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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전원 미풍 약풍 강풍 / 윤지양

 

  0100

  밤이었다. 눈을 떴을 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발가락으로 더듬다


  0010

  새벽에 매미 우는 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다. 여름엔 매미가 커지고 점점 커져서

  새를 잡아먹는다. 새 소리를 들을 수 없다.


  1000

  숨이 막히는 줄 알았어.


  0100

  비행기 엔진 소리

  잡아먹힌 새가 매미가 되는 소리


  1000

  (나는 이곳에 없다.)


  0001

  침대 위의 옷가지


  0100

  침대는 깨끗하다. 아직은 숨이 막힐 때가 아니다. 탁자 위 물 한 컵


  0010

  (이곳에 없다.)



  <당선소감>


  내 안의 소리, 진짜라고 말해줘서 고맙습니다


  믿기지 않았습니다. 전화를 받은 날, 하루 종일 믿을 수 없었습니다. 전화를 받기 전에 읽고 있던 시집을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맥이 풀려서 옆에 있는 동생이랑 끌어안고 집에 돌아갔습니다.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려서 한숨도 못 잤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잠도 조금씩 더 자게 되면서 조금씩 진짜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소감문을 씁니다.

  시를 만난 것은 언제나 우연이었습니다. 고등학생 때 선생님이 나눠준 프린트물에서 시 한편이 마음에 들어 곧장 그 시인의 전집을 사서 읽게 된 것, 대학교 2학년 때 학교 도서관에서 일하다 서가에 아무렇게나 놓인 시집 한 권을 집어 들어 읽고 놀랐던 것, 졸업하기 전 친구의 추천으로 소설 수업을 들으려다 의도치 않게 시 수업을 듣게 된 것, 모두 우연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도 어쩌면 걸어가는 길의 일부였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어쩌다 시를 쓰게 되었고 어쩌다 이런 시를 쓰게 되었습니다. 다 쓸 때까지 모든 것을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불안했고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시가 계속 저를 붙잡았습니다. 끊임없이 망설이면서 가는 길이 이 길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제 시는 어쩌다 어딘가로 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므로 이 상은 잘 떠나라고 격려해주는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걸어가는 길도 지켜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시 이외의 책임에 대해서도 생각합니다. 2016년도에는 수없이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일들 속에 숨겨진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말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야기들을 모두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함께 걷는 길을 찾겠습니다.

  제가 무슨 짓을 하는지조차 몰라 어리둥절해하던 가족들, 미안합니다. 앞으로도 미안할 일만 있을 것 같아서 더 미안합니다. 계속 시를 쓰라고 격려해주셨던 선생님들께 감사합니다. 제가 저를 믿기 전에 먼저 확신해주셔서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옆에서 응원해주던 친구들, 내 말을 들어주고 기꺼이 글을 봐주는 여러분을 생각하면서 썼습니다.

  몸 안에 쌓인 풍경들, 소리들, 모든 느낌이 진짜라고 말해줘서 고맙습니다.


  ● 1992년 대전 출생

  ● 이화여대 독어독문학과 졸업

 

  <심사평>


  무심하고 당돌한 시…앞으로가 더 기대돼


  심사를 맡은 세 사람은 투고작들 가운데 7명의 원고를 1차로 골라냈고, 그 중 셋을 다시 추려 논의를 이어갔다. 강응민의‘꽃은 여남은 몸짓의 침묵이다’ 외 2편은 유장한 흐름과 단단한 구축력을 겸비하고 있었다.

  비교적 긴 시들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행까지 긴장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다만 그 긴장으로 인해 시의 흐름이 때로 경직된다는 아쉬움을 남겼다. 조금 더 유연하게 강약 조절이 이루어졌으면 좋았을 것이다. 유지나의 ‘귀귀귀귀’ 외 2편은 장면에서 장면으로 건너뛰는 서늘한 비약이 인상적이었다. 비약 속에 감추어진 감정 혹은 사건이 읽는 이의 마음을 끌어당기기도 했다. 그러나 우연성과 자의성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지 않은가 하는 의문을 끝내 지우지 못했다. 집중의 힘이 조금 더 강해진다면 이분의 작품도 머지않아 다른 지면에서 만나게 되리라 믿는다.

  우리는 윤지양의 ‘전원 미풍 약풍 강풍’ 외 4편에 어렵지 않게 마음을 모았다. 눈치 보지 않고 자신만의 시적 착지점에 닿은, 혹은 닿으려 하는 원고들이었다. 사소한 착상을 충분히 확장시킬 줄 알았고, 그렇게 확장된 세계에는 독특한 파토스가 담겨 있었다. 투고작 전반에 신뢰가 갔다. 이분이 앞으로 쓸 작품들을 계속 읽고 싶어졌다. 5편 중 특히 2편, ‘전원 미풍 약풍 강풍’과 ‘누군가의 모자’를 두고 어느 쪽을 당선작으로 삼을지 고심했다. ‘누군가의 모자’는 괴팍하면서도 생기 있는 상상력이 돋보이는 시였다. ‘전원 미풍 약풍 강풍’은 작은 모티브에서 출발하여 무심하고 당돌한 스타일로 감각과 정서를 끌어내는 시였다. 설왕설래 끝에 한겨울에 읽는 한여름의 시, ‘전원 미풍 약풍 강풍’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축하 드린다. 건필을 빈다.

심사위원 : 황인숙, 김정환, 신해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