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이중섭의 팔레트 / 신준희
이중섭의 팔레트 / 신준희 알코올이 이끄는 대로 너무 멀리 와버렸다 내려야 할 정거장을 나는 자주 까먹었다 날마다 다닌 이 길은 처음 보는 사막이었다 길도 없는 흰종이 위 맴돌아 나를 누른 깜깜한 압력에 감사 섭씨 1000도가 넘는 불길 속에서 세 시간만 지나면 깨진 백자항아리 같은 흰 뼈로 환원되는 삶. 그토록 고달프고 한시라도 벗어나고 싶던 삶은 눈물겨워 촉촉이 젖어 있는 함초롬한 꽃이었다. 길 끝의 낭떠러지, 나를 짓누르던 두려움, 떨어지거나 날거나 미치거나 아니면 써야 한다는 그 막막하고 깜깜한 압력에 감사한다. 나만의 밀도를 얻고 싶었다. 깡통처럼 짜부라지던 리듬은 괴로웠다. 단어와 문장들이 서로 할퀴고 싸우는 하얀 감옥. 얼어붙은 털신에 달라붙는 눈덩이처럼 아름답고 무서운 눈길에 갇혀 더는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