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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말의 뼈 / 이하(李下)

 

1.

어둔 숲. 외진 길에서 눈에 반짝거리는

인광燐光을 보았다


기척 없이 바닥위에 떠있다

잠 든

뼈 하나를 얻었다


말의 퇴적으로 오랜 풍화를 견디며 단단해진,

활자의 바다 심해를 꼬리치던, 작은 뼈에는

넝쿨처럼 촘촘한 핏줄이 붉게 감싸고 있었다


무덤 자취를 털어내고

부러진 뼈대를 가만히 들여 보았다


뼈에 숨은, 말이 있었다


행간의 뒤를 밟던 질주의 눈에 쫓겨, 든

미로의 숲을 벗어나지 못한 말이거나

풍경의 여백을 채우던 모음이거나

어둔 하늘을 날다, 비명에 얼개가 무너져 내려앉은 것인지

잔가지에 매달려 있던 낙과의 상흔을 삼키고

고요로 기운 침묵으로, 숨 멎어가는

말의 뼈가 분명했다


서늘한 음각의 문양을 품은, 인장印章의 편린片鱗이나

오래 쓰다 버려진 말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지만

소란을 걷어내지 못하고

적의敵意 살아 있는, 비밀의 말 이었다


사구에서 사라진 바람의 결이, 뼈마디에 일렁이는 것도 보았다

거리를 떠돌던 말, 혀에 돋아있다 휩쓸린 연흔도 있었다


미라의 검은 입술에서 퇴화된 명징한 표현들,

정염 불타던 눈길의 떨림도 남아 있다


뼈대는 말을,

다시 이룰 수 없어 보였다


허기진 기억이 낙엽처럼 덮여 있고

눈 감지 못한 주검이 되고 있었다


2.

오래 귀담아 두었던 낱말 하나, 아둔한 머리를 지나갔다

몸 깊숙이 숨겨, 이미 사라진 말이다


풍장風葬에 남은 돌의 뼈대, 홍예虹蜺처럼

견고한 문체文體를 가진 말의 뼈대를…


가시 촘촘하고 심장 뛰는 문장하나를 갖고 싶다


가슴 구부러져 박히는 못. 아닌 말

죽음의 시편을 걷더라도, 거꾸로 읽을 수는 없는

그런 말. 하나를, 갖고 싶다


 

  별지목록別紙目錄


오늘 밤에도 주검은 제집에서 썩어갈 수 없어, 앰뷸런스에 오른다. 뒤돌아서지 못하게 트렁크는 세차게 닫힌다. 지나치는 풍경을 더는 바라볼 수 없게, 두려운 창문을 닫는다. 썬팅을 하고 불투명해진 눈으로 울부짖으며, 길을 달린다.


눈빛을 피한 불안한 어둠이 남았다. 온기를 빼앗긴 발톱을 감추어야 한다. 털 없는 손은 시리다. 목을 세운 장화 속에서 툴툴거리는, 오늘의 아침인사는 질척거림. 풀리지 않던 오늘의 일기는 늘어진 밤의 목을 당겨 본다. 긴·꼬·리·여·우·원·숭·이·처럼 지루해져서 눈은 더 멀어진다. 예보를 비켜가는 날씨앱은 목록에서 지운다.


휴일아침. 방에 누워 벌처럼 몸을 부빈다. 각질이 우수수 떨어지도록, 윙윙… 온 몸으로 휘파람을 분다. 문은 울고, 뼈마디가 닿는 시간은 비명인 것을, 아직 모른다.


환유는 구부러져 “통증이 없다”라고, 생각한 적 있다. 직유처럼 단정한 뼈를 갖지 못한 탓이라 단념한다. 반짝이지 않는 건, 없는 것. 비 오는 어제부터 개인 오늘까지. 지루하거나 빠른 것은 기억이 된다. 무릎은 어제의 길을 오늘 다시 지나친다.


비 맞은 우산은 불투명한 껍질 속으로, 둥글게 아픈 몸을 말고 쓰레기통에 비밀이 된다. 축축한 날마다 갈비뼈를 펼쳐, *페티시에 필요한 날씬한 몸으로 다시 태어난다. 손아귀는 불편한 단어지만 구부러진 손잡이는 모멸에 가깝다. 상품의 표기처럼, 규범을 감춘 손바닥이 가려져 “지금”은 여전히 미확정.


겨울이나 여름에 있어 서두르는 사람들. 가을과 봄, 비 오는 오후에 흐려지는

시선들, 일정한 간격의 비를 맞고 있다. 어깨를 부딪지 않고 횡렬을 이루어 속보로 걷는다. 믿지 못할 마음을 감추고 예의바른 문자로 진심을 남긴다. 무시無時무시無視한 무관심한 미소는 바람이 쓸고 간다.


혼자 밥을 먹고, 엄마 없는 아이처럼 혼자 놀다, 홀로 잠 못 들어도 외롭지 않는 사람들. 스스로 혼자가 되어도 외롭지 않은 사람들.


퇴화된 귀를 세우지만 입은 자꾸 미끄러진다. 목적지를 잃고 두리번거리지 않는 눈. 날씨 얘기로 어색했던 만남은 눈을 감는 저녁에 비로소 완성된다.


선글라스로 속내를 가리고, 오늘 메뉴가 연기처럼 하늘로 올라가버린 걸 후회하는 연인들. 서로의 눈빛이 식어가는 것. 검고 두꺼운 유리창도 알고 있다는 것. 서로 다른 얼굴을 미리 기대하고 있다는 것.


편지는 오늘 보내지 못했다. 너무 길어서, 꼬리를 남겨서, 무겁고 너절했던 시간이 너무 많아서, 나른해진 오후의 손으로 흘려 쓴, 비 맞고 축축한 후줄근한 이야기여서…


별지목록의 상처를 훔친다 얼룩이 남은 별지에는 ‘흐림’으로 반드시 명기한다.


오늘 별지는 새벽 전까지 꼭 버린다.


*패티시 : 손이나 발 따위의 몸의 특정 부분 또는 옷가지나 소지품 따위의 물건을 통하여 성적 흥분이나 만족을 느끼는 일



  싱글 가이드


빗방울은 새롭지 않아요. 눈 오는 날은 기다려지지만, 관계처럼 뒤처리가 질척여 싫어요.

사랑이나 청춘 따위는 유통기한과 같이‘반드시’가 전제돼서…

아쉬운 기억이 덤으로 남아서… 찝찝해요.

묵묵하다거나 고요하다는 건 혼자일 때만 적용되는 단어예요.‘함께’라는 낱말은, 불편한 예감이 도사려 있죠. 눈을 마주치는 건 나이가 들었다는 얘기만큼, 슬픈 일이죠.


꼬리가 길어 흔적 남는 일은 되도록 피해요. 실핏줄같이 엉키고 찌꺼기 남는 거니까요. 체념은 오늘 아플 테지만, 내일 홀가분한 만족에 빠지죠. 오늘 어디로 갈지 마음 두지 않아도, 결국 내일 닿을 수 없는 분명한 결과가 있을 테니까요. 빠르게 흐르는 시간이나 밀리는 길 탓으로 돌리면 되니까요. 핑계는 적당한 의미를 가진 최선의 낱말이니까요.


어딘가로 끌려 다닌다니요. 어디에 매달려 있다니요. 단풍이 들면, 아니 눈 내리기 전까지, 반·드·시· 마쳐야 하다니요!


결혼은 또 어때요. 필수조건 아니잖아요? 아침이면 보게 되는 막장 드라마 같아요. 영·원·한·약·속·이라지만 영원도, 약속 같은 것도 애초부터 지킬 수 없는 것 아닌가요? 조건을 맞춰 서로 목적이 다른, 어색한 공생관계 같아요. 지출이 따라 다녀서 애당초 포기해야 할 참담한 일이니까요. 오늘 필요하지만, 내일 갚아야 하는 명세서를 남기는 것과 같죠.


그런 점에서 여행은 깔끔하죠. 홈쇼핑 같아서 추억을 안겨주니까요. 설렘만 챙기면 되니까요. 일등석과 비즈니스석은 감당할 수 없는 자리라서 생각 말아 야죠. 이코노미석은 낱말처럼 형편이 만족하는 자리이니까요. 선택은 지불의 결과로 답하는 거니까요. 능력이란 늘 경제적 조건이 절대적이니까요.


이제 줄을 서야겠죠. 줄에 서 있다는 건 아주 평범하다는 표시죠. 신분은 태어나면 확정되는 등급이잖아요. 환불이나 교환이 안 되는 마트의 계산방식과 닮았죠. 할인이나 업그레이드는 특별한 경우일 테지만 그럴 땐 아주 번거러운 일이 되겠죠?


이제 가성비를 최대한 올려야 할 때예요. 눈치만 있으면 불가능한 일은 없죠. 그러나 조식메뉴와 침대사이즈는 이미 결정된 것이라 포기해야 해요. 완벽한 만족은 없으니까요. 창밖 전망은 양보할 수 없는 일이죠. 셀카의 위력을 보여줄 결정적 찬스니까요. 별표의 숫자가 가진 절대적 가치와 만족이 일치하는 더없는 환상이니까요. 최종 결재 전까지 다시 체크해 봐야 할 숙제로 남겠네요.


제 여행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한, 최적의 조건을 이제 다 갖춘 것 같네요. ​


지정좌석이 아니라면 창가로 하고 싶네요. 내가 정할 수만 있다면… 그건 어렵겠죠? 실금사이로 스미듯 하늘로 떠나면 좋을 것 같아서요. 출발의 만족도를 높이는 마지막 최적의 조건이니까요.


누군가와 눈을 마주쳐야 하는 건 비극이니까요.

서로 손을 내밀고 잡는 것보다 끔찍한 일은 없는 거니까요.

발가벗겨진 나를 보는 것보다 더 참혹한 일은 없으니까요.


버킷리스트처럼 새로운 날을 기대하진 않아요. 오늘은 내일과 무관한 거니까요. 내일이 있다는 건, 자정뉴스가 매일 반복되는 것처럼 무서운 일이니까요.

그럼 ‘안녕 ’이라고 인사는 해야겠죠? ‘다음’이란 낱말은 버리고 갈게요.


돌아와 외로울 일 이젠 정말…

또, 없겠죠?



  낙과落果를 보다


간격 없이 떨리던 가슴을 안고 바람 속으로 떨어지는 것은

상처를 새긴 말의 은유인가


나무들 몸 가벼워져 숲 어깨로 스민 흐느낌, 멈춘 것인가


들썩이던 속 비워낸 뼈대는 얼마나 가벼운 일인지

손 풀어준 주머니는 또 얼마나 위태로운 막막함인지


숲길로 들어가 남南으로 기운 가지를 가만히 매만져 본다


땅 솟구쳐 올라 초록 무성히 메우던 풀의 여름과

붉고 노란 꽃들의 정처定處를 기억 한다

잎 흔들던 붉은 단풍과 폐가의 겨울, 자취를 생각한다


대지로 되돌아가

슬픔을 떠올리지 않아도 되는 일상처럼

그늘이 되는 낙과는

기억 너머의 강을 건너간다


바람에 떨리던 숲의 노래를 들으며,

살갗을 파고든 시린 날의 간극으로 들어선다

눈비를 맞고 햇살 닿던 너의 내지內地와

낡은 등뼈를 다시 본다


길 끊어버린 눈보라 속으로

가파른 벼랑으로 내몰려 몸 던진 비명 흔적으로

홀가분한 명부冥府의 길로

무한의 피안으로

가는, 눈을 본다


눈 감고, 더 깜깜해져 입 무겁다

팔 벌려 닿은 가지 끝에서 얼굴을 지우고

멸절滅의 생애 다 잊고

뜨거웠던 몸 내려, 땅으로 스며가는 찬란한 일

한 때의 치열함을 내려놓는 일

고요 속에서 침묵 더 깊어지는 일


네게 남은 비바람의 상처를

꽃, 뜨겁게 품던 여름날을

더는,

알지 못해야 한다


넝쿨이 가난한 손목을 붙잡지 못하게

후일後日에 사막에서 발등 무너지지 않도록


쿵쿵 발소리를 울리며…


 

  빈집


여우비가 내린 여름 오후였다

담 너머 수국은 마른 목을 꺾고 있다


선잠 속, 흉몽 일렁인 바다, 찬 물결 사이

어린 몸 하나를 품고 있다


낮달이 떠올라 타는 해를 가려주고 있었다


마당 키 작은 나무

홑이불을 들춘 하얀 손, 검푸른 잎맥 돋아 있다

꽃그늘은 온기 잃은 발등을 쓰다듬고 있다


마당을 적시는 흐린 등, 짧은 밤을 지켰다


캄캄한 골목으로 작은 그림자. 아득한 어둠으로 사라지고

자식 잃은 뼈마디에서 새벽 별빛이 희미하게 빠져 나갔다


잠이 오지 않던 그해 여름밤

추녀 밑. 거미줄에 벌레 몇 마리

버둥거리고 말라갔다


여름 지나

대문은 입을 닫고

벽을 세운 기둥이 주저앉았다


겨울이 오기 전

동네에 빈집이 하나 늘었다


봄날, 어린 꽃들이 빈 마당에 흐드러지게 펴도

나무그늘은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부엌 아궁이엔 눈처럼

재만 쌓여 있었다



  <심사평>


  -


제10회 웹진 『시인광장』 신인상 공모에는 여러 분의 응모작들이 들어왔다. 여러 차례 역량 있는 신인을 세상에 내놓은 바 있는 『시인광장』은 이번에도 꽤 의미 있는 신인 배출의 지표를 남기면서 독자적인 매체적 위상을 거느릴 수 있게 되었다. 응모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응모자들 가운데 심사위원은 시상(詩想)이 탄탄하고 이미지 조형이 탁월한 이승현, 이지향, 이하의 작품을 우선적으로 주목하였다. 그 결과 한 편 한 편의 완성도가 높고 우수한 언어적 운용 능력을 보여준 이하의 「말의 뼈」 외 4편을 당선작으로 선정할 수 있었다.

이하의 작품은 전체가 균질적인 수준과 품격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가령 「말의 뼈」에서 보이듯이 “어둔 숲. 외진 길에서 눈에 반짝거리는/인광燐光”의 순간성과 “말의 퇴적으로 오랜 풍화를 견디며 단단해진” 축적의 시간을 함께 결속해내는 힘을 갖추고 있었다. 잔뜩 웅크리고 있는 “뼈에 숨은, 말”과 “고요로 기운 침묵으로, 숨 멎어가는/말의 뼈”를 순간적으로 적출해내는 기막힌 서정적 솜씨를 갖추고 있었다. “가시 촘촘하고 심장 뛰는 문장 하나”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으로 충일한 시인이었다. 그런가 하면 “뼈마디가 닿는 시간은 비명인 것”(「별지목록別紙目錄」)을 하나하나 발견해가면서 “마당을 적시는 흐린 등, 짧은 밤”(「빈집」)의 오랜 흐름을 관찰하는 서사적 능력도 신뢰할 만한 것이었다. 그 결과 그는 “뜨거웠던 몸 내려, 땅으로 스며가는 찬란한 일”(「낙과落果를 보다」)의 가치와 “실금 사이로 스미듯 하늘로 떠나면 좋을 것”(「싱글 가이드」)이라는 깨달음을 얹어 자신의 시적 지향을 완비하였다. 앞으로도 이러한 서사와 이미지, 호흡과 울림을 우리 시단에 크게 전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결과적으로 이하의 작품은 감각의 구체와 활력 있는 자기 개진(開陳)의 밀도를 드러내 보여준 미학적 결실들이었다. 가볍게 초월하지 않고 무겁게 강요하지 않는 그의 언어는 자신의 삶에 대한 섬세한 반추와 성찰에도 불구하고 경쾌하고 진지한 무게를 잃지 않게끔 하는 균형추의 역할을 해주었다. 당선작들은 사물의 선명한 이미지를 포착하여 그것을 단단하고 심원한 경험적 기억과 결합해낸 성취로서, 하나같이 호흡이 길고 일관된 흐름을 놓치지 않는 시상의 견고한 구성을 보여주었다. 심사위원은 그가 삶에 대한 시선을 따뜻한 긍정과 차가운 냉소로 통합하면서, 은은하고 열정적으로 삶을 해석해가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을 신뢰할 수 있었다. 더불어 그의 오랜 존재론적 탐색과 타자 발견 과정을 긍정적으로 존중할 수 있었다.

이처럼 그의 당선작은 지나온 시간의 너비와 깊이를 보여준 사례라 생각되지만 어쨌든 당선자는 고유한 필력을 자산으로 삼으면서 오랜 습작 시간을 깊숙이 품고 있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주었고, 스스로의 경험적 구체성에 정성을 들였다고 생각된다. 이 점 그만의 큰 자산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앞에서도 강조했듯이, 그의 시는 구체적 시공간에서 벌어지는 삶의 가파른 흐름과 그 안에서 일고 무너지는 자신만의 내러티브를 담아내는 쪽으로 발전해갈 것이다. 그 밖에도 당선자에게는 상상력의 생기 있는 출렁임을 보여준 선명한 이미지의 작품들이 많았음을 부기하고자 한다.

당선을 축하하면서 더욱 개성적 필력과 경험적 구체성을 바탕으로 하여 신인다운 진경(進境)과 지속 가능성을 구현해가기를 마음 깊이 기대해마지 않는다.

심사위원 :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