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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세계문학의 가능성과 번역, 그리고 또 번역 - 황석영 장편소설 <해질 무렵(At Dusk)>론 / 김엔야

 

세계문학이라 하면 외국에 사는 독자의 상황에서도 공감을 자아낼 수 있어야 한다. 또 그것은 시간적으로도 동시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세계문학을 논하면서 이 번역의 문제를 결코 우회할 수 없다. 이 글은 이 근래에 맨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의 롱리스트에 오른 <해질 무렵>을 매개로 ‘한국어’ 문학은 어떻게 ‘세계문학’이 될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번역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관해 생각하고자 한다. 

<해질 무렵>은 노년기에 접어드는 한 산동네 출신의 자수성가한 도시 건축가 박민우가 첫사랑의 상대였던 차순아로부터 뜻밖의 연락을 받고 지난날을 회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을 매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정우희라는 ‘제3의’ 젊은 인물이다. 

이 소설에서 기성세대와 젊은 층을 연결하는 고리이자 소설을 관통하는 열쇠는 건축 모티프다. 한국에서 건축은 특수하고도 지극히 기형적인 형태로 진행되어왔다. 이러한 건축 모티프를 전면적으로 다룸으로써 이 소설은 한국 현대사에서 건축이 맡아온 역할의 폭력성을 폭넓게 추적하여 한국의 현대화 과정이 낳은 ‘야만성’이라는 문제를 전체적이고도 급진적으로 드러내고자 한다.

이 소설에서 박민우는 무리한 추진력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루고 한국을 OECD 국가로 도약시킨 이른바 한국식 개발 현대화, 난개발을 대표한다. 젊은 2030 세대. <해질 무렵>의 윗세대를 이루는 박민우의 과거와 중년의 회환은 곧 아랫세대인 정우희와 김민우의 좌절로 연결된다. 

작가는 이 두 세대의 이야기를 통해 베이비부머 세대가 만들어놓은 사회구조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렇게 사회적 발전의 그늘 속에서 도태된 이들을 가리켜 <해질 무렵>의 두 화자는 각자 ‘강아지풀’이라는 하나의 비유어를 제시한다. 

소설의 울림은 크다. 이 소설은 맨 부커상 후보로 오른 사실이 말해주듯 어쩌면 ‘세계문학’의 반열에 발돋움할 만한 작품이다. 그러면서 한국의 구체적인 ‘역사’를 다룬 소설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어떻게 ‘세계문학’으로 발돋움하고 인정될 수 있는가? 이것은 바로 번역의 문제이기도 하다. 나의 생각에, 좋은 번역은 이 ‘이국화’와 ‘자국화’의 중도와 균형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둘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하는 부분, 즉 원문의 문학성이 훼손될 가능성이 있는 부분에서는 번역의 가독성이나 유창성을 ‘희생하더라도’ 원문의 이질성에 충실해야 한다.

우선, 영역판의 제목인 ‘At Dusk’에 관해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처음에 나는 <해질 무렵>의 제목이 좀 더 서정적인 느낌을 주는 ‘When the Sun Sets’로 번역되었더라면 좋았으리라고 생각했지만 곧 판단이 달라졌다. ‘When the Sun Sets’ 쪽이 영어로서의 울림은 더 좋지만 ‘At Dusk’가 작품의 내용에 더 적합하다.

이 어휘가 더 황석영의 주제적 메시지와 맞어 떨어지기 때문이다. 해가 지는 장면에서뿐만 아니라, 소설 전체의 맥락상 <해질 무렵>의 ‘해’는 돌이킬 수 없는 박민우와 그의 지인 건축가들의 지는 ‘해’를 의미한다. 그래서 ‘더스크’가 제목으로 더 어울린다. 그리고 ‘더스크’와 ‘썬셋’은 어감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더구나 ‘더스크’는 ‘썬셋’과 의미에서도 다르다. 엄밀히 말해 ‘더스크’는 노을(‘sunset’)이 진 후 어둠이 내리기 전까지의 일정한 기간인 황혼을 뜻한다.

번역자 소라 김-러셀은 상당히 유창한 원어민적인 영어를 구사한다. 예를 들자면 한국어 관용구인 “죽이 잘 맞았”다(13쪽)는 영어권 관용구인 “we were like hand in glove”(영역판, 7쪽)로, 은어인 “보릿고개”(13쪽)는 그 의미만 추려내 “true hunger”(영역판, 7쪽)로 번역한다. 또 “비아냥거리지 않고”(16쪽)는 “I didn’t give him shit for it”(영역판, 10쪽) 등으로, 슬랭을 섞어서 자유자재로 번역하는 방식을 취했다. 특히, 우리말 관용구인 “피차마차 역마차”(44쪽)를 영어권 관용구인 ‘Potayto, potahto’(영역판, 40쪽)라고 한 것은 훌륭하다.

그럼에도 오역들이 있는데 이 글에서 일일이 지적할 수는 없다. 그래도 역자의 번역 문장은 대체로 매끄럽게 읽히며, 기본적으로는 독자 중심의 번역에 기울었다. 때문에 번역자는 약간의 개작도 마다하지 않았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첫 장면에서의 일종의 ‘추가’다. 번역에서는 원문에서 비공개된 인물에게 “She”라는 성별을 특정할 수 있는 대명사를 중성 인칭 대명사 대신에 또는 우회하는 방식 대신에 사용했다. 또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기 전에 “Not long after”이라는 구를 삽입하기도 했다. 원문에는 없는 어휘나 문구를 추가하여 독자의 이해를 도왔다.

그런가 하면 ‘삭제’를 통한 개작도 있다. 차순아가 아들의 장례를 치른 후 정우희에게 술이나 한 잔 하자고 말하는 대목이다. 여기서 번역문은 원문에 나온 “인간적으로”라는 표현을 모두 삭제해버렸다. 그러나, 영어로도 “honestly”, “frankly”, “seriously” 등으로 얼마든지 번역될 수도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문장력이 유창한가가 아니라 얼마나 이 작품의 한국적인 특수성을 잘 살려냈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특히 건축이 주제인 만큼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한국적 건축 표현은 아주 중요하다. 그런데 역자는 ‘산동네’(46쪽)는 ‘hillside slum’(영역판, 43쪽)으로, ‘판자집’(103쪽)은 ‘shacks’(영역판, 98쪽)로, ‘판자촌’(92쪽)은 ‘hillside shantytowns’(영역판, 96쪽)로 ‘음차어’ 없이 번역한다.

또, 역자는 영어에 마땅한 대응어가 없는 경우에는 음차어를 사용한 후 풀어서 설명하는데,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한옥’을, 음차어 ‘hanok’이 아닌 ‘traditional Korean-style house’(영역판, 2쪽)라고만 번역했다. 그러나 ‘한옥’은 매번 ‘hanok’이라고 음차어를 사용해도 좋았을 법한 유일한 건축용어였다. 

한옥은 본래 역사적으로 ‘나’만 생각하는 건축이 아니라 주변의 땅과 계절 등을 고려해 위치와 내부 설계가 이루어지는 건축 양식이다. 지극히 한국적이다. ‘배산임수’의 원리를 중요시해 산과 강 주변에 있는 자연과 더불어 살도록 짓는, 자연과의 상생을 추구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달골시장’이라는 어휘의 ‘달골’을 번역한 것이다. 역자는 이 ‘달골’이 처음 등장할 때, 이를 ‘Dalgol, or Moon Hollow’(영역판, 45쪽)라고 번역한다. ‘Dalgol’(영역판, 45쪽)이라는 음차어를 한 번 써주고 옆에 ‘Moon Hollow’라고 또 번역해 놓는다. 이후에는 계속 ‘Moon Hollow’(45쪽, 등)라는 번역을 유지한다. 

‘문 헐로우(Moon Hollow)’는 두 글자인 ‘달골’을 ‘달’과 ‘골’로 나누어, ‘달=Moon’이라는 공식에 ‘골=Hollow’라는 공식을 적용한 것이다. 이렇게 단어를 해부하는 식의 번역은 주로 한자어를 번역할 때 쓰이는 방법이다. 그러나 ‘달골’은 순우리말이기 때문에 우선 방법론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또, ‘달골’에서의 ‘달’은 ‘산’을 일컫는 옛말로서 ‘달골’은 ‘산골짜기 마을’이라는 뜻이다. 또 ‘골’은 ‘골짜기’ 할 때의 ‘골’이므로, 굳이 의미 중심을 따른다면 ‘Hollow’ 대신 ‘Valley’라고 하는 편이 차라리 나았다.나의 생각이지만 가장 벋아들이기 어려운 번역은 아무래도 ‘강아지풀’에 관한 것이다. <해질 무렵>에서 자본주의의 지배 아래서 밀쳐져 버려진 자연적이고 토속적인 소중한 옛것들을 상징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이 ‘강아지풀’이다. 역자는 이것을 ‘foxtail(폭스테일)’이라고 번역한다. 이를 한국어로 다시 옮기면 ‘여우꼬리’가 된다. ‘폭스테일’이라는 영어의 울림 역시 거칠고 아름답지 못하다. 강아지가 여우로 변신한 듯한 느낌이다. 

기본적으로는 ‘자국화’의 번역을 유지하더라도 우리나라의 문화와 같은 특수성이 드러날 수 있는 부분에서만큼은 좀 다르게 갔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 소설은 유럽을 향해, 현대성에 있어서의 ‘비동시성의 동시성(the contemporaneity of the uncontemporary)’이라는 화두를 제시한다. 유럽인들에게 비서구 사회 한국의 현대사 속에서도 현대성에 대해 ‘심문’하는 문제적인 이야기가 산출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번역의 문제라는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세계문학’에 도달할 수는 없다는, 한국어 문학의 어려움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당선소감>


   "언어는 나의 종족, 국적, 피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라캉의 이 기본 명제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철학적 명제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 속하는가’라는 나의 정체성의 문제를 이처럼 잘 정리해주는 명제는 없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나의 종족, 나의 국적, 나의 피다.

어려서 부모님을 따라 캐나다로 이주했던 나는 과거에, 한국어를 잊고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문학을 읽고 쓰며 문학청년을 꿈꾸었던 언어는 영어였다. 세월을 지나 한국에 돌아왔을 때 나는 이미 성인이었고, 성인이 돼 처음으로 모국어인 한국어로 된 문학을 읽고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영어를 사용하던 세계에서 성장 과정을 다 보내고 성인이 돼 다시 한국어를 사용하는 세계로 들어와 한국어가 나의 세상 속으로 스며들어 왔을 때였다. 나는 어릴 적 알았던 어떤 세상, 소멸했던 어떤 세상이, 꿈틀거리면서 부활하는, 그런 ‘이상한’ 경험을 했다. 그러면서 내가 알고 있었으나 잊고 지냈던 새로운 또 하나의 세상이 펼쳐졌다. 이 경험은 마치 크로노스의 시간이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가져다줬다.

그 이래로 나는 두 개의 언어로 구축된 두 개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나는 한국어로 된 세상과 영어로 된 세상, 두 개의 세상이 있다. 여기에서 내가 깨달은 게 있다. 나의 피부색이 무엇이든 국적이 무엇이든, 내가 어디에 있든,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언어며, 언어야말로 나의 정체성이자 나의 피라는 사실이다.

나의 모국어로 쓴 글로 상을 받아 기쁘다. 그 글이 나의 또 다른 세상을 구축하는 언어인 영어로 된 글을 분석하는 작업이었기에 더없이 기쁘다. 심사위원과 불교신문에 깊이 감사드린다. 사랑하는 가족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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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평>


  번역이 한국문학 난제임을 환기시킨 작품


올해의 평론 부문은 세월이 어려운 때여서 그런지 오히려 높은 수준의 작품을 낸 분이 많았다. 문학은 역시 행복의 산물만은 아니라는 것, 고통 속에서 아름다운 꽃이 피어난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게 했다. 

좋은 문장들 가운데에서 먼저 세 편을 어렵게 선정했다. 하나는 ‘세계문학의 가능성과 번역, 그리고 또 번역―황석영 장편소설 <해질 무렵>론’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고인이 된 박상륭 작가의 ‘죽음의 한 연구’를 대상으로 삼은 ‘죽음, 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박상룡 장편소설 <죽음의 한 연구>를 중심으로’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올해 한창 뜨거웠던 김봉곤 사태를 상기시키듯 두 퀴어소설 작가의 문학세계를 다룬 ‘퀴어(queer) 소설(들)에 묻는 관계의 본질-김봉곤과 박상영의 게이(gay) 소설들’이었다.

비평이란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고민하게 한 세 작품이었다. 비평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누군가 말했다. 하나는 시류의 흐름을 타는 비평, 세상일에 개입하는 비평, 문학의 장 속에서 싸우는 비평이다. 또 하나는 어떤 주제에 몰두하는 비평, 즉 아르바이트 비평이다. 나머지 하나는 예술가가 자신의 작업을 바탕으로 성찰하는 비평, 예술가 비평이다.

황석영 장편소설 <해질 무렵>의 번역 문제를 검토하면서 이를 중심으로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으로 어떻게 ‘도약’할 수 있는가? 여기서 번역에 수반되는 문제는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다룬 평론이다. 무엇보다 그 질문의 현재성이 관심을 끌었다. 황석영은 지금도 살아 움직이는 작가이며 어느 의미에서 계속 도전 중인 작가다. 번역 문제의 구체적 사례들을 원활히 다룰 수 있었던 ‘실력’에도 관심이 간다. 번역이 여전히 한국문학의 난제임을 환기시켜 주었다.

당선작의 선정은 ‘쇼트 리스트’에 들어간 이후에는 일종의 우연에 맡겨진다. 그만큼 모두 제각기 자격이 있다는 말이다. 당선작은 낸 분에게 큰 축하드리며 아쉽게 탈락한 두 분께는 더 좋은 결실 있기를 기대하고자 한다. 

 

심사위원 : 방민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