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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재활 병원 / 정경화

 

바장이던 시간들이 마침내 몸 부린다
한 평 남짓 시계방에 분해되는 작은 우주

숨 가삐 걸어온 길이
하나 둘씩 드러난다

시작과 끝 어디인지 알 수 없는 하늘처럼
종종걸음 맞물리는 톱니바퀴 세월 따라

녹슬고 닳아진 관절
그 앙금을 닦는다

조이고 또 기름 치면 녹슨 날도 빛이 날까
눈금 위 도돌이표 삐걱거리는 시간 위로

목 붉은 초침소리를
째깍째깍 토해낸다


 

  <당선소감>

 

   -


  무척 기뻐도 눈물이 나오나 봅니다.

  멀리서 다가오는 낯선 음성이 들리는 순간 담담했던 마음에 잔물결이 일면서 머리에 냉수를 쏟아 붓는 것처럼 또렷해졌습니다. 그리고 당선을 축하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뜨거운 눈물이 흘렀습니다. 저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신의 등을 가만히 토닥이면서 그동안 시조와의 동행에서 결코 쉽지 않았던 지난날의 수고에 대해 위로를 했습니다.

  어릴 적 마을사람들은 마을이름을 구름다리라고 불렀습니다. 분명 운교리라는 이름이 있는데 구름다리라고 불러서 저는 초등학교를 오가는 길에 목이 꺾어져라 하늘을 쳐다보며 구름다리를 찾았습니다. 그렇게 바라본 하늘에서 구름다리와 비슷한 구름을 찾았는가 하면 금세 어디론가 사라지고 어떤 날은 아예 구름 한 점 없는 시린 하늘이었습니다.

  산길을 걸어 논길을 지나 십리가 넘는 학교를 오가면서 구름다리를 찾던 그 작은 아이는 지금은 구름다리를 찾지 않습니다. 다만 그때 구름다리를 찾으면서 보았던 변화무쌍한 자연을 소환하고 있을 뿐입니다. 벼 익는 들판을 일렁여놓고 금세 멀리 대숲을 흔들고 있는 바람둥이 바람, 논일을 하다 잠시 오수를 즐기시는 농부의 젖은 발을 따숩게 덮어주던 햇빛, 그리고 사시사철 아무렇게나 피어났지만 그 곁에 쪼그려 앉혀놓고 바라보게 하던 들꽃들은 제 시조창작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조금씩 그것들을 빌어다 쓰고 있지만 화수분처럼 늘 넉넉히 지금도 그대로 있습니다.

  긴 터널을 빠져나온 느낌입니다. 터널을 지나는 동안 외롭지 않게, 두렵지 않게 늘 함께해준 윤금초 교수님과 문우여러분, 고맙습니다. 이럴 땐 그 말의 무게도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열심히 창작에 매진하라고 제 손을 선뜻 잡아주신 심사위원님께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 1963년 전남 담양 출생 
● 호남대 대학원 한국어교육학과 졸업 
● 호남대 언어교육원 강사


 

  <심사평>

 

  

  '재활병원', '말 무덤', '뇌졸증', '몽돌' 남다른 면모 보여

 

  "우와 이거다!" 하고 번쩍 들어 올리고 싶은, 펄펄 살아서 냅다 뛰어오르는 금빛 대어를 찾지는 못했다. 하지만 당선권에 오른 '재활병원', '말 무덤', '뇌졸증', '몽돌' 등은 모두 남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몽돌'은 잘 다듬어진 작품이지만 너무 무난했다. 정말 난데없는 반전 같은 결정적인 한 방이 없는 것이 아쉬웠다. '뇌졸증'은 내려놓기가 조금 아까운 작품이었다. 보폭이 활달하고 리듬이 역동적이었다. 거침없는 패기와 실험정신도 남달랐다. 그러나 감정 과잉의 직설적 표현들이 섞여 있는 데다, 자유시와 유사한 과도한 행 갈이로 인하여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밀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말 무덤'은 말[言]과 말[馬]이 지닌 유기적인 속성을 절묘하게 포착하여 이중적으로 뒤범벅한 작품인데, 말을 주무르는 능력이 탁월하였다. 하지만 '말 무덤[言塚]'이 경북 예천에 실재하고 있는 무덤이어서 신선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재활병원'은 시계방을 소재로 한 작품인데, 제목부터 의표를 찔렀다. 재활에 성공한 시계가 톱니바퀴에 맞춰 어김없이 착착 돌아가듯이, 전체적인 시상 전개가 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안정된 가락을 담보하고 있었다.

  게다가 세계와 인간에 대한 따뜻한 응시와 메시지를 말의 밖에다 슬며시 담아놓고 있기도 하다. 시계와 사람을 겹쳐놓은 재활의 중층구조를 통해 우리 시대의 곤고한 삶을 조곤조곤 노래하고 있는 이 작품에 당선의 방점을 찍은 연유다.

  당선자에게 뜨거운 축하를 드리면서, 앞으로 좀 더 과감하고 담대한 도전을 통하여 큰 시인으로 성장하시기를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아쉽게도 낙선한 분들께서는 내년에 3박자를 제대로 갖춘 작품으로 다시 한번 도전해주셨으면 한다.

심사위원 : 이종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