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당선작>

 

  오래된 꽃밭 / 정경화

 

이른 가을 강쇠바람 시린 상처 들쑤신다
움켜쥔 시간만큼 안으로만 말라 가다
까맣게 옹이가 되어 불길 적막 견디는 날

핏기 없는 손톱 끝에 긴 침묵이 묻어나고
비 젖은 목소리로 귓바퀴가 울려올 때
선홍빛 흉터 하나가 겹무늬로 앉는다

벼룻길 하나 없는 삶이 어디 있겠는가
끝물 동백 이우는 해 잡았다 놓는 바위 난간
아찔한 순간순간이 모두 다 꽃밭이다


 

  <당선소감>

 

   당선소식 선물처럼 남기고 간 그녀


  여고를 졸업한 지 까마득히 지난 어느 날, 여고 동창 모임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곱게 그린 눈썹과 웃을 때 드러나는 하얀 치아를 보고 그동안 살아온 그녀의 삶을 읽고 있는데 위트 있는 유머로 좌중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것을 보고 그만 그녀의 매력에 푹 빠지고 말았다.

  그런 얼마 후 믿기지 않은 사실을 알게됐다. 그녀는 지금 힘겹게 투병 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지난 번 동창 모임도 투병 생활 중에 잠깐 시간을 내어 가발을 쓰고 온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지우개로 지워진 듯 하얘졌다. 긴 고통의 강에서 건져 올린 웃음이기에 은피라미처럼 반짝였던 것일까.

  지금 그녀는 이 세상에 없다. 그녀 없는 가을만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다녀갔을 뿐이다. 하지만 올해는 그렇게 기다리던 당선 소식을 선물처럼 놓고 갔다. 나는 알고 있다. 고통 속에서도 그렇게 살고 싶어 했던 그녀의 몫까지 대신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분명 꽃밭이다.

  선뜻 당선 축하를 안겨준 심사위원님, 그 깊은 뜻을 헤아리겠다. 끝까지 믿어주시고 지켜봐 주신 윤금초 교수님과 문우 여러분의 고마움은 어떤 말로 표현해도 부족하다.

 

● -


 

  <심사평>

 

  

  꽃밭 교본으로 삶 투영, 공감대 자극

  100년이 넘는 역사에도 아직 이 땅에서 신춘문예가 건재한 까닭은 문단 지망생들의 집중력을 끌어내는 가치와 미래에 대한 포기할 수 없는 희망 때문이다. 더욱이 국시, 시조에 대한 기대가 더없이 절실한 오늘의 문학 풍토를 생각하면 경건하게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예선을 거쳐 올라온 56편의 작품 가운데 시조의 정제된 율격과 완성도, 메시지 등을 고려하려 ‘슬도에서’ ‘어떤 수사학’ ‘오래된 꽃밭’에 주목하였다. 습작 과정이 엿보이는 언어 감각과 자기주장을 이끌어 나가는 논리가 정연하다고 읽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자기감정이 지나쳐 명징한 주제와 메시지의 전달에서 약점을 보인 ‘슬도에서’를 먼저 내려놓았다. ‘어떤 수사학’은 상징적 이미지를 행간에 옮기는 남다른 능력에도 불구하고 시조의 단아한 절제미를 십분 살려내지 못하였다. 문장에서도 3수 연시조에서 서술형 종결이 하나뿐일 정도로 산문의 분절 구성 또한 아쉬웠다. 마지막까지 남은 ‘오래된 꽃밭’을 올해의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외형적으로 보면 자연의 섭리에 따라 쇠락해가는 꽃밭을 소재로 한 평이한 작품이다. 하지만 보다 세심히 읽어보면 이 작품에는 꽃밭을 교본으로 자신의 삶을 투영해내는, 상당히 계산적인 은유가 숨겨져 독자적 공감대를 자극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함께 응모한 작품들로 유추해 볼 때 시조의 정형성과 질서 의식에 대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사색을 통해 긍정적인 삶의 가치와 만나는 시적 자세를 믿기로 한 것이다.

심사위원 : 민병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