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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목다보 / 송하담

 

아버지는 목수였다

팔뚝의 물관이 부풀어 오를 때마다 나무는 해저를 걷던 뿌리를 생각했다. 말수 적은 아버지가 나무에 박히고 있었다.

나무와 나는

수많은 못질의 향방을 읽는다

콘크리트에 박히는 못의 환희를 떠올리면 불의 나라가 근처였다. 쇠못은 고달픈 공성의 날들. 당신의 여정을 기억한다. 아버지 못은 나무못. 나무의 빈 곳을 나무로 채우는 일은 어린 내게 시시해 보였다. 뭉툭한 모서리가 버려진 나무들을 데려와 숲이 되었다. 당신은 나무의 깊은 풍경으로 걸어갔다. 내 콧수염이 무성해질 때까지 숲도 그렇게 무성해졌다. 누군가의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박히는 게 아니라 채우는 것. 빈 곳은 신의 거처였고 나의 씨앗이었다.

그는 한 손만으로 신을 옮기는 사람

나무는 노동을 노동이라 부르지 않는다. 당신에겐 노동은 어려운 말. 그의 일은 산책처럼 낮은 곳의 이야기였다. 숲과 숲 사이 빈 곳을 채우기 위해 걷고 걸었다.

신은 죽어 나무에 깃들고

아버지는 죽어 신이 되었다

나무가 햇살을 키우고

나는 매일 신의 술어를 읽는다

목어처럼 해저를 걷는다


 

 

  <당선소감>

 

   “보이지 않는 장벽에 ‘詩'라는 못 박을 것”


  긴 채굴의 시간이었습니다. 탄차의 여정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시 쓰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세상이 거리두기를 외칠 때 저는 무엇보다 나와의 거리두기가 중요했고 그 거리 언저리에 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출구가 저기 보이는 듯합니다. 이번에 강원일보에서 부족한 글꾼에게 손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고대하던 등단은 또 다른 나와의 거리두기가 될 것이고 힘든 싸움의 시작임을 알고 있기에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지치지 않고 한 걸음씩 걷겠습니다. 당선작의 첫 구절처럼 아버지는 목수이셨고 막노동의 현장 한가운데 서 계시던 분이었습니다. 쉼 없이 못과 망치를 쥐시던 거친 두 손처럼 저 역시 보이지 않는 벽에 시라는 못을 박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엔 벽이 너무 많습니다. 보이지 않는 벽과 싸우는 많은 계층의 사람들을 대신해서 못을 박겠습니다. 조금 더 겸손하게 더 낮은 곳을 바라보며 나의 아픔뿐만 아니라 다른 이의 무거운 옷들을 걸 수 있도록 열심히 시라는 못을 박겠습니다. 쉬지 않는 목수가 되겠습니다. 힘든 시간 옆에서 응원해 주신 전다형 시인님, 황윤현 시인님, 김선미 시인님, 활연 시인님, 세상에 나갈 물꼬를 터주신 용인문학회에 감사 인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심사위원분들과 강원일보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송하담(본명 송용탁·45) 
● 부산 生 
● 학원 국어강사


 

  <심사평>

 

  

  “상상의 폭 넓게 두고 적확한 시어 찾아내”

  예심을 거친 작품들은 대부분 오랜 습작의 내공들을 보여주고 있었으나, “왜 이 시를 쓰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흔쾌한 답을 주는 작품은 드물었다. 달아나기만 하는 언어를 붙잡아 내 존재의, 삶의 숨결을 불어넣으며 시 고유의 장르적 힘을 보여주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선자들이 마지막까지 논의한 작품은 이용원의 ‘무심하게 미시령' 외 4편과 송하담의 ‘목다보' 외 4편이었다. 이용원의 시들은 마치 베틀로 피륙을 짜내려가는 듯한 직조의 맛이 돋보였으나, 이러한 정성이 오히려 시를 단조롭고 밋밋하게 만드는 아쉬움을 남겼다.

  송하담의 시들은 이용원의 시들에 비해 좀 더 과감한 면이 있었다. 거친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다보'를 당선작으로 뽑은 이유는 이 작품이 이러한 응모자의 특성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상상의 폭을 넓게 두면서도 적확한 시어를 찾아내고자 하는 노력, 그리고 이 상상과 언어 속에 삶의 비의와 존재의 근거를 담아내고자 하는 치열함이 그를 좋은 시인으로 우뚝 서게 만들 것이라 믿는다.

심사위원 : 이영춘, 이홍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