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제주신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붉은사슴이 사는 동굴 / 서정애
붉은사슴이 사는 동굴 / 서정애 붉은 불빛 한 줄기가 게슴츠레 눈을 뜬다. 확대기에 필름을 끼우고 적정 빛을 준 인화지를 바트에 넣고 흔든다. 마지막 수세를 거치면 흑과 백의 피사체가 서서히 드러날 것이다. 액체 속의 인화지를 살짝 흔들어준다. 비로소 필름 속에 갇혀있던 사물이 제 존재를 드러낸다. 중국 윈난성에는 ‘붉은사슴동굴’이 있다. 동굴 벽면에 붉은사슴이 그려져서 붙여진 이름으로 일만 오천 년 전쯤의 벽화로 추정된다고 한다. 사슴은 큰 뿔을 들이밀며 금방이라도 벽을 박차고 나올 듯 뒷다리를 앙버티고 있다. 빙하기에 살았다는 붉은사슴동굴인은 어떤 연유로 캄캄한 곳에서 벽화를 그렸던 것일까. 주술이나 신앙의 표현이었겠지만 자연의 위대함을 빌려와 자신의 소망을 거기에 투영한 게 아니었을까. 혼신의 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