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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캐롤', 시선의 전복이 가져다주는 정취 / 조선호

 

  시선은 응시의 개념이 생겨난 이래로 언제나 민감한 화두다. 영화가 르네상스적인 원근법을 제공하는 이상 관객이 영화의 이미지에서 자유로워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 부자유는 관객이 스스로를 응시의 주체라고 믿게 만드는 결정적인 장치가 된다. 페미니즘 영화에 불을 지핀 '로라 멀비(Laura Mulvey)'가 '시각적 쾌락과 내러티브 영화(Visual Pleasure and Narrative Cinema)'에서 진행한 논의 또한 할리우드의 내러티브 영화들이 남성 주체적인 응시를 자연화하고, 여성은 응시를 받을 수밖에 없는 수동적인 상태에 머물게 된다는 지점을 지적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멀비의 논의가 일차적으로 '성'에 대한 주체적인 전복을 촉구했다면, '퀴어 영화'는 나아가 '젠더'의 문제를 영화의 전면에 가져오기 시작했다. 퀴어영화의 발전은 관음증적인 영화의 속성이 '젠더'의 문제 또한 이데올로기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해줌과 동시에, '젠더'의 문제도 이데올로기와 마찬가지로 안정되고 확정적인 것이 아님을 폭로한다. 멀비의 논의가 응시에서 시작된 만큼, 많은 페미니즘 혹은 젠더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영화들은 항상 '시선'을 전복시키면서 자신들의 위치를 점해나갔다. '시선의 전복'은 페미니즘 계열의 영화가 남성 중심적 서사와 응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수단이자 동시에 최후의 과제인 것이다. 

  토드 헤인즈 감독은 퀴어 영화의 최전선에 있는 감독 중 하나다. 이전 작품인 '벨벳 골드마인(1998)'과 '아임 낫 데어(2007)'에서는 정체성의 분열을 겪고 있는 인물이 서사의 전면에 등장했으며, 장편 데뷔작인 '포이즌(1991)'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토드 헤인즈가 '캐롤(2016)'을 통해 다시 한번 성 소수자를 서사의 전면에 내세운다면, 페미니즘 계열의 영화가 추구하는 전복의 과업은 아직 완수되지 못한 진행 과정에 놓여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따라서 남성 중심적인 시선이 어떠한 방식으로 설정되고, 어떠한 과정을 통해 전복되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여전히 유효한 지점이 될 것이다. 많은 이들이 '캐롤'의 아름다움을 말하지만, 그 아름다움을 1950년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톤의 이미지들과 멜로드라마적 정취에 국한시키는 경우가 많다. '캐롤'의 아름다움은 캐롤(케이트 블란쳇)과 테레즈(루니 마라)의 시선 그리고 그녀들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설명하지 않고서는 명확해지지 않는다.


1. 시선과 공간의 이동 


  시선을 구성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관객이 가장 쉽게 동일시되는 방식은 '시점쇼트(point of view)'를 이용하는 방식이다. 등장인물의 시점쇼트는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 그대로를 보여주기 때문에 관객은 시점쇼트에 드러난 인물의 가치관과 감정에 쉽게 동일시될 수 있다. '캐롤'에서 우리가 가장 빈번하게 마주하는 시점쇼트는 회상의 주체인 테레즈의 시점쇼트이다. 테레즈의 회상을 통해 과거로 돌아간 우리가 가장 먼저 마주하는 시선(시점쇼트) 또한 테레즈의 시선이다. 테레즈는 항상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군중들을 바라보고 있다. 백화점에서의 식사 시간에도 영업 준비 시간에도 그녀는 언제나 군중들을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에 응답해주는 군중은 어디에도 없다. 테레즈의 시선에 처음으로 응답해주는 이가 바로 캐롤이다. 

  테레즈와 캐롤이 서로를 바라보는 이 장면은 이들이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보여줌과 동시에 앞으로 그녀들이 헤쳐나가야 할 싸움이 무엇인지도 함께 드러난다. 테레즈가 캐롤을 바라보는 시선 사이에 침투해 들어오는 것은 백화점 속 '군중'들이다. 테레즈와 캐롤 사이의 거리감은 둘 사이를 지속적으로 틈입하는 군중들에 의해 가시화된다. 테레즈와 캐롤이 서로를 바라보자마자 그들의 시선은 "화장실이 어디죠"라고 묻는 또 다른 익명의 군중에 의해 곧바로 흩어진다. 캐롤과 테레즈의 서로를 향한 시선을 지속적으로 방해하는 군중들에게는 악의가 없다. 그들은 그저 자신이 배워온 삶의 방식과 습득한 가치관대로 살아갈 뿐이다. 다만 그 삶의 방식은 남성 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가치관과 동성애를 죄악이나 질병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내재되어 있는 그런 삶의 방식일 것이다. 그녀들을 위협하는 것은 이렇듯 그녀들을 악의적으로 바라보는 누군가가 아니라 당연하다는 듯 그들의 시선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1950년대의 사회' 그 자체다.

  앞선 장면으로 대표되는 테레즈의 시선이 우리에게 일련의 울림을 가져다준다면, 그녀의 시선에서 느껴진 그녀의 감정이 위대하거나 특별해서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녀의 감정이 가장 극대화되어 드러나야 할 그녀의 시점쇼트임에도, 시선 속을 사정없이 침투하는 사회의 시선에 그녀의 감정이 더욱 미약해지고 있음을 느낄 때, 테레즈가 스스로에 대해 말하듯이 "점심 메뉴 하나 정하지 못하는" 우유부단하고 나약한 소녀가 범람하는 사회의 시선 속에서도 캐롤을 향한 미약한 시선을 끝까지 거두지 않는 그 의지가 우리에게 울림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그들이 사회의 시선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개인의 공간이라 할 수 있는 '집'으로 향하는 것은 어쩌면 영화적 필연일지 모른다. 테레즈는 캐롤이 백화점에 두고 간 장갑을 돌려주게 되고, 캐롤은 이에 보답하기 위해 테레즈를 크리스마스에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테레즈가 바라보게 되는 것은 캐롤에게 낙인처럼 새겨져 있는 그녀의 '사회적 위치'다. 테레즈는 과자와 차를 준비하다가 문득 캐롤이 그녀의 딸 린디와 함께 크리스마스 트리를 꾸미고 있는 것을 바라보게 된다. 지금 테레즈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어머니 캐롤'이다. 캐롤의 이름 앞에 '어머니'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질 때, 테레즈가 바라보는 캐롤과의 거리는 여러 개의 방문을 통과해야 할 만큼 깊고 멀게만 느껴진다. 저녁이 깊어지고 테레즈와 캐롤은 조금씩 가까워진다. 이때 그들의 보금자리를 침투해 들어오는 것은 캐롤의 남편 하지(카일 챈들러)다. 캐롤과 하지는 린디를 데려가는 문제로 부엌에서 다투게 되고 테레즈는 이를 멀리 떨어져 지켜보게 된다. 테레즈의 시선 속에 캐롤의 뒷모습이 담기지만, '어머니 캐롤'을 지켜봤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그녀가 바라보는 캐롤은 '아내 캐롤'이다. 아내 캐롤 또한 테레즈에게는 너무나 멀게만 느껴진다.

  사실 우리는 테레즈보다 먼저 캐롤의 집에 머문 적이 있다. 우리는 그녀의 집에서 캐롤이 거울 앞에서 린디의 머리를 빗겨주던 모습을 기억한다. 벽을 타고 이동해 온 카메라는 이 두 모녀를 바라본다. 클로즈업 된 거울에는 캐롤이 보이지만 그녀의 딸 린디는 보이지 않는다. 방문 뒤에서 캐롤과 린디를 바라보던 누군가의 시선은 마치 캐롤과 린디가 함께 있는 것을 바라보길 원치 않는 것만 같다. 우리가 린디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은 뒤이어 방에 들어온 하지가 그녀를 들어 올릴 때다. 캐롤과 린디가 함께 있는 것을 거부하는 듯한 이 시선은 그럼 누구의 시점쇼트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잠시 '캐롤'의 오프닝 장면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영화는 '잭'이라는 한 남자를 따라가면서 시작한다. 캐롤이나 테레즈가 아니라 '익명'의 인물에 가까운 잭을 따라가며 시작하는 것은 단순히 '밀회(1945)'를 오마주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다. 잭은 어떤 인물인지 설명되지 않는다. 잭이 어떤 인물인지 설명되지 않는 익명의 인물이라는 지점은 그가 '1950년대의 보편적인 남성'이라는 여지를 남긴다. 1950년대의 보편적인 남성이라는 것은 아마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인 질서를 당연하게 여기고, 동성애를 질병이나 죄악으로 바라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인물일 것이다. 우리는 잭의 가치관과 가장 먼저 동일시되면서 영화의 서사를 마주한다. 더욱이 우리는 잭의 시선을 경유해서 캐롤과 테레즈를 처음으로 마주한다. 우리는 이미 '1950년대의 사회적 시선과 동일시'된 채로 그녀들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즉, 우리는 캐롤과 테레즈라는 '개별자'를 마주하기 전에, '사회 속의 일원'으로서의 그녀들을 먼저 바라보게 된다. 잭의 시선과 조응하는 것은 백화점에서 그들 사이를 틈입하는 군중들이며, 관객은 잭의 시선을 경유하는 과정을 통해 이들과 동일 선상에 놓이고 1950년대라는 사회와 공모하게 된다.

  다시 린디의 머리를 빗어주던 캐롤을 바라보는 시점쇼트로 돌아와보자. 이 시점쇼트에서 위화감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이 시선의 주체가 누군지 설명되지 않음에도 벽을 타고 넘어오며 분명히 시점쇼트임을 표현하는 카메라의 움직임 때문이다. 이 시점쇼트가 누구에게도 포함된 것이 아니라면 이 시선은 '관객'의 시선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관객의 위치는 이미 '잭'의 시선을 가장 먼저 공유하는 과정에 의해 1950년대의 보편적인 군중과 동일시되어 있다. 즉, 이 시선은 '1950년대의 사회'가 '동성애를 행한 캐롤'을 바라보는 시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동성애를 했던 혹은 하는 캐롤은 이 (1950년대 사회의) 시선 속에서 '어머니'의 위치를 부여받을 자격을 잃어버린다. 이는 바로 뒤이어 들어오는 남편 하지의 모습, 적절한 '가장'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하지와 완벽하게 대비되며, 1950년대에 동성애를 하는 중년여성의 위치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장면 이후 곧바로 이어지는 장면은 하지와 캐롤이 해리슨의 아내인 지넷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하지는 캐롤이 그녀의 이전 동성애 상대였던 린디의 대모 '애비(사라 폴슨)'와 지속적으로 연락을 하고 지내는 것에 대해 못마땅해 한다. 그때 캐롤은 가정부 플로렌스를 쳐다본다. 잠깐 스치듯이 나타난, 플로렌스를 바라보는 캐롤의 시점쇼트는 캐롤의 가장 사적인 공간이어야 할 '캐롤의 집'은 그녀에게 '어머니'와 '아내'라는 사회적인 위치를 부여하는 공간일 뿐만 아니라 그녀의 동성애를 '감시하는 시선'인 플로렌스의 시선까지 존재하는 공간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캐롤의 집은 그녀의 사적인 공간이 아니라, 그녀를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이 혼재하는 또 다른 사회적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 

  캐롤의 집이 또 다른 사회적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캐롤과 테레즈가 또 다른 사적인 공간인 '테레즈의 집'으로 향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선택일지 모르겠다. 캐롤은 테레즈가 사진작가의 꿈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 좋은 카메라조차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카메라를 하나 마련해 테레즈의 집으로 향한다. 캐롤의 방문에 문을 열어주는 테레즈의 모습을 우리는 또다시 '주인 없는 시선'을 통해 바라보게 된다. 이 시선 역시 린디와 함께 있는 캐롤을 바라보았던 것과 동일하게 '관객의 시선'의 시선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1950년대의 사회가 그녀들의 관계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사회의 시점쇼트는 그녀들에게 공간을 내어줄 생각이 없어 보인다. 좁은 복도에 서 있는 캐롤과 테레즈는 마치 사라질 듯 화면의 오른쪽에 겨우 화편화 되어 있다. 테레즈는 상류사회의 여성인 캐롤과는 다르기에 그녀의 집에는 그녀가 감내해야 할 사회적 시선(린디, 하지, 플로렌스로 대변되는)이 침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집은 간단한 통화조차 집주인의 눈치를 보면서 해야 하며, 그런 통화조차 옆집의 시끄러운 군중들에 의해 가로막힐 정도로 자유롭지 못하다. 테레즈의 집은 언제든 사회의 시선이 침투할지 모르는 공간이다. 실제로 이들의 가장 은밀한 대화, 캐롤이 테레즈에게 함께 여행을 떠나자고 제의하는 대화는 테레즈의 집이 아닌 옥상에서 이루어진다. 

  캐롤과 테레즈에게 '집'이라는 공간은 사회의 시선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그들만의 내밀한 공간이 아니다. 각자의 집에서의 만남은, 상류사회의 여성은 상류사회의 여성대로 서민층의 여성은 서민층의 여성대로, 그들의 집이 1950년대의 사회의 연장선에 놓인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에 불과하다. 캐롤과 테레즈가 떠나게 되는 여행은 현실을 견디지 못한 캐롤의 도피여행이자 서로의 감정이 깊어지는 여행이기도 하지만, 사회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그들만의 공간을 찾아 헤매는 여정이기도 하다. 캐롤과 테레즈가 육체적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은 가장 고급스러운 호텔이 아닌, '워털루'라는 그들조차 처음 들어보는 공간에 들어선 이후다. 그들의 육체적 관계는 사회의 시선에서 벗어났다는 확신에 의한 행위였으며, 그들의 도피적 여행은 성공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들의 확신은 가장 은밀하게 숨어있던 시선, 하지가 붙인 사설탐정(코리 마이클 스미스)의 관음적인 시선에 의해 산산조각 나버린다. 그들의 도피여행은 결과적으로 사회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은 없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는 여정으로 전락해버린다. 


  2. 대화 장면과 시선의 전복 


  시점쇼트가 인물들과의 감정적 동일시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침투하는 사회의 시선과의 관계를 함께 드러내 주었다면, 오버더숄더(over the shoulder)쇼트로 이루어진 대화 장면들은 사회의 시선 속에서 성 소수자인 그녀들이 어떤 위치에 놓이게 되는지는 포착해낸다. '시선'을 다루면서 대화 장면을 언급하는 것은 다소 의아할 수 있겠지만, 오버더숄더쇼트로 이루어진 대화 장면은 시점쇼트만큼이나 명확한 시선의 교환이 이루어지고 있는 장면이다. 일본 영화계의 거장 '오즈 야스지로(1903~1963)'의 특별한 대화 장면은 오버더숄더쇼트에서 시선의 교환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좋은 예시다. 오즈 야스지로는 종종 대화 장면을 담아낼 때, 오버더숄더쇼트를 사용하지 않고 듣는 이를 배제한 채 말하는 이만 정면으로 담아내는 것을 반복하는 경우가 있다. 기존의 오버더숄더쇼트방식을 접해오던 관객이 오즈의 이러한 대화 장면에 어색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말하는 이의 시선을 받아주던 듣는 이의 뒷모습이 사라져, 말하는 이의 시선을 급작스럽게 정면에서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위화감은 '부재'한다고 여겼던 '시선의 현존'을 마주했기 때문에 온다고 말할 수 있다. 

  오즈 야스지로의 대화 장면에서 우리가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대화 장면에서 시선의 교환은 이중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지점이다. 듣는 이가 뒷모습으로 카메라의 바로 앞에 화편화되기에 우리는 일차적으로 듣는 이에게 동일시가 이루어지지만, 듣는 이의 완전한 시점쇼트가 아니기에 대화 장면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을 이차적으로 가지게 된다. 즉, 우리는 이 장면을 듣는 이의 시점으로도, 동시에 듣는 이와 말하는 이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바라보는 응시의 주체로서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앞서 '캐롤'에서 관객의 시선은 이미 1950년대 사회의 보편적인 시선과 동일시되어 있다는 것을 언급했는데, 그렇다면 해당 대화 장면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주체는 1950년대의 사회라고도 볼 수 있다.

  '캐롤'에는 많은 오버더숄더쇼트가 나오지만 그중 '테레즈-리처드'의 대화 장면과 '테레즈-캐롤'의 대화 장면은 극명하게 대비된다. 캐롤을 만난 후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고 있는 테레즈는 현재 사귀고 있는 남자 친구 리처드에게 길을 가다 문득 "사랑에 몇 번이나 빠져봤나요"라고 묻는다. 테레즈의 물음에 화면은 오버더숄더쇼트로 전환되고, 리처드는 "너뿐이야"라고 대답한다. 이어서 이들은 동성애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리처드는 동성애는 질병이라며 거부한다. 1950년대 사회의 시선으로 보기에 남녀 연인관계인 리처드와 테레즈의 관계는 안정적인 관계다. 동성애에 대한 테레즈의 질문에 대한 리처드의 답변도 동성애를 죄악이나 질병으로 보는 당시 사회의 시선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정상적이고 안정적인 관계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 또한 안정적이다. 테레즈는 한편에 리처드는 다른 한편에 화편화되어 화면의 안정적인 구도를 반영한다. 테레즈와 캐롤이 처음으로 '사적인 대화'를 나누게 되는 공간은 캐롤이 테레즈에게 장갑을 찾아준 답례로 식사를 대접하는 식당이다. 이 장면도 역시 오버더숄더로 잡혀있는데, 이때의 화면은 리처드와의 대화 장면과는 다르게 두 인물 모두 한쪽으로 화편화되어 있어 불안한 화면 구도를 창출한다. 비균일하고 불안한 화면 구도는 사회의 시선 속에 이들의 관계가 정상적이지 않고 불안한 관계로 비친다는 점을 명확하게 드러내 준다.

  사회의 시선이 캐롤과 테레즈를 재단하고, 그녀들은 사회의 시선에 의해 수동적으로 규정지어지던 관계가 전복되는 것은 '법정 공방 대화 장면'이다. 하지가 캐롤과 테레즈의 관계를 캐내기 위해 사설탐정을 고용하게 되고 하지는 사설탐정이 녹취해온 증거자료를 통해 캐롤에게서 린디에 대한 양육권을 뺏어오려 한다. 이 사건 때문에 캐롤과 테레즈는 헤어지게 되고, 캐롤은 하지와 법정공방으로 나아가게 된다. 캐롤과 하지 그리고 둘의 변호사는 법원에 모여 캐롤의 '처벌'을 논의하는데, 결국 이 법적 공방은 1950년대의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사회가 '엇나간' 중년여성을 처벌하는 행위인 것이다. 캐롤에 대한 재판임에도 그녀는 논의과정에서 제외되어 있다. 그녀에 대한 처벌은 두 변호사와 하지가 소리 높여 논의한다. 법정 공방이 더욱 치열해지려는 순간 캐롤은 "제가 이야기해도 될까요"라고 말하며 법정 안의 모든 시선을 주체적으로 자신에게 가지고 온다. 이전까지 캐롤과 테레즈의 위치는 언제나 수동적인 것이었다. 테레즈는 백화점에서 '벨리벳 양'으로 호명받거나 리처드가 '테리'라고 불러줄 때만 사회 속에 위치할 수 있었고, 그녀가 꿈꿀 수 있는 직장에 가보는 것 또한 그녀의 친구 대니가 테레즈에게 호감을 품고 그녀를 불러줄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캐롤 또한 상류층 집안의 아내로서 '캐롤'이 아닌 '에어드 부인'으로 존재해야지만 자신의 삶을 영위해 갈 수 있었다. 그녀는 지금 사회 혹은 남성에 의해 호명되고 응시되는 객체의 위치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남성과 사회의 시선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캐롤은 자신에게 형벌이 내려지는 장소에서 스스로 자신에게 형벌과 판결을 내린다. 즉, 캐롤은 자신이 가장 약자이면서 수동적인 상황에 놓여있는 법정에서 오히려 주체적으로 시선을 요구하고 자신에게 형벌을 내리며, 서사 내내 수동적이었던 자신의 위치를 전복시킨다. 나아가 그녀는 하지를 '추한 사람이 아니다'고 말하며 끌어안아준다. 하지는 1950년대의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적인 전형적 가장이며, 변호사들 또한 법을 영위한다는 측면에서 해당 사회의 기조를 수호하는 인물군들이다. 우리 또한 이들과 동일시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캐롤을 처벌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캐롤의 주체적인 행동에 의해 캐롤에게 용서받는 위치로 내려앉게 된다. 

  자신의 정체성을 마주하기로 택한 캐롤은 테레즈와의 재회를 꿈꾼다. 캐롤은 처음으로 테레즈에게 "사랑해"라고 말하지만, 테레즈가 미처 대답하기 전에 '잭'이 테레즈를 발견하고 그녀에게 말을 걸며 다가온다. 이 장면은 우리가 '잭'의 시선을 통해 테레즈와 캐롤을 발견했던 영화의 첫 장면이다. 둘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대화가 오갔지만, 그 대화를 방해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우리와 동일시 된 익명의 군중 '잭'이다. 하지만 이 잭의 난입은, 동시에 우리의 시선의 난입은 그 어떤 군중보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이 둘을 방해하게 된다. 아무런 자각 없이 그 사회의 혹은 시대의 이데올로기나 가치관, 시선에 편승하며 살아가는 것이 다른 이들의 삶에 어떤 방식으로 틈입하게 되는지를 토드 헤인즈는 '밀회'의 서사 형식을 빌려 영리하게 표현한다. 


  3. 기차와 시선의 회귀 


  시점쇼트와 대화장면들이 캐롤과 테레즈 그리고 사회와의 관계를 시선을 통해 규정짓고 이를 전복시키는 과정을 보여주었다면, '기차'로 표현되는 회귀의 테마는 캐롤과 테레즈라는 두 여성의 관계에 보다 집중한다. 이미 여러 평자들이 '캐롤'의 기차가 주는 정서와 이와 맞물려 돌아가는 '회귀'의 서사를 언급한 바 있다. 박소미 또한 '테레즈가 캐롤에게 다가갈 때(씨네21 2016년 2월 25일 자)'에서 "캐롤이 테레즈에게 다가가던 첫 만남과 대구를 이루며 이번에는 테레즈가 캐롤에게 다가갈 때 '캐롤'의 이야기도 완결된다"라며 기차라는 소재에서 드러나는 회귀의 정취가 서사적 형식과 맞물려 돌아가는 아름다움을 말한다. 회귀의 테마는 박소미의 언급처럼 서사적 형식과 맞물려 돌아가며 완결성을 더해주는 부가적인 효과를 주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이 기차라는 소재와 회귀의 정취는 캐롤과 테레즈의 '시선의 교환'과 맞물린다는 지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테레즈는 백화점 개장 준비를 하며 장난감 기차세트의 전원을 올린다. 그리고 그 기차의 전원을 우연히도 끄게 되는 것은 다름 아닌 캐롤이다. 테레즈의 시선이 캐롤에게 도착했을 때, 테레즈가 보낸 기차가 캐롤 앞에서 멈춘 것은 단순한 우연의 작용만은 아닐 것이다. 테레즈가 캐롤에서 보낸 시선은 기차와 함께 캐롤의 집으로 가게 된다. 린디의 크리스마스 선물로 구입한 기차 세트지만, 우리는 린디에게 이 기차가 도달하는 것은 보지 못한다. 우리가 이 기차를 다시 보게 되는 것은 캐롤의 집에서, 모두가 잠든 늦은 밤 그녀의 방에서다. 캐롤이 기차를 꺼내어 작동시켜 보는 때는, 그녀의 집 안에 있는 모든 시선이 제거된 이후다. 하지도 돌아갔으며 린디는 잠들어있다. 그녀를 감시하는 시선인 가정부 플로렌스 또한 이 공간은 들여다보지 못한다. 그녀는 지금 '어머니 캐롤'도 아니며 '아내 캐롤'도 아니다. 온전히 자신의 정체성을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과 공간에 놓여있는 캐롤은 지금 테레즈가 보낸 시선, 기차를 마주 보고 있다. 

  기차 세트가 뻗어 나가는 형태가 아닌 원형의 레일을 갖고 있다는 것은, 기차와 맞물려 있는 테레즈의 시선이 어떠한 형태로든 캐롤에게서 다시 테레즈에게로 회귀할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테레즈에게로의 회귀는 다소 의외의 형태로 또 급작스럽게 다가온다. 테레즈는 캐롤의 초대로 크리스마스날 그녀의 집으로 향하지만, 그곳에서 테레즈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어머니 캐롤'과 '아내 캐롤'이다. 테레즈가 보낸 시선은 아직 캐롤이 준비되지 않은 자신의 모습인 어머니 캐롤과 아내 캐롤의 모습을 테레즈에게 보이게 되고, 이는 테레즈가 울음을 터트리며 기차를 타고 돌아오게 되는 방향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들의 기차가 선로를 벗어난 이유는 이들이 아직 서로의 시선을 감내할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캐롤은 아직 1950년대 사회가 요구하는 '에어드 부인' 과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는 '캐롤'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으며, 테레즈 또한 자신의 정체성을 마주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못한 상태다. 테레즈의 미성숙은 그녀가 일하고 있는 백화점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장난감은 통상 아이를 상징하고 노동은 성인을 상징하지만, 테레즈는 장난감 가게에서 노동을 하는 상황이다. 그녀는 성인인 동시에 아이인 상태다. 캐롤과 테레즈는 아직 1950년대라는 사회 속에서 서로를 응시할 수 있을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서사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기차의 소리가 다시 들리는 것은 영화의 마지막, 테레즈가 무언가 결심을 한 듯이 캐롤이 있는 오크룸으로 향할 때다. 캐롤은 법정공방을 겪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마주하기로 택했고, 그 과정에서 남성 중심적 시선을 전복시키며 자신의 싸움을 헤쳐나온 상태다. 테레즈 또한 캐롤과 헤어진 이후 타임즈에 취직을 해서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힘을 얻었고, 동시에 자신에게 다가오는 동성애적 시선을 통해 캐롤에 대한 자신의 감정 또한 재확인할 수 있었다. 캐롤에게로 향하는 테레즈의 모습에는 기차의 소리가 겹쳐 들린다. 그녀는 지금 곧게 뻗은 길을 주저 없이 나아가고 있다. 지금 캐롤에게 향하는 테레즈의 기차는 더 이상 사회 속에서 무한 회귀하는 원형의 레일에 매여있는 기차가 아니다. 테레즈의 기차는, 그녀의 시선은 이제 올곧게 뻗어 나갈 준비가 되어있다.


  4. 엔딩 시퀀스의 정취 


  테레즈는 캐롤이 있는 '오크룸'으로 향한다. 테레즈는 군중 속에 있는 캐롤을 찾아내고 그녀를 향해 다가간다. 흔들리는 그녀의 시선이 안정감을 찾는 순간은 캐롤이 그녀의 시선에 또 한 번 응답을 해주는 순간이다. 군중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게 되는 과정은 그들이 서로를 처음 발견했던 '백화점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1950년대의 사회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캐롤과 테레즈는 여전히 군중들 속에 있는 서로를 발견해야만 하며, 캐롤에게 향하는 테레즈의 시선에는 군중들이 끊임없이 틈입한다. 하지만 더 이상 군중들은 캐롤과 테레즈가 서로를 바라보는 것을 방해하지 못한다. 그들만의 공간을 찾아 떠난 도피성의 여행은 실패의 여정으로 끝나고 다시금 그들이 사회로 회귀하도록 만들었지만, 그들은 실패의 여정을 통해 익명의 군중들로 가득한 사회 속에서 '개별자'로 서 있을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우리는 지금 '에어드 부인'과 '벨리벳 양'이 아닌 개별자 '캐롤'과 '테레즈'가 서로 마주 보는 순간을 보고 있다. 사회 속에서 개별자로 서 있는 두 여성이 주체적으로 서로의 응시의 대상이 되는 순간,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시선의 정취를 마주하게 된다. 



  <당선소감>


  책임감 갖고 영화와 마주하라는 독려와 채찍질


  아직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는 나에게 영화 평론은 그저 영화에서 느낀 감흥을 마주하는 일이다. 그것은 영화와 나와의 간극을 감흥으로 채우는 일이며, 동시에 그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 과정과도 같다.

  1년의 휴학 중에 절반은 나의 감흥에 솔직해지는 것에 몰두했던 것 같다. 영화를 보는 눈과 지식을 쌓는 것보다 힘들었던 것은, 나에게 다가온 이 감흥이 내가 진정으로 느끼고 있는 것인지 다른 이의 감흥을 나 또한 느꼈다고 착각하는 것인지를 솔직하게 구분해 내는 일이었다. 그 과정은 나 자신을 옥죄고 괴롭게 하는 일이었지만 동시에 나에게, 타인에게, 영화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해주었다.

  다소 이기적인 작품이었음에도 당선이라는 영광을 주셨기에, 이번 당선은 나의 작품에 대한 수상이라기보다 조금은 더 책임감을 가지고 영화와 마주하라는 독려와 채찍질로 다가온다.

  감사 인사를 올려야 할 분들이 많지만 몇 분을 특히 언급하고 싶다. 영화평론이란 세계에 발을 들이도록 해준 안숭범 평론가에게, 집요하게 글을 쓴다는 고통과 희열을 동시에 느끼게 해준 정한석 평론가에게, 영화에서 느낀 감흥만을 가지고 영화 안에서 헤매는 소중한 경험을 하게 해준 남다은 평론가에게 감사 인사를 올리고 싶다. 묵묵히 바라봐 주셨던 부모님께, "오빠, 이제 인생 핀 거야?"라고 되지도 않은 축하를 해준 어리고 사랑스러운 내 동생에게, 힘든 시기마다 항상 옆자리를 지켜주었던 여자친구에게도 수상의 영광을 돌리고 싶다.


  ● 1992년 서울 출생. 
  ●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재학 중.


  <심사평>


  정치·사회성에 대한 영화적 시선이 창의적


  모두 18편의 응모작이 들어왔고 그중 14편이 영화평론이었다. 대체로 수준급이었지만 시국 탓인지 사회적 상황과 영화 서사를 연관 짓는 글이 많았다. 이런 접근은 사회학적 환원론에 빠질 위험이 있는데, 안타깝게도 그 함정을 벗어나지 못한 글이 많았다.

  최종적으로 3편을 두고 오래 고민했다. 세 편 모두 그 필자의 또 다른 글을 읽고 싶은 좋은 평론이었다.

  '헬조선에서 한국영화가 살아남는 방법: 나홍진의 '곡성', 연상호의 '부산행'을 중심으로'는 사회적 시야를 견지하면서도 영화적 디테일에 대한 감각이 돋보이는 글이었다. 하지만 '곡성'의 '사술'에 관한 분석은 완전히 새롭다고 말하기는 어려웠고, '부산행' 분석에서 '북한'을 끌어들인 건 참신했으나 설득력이 다소 부족해 보였다. '기억의 허술함과 부재를 견디는 방식-홍상수 영화의 어긋난 시간과 사랑의 층위'는 성실한 독해의 태도가 좋았고 문장력은 응모작 중 가장 뛰어났다. 하지만 홍상수 영화의 부정성과 균열이 어떻게 또 다른 층위의 조화에 이르는가의 지평에까지 나아가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당선작으로 ''캐롤', 시선의 전복이 가져다주는 정취'를 뽑았다. 이유는 이렇다. 첫째, 자신의 분석 대상이 소설이 아닌 영화라는 점을 가장 깊이 의식하고 있다. 둘째, 영화적 시선의 정치성과 사회성에 대한 포착이 창의적이며 예리하다. 훌륭한 영화평론이다. 

  시 평론 4편 중 '타자의 윤리를 실현하는 '빈 몸'의 시학-김행숙론'은 설득력 있고 문장도 좋았으나 역시 완전히 새로운 분석이라고 보긴 힘들었다. 시 부분 심사위원들의 견해를 참조한 뒤, 영화평론 당선작 쪽이 좀 더 뛰어나다고 결론을 내렸다.

심사위원 : 허문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