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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실종자의 미궁 / 차선일

 

1. 실종과 미궁



실종자는 사회 바깥의 사람이다. 그는 이 세계 어딘가에 존재하지만 오직 몸이 없는 상태에서만 그러하다.(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2015, 35면) 몸이 없으므로 어떤 물리적 장소를 점유할 수 없고, 자신만의 거처가 없으므로 사회적 인격 또한 말소된다. 그가 누린 모든 권리는 유예되고 재산은 유실물로 처분된다. 실종자는 죽은 자의 자격으로 추방되는 것이고, 공백으로서만 실증되는 것이다. 이처럼 실종자는 배제[공백]의 방식으로 포함[존재]되는 예외적 인간이라는 점에서, 죽은 자로서 살아 있는 유령적 존재라는 점에서 ‘인간적인 것’이 박탈된 헐벗음의 상태로 살아가는 현대인의 초상에 대한 적절한 은유로 여겨질 수 있다. 가령 최후의 인간(니체)에서부터 동물(코제브), 벌거벗은 생명(아감벤), 인간 쓰레기(바우만), 몫 없는 자(랑시에르), 인간-동물(바디우), 유령(데리다)에 이르기까지, 실종자는 의미화되지 못하는 인간의 삶에 부착되는 저 숱한 명명들과 같은 이름이다.


편혜영의 소설은 세계의 도처에서 사라져버린 사람들을 추적하고 기록하며, 실종의 원인과 내막을 탐색하는 이야기이다. 무엇보다 그의 소설에는 크고 작은 실종 사건들이 끊임없이 발생하는바, 돌이켜보면 실종 사건은 편혜영 특유의 그로테스크한 괴담들이 출몰하는 진원지이기도 했다. 예컨대 『아오이가든』에서 페이지마다 발견되는 피 묻은 옷가지와 토막 난 시체, 토사물과 분뇨가 뒤범벅된 오물은 애초 실종 사건의 단서들로 발견된 것들이다. 저 역겨운 흔적들은 어느 날 홀연히 사라져버린 여직원(「문득,」)과 아내(「시체들」)와 소년(「만국박람회」)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류품들이었다. 이후 실종 사건은 더욱 모호한 형태로 빈발한다. 교통사고 후 멀쩡하게 살아남은 사내가 증발하고(「서쪽으로 4센티미터」) 파견근무자나 그의 담당자(「토끼의 묘」, 『재와 빨강』), 숲의 관리인이나 공장장(『서쪽 숲에 갔다』, 「통조림 공장」)들이 돌연 사라진다. 늑대와 코끼리가 동물원과 놀이공원을 뛰쳐나가 행방이 묘연하고(「동물원의 탄생」, 「퍼레이드」), 마술쇼의 원숭이는 마술처럼 증발한다.(「만국박람회」) 중요한 서류나 배달물품 역시 종적 없이 사라진다(「분실물」, 「관광버스를 타실래요?」). 한편 『밤이 지나간다』의 근작들에서는 한 줌의 비밀도 갖지 못한 고독한 존재들의 내면적 궁핍을 묘사하며, 형태 없는 마음의 실종마저 사건화하고 있다.


실종자는 어디로 사라지는 것일까? 실종은 매번 이해할 수 없는 미스터리로 나타난다. 사라진 이유를 알 수 없고, 추방된 내막을 짐작할 수 없다. 이러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속성 때문에 실종자는 헐벗은 존재를 가리키는 저 숱한 명명들과 구별된다. 헐벗은 인간을 실종자로 표상할 때 세계는 미궁의 모습으로 현상한다. 실종자의 세계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모호한 불안과 불투명한 공포가 전염병처럼 만연해 있는 세계이다. 이 불가해한 미궁의 세계가 편혜영의 인물들이, 다름 아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다. 주지하듯이 편혜영의 소설은 문명의 배후와 도시의 하부, 일상의 이면에 잠복해 있는 폭력과 죽음, 그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출구 없는 미로의 형상으로 주조해왔다. 이 음침하고 기괴한 구조물 속에는 악취를 내뿜는 쓰레기와 배설물, 동물의 썩은 내장과 절단된 신체들이 산재해 있으며, 이와 관련된 끔찍한 괴담들이 끊임없이 유포된다. 괴담들이 발생하는 공포의 근원, 즉 이 세계가 미궁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원인은 미스터리한 실종들 때문이다. 그 누구도 실종자들이 사라진 이유를 알 수 없으므로 세계 자체가 하나의 수수께끼가 된다. 세계는 구멍이 뚫려 있는 상태로, 현실적인 일관성을 잃은 채 조각조각 와해된다. 이런 맥락에서 편혜영 소설에 편재되어 있는 절단된 신체와 오물들은 실종자의 것이면서 또한 세계의 무의미한 단편들이다. 실종은 어떠한 삶도 뿌리내리지 못하는 세계의 헐벗음을 반증하는 흔적이다.


다시 실종자란 무엇인가? 실종자는 삶의 의미를 모조리 박탈당한 상태, 초라하고 보잘것없으며 차라리 없느니만 못한(less than nothing) 존재에 대한 은유이다. 미궁은 이러한 실종자를 무수히 양산하는 세계의 실재를 가리키는 알레고리이다. 편혜영은 실종과 미궁의 장치를 통해 문명, 도시, 일상 그리고 개인의 내면에서도 인간의 삶을 헐벗은 상태로 전락시키는 세계의 기만적인 논리를 발견한다. 이제 우리는 헐벗은 삶의 형식에 갇힌 실종자들, 요컨대 언제나 일상 너머를 꿈꾸는 속물적인 도시인들, 단지 순응함으로써 생존하기만을 바라는 파견자들, 한 줌의 비밀조차 간직하지 못한 초라한 개인들을 대면하고, 그들이 악몽 같은 미궁을 벗어나는 지난한 과정을 거듭 목도할 것이다. 



2. 일상 혹은 미궁의 내부



『아오이가든』(문학과지성사, 2005)은 의혹과 음모가 빚어내는 괴담의 세계였다. 이곳에서는 실종된 여자들이 변사체로 발견되고 유기된 아이들이 기아로 죽어가는 끔찍한 참상들이 잇달아 일어난다. 그런데 더욱 공포스러운 것은 이러한 사태들이 모두 원인불명으로 판명되면서, 저수지 속 “괴물”이 사람들을 잡아먹는다(「저수지」) 따위의 괴담들이 유포되고 불안을 확산시킨다는 점이다. 물론 저수지 속 “괴물”의 존재나 인간이 개구리를 낳는 재앙(「아오이가든」)은 한낱 유언비어일 뿐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괴담의 상상력은 그 나름 어떤 효용이 없지 않다. 그것은 모든 음모론이 그렇듯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누설하는 한편, 이 모든 재난에 대하여 주체에게는 어떤 혐의도 추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육장 쪽으로』(문학동네, 2007)에서는 더 이상 괴담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야기의 무대가 일상적 삶의 공간으로 옮겨오면서 불가사의한 재앙은 사라진다. 이러한 변모는 일상 자체가 괴담의 진원지일지도 모른다는 인식의 전환에 따른 결과이다. 괴담의 세계와 일상적 현실을 연결시키는 매개자는 일상적 삶을 살아가는 범상한 개인들, 다시 말해 일상 너머의 삶을 꿈꾸는 욕망의 주체들이다. 일상 자체가 불가해한 미궁으로 변모하는 것은 초자연적인 원인이 아닌 바로 평범한 일상인의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무너져가는 담장을 다시 쌓는 작업을 소재로 삼고 있는 「밤의 공사」는 편혜영이 일상의 미궁을 도해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적절한 범례가 되는 작품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그”는 쥐떼들로부터 평온한 가정을 보호하기 위해 담장을 보수하는 공사를 시작한다. 그러나 “밤의 공사”는 이내 몇 가지 난관에 봉착하는데, 가장 큰 문제는 평온한 일상의 회복을 바라던 “그”의 마음가짐이 변질되었다는 점이다. 즉 담장을 쌓기 위해 땅을 파면서 “그”는 어쩌면 “담장 밑에서 고대 왕의 부장품이 출토될지도 모른다”(p.107)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가 사는 마을은 과거 “사적지구”로 지정되어 곳곳에 고분들이 널려 있었고, 간혹 땅을 팔 때마다 유물이 출토되기도 한 곳이었다. 해서 집터를 파헤쳐보면 실제 “고대 왕의 부장품”이 묻혀 있을지도 몰랐다. 이처럼 보물에 대한 기대 때문에 “밤의 공사”는 처음과 달리 평범한 담장 축성이 아닌 은밀한 도굴 행위로 변질되어 버린다. 


그러나 “고대 왕의 부장품”을 발굴할지 모른다는 기대와, 애초에 담장 공사를 시작하게 된 동기는 서로 배치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서 “그”의 마음은 변질되었다기보다는 단지 초과된 것이다. 왜냐하면 “고대 왕의 부장품”은 일상적 삶의 평온한 질서가 유지되길 바라는 욕망의 원인인 동시에 그 욕망을 파괴하는 덫이기 때문이다.


이 욕망의 덫이 작동되는 원리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그 덫에 걸려든 인물, 즉 “파산 통보”를 받은 「사육장 쪽으로」의 위태로운 가장이다. 스스로 자책하듯이, 파산은 가장인 “그”가 자초한 일이나 다름없다. “그”는 이미 상당한 빚을 떠안은 채 연립주택에 거주하면서도 다시 융자를 얻어 전원주택을 매입했기 때문이다.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가 주택을 매입한 것은 “전원주택이야말로 진정한 도시인의 꿈”(p.48)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도시를 벗어나 전원에서 사는 “진정한 도시인”의 삶을 선망한다. 그런데 “그”는 “도심 한복판에 산 적도 없고 도시를 떠나본 적도 없다는 점에서” 이미 “전형적인 도시인이었다.” 그러니까 “전형적인 도시인”이란 “전원주택”의 삶을 꿈꾸는 것, 곧 “진정한 도시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일상성에 대한 정의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일상적 삶은 일상 너머의 삶을 꿈꾸는 욕망에 의해서만 유지된다. 그렇기 때문에 「밤의 공사」의 가장이 “고대 왕의 부장품” 발굴에 집착하는 것은 담장을 쌓는 일의 연장선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오히려 “고대 왕의 부장품”에 눈이 먼 “그”의 모습은 기실 틀에 박힌 일상인의 전형에 가깝다. 그렇다면 「소풍」의 연인이 고단한 일상을 벗어나 “W시”로 여행을 떠나는 것도 일상적 삶의 관성이며, 마찬가지로 「동물원의 탄생」에서 “보험회사의 사무원”이 사표를 던지고 야성적인 “늑대”를 잡는 사냥꾼이 되려는 일탈도 실상 전형적인 도시인의 생리이다. 또한 평소 “‘아무’ 취급이나 받아”오다 비밀스러운 업무를 맡으면서 ‘특별한 사무원’이 될 수 있으리라는 「분실물」에서의 “박”의 기대도, 8년의 지사 근무를 정리하고 서울로 상경하며 ‘크림색 가죽 소파’가 상징하는 안락한 생활을 꿈꾸는 젊은 부부의 바람도(「크림색 소파의 방」)도 그들이 평범한 일상인이자 범상한 사무원이며 전형적인 도시인이라는 표식이다.


이러한 일상성의 역설에 따른다면, ‘아오이가든’의 세계를 뒤덮고 있는 그로테스크한 악몽의 이미지 역시 재해석할 수 있다. 그 기이하고 역겨운 형상들은 문명과 도시와 일상의 구획된 질서와 대립하는 것도, 그 질서를 존속하고 유지하기 위해 은폐하고 있는 어떤 이면적 실체도 아니다. 오히려 쓰레기와 역병과 시체들은 문명의 자원이자 도시의 동력이며 일상의 토대다. 두 세계는 분리 불가능하며, 상호 간 의존과 구속의 이중적 고리로 결박되어 있다. 이러한 두 세계의 적절한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 삶은 돌이킬 수 없는 비참한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편혜영은 이 균형과 파국의 인과관계, 즉 미궁의 구조를 특유의 알레고리 기법으로 정밀하게 도해한다. 「밤의 공사」의 무대인 마을의 조감도를 보자. 「밤의 공사」에서 “그”의 집은 “습지”를 품은 풀숲과 “고분” 사이, 달리 말해 죽음과 일상 사이에 위치해 있다. “습지”는 구역질 나는 악취를 풍기는데, 그것은 “분뇨와 음식 찌꺼기, 애완동물의 사체” 등 마을의 모든 쓰레기가 모여들어 썩어가는 탓이다. 한편 마을이 속한 “D시”는 무덤의 도시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D시의 고분으로 먹고살았다”(p.114)고 할 정도로, “고분”은 마을과 도시의 젖줄이다. “고분”이 “그”의 집을 지탱하는 경제적 자양분이라면(그는 “고분이 널려 있는 능원의 관리사무소”에서 일했다), 반대로 “습지”는 평온한 일상에 균열을 만들고 삶을 파괴하는 ‘검은 물’의 수원지이다.


“그”의 집은 지정학적 위치상 “고분”과 “습지”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쇠락한 무덤을 지키는 파수꾼”인 “그”의 삶은 “습지”(죽음)의 숙주이면서 동시에 “고분”(죽음)에 기생함으로써만 유지된다. 문제는 “습지”로부터 자신의 일상을 보호하기 위해 담장을 쌓는 “공사”가 그의 삶에 양분을 제공하는 “고분”의 젖줄을 차단하는 행위라는 사실을 “그”가 깨닫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러니까 “담장”은 검은 물의 유입을 차단하는 빗장이면서 동시에 은밀한 수로이기도 한 것이다.


“그”가 찾고자 했던 “고대 왕의 부장품”은 그것이 “고분” 아래 안치되어 있을 때에만 보물로 존재한다. “고분”의 형식이 파괴되면 보물은 흔적 없이 증발하고 마는 것이다. 실제로 「밤의 공사」의 가장이 땅을 파헤치고 발견한 것은 “오물을 실어 나르는 하수관”뿐이었다. 게다가 “고분”이 상징하는 삶의 문화적 형식을 훼손한 대가는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이거나 끔찍한 파국으로 되돌아온다.


편혜영은 욕망의 초과 경제가 삶의 형식을 파괴함으로써 결국 그 자신마저 죽음에 이르는 인물들의 참담한 운명을 해부한다. 여기서 해부의 목적을 누차 강조할 필요가 있겠다. 그것은 “습지”의 ‘검은 물’과 우글거리는 ‘쥐떼’로 상징되는 끔찍한 실재의 침입, 삶의 안정과 질서를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실재의 가공할 만한 파괴력을 묘사하는 데 있지 않다. 문제는 ‘밤의 공사’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다시 말해 일상의 질서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근원이 다름 아닌 ‘검은 물’을 유입시키는 원인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실재의 ‘검은 물’은 담장 바깥에서 유입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내부에서 새어 나온다. 도시와 일상에 양분을 공급하는 혈류에 흐르는 것이 ‘검은 물’인 셈이다. 이렇듯 고분과 습지, 일상과 모험, 도시와 숲, 문화와 실재, 삶과 죽음은 한 몸으로 얽혀 있는바, 이것이 곧 미궁의 실체이다. 미궁은 인간의 내부에 있다. 



3. 파견의 미궁, 버려짐의 세계 



『사육장 쪽으로』 이후 이른바 ‘파견’이라는 주제 아래 묶이는 일련의 작품들은 이전과는 다른 서사적 논리로 작동하는 미궁의 형태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가장 현격한 변화는 미궁 속으로 유인하는 작인(agent)이 ‘욕망’에서 ‘명령’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욕망’과 ‘명령’은 반대어이다. ‘파견 명령’은 욕망하는 주체가 아니라 ‘적응하는 동물’을 양산하기 때문이다. 파견자는 어떤 명령에도 별다른 저항 없이 복종하고 순응하는 인간들인바, 그들에게는 내면이 없으며 따라서 “고대 왕의 부장품” 따위에 현혹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저 순응자들이 파견지의 미궁에서 마주하는 것은 죽음보다 가혹한 대가인 고립이다.


파견의 일차적인 특징은 그것이 임의적이라는 데 있다. 『재와 빨강』(창비, 2010)에서 방역회사에 근무하는 “그”가 새로운 지사의 경영인 연수를 겸한 특별한 파견직에 발탁된 것은 단지 ‘쥐를 잘 잡기’ 때문이다. 이 우스꽝스러운 희화화가 말해주듯이, 파견근무는 처음부터 그 동기와 목적이 정해진 바 없으며, 단지 불합리한 명령으로 하달될 뿐이다. 파견은 그 자체로 하나의 수수께끼처럼 보인다. 예컨대 「관광버스를 타실래요?」에서 “지정된 장소”에 정체불명의 “자루”를 운반하는 “에스”와 “케이”의 간단한 업무(그들은 이 일을 파견/출장이라고 생각한다. “이것도 일종의 출장인 셈이지?”, p.102)가 내포하고 있는 불가해한 성격이 그렇다. 기실 이 이야기에는 미스터리를 유발하는 어떤 트릭도 없다. 이 작품의 기이한 모호함은 결말에 이르러서도 밝혀지지 않는 “자루”의 수수께끼 때문이 아니라 “절대 자루를 열어 봐서는 안 된다”는 “상사의 지시”에 순응하는 “에스”와 “케이”의 태도에서 기인한다.


“에스”와 “케이”가 “자루”를 열어보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라고 묻는 것은 어리석다. 「정글짐」의 상사가 말하길, “파견”은 “퀴즈가 아니”다. “우리를 고용한 사람이 누군지 모른다는 것 말이야. 우리가 모르는 게 그것뿐일까? …… 나는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는데, 자네는 알고 있나? 내가 아는 건 생계 때문에 나 스스로 고용을 자처했다는 것뿐이야.”(p.158) 파견자들에게 필요한 덕목은 명령의 강제성을 선택의 자발성으로 전환하는 능력이다. 자발적으로 순응함으로써 그들은 어떠한 혹독한 환경에서도 살아남는다. 이 세계의 비밀스러운 의혹에 관하여 어떤 소송도 제기하지 않고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는 것, 오직 살아남는 것만이 파견자들에게 주어진 실질적인 임무다.


그렇다면 파견 근무의 목적을 이룬 후 그들은 다시 파견 이전의 상태로 복귀할 수 있을까? 『재와 빨강』의 “그”는 일상으로 복귀하기 위해 자신에게 파견 명령을 하달한 “몰”을 수소문한다. 그러나 “몰”이란 인물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해 “몰”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모든 파견근무자에게는 예외 없이 파견 지시를 하달하거나 전달하는 안내자가 있다. 「정글짐」의 “백 이사”, 「산책」의 “지사장”, 「관광버스를 타실래요?」의 “상사”가 그렇다. 「토끼의 묘」에서 “그”에게 파견 근무를 제안한 것은 “선배”인데, 이상하게도 파견 근무를 맡은 직후 “선배”는 홀연히 실종되고 만다. 소설의 결말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선배”가 실종된 내막을 알게 되는데, 그것은 “선배” 역시 파견근무자였기 때문이다. 「토끼의 묘」의 한 동료는 이 수수께끼를 푸는 몇 가지 단서를 알려준다. “그”가 업무를 보고하는 “담당자”인 동료의 충고에 따르면, “시기만 다를 뿐 우리는 모두 파견 근무 중이”(p.20)다. 또한 “그”가 맡은 파견 업무가 전적으로 무용한 것처럼, “파견 근무를 한다는 게 특별한 일은 아니”(p.19)다. 모든 파견 근무는 동일하며, 언제라도 교환 가능하다. 과거 “선배”가 그러했듯, “그” 역시 “후배”에게 파견 근무를 제안한다. 그리고 “후배”가 출근하면서 “그”는 결근한다. “그”가 맡은 업무가 전적으로 무용한 일이었으므로, 굳이 나갈 까닭이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출근을 하지 않고 결국 사라지는바, 이것이 “선배”가 실종된 연유였다.


“몰”은 없다[歿/沒]. 있다면, “몰”은 다름 아닌 “그” 자신이다.(“그”는 “몰”이라고 적힌 옷을 입고 다닌다.) 「토끼의 묘」에서 동료가 말한 대로, “몰” 역시 파견근무자임이 틀림없다. 모든 파견근무자는 동일인물이나 다름없으며, 누구와도 대체 가능하다는 사실은 한 가지 역설을 내포한다. 그것은 파견 명령의 발신자와 수신자가 동일하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재와 빨강』에서 “그”를 “C국”으로 파견한 사람은 역설적이지만 바로 “그” 자신이다.


이처럼 파견자가 살아가는 장소는 수없이 복제된 파견자들이 만든 동일성의 미궁이다. 모든 것이 동일한 파견지의 미궁에서 그들은 누구와도 공유하지 못하는 외로움을 느끼며 고립된다. 「토끼의 묘」에서 “그”는 불현듯 “자신이 이 도시에서 아무와도 친교를 나누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p.27)고, “처음으로 누군가와 간절히 얘기하고 싶”(p.26)은 충동을 느낀다. 더불어 「산책」에서 숲에서 길을 잃은 “그”가 도시를 더 잘 이해하게 된 것도, 「정글짐」에서 낯선 도시로 옮겨온 “그”가 익숙한 도시로 되돌아가고 싶은 것도 모두 “외로움” 때문이다. 파견자들의 “외로움”은 그들이 낯선 곳에 완전히 버려지고 유기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끔찍한 비명이다. 결국 파견자들이 당도한 곳은 낯선 도시이거나(「정글짐」) 울창한 숲의 미로이며(「산책」) 인간 이하의 악몽 같은 세계다.(『재와 빨강』) 이러한 파견지에서 그들은 자신이 과거의 세계와 완전히 단절되고 주변 세계로부터 철저하게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제 ‘파견’이 무엇인지 정의 내릴 수 있겠다. ‘파견’이란 갈기갈기 찢어져[派] 무용하게 소모되고 버려지는[遣] 비참한 인간의 삶을 양산하는 사회적 형식이다. 파견된다는 것은 단절되고 고립된 ‘고독한 개인’이 된다는 것이다.


파견의 본질이 이러하다면 파견자들의 삶에 나타나는 동일성의 의미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 즉 파견자들은 모두 동일하기 때문에 교환[파견]되었던 것이 아니라 교환[파견]되었기 때문에 동일한 것이다. 다시 말해 찢어지고 버려진 헐벗은 존재들이기 때문에 파견자들의 삶과 형상은 동일할 수밖에 없다. 반복하자면, 파견자들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4. 비밀의 미궁, 미궁의 비밀



이제까지 편혜영 소설에서 실질적인 주인공은 특정 인물이 아닌 ‘장소’가 담당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오이가든’이 그러했고, 이후 작품들에서도 무덤을 품고 있는 도시 형태, 공장지대와 검은 강에 둘러싸인 도시의 외곽, 어두운 밤의 고속도로, 울창한 숲과 도시 하부 등 알레고리적 장소의 함의가 인물의 그것을 압도했다. 이 장소들은 지금까지 살펴본바 속물적인 일상인과 순응하는 파견자들이 각자의 파국과 고립에 이르는 과정을 반복적으로 재연하기 위한 특수한 무대장치이다. 실종의 원인과 실종자를 찾아내기 위한 재연의 무대에서 인물은 대개 소품에 불과했다. 그런데 근작들에서는 점차 이러한 알레고리적 장소의 인력으로부터 이탈하는 인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는 ‘실종 미스터리’가 발생하는 정황과 조건, 즉 미궁의 구조에 대한 탐색에서 그 미궁을 탈출하는 방법에 대한 숙고로 이행하는 주제의식의 변화와 맞물려 있다.


실종의 미궁으로부터 탈출하는 것, 달리 말해 사회적 실존성이 증발한 헐벗은 삶을 살아가는 실종자들이 다시 현실로 귀환하는 방법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복권시키고 살아가야 할 의미를 되찾는 것이다. 그렇다면 『밤이 지나간다』(창비, 2013)의 등장인물들이 붙잡고 있는 화두가 ‘비밀’, 더 정확히 말해 ‘비밀 없는 삶의 빈곤함’이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비밀이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존재의 질량과 무게를 증명하는 유력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밤이 지나간다』의 인물들은 저마다의 사연들 속에서 자신의 삶이 그리 대단하지 않으며 특별한 비밀도 없다는 사실로 말미암은 불안과 결핍에 시달리는 중이다. 「비밀의 호의」에서 황혼에 접어든 노인은 자신의 인생에서 과장하고 허세를 부릴 만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한탄한다. 「야행」에서 하반신이 죽어가는 불구의 노파 역시 “일생을 통틀어 지킬 만한 비밀이 없는 시시한 인생이라는 것이 그녀가 가진 유일한 비밀”(p.19)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깊은 공허감을 느낀다. 「해물 1킬로그램」의 “엠”은 아들을 잃은 “순수한 고통”이 “누구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고 누구에게도 정확히 말해질 수 없”(p.77)는 자신만의 특별한 불행이자 비밀이라고 여겼지만,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의 치료모임에 참석하면서 그 ‘고통의 비밀’이 자신만의 것이 아님을 깨닫고 낙담한다. 


일종의 ‘비밀증후군’에 시달리는 이러한 인물들의 명백한 진실은 그들이 아무런 비밀도 간직하지 못한 초라한 삶의 주인들이라는 점이다. 비밀이 없다는 것이 그들이 가진 유일한 비밀이며, 그들은 ‘비밀 없음의 비밀’을 어떻게든 유지하길 간절히 소망한다. 나아가 그들은 타자와 세계 역시 의혹과 비밀을 누설하지 않기를 바란다. 예컨대 「비밀의 호의」에서 “그”는 오십여 년 전 “경술”이 가출했던 나흘간의 행적을 안다면 “경술의 일생을 알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 나흘의 시간이 “경술”의 운명을 결정한 비밀이라고 생각하지만, 끝내 그 비밀을 캐묻지 않는다. 「서쪽으로 4센티미터」의 “조”는 삶이 감추고 있는 적의와 불공평, 불합리한 우연 따위에 별다른 호기심을 느끼지 않는 심드렁한 인물이지만, 동료가 전해준 기이한 사건, 즉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뒤 갑자기 실종된 남자의 이야기에 매료된다. “조는 언제고 그런 순간이, 우연히 교통사고에 휘말려 그가 없이도 태연히 계속될 이 세계로부터 사라져버리거나 사라지고 싶어지는 순간이 닥쳐올지 모른다고 막연히 생각해왔다.”(p.154)


이처럼 인물들이 허울뿐인 비밀을 끈질기게 고수하려는 까닭은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돌이킬 수 없이 훼손되고 파괴된 자신의 삶을 방어하려는 것, 더 정확히 말해 삶을 파탄에 이르게 만든 원인과 그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함구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곧 『서쪽 숲에 갔다』(문학과지성사, 2012)에서 “박인수”가 깨닫게 되는 ‘숲의 음모’의 실체이다. 


『서쪽 숲에 갔다』는 실종 사건을 추적하는 탐정소설로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파견에 관한 이야기다. 연이은 실패와 좌절로 심한 패배감과 자괴감에 빠져 있는 “박인수”가 “김 대령”의 파격적인 제안을 수락하여 어느 낯선 도시에서 숲의 관리인이 되었을 때, 그는 이른바 파견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박인수”는 파견지에서 철저하게 버림받고 고립되는 헐벗은 상태에 직면한다. 그런데 『서쪽 숲에 갔다』가 이전 파견자들의 이야기와 다른 점은 삶을 파탄에 이르게 만든 주범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 성찰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알코올중독자인 “박인수”는 자신이 술에 취해 저지른 끔찍한 일들이 거짓임을 밝히기 위해 숲에서 벌어지는 불법적이고 야만적인 일을 추적한다. 그러나 “진”과의 대면에서 밝혀지는바, ‘숲의 음모’는 자신의 삶을 파탄에 이르게 한 진범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만들어낸 거대한 의혹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깨달음 이후의 그의 행적이다. 『서쪽 숲에 갔다』의 마지막 장면에서 “박인수”는 “자기 자신이야말로 영원히 알 수 없는 암흑세계”(p.337)라고 고백하면서 “처음으로 제 의지대로 움직이며”(p.333) 숲 속으로 걸어간다. 그 자신의 토로처럼, 이 행동은 분명 모순투성이의 내면, 자기 내부의 불가해한 미궁의 실체를 정직하게 응시하는 주체적 의지와 용기에 값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지와 용기의 방향성이 거대한 숲의 미궁을 벗어나는 것이라고 해도, 우리는 그가 끝내 숲을 벗어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자신의 정직함과 용기를 알고 있는 이가 오직 그 자신뿐이라는 점에서 그의 행보는 ‘자신만의 유일한 비밀’로 남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밤이 지나간다』의 인물들이 보여주듯, 비밀은 아직 삶의 의미가 아니다. 



5. 다시 미궁 속으로



무의미한 비밀이 어떤 삶의 신호로 전환되는 과정은 「몬순」(『한국문학』, 2013년 겨울호)에 담겨 있다. 「해물 1킬로그램」의 “엠”처럼 「몬순」의 “태오”와 “유진” 역시 아이를 잃은 후 허물어져 버린 삶을 가까스로 버티는 중이다. 아이를 잃은 것은 사실 그 누구도 책임을 질 수 없는 불의의 사고였다. 그러나 “태오”는 아이가 죽어가는 순간 일어난 우연적인 일들을 엮어 어떤 의혹과 비밀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아이가 죽기 전 “유진”이 무엇을 했는지, “아기를 홀로 재워두고 나가면서까지 만나야 하는 사람이 누굴까”(p.58)라는 의문이다. 하지만 “태오”는 그 의혹에 관해 “유진”에게 묻지 않는다. 『밤이 지나간다』의 저 많은 인물처럼 “태오”는 비밀을 비밀로 남겨둠으로써 다른 무언가를 감추려 든다. 그것은 그 자신에 대한 자책과 힐난, “유진”에 대한 불신과 의혹 때문에 엎드려 잠든 아이를 그대로 두고 “유진”을 따라간 것이 아이를 죽게 만든 실수이자 원인이라는 죄책감이었다. 죄책감을 회피하기 위해 “태오”는 “유진”을 향한 의문을 비밀로 남겨두고, 그 비밀이 그들의 삶을 붕괴시킨 밝혀지지 않은 원인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 비밀스러운 삶에서 얻게 되는 것은 서로에 대한 불신과 단절이며, 철저하게 홀로 삶의 상처를 감당해야 하는 고통이다. 이것은 다름 아닌 저 파견자들이 겪었던 헐벗은 삶의 외로움과 동일한 것이다.


이 고립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비밀 따위는 없음을 인정하는 것, 비밀을 만들어낸 이유는 자신의 죄를 면죄하고 타자에게 죄를 전가하기 위해서라는 것, 자신이 그만큼 비겁하고 하찮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정직하게 대면하는 것이다. 편혜영은 「몬순」에서 자기 안의 어둠을 응시하는 방법이 비밀에 연루된 타인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라고 말한다. “태오”는 정전된 아파트 단지를 바라보며 “유진”에게 자신의 비밀을 말하리라 다짐한다. 삶을 거대한 의혹과 음모의 수수께끼로 만든 괴물은 자기 안에 있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자신이 그토록 보잘것없고 차라리 없느니만 못한 존재라는 사실을, 이를테면 단지 무를 ‘무’라고 말해야 한다. 이 최소 차이 또는 순수한 반복에 의해서 무는 어떤 신호[‘무’]가 된다. 「몬순」의 마지막 장면, 정전이 복구되는 아파트의 명멸하는 불빛이 크리스마스 전구와 같이 보이듯, 그것은 삶을 향해 보내는 실종자들의 신호다. 이 신호만으로, 이 한 줌의 ‘무’만으로도 삶은 다시 시작될 수 있다.


편혜영의 소설은 상징적 질서를 교란하고 파괴라는 실재의 침입을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작업에서 시작했다. 이 글은 그러한 실재의 누수로 붕괴된 삶을 영위하는 인간의 모습이 실종자라는 증상으로 나타나는 데 주목했다. 실종자는 헐벗음의 상태, 즉 어떤 삶의 의미도 일구어내지 못하는 초라하고 궁핍한 인간 존재에 대한 은유이다. 편혜영은 무수한 실종자가 출몰하는 현상의 원인과 내막을 추적하는데, 모든 실종 사건에는 이미 실종자 그 자신이 연루되어 있음이 밝혀진다. 삶을 파괴하는 실재의 침입을 유인한 것은 주체의 욕망이자 비밀이었던 셈이다. 이처럼 세계와 주체가 모종의 공모관계를 이루고 있는 기만적인 시스템이 곧 미궁이다. 편혜영의 소설은 이러한 미궁이 작동하는 논리와 양상을 정밀하게 도해하며, 미궁에 갇힌 실종자들의 좌절과 몰락을 집요하게 관찰한다. 


그렇다면 미궁을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 물음은 실재의 침입으로 몰락한 삶을 다시 재건하는 방법에 대한 질문과도 같다. 그 재건의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몰락을 반복하는 것이다. 편혜영은 미세한 실재의 균열로 삶이 허물어지는 과정을 관찰하며 그 몰락의 과정을 강박적으로 되풀이하고 응시한다. 그것은 삶의 의미를 증발시키는 미궁 속에서 점점 사라져 가는 인간의 실존을 직시하고 그러한 삶의 연원과 내력을 끈질기게 반추하는 태도이다. 그리고 이것이 곧 미궁을 벗어나는 방법이다. 미궁의 출구로 인도하는 아리아드네의 실은 미궁으로 들어온 바로 그 길이기 때문이다. <끝>


◇ 작품의 인용은 별도의 표시 없이 해당 작품이 수록된 소설집 또는 단행본의 쪽수만 표기.





<당선소감>

 

옹졸하지않게 문학의 門 두드리겠습니다

 

문학에 대한 애정이 식어가고 그만큼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이 깊어가던 차에 뜻밖에도 큰 격려와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꽤 오랫동안 소설을 읽는 일에 게을렀습니다. 의도적으로 등한시하며 소설이 재미없다는 말을 수시로 내뱉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왜 소설에 관한 비평을 쓰고 있었을까요? 의구심 많던 구석이 신기하게도 이제 와선 선명하게 잘 보입니다. 딱 제 됨됨이만큼 그렇듯 옹졸하고 미련하게 문학의 주변을 맴돌았던 모양입니다. 이제부터는 단도직입 문학의 문을 두드리겠다고 다짐해봅니다. 

흠이 많은 글을 뽑아주신 서영채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세심한 조언을 해주신 고인환 선생님을 비롯, 선후배와 친구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병고에 시달리는 아버지의 마음이 언제나 평안하셨으면 합니다. 글을 쓰는 동안 둘째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당선은 순전히 딸아이의 복입니다. 투고마감일은 결혼기념일이었습니다. 아내 민지에게 고맙고 사랑한다는 말을 전합니다. 가족과 동생들의 얼굴도 떠올려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늘 마음으로 경계하는 특별한 독자인 어머니에게 당선의 기쁨을 고스란히 드립니다.




◎ 약력

▶ 1977년 부산 출생

▶ 부산외대 국문과 학·석사 졸, 경희대 국문과 박사 졸업




<심사평>

 

과시적이지 않은 이론… 독자들 위해 더 친절하게 써야

 

문학평론은 글감을 고르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고르는 일은 그 자체가 이미 쓰는 일이다. 텍스트나 글감을 자기 맥락 속에 위치시키는 것까지 포함하면 평론 쓰기의 사실상 전부라 해도 좋겠다.

올해도 예년과 같이 대다수의 응모작이 기본을 갖춘 글이었으나 네댓 작품을 추려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선정한 텍스트와 맥락화의 논리들이 이미 글의 수준을 웅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 한 작품을 추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조대한 씨의 ‘조용한 윤리적 발화들 - 시적 주체와 타자가 만나는 시간’과 차선일 씨의 ‘실종자의 미궁-편혜영론’을 두고 마지막까지 갈등했다. 

조대한 씨는 미학과 정치가 곧바로 이어지는 논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그 중간항으로서 최근의 시편들에서 확인되는 조용한 윤리적 발화들을 설정하고자 했다.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는 문제의식이 뛰어난 시편들을 통해 개진되어 큰 설득력을 지닌 글이었다. 문제설정의 적절함이라는 점에서 보자면, 편혜영의 소설 세계가 지니는 의미를 말하기 위해 실종자와 미궁이라는 화두를 들고 나온 차선일 씨의 경우도 이에 못지않았다.

편혜영의 세계 속에서 실종자란 “없느니만 못한 존재들의 은유”라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상당한 이론적 내공이 보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차선일 씨가 구사하는 이론과 수사는 장식적이거나 과시적이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문장이 정교했다. 이 점은 조대한 씨의 글이 갖지 못한 미덕이었다. 그러니까 덜 정교한 문장들이 조대한 씨의 글을 마지막 씨름판에서 밀어낸 셈이다.

차선일 씨의 글은, 자상할 것까지는 없지만 좀 더 친절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들을 상대로 글을 쓴다고 생각한다면 어떨까 싶다. 이제 기회를 얻었으니 좋은 글 많이 쓰시기 바란다. 


심사 서영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