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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MPD(multiple personality disorder·다중인격장애) /김나비

 

포르말린 가득 찬 유리병을 본 적 있니

시간을 베고 누운 병 속의 표본처럼

내 몸속 수많은 사람 보관되어 있지


네모난 구멍들이 뚫려있는 몸통에

각진 불이 켜지는 한밤이 찾아오면

사람이 꿈틀거리는 유충처럼 보이지


몸속엔 살인범도 그를 쫓는 형사도 살지 

술병의 병목 부는 나팔수도 하나 있지 

심장엔 물방울 같은 아이들이 뛰어 놀지 


바람이 어깨 펴고 옆구리를 치고 가면 

철커덕 휘청이며 키를 높이 세우지 

가슴에 현대아파트 이름표가 반짝이지 




  <당선소감>


   "오랫동안 꾸던 꿈의 소리 이제야 들어"


  커튼을 연다.

  밤을 지새우며 게워낸 글자들이 어둠을 뒤적이고 있다.

  단단한 어둠의 각질을 뚫고 새로운 세상이 밀려온다.

  오랫동안 꾸던 꿈의 소리를 이제야 듣는다.

  내 안에서 다시 꿈틀거리는 문학 씨앗을 하늘에 심는다.

  셈을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글을 덮기도 했다.

  그때마다 불 꺼진 뒷골목에 쪼그려 앉아, 공벌레처럼 몸을 말고 어깨를 들썩이는 나와 마주쳤다.

  덧셈의 수치로만 삶을 표시하는 어리석은 일이 다시는 없기를….

  지금 나를 향해 오고 있는 따듯한 계절을 향해 두려운 걸음을 딛는다.

  잘 자라 거라 내 글의 씨앗이여! 

  하늘에 누군가 파종한 수많은 별 속에 아직 너의 자리가 남아있을지니.

  그 자리에 들어 어둠별처럼 고요히 반짝 이거라. 

  그리하여 가장 낮은 곳에 피는 서러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윽하게 비추는 알곡이 되거라.

  조경선 시인님, 정진규 시인님, 임승빈 교수님, 함기석 시인님, 정유지 교수님께 감사한 마음을 보낸다. 그리고 나의 가족과 심사위원님께도 진심을 담아 감사를 표한다. 




  ● 1970년생.

  ● 본명 김희숙.

  ● 용인한국외국어대학교부설고등학교 교사.

  ● 청주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우석대 교육대학원 국어교육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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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평>


  "시험관 들여다보고 관찰하듯 현 시대·사람 객관화"


  340여 편에 이르는 작품들을 놓고 우선 예심을 보았다.

  열두 분의 작품을 골라내고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이미 많이 다루어져 식상한 작품은 비록 율격을 잘 갖추고 있어도 내려놓았다.

  기성작품을 모방한 듯한 작품도 탈락을 면치 못하였다. 참신한 생각을 바탕으로 한 패기와 열정의 도전정신이 없다면 신춘문예에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비슷비슷한 수준의 작품들을 놓고 먼저 결함을 찾아내었다. 회고적, 애상적인 작품은 비록 세련미와 이미지의 선명함이 드러나도 최종선을 넘을 수 없었다. 또한 추상적, 관념적인 작품들도 내려놓았다.

  '까치집' '길고양이 삽화' '어떤 점검표' '쿠웬 씨의 하루' '고구마 순' 'MPD(다중인격장애)'가 마지막까지 남았다. 그 중 노모의 거칠어진 머리카락과 빛바랜 까치집의 비유가 절묘한 '까치집'과 감칠맛 나는 시어와 긴장미를 일으키는 '길고양이 삽화', 참신한 발상과 현 시대와 사람들의 인격장애를 마치 시험관을 들여다보고 관찰하듯 객관화한 'MPD' 작품을 두고 고심했다. 세 분 모두 제출한 다른 작품들도 우수했다.

  그 중에서 'MPD'를 당선작으로 민다. 그의 다른 작품 '기억렌지 사용법' '치매'를 두고 무엇을 당선작으로 할까 고심했다. 물론 작품이 다 좋았다는 뜻도 있지만 정형률에 걸림돌이 보이고, 치매 같은 제목에 망설임이 있었던 탓이다. 앞으로 당선자가 더욱 노력해야 할 부분이다.

  새로움, 패기, 개성이 선명하게 드러난 작품을 선정하게 된 것은 큰 기쁨이다. 시조단에 새로운 흐름을 일으키는 한 역할을 할 것으로 믿으며 당선을 축하한다. 


 

심사위원 : 전연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