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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유리 상자 / 오미순

 

오늘은 어느 편의점에 갈까

아무래도 안경 아저씨가 있는 곳으로 가야겠어요

아저씨는 휴대폰으로 게임하느라 손님을 잘 안 보거든요

이제 내 선물을 고를 시간이에요


배가 고파요. 과자를 잔뜩 먹었는데도 배가 고파요. 밥솥은 비어 있고 냉장고엔 시커먼 비닐만 가득해요. 아빠가 안주로 먹다 싸온 것들이에요. 아빠는 치킨이나 갈비는 안 먹어요. 순 닭발, 곱창, 번데기 이런 것만 먹어요. 난 아무리 배고파도 아빠처럼 못 먹겠어요. 닭발은 빨갛고 징그러워요. 곱창은 지독한 냄새가 나고, 번데기는 벌레잖아요. 난 벌레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요. 우리 집은 사람이 아니라 벌레가 주인 같아요. 벌레들은 마음껏 돌아다니는데 나는 벌레가 무서워서 도망 다니잖아요.

서랍 속에 숨겨 두었던 간식도 다 떨어졌어요. 바닥에는 과자 부스러기들이 굴러다녀요. 내가 개미라면 부스러기만 발견해도 신났을 거예요. 걔네는 몸이 엄청 작잖아요. 나도 새털처럼 가벼운데 왜 자꾸 배가 고플까요?

나는 빨래 바구니에 쌓인 아빠 옷을 살펴요. 땀 냄새랑 발 냄새가 섞여서 우웩, 배속이 더 이상해요. 그래도 오늘은 운이 좋아요. 바지 주머니에 구겨진 천원짜리 한 장이 들어 있어요. 요즘 아빠 주머니엔 회색 먼지뭉치만 가득했거든요.

이제 나갈 준비를 해요. 난 아빠가 시장에서 사온 검은색 점퍼를 입어요. 학교에 갈 땐 아무리 추워도 안 입는 옷이에요. 무릎까지 오는 점퍼를 내가 입으면 꼭 김밥이 걸어 다니는 것 같아요. 아빠는 멋진 걸 고를 줄 몰라요. 그러니까 내 이름도 영실이라고 지었죠. 우리 반 애들 이름은 세빈이, 현지, 다희, 다들 예쁜데 나만 촌스럽게 영실이에요. 이름 때문에 새 학년으로 올라갈 때마다 창피해요. 내가 조그만 목소리로 자기소개를 하면 아이들이 킥킥 웃어요. 난 어른이 되면 이름부터 바꿀 거예요. 그때가 오면 지금처럼 편의점에 뛰어갈 일도 없겠죠.

오늘은 어느 편의점에 갈까. 난 삼거리에 서서 고민해요. 같은 곳을 자주 가면 편의점 주인이 이상하게 쳐다봐요. 한밤중에 나 혼자 편의점에 가니까요. 절대로 나를 의심해서가 아니에요. 흰 종이 위에 빨간 펜으로 쓰인 경고는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예요. 난 도둑이 아니니까요. 도둑은 남의 물건을 훔치는 사람이지만 난 선물받는 거예요.

그래요. 이건 선물이에요. 겨울이 되면 사람들이 큰 소리로 이야기해요. 불우이웃을 돕자고요. 그게 나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날 못 찾아요. 내겐 아빠가 있으니까요. 그깟 아빠, 없어도 괜찮아요. 나는 성진이네 도시락이 더 갖고 싶어요. 성진이는 무릎이 아파서 절뚝거리는 할머니랑 둘이 살아요. 불쌍하다고 동사무소에서 반찬이 네 개나 들어있는 도시락을 배달해줘요. 모르는 사람들이 햄 세트랑 과자 세트도 선물해요. 난 아빠가 있다고 아무 선물도 못 받아요. 성진이네 할머니는 김치 부침개도 만들고, 콩나물국도 맛있게 끓인다고요. 우리 아빠는 애들은 못 먹는 술안주만 가져온단 말이에요. 우리 집에 와 보면 다 알 텐데, 정말 불공평해요.

으으, 차가운 바람이 꼭 내 살을 깨무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안경 아저씨가 있는 곳으로 가야겠어요. 아저씨는 휴대폰으로 게임하느라 손님을 잘 안 보거든요.

캄캄한 밤거리에 유리상자가 환하게 빛나요. 나는 돈 벌면 편의점 주인이 되고 싶어요. 투명한 유리 안에 근사한 게 잔뜩 들어 있잖아요. 두꺼운 문을 밀면 금색 종이 딸랑 울려요. 안경 아저씨는 잠깐 나를 쳐다보고 다시 고개를 숙여요. 게임은 나쁘다지만 난 게임하는 안경 아저씨가 좋아요.

컵라면 하나를 집어 들고서 편의점을 한 바퀴 돌아요. 따끈따끈한 어묵이랑 고소한 튀김, 윤기가 흐르는 닭다리와 큼지막한 피자가 맛있는 냄새를 풍겨요. 먹고 싶어서 저절로 손이 가지만 꾹 참아야 해요.

이제 내 선물을 고를 시간이에요. 부스럭거리지 않는 작은 선물만 골라야 해요. 안경 아저씨를 한 번 슬쩍 보고서, 나는 점퍼 속으로 선물을 집어넣어요. 그다음 계산대에 조심히 컵라면을 올려놔요. 아무것도 사지 않으면 어른들은 더 이상한 눈으로 보거든요.

"천오백원."

안경 아저씨가 말해요. 휴대폰에서 삐융삐융 게임 소리가 나요. 아저씨가 손가락으로 휴대폰을 누르면 번쩍거리는 다이아몬드가 쏟아져요. 나는 가짜 다이아몬드가 왜 좋은지 모르겠어요. 안경 아저씨가 하품을 해요. 어른들은 모두 아빠처럼 피곤한 얼굴이에요.

사실 떨리지 않는 건 아니에요. 꼭 누가 내 어깨를 잡아당길 것 같아 고개를 푹 숙이고 걸어요. 바람이 세차게 불어 뺨이 얼어붙어요. 나는 따뜻하고 포근한 봄바람이 그리워요. 집으로 가는 마지막 골목길에 도착하면 점퍼 안에서 선물을 꺼내요. 검은 점퍼는 두툼한 솜 때문에 선물을 숨겨도 티가 안 나요. 오늘은 참치 한 개, 손가락 소시지 두 개예요. 돈 주고 사려면 오천원은 있어야 할 거예요.

"안경 아저씨, 잘 먹겠습니다."

나는 먹기 전에 꼭 인사를 해요. 불쌍한 아이를 도운 거니까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요. 처음엔 안 그랬는데 자꾸 안경 아저씨께 할 말이 늘어요.

"아저씨! 아저씨는 오천원이 없어도 살 수 있죠?"

난 손가락 소시지를 먹으며 말해요. 라면부터 먹으면 배가 꾸르륵거려 소시지부터 먹어야 해요. 어느새 고양이 제비가 와서 날 보고 있어요. 제비는 목만 하얗고 몸은 까매서 내가 지어 준 이름이에요. 난 제비가 집 안에 들어올 수 있게 창문을 열어줘요.

"내 밥이야. 너는 챙겨주는 사람 많잖아."

추울까 봐 문을 열어줬더니 제비가 내 소시지를 탐내요. 난 제비가 부러워요. 까미야 부르는 언니는 통조림 캔을 가져오고, 냥냥아 부르는 언니는 고양이가 먹는 우유도 사와요. 제비는 그럴 때마다 갸르릉 소리내며 예쁜 짓을 해요. 내가 제비처럼 예뻤으면 달랐을까요? 엄마는 안 떠나고, 아빠도 밖에서 술 마시는 대신 나랑 저녁밥을 먹었을까요? 하지만 내 얼굴은 엄마와 아빠가 만들어준 것이잖아요. 쌍꺼풀이 없는 불룩한 눈에 낮은 코와 조그마한 입술. 아무리 봐도 내 얼굴은 엄마랑 아빠를 섞어 놓은 것이에요. 모르는 사람이 봐도 판박이라 그런다고요. 손등에 붙이면 손톱으로 긁을 때까지 안 떨어지는 판박이요.

", 빵실아, 너 아빠랑 똑같이 생겼더라!"

나를 놀려대던 우리 반 강호준이 떠올라요. 이름이 영실이라고 빵실이라니, 정말 유치한 애예요. 오늘 아침, 아빠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강호준을 만났어요. 아마 그 애는 '번개 배달'이라고 쓰인 아빠 조끼를 봤겠지요.

"교문까지 가면 안 돼. 건널목에서 내려줘."

내가 몇 번이나 말해도 아빠는 곧장 가버려요. 뒤차가 빵빵대서 내려줄 수 없대요. 내가 늦잠을 자는 건 아빠 탓인데도요. 술 취한 아빠가 대문을 꽝꽝 발로 찰까 봐 난 새벽까지 깨어 있어요. 터벅터벅 걸어오는 아빠 발소리가 들릴 때까지 나는 잠이 오지 않아요.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고 삼 분을 기다려야 해요. 너무 빠르면 면이 딱딱하고, 오래 두면 지렁이처럼 불어요. 나는 익숙하게 왼쪽 손목을 들어요. 그런데 손목에 딱 붙어 있어야 할 시계가 없어요. 분명 밖으로 나갈 때 차고 있었는데! 감쪽같이 사라졌어요. 삼거리에 서 있을 때 빠진 걸까요? 참치 캔 선물을 받을 때 풀린 걸까요? 잠금 쇠가 덜렁거리는 시계는 자꾸 손목에서 떨어져요. 아빠가 고쳐주지 않을 게 뻔하니까, 난 투명 테이프를 돌돌 말아놨어요. 그다음부터 손목에 철썩 붙어 있었는데 하필이면 오늘 풀렸나 봐요. 점퍼 주머니에도 없고 방바닥에도 없어요. 강호준은 고물 시계라고 놀리지만 나한텐 제일 중요한 물건이에요. 엄마가 사준 거거든요. 작은 바늘이 8, 긴 바늘이 12에 가 있으면 엄마가 온댔어요. 그때까지는 엄마를 기다리지 말고 마음껏 놀라고 했어요. 내가 학교도 들어가기 전, 아주 옛날 일이에요. 엄마가 내 곁에 있을 때니까요.

바람 때문에 귀에서 울음소리가 나요. 맨발에 슬리퍼만 신었지만 추운지 모르겠어요. 시계는 골목길에도 없어요. 삼거리에도 내 시계는 안 보여요. 낡은 거라 아무도 안 주워갈 텐데요. 내 멋대로 선물을 받아서 벌을 받은 걸까요. 편의점 사장님들이 모여 날 벌주자고 했을까요. 갑자기 안경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던 게 생각나요. 혹시 안경 아저씨가 내 시계를 가져갔을까요?

나는 두 눈을 비볐어요. 아니에요. 아빠가 아니라 아빠랑 똑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일 거예요. 아빠가 안경 아저씨랑 얘기할 리 없잖아요. 그런데 조끼에 그려진 번개가 찢어진 걸 보면 아빠가 틀림없어요. 까치집 머리를 벅벅 긁는 것도 아빠 버릇이고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왜 아빠가 안경 아저씨와 내 얘길 하는 걸까요?

"애한테 아빠 퀵서비스 하시냐고 물어보기도 뭣해서요."

안경 아저씨가 아빠를 '아저씨'라고 불러요. 나는 편의점 간판 뒤에 숨어 말소리를 엿들어요.

", 미안하게 됐어요. 먹고사느라 애를 신경 못 썼네. 우리 애가 가져간 게 모두 얼마지?"

아빠가 해진 주머니에 손을 넣고 지갑을 꺼내요. 보나마나 지갑은 텅 비었을 텐데요. 술도 안 마셨는데 아빠 얼굴이 붉어져요.

"아저씨, 돈은 얼마 안 돼요. 애 손버릇 고치시라고 연락드린 거예요. 보통은 집에 전화하기 귀찮아서 바로 경찰에 얘기하거든요."

안경 아저씨는 정말 사장님처럼 말해요. 아빤 자꾸 안경 아저씨에게 사과하고요. 찬 바람이 불 때마다 아빠의 조끼가 펄럭거려요. 나는 찢어진 번개무늬를 바라보다 질끈 눈을 감아요. 겨울바람 때문에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아요.

배가 고파요. 남은 손가락 소시지를 먹었는데도 배가 고파요. 상 위에서 불고 있을 내 컵라면이 생각나요. 그렇지만 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 깜깜한 놀이터에는 애들이 한 명도 없어요. 모두 따뜻한 방에서 자고 있을 거예요. 둥근 돌로 둘러싸인 모래밭에는 깨진 장난감 삽이 묻혀있어요. 나는 빨갛게 얼어붙은 손으로 모래를 파요.

어른들에게 혼나는 건 무섭지 않아요. 거지 빵실이나, 도둑 빵실이나 그게 그거예요. 하지만 착한 척하는 아빠 얼굴은 보기 싫어요. 안경 아저씨는 아빠가 좋은 아빠인 줄 알았을 거예요. 만날 술 마시고 들어와 소리 지르면서 아빤 날 걱정하는 척했어요. 아빠가 미워요. 나는 삽으로 뜬 모래들을 바람에 흩날려 보내요. 달빛에 반짝이는 모래가 모두 다이아몬드면 좋겠어요. 그럼 넓은 아파트로 이사해서 혼자 살 거예요. 아빠는 아주 가끔만 만나줄 거예요. 벌레가 주인인 집에 혼자 살면 아빠도 알겠죠. 아빠가 없는 동안, 내가 얼마나 쓸쓸한지요.



<당선소감>

 

 "낱장부터 찬찬히… 진짜 책 만들겠다"

 

  오미순 "이모! 1단계 통과한 거야?" 저와 두 손을 마주 잡은 일곱 살 조카가 물었습니다. 우리는 가끔 엉터리 왈츠를 추거나 음악에 맞춰 씰룩씰룩 몸을 흔들었습니다. 제가 대답을 고민하는 사이, 우리를 보고 샘이 난 다섯 살 조카가 끼어들었습니다. 셋이 손을 잡기만 해도 금세 웃음이 새어 나왔습니다. 아이들은 제 안에 없던 것도 끄집어내는 재주를 가졌습니다.

 

  아버지 말대로 '몽케기'만 하다 어른이 되었습니다. 제주도와 서울은 바람의 결이 달라 더 오래 아팠고, 머뭇거렸습니다. 떠돌이인 저를 덤으로 데리고 다녀 준 언니에게 정말 고맙습니다. 마음껏 저에게 사랑을 고백해주는 조카 승혁이와 준혁이, 아이들의 목소리를 쫓아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제게 누름돌이 되어주신 J선생님. 다시 선생님을 부를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참 다행입니다. 그리고 나의 제로, 혹여나 제가 작가라 불릴 수 있다면, 걸음을 헤아리듯 당신이 나를 이끌어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등을 맞대고 서로의 글을 보듬어 줄 수 있기를!

 

  부족한 작품을 선택해주신 최윤정 선생님, 선생님 덕분에 쥐며느리도 등을 펼 짬이 생겼습니다. 낱장부터 찬찬히 시작하여 책의 모양을 갖춰나가겠습니다.

 

1984년 제주 출생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심사평>

 

독자 마음 파고드는 생생한 표현 인상적

 

  올해 응모작은 총 270편으로 작년보다 훨씬 많았다. 응모 편수는 매년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지만 일정 수준에 도달한 작품의 수는 오히려 적었다. 요즘에는 해피엔딩의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동화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이 된 모양이다.

 

  올해에도 학교 폭력, 아동 학대뿐만 아니라 영아 유기에 이르기까지 심각한 사회문제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이 많았고 밝은 작품은 드물었다. 올해는 특이하게 귀신이나 유령 이야기, 그리고 죽은 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야기가 더러 있었다. 그러나 어린이와 연관해서 죽음이라는 사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깊어 보이는 작품은 없었다.

 

  심사자는, 무서운 마음을 드러내지 않아야 하는 남자아이의 심리를 무난하게 그려낸 '화장실 귀신', 사랑과 우정 그리고 학교 폭력을 배경으로 소소한 일상 속에서 친구와 다투고 화해하기까지의 과정을 3학년 여자아이의 언어로 잘 그려낸 '5분만', 그리고 주민센터에서 배급품을 받는 조손(祖孫)가정의 친구도, 동네 언니들이 통조림이나 우유를 챙겨주는 길고양이조차도 부러운 자칭 '불우이웃'인 아이 목소리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유리상자', 이렇게 세 편을 최종 후보작으로 놓고 당선작을 가렸다.

 

  앞의 두 편은 이야기가 큰 결점 없이 평이하게 만들어졌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참신함이나 문학적인 향기가 없었다. 그에 비해 '유리상자'는 문제를 포착하는 작가의 시선이 남다르고 배고픈 어린 화자(話者)의 모습이 읽는 이의 마음을 파고드는 강점이 있다. 거듭 고민 끝에 '유리상자'를 당선작으로 결정한다. 작가의 정진을 빈다.

 

최윤정·아동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