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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 ㅅ 외 4편 / 서종현



1

그러나 카인의 혀에 적힌 낱말들 왜 제가 아벨의 카인은 무너지는 아벨의 등을 받치며 스스로의 무너짐을 방해한다 카인의 세례는 아벨을 위한 것 낱말에게서 시작과 끝이라는 임무를 받은 낱말이 계획한 기하학 첫장부터 노예의 낙인을 준비한 오랜 책은 카인의 이마를 인두로 지진다 그것은 짐 진 자를 위해 짐 지는 자의 낙인 짐 진 자는 자신의 짐을 낙인의 낱말 위로 내려놓는다 그러므로 언젠가 짐 진 자는 짐 지지 않은 자의 후예 언젠가 짐 진 자의 짐은 낙인의 후예 그 이마 위에 놓여 지상의 십자가가 된다 수많은 카인들이 짊어진 십자가 카인의 혀가 오직 아벨을 위해 왜 제가 아벨의 카인이 되는지 묻는다 카인은 카인을 위해 무너져도 되는 것 아벨은 아벨을 위해 무너짐을 지키는 것 그러나 카인의 혀에 적힌 낱말들 왜 제가 아벨의 카인의 선이 무너질 때 아벨의 선이 무너지는 것은 낱말이 정한 낱말의 율법 이미 카인은 카인의 이름을 이마에 새겼으므로, 벗어나지 못한다 카인이라는 이름의 낙인―ㅅ이라는 이름의 낙인


2

ㅅ은 ㅅ이 되기 위한 ㅅ의 꿈이다

평행하지 않은 두 개의 선은 결코

마주칠 수 없는 멀어짐의 선

얼굴과 얼굴을 맞닿을 수 없는

선의 간격이다

비스듬히 기운 선들은 척력의 영역에서

인력의 꿈을 꾼다

언젠가 하나의 점에서 만나는

ㅅ의 꿈

다가간 만큼 멀어지는 꿈


3

낱말을 굴리는 자는 ㅅ의 정상을 향해 오른다 지상의 낱말들이 뭉친 낱말덩어리는 점점 불어나 지상은 낱말의 두께를 잃는다 말할 수 없는 말할 수 없음이 도처에서 도처를 잃는다 낱말을 굴리는 자의 한 걸음 한 걸음은 더 이상 말해지지 않는다 단지 낱말의 움직임 어느 것도 고정될 수 없는 ㅅ의 정상에서 낱말은 끊임없이 지상을 되찾아가는 스스로의 낱말이다 또다시 지상으로 굴러떨어져 지상의 두께를 더하는, 낱말은 말할 수 있는 말할 수 있음을 도처에 흩뿌린다 낱말의 입에서 흘러나온 낱말은 낱말을 굴리는 자의 한 걸음 한 걸음을 처음으로 말할 수 있는 곳으로 되돌린다 낱말을 굴리는 자는 ㅅ의 정상을 향해 오른다 자신의 생명으로 길을 만들며 낱말이, 완만한 자살의 끝에서 고정될 수 있도록


낱말을 굴렸던 모든 자들이 묻혀있는 ㅅ의 정상까지



■ 파울의 형식 외 4편 / 하시안


파울의 형식


당신은 오늘 내게 세번째 파울을 선언했다

배경으로 깔리던 정오의 희망곡 안에서 나는 폭삭 주저앉고

9회 말 투아웃, 투스트라이크에 내몰린 타자처럼

당신이 만든 소문까지 받아쳐야 한다


당신이 매번 던진 돌직구에 방망이조차 들지 못한 내가

홈을 밟을 것인지, 장외까지 날아갈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볼넷까지 허용하고 싶지 않은데

타인들은 온갖 변화구로 병살로 유도한다


은퇴경기처럼 집중하다가

현관문으로 튕겨나간 자존심

심판처럼 빗줄기가 쏟아진다

젖은 눈속으로 빨려드는 강속구들

가슴속 스트라이크존에 정확히 꽂힌다


이별에 대한 방어율은 낮아지고

선언을 향한 타율은 높아진다

그래도 교체할 감정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기에

연장전 같은 표정으로 지루한 일인칭이 되어간다


지금까지 내게 어떤 사인도 주지 않고 배신한 이유가 뭐니?

뱉기만 하고 도무지 삼킬 줄 모르는 말이 터져나온

어둠이 내게 보낸 수많은 기척만이 정확했다

그러니 오늘의 승률을 숨겨야 한다


신파가 되기 싫은 나는 지금까지 비상구를 원했을까

패배자들이 모이는 드라마를 원했을까


내가 날 자꾸 경기장 밖으로 밀어 내고 있다


그것이 완벽한 파울이 될 거라는

자명한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우리는 오늘밤 서로를 아웃시키고 있다


  <심사평>


  신인상 본심을 마치며


현대시학 신인상 투고작으로 총 98인이 보내온 1000여 편의 작품들 중 편집위원들이 2회에 걸쳐 예심을 진행한 후 총 4 인의 본심 대상작을 추려내었다. 박현수/허혜정 심사위원에게 도착한 심의 후보자들은 「턱」 등의 시편을 투고한 송승정, 「코로나」 등을 응모한 장동한, 「ㄱ」 등 한글기호 제목의 연작시를 투고한 서종현과 「파울의 방식」 등의 시편을 보내온 하시안, 총 4인이었다.

신인상 투고 규정상 각 시인들이 10여 편의 작품을 투고하였고, 근래의 창작추세인지 여전히 장시들이 많아, 심사위원들은 당선작을 추려내는 데 몇 번이나 되읽기와 돌려읽기를 하며 결국 점수를 합산해 등위를 결정하기로 하였다. 사실 각 시인의 투고작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삶의 단면들을 호소력 있게 보여주는 시정을 갖추고 있었지만, 이 4인 외에 좀 더 작품 범위를 넓혀 검토하고 싶어, 편집위원들이 예심에서 아깝게 탈락한 ‘예비작’으로 추려놓은 100여 편의 시편들을 다시 읽어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어떤 시편들은 첨단의 과학기술과 그에 걸맞은 속도로 전개되는 무심한 자본주의 시대의 감상을 담아내기도 했고, 어떤 작품들은 분명 문명과는 대척점에 놓여 있지만, 또 자연 그대로만은 아닌 시적 대상들을 탐색하는 독특한 시선을 갖추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너무 시를 길게 쓰는 추세여서 언어를 아껴 조탁해낸 간결한 서정시나, 우리 모두가 고통스레 경험하고 있을 ‘코로나 블루’의 감성을 담은 작품들에 눈길이 멎기도 했다.

심사위윈의 의견이 쉽게 일치되어 먼저 수상자로 선정한 하시안의 「파울의 방식」 「케이크」 「회전문」 「접사」 「안녕, 지니?」 등은, 시적 상상력을 발휘해 대상을 형상화해내는 스타일이 매우 훌륭하다. 하시안의 시편들은 쉽게 말하자면 삶이 아름답다거나, 평화롭다거나, 여유 있다거나, 순수하다거나 하는 따위가 없다. 그저 살아간다. 그의 시는 이따금씩 삶을 곤란하게 만드는 우울이나 외로움, 소문, 혹은 이별에 다치지 않으려고 삶의 ‘방어율’을 높이려는 화자의 이야기를 인상적으로 풀어낸다. 시인은 “패배자들이 모이는 드라마”(「파울의 방식」)로 내몰려가는 자신을 자꾸만 “경기장 밖으로 밀어내”고 있는 ‘아웃’의 순간을 담담히 그려내고 있다. 사람들이 내던진 ‘돌직구’에 “매번 방망이조차 들지 못한” 내가 “홈을 밟을 것인지 장외까지 날아갈 것인지 결정해야” 하는 순간들은 얼마나 많은가. 그렇게 갈등하는 자신과 싸우며, 혹은 갈등을 빚어야 하는 삶 그 자체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삶의 환경이나 맞닥치는 대상들을 적대시 하거나 불화의 관계로 그려내기보다는 그저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이고 그 갈등의 ‘기척’을 느끼고 ‘승율’을 계산하는 화자의 내면을 경기장의 룰에 비유하며 호소력 있게 유도심문하고 있다. 그의 다른 시편들에서도 엿보이는 이런 천연덕스러운 태도는 곧 시인의 발랄한 상상력은 물론 누구나 당당하게 살아가야 하며 그 당당함이 나를 ‘아웃’시키는 ‘룰’에 대한 항변이자 반격이라는 생각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타인들의 소문과 판정, 시선으로 인해 늘 자신의 삶을 억누르며 살아가야만 하는 젊은 세대들이 정말 너무 거지같고 무지막지한 세상을 향해, (9회 말 스트라이크에 내몰린 타자처럼) 요구하는 시라는 ‘연장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신인상 수상작으로 심사위원의 의견이 망설임 없이 일치될 만큼 매력적인 시편이 아닐 수 없다.

심사위원들이 작품에 감탄하며 너무나 행복하게 수상자로 결정한 서종현의 작품은 한글 자음을 제목으로 한 연작시들로서 매우 “실험의 품격”을 느끼게 하는 시편들이다. 결국 하나의 낱말, 낱말들의 영토, 낱말들의 유적으로 남게 되는 사유, 매순간을 관통해가는 삶의 순간들, 심지어는 문명과 지구라는 터전에 이르기까지, 언어기호를 의미의 자연과 연관시킨다는 발상도 신선하지만, 모든 의미화의 과정이자 결과인 기호에 대한 시인만의 사유의 성채를 세우고자 하는 연작산문시들은 자못 실험적이고 웅장하고 화려하다. 전반적으로 그의 시편들은 인간과 문명이 기호와 동행하는 것은 무엇을 만들고 창조하기 위함이며 그것이 ‘생명’의 본질이라고 웅변하는 듯한 걸작이 많다. 서종현의 시들은 시적 대상에 숨어있는 의미만을 탐색하는 것이 아니라 기호라는 의미화의 현상 그 자체를 사유하고 그것이 지닌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친절하게 나누어 주는 기쁨을 느끼게 한다. 그의 시는 지난 90년대에 유행하던 ‘메타시’의 소란스런 말부림에 물들지 않고, 기호 그 자체를 정물이나 식물들, 혹은 하나의 아름다운 소품처럼 독자의 마음에 아로새긴다. “지구를 깎아내야 살아나는 생명이 뛰어다닐 때 기역이 탄생했다”(「ㄱ」) 는 구절을 보라. 기역자의 꺾임소리에서 지구가 제 몸을 헐어 생명을 토해내는 원리를 유추해내고 있다. 그의 상상력은 대상을 역동적으로 그려낼 뿐 아니라 대상의 숨은 비밀까지 잘 드러내고 있다.

서종현의 연작시는 이렇게 놀라운 상상력을 펼쳐내며 기호들의 본질을 탐사하고 기호의 세계를 숨쉬며 살아가는 생명들의 펼쳐짐, 의미들의 우주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남다른 시각으로 발견하고 서술해내고 있다. 서종현은 신선한 상상력과 예리한 통찰력, 그리고 놀라운 집중력으로 시적 대상을 묘사하는 수사학적인 능력을 가진 시인이다. 그는 이미 자신만의 은유와 문법,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그의 시편 여기저기에서 번뜩이는 상상력의 빛, 즉 기호의 원리에서 생명원리를 유추하여 포개놓고 모든 의미들의 생명원리를 놀이하는 그의 상상력은 의미세계에 자리한 모든 사물의 꿈과 진실도 비춰주고 있기 때문에, 거듭 읽어볼수록 수상자의 영광은 당연히 이 훌륭한 시인에게 주어져야 함을 확인하게 된다.

심사를 마친 우리는 너무나 감사하고 기쁘다. 단순히 현대시학 신인상 수상자가 확정되어서가 아니라 정말로 훌륭한 시인들을 우리의 시단으로 내보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미래의 현대시를 이끌어갈 젊은 시인들에게 축하와 격려를 전하고 싶다.


심사위원 : 김금용(시인·본지 편집주간) 박현수(시인·문학평론가·경북대학교 교수) 허혜정(시인·문학평론가·숭실사이버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