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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집으로 가는 길 / 김미리

 

  등장인물

효인 50대 (소미의 여성 양육자)
소미 20대
다원 (보험사 직원)

  배경

자율화 3단계 자율화 3단계는 차량이 교통신호와 도로 흐름을 인식해 운전자가 독서 등 다른 활동을 할 수 있고, 특정 상황에서만 운전자의 개입이 필요한 조건적 자율주행 단계이다. 핸들에 손을 올리고 전방을 주시하라는 권고사항이 담긴 안전 운행 가이드라인만 존재한다. 국토교통부는 2020년 08월 열린 ‘자율주행차 윤리지침’ 공개토론회에서 “내년에 3단계 자율주행차가 국내 출시될 예정”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의 자율주행 자동차가 상용화된 시기.

  공간

  무대 중앙에 자동차의 좌석으로 보이는 의자들이 놓여있다.

  장면이 병원으로 전환될 때는 운전석과 조수석, 뒷좌석을 간편하게 분리해서 병원 의자처럼 보이도록 나란히 놓을 수 있다.


1
  어둡고 좁은 국도. 자율주행 중인 차 안의 소미와 효인.

  소미는 조수석에 앉아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효인은 운전석에서 귤을 까고 있다. 관객들은 그 모습을 보고 차량이 자율주행 중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소미 얼마나 남았어?

효인 거의 다 왔어. 할머니한테 전화해.

소미 곧 도착할 건데 뭐 하러.

효인 꼭 위험하게 밤길에 나와계신단 말이야. 들어가 계시라고 전화해.

소미 어차피 들어가 계시라고 해도 기다리실걸. 그냥 할머니 태우고 들어가자.

효인 전화해봐. 뭐 필요한 건 없는지 물어봐서 읍내에서 사가게.

소미 맨날 없다고 하시잖아.

효인 할머니한테 전화하기 싫어?

소미 싫은 게 아니라 불필요한 전화를 왜 하냐는 거야. 곧 만날 건데. 얼굴 보고 얘기하 면 되잖아. 정 걸고 싶으면 엄마가 걸어. 어차피 자율주행이잖아.

효인 곧 도랑 있는 좁은 길로 들어갈 거라 앞에 보고 있을 거야.

소미 (비아냥대며) 그렇게 모범적인 운전을 하시는 분이 왜 차로 고라니를 치셨어요?

효인 너 말 그렇게 할래? 됐다. 됐어. 내가 해야지.

효인은 휴대폰을 찾으려고 몸을 돌려 차 뒷좌석을 뒤적거린다.

효인 (혼잣말로) 고라니 한 번 쳤다고 엄마를 잡아먹으려 드네. 무서워서 살 수가 있나. 이놈의 핸드폰은 어딨는 거야.
그때 소미가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본다. 그리고 다급하게 효인을 부른다.

소미 엄마! 엄마!

효인 왜?

소미 (큰 소리로) 엄마 차 멈춰!

  효인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에 몸을 돌려 앞을 바라본다.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는다. 동시에 둘의 비명 소리가 들리며 둔탁한 충돌음이 발생한다.

[충돌이 발생하였습니다. 1시간 전 충돌과 비슷한 강도입니다. 주행을 계속하겠습니까?]

효인은 기계음이 다 끝나기도 전에 시동을 꺼버린다. 차는 멈췄지만 쉽사리 내리지 못한다. 그런 효인을 두고 급하게 뛰어내리는 소미.

소미 할머니!!

암전.

 

2
병원 수술실 앞 의자. 소미와 효인이 앉아있다.

소미 수술 얼마나 걸린대?

  효인은 대답하지 않고 손톱을 물어뜯는다.

소미 내 말 못 들었어?

효인 엄마 머리 아파. 조용히 좀 해.

소미 할머니 돌아가시는 거 아니겠지?

효인 (화를 내며) 그런 소리 좀 하지 마. 안 그래도 불안한데.

소미 왜 자꾸 화를 내?

  다원 등장. 멀끔한 정장을 입고 두 사람에게 다가온다.

  둘은 인기척도 느끼지 못하고 계속 날선 대화를 하는 중이다.

다원 안녕하세요. 황효인씨 맞으세요?

효인 (자리에서 일어나며) 네. 제가 황효인인데요.

다원 (명함을 내밀며) 안녕하세요. TD다이렉트 손해사정센터 이다원입니다.

효인 아, 안녕하세요.

다원 (작은 목소리로) 고객님 혹시 1층 카페에서 저랑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흔한 사고는 아니다 보니 절차상 필요한 것들이 꽤 많아서요.

효인 네. (몸을 돌려) 소미야. 여기 잠깐만 있어.

소미 나도 갈래.

효인 너도?

다원 (살짝 당황하며) 보험액 지급 문제나 사고 관련 모든 절차는 당사자와 보험사끼리 처리하는 게 원칙이라서요.

효인 그래. 소미야, 너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엄마 얼른 다녀올게.

소미 (다원을 보며) 저도 당사자 맞는데요?

다원 네?

소미 저도 당사자라고요. 사고 목격자이기도 하고요. TD에서 제 앞으로 생명, 상해, 비운 전자, 동승자 보험 전부 들어놨고 사고 차량 조수석에 탑승하고 있기도 했는데, 저 는 왜 당사자가 아니라고 생각하세요?

  당황하는 다원과 효인

다원 그럼 그냥 여기서 얘기할까요?

소미 네. 그렇게 하세요.

효인 (다원을 의자로 안내하며) 이쪽으로 앉으세요.

  다원은 수술실 앞 의자에 앉는다. 효인과 소미 사이에 앉아있지만, 몸은 효인의 쪽으로 완전히 돌린 상태이다. 사실상 효인과 다원만 마주 보고 있는 것. 다원은 들고 온 가방을 열어 이것저것 서류들을 꺼낸다.

다원 고객님, 차량이

효인 ‘레브’요. 연식도 3년 정도밖에 안 됐어요.

다원 자율주행하셨어요?

효인 네. 3단계요. 3년 동안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대체 무슨 일일까요?

소미 (효인에게 귓속말을 하며) 왜 굽실대? 화를 내도 모자랄 판에.

다원 혹시…

효인 네네.

  주위를 둘러보는 다원.

다원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고) 경찰에 신고하셨나요?

효인 아… 아뇨.

다원 잘하셨어요.

소미 (어이가 없다는 듯) 지금 뭘 잘했다는 거예요?

다원 지금 수술 중이신 황명자씨도 어차피 가족이시잖아요. 조회해 보니까 보험도 다 TD 에서 가족상품으로 들어놓으신 부분 확인되고요. 이런 상황에는 신고 안 하는 게 훨씬 좋죠. 괜히 사고 때문에 보험료 오를 일도 없고요. 인명 사고는 보험료가 어마 어마하게 오르거든요.

효인 저기, 저는

다원 네. 말씀하세요.

효인 보험료도 보험료지만 대체 왜 이런 사고가 일어났는지 이해가 가질 않아서요. 자율 주행 자동차가 사람을 칠 수 있는 건가요?

다원 (더 살가운 말투로) 저희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조사를 진행하고 있어요. 차량의 모든 기록과 오토파일럿 시스템 전체, 도로교통 상황까지 전부 분석 중이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소미 인명 피해 교통사고 신고 불이행은 불법이잖아요.

  다원은 처음으로 소미를 향해 몸을 돌린다.

다원 따님.

소미 따님 아니고 고객님이라고 불러주실래요? 같은 고객인데 왜 호칭이 달라요?

다원 고객님.

소미 제 말이 틀린 건 아니잖아요. 도로교통법 모르세요?

효인 (소미를 막아서며) 소미야, 그건 일단 할머니 깨어나시면 얘기하자.

소미 뭔 소리야. 할머니가 퍽이나 신고하라고 하겠다.

다원 사고가 나서 충격받으신 마음 매우 이해합니다. 게다가 자율주행 중이었는데 얼마 나 놀라셨겠어요. 하지만 저희가 사고 처리와 분석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조금만 더 신뢰하며 기다려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소미 이미 사고가 일어났는데 어떻게 신뢰를 하라는 거에요.

  다원은 소미의 말을 무시하고 효인에게 서류를 건넨다.

다원 보험 예상 지급액입니다. 지급 내용과 특약 확인하시고 연락 주세요.

효인 (서류를 들여다보며) 네. (사이) 잠시만요.

다원 네?

효인 보장 금액이 너무 달라서요. 제가 가입했던 상품의 거의 세 배인데요.

다원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본사에서 지급액 산정이 그렇게 됐네요. 내용 확인 꼼꼼하게 해보세요. 연락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다원은 인사를 하고 퇴장한다. 효인은 서류를 읽기 시작한다. 소미는 다원이 간 걸 확인하고 효인에게 말을 붙인다. 이때 다원이 다시 나와 구석에 숨어 둘의 이야기를 엿듣는다. 소미와 효인은 다원을 볼 수 없지만, 관객들은 다원을 볼 수 있다.

소미 신고 안 할 거야?

효인 잠깐만 가만히 있어 봐. 이거 읽고 있잖아.

소미 엄마!

효인 (짜증을 내며) 아, 왜?

소미 엄마 정신 차려. 지금 차로 사람 친 거야. 경찰에 신고를 왜 안 해?

효인 할머니도 아직 별말이 없는데 네가 왜 이래.

소미 할머니 의사랑 상관없는 문제잖아. 알면서 왜 그래.

  효인은 한숨을 쉬며 서류를 내려놓고 눈을 감는다. 소미는 본격적으로 따지기 시작한다.

소미 이제 와서 후회가 돼? 그러니까 자율주행하지 말라고 했잖아.

효인 나라고 이렇게 될 줄 알았겠어?

소미 할머니 치기 전에 다른 충돌이 있었잖아. 그때라도 수동으로 바꿨어야지.

효인 사람을 친 것도 아니었잖아.

소미 뭐가 달라? 동물들은 죽어도 아무 상관없다는 거야?

  다원은 핸드폰으로 녹음을 시작한다. 최대한 두 사람 가까이 핸드폰을 든 팔을 뻗는다.

소미 두 번이나 부딪혔으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어야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면 차를 멈추거나 자율주행을 하지 말았어야지.

효인 첫 번째는 쓰레기였잖아.

소미 아냐. 지금 생각해 보니 강아지였어.

효인 강아지?

소미 작게 짖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아.

효인 왜 그 얘기를 지금 해.

소미 계속 얘기했어. 쓰레기 아닌 것 같다고도 말했고 고라니 쳤을 때 세우자고도 말했 잖아.

효인 (괴로운 표정으로) 제발 이따가 얘기하면 안 될까? 할머니 수술이라도 끝나고.

소미 엄마가 신고 안 하면 나라도 할 거야.

효인 소미야!

  효인과 실랑이를 하는 소미. 다원은 급하게 녹음을 끄고 어디론가 전화를 한다. 소미와 효인은 다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속삭이듯 말하는 다원.

다원 어. 오늘 사고 난 차. 어 그거. 블랙박스 칩 빼서 영상 옮겨 놔. 황명자씨 치기 전에 충돌 두 번이나 있었대. 아니, 사람은 아니고. 개랑 사슴? 고라니인가? 몰라 시발 개새끼는 확실히 들었어. 정 안 되겠다, 싶으면 그걸로 물고 늘어져야 할 것 같아. 어어. 일단 충돌 부분 영상만 좀 빼서 나한테 보내줘.

  다원의 휴대폰으로 전송된 영상. 다원은 블랙박스 영상을 재생하기 위해 저장한다.

  실랑이를 하던 소미와 효인은 의자를 자동차 좌석으로 바꾸고, 운전석과 조수석에 앉는다.

3

  블랙박스에 담겨있을 사고 전 충돌 장면들이 펼쳐진다.

  어둑한 도로를 운전 중인 효인.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한 손으로 비닐봉지에서 편의점 도시락을 꺼낸다.

소미 자율주행하게?

효인 응. 고속도로 들어가면. 엄마 종일 일해서 운전 힘들어.

소미 난 자율주행 별론데.

효인 왜?

소미 이상하잖아. 내 의지랑 상관없이 어디로 이송되는 기분이야.

효인 사람이 개발하고 사람이 입력한 대로 가는 건데, 의지랑 왜 상관이 없어.

소미 그냥 내 기분이 그렇다고.

효인 나중에 네 차 생기면 넌 직접 운전해. 엄마는 자율주행 켜고 밥 먹을 거야.

소미 맘대로 해.

효인 시간 좀 걸리니까 한숨 자든지.

소미 어제 많이 잤어.

  전화벨이 울린다. 통화를 하는 효인.

효인 어, 엄마. 밥? 소미는 배 안 고프대. 나는 가는 길에 도시락 먹으려고. 괜찮다니까. 다들 자율주행으로 고속도로 운전하고 그래. 응응. 한 시간 정도 걸려. 기다려.

  아직까지는 직접 운전대를 잡고 있다.

소미 할머니야?

효인 응.

소미 할머니는 아직도 엄마가 애 같은가 봐.

효인 칠십 먹은 노인도 아흔 노모 앞에서는 애지.

  효인이 핸들에 달린 버튼을 누른다. 인공지능 시스템에서 기계음이 들려온다.

[고속도로에 진입합니다. 자율주행 3단계로 변경합니다.]

  효인은 핸들에서 손을 뗀다. 곧바로 도시락 뚜껑을 열고 나무젓가락을 쪼갠다. 소미는 그런 효인과 고속도로를 번갈아 보며 살짝 인상을 찌푸린다.

소미 으윽. 기분 이상해.

효인 넌 애가 늙은이처럼 왜 그래? 나 진통 오고 너 낳으러 병원 갈 때도 자율주행으로 갔어. 너희 아빠가 하도 손을 떨어서.

소미 간도 크다. 그러다 사고 나면 어쩌려고.

효인 직접 운전했으면 사고 났을걸. 산모인 나보다 벌벌 떠는 꼴이 얼마나 웃기던지.

소미 그때도 지금처럼 3단계 자동화였어?

효인 아니. 1단계인가 그랬어. 주행 자체는 자동인데 방향 설정만 수동이었지.

소미 그게 그나마 인간적이네.

효인 어차피 기계가 하는 일인데 인간적이고 말고 가 어디 있니? 인간은 편리하면 그만 이지.

소미 (발끈하며) 차 안에 사람이 타고 있잖아. 도로 위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도 있고.

효인 (지겨운 듯) 어우, 그만해. 아무튼 넌 자율주행 베이비야. 알겠니? 제발 이 편리한 세상을 받아들여.

  소미는 대답하지 않는다. 효인은 뒷좌석으로 손을 뻗어 물병을 꺼낸다. 그 순간 차체의 앞쪽에서 작은 충돌 소리와 무언가가 작게 짖는 소리가 들린다. 이상하게 생각하여 창밖을 바라보는 소미와 아무렇지 않은 효인.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감속합니다. 주행을 지속하시겠습니까?]  

  효인은 주행 모드 지속 버튼을 누른다.

소미 엄마 방금 뭐 친 거 아니야?효인 아냐.

소미 느낌이 이상했는데.

효인 쓰레기겠지. 고속도로에 쓰레기가 얼마나 많은데.

계속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고 뒤를 돌아보는 소미.

  어둑한 도로 위에 애매하게 작은 형체가 보인다.

소미 자율 주행하지 말고 그냥 엄마가 운전하면 안 돼? 좀 이상한 것 같아서 그래.

효인 뭐가 이상해?

소미 충돌이 발생하고 나서 알려주는 게 이상하잖아.

효인 그럼 고속도로에서 앞에 쓰레기가 나타날 때마다 멈춰서 확인하고 주행할까?

소미 아니 그게 아니라.

효인 (말을 자르고) 고속도로 자율주행 허가 난지 벌써 20년째야. 그동안 자율주행 과실 인명 사고는 한 번도 없었어. 그리고 출시 전에도 얼마나 많은 실험을 했겠니. 쓸데 없는 걱정 그만하고 시트 밑에 쓰레기 정리나 좀 해.

  비닐봉지를 건네주는 효인. 소미는 쓰레기들을 주워 담으며 혼잣말을 한다.

소미 아무리 생각해도 쓰레기는 아니었는데.

  효인은 그런 소미를 신경도 쓰지 않고 본격적으로 도시락을 먹는다.

사이

  완전히 어두워진 도로. 라이트를 켜고 달리는 자동차. 갑자기 도로로 뛰어 들어온 고라니. 효인과 소미가 타고 있는 차가 고라니를 빗겨 친다.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감속합니다. 정차하시겠습니까?] 소미 방금 노루 쳤잖아. 차 세워 엄마.

효인 노루? 고라니 아냐?

소미 노루인지 고라니인지 뭐가 중요해! 얼른 차 세워.

효인 어차피 고의 아니면 벌금 안 물어. 인터넷에 검색해서 사체 처리하는 곳에 전화해.

소미 엄마!

  효인은 위치 파악을 위해 창밖을 살핀다.

효인 여기 경부고속도로 부산 가는 방향 200.8km 지점.

소미 살아있을 수도 있잖아.

효인 어떻게 살아있어.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에 치였는데.

소미 엄마 진짜 미쳤어?

효인 여기서 지금 차를 세워서 어쩌자는 건데?

소미 상태가 어떤지 확인해야지.

효인 확인해서 살아있으면?

소미 그거야...

효인 이것 봐.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어.

소미 그래도 이건 아니지. 생명을 죽인 건데.

효인 사고였잖아.

소미 내가 자율 주행하지 말랬잖아.

효인 이보세요. 자율주행 기능 없을 때도 로드킬은 고속도로에서 자주 일어나는 사고 중 하나였어. 갑자기 튀어나오는 고라니를 어떡하라고. 심지어 저 고라니가 죽었다고 하더라도 우리 책임은 없어. 로드킬에 대해서는 운전자의 양심과 개인적 책임에 맡 기는 게 이 나라 법이야.

소미 불법만 아니면 다 괜찮다는 거야?

효인 그럼 법치국가에서 뭘 더 지켜야 해?

  찝찝한 마음이지만 더 이상 대답하지 못하는 소미.

효인 고라니 치워달라고 전화 안 할 거야?

소미 엄마가 해.

효인 그래.

  인터넷에 전화번호를 검색하는 효인. 신호음이 간다.

  신호음과 직원의 목소리는 음성으로만 들린다.

직원 도로공사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효인 여기 경부고속도로 부산 가는 방향 200.8km 지점인데요.

직원 네.

효인 운전 중에 갑자기 고라니가 튀어나와서 차에 부딪혔어요. 처리 부탁드립니다.

직원 지금 정차 중이세요?

효인 아니요.

직원 고라니 상태 확인은 안 하신 거죠?

효인 네네.

직원 신고 접수 완료되었고요. 전화 주신 번호로 진행 상황 및 처리결과 문자 드릴 거예 요.

효인 네. 감사합니다.

  효인은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뒷좌석으로 던진다. 계속해서 나오는 차량 안내 기계음.

[차선을 변경합니다. 전방에 휴게소가 있습니다. 경유 설정을 원하시면 버튼을 눌러주세요.]

소미 엄마, 나 화장실 가고 싶어.

효인 넌 꼭 그러더라. 아까 싸고 오라니까.

소미 아 몰라. 아까는 안 마려웠어. 얼른 세워줘.

효인 알겠어.

  버튼을 누르는 효인.

[전방 500m에 있는 휴게소를 경유지로 설정합니다.]

소미 (혼잣말로) 고라니가 죽어도 차를 안 세우는데 내가 오줌 마렵다니까 차를 세우네.

효인 야, 너 화장실 가지 마.

소미 아 그런 게 어딨어. 세워줘.

효인 싫어. 나는 고라니가 죽고 자식이 오줌보가 터져도 차를 안 세우는 냉혈한이야.

  효인은 버튼을 다시 누른다.

[경유지 설정을 취소합니다. 주행을 계속합니다.] 소미 엄마 진짜 또라이같아.

효인 어, 맞아.

  소미는 조수석에 앉아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효인은 운전석에서 귤을 깐다.

소미 얼마나 남았어?

효인 거의 다 왔어.

소미 금방 오네.

효인 할머니한테 전화해봐.

소미 곧 도착할 건데 뭐하러.

  암전.
 

4

  다시 병원의 상황으로 돌아온다. 실랑이 끝에 효인을 뿌리치고 나가려다 다원을 발견하는 소미. 다원은 다급하게 전화를 끊는다.

소미 여기서 뭐 하세요?

다원 깜빡하고 말씀 못 드린 게 있어서요. 가던 길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소미 뭔데요? 말씀하세요.

다원 (웃으며) 황효인 고객님께 설명드릴 예정이라서요.

소미 맘대로 하세요. 저 지금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회사에 전화해서 차량 전체 리콜할 준비나 하세요.

다원 황명자씨랑 부딪히기 전에 강아지랑 고라니 쳐서 죽이셨던데요?

  당황한 소미와 여유롭게 웃는 다원.

소미 그래서요?

다원 왜 저희한테 그런 얘기는 안 하셨어요?

소미 굳이 말해야 할 의무가 있나요?

다원 그럼요.

소미 왜요?

다원 자율주행 자동차엔 AI 딥러닝 딥러닝은 사물이나 데이터를 군집화하거나 분류하는 데 사용하는 기술이다. 딥러닝의 핵심은 분류를 통한 예측이다. 수많은 데이터 속에서 패턴을 발견해 인간이 사물을 구분하듯 컴퓨터가 데이터를 나눈다. 분별 방식 중에는 ‘비지도 학습(unsupervised learning)’이 존재한다. 비지도 학습은 직접적으로 정보를 가르치고 입력하지 않아도 컴퓨터가 스스로 학습하는 진보한 기술이다. 현재 딥러닝 분야의 핵심 기술을 개발한 전세계의 연구자들이 해당 기술을 자율주행에 적용하고 상용화시키기 위해 개발에 힘쓰고 있다. 한국의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기술이 탑재되어 있어요.

소미 딥러닝이요?

다원 자동차가 인간처럼 운전을 반복하며 학습하는 과정이 구현되는 소프트웨어요. 운전 자가 직접 주행하거나 선택하는 방식을 관찰하며 주행을 결정하게 되는 거죠. 그런 주행 데이터가 쌓여서 모든 시스템을 만들어 간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소미 그게 뭐 어쨌다고요.

다원 이전에 비슷한 사고를 내고도 차량을 멈추지 않았다면, 자율주행 자동차의 시스템 구축에 운전자의 책임도 있는 거죠.

소미 운전자와 제조사의 책임을 결정하는 기준점은 ‘운전 당시’ 운전자 개입의 정도라고 알고 있는데요? 엄마는 3단계로 운전했어요. 엄마가 아니라 자율주행 알고리즘이 사고를 낸 거라고요.

다원 황효인씨의 선택이 그 알고리즘을 만든 거라면요?

소미 말이 되는 소리를… (망설인다.)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애초부터 당신들이 위험한 방식으로 시스템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다원 3단계는 꽤 모호한 단계죠. ‘일상적인 주행 시에는 자율주행 시스템이 작동하지만, 비상시에는 운전자의 개입이 요구되므로 운전자는 항상 직접 운전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게 공식적인 자율주행 3단계의 정의입니다. 이걸 모른 채 3단계를 가동하는 사람은 없어요. 모두의 약속이라고요. 동물을 두 번이나 죽였으면 운전자 로서 ‘비상시’라는 판단을 했어야죠. 만약 오늘의 사고들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숨을 고르고) 우린 황효인씨의 불성실한 판단력을 탓할 예정입니다.

소미 이렇게 위험하고 모호한 단계의 기술을 왜 출시하셨어요? 그쪽 말대로라면 자동차 가 자율적으로 주행한다고 볼 수 없는 수준의 알고리즘을 장착한 건데, 도대체 왜 자율주행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는지도 모르겠고요.

다원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덕적 책임감을 벗어던지는 걸 좋아해요. ‘자율주행’ 자동차가 아니라 ‘인간과 컴퓨터가 함께 운전하는, 조금 더 편한’ 자동차는 아무도 원하지 않 는다고요.

소미 사람들을 속이는 거네요.

다원 우리는 사람들이 원하는 걸 만들 뿐입니다. 사람들이 안전하기만을 원했다면 자율 주행뿐만 아니라 자동차 자체가 탄생하질 않았겠죠. 모두 걸어 다니는 게 제일 안 전하니까요.

소미 그럼 안전성이 제대로 식별되지 않은 기술을 사람들이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세상에 내보내도 된다는 말씀이세요?

다원 저희는 최선을 다해서 기술을 개발합니다. 세상에 완벽한 기술은 없어요. 돈을 주고 편리함을 구매했다면, 이후의 책임은 같이 져야지 않을까요? 세상의 모든 기술과 그에 따른 사고가 제조사만의 탓일 수가 있습니까? 게다가 자동차는 아직 운전자의 개입을 필수로 요구하는데요.

소미 하지만

다원 (말을 자르고) 경찰에 신고하시면 자율주행 사고 조사 위원회가 조사를 시작할 겁 니다. 그때부터는 저희도 당사의 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해야겠죠.

소미 저희 책임으로 돌리고 당신들은 빠져나가겠다는 건가요?

다원 그렇게 말한 적은 없는데요.

  소미는 다원을 노려보다가 다시 효인에게 성큼성큼 다가간다. 효인이 들고 있는 서류를 빼앗아 다원 앞에서 북북 찢는다. 효인은 의자에서 일어나 소미를 말린다.

소미 한 번 해봐요. ‘개, 고라니 죽이고 사람도 죽이는 잔인한 자율주행 자동차’로 기사 타이틀 뽑히면 TD자동차 주식 얼마나 바닥 칠지 나도 궁금하네요.

효인 소미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소미 엄마, 이 사람이 지금 뭐라고 했는 줄 알아? 오늘 사고 책임 엄마한테 다 덮어씌울 거라고…

효인 죄송해요. 딸이 아직 어려서.

다원 괜찮습니다. 서류는 다시 출력해서 드릴게요.

소미 (어이없다는 듯) 허?

  다원은 바닥에 흩뿌려진 서류조각들을 줍는다.

효인 그만해. 소미야. 이따가 엄마랑 얘기해.

소미 (효인을 붙잡고) 엄마 진짜 왜 이래? 보험료 때문에 그래?

효인 보험료 때문만은 아니야.

소미 그럼 왜 이러는데. 엄마 법 좋아하잖아. 법치주의 국가에서는 법만 지키면 된다며. 갑자기 가치관이 변했어? 보험료 오르고 면허 취소될까 봐?

효인 이래저래 복잡한 문제잖아. 신중하게 결정해야지.

소미 고라니 죽었을 때는 그렇게 이성적이더니.

  대답하지 않고 다원과 함께 찢어진 조각들을 줍는 효인. 소미는 그런 둘의 모습을 바라보다 다원을 향해 묻는다.

소미 진짜 이 모든 사고가 저희 탓이라고 생각하세요?

다원 제 개인적인 의견을 물으시는 건가요?

소미 네.

다원 어려운 문제죠. 백퍼센트 누구 한쪽의 책임만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소미 그럼 왜 이렇게까지 하세요?

다원 이게 제 일이니까요. 다 이렇게들 살잖아요.

소미 그럼 질문을 바꿀게요. 이 일이 옳다고 생각하세요?

다원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데요. 제게는 옳고 그름이 별로 중요치 않다는 게 정확 하겠네요. 이건 그냥 일일 뿐이니까요.

소미 당신이랑 영원히 상관없는 문제일 것 같죠. 그러니까 이러는 거겠지.

다원은 조각들을 전부 다 주워서 자신의 가방에 넣는다. 일어서서 정장 바지를 탈탈 턴다.

다원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 안 해요.

소미 네?

다원 언젠가 제가 자율주행 자동차에 치여 죽을 수도 있겠죠. 혹은 제가 사람을 치거나. 아주 작은 확률이지만요. 재수 더럽게 그 확률에 걸린다? 어쩔 수 없죠.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야죠. 그렇다고 이미 보편화 된 편리함을 포기하고 나만 불편하게 살 수는 없잖아요.

  멀리서 황명자 환자 보호자를 찾는 간호사의 외침이 들린다.

  효인은 소미와 다원을 두고 수술실 앞으로 뛰어간다.

다원 고객님도 가보세요.

소미 다 회사 방침이에요? 아니면 일부는 당신 생각이에요?

다원 그게 뭐가 중요한가요. 이건 우리 모두의 생각과 같죠.

  급하게 뛰어오는 효인.

효인 (손짓을 하며) 소미야! 빨리 와! 할머니 깨어났어.

  효인의 말을 듣고 다원은 사무실의 직원에게 다시 전화를 건다.

다원 황명자씨 사망 말고 상해로 서류 다시 준비해줘. 응, 금액 산정도 다시.

  소미는 그런 다원을 왜인지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암전.

  막.시간 장마 끝 무렵 7월 중순 어느 월요일 오전 11시경

장소 서해안 고속도로 목감휴게소

등장인물

홍태주 (여, 17) : 교복 차림의 여학생. 캐리어가 있다.

백수장 (남, 30) : 양복 차림의 젊은 남자. 양복과 어울리지 않은 장화를 신고 있다.

안다정 (여, 30) : 원피스를 입고 남자 구두를 신고 있다. 수장과 결혼을 앞둔 여자친구다.

사람이 없는 한적한 휴게소 앞. 비가 막 그쳤는지 휴게소 앞에 있는 탁자의 의자는 젖어있다. 휴게소 근처에 있는 야구 연습장에서는 야구공 치는 소리가 들린다. 때론 세게, 때론 약하게…….

휴게소 건물 옆 나무 의자가 있는 곳에 교복 차림의 태주가 있다. 맨발에 삼선 슬리퍼를 신고 있다. 태주는 의자에 앉으려다가 의자가 물에 젖은 것을 보고 돌아선다. 태주는 헤드셋으로 노래를 들으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캐리어를 끌고 의자 바로 옆 흡연구역 가까이 간다. 태주는 가방에서 담배를 꺼냈다가 도로 집어넣고 치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다. 태주가 핸드폰 화면을 보자마자 종료음이 울리면서 전원이 꺼진다.

태주: (꺼진 핸드폰 화면을 보며) 에이씨…….

그때 태주의 등 뒤로 수장이 보인다. 수장, 흡연구역으로 온다. 수장은 양복과 어울리지 않게 장화를 신고 있고, 여자 구두를 들고 있다. 수장은 흡연구역으로 와 태주 옆에 선다. 구두를 내려놓고 손에 있는 물기를 바지에 대충 닦아낸다. 수장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문다. 옆에 있던 태주는 이상한 눈으로 수장을 쳐다본다. 수장 역시 태주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인지하고, 불편한 듯 고개를 돌린다.

수장은 담배를 피우며 휴게소 건물 쪽을 여러 번 쳐다본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하다. 태주의 헤드셋에서 음악 소리가 흘러나온다.

수장: 왜 자꾸 쳐다보는 거야…….

태주, 수장을 위아래로 쳐다보다가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가방에서 담배를 다시 꺼낸다. 수장은 그런 태주를 기가 막힌다는 듯 본다.

수장: 하.

태주는 헤드셋을 내리고 수장에게 다가간다.

태주: 다 들리거든요.

수장: 네?

태주: 다 들린다고요. 라이터가 없어서 그런데, 좀 빌려주세요.

수장: 뭐라고?

태주: 왜 갑자기 반말해요?

수장: 너도 해.

태주: 라이터.

수장: 하. 너 지금 무슨…… (태주 옆에 있는 캐리어를 보고) 가출?

태주: 아니거든요.

수장: 아니긴.

태주: 무슨 상관이에요.

수장: 집 나오면 고생한다.

태주: (수장을 위아래로 본다) 그래 보여요.

수장: 뭐?

태주: 아저씨 지금.

수장: 난 집 나온 거 아니거든.

태주: 그럼요?

수장: 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수장,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태주에게 건넨다. 두 사람, 담배를 피운다.

태주: 무슨 사정인데요?

수장: 내가 그걸 왜 말해야 하지?

태주: 까칠하시네. 아저씨 장화는 왜 신었어요? 장화랑 어울리는 옷은 아닌데.

수장: 얘기하면 길다. 넌 왜 맨발이야?

태주: 저도 얘기하면 길어요.

수장: 까칠하시네.

태주: 아저씨가 누군 줄 알고 말해요.

수장: 불 빌려놓고선. 너 그거 갚아라.

태주: 어떻게 갚아요?

수장: 지금부터 방법을 생각해 봐. 잘.

태주: 아저씨…….

두 사람, 조금 긴 정적. 태주는 미심쩍은 듯 수장을 바라보고, 수장은 그런 태주를 멀뚱멀뚱 본다.

태주: 이상한 사람이죠?

수장: 뭐라는 거야.

태주: 하긴. 이상한 사람이 응 나 이상한 사람이야 하진 않겠지.

수장: 아니거든. 이상한 사람.

태주: 여긴 언제까지 있을 건데요?

수장: 모르겠다. 왜? 여기 있음 진짜 갚으려고?

태주: 그럼 핸드폰 좀 빌려주세요.

수장: 핸드폰은 왜?

태주: 배터리가 다 떨어졌어요.

태주,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수장에게 보여준다.

수장: 없어.

태주: 핸드폰이요?

수장: 응.

태주: 거짓말.

수장: 진짜야.

태주: 요즘 대한민국에 핸드폰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수장: 여기.

태주: 빌려주기 싫으면 그냥 빌려주기 싫다고 해요.

수장: 아, 진짜라니까. 넌 왜 사람 말을 안 믿냐?

태주: 전 원래 사람 안 믿어요.

그때, 다정이 다가온다. 다정은 원피스를 차림에 남자 구두를 신고 있다. 구두는 진흙이 묻어 조금 지저분하다. 다정은 많이 지쳐 보인다. 수장, 다정이 오는 소리를 듣고 뒤돌아본다. 태주, 담배를 끄고 다가오는 다정을 못 본 척하고 헤드셋을 쓴다.

다정: 왜 여기 있어?

수장: 담배.

다정: 핸드폰은?

수장: 차에.

다정: 돼?

수장: 아니. 먹통이야.

다정: 충전은 해 봤어?

수장: 배터리 문제가 아니야.

다정: 그럼 어떡해?

수장: (하늘을 본다) 곧 비 또 떨어지겠다.

다정: 어떡하냐고.

수장: 뭘 어떡해.

다정: 아버님한테 연락드려야지.

수장: 안 해도 돼. 어차피 안 기다려.

다정: 야.

수장: 서울 가서 해.

다정: (주위를 본다) 공중전화 없나?

수장: 가 있어. 금방 갈게. 눈 좀 붙이고 있어.

다정: 전화 드려. 출발하기 전에.

수장: 아, 알았어.

다정, 신고 있는 구두가 커서 불편한 듯 뒤뚱거리며 걷는다. 수장은 다정이 돌아서 가는 모습을 본다. 태주, 헤드셋을 다시 내린다.

태주: 거짓말 아니네요.

수장: 말했잖아.

태주: 저 아줌마가 아저씨 사정이에요?

수장: 뭐, 비슷해.

태주: 무슨 사정인데요?

수장: 말해도 모른다, 넌.

태주: 되게 예쁘다.

수장: 예쁘긴.

태주: 이 캐리어 같은 건가?

태주, 옆에 있던 캐리어를 발로 툭 친다. 수장, 담배를 끈다.

수장: 너 보기보다 똑똑하구나.

태주: 아줌마 신발은 왜 그래요? 아까 아줌마가 아저씨 신발 신고 있는 것 같던데.

수장: 아, 맞다. 구두.

수장, 옆에 있던 다정의 구두를 들지만, 다정은 이미 가고 보이지 않는다.

태주: 신발도 어쩌다 보니?

수장: 굴렀어. 뻘밭에서.

태주: 싸웠어요?

수장: 되겠냐, 싸움이.

태주: 미안하다고 해요.

수장: 뭘 미안하다고 해.

태주: 먼저 미안하다고 해요.

수장: 내가 왜.

태주: 화난 것 같던데.

수장: (어이없다) 그럼 나는?

태주: 아저씨 왜요?

수장: 아니다. 됐다.

태주: 아저씨 핸드폰은 왜 안 돼요?

수장: 몰라.

태주: 뻘밭에서 굴러서?

수장: 뭐, 비슷해.

태주: 저…… 아저씨.

수장: 또 왜.

태주: 저 돈 좀 빌려주세요.

수장: 뭘 빌려줘?

태주: 돈이요.

수장: 빌려줘?

태주: 갚을게요. 진짜로. 서울 가서.

수장: 갚아야 할 게 늘면 안 좋다, 너.

태주: 고작 라이터 한 번 빌려줬으면서.

수장: 뭐?

태주: 맞잖아요. 돈은 아직 안 빌려줬잖아요. 핸드폰도 안 빌려줬고.

수장: 내가 널 뭘 믿고? 나도 사람 안 믿어.

태주: 에이씨.

수장: 에이씨? 그래. 그럼 너가 지금 왜 여기 있는지 말해주면 빌려줄게.

태주: 그걸 제가 왜 말해요.

수장: 돈 빌려줄 사람 입장에서 그 정도 알 필요는 있을 것 같다.

태주: 됐어요, 그럼.

수장: 그래. 학생이 됐다면 그 입장 존중하지.

태주: 에이씨. 그리고 저 학생 아니거든요!

수장: 자꾸 에이씨 에이씨 할래?

태주: 좀 빌려줘요! 진짜 갚는다고요!

수장: 서울 가면 돈이 생기냐?

태주: 네.

수장: 무슨 수로?

태주: 알바 할 거거든요.

수장: 너 근데 몇 살이냐?

태주: 왜요?

수장: 그니까.

태주: 열일곱이요.

수장: 학교는?

태주: 안 다녀요.

수장: 교복은 뭐야?

태주: 교복 입으면 다 학교 다니는 거예요?

수장: 교복 입은 사람 보고 학교 다닌다고 생각하는 거랑 교복 입고도 학교 안 다니는 거랑 둘 중 뭐가 더 이상하냐?

태주: ……돈 좀 빌려주세요.

수장: 하. 그래서 얼마면 됩니까?

태주: 돈은 있어요? 현금 말이에요.

수장: 너보단 있겠지?

태주: 음…… 이십만 원? 삼십만 원?

수장: 얼마 빌려야 할지도 모르고 돈을 빌려달라고 해?

태주: 아니, 알아요.

수장: 너 당장 너한테 얼마가 필요한지도 모르지?

태주: 아, 안다니까요.

수장: 그니까 그게 얼만데?

태주, 대답을 못 한다. 수장은 태주의 대답을 기다리다가 뒤에 있는 의자로 간다. 수장, 의자 위에 물기를 자신의 옷으로 닦아낸다.

수장: 앉아.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인데 너가 지금 왜 여기 있는지 말할 때까지 기다려줄게.

태주: 왜요?

수장: 알아야겠어, 내가.

태주는 앉지 않고 서 있다.

수장: 앉으라니까.

태주: 아저씨 왜 자꾸 어른인 척해요?

수장: 뭐인 척해?

태주: 지금 그렇잖아요. 재수 없게.

수장: 재수 없어? 재밌다, 너.

태주: 놀리지 마세요.

수장: 어른인 척하는 게 뭔데?

태주: 알고 싶은 마음도 없으면서 알고 싶은 척하는 거요.

수장: 난 놀리는 것도 아니고, 어른인 척하려는 것도 아니야. 근데 너가 여기 왜 있는지 알고 싶은 건 맞아. 그냥 쉬려고 있는 건 아닐 거 아냐. 집 나온 거야?

태주, 망설이다가 주춤주춤 수장 옆으로 가 앉는다. 짧은 정적이 흐른다.

태주: 네. 근데 아저씨부터 말해줘요.여기 왜 있는지.

수장: 하……. 그래. 난, 아까 본 너가 예쁘다는 여자랑 결혼을 하기로 했어.

태주: 엥? 진짜요?

수장: 야. 뭐냐, 그 반응.

태주: 아줌마 예쁘잖아요.

수장: 근데?

태주: 아저씨는 영…….

수장: 뭐. 나 인기 많아.

태주: 아무튼 그래서요?

수장: 그래서 예전에 살던 집 사람들한테 소개해 주려고 가는 길이었는데 취소했어. 그런데 차도 갑자기 맛이 가고, 핸드폰도 맛이 갔어. 그래서 지금 여기에 있는 거야. 됐지?

태주: 예전에 살던 집이요?

수장: 어릴 때 살던 집.

태주: 보통 그렇게 말하나?

수장: 보통 그렇게 안 말하지.

태주: 근데 왜 취소했어요?

수장: 아버지란 인간이 결혼한단다.

태주: 아저씨네 아빠가 결혼을 해요?

수장: 어.

태주: 그런데 왜 안 가요?

수장: 그 인간 또 결혼하면 나 안 보기로 했거든.

태주: 아…….

수장: 자, 됐지? 이제 너 차례.

태주: 질문이 뭐였죠?

수장: 어이, 학생.

태주: 학생 아니라니까요! 집 나오는 데 무슨 이유가 있어요? 그냥 싫어서지!

수장: 그럼 학생은 왜 아니야? 학교를 그만뒀어? 아님 그만둘 거야?

태주: 그만둘 거예요.

수장: 왜.

태주: 다닐 필요 없으니까요.

수장: 왜.

태주: 다니기 싫어요. 재미없어요.

수장: 학교는 재미를 위해 다니는 데가 아니야.

태주: 다른 애들은 재미있어서 다녀요.

수장: 누가 그래? 걔들이 그렇게 말해?

태주: 아니요.

수장: 봐. 다니다 보면 재미있어지는 거지.

태주: 아니던데요.

수장: 너 왕따구나?

태주: 아니거든요!

수장: 아니긴. 왜 발끈해?

태주: 아니라고요!

수장: 그럼 신발은? 어디 있어? 왜 맨발이야?

태주: 잃어버렸어요.

수장: 어디서?

태주: 몰라요.

수장: 어떻게 몰라?

태주: 아저씨는 왜 장화 신고 있는데요?

수장: 몰라.

태주: 어떻게 몰라요?

수장: 아, 몰라!

태주: 봐요. 모르잖아요, 아저씨도.

수장: 그래. 그쯤 해두자.

태주: 어차피 돈 빌려주지도 않을 거면서.

수장: ……집으로 가.

수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정의 구두를 들고 가려 한다. 태주는 수장이 가는 게 서운한 듯, 수장을 본다.

태주: 아저씨.

수장: 왜.

태주: 저 그 구두 한 번만 신어보면 안 돼요?

수장: 너 이거 되게 비싼 거야.

태주: 그러니까요. 한 번만요.

수장, 잠시 고민하다가 태주 앞에 구두를 내려놓는다. 태주, 구두를 신어본다. 태주의 발에 구두가 꼭 맞다.

태주: 진짜 예쁘다. 이런 구두 처음 봐요. 아줌마 발이 엄청 작네요.

수장: 속이 좁아서.

그때, 다정이 휴게소 음식을 가지고 온다.

다정: 내 구두 어디 있어?…… 어?

수장: 이 학생이, 아, 학생 아니라고 했지. 이 친구가…….

태주, 놀라서 구두에서 발을 뺀다. 다정은 음식을 탁자에 내려놓는다.

다정: 안녕. 신어보는 건 상관없는데 지금 이 상황, 설명이 좀 필요하겠지?

수장: 집 나온 애야. 돈 빌려 달라더니 구두 한 번 신어보겠대.

태주: 아저씨!

수장: 맞잖아!

다정: 핸드폰 켜지더라. 먹고 정비소 전화해 보자.

수장: 핸드폰 돼?

다정: 학생도 좀 먹을래? 우리 둘이 먹기엔 좀 많은데.

수장: 학생 아니라니까.

다정, 수장의 신발을 벗고 태주가 신던 삼선 슬리퍼를 신는다. 수장은 의자 위에 양복 자켓을 놓는다. 다정은 자켓이 놓인 자리에 앉는다.

다정: 밥 먹을 동안 우리 바꿔 신자. 나도 신발이 젖어서.

태주: 네? 네.

다정: 이름이 뭐야?

태주: 태주요. 홍태주.

다정: 이름 예쁘다. 난 안다정이야.

수장, 말없이 라면을 먹는다. 다정은 수장의 팔을 툭 친다.

다정: 너는 왜 말 안 해.

수장: 난 백수장.

태주, 웃는다.

다정: 이름 귀엽지? 여기까지 오는데 이름이 한몫을 했지. 아버님한텐 내가 전화 드렸다.

수장: 뭐?

다정: 왜?

수장: 왜 해?

다정: 넌 안 할 거잖아.

수장: 야.

다정: 조만간 다시 찾아뵙겠다고 했어. 차가 고장 났다고. 거짓말 하나도 없다.

수장은 맘에 들지 않는 듯, 한숨을 내쉰다.

다정: 으이구. 언제까지 그럴래? 얘가 속이 좀 좁아.

태주: 어? 좀 전에 아저씨도 아줌마 속 좁다고 했는데.

다정: 뭐라고?

수장: 맞잖아.

다정: 너 커피 마시지 마. (태주에게) 그리고 나 아줌마 아니야.

다정, 수장 앞에 있던 커피를 뺏는다.

수장: 이것 봐.

다정: 그럼 이제 어디로 가?

태주는 아무 말 없이 음식을 먹는다.

수장: 몰라 얘도. 자기가 어디로 가야 할지. 집은 어딘데?

다정: 다 먹고 말해도 돼.

태주: 집으로는 안 가요.

다정: 왜?

수장: 집 나왔다니깐.

다정: 넌 조용히 해.

태주: 이유는 많아요.

수장: 그니까 왜. 애가 비밀이 많아.

다정: 왜 말을 그렇게 해? 밥이나 먹어.

태주: 아줌마 저 충전기 좀 빌려주세요.

다정: (수장에게) 차에서 충전기 좀 가져와. (태주에게) 그리고 언니라고 해줄래?

수장: 아, 라면 불어.

다정: 내 핸드폰도.

수장, 못 이기는 척 일어나 간다.

다정: 집으로 다시 못 가는 이유가 집을 나온 이유랑 같나?

태주: 비슷해요.

다정: 그럼 계획은 있고?

태주: 모르겠어요.

다정: 다시 돌아가지 않으려면 계획이 필요해. 당장 오늘은 어디서 자려고?

태주: 모르겠어요…… 저 돈도 좀 빌려주세요.

다정: 돈?

태주: 서울 가서 꼭 갚을게요. 진짜로. 저 알바 할 거예요. 면접 보기로 한 곳도 있어요.

다정: 학생을 써 준대?

태주: 학생인 거 몰라요.

다정: 그럴 수가 있나? 어디서 면접 보는데?

태주는 대답이 없다.

다정: 너가 오늘 처음 본 나한테까지 대답 못 하는 거 보면 너도 그게 잘못된 걸 아는 거네. 그럼 굳이 하지 않는 게 좋아. 집이 싫어서 나왔으면서 나와서까지 뭐하러 잘못된 것부터 시작해. 그것도 곧 싫어질걸.

태주: 지금보다 더 싫어질 건 없어요.

다정: 그래도 나쁜 일은 결국엔 싫어져.

태주: 다른 사람한테 나쁜 일이라고 해서 저한테도 나쁜 일이 되는 건 아니에요.

다정: 그래. 그건 그럴 수 있겠다. 집은 왜 가기 싫은데?

태주: 언니는 말해도 몰라요.

다정은 태주의 대답을 기다린다.

태주: ……집에 혼자 있기 싫어요. 엄마도 싫고.

다정: 집에 혼자 있어?

태주: 아빤 원래 없고, 엄만 맨날 나가요. 이상한 사람들 만나요.

다정: 이상한 사람들?

태주: 네. 이상한 아저씨들이요. 엄마가 집 보증금도 빼서 어차피 곧 나가야 해요.

사이

태주: 전 엄마가 아팠으면 좋겠어요. 아프면 집에 있으니까.

사이

태주: 지금 저 나쁘다고 생각하고 있죠?

다정: 아니. 난 그래도 너가 일단 집으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아.

태주: 아저씨랑 똑같네. 언니가 뭘 알아요?

다정: 나랑 걔랑 똑같은 게 아니라 대부분 똑같이 말할 거야.

태주: 자기 일 아니니까 똑같이 말하겠죠. 그렇게밖에 생각 안 하니까.

다정: 아니. 집 나와 본 사람들은 다 알아. 걔도 나도 집을 나왔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고.

태주: 뻔하지. 집 나오면 고생한다고요?

다정: 너 지금 이러고 있는 건 고생 아닌 것 같아? 땀 흘리고 눈물 흘리는 것만 고생 아니다, 너.

태주: 안 빌려줄 거면 함부로 말하지 마요!

다정: 집으로 가. 가서 엄마 기다려.

태주: 제가 엄마를 왜 기다려요! 엄마가 저를 기다려야죠!

다정: 엄마라고 꼭 자식을 기다려야 하는 건 아니야.

태주, 말이 없다.

다정: 엄마가 너를 안 기다리면 너가 기다려줄 수도 있는 거지.

태주: 엄만 저 안 필요해요.

다정: 조금만 더 기다려 봐. 엄마 너 필요해.

사이

다정: 내가 기다려봐서 알아.

태주는 말없이 다정을 쳐다본다.

다정: 돈은 빌려줄게.

태주: 됐어요.

다정: 갚진 않아도 돼.

태주: 왜요? 지금 저 불쌍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다정: 아니. 내가 널 왜 불쌍하게 생각해?

태주: 집 나오고 갈 데 없고 돈 없다고 하니까 불쌍하게 생각하는 거 맞잖아요!

다정: 내가 안 갚아도 된다고 해서 그래?

태주는 울음을 터뜨린다. 다정은 태주에게 휴지를 건네고, 태주의 울음이 그치길 기다린다. 그때 수장이 온다. 수장은 쇼핑백을 들고 있다.

수장: 왜 그래? 울어?

다정: 내가 그런 거 아니야. 울지 마. 빌려준다니까?

수장: 뭘 빌려줘? 돈?

다정: 그럼 어떡해.

수장: 집으로 보내야지. 돈을 빌려준다고 해?

다정: 집에 가기 싫다잖아.

수장: 싫다고 안 보내?

다정: 너도 지금 싫다고 안 가고 있잖아.

수장: 나랑 얘랑 같아?

다정: 다를 건 뭐야. 집 나온 건 똑같지.

수장: 안다정!

태주: 아줌마 아저씨가 왜 싸워요!

다정: 우리 싸운 거 아니야. 나 그리고 아줌마 아니라니까.

수장: 싸운 거 아니야. 얘기한 거야. (다정에게) 그리고 너가 왜 아줌마가 아니야? 아줌마지.

다정: 빌려줄게.

수장: 데려다줄게. 집으로 가자.

다정: 싫다는 애를 왜 자꾸 밀어붙여?

수장: 넌 어른이 왜 그러냐?

다정: 너 왜 어른인 척해?

태주: (동시에) 왜 자꾸 어른인 척해요?

다정: 어른도 아니면서.

수장: 자, 우리 이러지 말고 생각을 하자. 생각.

다정: 무슨 생각을 해. 너 집에 갈 거야? 차 고치는 대로 바로 가?

수장: 아, 나 말고! 태주!

다정: 태주 집에 보낼 거면 너도 집 가!

수장: 너 왜 그래?

다정: 결혼할 사람 부모님 뵙겠다는 게 이상한 거야?

수장: 그 인간은 볼 필요 없다니깐.

다정: 넌 우리 엄마 봤으면서 난 왜 못 보게 해?

수장: 부모가 아니니까 그렇지.

다정: 너가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게 되냐? 괜히 고집이야.

수장: 넌 다 알면서 왜 고집이야?

다정: 지금 내가 이러지 않게 생겼어? 그럼 아버님 뵙지도 않고 그냥 식 올려? 그럴까? 너 내 생각은 안 해?

태주, 일어난다.

태주: 저 갈래요.

수장: 어딜 가?

태주: 무슨 상관인데요. 어차피 다 자기들이 중요하지. 다 똑같아.

태주, 다정의 구두를 벗는다.

태주: 제 신발 주세요.

다정: 미안해. 태주야.

태주: 신발요. 제 신발 주세요. 갈 거예요.

수장: 일단 충전기. 우린 또 있어.

수장, 태주에게 충전기를 건넨다.

다정: 왜 줘. 여기 충전할 데도 없어.

수장: 어쨌든 필요하잖아.

다정은 슬리퍼를 벗는다. 태주는 다정이 신던 슬리퍼를 신으려 한다. 수장은 쇼핑백에서 운동화를 꺼내 태주 발밑에 내려놓는다.

수장: 이거 신어. 슬리퍼도 커 보이던데.

다정: 어디서 찾았어?

수장: 트렁크에 있길래.

다정: 신어. 그거 나 몇 번 신지도 않은 거다. 빌려주는 거야.

태주: 신발 빌려달라고 한 적은 없어요.

다정: 그럼 가져. 어차피 나 이제 이거 안 신어.

태주는 망설이다 수장이 건넨 운동화를 신는다. 다정은 다시 태주의 삼선 슬리퍼를 신는다.

다정: 그럼 난 이거 신어야지!

그때, 빗물이 조금씩 떨어진다.

수장: 비 또 오기 시작한다. 일단 차로 가자.

태주: 집 안 간다고요!

수장: 알겠어. 일단 가자. 곧 엄청나게 쏟아질 거야.

다정: 차 고치면 우리 집으로 가자.

태주: 네?

다정: 지금은 가기 싫다며. 나도 얘도 좀 씻어야 하고. 너 핸드폰 충전도 해야 하잖아.

수장: 그래. 가서 충전하고 집에 전화해. 너 어디 있는지는 아셔야 할 거 아니야.

다정: 너도. 너도 가서 집에 전화해.

수장: 아…….

다정: 알겠지?

태주: 어차피 전화 안 받을 거예요.

다정: 받을 때까지 해. 문자를 남겨 놓던가.

태주: 뭐라고 해요?

수장: 친구 집에 있다고 해.

태주: 거짓말이잖아요.

다정: 뭐가 거짓말이야. 같이 기다려줄게. (수장에게) 너도 꼭 전화해. 안 그러면 두 사람 다 오늘 집에서 쫓겨날 줄 알아.

수장: 가면서 뭐 사 가자. 집에 아무것도 없어.

다정: 약속했다. 가자!

세 사람, 일어난다. 태주는 수장과 다정을 따라가다가 뭔가 깜박 잊은 듯 뒤돌아본다. 태주, 테이블 쪽으로 다시 돌아가 캐리어를 끌고 온다. 세 사람, 함께 간다.

빗방울이 점점 더 굵어진다.

암전.


 

 

  <당선소감>

 

   -

  그냥 좋아한다는 사실은 점점 소용없어졌습니다. 모든 과정이 유쾌하고 즐겁진 않았습니다. 매일을 부지런히 기억한 것도 아닙니다. 무념무상으로 보낸 하루가 더 많았습니다. 하지만 저란 사람은 무슨 일을 해도 똑같았을 거 같습니다. 좋아하다 가도 싫어하고, 그러다 어느 정도 참을 만해지면 결국 싫어하는 마음을 잊어버리는, 그런 식의 반복이었을 겁니다.

  아직은 이게 맞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마음이란 건 날마다 다릅니다. 이유 없이 보상받는 기분은, 내일이면 지나갈 오늘치의 기분일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어차피 무슨 일이든 똑같을 거라면, 조금 더 해보고 싶습니다.

  힘든 시기 학교를 다니는 동안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게 도와주시고, 쓴 것보다 더 깊이 읽고 이야기해주신 성기웅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소중했습니다.

  박해성 교수님, 쓰고 싶은 생각 맘껏 쓸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시기 써낸 두서없는 글 덕분에 해소되고,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고선희 교수님, 교수님께서 해주신 말과 따뜻한 응원 덕분에 힘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광화 교수님. 어떤 마음이든 그 마음을 당연히 여기게 되면 항상 생각합니다. 함부로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천천히 해보겠습니다. 여전히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어서 좋아요. 늘 감사합니다.

  밀린 말이 많습니다. 이 시간이 지나고 나야 떠오를 말들을 생각하며 앉아 있는 하루를 연장하고 싶습니다. 잘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런 마음입니다.

● 1993년 서울 출생 
● 서울예대 극작과 졸업예정


 

  <심사평>

 

  

  냉동인간, 우주, 외계인의 인류 지배 등 SF적 소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점도 특징적

  올해 신춘문예 희곡·시나리오 부문은 전년보다 약간 적은 103편이 응모되었다. 일상의 삶을 그린 작품이 다수였지만 장애, 탈북, 노인문제, 청년실업 등 사회문제를 다룬 작품도 적지 않았다.

  그 외 냉동인간, 우주, 외계인의 인류 지배 등 SF적 소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점도 특징적이었다. 전체적으로 주제나 기법의 측면에서 안정적이고 패기가 엿보이는 작품이 여럿 있어 작품을 고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최종심에 오른 것은 '줄 위에서', '로봇 아이', '집으로 가는 길' 등 세 작품이었다. '줄 위에서'는 이른바 '라인스탠더', 돈을 받고 줄을 대신 서주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신선한 소재, 자연스러운 대사, 매끄러운 극의 전개 등이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결말로 갈수록 긴장이 느슨해져 주제가 잘 부각되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로봇 아이'는 인간의 필요를 위해 고안된 A.I. 로봇의 이야기로, 로봇과 인간이 교감하는 이야기가 감동적이었다. 1-4장의 구성을 좀더 긴밀히 하고 미래사회를 바라보는 작가의 관점이 부각된다면 더 좋은 작품이 되리라 본다.

  '집으로 가는 길'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우연히 만난 소녀와 젊은 남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설정은 단순하지만 인물이 살아있고 희곡언어 구사력이 예사롭지 않다. 주제의식의 깊이나 인물 형상화에 있어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무대를 상상하게 하는 필력으로 볼 때 앞으로의 가능성에 큰 기대를 걸며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하는 바이다. 축하하며 건승을 기원한다.

심사위원 : 김윤미, 조보라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