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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삭제하다 / 전영임

 

누구 하나 기별 없는 전화기를 매만지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번호들을 지운다

절두산 망나니 손이

칼춤 추듯, 칼춤 추듯

삭제한 낯선 이름 온 저녁을 붙잡는다

단칼에 날린 순간 불현듯 떠오르는

아뿔싸, 목을 벤 후에

도착한 어명 같은

산다는 핑계 속에 까마아득 잊혀져간

나는 또 누구에게 삭제될 이름일까

희미한 번호를 뒤져

늦은 안부 묻는다


 

  <당선소감>

 

   아버지 말씀처럼 즐기면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금빛 모래 쓸리어 내리는 강을 건너, 진달래가 흐드러진 산으로 꽃상여를 타고, 화려하고 호강스럽게 떠나시던 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난다. 내 삶의 지침이 되어 준 말씀, “즐기면서 최선을 다해라.”

  시조와의 연애는 내가 늘 을이었다. 그래도 설레고 행복했다. 무릎을 치게 하는 시조를 만날 때마다 흩어진 언어들을 씨줄 날줄로 엮어 가슴을 울리는 시조를 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사람 복이 많아 감사할 분들이 참 많다. ‘꿈꾸면 이루어진다!’며 시조시인의 길로 안내해 주시고, 칭찬과 격려로 꿈을 키워주셨다. 부족한 글에 늘 ‘잘한다!’는 응원으로 가르쳐 주신 영주문예대학 박영교 학장님, 목요일 밤을 밝히던 문예대학 동문님들, 사이버 공간에서 내 글에 관심 주시고 지도해 주신 백윤석 시조시인님, 코로나19 이후 교회에 출석하지 않아도 큰 상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막내가 뭘 하든 자랑스러워하는 친정 8남매, 무한 응원으로 내 가슴을 뛰게 하는 민지, 민기와 함께 기뻐해주는 가족이 있어 기쁨이 배가 된다. 2년 동안 맨살을 만져보지 못한 요양원에 계신 엄마가 보고 싶다.

  고뇌하며 쓰기보다 즐기면서 시조를 품는, 수굿한 시조시인이 되어 이 설레는 연애를 오래 하고 싶다. 부족한 글에 눈길 주신 부산일보와 신춘문예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린다.

 

● 1965년 경북 영주시 출생, 
● 서울디지털대 문예창작과 재학 중
● 현 동양대 사감.


 

  <심사평>

 

  

  인간 존재에 관한 사유를 촉발할 여운 머금은 시조

 

  너무 길고 막막한 팬데믹 시대다. 누구도 명쾌한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는 어둠의 터널 속에서 우리의 생활은 2년을 경과하고 있다. 인간의 거만함을 비웃기라도 하듯 바이러스들은 새로운 변종이 되어 날뛰고 있다. 이러한 전망 부재의 삶 앞에서 투고 작품들의 현황은 어떤 모습일까? 라는 궁금함과 일말의 기대 속에서 작품을 읽는 선자는 떨렸다. 결과를 먼저 말하면 투고작 수는 전해에 비해 소폭 증가하였고 수준은 높아졌다. 형식에 대한 이해도도 높았다. 그리고 이 시대의 시조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어떤 대상을 노래해야 하는 가를 잘 알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유의해서 읽어본 작품으로는 ‘월력’ ‘어머니의 좌판’ ‘기계치’ ‘원추리 여인숙’ ‘ 삭제하다’였다. 그러나 서정성과 수사 능력의 부족 등을 발견하여 제외한 뒤 마지막 당선작 후보로 남은 작품은 ‘삭제하다’와 ‘원추리 여인숙’이었다. 한 작품은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우리 시대의 어두운 삶을 예리하게 드러내어 반추하게 하는 작품이고 다른 하나는 시조를 읽는 재미를 소소하게 선사하는 잘 수놓은 수틀 속의 그림 같은 작품이었다. 이 두 시인의 다른 작품들도 탄탄하였다. 오래 심사숙고한 결과 좀 더 신선하고 현대적인 작품을 고른다는 의미에서 당선의 영광은 ‘삭제하다’를 쓴 시인에게 돌아갔다. 정보화 기계화 시대가 된 지금일수록 고독한 사람들은 더욱 고독해지고 잊혀 가는 사람들은 더욱 잊혀 갈 것이다. 팬데믹 시대가 그런 외로움을 더 부추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삭제하다’는 인간 존재의 중요성을 성찰하게 하고 그와 관련한 여러 가지 사유를 촉발할 수 있는 여운을 머금고 있는 수작이다. 대성을 기원한다. 

심사위원 : 이우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