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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의 아바타

수도꼭지가 마른 눈물을 보인 건

꽤 오래 전 일이다

철물점 김 씨를 불러

몇 번 수리를 해도

여전히 훌쩍거린다

팔순 앞둔 어머니

무릎에도 물이 샌다

그 누수엔 대책이 없다며

쇠붙이 무릎 끼워 넣는다

무릎에 세 든 쇠붙이는

제 무릎이 아니다

하늘 아래 그 무엇도

처음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원형은 죽었다

사실 신도 죽었다

우리가 신봉하는 것은

신의 아바타인 것처럼

우리 집 수도꼭지든

어머니의 무릎이든

또 다른 아바타로 살고 있다

골목

 

시간의 나이테 같은 길이

둥글게 휘어지며 모퉁이를 지나간다

숨겨진 흔적이 꿈틀거린다

아픈 생각이 이 골목을 지나는 동안

꿈의 모서리가 닳아져 뭉툭해진다

하늘을 찾아가던 어린 날의 숨바꼭질

골목의 어깨보다 더 커버린 지금

골목에 들면 언제나 첫 눈이 내린다

그 골목 끝에는 아직

그 주소가 남아 있을까

골목이 깊어질수록 궁금해진다

부정하고 싶지 않는 상처의 풍경

골목이 굽은 허리를 펴고

내 눈물을 쓸어 내고 있다

그쯤에서 멈추고 싶은 길이여

그것이 기쁨이든 슬픔이든

화장을 지운 술래의 얼굴

원형은 죽었다

사실 신도 죽었다

우리가 신봉하는 것은

신의 아바타인 것처럼

우리 집 수도꼭지든

어머니의 무릎이든

또 다른 아바타로 살고 있다

 

어머니의 문자

바코드 넘버 19320628

수천 번을 입력시켜도

숫자는 늘 뒤죽박죽이었다

0에서 9까지 열 개의

조합이 어려운 어머니

치매퇴치용 문자 메시지

가르치고 또 가르쳤다

숫자 보다 배짱이 맞으신지

글자 수가 나날이 늘어간다

-따라바무거나

딸아 밥먹었나 라는 말이고

-어지소시이음노

어찌 소식이 없노 라는 말이다

식민지의 가난한 딸로 태어나

글 한 자 배우지 못한 내 어머니

가끔은 신문지에 아는 글자

침 발라 꼭꼭 눌러

따라 써보기도 하고

읽어보기도 하는데

손바닥 보다 작은 휴대전화

그 속에 세상이 다 들앉았다고

닦기도 하고 금방울을 달기도 하고

어린 나를 키웠듯 정성이다

띄어쓰기 받침 다 무시해도

나에게는 신통하게 다 해석되는

어머니의 문자

 

내부로부터의 안부

 

책을 펴자 모서리를 찢으며 친구의 숨소리 들린다 궁서체가 미세하게 발을 뻗은 갈피에서 편지가 유언처럼 발견됐다 찢겨진 입술 누군가 비밀을 물고 있는 입술에 날 선 칼을 갖다 댄 자국이 붉고 선명했다 갈피갈피 겨울이 익어가는 견고한 내부가 보였다 친구의 안부가 몸을 웅숭그려 먼 길을 걸어 왔던 날, 수십만 마리의 일개미들이 모인 듯 봉투 속은 분주했다 신음 소리가 편지의 몸 밖을 수시로 나들었다 찢겨진 봉투처럼 친구의 도 오래가지 않아 찢어졌다 나는 그를 외면했다 오늘, 다시 친구를 만났다 편지지에 맨몸을 밀며 묻는 안부가 숨가쁘고 침울했다 세상 모든 나무들 제 몸 말려 겨울을 준비하듯 친구의 겨울은 어디쯤에서 서성이고 있을까 책갈피마다 겨울나무 우는 소리 웅웅 들린다

 

상처

봄이 산산조각 났다

꽃나무의 정거장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무의 입술은 더 검고 어두워져 갔고

만년설 아래 가부좌 튼 氷河氷

검고 어두운 입술에 수혈을 시작했지만

봄의 기억은 나무의 힘줄을 따라 다시 찾아왔고

그의 갈비뼈 사이사이

면경 같던 얼음이 몸을 찔렀다

나에게도 벚꽃 환하던 봄이 있었다

환한 그의 얼굴 속에도

거미줄처럼 얽힌 상처의 길이 숨어 있어

호요바람이 잦고

갈씬거리는 흔들림에도 허리가 굽었다

산다는 건

환한 꽃에도 상처 내는 일이란 것을 살면서 알았다

봄의 상처 위로 푸른 잎이 돋고

나는 그가 남긴

상처 속의 길을 외면했다

 

<당선소감>

 

누구나 날고 싶다는 엉뚱한 상상을 한번쯤 해보았을 겁니다. 새처럼 하늘을 훨훨 날아보고 싶은 생각 말입니다.

시를 쓰다 매듭이 풀리지 않는 밤이면 어김없이 하늘을 나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 하나하나마다 길은 열려 있어 제각각의 형태로 음표를 그렸습니다. 시가 걸어간 자리에 알록달록 피어난 시의 칸타타. 꿈속은 금세 눈부신 시밭이 되었습니다.

코끼리는 상대의 이마에 코를 대고 마음을 읽는다 합니다. 시를 쓰면서나는 무엇을 내밀어야 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까하는 것이 하루도 지우지 못한 화두였습니다. 시가 일러주는 푸른 신호등 앞에 서서 생각합니다. 시의 어디쯤에 손을 넣어야 알토란 같은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까. 시의 의식과 희망이 자라고 있는 깊고 깊은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을까.

그렇듯 버릴 수도 삼킬 수도 없는 는 늘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어느 날은 숨통을 죄기도 하고 어느 날은 뒤통수를 후려치기도 했습니다. 학이지지(學而知之), 곤이지지(困而知之)는 커녕 면강부지(勉强不知)한 아둔함에 언제나 시름시름 앓아야 했습니다.

입 안 가득한 떫은맛에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지만 비바람을 이겨내면 떫은맛도 사라질 거라 믿었습니다. 믿음이 현실이 된 이 결실에 스스로에게 격려를 보냅니다.

부족한 사람을 해 주신 한국문학방송에 감사드리며, 힘들 때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격려해주신 주변 가족들께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심사평>

   한국문학방송 신춘문예는 당선자의 응모작품 모두를 당선작으로 삼고 있다. 응모작 중 단 한 편이라도 각 심사위원으로부터 낙제점수(소정의 채점 기준에 의거)를 받으면 당선이 불가능하다. 그것은 심사과정에서부터 작가의 역량을 보다 광범위하게 체크하여, 당선자를 보다 자신감 있게 세상에 선보이기 위함이다. 또한 불특정 다수의 독자들로부터 정말 한국문학방송 신춘문예 공모에 당당하게 당선될 만한 수준인지 평가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이번 신춘문예도 예년과 마찬가지로, 공지시 응모작품수를 5편으로 안내했으며, 예심과정에서 5편을 초과하거나 미달한 응모자는 심사에서 제외시켰다. 심사의 형평성 때문이다. 응모자들 중 일부는 공모규정(요강)을 주의 깊게 읽지 않고 대충 또는 건성으로 접수한 것으로 판단된다. 뿐 아니라, 분명히 공모규정에 명시되어 있는 내용을 전화로 질문하는 등 갑갑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 차년도 응모시에는 모든 응모자들이 공모규정을 먼저 주도면밀히 읽고 응모해 주시기를 이 자리에서 부탁드린다.

이번 응모자는 170명 남짓이었으나, 숫적인 과다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내공(실력)이 있는 응모자가 과연 몇인가가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예심을 통과한 5명의 작품 25편이 본심으로 넘겨졌다. 본심으로 넘어가는 작품들은 응모자 성명, 연락처 등 인적사항이 완전히 삭제됐다. 올해 심사위원도 예년과 같이 세 분이었다. 한국문학방송 심사위원은 해마다 전원 달리함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채점(한국문학방송 신춘문예 심사는 심사위원간의 작품추천 및 토론방식이 아닌, 심사위원 개별적으로 매 작품마다 100점 만점을 기준으로 각각 점수를 매겨나가는 채점방식이다)이 완전히 끝나기 전까지는 각 심사위원은 다른 심사위원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게 진행됐다.

예심은 안재동 시인(한국문학방송 주간)이 담당했으며, 본심은 박남주 시인(현대문학등단), 이화국 시인(현대시등단), 장종권 시인(현대시학등단) (가나다순) 세 분에게 맡겨졌다. 이번 본심에선 심사위원들이 거의 공통된 평가(채점) 결과를 보여주었기에 '원 오브 뎀(One of Them)'을 선정하는 데 별 다른 논의가 필요 없을 정도였다.

당선작에 대한 작품평이나 낙선작에 의견 등은 별도로 내지 않기로 한다. 한국문학방송의 신춘문예는 타 신춘문예나 문예지 등과 '차별성(개성)'을 어떻게 둘 것인가를 놓고 매번 크게 고민한다. 심사방식도 타 매체들과는 달리, 매 작품마다 '문법·어법·표현의 적절성', '주제와 내용의 일관성', '감동·느낌', '시적구조와 메타포의 깊이', '작품의 신선감·독창성', '작가적 역량·성장가능성' 등을 구체적 평가항목으로 설정하고, 그 항목들에 미리 배점을 하여 매 작품마다 똑같은 방식으로 채점 테이블을 삽입한 가운데 채점해나가는 방식으로 심사를 진행한다. 이러한 방식은 초회부터 해마다 동일했다. 이번 당선작도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각 항목들에서 타 응모자들의 작품보다는 상대적으로 골고루 높은 점수를 받은 것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최종심에 오른 응모자가 누구인지는 예년과 마찬가지로 인비(人秘)키로 한다. 타 매체의 신춘문예나 현상공모 등에 당선됐던 분도 있고 기등단자로서 시집을 몇 권씩이나 상재한 분도 있기 때문에 그분들의 프라이버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에서다.

이번 신춘공모에 참여해 주신 모든 응모자 제위께 진심어린 큰 감사와 아울러 아쉽게도 낙선된 분들께는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당선된 분께는 큰 축하를 드린다. 한국문학방송 신춘문예 역시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란 말이 맞을 정도로 정말 어려운 관문이란 사실을 시행(진행)할 때마다 느끼면서, 한국문학방송 신춘문예 당선자도 소위 '선택받은 시인'의 반열로 인정받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보기에 늘 긍지와 명예를 지녀 주시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 박남주, 이화국, 장종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