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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백팩 / 정숙인

 

  나의 과거가 사라진다면 나는 존재할 수 있을까. 과거는 현재의 기억이다. 현재는 미래의 기대가치다. 아버지를 향해 뿌려진 막걸리 한 잔이 나의 과거가 되고 지금이 나의 미래가 되는 것이다. 내 피 속의 우주먼지가 또다시 중력에 끌리는 몸을 만들 것이다.

  나는 펜을 멈추고 메모장을 덮었다. 열차가 플랫폼에 닿기도 전에 몇몇의 사람들은 출입구 쪽을 향해 줄을 섰다. 손에 들고 있던 낡은 공책을 상자 안에 넣고는 창밖을 내다봤다. 종착역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열차는 속도를 줄였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백팩을 맸다. 백팩은 여행자에게 의식과도 같은 것이다. 플랫폼에 발을 디디는 순간, 열차는 나를 습하고 비릿한 열기 속으로 토해냈다. 내가 도착한 해안도시, 여수다.

  역 출구 왼편으로는 오래전 시멘트 싸이로였다는 전망대가 보였고 그 뒤편에 있음직한 바다에는 크루즈 유람선이 졸고 있었다. 스카이타워 전망대는 하프모양의 거대한 파이프오르간을 원통의 싸이로 바깥으로 두르고 뱃고동 소리를 뱉어냈다. 원시의 소리가 광장을 압도했다. 소리가 빛을 통과하는 순간 중력에 가둬진 시간이 사람들의 움직임 속으로 흡수되었다. 여행객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일정이나 목적지에 대해 이곳저곳에서 떠들어댔다. 그들의 웅성거림은 하프의 선율에 음표를 만들며 흔들렸다. 사람들의 표정은 제각각이었지만 누구나 할 것 없이, 상기되어 보였다. 나는 어때 보일까? 그들을 보며 가만히 내 이마를 짚었다. 낯선 곳으로 떠나기 전날 밤이면 나는 묘한 긴장감에 줄곧 잠을 설치곤 했다. 금식을 하지 않으면 여지없이 체했다. 그 습관은 어쩌면 나에게 존재하는 암흑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오르간 소리는 빈속의 내장을 훑으며 투웅, 하고 공명했다. 중력으로 엮인 그 파장이 거대한 너울을 만들면서 박람회장의 웜홀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팔월의 열기가 광장의 아스팔트 위에서 형체도 없이 이글거렸다. 여수엑스포역 광장과 도로의 경계에 있는 여행 안내소에서 만성리로 가는 버스 시간을 확인했다. 나는 그가 적어놓은 공책의 노선을 따라가기로 했다. 만성리행 버스를 타면 마래터널을 지난다고 했다.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7번 버스를 타야 한다. 버스정류장은 안내소와 멀지 않았다. 문화관광해설사에게 안내받은 대로 박람회장 3문에서 큰 도로 방향으로 일 분여를 걸었을 때 만성리행 7번 버스를 탈 수 있는 곳이 나타났다. 그의 공책에 씌어진 마래터널이 궁금했다. 조사를 뺀 몇 개의 단어들이 지도를 그리듯 흩어져 적혀진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유적의 형체를 찾아내라는 것일까. 붓으로 타임슬립의 시간을 털어내듯 그가 남긴 문자들을 생생하게 복원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만성리와 마래터널의 행간의 의미를 찾아, 나의 아버지, 그가 내게 전하는 말의 의미를 찾아.

  정류장에는 인솔자로 보이는 남자가 스무 명쯤 되는 학생들에게 뭔가를 소리 높여 말했다. 학생들은 버스를 기다리는 것이 지루한 듯 보였다. 팔월 한낮만 아니라면 그들도 버스를 기다리지 않고 걸었을 것이다. 오른쪽으로 비켜서시오, 라고 쓰여 있었다. 터널 안에서의 주의사항이 분명했다. 터널과 어울리지 않는 안내판이 검은 아치의 입구 오른편에 붙어있었다. 약 백 미터마다 오른편으로 비켜설 공간을 알리는 LED였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못 보고 지나칠 게 분명했다. 그러나 이를 관찰한 목격자 누군가는 관할부서에 잘 모르겠더라, 라는 댓글이라도 달아야 할 것이다. 터널은 쌍방이 아니었다. 초행이라면 이용방법에 서투를 수밖에 없겠지만 예상한대로 어떤 이는 그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관광객들은 왜 낯선 곳에서 더 주의하지 않는 걸까? 편도의 터널 안은 꽉 막힌 게 분명했다. 사람들은 암호 같은 그림을 해석해내지 못했다. 터널 밖의 차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엉성한 테트리스처럼 늘어섰고 급기야는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었다. 푹푹 찌는 열기 속에 묵혀지는 시간들도 답답했다. 아저씨, 저 좀 내려주세요. 기사는 얼굴을 찡그렸다. 한숨을 몰아쉬더니 마지못해 문을 열어주었다. 사고책임은 지지 않겠다면서. 차 밖으로 몇몇의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노년의 한 남자는 상황을 파악하려는 것인지 팔짱을 끼고 이리저리 둘러봤다. 어떤 중년의 남자는 터널 안으로 들어오지 말라는 듯 손사래를 치며 빛이 환한 터널 밖의 차량들을 향해 소리를 질러댔다. 세워진 차량마다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민 사람들, 그들의 얼굴이 겹쳐져 한 사람처럼 보였다. 검은 굴 안에서는 차들의 불빛과 소음만 들렸다. 사람들의 호흡과 뒤숭숭한 소리들이 뒤섞였다. 침이 마르고 헛헛증이 일었다. 마래터널 안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좁았다. 최대한 벽 쪽으로 붙어서 걸어야 했다.

  나는 군 입대를 미뤄왔다. 어쩌면 이번에도 입대를 포기하고 다시 연기신청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도 없다. 이틀 후면 군에 입대해야 한다. 여지없이 입대일이 다가오자 또 미칠 것처럼 답답했다. 밑도 끝도 없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내 처지를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통화는 할 수 없다고 지민에게서 다급한 문자가 찍혔다. 그리고 서울 집으로 어제 그녀의 아버지와 오빠가 찾아왔다. 그녀의 아버지는 내 휴대폰을 낚아채더니 컴퓨터를 가져오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팔로 그것들을 내던지더니, 뒷발로 휴대폰과 컴퓨터 본체를 짓밟아 부수고 폭언을 퍼부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내게 어떤 말을 했는지 다시 떠올리고 싶지도 않다. 엄마에게 차마 그 말까지는 하지 못했다. 그녀와 내가 장난처럼 찍은 사진이 문제였다. 스마트폰은 누구에게나 쉽게 기록의 도구가 되었다. 또래 사이에서는 백 일이나 천 일을 기념해서 연인의 기록을 남기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진실을 나눈 순간을 확인하고 싶었다. 서로를 찍어주고 함께 본 다음 바로 삭제했다. 우리만의 원칙이었다. 확인하고 싶었을 뿐 남겨둬서 해킹을 당하거나 분실하는 일로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노출시키는 일을 벌이지 말자고 약속했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내게는 사진 한 장도 남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민의 휴대폰이 문제였다. 내가 보냈던 JPG파일 중 미처 삭제되지 않은 사진이 있었다. 그녀말로는 휴대폰으로는 확인되지 않아서 몰랐다고 했다. 부모님과 자신의 휴대폰에 있는 영화를 같이 보기로 하고 TV모니터와 연결시켰다가 알몸으로 엉켜있는 사진을 가족 모두가 보게 된 것이다. 어른들에게는 용납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용서받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나와 같은 버스를 탔던 학생들이 긴 띠처럼 마래터널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도 차를 피하며 벽으로 내몰렸다. 아이들은 조심스러워 보였다. 튕겨 나가지 않으려고 내 발걸음을 되밟으며 잰걸음을 하는 것이다. 나는 그들과 멀찌감치 떨어져 걷기위해 성큼, 보폭을 키웠다.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나의 두 번째 사춘기는 엄마에게 질문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엄마는 내가 없는 게 더 좋겠죠? 내가 없었다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그럴 때마다 엄마는 내 눈을 피했다. 중심을 잡기위해 벽을 붙들었다. 생명을 느낄 수 없는 검은 벽은 서늘했다. 머리카락 끝부터 발끝까지 순식간에 퍼지는 차가운 전율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런데 검은 화석 속에 깃든 무언가가 아우성치고 있었다. 깜짝 놀라 중심을 잃지 않으려 벽을 붙든 내 모습이 더 이상 생식기를 쓸 수 없는 늙은 거미처럼 느껴졌다. 나는 더 이상 스물다섯 살의 청년이 아니었다. 그가 내게 보낸 상자, 내가 짊어진 상자를 생각했다.

  누군가 시체들 속에서 아버지를 봤다고 했다. 하지만 제주여자는 사람들의 말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눈앞은 검고 차가운 침묵뿐이었다. 포승줄에 줄줄이 묶인 사람들이 터널을 지나 구덩이 앞에서 자신들보다 먼저 이곳에 왔던 사람들, 그 주검들을 보는 것은 참혹했을 것이다. 이제 자신들도 그리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제주여자는 믿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두 눈으로 아버지의 주검이 없는 걸 확인해야 했다. 제주여자에게 터널은 희망이었다.

  일제강점기의 일본군들은 군수물자를 약탈하기 위해 한국인에게 이 터널의 건설을 부역시켰다. 한 정 한 정씩 떨어져나간 고통의 흔적은 백 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었다. 터널을 뚫으며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던 얘기가 떠올랐다. 차갑게 잊힌 검은 기억들이 터널의 천정에서 바닥까지 벽을 타고 내렸다. 통행하는 차량과 행인을 위해 설치된 불빛은 푸르스름했다. 그 때문인지 거대한 수용소처럼 음울했다. 내가 상자를 받던 날, 외할머니는 내게 마래터널을 알려주었다. 외할머니가 나보다 더 어렸을 때, 만성리로 가는 이 길은 암흑천지였다. 사람들은 한낮에도 그믐밤처럼 벽을 붙들고 귀를 곤두세우며 걸을 뿐이었다. 오래전 그들은 이 벽을 더듬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차들이 내뿜는 이산화탄소를 산소처럼 들이마셨다. 차들의 전조등과 후미등은 점점 더 규칙적으로 패턴화 되었다. 어지러웠다. 숨을 몰아쉬다가 이내 다시 벽을 붙들어야 했다. 아아. 누군가가 내 손끝을 쳤다. 벽, 벽은 더 이상 사물이 아니었다. 벽을 붙들 때마다 터널 부역자들의 터진 손이 만져졌다. 한 손 한 손, 또 한 손, 끝없이 내 손을 붙들었다. 무엇 때문일까? 그들의 손끝은 뜨거웠다. 나는 더 이상 마래터널이 두렵지 않았다. 외할머니가 들려줬던 그 시절처럼 부역자의 손을 더듬으며 터널을 빠져나왔다. 나의 할머니처럼.

  터널을 나오자 오른 편 벼랑 아래로 시퍼런 바다가 처연히 부딪혔다. 갈매기들은 낮게 날았다. 수면과 맞닿은 하늘은 눈이 부셨다. 수면이 너울거릴 때마다 잔잔한 물결이 은빛 윤슬을 만들었다. 어떤 의식처럼 나는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한참을 응시했다. 만성리 해변이 보이는 터널 밖의 차들은, 마래터널 안으로 들어오려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길 위에 붙들려 있었지만 이상하리만치 누구도 경적을 울리지 않았다. 서울과 다른 그 풍경이 낯설지 않았다. 오십 여 미터를 더 걷다가 걸음을 멈췄다. 비문이 있는 언덕이었다. 언덕에 세워진 비문 주변은 바람소리마저 고요했다. 분명 이곳은 누군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것이 분명했다. 주변의 잡초들은 입대 직전에야 삭발한 머리처럼 뿌리 가까이까지 깨끗하게 깎여 있었다. 친구들이 입대하던 연병장이 떠올랐다. 몇몇은 웃고 몇몇은 찡그렸고, 또 몇몇은 공포에 떨었고, 그렇게 몇몇은 눈물을 닦았다. 나도 모르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왼편에는 희생지로, 오른편에는 학살지로 쓰인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한 장소를 두고도 해석이 다르다. 무엇 때문에? 여순사건추모비 앞으로 더 가까이 갔다. 어떤 장식도 없이 건조해 보이는 비문을 돌다가 순간 걸음을 멈췄다.

  ‘……’

  단지, 말줄임표만이 비문의 중심에 있었을 뿐이다. 여섯 개의 점,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추모비 뒤편 비문의 내용은 너무나 뜻밖이었다. 여수로 내려오기 이틀 전이었다. 일곱 살 때 헤어져 지금껏 연락 없던 그로부터 상자 하나가 도착했다. 그 안에 담겨진 낡은 공책 한 권과 사진 한 장 그리고 칠십 년을 산 아버지의 흔적이었다. 질끈 눈을 감았을 뿐 울지 않았다. 무책임한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릴 의무 따위는 없었다. 나는 그의 성을 따르지 않았다. 엄마의 아들일 뿐이었으니까. 눈을 감은 채로 상자 안에 담긴 것을 더듬었다. 손끝에 느껴지는 얇고 각진 사진과 손가락 두께만큼 뭉툭한 공책에서 낡은 시간이 느껴졌다. 공책의 겉장은 오랜 노동으로 굳은살이 박이고 튼 것처럼 거칠었다. 상처가 덧나고 간신히 아문 손이라는 걸 눈을 감고도 알 수 있었다. 손가락을 공책 속에 넣었다. 글자들이 만져졌다. 꼭꼭 눌린 흔적이 종이의 뒷면에 한 자 한 자 손끝에서 살아났다. 아버지에 관한 것들은 오래전부터 내게는 낯설 뿐이었다. 그러나 뼈에라도 새길 듯 선명했고 손끝에서 전율하는 이야기는 온통 나를 뒤흔들었다. 여름날 중형 태풍에 흔들리는 나무처럼. 나는 꼬박 밤을 새운 채 백팩에 그의 상자를 넣고 여수로 온 것이다. 글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동경대를 졸업하고 고향의 여수공립수산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지역계몽운동에 매력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지역계몽주의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제주에서 4·3항쟁이 일어난 지 몇 개월이 지난 후였다. 10월 19일부터 ‘칠일천하’가 있었다. 그리고 대학살이 있었다. 그때 여수 민간인 일만여 명이 사라졌다. 아버지의 소식도 알 수 없었다. 아니,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다. 이후로 흉흉한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한반도는 나뉘어졌다. 결국 가장 두려워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전쟁은 참혹했다. 약자가 견디기 어려운 최악의 아수라장이었다. 만성리의 검은 해변처럼 사람들의 속을 알 수 없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적이었다. 아버지는 여순사건으로 실종된 후 일 년 반 동안 형무소에 갇혀 있었다.

  언제 왔는지 아이들이 내 주변에 빙 둘러서서 말줄임표의 해석을 두고 서로 떠들어대며 킥킥거렸다. 인솔자가 아이들에게 주의를 시켰다. 이곳은 울어야하는 곳이다. 너희가 서 있는 땅 아래에는 바다로 통하는 굴이 있었어.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대한민국이 둘로 나뉘는 것이 싫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또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었지. 결국 여순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학살되었어. 지금 너희들이 서 있는 이곳에, 바다와 연결된 구덩이 안에 죽은 사람들을 던져 넣었던 거다. 그 위에 자갈과 바위를 덮고……사람들을 던져 넣고 돌로 덮었다. 다시 사람들을 쏟아 붓고 그 위에 돌을. 왜 그랬어요? 한 아이가 질문했다.

  이곳? 나도 안다. 내게 부쳐진 이 공책 안에는 내가 이곳을 찾을 수밖에 없는 진실이 새겨져 있으니까. 추모비가 세워진 이곳은 사라진 일만 여개의 말줄임표였다. 침묵할 수밖에 없는 침묵. 나도 아이들을 따라 내게 물었다. 왜 그랬을까, 왜 그래야만 했지? 왜, 왜?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그곳을 벗어났다. 백여 미터를 더 걸었을 때 다시 왼편 언덕으로 오르는 계단이 나타났다. 형제묘라는 안내판이 있었다. 여순사건 당시 학살된 부역자들의 묘라고 씌어 있다.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의지하라는 내용이었다. 형제처럼 의지하라, 형제처럼. 외침이 되어 자꾸만 입 안에 맴돌았다. 가파른 계단을 바라봤다. 오른다 오르지 않는다 오른다 오르지 않는다 오르지 않는다……. 나는 잠시 목례를 했다. 꼬리를 물며 늘어선 차량들이 한 여름의 뜨거운 볕 아래 텁텁한 숨을 토해냈다. 나는 그늘이 있는 계단 구석에 걸터앉았다. 공책을 폈다.

  아버지는 줄곧 사라졌다 돌아왔다. 돌아올 때마다 몸의 어느 한 곳은 처참히 뭉개어져 왔다. 그러나 침묵해야 했다. 갑자기 사라졌다 돌아오는 일은 변함없이 빈번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막걸리 심부름을 시켰다. 누런 양은 주전자를 내밀 때에만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때만이 나는 아버지의 아들일 수 있었다. 아버지는 항상 시름시름 앓거나 취해 있었다. 그런 아버지라도 내 곁에 오래 머무를 수 있기를 바랐지만 내 바람처럼 되지는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아버지가 제 명을 다 살지 못할 거라고 했다.

  고개를 들었다. 갈매기 한 무리가 수면 위에 동동 떠 있다. 그들은 무얼 기다리는 건가. 노천카페에는 가족이거나 연인 또는 누군가의 동료들이 앉아 무언가를 마시거나 빨면서 여름을 식히고 있었다. 갈매기들처럼. 가위바위보 놀이를 하며 아카시아 잎을 떼어내는 아버지와 어린 아들도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젊은 연인이 레일바이크를 타고 페달을 밟으며 폐터널이 된 곳을 향해 웃어댔다. 무엇이 좋은 건가. 나는 그들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저들과 다른 감정을 가진 나는 누구라고 말할 수 있을지 혼란스러웠다. 엄마는 아버지와 헤어진 후 외가댁 어른들을 따라 서울로 와서 본적과 내 성을 바꿨다고 했다. 나의 호적상 부모는 엄마뿐이었다. 검은 해변을 바라보며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순환하는 7번 버스에 다시 올라탔다. 이제는 상황이 달라진 듯했다. 왼쪽으로 비켜선 차들 덕택에 만성리 해변을 출발한 버스는 터널을 통과해 여수엑스포역 앞을 지났고 오동도 입구 주차장에서 나를 내려줬다. 몇 년 전 어느 여름밤, 엄마는 여수엑스포 관람을 마치고 광장 벤치에서 어렵게 아버지의 얘기를 꺼냈다. 아버지는 엄마를 사랑했다고. 나와 엄마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그러나 나는 아버지의 선택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다. 나의 내력마저 두려워졌다. 지금 내 등에 짊어진 상자를 받기 전까지는.

  이 사진 배경은 등대가 맞네요. 관광안내소 해설사가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알겠다는 듯 얼굴이 환해졌다. 동백나무숲길을 따라 등대 전망대로 향했다. 지금은 담장이 없다. 오래전의 등대는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았고 동백나무 담장에 둘러싸여 있었던 것이다. 승강기로 등대전망대에 올랐다. 백팩에서 상자를 꺼냈다. 빛바랜 사진 뒷면에 써진 아버지의 이름. 등대가 올려다 보이는 담장아래서 어린 소년은 왼쪽 눈을 가늘게 찡그렸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투정부리듯 찡그리다 찍힌 듯한 사진이었다. 오래전 소년은 담장너머 등대 안에서 먼 바다를 보고 싶었을 것이다. 사진을 양 손으로 감싸 쥐었다. 사진 속 소년이 풍경을, 소년의 눈으로 그 풍경 속의 바다와 섬들을 볼 수 있게 등대 전망대 안을 천천히 돌았다. 철 모르는 핏빛의 동백꽃 몇 알이 처연하게 밟혔다.

  오동도 광장에서는 음악 분수 쇼가 한창이었다. 어린아이들이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분수 사이를 뛰어다니며 깔깔거렸다. 그들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즐거운 듯 사진을 찍거나 지켜보다가 걱정스레 소리치기도 했다. 셔틀기차를 기다리며 안내소 옆 벤치에 앉아 그들을 바라봤다. 나도 저들처럼 저렇게 뛰었을까. 기억나지 않지만 엄마는 아버지가 오동도의 기념품점에서 내게 카우보이 모자를 사줬다고 했다. 나는 그 모자를 아버지의 분신처럼 아꼈지만 서울로 이사 가기 전쯤엔 다시 볼 수 없었다. 얼마 전까지, 그러니까 공책을 읽기 전까지, 아버지가 나를 떠난 것은 내가 그 모자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오른쪽 상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민의 부모가 운영하는 기념품점이 눈에 들어왔다. 어쩌면 방학 중인 그녀도 부모를 돕고 있을지 몰랐다. 그때 느닷없이, 정말 지민이 나왔다. 여행객과 얘기를 나누다가 돈을 받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이렇게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그녀가 사라졌다. 형체도 없는 차가운 입자들이 분수처럼 찢겨져서는 나의 가슴을 여러 갈래로 할퀴었다. 공수부대 원사로 전역한 지민의 아버지는 내게 애비를 닮아서 몹쓸 짓을 저질렀다고 했다. 내가 그녀에게 관심 있었던 건 지민이 여수 아이였기 때문이었다. 대학 엠티 자기소개 시간이었다. 지민은 여수가 고향이라고 했다. 나는 그 말에 파블로프의 개처럼 고개를 쳐들고 지민을 응시했다. 뒤풀이에서 지민이 내게 말했다. 그렇게 자신을 쳐다보는 이유를 안다고. 선배의 이름이 ‘여수’이기 때문이 아니냐고. 나는 아주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새로운 여행객들을 상대하는 지민에게서 시선을 접고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왜? 나는 마지못해 투박하게 말을 털어냈다. 여행은 어때? 뭐, 그냥. 아들, 사랑해. 뭐야, 갑자기. 으응, 엄마가 너 사랑하는 거 알지? 전화기 너머에서 볼우물을 파며 웃고 있을 엄마의 표정이 선했다. 엄마는 참 이상하다. 멀리 있으면서도 나의 결정적인 순간을 찾아낸다. 엄만 오동도에서 가파른 계단을 타고 올라간 적이 있었어. 바람이 거세서 발을 헛디딜까봐 겁내기도 했지만 그 계단을 끝까지 올랐지. 팔각정까지 갔어. 너도 가보렴. 네 아버지랑 갔던 곳이기도……. 엄마는 말끝을 흐리면서 잠시 쉬었다. 그럴게. 엄만 그날 거기서 새해 일출을 봤거든. 지금도 생생하구나. 엄마는 그와의 추억 길을 내게 걷게 하는 것이리라. 엄마와 그도 행복했던 순간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 순간은 진실이었을 것이고, 현재의 내가 있는 것이리라. 나 또한 그랬다. 지민과의 순간은 진실이었다. 지민의 아버지가 우리 사이에 끼기 전에는. 그녀에게 문자를 남겼다. 나 지금 여수에 와 있어. 여수갯가길, 같이 걸을래? 분수광장과 오동도 입구까지, 셔틀기차는 방파제를 따라 일천 이백여 미터를 운행했다. 나도 사람들 틈에 섞여 동백열차를 탔다. 오동도를 나와 자산공원과 연결된 가파른 계단을 올랐다. 엄마가 말한 그 계단이었다. 팔각정의 전망대에 미리 자리 잡은 사람들은 여러 도의 사투리를 부려놓았다. 그들에게 여수는 관광지로서도 충분히 매력적인 것이다. 나는 백팩을 고쳐 매고서 팔각정의 여덟 꼭지를 천천히 돌았다. 오동도의 왼편으로 몇 해 전 크게 행사를 치룬 엑스포 행사장이 내려다 보였다. 아이가 있는 가정에서는 엑스포를 필수 코스처럼 찾았을 것이다. 마침 빅오쇼가 시작되었다. 공연장의 음악은 알아들을 수 없이 하울링 되었다. 가장 인기 있던 빅오쇼는 여전히 운용되는 모양이었다. 행사장과의 거리 때문에 제대로 된 메시지를 보거나 들을 수는 없지만 쇼를 보기 위해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을 부모와 아이들의 표정을 떠올릴 수 있다. 키아네아 카필라타, 거대한 해파리의 다리처럼 흩어지는 투명한 물줄기들을 상상해보는 것은 여기서도 충분했다. 아버지는 나와 헤어지기 전에, 소나무 숲과 자갈해변이 있는 여수 무술목의 해양수산과학관에서 키아네아 카필라타를 보여줬다. 유령해파리과에 속하는 맹독성의 해파리라면서 사자 갈기처럼 잘 생겼다고, 진지하게 말했다. 여수야아, 키아네아 카필라타에게 물리며언 심장이 약한 사람은 죽지마안, 건강한 사람은 생명을 유지하거나 살아남는단다아. 너언 건강한 사람이 되어야 해애. 세상에느은 키아네아 카필라타가 나타나는 일이 있거어든. 마치 집중시키려는 듯 무언가를 기다리게 하려는 듯 더듬거리듯 느릿하던 어법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스스로 메아리를 만들며 자신의 그림자를 내게 각인시켰던 것이다. 워터스크린 안에는 아버지의 얼굴이 있을 것이다. 스크린 밖으로 뻗어나가는 사자갈기. 수족관을 나와 몽돌밭 무술목 해변에서 말없이 아버지의 갈기에 나를 목말 태웠다. 우리는 함께 무술목 바다 위의 섬 두 개를 바라봤다. 여수야아, 작고 납작한 돌 찾아볼래애? 아버지와 나는 작고 납작한 돌을 주웠다. 퉁퉁퉁퉁퉁퉁……수없이 많은 말줄임표들이 수면 위를 날았다. 그뿐이었다. 아버지는 내 기억 속에서 언제나 말이 없었다.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고, 무언가에 화가 난 사람 같기도 해서 좀처럼 놀아달라거나 어리광을 부릴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난 갑자기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버지로부터 멀리 튕겨졌다, 물수제비 뜨던 조약돌처럼. 나와 엄마는 외가 어른들과 함께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나에게 함께 가겠다거나 여수에 남아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고만하게 어린 마음으로도 그의 침묵을 무책임하다고 느꼈다.

  아버지가 사랑한 여자는 제주여자였다. 나의 어머니는 나를 낳다가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제자였던 제주여자는 아버지 곁에서 아들인 나를 돌봐줬다. 아버지가 대구형무소에서 사형집행을 당한 날은 1950년 7월 9일이었고, 제주여자는 사형집행 전에 마지막으로 면회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때 내 나이, 다섯 살이었다. 나는 제주여자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았고 누나라고 불렀다. 갓 스무 살 처녀였기 때문이었다. 제주여자가 내 처의 어머니라는 걸 여수를 낳고 알게 되었다. 여수 나이 일곱 살 때였다. 하늘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오동도를 감싼 바다에 노을이 붉게 번지고 있었다. 해상케이블카의 여러 빛이 돌산까지 다리를 만들며 건너갔다. 팔각정으로 올랐던 가파른 계단을 다시 내려와 오동도 주차장 입구에 있는 터널로 들어섰다. 마래터널과는 달랐다. 화려한 쇼윈도보다 더 눈이 부셔서 한참 동안 눈을 껌벅이고서야 중심을 잡았다. 나를 따라 터널 안으로 들어오는 다른 여행객들도 있었다. 터널은 길지 않았다. 하멜등대가 보였고 그 뒤편에 돌산대교가 있었다. 종포를 따라 이어진 해안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마술을 부리고 색소폰으로 재즈를 연주했다. 사람들이 여자 보컬을 중심으로 공연팀을 겹겹이 에워싸고는 환호성을 지르거나 휘파람 소리를 냈다. TV 오디션프로에서 인기를 얻은 보컬인가 싶었다. 공연을 보는 사람들의 손이 그들의 눈보다 더 바빴다. 공연감상은 사람의 눈이 아닌 휴대폰들이 대신 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자체 발광하는 수십수백 개의 살아있는 눈들을 쳐든 그들이 더 흥미로워 보였다. 거리 버스킹 공연은 아주 다양했다. 바다 위에서는 유람선이 사람들을 향해 고동을 울리더니 해양공원을 따라 서서히 미끄러지듯 흐르며 심해의 발광체 같은 야경을 만들었다. 배에서는 〈여수 밤바다〉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누구랄 것 없이 그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큰소리로 따라 불렀다. 자산공원에서 시작해 하멜등대 위로, 다시 거북선대교와 돌산공원까지 이어지는 해상케이블카의 불빛이 여수의 밤바다를 살아있게 했다. 지금은 관광객들 틈에 섞인 나도, 더 이상은 먼 섬이 아니었다. 거리공연을 보는 사람들을 보며 걷다보니 거북선 모형이 있는 이순신 광장까지 왔다. 이순신 장군의 동상 너머 진남관이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배가 고팠다. 음식점거리라는 원형의 입간판의 불이 밝았다. 나는 어둠이 켜지는 해안통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성수기라 식당 어디나 사람들로 붐볐다. 낯설고 북적거리는 음식점에서 나 혼자 테이블 하나를 차지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차라리 카페가 나을 것 같았다. 천사 문양이 그려진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메리카노 커피 한 잔과 와플을 주문하고 컴퓨터가 어디 있는지 둘러봤다. 여수갯가길을 검색하려는데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종업원이 먼저 그 길을 훑어보고 있었다.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내가 멋쩍은 듯 나에게 슬쩍 웃어보였다. 그는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고 문의하는 여행객이 많아서 자신도 궁금해졌다고 했다. 그의 고향은 제주라고 했다.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하기 전에 특별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여수를 선택했다고 했다. 나는 이틀 뒤면 입대할 거라고 말했다. 톡. 휴대폰을 확인했다. 아니, 집 밖으로 못 나가게 해. 미안. 지민에게서 온 문자를 지웠다. 남자는 여수 시티투어를 하는 노란버스를 타면 갯가길이 시작되는 곳에 내려줄 거라고 했다. 서두르면 다행히 마지막 버스를 탈 수 있겠어요. 내가 고맙다고 하자 그는 자신도 아르바이트를 마치면 여수갯가길을 걸을 거라고 했다.

  비릿한 바람이 정면으로 얼굴을 스쳤다. 여수 밤바다를 에둘러가는 노란 버스의 이층에서 바라보는 여수의 밤풍경이 자꾸만 흔들렸다. 버스는 돌산의 갯가길 1코스가 시작되는 돌산공원 아래서 나를 내려줬다. 갯가……물이 흐르는 가장자리, 완만하게 흐르는 물살처럼 오늘만은 그렇게 걷고 싶었다. 몇 달 전이었다. 엄마는 보던 신문을 접고 일어섰다. 아버지와 첫 데이트를 했던 길이 갯가길 코스가 되었다면서 왠지 쓸쓸해했다. 그 갯가길을 오늘 내가 걷는 걸 안다면 엄마는 뭐라 하실까. 돌산대교 아래 우두리항에서 길은 시작되었다.

  바다가 밀려와 부딪혔다. 갯가 너머로 해안선이 멀리 물러나 있었다. 무술목에서 몽돌 사이를 흐르던 파도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몽돌아래 단단한 근육질의 모래사장이 드러나 있었다. 돌 하나를 주머니에 넣었다. 한때는 불가사리였을 오각형 모양의 하얀 화석도 함께. 그와 물수제비를 뜨던 곳이 여기 어디쯤이지 않았을까. 섬 두 개가 보였다. 오래전 그때처럼 말이다. 주머니에서 만지작거리던 돌을 꺼냈다. 호흡을 늦추며 수를 세었다. 하나아 두울 세엣, 던졌다. 여섯 번쯤 튀어 오르다가 가라앉았다. 아버지……나도 모르게 입술 밖으로 소리가 흘렀다. 창백해진 무술목 해변을 서둘러 뒤로 했다. 한때는 향일암이라 불리기도 했다던 영구암으로 가는 군내버스를 기다렸다. 버스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어쩌면 막차가 떠난 후인지도 모른다. 외할머니와 어머니 두 분이 운영하는 의상실은 서울에서도 꽤 이름을 얻었다. 그렇지만 나는 텅빈 집에서 혼자 차려 먹어야했던 식사가 너무나 싫었다. 사춘기를 심하게 앓던 고등학교 때 외할머니의 차를 몰래 타고 나오기도 했다. 아버지를 떠난 엄마가 미워 반항하는 것 말고는 다른 출구는 생각할 수 없었다. 친구들과 몇 번의 가출 끝에 그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나를 만나주지 않았다. 버스가 왔다. 버스로 방죽포 해수욕장을 지나 영구암 아래 마을인 임포까지 왔을 때는 달이 높이 떠올랐다. 살이 가득 오른 달이었다. 막걸리가 채워진 양은 주전자, 그가 할아버지를 위해 심부름을 했던 그날이 오늘이었을까. 달에는 막걸리가 채워진 것이 분명하다. 달을 보고 말했다. 우리 막걸리 한 잔 어때요? 달이 헛헛하게 웃었다.

  옛 주막 같은 선술집의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갔다. 내가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돌산 갓김치를 안주로 내어주었다. 달이 보이는 창가에 앉았다. 달과 막걸리를 마시거니 주거니 받거니. 창밖으로 임포의 밤 풍경이 흔들렸다. 그에게 막걸리 한 잔을 올리고 싶어졌다. 내 사정을 들은 주인아주머니는 주전자에 막걸리를 가득 채우더니 잔 하나를 챙겨줬다. 가로등이 별빛처럼 빛나고 있었다. 포구에 매여진 여러 척의 배들이 서로를 부비며 피붙이처럼 의지하고 있었다.

  포구 끝에서 백팩을 풀어 내렸다. 사진과 유골함을 꺼냈다. 달항아리 같은 둥그런 주전자에서 막걸리 한 잔을 따랐다. 그에게 잔을 건넸다. 그도 나도 바다를 바라봤다. 막걸리 잔 속의 흰 것을, 바다에 뿌렸다. 바다가 출렁거렸다. 밤의 파도가 달빛을 보듬고 금빛 윤슬을 목말 태웠다.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지러운 것도 같고, 취해버린 것도 같았다. 아버지는 사진을 바다에 띄워 보내길 바랄까? 어릴 적 나와 닮은 아버지를, 나는 기억하고 싶었다. 어린 소년의 얼굴에서 내 얼굴을 찾을 수 있었으니까. 사진을 천천히 백팩 안에 넣었다.

  곧 해가 떠오를 것이다.

  암자로 오르는 계단은 널찍했다. 잘 골라진 계단은 암자에 거의 이르러서 끝이 났다. 한 계단 한 계단 시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걸 외할머니에게 들었다. 동트기 전의 어둠이 낯설지 않았다. 발아래 느껴지는 단단함에서 힘이 느껴졌다. 계단 양 옆으로 난 숲은 어둠이 깊었다. 암자는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재건되었고 몇 번이나 이름을 잃었다가 다시 영구암으로 불리었다. 여수라는 지명도 세 번이나 이름을 잃었다가 결국 되찾았다던 얘기가 떠올랐다. 거대한 비석을 기대어 놓은 듯 좁은 토굴의 천장을 올려다보며 백팩의 끈을 꽉 틀어잡았다. 여러 겹의 형체들이 겹쳐졌다 흩어지기를 끝없이 반복했다. 구석에는 누군가 기도를 하려 켜두었다가 다 타고 녹아내린 촛농들이 원형과는 다른 흔적으로 남아있었다. 슬쩍 춤추듯 흔들리며 어둠을 밝히는 초들이 벽에 기대어 꽃처럼 피어있었다. 문득 무술목에서 주웠던 화석이 기억났다. 흘러내린 초의 흔적들 옆에 그것을 내려놓았다. 주머니 안에서 화석에 배어있던 모래 낱알들이 만져졌지만 털어내지 않았다.

  암자로 오르는 길의 바위들은 거북의 등처럼 예외 없이 풍화가 되어있었다. 새벽 여명은 바람의 흔적을 쓰다듬었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다 비틀거리다 기댄 바위에서는 마래터널에서 내 손을 붙들던 손의 흔적이 만져졌다. 날이 새면 여수엑스포역으로 가서 용산행 KTX를 타야 한다. 그리고 입대해야 한다.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지민의 이름을 지웠다. 관음전 앞의 하늘이 붉어졌다. 날이 밝고 있었다. 백팩의 상자를 꺼냈다. 손을 얹었다. 상자를 열어 아버지의 뼛가루를 날렸다. 하늘로, 바다로, 경계가 없는 곳으로. 바다에도 하늘에도 눈시울이 있었다. 가슴이 화끈거린다. 여수야아. 귓가에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쩌면 내 심장에서 들려오는 게 분명했다. 해무 위로 뜨거운 것이 젖어들었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에서 문이 열리고 있었다.

  해가 떠올랐다.



  <당선소감>


  "잘 쓴 글보다 좋은 글 쓰고 싶다"


  크리스마스 저녁 공연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르케 소극장에서 공연을 마치고 나와 휴대폰을 열었을 때 낯선 전화번호가 찍혀 있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이 전북일보사로부터 도착한 것이다. 반가운 소식인데도 명치가 아려오는 듯했다. 엄마에게 당선 소식을 가장 먼저 알렸다. 울음이 터져 나왔다.

  잘 쓴 글 보다는 좋은 글을 쓰고 싶다. 이제는 저의 이름 앞에 ‘소설가’를 붙일 수 있다는 것에 마냥 감사한다.

  정호경 선생님, 신병은 선생님과 지금은 고인이 되신 송수권 선생님께, 그리고 한참 부족한 제게 격려와 가르침으로 용기를 주셨던 장마리 작가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여순사건의 아픈 기록을 여섯 알의 말줄임표로 담아 그 뜻을 말씀해준 김진수 선생과 영란언니에게 감사한다. 가만히 차 한 잔을 내어주던 임미숙 선생님과 친구 정환과 용우, 서영, 아들 규종. 그리고 천국에 계신 아빠와도 이 기쁨을 함께 하고 싶다.


  ● 1970년 여수 출생.
  ● 1992년 전주대 회계학과 졸업.
  ● 2016년 고은문학상 산문부문 차상.
  ● 현재 시낭송 퍼포먼스 및 배우로 활동 중.
 

  <심사평>


  "여순사건 다뤄…탐구정신 돋보여"


  신춘문예가 시작된 지 한 세기가 되어간다. 그만큼 역사가 깊은 문학제도이다. 한국문단은 신춘문예와 잡지를 통해 유지해 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그 의의가 크다.

  신춘문예는 가슴 설레게 한다. 새로운 탄생에 어디 설렘이 없을 수 있겠는가. 작가로 탄생한다는 것은 사회 역사 속에 나 자신을 투척하는 일이다. 이는 영광과 책임이 함께한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춘문예에 작품을 투고하는 이들에게, 당선 여부와 상관없이 축하를 드리는 것이다.

  본심에 올라온 작품은 모두 6편이었다. 매뉴얼에 따라 달려가는 시대상을 다룬 ‘가만 있으라’, 현실과 단절된 개인의 삶을 소재로 한 ‘홀’, 역사 속에서 개인의 의미를 발견하는 과정을 추적한 ‘백팩’, 치매에 걸린 할머니와 사는 발레리나 지망생의 일상을 그린 ‘카페 헤밍웨이’, 벽지에 근무하는 남편과 아이를 데리고 도시에서 생활하는 아내 사이에서 희박해지는 인간관계를 다룬 ‘고객님 안녕히 가세요’, 다문화사회의 일면을 그린 ‘닭’ 등을 읽었다. 전반적으로 개인의 지위 약화, 느슨한 인간관계, 무의미한 일상 등을 다루면서 주제의식이 좀더 치열해져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심에 올라온 작품 가운데 ‘카페 헤밍웨이’와 ‘백팩’ 두 편을 두고 논의를 벌였다. ‘카페 헤밍웨이’는 개인의 정체성이 희석되고, 존재의 연결이 느슨해지며, 삶의 가치가 의미의 지평 너머로 사라지는 현대인의 삶을 점묘식으로 그린 수작이었다. 그러나 서사를 엮어나가는 힘이 딸린다는 점에서 한계를 보였다.

  결국 ‘백팩’을 당선작으로 밀기로 했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정확한 문장으로 시작해서 끝까지 풀어지지 않고 끌고 가는 힘이 있었다. 아버지의 생애를 서술하는 부분과, 백팩을 메고 아버지의 죽음을 찾아가는 여정과, 지민과의 사랑과 이별 등을 알맞게 교차하여, 이야기를 엮어 내는 솜씨가 남달랐다. 여순사건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다룬 점, 등에 지고 가는 백팩과도 같은 역사적 부담감에 대한 상징성 등, 미래 작가로서의 본격적인 탐구정신과 태도가 돋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쉬운 결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백팩 속의 유골을 바다에 뿌리는 행위가 과연 적극적인 결말인가? 유골을 바다에 뿌리는 행위가 역사를 청산하자는 것인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인지 상징성이 약하다. 이와 같은 회고적 여행구조는 결국 작가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을 감상에 빠지게 한다. 센티멘탈리즘으로 완결짓는 소설적 해결보다 치열한 사유를 바탕으로 한 비판의식이 작가의 몫이라는 인식이 투철해지기를 바란다. 응모한 분들의 정진을 비는 마음 간절하다.


심사위원 : 송하춘, 우한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