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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퍼레이드를 기다리는 시간 / 유영은

 

  주말에 디즈니랜드의 퍼레이드에서 조안의 영혼을 본 것 같다고 말했더니, 엄마가 너는 거기까지 가서 술을 얼마나 퍼마신 거냐고 물었다. 미키 귀가 달린 귀여운 컵에 생맥주를 팔길래 딱 한 잔만 마셨다고 하니 주정뱅이 말은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핀잔이 돌아왔다. 너희 언니가 리지랑 있을 때는 절대 마시지 말라고 하지 않았니?

  언니가 리지랑 있을 때만은 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한 사항은 음주 외에도 많았다. 욕하지 마라, 에이씨 소리도 안 된다, 소리 지르지 마라, 인상 쓰지 마라, 업어주지 마라, 칭얼거림의 전부를 받아 주지 마라. 리지 담임 선생님에게 전화가 걸려올 때마다 언니는 가족 단톡방에 당부의 말을 장문의 카톡으로 올렸다. 엄마, 주희야, 항상 고맙고 미안한데, 하며 시작하는 카톡이었다. 맞아, 언니가 마시지 말라고 그랬지. 그렇지만 엄마, 맨정신에 남의 집 애를 어떻게 봐. 나는 술을 마시면 리지가 내 딸 같고 그래.

  언니도 리지가 자기 딸이 아니라 내 딸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고 했다. 언니는 리지 앞에서 화를 낸 적이 없고, 삼 년 전 헤어져 양육비만 보낼 뿐 이제는 무슨 행사 날이나 그것도 아니면 애 생일 때나 되어야 저도 아빠랍시고 슬금슬금 전화를 걸어오는 리지 아빠도 그 부분에서만큼은 결백하다면서. 둘 다 애 앞에서는 웬만하면 조심하면서 큰소리 낸 적 없는데 그 분노가 대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겠다고 하며 언니는 나를 쳐다봤다. 소리 지르는 사람은 이 세상에 차고 넘쳤는데, 왜 리지가 날 닮아 그렇다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언니에게 그렇게 따지려다가 그만두었다. 리지가 아이패드를 집어 던지며 악을 쓰는 모습이 꼭 나를 보는 것 같아 고개를 돌려버렸던 어느 날 저녁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렇게 애 챙기기 힘들면 리지는 나랑 있게 두고 너 혼자 다녀오라니까.

  엄마는 그날 마치 내게 리지를 봐주겠다는 제안이라도 했던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오만 원짜리를 고 조막만 한 손에 쥐여 주며 이걸로 하루 치의 추억을 사 오라던 건 엄마였다. 엄마, 오만 원으로 하루 치를 어떻게 사, 반나절 치도 못 사. 나는 엄마에게 눈을 흘기며 리지의 손에 들려 있던 지폐에 자연스럽게 손을 뻗었다.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이모가 보관만 할게, 알았지? 지폐는 리지의 손에서 수월하게 스르르 벗어나는 듯했으나 마지막 순간에 끝자락이 붙잡히고 말았다. 그래 봤자 아홉 살짜리의 힘이었다. 지폐가 내 손에 들어오고 난 후 리지는 빈손을 오므려 허공을 잡았을 뿐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

  먼 곳으로 놀러 간다는 생각에 신나서 돈 따위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었을 수도 있다. 디즈니랜드를 싫어하는 어린애가 어딨겠어? 그날 아침, 같이 놀이동산을 가겠냐는 제안에 리지는 너무너무 좋아! 라고 외치곤 내 허리 부근을 꽉 안았다. 나는 리지의 정수리에 손을 가만히 가져다 댔다. 뜨끈하고 작고 부드러운 리지. 그 애는 화를 낼 때만 아니면 그토록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사실 그날의 디즈니랜드행은 리지가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었다.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개장이었다. 한국에 디즈니랜드가 들어선다는 이야기는 내가 스무 살 즈음, 그러니까 약 십오 년 전부터 나왔는데 디즈니 측에서 부지를 구입하기까지 한세월이 걸렸고, 공사를 시작한 이후에도 사소한 자재 운반 실수부터 사망 사고까지 연이어 발생하는 바람에 머리끄덩이가 붙잡혀 멈춰 선 것도 벌써 몇 번이었다. 일 년여 전 마침내 개장을 코앞에 두게 되었으나 시범 운영 기간에 또 사망 사고가 일어났다. 듣기로는 기술팀 직원이 안전점검 중에 알라딘 양탄자에서 떨어졌다고도 하고, 본사 측 경영진이 덤보 귀에 매달려 있다가 떨어졌다고도 하고, 퍼레이드 연습을 하던 웬디 배우가 피터팬과 구름 위를 날다가 떨어졌다고도 하는데 정확한 경위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아무튼 누가 어디서 떨어지기는 한 것 같았다. 손 있는 날에 공사를 강행한 탓이라고 했다. 그쪽 터가 안 좋기로 유명한데 부지를 정하고 고사나 굿 한 번 안 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연유야 어찌 됐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곳, 가장 마법 같은 곳에 죽음 내지는 추락의 이미지가 드리워진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연이은 불행이 찾아온 그곳을 가족 나들이 장소로 선택할 사람은 없었고 개장은 또 연기됐다.

  몇 번이나 조정된 개장일이 다가오자 이미지 탈피를 위해서인지, 어떻게든 방문객을 유치하기 위해서인지 디즈니랜드 측에서는 3D 홀로그램이라는 신기술을 활용한 퍼레이드에 초점을 맞춰 온 사방에 광고를 뿌렸다. 사람이 코스튬을 입고 연기하는 퍼레이드가 아닌, 애니메이션 속 인물의 3D 영상을 공중에 쏴서 진행하는 퍼레이드였다. 꾸밈없는 세상, 단 한 톨의 거짓도 없이 완벽히 진실한 마법과 행복의 세상! 인스타그램 피드의 스크롤을 내리는데 디즈니랜드의 광고 문구가 나를 멈춰 세웠다. 문구 뒤로는 밤의 디즈니 캐슬이 화려하게 빛나고 그 뒤로는 컴퓨터 그래픽일 것이 분명한 폭죽이 펑, 펑 터지고 있었다.

  수십 가지 색으로 빛났다가 사라지는 폭죽을 보면서 그곳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디즈니가 좋았다. 어릴 때 인어공주와 백한 마리 강아지를 비디오테이프가 늘어날 때까지 수십 번 돌려보고, 중고등학교 때는 디즈니 캐릭터가 그려진 펜과 노트를 사 모았다. 해외 주식 계좌를 처음 개설했을 때 가장 먼저 매수한 것도 디즈니 주식이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나를 사로잡았던 건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온통 진실뿐이라는 문구였다. 내가 오래전 떠나온 인물들이 수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대로, 진실한 모습으로 남아있는 것을 직접 보고 싶었다.

  그날 오후 외삼촌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엄마에게 조안의 영혼을 봤다고 말한 지 두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엄마가 내 말을 아주 헛소리로 듣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조안이 디즈니랜드에서 일한다며? 네가 퍼레이드에서 봤다며? 사실이야?

  여보세요 소리가 그쪽까지 채 닿기도 전에 삼촌은 질문을 쏟아냈다. 퍼레이드에서 조안이 무슨 역할을 맡았냐고, 정확히 뭘 하고 있었냐고 다그쳐 물었다. 내가 본 건 조안이 아니라 조안의 영혼이었는데…. 삼촌에게까지 주정뱅이 소리를 들을까 봐 그 말은 삼켰다.

  퍼레이드에서 무슨 역할을 맡은 사람은 없었다. 아무도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연기하지 않았다. 백설공주는 백설공주였고, 인어공주는 인어공주, 안나는 안나, 올라프는 올라프, 알라딘은 알라딘이었다. 조안도 조안이었다. 각자의 세계에서 분투하다가 결국 행복한 결말을 맞게 되는 인물들 사이에서 조안이 정확히 뭘 하고 있었는지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조안은 그냥 서 있었다.

  조안이 있던 곳은 알라딘 섹션이었다. 퍼레이드에서는 공원 부지가 만화별 섹션으로 구획되었고, 각 섹션에서는 해당하는 만화 인물의 3D 영상이 상영되었다. 알라딘 섹션은 부지 북서쪽 끝에 위치한 작은 알라딘 테마존이었다. 테마존이라고 해봤자 모래로 쌓은 듯한, 그러나 사실은 시멘트로 올린, 금색과 파란색의 둥근 지붕이 얹힌 성이 몇 채, 그리고 포토월이 전부였다. 퍼레이드가 시작되자 그나마 있던 소수의 관람객은 새파란 조명의 겨울 왕국 섹션이나 머리칼이 길게 내려온 높은 탑이 있는 라푼젤 섹션으로 몰렸다. 알라딘 섹션에는 나와 리지밖에 없었다. 조안을 발견한 건 퍼레이드가 꽤 진행되고 나서였다. 조안은 양 주먹을 꽉 쥐고 곧은 자세로 서 있었다.

  삼촌의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까? 조안은 단지 서 있기만 했다고? 그러나 삼촌은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당장에 디즈니랜드에 가야겠다고 했다. 조안을 찾아내야 한다고.

  삼촌은 작년 이맘때 엄마에게서 엄마 교회 친구인 조안을 소개받았다. 둘은 한 번은 엄마와 함께, 그다음에는 단둘이 식사 자리를 가졌고, 두 번째 식사 후 삼촌은 조안을 멋지고 좋은 친구라고 평했다. 낭만과 비전을 동시에 갖춘 사람. 우리 나이에 그런 사람 흔하지 않지.

  엄마는 처음부터 연애 상대가 아니라 친구로 조안을 삼촌에게 소개해 줬다고 했지만, 혹시 잘되면 또 누가 아니, 그런 말을 덧붙였다. 삼촌은 적지 않은 나이에 미혼이었고 엄마는 늙은 남자의 독신 생활은 남 보기 부끄러운 것이라 했다. 조안은 한국 나이로 쉰이었고 삼촌은 엄마보다 여덟 살이 어리니 쉰넷이었다. 궁합도 안 보는 나이 차 아니니? 엄마는 기대에 부풀었다.

  그러나 그 교회에서 조안을 그런 식으로 탐내는 사람은 엄마 외에도 많았다. 누구나 조안을 좋아했고 더 긴밀히 엮이고자 했다. 나도 조안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그날 엄마는 교회 친구들과의 저녁 식사 자리에 나를 불러냈는데 조안이 그 자리에 있었다. 참깨 샐러드, 죽, 전, 비빔밥이 간단히 코스로 나오는 한식집이었고 고즈넉한 분위기, 합리적인 가격에 소화가 아주 잘된다고 김 집사님이 강력 추천한 곳이었다.

  내가 식당에 들어갔을 때 김 집사님은 맞은편에 앉은 조안에게 무슨 이야기인가 하고 있었다. 분위기를 봐서는 조언을 구하는 듯했다. 김 집사님은 식탁의 절반을 넘어설 정도로 상체를 앞으로 바짝 기울이고 있었고, 조안은 양손을 식탁 위에 포개어 올리고 등을 의자에 붙여 정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날 식사 내내 조안은 비슷한 자세를 유지했다. 어려운 한국어도 전부 알아듣는 낌새로 봐서는 한국어가 유창할 듯한데 집사님, 권사님, 언니, 하는 호칭을 제외하고는 웬만해선 한국어를 쓰지 않았다. 영어 학원을 운영하는 최 원장님과 대화할 때는 그렇다 치고 옆자리 박 권사님에게도 영어로만 말했다. 몇 년 전까지 이태원에서 약국을 했던 덕에 웬만한 소통은 단어로 어떻게 해본다고 해도 문장을 듣거나 말하기 위해서는 잔뜩 긴장해야 했던 박 권사님은 시시때때로 최 원장님을 쳐다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고 다시 조안을 바라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조안이 괜찮은 투자처라며 필리핀의 모 스타트업을 추천했고 교회의 많은 신도에게 약 이백만 원씩을 받아냈다는 것을 나는 모든 상황이 끝나고 나서야 들었다. 안타깝게도 박 권사님은 이백이 아니라 삼백을 투자했다는 이야기를 엄마에게 전해 듣고 나는 그때 식사 자리에서의 박 권사님 표정을 떠올렸다. 조안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돈을 들고 난 거지. 엄마는 당연한 수순이라고, 진작에 몰랐던 내가 잘못이라고 말하면서도 하루 동안은 멍하니 공중만 바라봤다.

  이백만 원이 아까워서는 아니고 조안의 웃음소리와 언니, 하는 그 살가운 목소리가 계속 생각났다고 한다.

  삼촌은 디즈니랜드에 가려고 휴무까지 냈다. 내가 삼촌 집에 여덟 시쯤 도착하면 아침을 먹고 아홉 시쯤 출발하면 되겠다고 삼촌은 일정을 통보했다. 그러나 전날 저녁에 엄마가 동태찌개를 끓여줬고 또 시원한 국물에 한잔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한잔하다 보니 두 잔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엄마는 새벽에 화장실을 가려고 일어났다가 그때까지 식탁에 앉아 다 식어버린 찌개를 앞에 두고 맥주잔에 소주를 따라 마시고 있는 나를 보고선 사탄이라도 본 듯 오, 주여, 하곤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여덟 시쯤이라고 했으니까 여기서 여덟 시에 출발하면 되겠지, 하면서 잠들었는데 일어나보니 오후 두 시였다. 삼촌에게 헐레벌떡 전화하니 너 그럴 줄 알았단다. 지금이라도 오라기에 대충 씻고 삼촌 집에 갔고 디즈니랜드 주차장에 차를 주차했을 때는 오후 네 시를 약간 넘긴 시각이었다. 입구까지 걸어가는데 숙취 때문인지 초가을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오는데도 땀이 삐질삐질 났다. 삼촌은 잠깐 제자리에 멈춰서 땀을 닦으려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너는 좀 애가 이상해졌다고 말했다.

  네가 약속 시각에 늦는 애가 아니었어, 원래.

  엄마는 출산 예정일 전날에 진통을 시작해서 그날 자정경에 나를 낳았다. 약속한 시각에 딱 맞춰 나온 거지. 처음 시작부터. 삼촌은 이 이야기를 전에도 수십 번 했다. 애가 나왔다는 전화를 받고 벽시계를 쳐다봤는데 시침과 분침이 숫자 십이 부근에 함께 다소곳이 포개져 있었다고. 삼촌은 얘가 뭐가 돼도 될 애구나 싶어서 머리칼이 쭈뼛 섰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주 늦는 게 일상이야, 일상. 삼촌은 그렇게 말하곤 손목시계를 쳐다봤다.

  언제 이렇게 변했지?

삼촌은 그 질문도 전에 수십 번 했다. 너 저번에는 아주 작았는데 언제 이렇게 자랐지? 구구단 사단도 못 외웠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컸지? 내가 놀리면 울기만 했었는데 언제 이렇게 소리를 지를 수 있게 됐지?

  예전에는 삼촌의 질문이 의아했다. 언제 이렇게 변했냐고? 시간이 가면서 변했지 뭐. 삼촌과 나는 같은 시간을 살고 있는데 마치 내 시간만 흐른 것처럼 삼촌은 물었다. 그러나 아이패드를 붙잡고 있는 리지의 뒤통수를 가만히 바라보다 보면 그 질문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리지와 같은 공간에 있어도 리지와 나의 시간은 다르게 흘렀다. 시간의 흐름이 뒤틀리거나 어느 한구석이 잔뜩 구겨진 것만 같았다.

  주차장에도 빈자리가 많다 했더니, 입구 부근에도 사람이 없었다. 공원 안쪽에서는 여기저기서 깔아 놓은 듯한 배경음악 여러 곡이 겹쳐져 들렸고 놀이기구가 작동하며 내는 기계음도 심심찮게 밖으로 새어 나왔지만, 사람들의 웃음소리나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매표소 투명 창에 얼굴을 들이미니 곰돌이 푸 얼굴이 대롱대롱 달린 머리띠를 한 매표소 직원이 무표정으로 있다가 해사하게 웃으며 반겼다. 꿈과 희망, 환상의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그렇지만 지금 입장권을 사는 건 추천드리지 않는다고, 지금 사면 종일권을 사야 하고, 다섯 시부터는 야간권을 살 수 있다고 했다.

  야간 입장권이 훨씬 저렴한데, 어떻게 하시겠어요?

  직원이 머리띠 위의 푸와 같은 미소로 물었다. 한 시간이나 남았으니 그냥 종일권을 달라고 했다. 어서 들어가서 조안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집에 가서 눕고 싶었다. 그러나 삼촌이 내 어깨를 두 번 두드리며 한 시간밖에 안 남았으니 근처 벤치에 잠깐 앉아 있다가 야간권을 사자고 했다. 결국 직원에게 야간권을 사겠다고 번복하고 돌아서려 하는데 삼촌이 내 어깨를 다시 두드리곤 물어봐, 물어봐, 했다.

  저기…, 사람을 좀 찾는데요.

  혹시 조안이라는 사람이 여기서 일하지 않느냐고 물으니 푸 직원이 갸우뚱하며 옆자리에 턱을 괴고 앉은 피글렛 머리띠를 한 직원을 불렀다.

  니모라는 직원을 찾는다는데 혹시 알아?

  피글렛 직원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직원이 고갯짓할 때마다 피글렛의 얼굴이 양옆으로 미세하게 흔들렸다. 니모가 아니라 조안이요, 조안, 하며 삼촌이 나를 옆으로 살짝 밀치곤 창구 가까이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피글렛 직원은 삼촌을 힐끔 보며 처음 들어보는데, 했다.

  안에 들어가서 물어보셔야 할 것 같아요.

  푸 직원이 그러면 종일 입장권으로 도와드리면 되겠냐고 다시 물었다. 삼촌을 쳐다보니 삼촌은 아뇨, 한 시간 뒤에 다시 오겠다고 말하곤 먼저 잔디밭 앞의 벤치 쪽으로 걸어갔다. 벤치 한쪽에는 이미 어린아이만 한 미키 동상이 앉아 있어서 삼촌이 앉고 나자 내가 앉을 자리가 없었다. 삼촌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괜히 왔나 싶지?

  삼촌은 대답 없이 다리만 달달달 떨었다. 이번 디즈니랜드행은 삼촌 주도하에 이루어졌고, 나는 가자는 말을 맹세코 꺼내지 않았으나 여기에 의미 없이 앉아 있는 것도 어쩐지 내 탓인 것 같았다. 내 말을 헛소리로 듣지 않은 엄마를 잠깐 탓하기도 했다.

  오전에 가을비라도 내렸는지 뒤쪽 잔디밭에서 풀냄새가 기분 좋게 불어왔다. 벤치가 축축하지는 않은가? 공원 내에서 새어 나오는 복잡한 배경 음악과 기계 소리, 삼촌의 신발 뒤꿈치가 시멘트 바닥에 탁탁탁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삼촌에게 무슨 말이라도 붙여야 할 것 같아 하늘을 쳐다봤다. 어디 특이한 구름 없나. 미키마우스 모양이면 딱인데. 그렇지만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삼촌은 대체 얼마를 투자한 거야?

  정확히 백오십이라고 했다. 그래도 많이는 안 줬네. 나는 박 권사님 이야기를 전했다. 권사님은 삼백 했대, 삼백. 삼촌은 운이 좋았던 거라고 말해줬다. 그러나 삼촌은 돈이 문제가 아니라고, 조안이 다른 것도, 더 중요한 것도 가져갔다고 했다.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그 씨발년이.

  삼촌은 조안이 아주 씨발년이라고 했다. 그런 년이랑은 처음부터 상종해서도 안 됐는데. 삼촌이 점잖은 사람이야 아니지만, 삼촌의 입에서 그런 노골적인 욕이 나오리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당황해서 허허, 하는 어색한 웃음이 나왔다. 곧이어 내 웃음소리에 기분이 나빠졌다.

  대체 조안이 뭘 가져갔길래 그렇게 화가 났냐고 묻자 삼촌은 카세트테이프라고 답했다. 마음을 가져갔다는 촌스러운 답변이 나올까 걱정했던 나는 비슷하게 오래 묵은 단어를 듣게 되어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오래된 테이프라 재생할 수가 없었는데 조안이 괜찮은 기술자를 알아서 다시 들을 수 있게 만들어 준다고 했단다. 무슨 테이프였냐고 묻자 대학 시절 동아리 친구들과 함께 노래를 녹음한 테이프라고 했다. 나라면 백오십만 원을 가져간 것에 더 분했을 거였다. 그러나 삼촌에게 그렇게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소중한 추억인가 보네, 하고 동조하자 삼촌은 그 테이프의 가치에 비하면 소중한 추억이라는 말은 너무 가벼운 표현이라고 했다.

  어쨌든 조안이 삼촌한테만 씨발년인 것은 아니었다. 조안이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 후, 그래, 비싼 수업료 내고 좋은 거 배웠다 치자는 사람도 있었지만, 속에서 울렁대는 배신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마구잡이로 토해내는 사람이 더 많았다. 김 집사님은 조안을 그 되먹지도 못한 년이라고 불렀고, 예의와 교양을 중요시하는 문 권사님도 그 계집애 그럴 줄 알았다고, 외국년들은 하나같이 믿을 수가 없다 했다.

  그전에는 모두들 조안을 선생이라고 불렀다. 조안 선생님. 정확한 호칭이었다. 조안은 선생님이 맞았다. 엄마와 같은 교회의 최 원장님이 운영하는 아이들 영어 회화 학원에서 일했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두 번 오십 분씩, 수강료는 원어민이 이십오만 원, 한국인 유학파는 이십만 원, 필리핀인은 십팔만 원이었다. 리지를 등록할까 고려했던 학원이었다. 영어 유치원에 돈을 퍼부은 보람도 없이 초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리지의 영어 발음은 빠르게 무너졌다. 리지는 더 이상 ‘월드’를 발음하지 못했다. 유치원 때보다 혀가 길어져서 그런가, 하던 언니도 리지야 너는 어떤 맛이 제일 좋니, 묻자 스, 위, 트라고 정확하게 발음하는 리지를 보고 조바심이 났고 사교육의 도움을 받아야겠다고 선언했다. 비용 부담 때문에 과외가 아니라 학원을 찾아보던 와중에 리지 친한 반 친구가 다닌다길래 리지도 보내는 게 어떨까, 친구도 있으니까 적응도 어렵지 않겠다 싶어 언니 대신 최 원장님한테 상담을 받은 적이 있었다. 최 원장님은 우리 예쁜 리지니까 처음 삼 개월간은 특별히 삼만 원을 할인해 주겠다고 했다. 언니는 그 호의가 불편해 리지를 다른 학원에 보냈다.

  언니의 바람과는 다르게 리지는 영어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주말에 퍼레이드에서도 나는 리지에게 영어를 시켜보려 했다. 알라딘 주제곡 ‘어 홀 뉴 월드’의 한국어 버전이 흘러나오고 있을 때였다. 회화학원에 다니기 시작한 지도 석 달이 넘었다. 이제 다시 월드를 유창하게 발음할 수 있게 되었으리라 기대하고 나는 리지에게 물었다.

  리지야, 너 이 노래 영어로 들어봤지? 응? 어 홀 뉴 월드! 응?

  리지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자꾸 저기 저쪽, 얼음으로 계단을 만들고 있는 엘사에게 가자고 했다. 그놈의 엘사. 엘사의 얼음 성은 여기서 이백 미터는 더 걸어야 했다. 맥주 기운이 올라 다리가 무거웠다. 더는 한 발짝도 걸을 수 없었다. 리지에게 이 노래만 끝나면 엘사든 안나든 보러 가자고 했다. 아직 시간이 많다고.

  어릴 적 본 알라딘 만화는 분명 더빙판이었던 것 같은데 어 홀 뉴 월드의 한국어 버전은 들은 기억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한국어 노래의 제목은 뭐였지? 가사를 들어보려고 해도 음악이 설치물 여기저기에 부딪쳐 울리는 바람에 내용이 명확히 들리지 않았다. 세상이 아름답다는 이야기만 간헐적으로 들리고 뭐가 신비하다 어쨌다 하는 거 같은데 익숙한 멜로디에 낯선 가사를 들으려니 더 어려웠다.

  그리고 그때 조안을 봤었는데…. 조안이, 아니 조안의 영혼이 아직도 저 안에 있을까? 삼촌은 긴장한 건지, 초조한 건지, 화가 난 건지, 굳은 표정으로 여전히 다리를 떨고 있었다. 나도 덩달아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조안이 저 안에 반드시 있어야 했다.

  놀이공원은 역시나 한산했다. 운영 중인 놀이기구에도 대기 줄이 없었다. 군데군데 아이를 동반한 가족들의 발걸음도 슬렁슬렁 편하고 느렸다. 오늘은 평일이라 그렇다 치고 주말에 왔을 때도 한적하다 못해 쓸쓸하다 느꼈는데 이 많은 기계를 돌리는 돈은 어디에서 충당하는지 쓸데없는 걱정도 해봤다.

  삼촌은 일단 직원에게 사무소가 어딘지 물어볼 테니 여기 잠깐 있으라고 하며 나를 내버려 두고 저기 가판대 쪽으로 달려갔다. 나는 덤보 여러 마리가 기계 팔에 매달려 원을 그리며 하늘을 나는 놀이기구 옆에 혼자 덩그러니 서 있었다. 어릴 때도 삼촌과 놀이공원에 왔었다. 삼촌은 시시해서 안 타겠다는 나를 놀이기구에 억지로 태웠다. 정작 자기는 타지도 않았다. 사실은 시시한 게 아니고 무서웠다. 삼촌도 내 마음을 눈치챘을지 모른다. 레볼루션이었는지, 혜성특급이었는지,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삼촌의 등쌀에 밀려 타게 된 그 놀이기구에서 나는 심장이 배까지 철렁 몇 번이고 내려앉았다. 기구에서 내리니 바닥이 물렁거리고 천장이 뱅글뱅글 돌았다. 삼촌은 출구에서 나를 반겼다. 어때? 기분이 이상하지? 그게 재밌는 기분이야!

  그 뒤로도 놀이기구를 즐기는 어린이는 되지 못했으나 목 깊은 곳이 간지럽고 심장이 급하게 뛸 때마다 생각했다. 이건 재밌는 기분이야! 돌아보면 삼촌에게 배운 것이 많았다. 처음 친구와 싸웠을 때도, 처음 연애를 할 때도, 처음 집을 구할 때도 삼촌은 진부하지만 나름 유용한 조언을 해줬다.

  사무소 위치를 물어보러 갔던 삼촌이 저 멀리서 씩씩거리며 빠른 걸음으로 돌아왔다. 직원에게 사람을 찾는다고, 사무소가 어딘지 물으니 직원은 아이를 잃어버리신 거냐고 걱정하며 아이 이름과 인상착의를 물었다고 한다. 무전으로 전달해서 공원 전체에 방송을 할 수 있다면서. 아이가 아니라 조안이라는 필리핀 여자예요, 하니 직원은 갑자기 얼굴을 잔뜩 구기곤 그러니까 한국 여자를 데리고 살아야죠, 하면서 충고했다고 했다. 삼촌은 대번 그런 거 아니라고 소리를 버럭 질렀지만, 분이 안 풀린다고 저 멀리 직원 쪽에 삿대질을 했다. 도날드덕 모자와 꼭 같은 파란 해군모를 쓴 직원이 아이들에게 풍선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뭐 그런 무례한 인간이 다 있냐고, 삼촌보다 더 크게 삿대질을 하며 가서 한마디 할까 물으니 삼촌은 됐다, 됐어, 했다.

  내가 큰소리를 내니 삼촌은 조금 차분해졌다. 사무소가 어딘지는 알아 왔냐고 묻자 삼촌은 도날드덕 직원이 줬다며 공원 지도를 내밀었다. 공원 내 사무소는 총 세 곳이었다. 다 가보는 게 좋겠지? 이 부근에 있는 사무소 두 곳에는 내가 다녀올 테니 삼촌은 좀 멀리 있는 세 번째 사무소를 갔다가 중간 지점에서 다시 만나는 게 어떨까 물었다. 삼촌은 함께 움직이자고 했다. 도날드덕 직원의 말 때문에 혼자 조안의 행방을 물어보고 다니기 껄끄러워 그랬을 수도 있으나, 이유가 무엇이든 뭔가를 같이 하자고 요청하는 삼촌의 모습은 낯설었다. 삼촌은 혼자 사는 사람, 모든 걸 혼자 할 수 있는 사람, 친척들 십수 명이 모여 왁자지껄한 외할머니 집에서도 어딘가 혼자 있을 공간을 용케 찾아내는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니 삼촌이 내가 이상해졌다고 했던 것처럼, 엄마도 삼촌이 좀 이상해졌다고 했다. 엄마는 안 그래도 평소에 좀 이상해졌다는 소리를 많이 했다. 수영 엄마가 좀 이상해졌어, 그 꽃집이 좀 이상해졌어, 그 길이 좀 이상해졌어. 그 말의 의미를 몰랐으나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나는 그대로 있는데 네가 변해서 낯설어졌다는 뜻이었다. 엄마 말대로 삼촌이 옛날과 달리 정말 이상해졌나 생각하다 보니 근래에 삼촌과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이 년여 전 모아두었던 돈이 바닥을 드러내고 집세를 감당하기 어려워진 내가 엄마와 언니, 리지가 살고 있던 엄마 집에 들어오게 되면서부터 삼촌의 연락이 뜸해졌다. 내가 혼자 살 때는 일주일에 한 번은 전화하던 삼촌이었다. 삼촌의 용건은 주로 시사 다큐멘터리에서 본 심각한 사회 현상이었다. 너 그거 봤냐. 어젯밤 열한 시에 궁금한 이야기 와이 봤냐. 노인만 고독사하는 게 아니라 청년도 혼자, 아무도 모르게 죽는다는 거 봤냐. 나는 삼촌도 조심해, 하며 유튜브에서 본 건강 지식을 쏟아냈다. 삼촌 그거 알아? 고혈압이 있으면 반신욕조차 위험하다는 거 알아? 빈속에 바나나를 먹으면 위벽이 무너진대, 그거 알아? 엄마가 들었으면 좀 이상하다고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우리가 서로에게 안부를 묻던 방식이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사무소에서 조안이란 사람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고, 더군다나 직원 정보는 기밀이기 때문에 조안이 이곳에서 일한다고 하더라도 알려줄 수 없다는 답변을 듣고 우리는 그냥 집에 갈까 하다가 삼촌이 여기까지 온 김에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보고 싶다고 하기에 세 번째 사무소도 가보기로 했다. 세 번째 사무소는 구석에 홀로 덩그러니 있어 한참을 걸어야 했다. 걸으면서 바랐다. 그날 내가 본 것이 조안의 영혼이 아니라 조안이었으면. 그래서 삼촌에게 돈과 테이프를, 아니 테이프라도 돌려주었으면. 사기꾼을 잡으러 놀이공원을 뒤지게 될지는 몰랐다는 생각에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오면서도 동시에 내가 본 것이 조안이 아니라 조안의 영혼이었다고 삼촌에게 언제 고백하면 좋을지 바쁘게 고민했다.

  리지는 잘 있지? 병원에 갔었다며?

  지금이라도 말해야겠다고 다짐하곤 숨을 들이켰는데 삼촌이 요즘 어때, 하며 리지의 안부를 물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언니는 리지가 떼를 잘 쓰고 쉽게 화를 내는 애라고는 생각했으나 문제가 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애들이 다 그렇지 뭐, 하면서 애써 가볍게 넘겼다. 그러던 지난해, 리지는 친구들과 아파트 단지 내 정자에서 놀다가 같은 반 남자아이를 밀쳤다는 혐의를 받았다. 의자 위에 서 있던 남자아이는 바닥으로 떨어져 정강이 뼈가 골절됐다. 리지 네가 밀었냐고, 솔직히 말해보라고, 혼나지 않는다고 해도 리지는 입을 굳게 다문 채 눈을 맞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잘 지내지 뭐. 리지도 지칠 거야.

  의사가 뭐라고 하더냐고 삼촌이 물었다. 의사는 문제아의 스펙트럼이 있다고 하면 리지는 저기 저 끄트머리, 심각한 애들이 속하는 빨간색 영역에 발도 들이지 못한다고 했다. 중간보다 약간 옆이라고 보시면 돼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의사는 말했다. 다만 부모가 단호해져야 한다고 했다. 아이가 소리 지르는 걸 중단할 때까지 관심을 주지 말고 스스로 진정한 다음에 화난 이유를 말로, 명확한 언어로 설명할 수 있도록 도와주라고. 리지는 악을 쓰다가 물건을 던지고, 그다음엔 숨을 참았다. 리지의 얼굴이 벌게지기 시작하면 언니는 대체로 울기만 했다. 그러면 엄마는 언니를 달래고 나는 리지를 달랬다.

  리지야, 대체 뭐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나는 거야? 진정하고 말 좀 해 줄 수 있어?

  리지는 대답을 하지 않고 악을 쓰며 소리만 질렀다. 리지는 나에게 한 번도 분노의 이유를 밝힌 적이 없다. 언니에게는 몇 번 말해줬다고 하는데, 대부분은 유튜브를 못 보게 한다거나 가지나물을 억지로 먹인다는 아이다운 이유였다. 그러나 딱 두 번 아이답지 않은 근거를 들었다고 한다. 한 번은 펭귄 때문이었다. 언니는 그 이야기를 좋아했다. 얘가 여섯 살 때 유치원에서 무슨 이야기를 듣고 왔는지 엉엉 울면서 화를 내더라고.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뭐라고 하던지 아느냐고, 빙하가 다 녹아서 펭귄이 죽게 되는 게 너무 화가 난다고 했다고. 나는 그 펭귄 이야기를 지겹도록 들었다.

  그러나 펭귄의 죽음을 이야기할 때마다 언니의 눈가와 입가에 부드럽게 고이는 미소를 또 보고 싶어 매번 잠자코 있었다.

  두 번째 이유를 이야기할 때 언니는 웃지 않았다. 여러 번 반복해 말하지도 않았다. 엄마가 나한테서 아빠를 빼앗아 갔잖아. 그래서 화가 나. 리지는 언니에게 정확히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때 언니는 정말 쿵 하는 소리를 들었다. 마음이 무너진다는 표현이 과장이 아니구나, 하면서 가슴께를 쓸었다. 그 순간 시간이 멈춰야 할 것 같았는데 리지는 곧바로 아이패드로 유튜브를 보러 거실 소파로 휙 가버렸다고 한다.

  너도 엄마가 아빠를 빼앗아 갔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화가 났어?

  언니는 두 번째 이유를 말하곤 내게 간절히 물었다. 엄마와 아빠의 이혼 당시 나는 너무 어렸고 아빠가 없는 집에 금방 적응했기 때문에 어떤 기분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으나 분명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래도 아빠가 보고 싶었을 때는 있었던 것 같다고 대답하자 언니는 그래, 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언니는 엄마 아빠가 이혼할 때 열한 살이었다. 아빠를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슬퍼서 밤마다 베개를 눈물로 적셨다고 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축축한 베개에 뺨을 뭉개며 잠을 청해야 했던 찝찝함을 아직도 선명히 기억한다고 말하며 언니는 자기 뺨에 손등을 가져다 댔다. 나는 애들은 원래 상처 주기 위해 별소리를 다 하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위로했다. 진심은 아닐 거라고. 그 말이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실 언니의 베개 이야기를 들으면서 리지가 화를 내는 게 다행이라고 느꼈다. 베개를 적시는 것보다야 던지는 게 나았다.

  삼촌은 나더러 내 인생을 살라고 했다. 너는 리지 엄마도, 아빠도 아니니까 리지 일에 깊게 개입할 이유가 없다고. 남자를 만나서 결혼을 하라고, 그것도 아니면 직장이라도 구하라고. 삼촌은 내가 리지 때문에 남자와 직장을 만들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얼떨결에 괜찮은 변명 거리가 생긴 것 같은 동시에 리지에게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언니의 육아를 돕는 건 그 집에 얹혀사는 데 지불하는 대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보다는 언니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고, 리지를 보면 과거보다는 미래에 매달려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리지를 사랑하기도 한다. 그건 또 다른 문제였다.

  삼촌은 그러면 왜 결혼을 안 했어? 그렇게나 오래 혼자 사는 게 지겹지는 않았어?

  삼촌에게 물으니, 삼촌은 지겨울 것도 많다, 시간이야 그냥 가는 거지 했다. 너는 혼자 지내는 게 지겨웠니? 삼촌도 내게 물었다. 나도 지겹지 않았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지겹기보다 화날 때가 많았다. 시간이 줄다리기의 밧줄이라도 되는 양, 양손으로 단단히 붙들고 절대 놓지 않으려 했는데 누군가 내 꽉 쥔 주먹을 억지로 펴서 내 시간을 다 빼앗아 갔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았고, 시간은 밧줄보다는 빛줄기에 가까워 그저 나를 가볍게 통과해 지나갔을 뿐이라는 걸 수용하는 데만 해도 많은 에너지와 추가적인 시간이 들었다.

  세 번째 사무소에서는 조안의 성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삼촌을 쳐다봤고 삼촌은 나를 쳐다봤다. 결과적으로 조안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사무소를 나오니 해가 지려는지 주변이 어느새 어둑했다. 한 시간 반은 넘게 걸은 듯했다. 퍼레이드 시작 시각인 여덟 시까지는 이제 한 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삼촌은 기왕에 이렇게 된 거 조안이 퍼레이드에 다시 나타날지 확인해 보자고 했다.

  알라딘 테마존 안에 적절한 벤치가 있었다. 벤치 정면에는 포토월이 있었다. 알라딘과 자스민, 호랑이와 원숭이의 얼굴에 구멍을 뻥뻥 뚫어 놓은 커다란 판이었다. 가끔 몇몇 사람들이 달려와 네 개의 구멍에 차례로 얼굴을 들이밀며 사진을 찍는 모습은 구경하기에도 좋았다.

  쟤 말이야, 알라딘 여자 친구. 이름이 뭐지?

  삼촌이 물었다. 자스민이라고 대답하니 삼촌은 맞아 맞아, 알고 있었는데, 했다. 그런데 저 원숭이 이름은 뭐냐고 삼촌이 다시 물었다. 나는 저 원숭이는 아부고 호랑이는 라자라고 알려주었다. 삼촌은 라자는 이름이 리지랑 비슷하네, 하면서 짓궂게 웃었다. 삼촌의 농담 뒤에 언제나 따라붙는 웃음이었다. 나도 같이 웃었다. 문득 리지가 보고 싶어졌다.

  리지는 언니가 붙인 이름이었다. 형부가 지은 거였다면 애 이름을 왜 이렇게 지었대, 하며 언니에게 툴툴대기라도 했을 텐데. 나는 리지라는 이름이 별로였다. 무슨 아이디도 아니고, 별명도 아니고, 강아지도 아니고, 외국 애도 아니고, 리지가 뭐야. 리지를 방에 재워 두고 식탁에 앉아 언니와 맥주를 마시던 어느 날 밤, 아니 나는 맥주를 마시고 언니는 대체 뭘 쳐다보는지 멍한 눈빛을 하고는 내가 전자레인지에 돌려 둔 쥐포를 먹지도 않을 거면서 갈기갈기 찢기만 하던 어느 날 밤,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언니에게 물었다. 애 이름을 왜 그렇게 지은 거야?

  언니는 한국말로도 영어로도 부르기 쉬운 이름이라 그렇게 지었다고 했다. 외국에서 살게 되든, 외국계 회사에 가든, 여행을 가든, 아니면 회화 학원에서라도, 그 누구도 리지의 이름을 잘못 부르지 않았으면 한다고. 리지 인생의 매 순간이 부드럽고 아주 자연스럽게 흘러가기를 바란다고, 아니, 그렇게 만들고 싶다고 언니는 말했다. 언니의 의도와는 다르게 한국에서 리지의 이름은 쉬운 이름이 아니었다. 리지예요, 리지, 하고 이름을 말하면 다시 질문을 받았다. 이진이요? 아, 그러니까 희지요?

  언니는 삶이 삐걱대며 멈춰 서던 순간마다 부드럽게 흘러가는 삶은 무엇인지 고민했을까? 자연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의 이름은 무엇일지 고민했을까? 나는 형부 얼굴을 떠올리고 그다음엔 리지를 떠올렸다. 가끔은 리지가 미웠다. 울며 고함을 지르는 리지를 붙잡고 세게 흔들면서 제발 사람들을, 언니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울고 소리 지르고 같이 화내고 싶은 순간도 많았다. 언니가 형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리지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나는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급하게 맥주를 들이켰다. 리지가 없었다면. 그 생각이 내 마음을 뚫고 방문도 뚫은 다음 리지에게까지 도달할까 무서웠다. 끔찍한 생각이었다.

  뻥 뚫린 알라딘 얼굴을 바라보면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삼촌에게 여기서 조안을 만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날 내가 본 건 조안이 아니라 조안의 영혼이었으니까. 조안의 영혼은 삼촌에게 백오십만 원도, 노래가 실린 테이프도 돌려줄 수 없을 거였다. 왜 갑자기 그렇게 사라졌는지, 그 이유도 설명하지 못할 게 뻔했다.

  조안이 아니라, 조안의 영혼을 봤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안이 죽었냐고, 삼촌은 사색이 되어 물었다. 그거야 모르지, 나도.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런데 어떻게 조안이 아니라 귀신을 봤다고 확신하는 거야?

  삼촌이 다시 물었다. 아니, 귀신이 아니라…. 나는 삼촌의 말을 정정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귀신이든 영혼이든, 그날 내가 퍼레이드에서 본 건 조안이라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조안의 형체를 한 조안의 일부분이었다. 조안의 본체는 필리핀으로 가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조안의 어떤 불행한 일부만 한국에 남아 부유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게, 정말. 왜 조안이 아니라 조안의 영혼이라고 생각했지?

  엄마 말대로 술기운 때문일지도 몰랐다. 혹은 나도 모르게 조안의 행복을 빌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퍼레이드의 어느 부분에서 조안을 봤는지 복기해봤다. 조명이 어두워지고 자스민과 호랑이 라자의 3D 영상이 가장 먼저 등장했다. 바람이 불자 라자의 털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흔들렸다. 쓰다듬으면 손가락 사이사이로 포근하게 들어앉을 것 같은 털이었다. 곧이어 알라딘을 태운 양탄자가 어디에선가 날아와 시야에 들어왔다. 알라딘은 양탄자 위에서 자스민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스민이 물었다. 안전해요? 알라딘은 네, 대답하곤 자스민에게 물었다.

  날 믿어요? 날 믿냐고요!

  자스민은 망설였다. 그러곤 웃으며 알라딘의 손을 잡았다. 네, 믿어요. 자스민이 양탄자에 올라타자 빼곡한 별들 사이로 갑작스럽게 비행이 시작됐다. 자스민은 아래에 서 있던 나와 리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비행하는 둘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나도 엉겁결에 손을 흔들었다. 둘은 다시 등을 돌리고 저기 저 높은 곳으로 날아갔다. 양탄자가 지난 자리에 바람이 꽤나 세게 불어 나는 리지를 내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퍼레이드가 어떤 모습일까 여러 번 상상해 봤지만, 알라딘과 자스민이 탄 양탄자의 뒷면을 바라보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뒷면에 새겨진 무늬는 앞면과 똑같았지만 훨씬 흐릿했다. 양탄자 앞면에서는 선명했던 보라색, 노란색, 빨간색의 무늬가 빛이 바랜 것처럼 희뿌옇게 번져 보였다. 화가 났다. 내가 오래전 떠나왔다고 생각했던 디즈니의 인물들이 날 떠나고 있었다.

  주제곡인 어 홀 뉴 월드가 끝나고 알라딘과 자스민도 저 멀리 사라져 갈 때까지 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노래 시작 즈음에 느꼈던 분노도 가라앉았고 계속 고개를 들고 있던 탓에 뒷목이 뻐근했다. 고개를 돌려 라자가 있던 자리를 보니 코가 도톰한 호랑이는 온데간데없고 바로 그 자리에 조안이 있었다. 조안은 점이 되어 사라진 양탄자를 계속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노려보고 있었다.

  삼촌의 표정을 살피니 다행히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삼촌은 벤치 등받이에 등을 가볍게 기대고 편안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나도 삼촌을 따라 벤치에 등을 기댔다. 이제 해가 완전히 졌다. 자연광이 아닌 인공조명 아래의 디즈니랜드는 진짜에 가까워 보였다.

  그런데 대체 무슨 노래를 녹음했길래 아직까지 가지고 있었던 거야?

  문득 조안이 가져갔다는 테이프가 생각나 삼촌에게 물었다. 삼촌은 뮤지션이 되고 싶어서 기획사에 보내려고 녹음한 노래라고 답했다. 삼촌이 가수가 되고 싶었는지 몰랐다. 삼촌 집 한쪽에는 항상 기타 케이스가 놓여 있었으나 저 안에 기타가 없을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먼지가 소복이 쌓여 있었다. 그때는 가수가 되고 싶었지, 그런데 아닌 것 같아서 금방 그만뒀다고 삼촌은 담담하게 말했다.

  근처에서 팝콘이라도 파는지 달콤하고 고소한 바람이 불어왔다. 나도 삼촌처럼 눈을 감아 봤다. 오래 걸어서 몸은 노곤했지만 숙취는 완전히 가신 것 같았다. 다시 맥주가 마시고 싶었다.

  맥주 사 올게. 삼촌도 마실 거지?

  나는 삼촌의 카드를 받아 들고 미키 컵에 담긴 맥주를 사러 나섰다. 오래된 나무를 흉내 낸 옹이 무늬가 잔뜩 그려져 있는,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한 가판대들 사이에서 기억을 더듬어 생맥주 파는 곳을 겨우 찾아 맥주 두 잔을 샀다. 플라스틱 컵에 직원이 능숙하게 맥주 두 잔을 따르곤 캐리어 드릴까요, 물었다. 괜찮다고 하니 직원은 맥주를 건네며 꿈이 현실이 되는 디즈니랜드에서 행복한 하루를 보내라고, 정해진 인사말을 던졌다. 하지만 해는 이미 다 졌고 하루는 다 지났다.

  퍼레이드에서 그날의 조안을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스민과 알라딘이 양탄자를 타고 완전히 새로운 세상으로, 저 멀리 날아가는 모습을 삼촌과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여덟 시가 됐는지 공원 내 조명이 조금씩 어두워졌다. 삼촌이 앉아 있을 벤치가 코앞이었다. 어 홀 뉴 월드의 전주가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생맥주가 담긴 플라스틱 미키 컵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자리에 멈춰 섰다. 컵이 얇아 손가락 끝이 시렸다. 이번에는 한국어 가사를 꼭 들어볼 생각이었다. 


 

  <당선소감>

 

   믿기지 않는 당선… 글 쓸 자격 생겼죠

  당선 소식을 듣고 믿기 어려울 만큼 기뻤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덜컥 겁이 났습니다. 너무 갑작스레 찾아온 기쁨이었던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누릴 자격 없는 행운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읽고 쓰는 내내 스스로에게 자격을 물어왔습니다. 내가 지금 소설을 읽을 자격이 있는지, 쓸 자격이 있는지, 물으면 언제나 답은 ‘자격 없다’였습니다. 항상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시험이나 취업, 생업 같은 현실적 문제에 가로막힐 때도 있었고, 나는 문장을 못 쓰니까, 생각이 짧으니까, 끈기가 없으니까 같은 제 부족함도 설득력 있는 근거가 됐습니다. 그러면서도 소설이 좋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읽고 써왔습니다.

  그러나 계속 읽고 써오면서도 자격을 돌아보는 데 열중한 나머지 소설을 사랑하는 일에는 소홀했던 것 같습니다. 한 번도 자격을 갖춘 적이 없었기에 매번 미루거나 망설였습니다. 마음 한편을 언제나 자격을 헤아리는 데 썼으므로 좋은 글을 읽고 충분히 감격하기도, 쓰는 행복을 충분히 누리기도 어려웠습니다. 지금 가장 후회되는 것은 그것입니다. 자격,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했을까요?

  앞으로 무슨 글을 쓰고 싶은지, 써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쓸 자격이 있는지, 언젠가는 자격을 갖출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그래도 소설이 좋은데 어떡하나요? 이제 스스로에게 자격을 묻는 일은 덜 하려고 합니다. 그 대신 읽고 쓰는 일에 마음을 다하겠습니다. 소설을 충분히 사랑하는 일에 애쓰겠습니다.

  소중한 기회를 주신 문화일보에, 부족한 글을 응원해 주신 심사위원분들께 감사합니다.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쓰겠습니다. 소설을 사랑하는 다양하고 즐거운 방법을 알려주신 서유미 선생님, 항상 다정한 시선으로 제 글을 읽고 함께 고민해 준 문우들에게 감사합니다. 그 덕분입니다. 한 번도 제게 자격을 묻지 않아 준 가족들, 긴 시간 주말 저녁을 함께해 준 연이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천국에 계실 할머니와 외할머니께도 닿기를 바라며 멀리서 사랑을 보냅니다.

● 1991년 서울 출생. 
● 서강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 현재 영한 번역자로 활동 중


 

  <심사평>

 

  누군가를 잘 떠나보내는 것이 우리의 삶… 서사적 완결성과 균형 돋보여

  본심에서 집중적으로 논의된 작품은 ‘아무도 갖지 않은 것’과 ‘운 모으기’, 그리고 ‘하루’와 ‘퍼레이드를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철거를 앞둔 작은 연구소에서 저마다 짐을 챙겨나가는 과정을 그린 ‘아무도 갖지 않은 것’은 사물과 공간의 묘사가 뛰어났다. 말하자면 사물과 공간, 그 자체가 주제화되는 힘이 있었다. 아쉬운 것은 끝까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정수’의 존재였다. 그로 인해 ‘정수’에 대한 혐오와 차별의 지점이 다소 뻔해져 버렸다는 평이 있었다. 아울러 결말 부분에 등장한 ‘개’의 상징도 그렇게 효과적이진 못했다.

  ‘운 모으기’는 구성이 튼실한 작품이었다. 사고로 누워 있는 은재와 그의 연인 경주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이 소설은, 계급의 문제와 동성애의 문제, 현실 예술의 문제까지, 당대의 여러 현상을 작품 안에 반영하고 있다. 그 많은 것을 압축해서 단편 분량으로 담아내고 배치한 것은 분명 이 작가의 능력이었다. 아쉬운 것은 결말이었다. 은재 없이 경주 혼자 오페라를 보는 장면은 그다지 감동적이지도 않았고, 오히려 단순하고 감상적이다, 라는 의견이 다수였다. 너무 많은 것을 너무 손쉽게 처리한 것은 아닌지, 고민해주길 바란다.

  ‘하루’는 응모작 중 가장 묘한 작품이었다. 나와 설란, 그리고 ‘하루’라는 이름을 가진 장년인 세 친구의 하루를 담은 이 소설은, 가야 할 곳으로 직진하지 않고, 딴청을 부리고 잡담을 나누고 무언가를 나눠 먹으면서 느릿느릿 진행된다. 특별한 갈등이나 사건도 드러나지 않은 채 딴청을 부리는 이 작품은 그래서 더 신선하고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무언가를 단단하게 구축하는 것이 아닌 덜어내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이야기였고, 어떤 독특한 정서가 있었다. 그리고 끝내 그 정서가 공감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마지막까지 심사위원들의 결정을 주저하게 만든 것도 이 소설이었다. 조금 더 문장을 꼼꼼하게 다듬고(손쉽게 쓴 문장 표현들이 자주 보였다), 에피소드를 보다 효과적으로 배치해낸다면 머지않은 시기, 다시 만나게 되리라 믿는다.

  올해의 당선작은 ‘퍼레이드를 기다리는 시간’이다. 디즈니랜드 놀이공원에서 얼핏 본 ‘조안’을 찾기 위해 외삼촌과 함께 다시 그곳을 찾은 나의 이야기를 다룬 이 소설은, ‘시간의 흐름이 뒤틀리거나 어느 한구석이 잔뜩 구겨진 것만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 과정을 통해 가족의 상처 또한 하나하나 드러나지만 그 태도가 결코 감상적이지 않고 유머러스하면서 절제돼 있었다. 우리는 모두 알라딘이 타고 떠난 양탄자의 밑바닥만 볼 수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렇게 누군가를 잘 떠나보내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말하는 소설이었다. 서사적 완결성과 균형이 돋보였고, 캐릭터의 구축에도 나무랄 곳이 없었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이 소설 또한 잘 떠나보내고 어서 빨리 또 다른 작품으로 독자 앞에 서길 바라본다.

심사위원 : 구효서, 조경란, 이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