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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귀촌 / 정연희

 

  귀가 한 마을을 이루고 있다

  멀고 가까운 말들도

  촌에서는 하나로 연결된 귀가 된다

  귀걸이처럼 빛나는 소문들

  귀가 제일 빠른 곳은 촌이다

  특용작물을 심은 노총각의 이야기, 젊은 며느리와 늙은 시어머니와 다국적 갈등, 파리 한 마리와 한나절을 놀았다는 과부댁, 허리가 점점 늦가을 풀포기처럼 구부러지는 재 너머 노인, 합죽의 입 꼬리에서 뛰어오는 손자들 부러운 마음 감추고 듣는 독거노인들 이야기가 점심 물린 마을회관에 가득하다. 토지수용 소문에 동네가 술렁이고 쇠약한 용돈을 먹고 약장사가 지나가고 나면 촌에는 보일러 공기구멍에 집을 짓는 새와 부엌이 놀이터인 쥐가 퍼트리는 소문이 있다

  반상회가 끝난 자정 무렵

  민화투 점수로 오고가는

  소문의 끄트머리들이

  텅 빈 까치집으로 들어간다

  폐가는 집 비운 소문으로 흉흉하고

  논두렁에는 논두렁 소문이 길게 늘어나고

  어쩌다 주춤했던 귀들도

  오일장 다녀 온 뒤로 다시 무성해지는

  이발관 그림 같은 풍경에 뛰어든 사람들

  밤이 빨리 찾아오는 촌 풍경에

  바쁜 귀가 몰입해 있다



  <당선소감>


  "시가 쇠약한 농촌에 울림 줄 것"


  내 생애 가장 근사한 선물인 신춘문예 당선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우리들의 고향은 비약적이고 시린 곳이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어도 늘 어미닭이 병아리를 품듯이 따뜻한 체온을 느끼게 해주는 모체다. 점점 쇠약해져가는 농촌의 현실이 마음 아프지만 시란, 그 본질적인 곳에서 울림을 줄 것이라고 믿었다.

  되돌아보면 비탈길을 내려와 햇살 쏟아지는 신작로로 떠나 온 그곳. 화려한 도색의 글들이 쌩쌩 지나간 뒤를 바라볼 때마다 나의 글은 갓 도시에 입성한 사람처럼 주눅이 들고 한없이 초라했다. 그런 시를 위로한 것은 바람의 속삭임이었다. 바람은 내 손을 잡고 물결치는 푸른 보리밭을 날다가 꽃가지를 흔들어대며 깔깔거리기도 했다. 그 촌스러움은 한없이 작아지다가 흙과 햇살과 바람과 별빛을 가득 채우는 넓은 가슴이기도 했다.

  소박한 시를 쓸 수 있는 환경과 우리들의 고향인 촌에 감사한다. 또한 힘을 실어 주신 유안진, 이동희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두 분의 선택에 누가 되지 않는 시를 쓰도록 노력하겠다.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딸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어 더없이 행복한 날이다. 늦게 찾아 온 시가 늦은 것이 아니라 이미 어린 날의 순박한 체득이었음을 고백한다. 우리들의 고향을 위해 언제나 흙냄새 나는 정론을 펼치고 있는 전북일보에 감사드린다. 잊지 않고 글다운 글 열심히 쓰겠다. 


  ● 1958년 전남 보성 출생.
  ●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 용인수지우체국 근무.
  ● 용인문학회 회원, 동서문학회 회원.
 

  <심사평>


  "사라져가는 우리 것 지키는 시심"


  시문학이 지닌 제일의 가치는 문학적 진실에 있다. 문학적 진실은 필연적으로 사유의 깊이와 미학적 감동으로 이루어진다. 시를 읽는 사람의 정신세계에 파열음을 내는 사색적 자극, 물신의 재미에 빠져 사는 사람에게도 격조 높은 심미적 쾌감을 주는 표현의 아름다움이 결합하여 시를 시답게 한다. 그것이 바로 문학적 진실이다.

  이런 시문학의 진리를 외면한 채 시류에 편승하거나 소위 ‘신춘문예형’ 시 쓰기로 독자를 현혹하려는 자세를 경계한다. 그런 경계를 뛰어넘고자 하는 시문학 지망생들이라면 반드시 화자의 체험이 깊이 육화되어 있어야 할 것이며, 그 체험적 진실이 미적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우리말을 갈고 다듬는 일을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시인의 제1사명이 바로 모국어의 지킴이가 아니겠는가.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여덟 응모자 33편의 작품을 정독했다. 제목이 곧 제재라면 김정숙 씨의 ‘새우가 쓴 고래의 자서전’은 ‘새우가 쓴 고래의 전기’여야 마땅할 것이며, 한문수 씨의 ‘폭우를 만나다’에서는 중심 제재인 ‘폭우’를 형상화하려는 진술들에서 폭우의 원관념이 실종되고 말았다. 체험적 진실이 깊이를 이루지 못한 점, 표현의 언어 감각이 의욕을 감당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런 작품들을 제외시킬 수밖에 없었다.

  끝까지 남은 작품은 김진희 씨의 ‘허공’과 최인순 씨의 ‘불을 자르는 사내’와 정연희 씨의 ‘귀촌’이었다. 세 응모자들이 함께 묶어 응모한 다른 작품들까지 면밀히 검토하면서 ‘허공’은 참신한 발상에도 불구하고 체험의 내면화 정도에서 섬세함이 모자라다 보았으며, ‘불을 자르는 사내’에서는 우리말을 가꾸고 다듬으려는 의장(意匠)이 좋은 성과를 내고 있었다. 이를테면 “파란 불꽃만 피워 올린 한 그루 불꽃, 정원사가 다듬어 놓은 불은 몇 백 년을 활활 타오를 것이다” 등의 표현의 참신성에서 끝까지 당선작과 겨루었다. 그러나 ‘귀촌’의 장점을 넘어서지 못했음을 아쉽게 여긴다.

  당선작 ‘귀촌’의 미덕은 많다. 사소한 듯이 보이는 소재들에서 사라져가는 우리 것의 소중함을 지켜내려는 시심(詩心), 모국어의 지킴이로서 올바른 시인의 사명에 대한 자각, 체험이 육화되어 스스로 우러나온 ‘태어난 시’이지 ‘만들어진 시’가 아니라는 점, 타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몸담고 있는 우리의 현실과 정면으로 맞닥뜨려 이를 형상화해 내는 시안(詩眼)의 참신함 등에서 당선작으로 밀어도 전혀 손색이 없다고 보았다. ‘귀촌’이 함축하는 세계가 오늘의 농촌-시골마을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열어주는 것은 물론 막연한 ‘소문’으로 피폐화되어 가는 현실에 대한 의장은 뜻있게 보였다. 다른 응모작들 ‘까끄라기’ ‘바람수습’ ‘씀바귀’에서도 고른 밀도를 보여, 이 당선자가 펼쳐 보일 시문학의 장래를 안심할 수 있겠다는 것도 당선작으로 미는데 힘이 되었다.

  좋은 시를 만난 느낌이 소중하다. 아깝게 선에 들지 못한 시문학 지망생들의 분투를 빌며, 당선자의 문운을 기대해 마지않는다. 


심사위원 : 유안진, 이동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