정도로 줄었다.


*

나는 너를 안다. 사실은 네가 이 회사에 지원한 두 달 전보다 훨씬 전부터. 네가 입사하기 전부터 입사할 때까지 빠짐없이 너를 알고 있다. 그러니까 네가 SNS를 그만두지 않는 한 나는 너를 추적한다. 그것은 너무나 쉽고, 하나도 어렵지 않고, 그러니까 일도 아니다. 그건 내 삶이다. 어느 순간 삶이 되었고, 여전히 삶으로 자리 잡고 있다.

너는 내 애인의 전 여자 친구다. 너의 이름은 예나주. 대기업 마케팅부에 근무하다가 두 달 전 인문서적 출판사 영업부로 이직했다. 트위터 아이디는 @yeah_naa로 인스타그램 아이디와 같다. 페이스북 이름은 Najoo-yeah, 블로그 주소는 /nobodybut13. 내가 아는 너의 채널은 여기까지였다.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입사 후 너의 채널 목록에 유튜브가 추가되었다. 유튜브 주소는 외울 필요가 없다. 너의 모든 나머지 채널 소개 글에 링크로 달려 있다. 클릭만 하면, 네가 운영하는 동영상 채널로 이동할 수 있다. 내 애인과 너는 3년 전 헤어졌다. 나는 애인과 3년 전에 만났다. 내 애인은 나와 만나기 위해 너와 헤어졌을 것이다.

입사지원서에서 너의 이름을 발견한 순간 나는 너를 알아보았다. 너는 최종 명단 두 명 중 한 명이었고 네가 뽑힐 확률이 제법 높았고 나는 그걸 슬쩍 옹호하기까지 했다. 무슨 마음이었는지 모른 채로. 나는 너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생각했다. 영향을 미치고, 영향을 받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왜인지에 대해. 먼 곳에 있는 너를 당겨 이곳에 놓고 살피고 싶었다. 그 욕망은 더 잔잔히 끈질겨져서 결국엔 너의 마음에 들고 싶었다. 너를 좋아하고 싶었다. 그 마음이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너를 좋아하고 싶다는 강렬한 마음이 진짜인지 가까인지 알 수 없었다. 위선인지 위악인지 가릴 수 없었다. 다만 이것은 이상한가? 라고 물었다. 아닐 거라고, 똑같은 상황에 데려다 놓으면 나와 똑같은 욕망에 사로잡히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나는 네가 다시 규희 같은 남자를 찾아내 연애를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너의 블로그에 종종 ‘애인에게 받은 꽃’, ‘생일이라 비싸고 좋은 식사. 고마워.’ 따위의 구절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알고 있으면서도 묻는다. 너와 너의 애인이 궁금하다. 너의 현재가, 현재의 사랑이, 현재의 사랑의 고민거리가 궁금하다.

나주 씬 애인 있나요? 이런 거 물으면 실례인가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남자 친구 있어요.

오래 만났어요?

아니요, 한 1년 정도……. 선배는요?

저도 있어요. 남자 친구.

와, 어떤 분이실지 궁금해요.

걘……. 재미없어요. 섹스도 안 좋아하고. 애인이 벗어도 하고 싶어 하지도 않고. 그런 액션이 없으니까 진짜 심심하더라고요.

선배 너무 재밌어요. 저는 그렇게 말 못하는데.

너는 정말 재밌는지 입을 크게 만들고서 웃는다. 그리고 덧붙인다.

음, 이런 말 주제넘을 수도 있긴 한데 남자 친구분 이해가 갈 것 같기도 해요. 사실 저도 별로 해야 할 필요를 못 느끼거든요.

안다. 나는 너를 너무 많이 안다. 규희와 너는 그런 사람들이지. 너희들은 신앙이 깊은 연인이었고 성애나 성욕은 학문적 관심사에 불과할 뿐이었다. 섹스는 필수 요소가 아니었다. 손을 맞잡거나 가볍게, 장난스럽게, 진하게, 신중하게, 무드 있게 입을 맞추면 됐다. 너희 사이에 스킨십은 그거면 완벽했다. 너와 규희는 모두 ‘끝까지 간다’는 표현을 혐오했다. 성기 결합이 섹스의 전부인 줄 아는 덜떨어진 애들이나 그런 말을 쓴다고 생각했다. 그런 상스럽고 거친 말로 생각하진 않았겠지만 내 식대로 표현하자면 그건 그런 생각이다.

진지하고 신중한 태도. 너의 모습에서 가장 자주 느끼는 그 태도는 규희가 추구하는 태도였다. 너는 규희가 추구하는 여자였다. 그런데 규희는 왜 나에게로 왔나. 나는 규희와 만나는 내내 그게 궁금하고 불쾌했다. 신선했겠지. 아니면 내 어떤 면을 높이 살 만하다고 평가했거나. 그거면 됐다고 판단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때는. 우리는 자주 착각을 하고 사람을 잘못 보니까. 연인이 된 이후에 규희의 성욕 없음 때문에 나는 종종 무안해졌다. 입을 맞추고 혀를 밀어 넣는 나에게 규희는 단호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키스만 해. 키스까지만 해.”

나도 나랑 하기 싫다는 놈이랑은 안 하고 싶어, 라고 쏘아붙였지만 달리 다른 남자도 없었으며 다른 남자가 필요한 일도 아니었다. 나는 규희가 좋았고, 성기를 내 안으로 넣는 게 좋았고, 사람과 하지 못한다면 기구가 있지 않냐고 묻는다면 플라스틱이나 고무는 싫었고, 그랬을 뿐이다. 나는 사랑하는 남자랑 하는 게, 규희랑 하는 게 좋았을 뿐이다. 그래서 규희가 섹스를 되게 잘했냐 하면 그건 정말 아니고……. ‘발기된 성기를 질 안으로 집어넣는 섹스를’, ‘규희랑’ 하고 싶었다고. 그뿐이다. 이외에는 설명이 안 된다. 나는 자주 의아했다. 그 단순한 설명이 왜 규희한테는 납득이 되지 않았을까. 규희는 왜 나를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면서 성기 결합 섹스에 미쳐 있는 이해 못할 애’라고 생각했을까.

물론 이 표현도 규희 필터를 거치지 않은 나의 표현일 뿐이다. 규희가 알면 펄쩍 뛸지 모른다. 아니라고, 절대 그렇게 생각한 적 없다고, 자신을 그렇게 몰아가지 말라며, 그저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을 뿐이라고 반박하며. 하지만 그런 건 소용이 없다. 규희의 말투와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약간, 이해가 안 돼.” 조심스러운 말투. 그러나 규희는 내내 착각하고 있었다. 말투가 조심스럽다고 파괴력을 지니지 않은 건 아니다. 너만큼 모든 걸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이 하필 자신의 애인을 향해 “조금, 이해가 안 돼”라고 말한다는 건……. 그리고 내가 그 말뜻을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건, 나에 대한 기만이다. 너를 사랑하고 너를 관찰해 온 나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기만.


*

나는 네가 운영하는 모든 채널을 안다. 네가 분리해서 보이는 전시욕과 표출욕을 모두, 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 부분 알고 있다. 나는 아마도 너의 가장 열렬한 추종자다. 너는 모든 SNS를 그 포맷에 맞게 사용할 줄 안다. 인스타그램에는 긴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 한두 문장 정도를 남긴다. 사진은 주 2회 정도 올라오는데 평일에는 거의 올라오지 않고 주로 주말 이틀 동안 보거나 읽거나 먹거나 갔던 것에 대한 사진이 올라오는 편이다. 인스타그램에서 너의 자아는 산뜻하고 질척이지 않는다. 담백하면서도 진지하다. 특히 좋아하는 책이나 작가에 대한 글을 적을 때면 그 한두 문장뿐인 짧은 글도 얼마나 고심하고 고쳤는지 알 수 있다.

페이스북에서 너는 좀 더 사적이다. 오프라인에서 알고 있는 사람을 기반으로 한 매체라는 생각에서인지 개인적인 행사나 사소한 단상 같은 것도 자주 남기는 편이다. 접속하는 횟수는 주 0회에서 3회 정도. 그러니까 일주일 내내 아예 사용하지 않는 주도 있고, 하루에 짧은 글을 두 개 내지는 세 개 연달아 올리는 주도 있는 것이다. 그중 몇 개는 인스타그램과 연동이 되어 있어 이미 인스타그램에서 본 것일 때가 많다.

너의 페이스북에서는 너의 대학 졸업식, 친구들과 만나서 봤던 영화나 연극에 대한 다소 긴 리뷰, 인터넷 서점 이벤트에 응모하기 위해 공유한 홍보물, 창경궁이나 경복궁으로 나들이 가서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이 있다. 그러나 그 게시물들 역시 1년 반 전에 게시된 것들이다. 어떤 날짜를 기점으로 인스타그램에는 올라온 사진이 페이스북에는 없다. 너는 아마도 1년 반 전 페이스북에서 완전히 인스타그램으로 넘어온 것 같다.

그리고 블로그. 나는 규희의 블로그를 통해 너의 블로그를 찾아냈다. 너는 블로그를 이제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두 달에 한 번, 석 달에 한 번 불쑥 글이 올라오는 식이다. 그마저도 시간이 지난 후에는 삭제했거나 비공개로 돌린 탓에 사라져 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 회사로 이직이 결정된 후, 출근을 기다리는 동안 너의 블로그에는 이런 글이 올라왔다. ‘쫓기는 꿈을 꾼다. 건물에 갇혀 쫓기는데 건물은 내가 아는 건물인 것 같고 나를 쫓는 게 누구인지는 모른다.’

블로그는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보다 연결되어 있는 친구들의 수가 현저히 적고, 너는 딱 그만큼 더 솔직하다. 너의 블로그에는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에는 없는 게 있다. 그건 바로 짧은 다짐들이다. 머릿속에 떠오른 다짐들을 잊지 않기 위해 너는 블로그를 메모장 삼아 쓰는 듯하다. 너의 다짐은 대체로 이런 것들이다. 겸손할 것. 상대를 존중할 것. 실패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 너는 겸손하고 상대를 존중하지만 세운 계획이 어그러지거나 실패하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블로그를 모두 보다가 보다가 보다 보면, 어김없이 규희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나는 매번 똑같은 짓을 반복한다. 더 이상 업데이트가 되지 않더라도 규희의 흔적이 나타나는 곳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규희가 단 댓글, 규희가 나온 사진, 규희가 태그된 게시물을 만나고 나서야 너의 채널에서 빠져나온다. 두근거리는 심장과 열에 달아오른 두 뺨을 하고서. 너의 모든 채널을 보기 시작한 것은 네가 입사하기 한참 전부터였다.

개인 SNS보다 본격적으로 운영하는 너의 채널들도 있었다. 유튜브와 팟캐스트였다. 유튜브에서는 네가 다녀온 짧은 여행을, 주말에 갔던 커피 맛이 유난히 좋았던 카페와 커피잔이나 티스푼처럼 작고 쓸모없고 예쁜 것들을 파는 잡화점을 소개했다. 여행지에서는 꼭 그곳에만 있는 동네서점이나 독립서점에 들러 포스터와 엽서를 산다고 했다. 너는 여행에서 돌아오면 그곳에서 산 엽서나 포스터를 네 방 벽 한쪽에 붙이는 것으로 여행 영상을 마무리하곤 했다. 유튜브 동영상 덕분에 나는 너의 부엌과 한쪽 벽면도 알게 되었다. 간단하게 저녁이나 간식을 만들어 먹는 모습도 종종 나왔기 때문이다. 너는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직장에 다니면서도 가죽 공예나 요가나 수영을 배우러 다니는 사람. 잊지 않고 화분의 물을 갈고 잎을 닦는 사람. 베개와 이불의 커버를 바꾸는 사람. 자신의 일상을 카테고리별로 잘라서 기록해 두는 방법에 능숙한 사람. 네가 사는 공간도 잘 분리된 너의 SNS 채널들처럼 잘 정리되어 있었다. 늘 쓸고 닦고 포스터를 바꾸어 붙이는 모습에서 알 수 있었다.

팟캐스트에서는 고전문학을 소개했다. 거기에서 너의 닉네임은 ‘마케터 N’이었다. 혼자서 진행하는 것은 아니고 서너 명의 진행자가 돌아가며 주제를 정하고 그 주제에 맞는 고전문학을 소개하는 팟캐스트였다. 어느 팟캐스트가 포화 상태가 아니겠냐마는 책을 소개하는 팟캐스트도 포화 상태가 된 지 몇 년째였다. 너와 네 팟캐스트 동료들은 딱히 욕심이 없어 보였다. 그래도 꾸준히 200명 정도는 그 방송을 듣고 있었다. 게시한 지 오래될수록 유입이 떨어지는 걸 감안했을 때, 유명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검색에 한 번쯤은 걸렸을 것 같은 방송이었다. N의 목소리는 늘 오프닝에는 조금 떨렸지만 5분 정도가 흐르면 자연스러워졌다. 시옷 발음이 약간 샜고(그 공기 소리가 좋았다), 니은과 리을을 또박또박 구분 지어 발음하려다가 오히려 부자연스러워지는 부분이 간간이 있었다. 대본을 미리 작성했을 텐데도 퇴고할 때 너에게는 거슬리지 않았는지 “했구요”로 끝나는 문장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는 편이었다. 너의 리스트는 이랬다. ‘댈러웨이 부인’, ‘삶의 한가운데’, ‘모래의 여자’,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나는 네가 뒤라스의 ‘연인’은 리스트에 넣고 나보코프의 ‘롤리타’는 넣지 않아서 너를 좋아했다. 나는 너의 취향을 대부분 신뢰했다. 종종 너무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만으로 일상을 구성하고 편집하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스스로의 약한 면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고 상처받는 일에 익숙해지지 않는 스스로를 전시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지만 네가 가진 다른 부분에서 느낀 호감이 그 작은 부분들을 모조리 상쇄시켰다.

나는 네가 왜 좋았을까. 그저 규희의 전 애인이라서? 규희가 너를 자기가 만났던 어떤 사람보다 완벽한 파트너라고 평했기 때문에? 그런 말을 남기고 규희가 죽어 버려서? 규희는 죽고, 규희를 공유했던 너만 남아 있어서?

규희를 훨씬 자주 떠올리는 건 규희가 죽은 이후부터다. 규희가 살아 있을 때보다 훨씬 더, 폭발적이고 끈기 있게 규희에 대한 힌트를 찾았다. 규희가 살아 있는 동안의 흔적을 찾고 찾다가 나는 너를 발견했다. 그리고 너를 생각했다. 네 채널들에 접속해 너의 일상을 보고, 규희의 흔적을 찾고, 빠져나온다. 그것은 나의 삶이었다.

나는 너에게 비추어 나를 생각했다. 네가 자주 올리는 사진들과 내가 올리는 사진들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남이 찍어주는 너는 대부분 어떻게 나오고 남이 찍어줄 때의 나는 대부분 어떤 모습인지. 너는 도드라지는 광대뼈가 콤플렉스였고 그래서 사진 찍힐 때면 두 손으로 뺨을 가리곤 했는데, 그런 너의 사진을 볼 때면 나는 광대뼈 같은 건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오로지 너의 손만을 보았다. 그런 식으로 너의 콤플렉스를 아는 만큼 나의 콤플렉스도 알았다.

나의 콤플렉스는 손. 누군가가 찍어 준 사진들 속에서 나는 언제나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웃을 때도, 이야기할 때도, 먼 곳을 쳐다보고 있을 때도. 심지어 한 손으로 책장을 넘길 때도 다른 한 손은 꼭 주먹을 쥐고 있었지. 엄지손가락 때문이었다. 그게 콤플렉스였다. 나는 주먹을 쥘 때 엄지손가락을 집어넣고 나머지 네 손가락으로 그걸 말아 쥐는 습관이 있었다. 날 때부터 뭉툭하고 못생긴 손인 데다 어릴 때 왼손 엄지손가락을 칼에 깊게 베인 적이 있다. 손톱과 손끝이 갈라졌다가 다시 붙는 바람에 그 부위가 울퉁불퉁하게 부어오른 채로 남아 버렸다. 그 흉터까지 포함하여, 내내 손이 콤플렉스였다. 콤플렉스는 무섭다. 습관처럼 몸에 붙고 입은 옷처럼 표가 나니까. 사진에 드러난 내 모습에서도 나는 보이지 않는 엄지손가락만 보고 있었다.

손으로 광대뼈를 가린 너의 사진과 손만 가린 내 사진을 번갈아 보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참 다르네. 다른 사람이네. 너의 가느다랗고 예쁜 손을 보며 얼굴이 달아오르고, 너의 도드라지는 광대뼈를 보며 다시 차분히 열이 내리는 일을 반복했다. 너는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내가 사랑하는 동시에 미워하는 사람은 둘이다. 나 자신, 그리고 규희. 규희는 죽고 없으므로 이젠 나 하나뿐. 너는 나 같았다.


*

너에 대해 아는 부분이 있는 만큼 모르는 것이 있다. 네 SNS에 없는 내용을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네가 어째서 대기업 마케팅부를 그만두고 이 작은 인문서적 출판사의 영업부에 들어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모른다. 우리는 둘뿐인 영업부였다. 20년 차 부장님이 그만두었는데 회사는 적어도 팀장급을 뽑는 게 아니라 다른 업계 마케팅 경력만 있는 중고 신입인 너를 뽑았다. 다행인 건 네가 운전을 할 줄 안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는 회사 차에 나란히 앉아 서점 영업을 돌았다. 멀미가 심한 나를 위해 너는 언제나 사탕을 준비해 두었다. 나는 너에 대해 몰랐던 사실 가운데 상당 부분을 너와 함께 차를 타고 다니며 알게 되었다. 너의 SNS를 아무리 읽고 읽어도 모를 일들이 바로 옆자리에서, 너의 목소리로 들려왔다. 싹싹하지만 조심성 많고 상냥하지만 거리를 두는 너에게 특별한 대답을 듣지는 못할 거라고 예상하며 했던 질문이었다.

그런데 나주 씨, 대기업이 많이 힘들었나요? 여기보다 훨씬 좋았을 텐데.

음, 하고 너는 눈을 크게 한 번 굴렸다. 차는 신호에 걸려 있었다. 의도하지 않은 침묵과 유예의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나는 딱히 대답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는 태도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흐리고 흐린 날이었다. 미세먼지가 심하네. 눈이랑 코랑……. 다 아프겠네. 괜히 차창을 건드리며 생각했다.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는데.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너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다. 나는 누군가를 곤란하게 하는 사람이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 사람 좀 사람을 곤란하게 하더라, 하는 평은 듣고 싶지 않았다. 특히 너처럼 예의를 지키는 일이 각별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한참 만에 차가 움직이고, 너는 입을 열었다. 정면을 주시하는 너의 얼굴에 그래 이 사람이라면 괜찮아, 말해도 괜찮아, 말하고 싶어, 하는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듯해서 두려웠다. 듣게 될 말들보다 나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리고 말을 꺼내기로 한 너의 결심이.

안 좋은 일을 겪었어요. 배운 대로 싸우며 견디고 싶었는데 마음이 많이 무너졌어요.

너는 일하던 팀에서 스토킹에 시달렸다고 했다. 상사는 거절할 수 없는 식사 약속을 제안하고 함께하는 프로젝트를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질질 끌었다. 퇴근하고도 끊임없는 문자와 전화에 너는 지칠 대로 지쳐버렸다. 회사 인사관리팀에 정식으로 고발하고 문제 해결을 하고 싶었으나 성공한 전례가 없었다. 그리고 너는 싸울 힘도 없었다. 동기의 8할은 남자였고 몇 안 되는 여자 동기들도 너의 말을 전부 못 들은 척했다. 네가 인기 있다는 것을 자랑하려고 그런 말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너는 회사를 그만두고 6개월을 쉬었다. 6개월, 그 시간 동안 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때 만났어요. 지금 남자 친구요. 제가 동호회처럼 여러 명이랑 작게 팟캐스트를 한 적이 있는데, 거기서 만난 사람이거든요. 무기력한 저를 방 밖으로 끌어내 줬어요. 그거 보면 참 인연은 타이밍인 게……. 다른 때였으면 그런 사람 정말 무례하다고 생각했을 거거든요. 함부로 다른 사람의 공간에 침범하는 사람요.

그랬구나.

나는 조용히 대답한다. 네가 그런 고백을, 힘들었을 이야기를 용기 내어 하는 와중에도 나는 너에게 깃든 규희를 본다. 둘의 닮은 점을 찾는다. 무례하다, 함부로, 다른 사람의 공간에, 침범. 그런 말을 할 때 너는 너무나 규희 같다. 자기 공간을 소중히 하는 사람들. 오롯한 혼자를 내버려둬야 하고 스스로가 세운 원칙을 존중받아야 해서 섣불리 노크하거나 노크조차 않고 불쑥 가까워지려는 사람들을 경계하는 사람들. 스스로를 내향적이라고 소개하며 절대 먼저 뭔가를 제안하지 않는 사람들. 같이 저녁 먹을래요? 시간 되면 볼래요? 하는 말을 주로 듣는 쪽인 사람들.

나는 생애 전반에 걸쳐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원망했다. 내가 가지지 못한 성향을 가진, 내향 인간들을 매번 좋아하면서도 서운했다. 나는 매번 제안하는 쪽이었기 때문에. 내향적이라며, 사람을 천천히 알아가고 조심스럽게 가까워지고 싶다는 사람들의 팔을 붙들고 같이 시간을 보내자고 흔드는 쪽은 백이면 백 나였다. 그런 나도 좀 병적인가. 어느 모임에서나 그런 유의 사람들을 좋아해 서촌으로 커피 마시러 갈래요? 광화문으로 생선구이 먹으러 갈래요? 하고 물으면 그들은 언제나 사려 깊은 표정으로 아, 네, 좋아요, 언제든 단이 씨 편하신 시간에……. 라고 대답해 왔다. 거절이 아닌 것만으로 마음이 놓였지만 한편으로는 늘 속이 꼬였다. 너희들은 좋겠다. 우아하게 컨펌할 수 있어서 좋겠어. 누군가가 물어보면 음……. 하고 고민하고 마침내 네, 라고 대답할 수 있어서 좋겠다. 나도 그런 역할 좀 맡아 보고 싶네.

규희도 그랬다. 나는 규희가 그래서 좋았고 그래서 슬펐다. 조심스럽고 조용한 성정. 나로서는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그런 성격으로 사는 일은 어떤 걸까 늘 상상하곤 했다. 규희는 나와 다툴 때, 그러니까 전적으로 나만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거나 인신공격을 할 때면 여러 말을 하지 않았다.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로 넘어오지 마, 하고 말할 뿐이었다. 나는 규희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상처받았다. 너는 너만 그렇게 현명하고, 그래서 남이 들어오고 들어오지 말아야 할 선을 분명히도 알고 있고, 그걸 나만 모른다고 생각하지. 나만 너에게 더 가까이 가고 싶고, 네가 아무리 가까이 와도 전혀 상관이 없고, 오히려 더 깊이 너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사이란 건 그 선을 조정해가며 우리 둘이 만들어가는 걸 텐데 너는 이미 선이 있고 항상 단호하고 나는 선이 있었던 적이 없으니까. 늘 한쪽만 맡는 일이란 전혀 유쾌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선배 제 남자 친구랑 좀 비슷한 면이 있는 거 같아요.

무례하다는 면이?

농담이었는데, 네가 나를 선배라고 부르고 있는 관계라는 걸 잊은 농담이었다. 너의 얼굴은 미안함과 아차 싶음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아니요, 아니요, 절대 아니에요.

운전대만 안 잡았다면 두 손 모아 싹싹 빌 것 같은 기세에 나는 당황해서 너에게 사과했다.

미안, 미안, 농담이었어요. 내 농담이 심한 거야, 진짜로, 나주 씨 잘못이 아니라.

진짜 죄송해요. 그런 사람이 무례하다고 생각했다는 말…… 그렇게 생각했던 건 정말 옛날이에요. 지나면서 생각도 변했고, 선배를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정말이에요.

알아요. 내가 미안해요. 안 맞는 농담을 했어. 이상한 쇼맨십이 있어 가지고. 웃겨야 될 것 같아서요.

너는 그제야 웃는다. 안도했는지 한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는 액션을 취한다.

선배를 멋있다고 생각한 게 그런 점이었어요. 단숨에 다가와 주는 면요. 그거 제가 진짜 못하는 일들이거든요.

너는 네 환영회 날 이야기를 했다. 작은 회사여서 회식도 자주 하지 않지만 아주 오랜만에 신입사원이 들어온 날이라 모처럼 전체 회식이 있던 날이었다. 삼겹살과 목살을 굽는 동안 30분은 어색하다가 겨우 서로 대화를 나누겠지, 하고 지레 포기하고 있던 참이었다. 소주를 섞은 맥주를 몇 잔 마시자 앞에 앉은 사람에게 말을 걸고 농담이 술술 나온 것은 나의 오랜 주사나 습관 같은 거였다.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습관. 앞에 앉은 사람의 웃는 얼굴을 보아야 마음이 놓이는 안달 같은 것.

저 어색하지 말라고 분위기 풀어주셨잖아요. 진짜 감사했어요. 선배가 저희 쪽 테이블에서 얘기하니까 다른 테이블에서도 얘기가 돌고, 다들 웃고. 선배가 주인공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니까요.

나는 머쓱하다는 표정을 지어내며 너의 말을 듣는다. 기분은 좋았지만 한편으론 무슨 소린가 싶기도 하다. 나도 너처럼 우아하게 가만히 있어도 괜찮고 싶거든. 괜히 아무도 부추기지 않았는데 혼자 침묵에 불안해져 까불지 않고. 나도 누가 웃겨 주면 웃고만 있고 싶다고. 내향 인간을 마주하고 속이 꼬인 사람처럼 또 그렇게 혼자 속으로 툴툴거렸다.

그렇게 떠들어놓고 3일 내내 후회해요. 말이 또 많았구나, 쓸데없이 나댔구나, 내가 미쳤지, 하고요.

에이, 말도 안 돼요.

그렇게 말하다가 너는 고개를 흔들며 방금 한 말을 정정한다.

알 것 같아요, 그 기분. 저도 그래요. 맨날 후회해요. 말해 놓고.

나는 나를 이해한다는 표정이 떠오른 너의 옆얼굴을 본다. 고개를 끄덕이며 마주 웃었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약간 빈정거리는 중이다. 너희들이 그러는 건 잘 알아. 한마디 해 놓고 안 해도 될 걱정까지 하는 부류라는 거. 너, 규희, 그리고 너희가 ‘우리랑 비슷한 사람들’, ‘나랑 맞는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말이야. 그런데 너희 말고 내가 그런다고. 나도 그런 후회를 한다고. 너희는 나를 거의 사교 왕으로 생각하잖아. 그런 술자리나 모임 같은 일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너 없었음 어쩔 뻔했니! 하고 내 뒤로 숨잖아. 함께 있는 사람들이 웃어야만 마음이 편해서 매번 큰 소리로 떠들지만 그것도 힘들다고. 나도 모르게 너와 규희 부류와 나의 부류를 나누어 생각하곤 했다. 혼자 반발심을 활활 태우고 또다시 혼자 꺼트리고, 그러길 반복했다.

지나간 너의 목소리를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한다. 제가 진짜 못하는 일이거든요. 못하는 일. 그러니까 그걸 할 수 있는 사람과, 진짜 못하는 사람이 있다. 그 차이는 뭘까. 너와 규희와, 그리고 나의 차이는 도대체 뭔가. 왜 규희와 너는 진짜 못하는 일을, 나는 종종, 자주, 제법 즐기며 하고 마는 걸까. 나는 규희가 사라지고 나서야, 여기에 없고 나서야 규희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한다. 너를 이루는 조각과 내 조각들을 맞춰 보고 비교한다. 화가 나서 던지기도 하고 소중하게 어루만지기도 하면서 기이한 모양의 성을 쌓는다. 그게 규희가 떠난 뒤 내가 유일하게 몰두하는 일이다.

미팅에서 만난 서점 담당자는 나에게 작게 알은척을 하고 내 옆의 너를 찬찬히 본다. 미팅이 끝날 무렵 테이블을 정리하며 그는 나란히 앉은 우리를 보고 두 분 느낌이 비슷하네요, 한다. 그 말이 칭찬처럼 들린 것은 나뿐이었을까.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너의 표정을 확인할 수 없었다. 정말 그랬을까 봐. 네가 뜨악한 표정을 짓고 있을까 봐.

회의실을 나오고 나서야 너를 본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다. 나는 근처에서 잠깐 커피를 마시고 들어가자고 제안한다. 네가 약간 망설이기에, 커피가 싫으면 따뜻한 차도 마실 수 있고 무엇보다 거기 찻잔이 진짜 예쁘다고 농담처럼 덧붙인다. 나는 네가 카페인에 약해서 하루에 여러 번 커피를 마시는 게 곤란하다는 걸, 그래서 카페인이 적은 홍차나 잎차를 선호하고 이미 몇 년 전 유행이 지나 버린 노리다케 홍차 잔을 아직도 혼자서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안다. 네가 좋다고 말하기를 기다리며 나는 데이트를 신청한 사람의 심정이 된다.

예상대로 카페에 들어간 너는 허브티를 주문하고, 허브티마저 티팟에 담겨 홍차 잔과 함께 정갈히 나오는 것에 감탄한다.

선배, 감사해요.

네가 웃으며 말한다. 음? 뭐가? 모르는 척 커피잔을 내려놓는 내게 너는 쑥스럽다는 듯 덧붙인다.

너무 잘해 주셔서 뭐랄까……. 보상받는 느낌이에요. 정말 힘들었는데. 여기 와서 마음도 많이 편안해졌고. 하는 일도 좋고요. 열심히 할게요.

블로그식 말하기구나. 나는 너의 화두를 들으며 그런 것을 감별한다. 너는 점심시간에 네댓 명이 모였을 때 나누는 스몰토크로는 인스타그램식 말하기, 외근 나가는 길에 두셋이서 대화를 나눌 땐 트위터식 말하기, 그리고 예외적으로, 아주 가끔 생기는 이런 둘의 시간에는 블로그식 말하기를 한다. 나는 그 말에 보답하듯 짧은 시간이지만 내 눈에 비친 너의 모습에 대해 말한다. 진지하고 열정이 있는 좋은 사람처럼 보인다고, 그러나 때론 안 해도 될 생각과 고민에 몰두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얘기하자 너는 곧바로 진지한 표정이 된다. 타인의 평가를 기억해 뒀다가 몇 번이고 곱씹으려는 듯한 태도에 나는 대화의 방향을 튼다. 보다 사적이고 쓸모없는 이야기로. 내가 겪었던 학교생활과 회사 생활에 대해 길게 털어놓자 너는 점차 편안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더 이상 머리 모양이 단정하게 잘 있는지, 화장이 망가지지 않았는지, 광대뼈가 도드라져 보이는지, 이 선배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경계 없이 너도, 자신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전 회사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난 갈등 이외에도 너는 요 근래에 네가 겪고 생각했던, 눈에 보이지 않고 일상적으로 스스로를 옥죄고 있는 듯한 부담과 심리적 억압에 대해서 털어놓는다.

나주 씨 장녀예요?

너는 고개를 젓는다.

대부분 그렇게들 많이 말하는데, 아니에요. 둘째 딸이고 막내예요. 너의 얼굴에 떠오른 익숙하다는 표정을 조금 오래 바라본다. 나는 네가 장녀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묻는다. 그런 물음이 익숙한 사람에게는 그냥 그렇게 묻는다. 그런 오해에 대해 설명하고 싶고 자신이 지닌 그런 분위기를 조금은 자랑스러워한다는 것을 안다. 그런 건 왠지 SNS를 보지 않아도 알 것만 같다. 막내인 사람에게 장녀인 줄 알았어, 하는 말이 좋게든 나쁘게든 그 사람의 어떤 점을 건드리는지. 그 점에 대해서 얼마나 말하고 싶어 하는지도. 나는 노력하지 않아도 네가 말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대화 주제를 꺼내게 된다. 왜 이렇게까지, 자꾸 네 마음에 들고 싶을까. 너를 안다고 자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이 유치한 마음은 뭘까.

너는 너에게 감정적으로 의존하는 엄마와 분리되는 일이 너무나 어렵다고 말한다. 먼저 그렇게 마음먹기까지 수없이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는 일이, 그리고 가까스로 독립을 목표로 착실히 독립 자금을 모으겠다고 결심했지만 작년 그 일 때문에 다시 독립에 대한 열망이 사그라진 일에 대해.

그런 무서운 생각도 들어요. 결국 결혼해야 떠날 수 있나 하는.

결혼. 나는 그 단어에 붙들린다. 너는 그러니까, 나아가고 있다. 자신의 과거를 집착하듯 살피지만 어쩔 수 없이, 또다시 착실하게 미래로. 너는 과거에 머무르는 사람이 아니다. 오지 않은 미래를 대비하는 사람. 그런 너의 건강함에 훼방을 놓고 싶었는지 나는 결국 그 날짜를 묻는다. 전혀 의도할 수 없이 뀌어지는 방귀나 나름대로 착실히 의도했지만 어설프게 매설된 덫, 그중 어느 쪽일지 모를 질문을 한다.

나주 씨, 작년 2월 1일에 뭐했어요?

글쎄요……. 기억이 잘 안 나요. 왜요? 무슨 날이에요?

아니요, 그냥. 곧이니까.

참, 그러고 보니 페이스북에는 그런 게 꼬박꼬박 뜨죠. 그거 가끔 보면 재밌더라고요.

식은 커피를 입에 머금고 나는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고, 커피잔을 내려놓는다. 내 몸짓을 신호로 우리의 티타임은 끝난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오늘도 하지 못한 채.

나는 내내, 줄곧,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내가 아는 너의 이야기 말고, 네가 좋아하는 대화 주제 말고, 너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게 내 솔직한 마음이다. 너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따로 있다.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이야기. 너에게만 할 수 있는 이야기. 나주 씨. 나주 씨 그거 알아요? 그거…… 있잖아, 규희가 죽었어. 널 떠난 남자 말이야. 널 떠나 나에게로 온 남자. 본가로 가던 길이었어. 너는 그날 뭐했니? 왜 버스 사고가 났는지는 모르지. 사고는 늘 나고, 규희는 그저 거기에 있었을 뿐이겠지. 그렇게 신을 믿었고, 그래서 언제나 죽는 걸 무서워하던 애였는데 진짜로 죽으니 좀 말도 안 되는 것 같더라. 규희가 살아온 모든 게 복선 같고, 이상했어.

우린 달라. 규희는 나와의 관계가 익숙해질 무렵 입버릇처럼 말했어. 다르지만 좋아. 내 얼굴에 언짢아하는 기색이 엿보이면 나를 달래듯이 그렇게 덧붙였지. 그런데 있잖아. 다른 걸 좋아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일까. 언제까지일까. 규희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나는 둘인데도 혼자 같았고, ‘나랑 진짜 비슷했던 애’로 등장하는 너를 생각했어. 곧이었어. 규희가 죽은 날이. 나는 완벽하게 혼자가 됐어.

규희는 11개월 전에 죽었다.


*

작년 2월의 첫째 주 일요일, 나는 춘천에 있었다. 규희는 젊은 사람답지 않게 납골당이 아니라 공동묘지에 묻혔다. 규희 어머니가 그걸 원했기 때문이다. 규희의 무덤은 규희 부모님이 자신들이 죽으면 사용하기 위해 미리 사 놓았던 춘천의 공동묘지에 있었다. 춘천은 규희 부모님의 고향이었다. 나는 규희 부모님의 흰색 혼다를 타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올랐다. 겨울의 공기는 차고 맑았다. 서울은 여전히 미세먼지가 자욱해 시계가 엉망이고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는데, 춘천의 하늘은 깨끗하게 파랗고 높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비염이 심해 미세먼지가 심하던 날마다 고생하던 규희의 얼굴이 떠오르고. 뒤이어 공기가 너무 나빠 눈도 코도 목도 너무 아프다 단이야, 하고 두꺼운 알의 안경을 살짝 들고 눈과 눈 사이, 콧대를 꾹꾹 누르던 모습이 떠오른다. 없는 너는 여전히 있을 때만큼 생생해서, 이 기억은 언제까지 살아 있을까, 차가운 두 손을 주무르며 그렇게 생각했던 것을 기억한다.

아담하다고 하기엔 좀 이상하지만 그렇다고 크다고는 말할 수 없는 무덤에 규희는 묻혔다. 떼를 잘 입힌 봉분 아래 규희가. 무덤 옆 매끄러운 비석의 앞면에는 ‘경주 이씨 규희’라고, 뒷면에는 ‘1988~2018’이라고 새긴 글자가 보였다. 나는 저 글자들을 잊을 수 없겠지, 하지만 정말로 잊을 수 없을까, 정말로? 언제까지? 라고 혼자서 꼬리를 물고 시비를 걸었던 것을 기억한다.

규희 부모님이 무덤 앞 작은 단에 과일과 술을 차리는 동안 나는 비석 옆, 꽃을 꽂도록 만들어진 깊은 대리석 관에 서울에서부터 안고 온 꽃을 꽂았다. 대체로 공동묘지의 무덤 옆에 꽂는 꽃들은 조화였다. 무덤은 사람이 자주 다녀가는 장소가 아니니까. 그런데 꽃은 자주 시드니까. 꽃이 시드는 즉시 다른 꽃으로 교체하기에 꽃은 너무 비싸니까. 묘지 입구에서 다양한 색과 종을 흉내 낸 조화 다발을 팔았다. 나는 거기까지 생화를 안고 갔다. 서울에서 춘천역까지만 두 시간이 넘게 걸리고, 춘천역에서 다시 규희 부모님을 만나 차를 타고 30분은 더 들어와야 하는 곳까지. 춘천행 기차에 오르기 전 나는 꽃시장에 들러 목화와 거베라, 리시안셔스를 다발로 샀다. 두 시간은 시들지 않겠죠? 나는 그렇게 물었다. 두 시간 후에 꽃다발을 건네면 규희가 바로 받아 물을 채운 화병에 꽂을 것처럼. 그렇게 꽃이 며칠은 살아 있을 것처럼. 괜찮아. 규희는 목화 리스를 좋아했다.

나는 규희의 부모님이 차린 상에 슬그머니 붕어빵 봉지를 얹어 놓는다. 소화를 죽어도 못 시키는 주제에 규희는 밀가루를 좋아했다. 붕어빵은 머리부터지, 이거지, 약간 덜 익은 밀가루맛,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겨울에 붕어빵 트럭을 찾아 거리를 느릿느릿 걸으며 시간을 죽이는 규희에게 나는 몇 번이고 춥다고, 그거 좀 나중에 먹으라고 통박을 줬었다. 절대 고집부리지 않는 성격의 규희는 내가 그렇게 말하기 전에, 내 표정에 스치는 기색만으로 내가 지쳤다는 걸 알고는 금세 붕어빵 욕심을 접곤 했다. 멋쩍게 웃으며 내 팔에 팔짱을 끼고 “춥지, 얼른 가자.” 했다. 나는 그게 좋으면서도 싫었다. 너는 왜, 내가 화도 못 내게, 아니 왜 맨날 나만 화내게. 너는 왜 우기질 않아. 왜 우기질 않아서 나도 너에게 우길 수 없게 만들어. 그땐 진지했고 진심이었지만. 이제 와 생각하면 그게 도대체 뭐가 중요했나 싶다.

규희 부모님과 나는 두 번 절했다. 규희야, 하고 불러도 이을 말이 없었다. 규희 어머니는 꽁꽁 언 손으로 무덤을 쓰다듬었다. 이미 깔끔하게 정돈된 무덤에서 괜히 잡풀을 뽑기도 했다. 나는 그 시간 동안 어쩐지 숨을 조금 참고 있었던 것 같다. 편하게 숨을 쉬는 일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규희가 죽었다는 사실은 믿기지가 않지만 저 솟아오른 흙 속에, 흰 뼈가 된 규희가 있고 규희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는다는 사실은 왠지 선명해서. 그렇지, 규희야, 너는 지금 숨을 쉴 수 없지. 나만 쉴 수 있어서 미안해, 그런 마음으로 조금만 내쉬어도 겨울 허공에 하얗게 티가 나는 숨을 간신히, 조금씩 참아보았다. 참 멍청하지. 안다.


*

주말이 지나 1월의 마지막 주, 그 끝엔 규희의 기일이 붙어 있다. 올해의 2월 1일은 금요일. 이주에 너는 나와 점심 먹는 날 벌써 몇 차례 점심을 건너뛰었다. 함께 영업을 나설 때, 이동하는 차 안에서 긴긴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도 몇 번씩이나 입술을 달싹이다가 만다. 나에게 묻고 싶은 말이나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게 틀림없는데, 네 입술은 여전히 꾹 닫혀 있다.

아마도 네가 나를 알아버린 것 같다. 역시 날짜가 힌트였을까. 내 물음 때문에 오랜만에 페이스북에 접속했던 걸까. 그래서 규희의 죽음을 뒤늦게 보았을까. 너는 1년 반 넘게 전혀 페이스북을 하고 있지 않고 규희의 죽음은 오로지 페이스북을 통해서만 알려졌다. 규희의 친구는 많지 않았다.

주말에 나는 춘천에 가지 않는다. 너와 마주칠 것 같아 두려웠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는 걸 안다. 너는 규희의 묘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날이 곧 올까, 네가 아는 날이. 어떻게 올까. 우연히 들이닥칠까. 잘 모르지만 할 수 있는 한 미루고 싶었다. 규희의 부모님에게서도 연락은 없다. 규희의 부모님은 그런 분들이었다. 규희 같은 분들. 애인을 잃은 앞길 창창한 아가씨에게 규희 기일에 춘천에 갈 건데 혹시 갈 거라면 태워 주겠다는 말로 부담을 지우고 싶어 하지 않는 분들.

주말부터 수요일까지는 설 연휴다. 5일을 쉬는 긴 연휴에 나는 전에 없이 목, 금까지 붙여 연차를 냈다. 주말 동안 낑낑대다 내린 결론은 너를 피하는 일이다.

2월의 셋째 주 월요일, 연휴가 끝나고 다시 출근하는 날, 너는 자리에 없다. 네가 누구보다 일찍 출근하는 것은 이제 사무실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 관리부장님께 너의 출근을 물어봐도 어깨를 으쓱할 뿐이다. 그럴 사람 아닌 것 같은데, 늦잠 잤나보지. 대수롭지 않게 몇 마디 거든다. 반차를 쓴 걸까, 하고 기다려 보지만 오후가 지나도 너는 오지 않는다. 퇴근 시간까지 너는 나타나지 않는다.

나는 문자를 여러 번 썼다가 지운다. 너에게 받았던 회사 명함에 너의 번호가 있다. 새 명함을 한 통 받고 찡한 표정이 되어 편집부장에게 왜 이래, 대기업 아이디카드 쓰던 사람이! 하고 놀림을 받았던 네가 떠오른다. 나는 너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것 같다. 너의 일상을 훔쳐볼 때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속이 메슥거린다. 이 정도의 메슥거림. 너와 실제로 마주하게 되면 들 거라고 상상했던 불편감이다. 나는 너에게 이런 식으로 내 존재를 알리고 싶었던 걸까. 고통을 주고 싶었던 걸까. 그런 거라면 나 자신이 너무 저열해서 견딜 수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없었다고는…… 못하겠지. 그러나 그 모든 과정에서 나는 정말로, 네가 좋았다. 이상하지. 이런 마음을 고백하면 너는 단호하게 굳은 얼굴로 내 앞에서 고개를 저을 것만 같다. 나쁜 것보다 이상한 게 더 나쁘다고 할 것 같다. 그건 어쩐지 네 목소리인 것 같기도 하고 규희 목소리인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고민하다가, 고민하던 모든 문자를 너에게 보내 버린다.

―나주 씨, 저 김단이에요.

―운전 중이에요?

―어디 아파요? 괜찮아요?

―내일은 출근할 거죠?

―우리 얘기 좀 해요.

―미안해요.

―강원도 춘천시 동산면 군자리 산133 추모공원 7단지 매장묘인데……. 찾기 힘들어요. 나중에……. 나중에 나랑 가요.

답장은 오지 않는다. 맞은편의 네가 사라지자 나는 수차례 들락거렸던, 한동안은 들어가지 않았던 너의 SNS에 또다시 들어간다. 차례대로. 늘 돌던 대로. 트위터,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블로그, 유튜브. 올라온 새 게시물은 없다. 어디에도 네가 없지만 나는 너를 생각한다. 조용히 생각하고 조용히 걸어 다니는 너를. 평일 저녁엔 일기를 쓰고 주말엔 종종 성당에 가고 혼자 영화를 보는 너를. 보름이나 한 달에 한 번 SNS에 텅 빈 공터나 반짝이는 강물이나 오래된 가방 귀퉁이 사진을 올리는 너를. 너는 거기에 있다. 나는 이곳에 있고. 우리의 거리는 여전히 이만큼 떨어져 있다. 그 거리만큼 너를 생각한다. 숨을 조금 참아 본다.




  <당선소감>


   "좋아하는 것 곁에 있는 일, 바라는 건 언제나 그것뿐"


문학 출판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도 취직한 즈음입니다. 각오나 목표가 있는 복잡한 마음은 아니었고 다만 내가 만든 이야기로 A4용지 10장 정도를 채우면 다른 어떤 생각도 들지 않고 순전히 기뻤습니다. 문학을 좋아한 지 5년 만에 입사하고 또 그로부터 5년 만에 당선된 것이, 출판사 합격 전화를 받았을 때와 신문사 당선 전화를 받았을 때가 비슷하게 기쁜 것이 재밌고 좋습니다.

문학 편집자라는 직업이 좋습니다. 이렇게까지 열심히 읽고 생각해야 하는 직업이라니. 그렇게까지 해야 하고 그렇게만 하면 된다니. 소설을 쓰는 일도 이 직업 덕분에 가능했다고 믿습니다. 좋은 소설을 만나면 너무 좋아서 누군가에게 이야기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니까요. 좋아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힘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이상하게 소설에는 싫고 슬프고 나쁘고 아픈 이야기도 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소설을 읽어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소식을 들은 날 재택근무라 내내 혼자였는데 사랑하는 고양이 홍시가 옆을 지켜주었습니다. 건강해야 해. 엄마 아빠, 당근과 채찍을 보내 준 동생 병규에게 사랑을 전합니다. 같은 팀 동료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입니다. 효인, 혜진 선배. 문학과 편집과 회사와 웃음을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영 씨, 함께 오래 일했으면 좋겠어요. 기현 씨, 기현 씨가 없었다면 하지 못했을 일이 정말 많아요. 그리고 제가 비밀을 털어놓았던 친구들. 유정 씨, 친구이자 동료가 되어요, 했던 말을 이렇게도 다시 할 수 있어 좋습니다. 호석 씨, 보라 씨. 우는 소리는 두 분 앞에서만 한 것 같습니다. 해진 선생님, 졸업 전 선생님 수업을 청강하지 않았다면 문학을 덜 사랑했을지도 모르겠어요. 선우 현경, 내 즐거움은 전부 너희 덕분이야. 성실하고 따뜻한 재현. 사랑한다.

문학을 읽고 쓰고 만드는 동료들에게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우리는 멋진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좋아하는 것의 곁에 있는 일. 바라는 건 언제나 그것이었습니다. 여기에 있을 수 있어서 기쁩니다.


  ● 1992년 경기 안양 출생
  ● 숙명여대 국문과 졸업
  ● 현재 출판사 편집자로 근무 중


 

  <심사평>


  한 사람에 대한 세밀한 묘사·정서적 변화 담아낸 문장… 정확하고 날카로워


예심을 통과해 본심에서 집중적으로 거론된 작품은 ‘수지’와 ‘나뭇잎 사이로’, 그리고 ‘없는 의자’와 ‘나주에 대하여’였다. 먼저 ‘수지’. 이 작품의 주인공을 한동안 잊을 순 없을 것 같다. 그만큼 매력적으로 다가왔다는 뜻이다. 어느 땐 에너지가 폭발했고, 어느 땐 혼란스러웠으며, 또 때때로 안쓰러웠다. 말 그대로 인물 그 자체로 ‘러너스 하이’인 상태. 아쉬웠던 건 ‘나’에 대해서 말하느라 다른 등장 인물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로 인해서 하고 싶은 말 또한 자기 안에만 머무른 듯한 인상을 주었다.

‘나뭇잎 사이로’는 가장 유니크한 소설이었다. 기타를 치는 아파트 경비원에 대한 이야기. 거기에 갑을의 문제나 철거를 둘러싼 갈등 등 사회적 의제가 마치 실제 ‘나뭇잎 사이로’ 악보 코드처럼 군데군데 잔잔하지만 격렬하게 나타났다. 문장도 미학적으로 나무랄 데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소설 중반부터 등장한 ‘꼬끄’의 존재였다. 그와 주인공 ‘김’의 관계가 작위적으로 느껴졌고, 그로 인해 ‘김’이 무언가 깨닫는다는 설정 역시 무리라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플롯에 대해서 다시 진지하게 고민해본다면 더 좋은 작품으로 곧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없는 의자’에 대해선, 먼저 이 작품 때문에 본심 시간이 예정보다 훨씬 더 길어졌다는 점을 밝히고 싶다. 뜨거운 지지가 있었고, 설득이 있었고, 마지막엔 미련이 남았다. 그만큼 완성도의 측면이나 메시지의 차원에선 흠결이 없었다. 영해와 성해, 그리고 죽은 진해의 캐릭터도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사람들처럼 생생했다. 하지만 의자가 가진 상징성이 너무 직접적이지 않으냐는 의견이 있었다. 중간 부분 등장하는 ‘우주 쓰레기’에 대한 삽화도 단점으로 지적됐다. 그 지적들이 이 작품이 지닌 미덕을 이길 만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선택에는 작은 영향을 발휘하고 말았다. 그러니, ‘없는 의자’의 작가는 미덕만 생각하고 가길 바란다. 지적에 지지 말고 미덕을 더 키우길 바란다. 그렇게 우리의 미련을 괜한 것으로 만들어주길 기다리겠다.

올해의 당선작은 ‘나주에 대하여’이다. 죽은 애인의 전 여자 친구인 ‘예나주’와 같은 회사에 근무하게 된 ‘김단’의 이야기. 이 예외적인 상황을 예외적이지 않게 만든 것은 이 작가의 문장 덕분일 것이다. 한 사람을 세밀하게 묘사해내고 그에 따른 정서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따라간 문장들은 정확하고 또 때론 날카로웠다. 그 구체적인 문장들이 말하는바 우린 너무 많이 ‘안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 누군가를 알 수 있는 방식은 늘어났지만 그로 인해 실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정작 나의 민낯뿐이라는 것. 그러니까 이 소설은 ‘나주에 대하여’가 아니고 실상 ‘김단에 대하여’가 맞다. 그 점을 작가가 밀도 높은 구성으로 끝까지 밀고 나갔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여기 함께 응모한 사람들의 몫까지 오래오래 지치지 말고 써주길 바란다.

심사위원 : 구효서, 조경란, 이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