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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알 수 없지만 / 양기연

 

  살구색 11시

  오전 11시 알람이 울렸다. 아침 운동 시간이다. 요가 매트를 펴고 앉았다. 양 뒤꿈치를 모아 배꼽 앞에 놓고 눈을 감았다.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다. 호흡에 잡념을 담아 모두 뱉어내려고 노력했지만 그럴수록 시진 생각이 났다. 어쩔 수 없이 또 발바닥으로 숨을 내쉬는 상상을 했다. ‘생각 멈추는 법’을 검색해서 알게 된, 어떤 블로거가 추천한 방법이다. 반신반의하면서 한 번 해봤는데 괜찮아서 종종 한다. 발바닥이 부풀어 올랐다가 다시 납작해지는 상상. 보통은 효과를 보는데 오늘따라 머리가 터질 것처럼 끓어올랐다.

  결국 눈을 뜨고 어제 보다 만 영화를 틀었다. 총구 앞에서 톰 행크스가 크랩택스를 풀고 있다. 다시 매트에 누워 요가를 시작했다. 여러 번 곱씹어본 영화라 화면을 보지 않아도 대충 어떤 장면인지 짐작됐다. 어려운 대사는 대부분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내가 영화를 보는 목적은 이해하고 감상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으니까.

  나는 겨울이 되면 주로 공포나 미스터리 스릴러, 좀비 영화를 봤다. 자취방을 재계약하는 시기여서다. 이전에 살던 집은 1층이었는데 여름이 되면 돈벌레가 들어왔다. 외부에서 들어온 벌레들은 정말 커다래서, 처음 봤을 땐 얼어붙어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곳에서 삼 년을 살았다. 공과금을 포함해도 주변보다 월세가 저렴했기 때문이었다.

  벌레 같은 건 그냥 잡으면 끝이다. 걔네는 저항도 못하고 손안에서 금방 으스러져 버린다. 그럼에도 마주칠 때마다 나는 얼어붙었다. 가끔 너무 커다란 벌레는 잡지 못해 차라리 집을 나가버릴 때도 있었다. 집 앞 씨유 파라솔에 앉아서, 나는 그것들이 내 우울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영화 속 이해되지 않는 현상들은 그런 내 우울감을 어느 정도 달래주었다. 로맨스 영화를 좋아하는 시진은 그런 내 취향을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또 시진 생각을 하고 말았다.

  코어 근육이 없어서 허리는 구부정하고 무릎은 조금 들린, 엉성한 막대 자세로 삼십 초 버티고 요가 매트를 정리했다. 영화는 막바지에 다다라 있었다. 톰 행크스와 같이 다니던 여주인공 소피가 알고 보니 예수의 직계 후손이었다. 나는 저런 비밀 뭐 없나, 탄생의 비밀도 괜찮고 종족의 비밀도 괜찮다. 좀비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휴대폰이 진동했다. 점심 알람인 줄 알았는데, 할아버지 전화였다.

  뭐하냐.

  운동.

  좀 데리러 와라. 기차역이다.

  모자만 뒤집어쓰고 택시를 탔다. 예정에 없던 방문이다. 할아버지는 이렇게 갑작스럽게 일을 저지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항상 눈치를 보기 바빴으니까.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걱정이 들었지만 그건 잠시였다. 이렇게 되면 하루를 넘어서 앞으로 사흘은 어그러질 것이다.

  기차역 로터리 앞에서 신호에 걸렸다. 택시가 멈춰 섰다. 내가 전에 일했던 주먹밥 집이 보였다. 불은 켜져 있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주먹밥 집 아르바이트에서 잘리고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코로나가 원인이었다. 원래 값이 싼 분식집에 현저히 손님이 줄어들자 일일 매출 10만 원도 안 되는 날이 태반이었다. 사장님은 미안한 얼굴로 일일이 사정을 설명했고, 사정이 나아지면 다시 불러준다 했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날 다이어리와 크로노덱스 도장을 샀다.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않도록 고정된 일정을 만들어 내 일상을 시스템화하고 싶었다. 택배가 도착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배가 고프면 라면을 끓여 먹고 다시 누워서 자거나 천장만 봤다.

  사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을 때도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그렇게 보냈다. 시진은 답답해하며 왜 그러냐 물었다. 나는 나도 모른다고 대답했지만, 사실은 돈 때문이었다. 이사 가고 싶다고 어렵게 말을 꺼냈을 때 할아버지는 자신의 적금을 깨서 주었다. 알바와 과외를 쉬지 않고 계속해왔는데, 과소비 한 적도 없는데, 왜 나는 보증금조차 모으지 못했을까. 그냥 그 집에서 참고 살 걸 그랬나.

  아르바이트를 나가지 않게 되면서는 종일 그런 생각만 했다. 그땐 나를 밖으로 끌어낼 시진도 없어서, 죄책감을 이불처럼 덮고 시간만 죽였다. 그나마 가끔 미스터리 영화를 봤다. 새로운 영화를 볼 기력은 없어서 봤던 걸 또 봤다. 가장 많이 다시 본 건 ‘다빈치코드’ 시리즈다. 거대한 음모를 하나씩 풀어나가는 톰 행크스를 보고 있으면 그래도 잡념이 덜했다. 알고 보니 실은 내 삶도 미스터리 영화여서 톰 행크스가 개입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일자리를 구해야했다. 매일 알바몬과 알바천국에 들어가 봤지만 애초에 모집 글도 거의 올라오지 않았다. 문자로 지원하면 답장조차 없는 경우가 많았다. 집 앞 뚜레주르에 면접을 보러 갔을 때는 나를 포함해 세 명이 동시에 면접을 봤다. 코로나 이전에는 없었던 일이다. 이전 집에서 나오던 벌레들처럼 나도 누군가의 손에 짓눌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 상태가 언제까지고 지속될 것 같아 숨이 막혔다. ‘발바닥으로 숨 쉬는 상상하기’는 그때 찾아본 것이다.

  며칠 뒤 택배가 도착했고 그때부터 매일 스케줄을 짜서 생활했다. 오전 아홉 시에 일어나자마자 다이어리에 정렬을 맞춰 크로노덱스 도장을 찍는다. 끊기는 부분이 없도록 꾹 눌렀다 뗀다. 그럼 울퉁불퉁한 톱니바퀴 같은 시간표가 새겨진다. 크로노덱스는 오전 9시부터 시작된다. 한 시간 간격으로 톱니가 한 칸씩 커지는데, 아날로그시계의 시간 기호처럼 15시, 18시, 21시, 24시가 가장 길쭉하다.

  책상 벽면에 붙여둔 포스트잇을 보며 그 안에 하루 일정을 기입하고 스케줄마다 다른 색깔로 칠한다. 선 안을 빼곡하게 채울 때면 자동으로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오늘도 내가 무사히 굴러가고 있다는 안도가 찾아왔다. 그게 좋아서 48색 색연필도 샀다. 물에 녹이면 수채화도 그릴 수 있다는 비싼 제품이었다. 당장 다음 달 생활비를 걱정해야 하는 판국에 쓸데없는 소비였지만 충동을 이기지 못했다. 크로노덱스를 칠하고 있을 때만, 어딘지는 몰라도 나아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빈칸을 채워 넣는 일에 열과 성을 다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매일 아침 기분에 따라 색을 고른다. 같은 계통만 가능하다. 오후의 가장 중요한 일정들, 컴퓨터 활용 능력시험 공부와 토익공부를 가장 진한 색으로 칠한다. 오늘은 붉은 계통인 살구색, 주황색, 분홍색, 다홍색, 적색을 골랐다.

  열두 시 알람이 울렸다. 원래 요가를 끝내자마자 준비를 해서 바로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시도한 지 한 달 정도가 흘렀지만 한 번 놓치는 순간 내 몸은 쉽게 나태해졌다. 다시 추스를 생각을 하니 짜증이 났다.

  그래도 짜증 내지 말자. 바지 깃을 구기면서 다짐했다. 할아버지, 입구 쪽에 있어. 문자를 보냈다. 답장은 없었다.

  주황색 12시

  택시가 기차역 로터리로 진입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시진을 떠올렸는데,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시진은 오전 아홉 시부터 오후 여섯 시까지 기차역 매표소에서 일했다. 오늘도 아마 출근했을 것이다.

  우리는 주먹밥 집에서 만났다. 나보다 세 살이 많은 시진은 종종 점심시간에 홀로 와서 주먹밥과 우동 국물을 먹었다. 뭐가 계기였는지는 모르겠다. 가끔 우리는 길게 눈을 마주쳤고, 그리고…… 모르겠다. 시작은 기억나지 않지만 끝을 결심하게 된 순간은 선명하다. 시진은 청소년 할인권이나 경로 우대권을 발급할 때 예외 없이 신분증을 확인했다. 교복을 입고 있어도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어도 상관없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그게 그런 방식인지는 몰랐다. 하루는 먼저 퇴근한 내가 시진을 데리러 갔는데 매표소 앞에서 한 노인이 주머니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쩔쩔매며 신분증을 찾는 노인을 바라보던 무감한 얼굴. 나라고 언제나 친절한 건 당연히 아니었지만…….

  할아버지는 기차역을 마주 보고 선 후락한 상가들 앞에 있었다. 로터리 중심에 있는 시계탑을 빙 둘러 다가갔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롯데리아를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을 보니 문자는 확인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갑자기 뭐야?

  그냥 심심해서 왔다.

  분명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았지만 할아버지는 고개만 설레설레 저었다. 할아버지의 만류를 무시하고 어깨에서 가방을 끌어 내렸다. 내가 중학생 때 메고 다녔던 유치한 회색 가방이다. 휘청할 정도로 무겁길래 뭐가 들었냐고 물었더니 작업복이랑 연장이라고 했다. 인력 사무소에 다녀오던 길이었다고.

  일단 집에 가서 밥부터 먹자며 버스 정류장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할아버지가 따라오지 않았다.

  오늘 점심 이거 먹자.

  지금 얼마 있더라. 가장 먼저 돈 걱정이 들었다. 세트 두 개 시켜도 이만 원도 안 되는데 그게 아까워서 짜증이 났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할아버지랑 먹는 건데, 구질구질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점심시간이라 시진과 마주칠 수도 있어 내키지 않았다. 집에 가서 먹자고 말했지만 할아버지는 이미 롯데리아 문을 열고 들어가 있었다.

  햄버거 사진이 크게 걸린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키오스크로 주문을 하고 돌아오자 할아버지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내 눈치를 봤다. 내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짜증이 묻어난 모양이었다.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오랜만에 보는 할아버지다. 저번 달 생신 때도 뵈러 가지 못했다. 코로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감정을 억눌렀다.

  오늘 일은? 인력 사무소 다녀왔다며.

  늙었다고 잘 안 써줘. 하냥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일거리도 없고 해서 집에 가려는데 갑자기 햄버거가 먹고 싶대. 근데 주문하는 법을 몰라서…….

  진동 벨이 울렸다. 불고기버거 세트 두 개를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매장 안에는 우리뿐이었지만 할아버지는 계속 눈치를 보듯 두리번거렸다. 평소에도 할아버지는 롯데리아 같은 패스트푸드 점을 불편해했다. 지금도 버거를 들지 않은 왼쪽 손을 다리 사이에 넣어 꼿꼿하게 펴고, 불편한 자세로 먹었다. 어디라도 기대야겠다는 듯이 팔꿈치를 탁자 위에 올리기도 했다. 진짜 햄버거 때문일까. 혼자 가게에 들어가기 민망해서? 할아버지는 그럼 그냥 참는 사람이지,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는 사람은 아니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래서 진짜 뭔데?

  할아버지는 한동안 대답 없이 먹기만 했다. 나는 햄버거를 식탁에 내려놓고 기다렸다. 음악을 틀어놓지 않은 매장은 고요했다. 배달 주문이 들어오는 딩동 소리와 내가 빨대로 콜라를 마시는 소리만 간간이 이어졌다. 결국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헤어졌어.

  헤어져? 누구랑?

  애인.

  애인?

  그 양반이 원래부터 신장이 안 좋았어. 투석도 매일 하고. 그러다가 뭐 결국…… 어제 삼일장 끝났어.

  할아버지에게 애인이 있었다는 예상 밖의 이야기에 너털웃음이 나올 뻔 했다가 삼일장 얘기에 쑥 들어갔다. 그렇다면 할아버지는 어제 애인의 장례식에 다녀왔다는 말이다. 방금까지만 해도 명치에 뭉쳐있던 짜증이나 화 같은 감정들이 한순간에 휘발됐다.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는 반대편 벽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계속 불고기버거를 먹었다. 입을 벙긋거리다가 나도 다시 콜라나 마셨다.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한 컵에서 얼음이 녹으며 떨어지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다홍색 13시

  정적 속에서 식사를 마치고 롯데리아를 나왔다.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려는데 할아버지가 밀가루 먹으면 소화가 잘 안 된다면서 걸어가자고 했다. 기차역에서 자취방까지는 도보로 오십 분 정도가 걸렸다. 할아버지가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쪽 아니라 이쪽. 할아버지 팔을 잡고 기차역 뒤편 2번 출구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서 오 분 정도 나가면 우리 동네로 이어지는 강변이 있다.

  날이 좀 풀려서 그런지 겨울보다 물비린내가 짙었다. 그 냄새를 맡으니 또 시진 생각이 났다. 시진은 식사를 마치고 시간이 남아도 일찍 기차역으로 들어가는 법이 없었다. 12시부터 13시까지, 점심시간을 모두 채우고 아슬아슬하게 돌아갔다. 사장님이 안 계실 땐 나와 함께 주먹밥 집에 있었고 아님 이 강변을 걸어 다녔다. 한겨울에도 예외는 없었다. 찬바람 때문에 시진의 볼과 손은 항상 빨갛게 터 있었다. 그게 싫어서 그냥 일찍 들어가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난 가만히 앉아만 있는데, 기차를 타러 가는 사람들의 끝없는 이동을 보고 있으면 불안해져. 그래서 그래.

  물비린내라도 맡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며 시진이 살짝 미소 지었다. 그럼 겨울만이라도 카페에 가는 건 어떻냐고 권하자 시진은 고개를 저었다. 돈이 아깝다는 이유였다. 시진에겐 목표가 있었다. 돈을 모아 통번역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이다. 기차역 매표소는 잠시 머무르는 곳일 뿐, 시진에겐 의미 없는 공간이었다. 그래서 방석이나 담요 따위를 두고 다니는 다른 직원들과 달리 시진의 짐은 단출했다.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나도 그걸 알고 있었고 그래서 더 말을 얹지 않았다. 대신 시진을 위해 퇴근 후 함께 자주 강변을 걷곤 했다.

  13시 알람이 울렸다. 지금쯤 시진은 매표소에 앉아 있을 것이다.

  평일 낮이라 강변은 한적했다. 원래는 컴활 공부를 할 시간이다. 모레가 시험이었다. 시험 접수 신청을 하면서, 하루도 빼놓지 않고 바짝 공부하겠다 마음먹었었는데. 오늘은 그보다 중요한 일이 생겨서 어쩔 수 없었다.

  할아버지와 나는 한참 말없이 걸었다. 옆을 힐끔 바라봤다. 할아버지는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었다. 식당에서 주문을 하거나 계산하는 것도 항상 일행에게 미뤘다. 내가 어릴 땐 할머니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선 내가 주문하고 계산대 앞에 섰다. 할머니랑 어떻게 결혼했냐고 물어봤을 때는 그 시절 다른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중매로 만난 거라 말을 얼버무리며 텔레비전 채널만 마구 돌렸다. 그런 할아버지에게 애인이 있었고, 그걸 내게 털어놨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그 할머니는 어떻게 만났어?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는 아저씨가 지나간 뒤 내가 물었다. 할아버지는 흐르는 강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옛날에 빙상경기장 근처에서 일한 적 있잖어. 그때 자주 가던 백반집이 있는디 거기 사장 엄마여. 현장으로 배달시키면 맨날 그 양반이 와 갖고는 알고는 있었지. 근데 가끔 식당 가서 먹으면 나한테만 고기 건더기를 많이 주드라고. 너 고등학교 들어가고 혼자 저녁 먹게 되면서 퇴근하고 종종 혼자 밥 먹으러 다니다가 그냥 그렇게…….

  나 고등학생 때면 오래 됐네? 왜 숨겼어, 그동안.

  그런 걸 뭣 하러 말혀. 노인네들 만나는 게 뭐가 자랑이라고.

  민망한지 할아버지의 귓바퀴가 붉게 물들었다. 작게 웃음이 터졌다. 할아버지도 머쓱한 얼굴로 같이 웃었다.

  그 할머니 많이 좋아했어?

  뭘 노인네들끼리…….

  그럼 안 좋아하는데 만나나? 좋아하니까 만나지.

  할아버지는 대답이 없었다. 갈림길이 나왔다. 여기부턴 위로 올라가 인도로 가야 했다. 계단을 오르는데 드릴 소리가 났다. 다리 맞은편에서 공사를 하고 있었다. 전에 시진과 자주 갔던 중고서점 자리다. 한 달 새에 내부까지 모두 바뀌어 있었다. 아직 새 간판이 달리지 않아 어떤 업장이 들어오는지는 알 수 없었다.

  회색 옷을 입은 인부가 가게 앞에서 철재를 자르고 있었다. 그라인더가 켜질 때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불티가 튀었다. 주로 인부의 몸 쪽을 향해 뿜어져 나갔지만 주위로도 조금씩 튀어 위험해보였다. 할아버지 팔을 잡고 길을 건너려는데 할아버지가 멈춰 섰다. 할아버지는 그 인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거 할 땐 조심해야 돼. 원체 위험한 공구기도 하고, 불티 튀어서 옷 그슬릴 수도 있거든. 작은 구멍도 나고. 언제 한 번은 내가 저거 하고 있는디 어떤 놈이 날 툭 치고 지나간 겨. 위험했지. 다행히 다치지는 않았지만, 옷이 좀 많이 그슬렸어. 그날 퇴근하고 밥 먹으러 갔는디 그 양반이 그걸 보고 맘이 좀 안 좋았나 벼. 다음 날 배달 와서는 나를 몰래 부르드라고. 검정 봉지를 쓱 내밀대. 보니까 셔츠여. 나 일할 때 입으라고 시장 가서 사 왔다 하드라.

  할아버지가 다시 걸음을 뗐다. 조금 앞에 있는 횡단보도로 향하는 나를 붙잡고 할아버지가 무단횡단을 했다.

  셔츠?

  그 빨간색 체크 셔츠 있잖아.

  할아버지 일 갈 때 자주 입던 거?

  어, 그거.

  중고서점을 지났으니 자취방까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길도 모르면서 앞서 걸었다. 방향이 틀리진 않아서 조용히 뒤따랐다.

  할아버지의 빨간 체크 셔츠는 나도 익히 알고 있었다. 보통 외출복으로 입기엔 오래돼서 색이 바랜 옷들이 할아버지의 작업복이었다. 그래서 빨간 체크 셔츠는 듣자마자 기억이 났다. 작업 현장의 먼지와 땀 때문에 금세 변하긴 했지만, 그 셔츠는 다른 작업복들과 달리 깨끗하고 선명한 색깔을 가지고 있었다. 그걸 처음 입으면서 할아버지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옷 새로 샀냐는 말에 아니라고 얼버무리며 현관에서 옷매무새를 다듬던 할아버지의 두꺼운 손가락만 기억날 뿐이었다.

  그리고 시진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더라. 또 시진 생각이 났다. 빨갛게 튼 시진의 볼과 손에 수분크림을 발라주던 기억. 강변을 돌며 점심시간을 보낼 시진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사실 좋은 외투를 사주고 싶었지만 큰 소비를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뭔가를 해주고 싶어 고른 게 수분크림이었다. 뚜껑을 열 때마다 맡았던 시카페어 향과 시진의 얼굴을 문지를 때 손끝에 닿던 튼 각질의 느낌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유순하게 감은 눈과 내 옆구리를 간질이며 장난치는 손길도 떠올랐지만 어떤 표정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뒤를 돌아봤다. 기차역은 보이지 않았다.

  적색 15시

  본가에 가면 할아버지랑 저녁마다 고스톱을 치고는 했는데, 화투가 내 자취방에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고 딱히 갈 곳도 마땅치 않았다. 리모컨에 쌓인 먼지를 옷으로 문질러 닦아 할아버지에게 건넸다. 나는 어지러운 책상을 정리했다. 다이어리를 덮고 색연필을 케이스에 넣어 한쪽에 미뤄두었다. 원래대로라면 곧 토익 공부를 할 시간이었다. 뒤를 돌자 할아버지가 벽면에 붙은 노란 포스트잇을 가리키며 뭐냐고 물었다. 아침 요가, 식사 시간, 토익 공부 같은 고정된 일정들만 따로 적어둔 크로노덱스였다. 시간표라고 답했다. 바쁜 거냐고 묻길래 고개를 저었다.

  조용하다 했더니 텔레비전엔 아침에 보다 만 ‘다빈치코드’의 톰 행크스가 입을 벌린 채 멈춰 있었다.

  그냥 이거나 틀어놔. 테레비 볼 것도 없다.

  텔레비전 채널로 돌려주기 위해 리모컨을 잡는데, 할아버지가 말했다. 내게 양보하기 위해 매번 하는 말이다. 본가에서는 그래도 내가 리모컨을 잡지 않으면 할아버지가 영화채널로 돌렸다. 할아버지는 나와 취향이 비슷했다. 영화관에 가서 돈을 주고 보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뉴스 볼 때가 아니면 할아버지는 OCN이나 슈퍼액션 같은 채널을 자주 틀어뒀다. 나오는 대로 가리지 않고 봤는데 반응이 좋은 건 언제나 액션이나 스릴러 영화였다. 물론 나는 미스터리 공포를 좋아하고 할아버지는 통쾌한 액션 복수극을 좋아한다는 점이 좀 달랐다. 언젠가 한 번은 할아버지가 텔레비전으로 타란티노의 ‘장고’를 보고 재밌었다며 내게 전화를 건 적도 있었다.

  영화를 처음으로 돌렸다. ‘다빈치코드’는 여주인공 소피의 할아버지가 살해당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피로 쓴 다잉 메시지에 의해 남주인공인 톰 행크스, 랭던이 유력 용의자에 오른다. 경찰인 소피는 다잉 메시지가 랭던이 범인이라는 뜻이 아니라는 걸 알아채고 랭던을 빼돌린다. 두 사람은 할아버지가 죽기 전에 소피에게 알리고자 했던 비밀을 파헤친다. 그들이 탄 차가 경찰들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는 동안 나는 할아버지를 힐끔 살폈다. 할아버지는 벽에 상체를 기댄 채 집중하고 있었다. 주인공들의 차가 대형 화물트럭 사이를 빠져나가자 할아버지가 작게 웃었다. 계속 망설이고 있었던 나는 그 틈을 타 입을 열었다.

  그 할머니 가족들도 알았어?

  모르지. 딸은 눈치는 챘을지 몰라도.

  그럼…… 장례식장엔 갔어?

  갔지. 이튿날 가고, 화장터도 따라갔다 왔다. 화장하는 것까지만 보고 나왔어.

  인사는 했어? 그 할머니한테.

  했지. 생판 남이라 입관은 못 따라 들어갔지만, 사진 보고 속으로 많이 했어.

  고개를 완전히 돌려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할아버지는 여느 때와 같은 덤덤한 표정이었는데, 그 모습이 갑자기 낯설었다. 나를 키운 어른이 나와 같은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새삼스럽게 깨닫는 순간이 있다. 나는 할아버지의 붉어진 귓바퀴부터, 입꼬리에서 턱으로 옅게 잡힌 주름들까지 찬찬히 들여다봤다.

  다시 텔레비전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인공 일행이 가지고 있는 성배를 파괴하려는 악당이 또 다른 사람을 살해하고 있었다. 결말에서 밝혀지는 사실이지만 성배는 머릿돌 같은 물건이 아닌, 예수의 후손인 여주인공 소피 자체다. 그걸 모르는 악당은 성배를 찾기 위해 많은 곳을 훼손하고 많은 사람을 죽인다. 그리고 체포되는 과정에서 총살당한다. 악당은 끝까지 알지 못했지만, 관람객의 눈에는 이토록 명확한 원인과 결과. 현실에도 영화처럼 그런 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또 시진을 떠올렸다. 지쳤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올리던 마지막 모습.

  먼저 헤어짐을 고한 건 나였다. 여러 번 입을 벙긋거리며 망설이는 시진이 두려웠다. 이별 선고라고 생각했다. 정작 내 통보에 시진은 황당해했다. 그러면서도 거부하진 않았고 결과적으로 우리는 이별했다. 그때 시진의 대답은 기억나지 않는다.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고 나를 빤히 보던 그 눈빛만 선명했다. 헤어질 생각은 없었지만, 네가 헤어지자고 하니까 그래, 그러자. 그런 말을 읽은 듯 했다. 시진이 나와 끝을 결심했던 순간은 언제였을까. 우리에게도, 명확한 원인과 결과가 있었을까.

  할아버지.

  응?

  나도 헤어졌다, 애인이랑.

  사귀는 사람이 있었어?

  나도 뭐가 자랑인가 싶어서 말 안 했지.

  내가 먼저 웃었고 할아버지도 웃었다. 그 뒤로는 말없이 영화만 봤다. 나는 이해할 수 없는 포인트, 특히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구르는 장면에서 할아버지는 웃음을 터트렸다. 복수하고 싶은 사람이라도 있나.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총구 앞에서 톰 행크스가 크립택스를 푸는 동안 나는 수납장에 기대어 놓은 할아버지의 회색 가방을 끌어왔다. 지퍼를 열자 안전화 밑창이 보였다. 안전화를 꺼내자 망치, 못이 든 주머니, 토시, 심지어 시디처럼 생긴 작은 그라인더 날도 있었다. 그리고 빨간색 체크무늬 셔츠도. 애인의 장지에서 사람들 사이에 섞이지 못한 채 홀로 서 있었을 할아버지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남들 눈을 많이 의식하는 할아버지가 그랬을 리 없지만, 내 상상 속의 할아버지는 이 옷을 입고 있다.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 속에서 홀로 빨간 체크무늬 셔츠를 입고 동떨어진 곳에 서 있는 할아버지. 무덤까지는 따라가지 못하고 장지를 나오면서 할아버지는 그때 무슨 기분이었을까. 꺼냈던 연장들을 순서대로 다시 집어넣었다. 마지막으로 안전화를 뒤집어 넣고 지퍼를 잠갔다.

  영화는 막바지에 다다랐다. 소피의 정체가 밝혀졌다. 소피가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톰 행크스는 밖에 혼자 앉아 있었다. 아침에 보다 만 장면이었다. 다시 할아버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후손이 믿음을 없애버릴까요? 아님 새롭게 할까요? 당신의 믿음이 가장 중요해요. 톰 행크스가 소피에게 말한다. 소피는 가타부타하지 않고 여기에 데려다줘서 고맙다고만 답한다. 둘은 웃으면서 그렇게 헤어진다.

  저 여자는 괜찮을까.

  톰 행크스가 마지막 비밀을 파헤치는 장면을 보면서 내가 말했다.

  안 괜찮아도 뭐 어쩌겄어. 괜찮아질 때까지 그냥 살아야지.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까지 말이 없던 할아버지가 대답했다.

  주황색 18시

  하룻밤 자고 가라고 했는데도 할아버지는 집에 가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날 방해하기 싫다는 게 이유였다. 벽에 붙여둔 포스트잇이 신경 쓰이는 눈치였다. 이럴 땐 괜찮다고 말해도 소용이 없어서 휴대폰으로 무궁화호를 예매했다. 경로 우대권. 곧 시진이 퇴근할 시간이었다.

  집 앞에 있는 제이 식자재 마트에서 돌나물을 사 왔다. 냉동고에 얼려둔 간장 불고기를 전자레인지에 돌려 해동하고 양파를 넣어 대충 볶았다. 밥통에 밥이 없어서 몇 개 안 남은 햇반을 뜯어 할아버지와 저녁을 먹었다.

  예매한 기차는 오후 7시 50분 차였다. 설거지를 하고 나니 한 시간 반 정도 여유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벌써 외투를 입고 있었다. 늦는 것보다 빨리 가서 기다리는 게 낫다며 계속 시계를 봤다. 버스 타고 가면 금방이라 했더니 혼자 걸어가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패딩을 꺼내 입었다.

  밖은 이미 어둑했다. 머리 바로 위의 하늘은 군청색이었지만, 흔적처럼 한 줄 남은 주황빛 노을이 저 멀리서 점차 흐려지고 있었다. 갈림길의 중고서점은 아직도 공사 중이었다. 가까이 갈수록 핸드 그라인더 소리가 커졌다. 아까와는 다른 인부가 환하게 밝힌 가게 조명에 의지하며 기다란 철재를 자르고 있었다. 왼 다리로 철재를 밟고 앉아 천천히 그라인더를 움직인다. 인부의 몸쪽을 향해 불티가 일직선으로 튀었다. 낮에 봤던 것보다 선명해서 불꽃놀이처럼 보였다. 한쪽 면을 다 자르고 철재를 돌리던 인부가 제 소매를 잡고 확인했다. 파편이 튀었는지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작게 욕설을 읊조리던 인부는 툭툭 털고 마저 절단 작업을 이어갔다.

  할아버지, 아까 말한 그 작업복 있잖아. 저거 하다가 많이 그슬렸다는 옷. 그거 버렸어?

  안 버렸지. 어차피 작업하면 또 그슬리는디.

  우리는 강변으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낮보다는 사람이 많았다. 빠르게 달리는 자전거를 피해 할아버지와 팔짱을 끼고 걸었다.

  기차역과 가까워질수록 많아지는 상가 불빛에 강변이 점차 밝아졌다. 나는 강기슭을 내려다봤다. 겨울에는 조금 느리게 흐르던 강물이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오늘도 시진은 이 길을 걸었을까? 시진의 방과 내 자취방은 반대 방향에 있었다. 그럼 이제 퇴근 후의 시진은 이 강변을 걷지 않는 걸까. 점심시간은 몰라도, 퇴근 후에는 그럴 확률이 높았다. 나는 메고 있던 가방을 추켜올렸다. 연장이 부딪히며 달그락거렸다.

  분홍색 19:30분

  자동발매기는 매표소 옆에 있었다. 지나가면서 창구 안을 살폈다. 시진은 없었다.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났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무료한 표정의 직원과 눈이 마주쳤다. 곧바로 고개를 돌리고 자동발매기로 향했다. 예약번호를 누르고 우대권을 뽑아 할아버지에게 건네는데 누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조금 전 눈이 마주쳤던 그 직원이었다.

  시진 씨 여자 친구 맞으시죠?

  아…… 왜요?

  우시진 씨가 물건을 안 챙겨 가서요. 근데 연락이 안 돼서, 대신 좀 가져가실래요?

  내일 주면 되지 않나요?

  며칠 전에 퇴직했어요.

  퇴직이라니. 뜬금없는 소식이었다. 목표 금액을 다 모아 통번역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한 걸까. 아님 다른 사정이 있었던 걸까. 내가 말을 잇지 못하자 직원이 난처한 얼굴을 했다.

  중요한 물건들은 아닌 것 같던데 그래도 그냥 버리기 좀 그래서요. 사진도 있고.

  놓고 간 게 뭔데요?

  몇 개 없긴 해요. 볼펜이랑 수분크림, 사진…… 그런 것들요.

  그냥 버려주세요.

  그렇게 대답하고 등을 돌렸다. 뒤에서 직원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매표소에 앉아 이동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불안해진다고 말하던 시진의 얼굴과 우리의 마지막 순간이 동시에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한참을 망설이다 끝내 꺼내지 못한 말. 그때 시진은 다른 이야기를 하려 했던 걸지도 모른다. 앞으로의 계획을 공유하려 했던 걸지도. 시진은 어디로 갔을까. 원하던 대로 홀가분하게 떠났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아마도 내가 아침마다 크로노덱스를 그리는 이유와 비슷한 사정일 거란 직감이 들었다. 19:30분 알람이 울렸다.

  뒤따라온 할아버지가 내 어깨에서 가방을 끌어 내렸다. 어깨가 뻐근하게 아팠다. 양팔을 들어 가볍게 돌렸다. 가방을 멘 할아버지가 내 등을 작게 토닥였다.

  아직 시간이 남아서 좀 기다려야 했다. 무궁화호 2번 탑승구 앞에 앉았다. 계단 바로 앞에 있는 5, 6번 탑승구와 달리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할아버지는 앉아만 있으면 무릎이 아프다며 내가 앉은 벤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가만히 있자 추워서 몸이 떨리길래 나도 일어나서 함께 돌았다.

  희미하게 경적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무궁화호가 들어오고 있었다. 


 

  <당선소감>

 

   할아버지가 내게 베푼 애정, 이번엔 소설이 내게 베풀어

  몇 년 전까지도 LPG 가스통으로 온수를 뽑아 썼던 본가가 생각났다. 겨울이었고, 샴푸칠을 하던 중 가스가 끊겼다. 물에 젖은 채 외출 중이던 할아버지께 전화를 했다. 대충 씻고 나와. 그 말에 버럭 짜증을 내며 찬물로 거품만 씻고 나왔다. 이불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는데, 창밖에서 도르륵 도르륵 가스통 굴리는 소리가 났다. 할아버지가 창문 앞에 서 있었다. 이제 다시 씻어. 그렇게 말하고 할아버지는 다시 볼일을 보러 나갔다.

  할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위대한 유산〉의 조를 떠올리고는 했다. 조가 핍에게 베풀던 무기력한 애정이 당신이 내게 주는 애정과 닮아 있어서. 애정을 받아본 경험이 적어, 방법이 서툰 사람의 애정을 받고 자란 자녀에게는 필연적으로 죄의식이 동반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는 했는데.

  글에 할아버지를 등장시킨 건 이번이 처음이다. 나의 기반을 만들고 기꺼이 내 죄의식의 핑계가 되어준 할아버지. 당신이 내게 베푼 애정만큼 이번엔 소설이 내게 애정을 베풀었다고 생각한다.

  어쩌겄어, 그려도 해야지.

  당신의 말버릇. 가끔은 정말 듣기 싫었던 그 말이 내 발판이 되었다. 그래도 해야지. 앞으로도 그렇게 글을 쓰겠다.

  감사한 분들이 많다. 부산일보, 김수진 교수님, 김태수 교수님, 동기들, 그리고 할아버지와 삼촌, 내 가족들. 모두에게 감사를 전한다.

● 1998년 전북 전주시 출생
● 현재 단국대 문예창작과 재학 중
● 본명 양효린.


 

  <심사평>

 

  감동적인 울림과 화자의 절제된 감정 등 여러 미덕 갖춰

  예심위원들이 고투 끝에 본심으로 넘긴 작품은 모두 7편이다. 모두 개성적인 빛을 발하고 있지만, 최종적으로 ‘유영’과 ‘알 수 없지만’ 두 편을 두고 오래 토론하였다. ‘유영’의 경우 고향에 머물러도 자유롭다는 인물과 자유를 찾아 고향을 떠나려는 인물의 대비가 서사의 긴장을 형성한다. 청계리에만 비가 오지 않는다는 예외적 상황과 말라붙은 저수지의 횡단 장면은 이런 긴장을 탄력적으로 만드는 상징적 장치로 보인다. 단편소설의 미적 본질에 대한 고민이 엿보이지만, 상징적 장치와 작중 인물들의 내적 동기 사이의 연관이 긴밀하지 못한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알 수 없지만’은 남루하고 구차한 삶을 살아 내야 하는 사람들의 애잔한 하루를 담아낸다. 아르바이트 자리조차 잃어버린 여성 화자는 무기력한 나날을 벗어나기 위해 시간표를 짜서 체계적으로 생활하고자 한다. 그러나 삶은 일정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시간표라는 외형 때문에 극적인 사건은 전개되지 않지만, 죽은 애인의 손길이 닿은 셔츠를 간직한 할아버지와 헤어진 연인의 생각을 떨치지 못하는 손녀가 함께 영화를 보고 있는 장면은 이 소설의 압권이라 할 만하다. 이 장면은 할아버지의 애처로운 모습을 바라보는 손녀의 웅숭깊은 시선과 함께 독자의 마음에 큰 울림을 남길 듯하다. 더불어 화자의 절제된 감정, 삽화와 소품의 적절한 배치 등 여러 미덕을 갖추었기에, 우리 심사위원은 ‘알 수 없지만’을 당선작으로 선정한다.

심사위원 : 정찬, 황국명, 나여경, 이정임, 배길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