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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없는 미래와 굴착기의 속도 / 염승숙

  ㆍ박솔뫼 ‘도시의 시간’론

 

  1. “없는 미래”-도시의 아이들 

  영화감독인 딸이 병상에 누운 어머니에게 묻는다.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한평생 라틴어를 공부하고 가르쳤던 어머니는 딸을 가만 바라보다 간신히 대답한다. “내일.” 나는 내일을 생각해. 더도 덜도 없이 말 그대로, 그 뜻일 것이다. 이 대화는 난니 모레티 감독의 이탈리아 영화 <나의 어머니>(2015)의 마지막 장면이다. 영화는 딸과 어머니의 가슴 아픈 이별을 담담히 보여주면서도,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하는 딸의 감정적 동요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물리적으로 성숙한, 나이 든 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불완전하다. 영화를 만들어가는 과정도, 이혼한 전남편과의 관계도, 사춘기 딸의 속내를 짐작하는 일도 어렵고 험난하기만 하다. 자기의 생을 움직여가는 그녀의 태도에는 여전한 서툶과 불안만이 있다. 딸은 충분히, 알고 있다. 엄마에게 ‘내일’은 없으리라는 것. 그러나 분명 오지 않을, 내일의 시간 앞에서 어머니는 내일을 이야기한다. 산 자에게 내일이란 곧 생의 지속됨이고, 살아감이며, 미래의 증거일 텐데, 죽음이 예정된 자에게 내일은 “없는 미래”일 뿐이다. 오지 않는 내일, 오지 않고 있는 시간, 오지 않을 미래. 


  “우나가 좋아하는 것, 우나는 여기에 없는 것들을 말했다. 들판과 벌판은 문자로 아는 것. 책에서나 본 거야. 숲에 사는 새들처럼 본 적 없는 것이다. 본 적 없는 것들을 우나는 줄줄줄 말했다. 우나는 손에 힘을 주었다. 우리는 언제 들판을 구르게 될까? 언제가 되어야 할 수 있을까? 나는 들판을 구르는 우리들이 그려지지 않았다. 그건 없는 미래였다.”(83쪽) 


  “없는 미래”라는 표현은 박솔뫼의 장편소설 <도시의 시간>에서 발견한, 비명과도 같은 단언(斷言)이다. 그녀의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길 위”에 선 채로 살아가고, 언제고 “더 나은 인간이 되지 못”하는 채로 “모르는 시간, 애를 써도 알 수 없는 것들의 시간”(171쪽)을 반복적으로 견딘다. 누구도 ‘내일’을 희망하지 않고, 내일에 설레어 하지 않는다. 책에서나 본 들판과 벌판에 대해 떠들며 다만 “가만히” 앉거나 누워 있다. 죽어 있는 시간, 죽음의 시간, ‘없는’ 시간과도 같다.

  소설에 등장하는 ‘나’와 배정, 우나와 우미는 같은 동네에 살며, 모두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 ‘나’는 고교를 중퇴하고 입시학원에 다니며 배정과 만나고, 그를 통해 우나·우미와 어울린다. 우나와 우미가 비자 문제 때문에 한국인도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 네 명의 아이들은 모두가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경계인이자 주변인이다. “방은 어둡고 밖에서 나는 소리는 왠지 먼 곳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12쪽), “사람들은 먼 곳에서 떠들었고 나는 졸리기만 했다”(13쪽)라는 도입부의 서술부터 중반에 이르러 우나가 반복해서 언급하는, “우리는 언제 들판을 구르게 될까?” 하는 질문들은 아이들이 느끼는 소외와 불안을 지속적으로 드러낸다. 방문을 열고 나가 “먼 곳”이나 “들판”으로 가야 하는 걸 알지만, “아득함도 알고, 먼 곳도 알”지만, 이들은 그저 “가만히” 앉아 있다. 그리고 묻는다. “내일은 무얼 해야 해?” “왜 몸은 무겁고 왜 피곤하기만 해?”(12쪽) “이러다 어디로 가게 되는 거야?”(96쪽)

  네 명의 아이들이 체감하는 피로의 근원은 체계 혹은 체제, 다시 말해 기성사회로의 편입을 목표로 하는 현재적 삶의 권태로부터 온다. 매일 입시학원에 가거나 가지 않거나 상관없이 아이들은 소속됨을 갈망하고 있지만, 미래는 요원하기만 하다. ‘방 밖’에 위치한 미래는 “먼 곳” 또는 “들판”으로 상징되는데, 그곳에 다다라야 한다는 강박은 도리어 ‘갈 수 없음’의 표지로 기능한다. 그곳이 “여기에는 없는 곳” “책에서나 본 곳” “본 적 없는 곳”으로 인식되는 건 그와 같은 이유에서다. 열일곱의 ‘나’는 4수째인 배정과 함께 재수생 단과반 수업을 듣고 있고, 우미는 “가만히 있다가도 학교에 다니고 싶다고 말”하며, 우나는 평소에 “넌 참 못한다, 못해”라는 엄마의 핀잔을 달고 산다. ‘나’와 우나는 “기다리는 것”이라든가, “가만히 있는 것” “혼자 오래 걷는 것”을 잘하지만, 이러한 특기는 그들이 도달해야 할 목표이자 목적지인 “먼 곳”이나 “들판”으로 데려다 줄 수는 없는 덕목들이다. ‘나’의 표현대로라면 이것은 “모두 미련하고 목가적이고 종교적이고 반사회적”(8쪽)인 것이다. 우나의 엄마가 아이들을 불러 요리를 해 주는 장면에서, “한 테이블에서 밥을 먹었지만 배제되었고 존재감이 없었다”라는 ‘나’의 진술은 이들이 일상에서 빈번히 느끼는 심정적 소외와 그로 인해 증폭되는 불안과 피로를 방증한다. 

  우미·우나의 엄마가 항상 “너는 참 못한다, 못해”라고 다그치는 것처럼, ‘안 해’에서 노래를 부르라며 위협하는 검은 옷의 남자가 “열심히의 세계”를 강조하는 것처럼 ‘노력이 부족하다’는 현 기성세대의 힐난과도 같은 목소리는 이전 세대를 능가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이지만, 그것은 청소년·청년세대에게 허약하고도 허망한 희망으로 제시된다. 그리고 그것은 머지않아 겪게 될 ‘미래 없음’의 절망스러운 선견, ‘성공 (불)가능성’에 대한 조용한 분노만을 일으킨다. ‘안 해’에서 검은 옷의 남자는 “네가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너는 그러니까 아름다운 건 못 된다는 거야”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남자가 운영하는 ‘구름새 노래방’은 그렇기에 ‘열심히’의 태도만을 강조·강요하며 사회구조나 시스템이 아닌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세태의 알레고리로 공간화되어 있다. 조금 보태어 말하자면, 이것은 현 사회가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방조하는 가혹한 경쟁의식, 그리고 그에 비례해 단단히 팽배해져가는 패배의식이야말로 명백한 가해(加害)라는 인식을 상기시킨다. 노력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누구도 이렇듯 냉엄하고도 엄혹한 세계에서의 “대비책”2)을 가르쳐주지 않았던 탓이다. 그렇기에 도시의 아이들은 ‘아름다워’지지 못한 채로, (방 안에서) 단지 비소(悲嘯)한다. “우리는 언제 들판을 구르게 될까?” “언제가 되어야 할 수 있을까?”라고. 


  2. 도시에서 살아가는 시간과 “우는 사람” 

  “언젠가 나는 흰 벽이 푸르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나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나는 더 나은 인간이 되지 못했고 더 나아가지도 못했다. 또한 더 나은 인간이 어떤 것인지 한 발짝 다음의 세계가 밝은지 어두운지 알지도 못한다. 알고 싶지도 않다. 나는 벽에 대고 우나 우나 하고 말해 보았다. 꼭 우는 사람 같다.”(170~171쪽) 


  작가의 말대로라면 <도시의 시간>은 2010년에 쓰이고, 2011년에 발표되었으며, 2014년에 출간된 소설이다. 한 편의 작품이 쓰이고 출간되는 이러한 시간적 경과는, 흥미롭게도 이 소설이 2010년대 초중반의 현재적 시간을 좌표처럼 품고 있다는 사실을 체감케 한다. 이 소설은 2000년대 이후부터 2010년대 중반인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쓰이고 있는 한국소설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흰 벽이 푸르게 변하는 시간, 그러나 그 시간이 나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고, 나는 더 나은 인간이 되지 못하는 시간. “우리는 그냥 어두움에 던져진 거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되”는 시간. 도시에서 살아가는 시간은 바로 이 지점에 놓여 있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는 것은 없고,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이 없다고 느끼는, ‘어두운’ 도시의 시간. 박솔뫼가 그리는 소설 속 ‘도시’는 철거되는 재개발 아파트 3층에서 크레인 위로 자리를 옮기는 ‘소년’과 저학력의 비주류 일용직인 ‘용대’가 운전대를 잡고 돌아가는 교차로 안에 있다(김애란, ‘물속 골리앗’,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 또 이곳은 존재론적 불안의 객관적 상관물인 ‘쿤’에 업혀 자기를 감추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윤이형, ‘쿤의 여행’) 이내 허물어져 버릴 재개발 상가에서 그림자에 쫓기어 사는 공간이며(황정은, ‘백의 그림자’), 자라와 유니클로의 다국적 스파 브랜드로 무장한 채 홍대 앞 골목을 활보하는 무리로 들끓는다(김사과, ‘더 나쁜 쪽으로’). 이런 일련의 소설들은 2010년대 초중반의 현실을 지극히 현재적으로 투영하고 있는데 그리하여 정권의 보수화, 높은 실업률, 빈부 격차와 비정규직자의 증가, 학자금 대출과 취업난으로 이어지는 2030세대의 빈곤과 무기력 등으로 혼란한 대한민국의 ‘진실’을 첨예하게 그려내 보인다. 

  <도시의 시간>의 등장인물들 역시 그 혼란의 중심에 있다. ‘나’를 비롯해 배정과 우미·우나는,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울타리 안에 들어가고자 주변에서 배회하지만, 스스로 ‘나은 인간’이 되지 못하고, 앞으로 더 나아가지도 못할 것이라 예감한다. 고교 중퇴인 ‘나’와 4수째 입시준비를 하는 재수생 배정, 그리고 주민권도 부여받지 못한 채로 살아가는 우미·우나는 그들이 획득하지 못한 ‘신분’(대학생, 한국인)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벽” 앞에서 “누워” 있는 것으로 소일한다. 더구나 우미·우나의 엄마는 아이들이 처한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도, 생각도” 가지고 있지 않기에, “벽에 대고 우나 우나 하고 말해 보았다. 꼭 우는 사람 같다”라고 생각하는 ‘나’의 무력감은 그러므로 당연하다. 이들은 이미 사회적 배제와 불평등을 체감하고 있고, “먼 곳”에서 곧 감당하거나 차지해야 할 자기 ‘자리’의 부재를 예상하고 있다. 

  바우만에 따르면 지난 수십 년간 고성장, 고학력 사회로 인한 “시대적 요구가 높아지면서 오늘날 성인의 문턱을 넘어서는 이들은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하고 좌절을 경험”하게 되었다. 대학의 졸업장만으로는 더 이상 미래에의 비전과 명예를 보장받을 수 없고, 그에 더해 고등교육 자격증 보유자들을 위한 노동시장은 포화 상태이다. 이 때문에 어른이 되어 맞닥뜨리는 현실은 ‘추락’과도 같이 느껴지고, “나의 기대나 능력 바로 그 밑바탕에는 장기적인 실업이나 ‘쓰레기 같은 직업’ 등의 절벽이 연속으로 점철되어 있”3)을 뿐이다. 점점 더 장기화되고 견고해지는 청년 실업은 자괴감과 패배감을 양산하고, ‘삽질’ ‘현시창(현실은 시궁창의 줄임말)’ ‘잉여인간’과 같은 자조적인 조어를 유행시킨다. 그에 더해 <도시의 시간>의 인물들은 자기 자신을 ‘점’으로까지 규정하고 있다. “우리는 가장자리에 작은 점으로 앉아 앞을 보았다.” 


  “지식 기반 사회이자 정보 중심의 사회라고 일컫는 사회경제적 체계를 갖고 있는 이 세계에서 지식은 더 이상 성공을 담보해 주지 않으며, 교육은 성공을 보장해 주는 지식을 선사하는 데 실패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심각한 지점은 불평등이라는 사회적 독소가 중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불평등이란 사회 속에서 그다지 해가 되지 않고 그 속에서 견디며 살 만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겁니다. 사회 계층의 상승이동을 가능하게 했던 교육, 아니 교육의 미래 자체가 희미해지고 있다는 겁니다.”4) 


  문제는 이것이 사회 속에서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사용된다는 점이다. 박솔뫼 소설의 서사적 리듬의 형식으로 “산책과 배회”를 언급했던 논자의 말마따나(백지연), <도시의 시간> 속 인물들은 방 안에 있거나, 벽 앞에 눕거나, 학원과 도서관을 오가거나, “길 위”에서 서성거릴 뿐이다. 이것은 소설의 결말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폭발’하지 않는, 즉 현시대나 사회의 세태에 노여워하지 않는 모습으로 보인다. 배정이 번번이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우미가 “그냥 학생이 되고 싶”어 어떻게든 졸업만은 하고 싶었으나 끝내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는 설정은 바우만의 지적대로, 이들이 사회적 불평등이라는 ‘독소’를 스스로 중화하며, “교육의 미래 자체가 희미해지”는 이 시대를 다만 ‘견디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우나의 눈은 쓸쓸했고 우리는 손으로 서로의 이마를 짚은 채로 서로의 눈을 보았다. 그러다 손을 내리고 눈을 거두고 벽을 보았다. 한참을 그랬다.”(75쪽) 


  ‘벽’ 앞의 인간, “우는 사람”의 형상은 <도시의 시간>에서 반복적으로 서술된다. “인간 자체란 것은 없다. 소설가는 필연적으로 한 사회의 인간을 그리며 동시에 한 사회를 그린다”5)라는 명제를 떠올린다면, 그리고 경험을 재현하고 그것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인간을 소설가라고 부를 수 있다면, 박솔뫼가 만들어낸 “우는 사람”은 2010년대 초중반을 지나오며 빚어진 한국 사회의 기형(畸形)이라 할 만하다. 벽 앞에서 “우나 우나 하고 말해 보”는 사람의 형상은, 비록 그가 벽 앞에서 그저 “누워” 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항상 내적인 투쟁 상태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혹은 못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무력감이 비유(非有)의 원리일 수는 없다. “자꾸만 물어도 모르는 것밖에 없다. 왜 그럴까, 우리는 아는 게 하나도 없다”(116쪽)라는 진술은 그리하여 거짓이다. ‘나’는 “자꾸만” 묻고 있기 때문이다. “점점 더 알 수 없게 되었다. 이러다 어디로 가게 되는 거야?”(96쪽) “우는 사람”의 내면에는 질문하는 인간이 있고, 이러한 질문은 스스로를 향한 자각과 자성(自省)을 바탕으로 한다(참고로 이러한 인간형은 황정은의 근작인 ‘웃는 남자’와 ‘양의 미래’ 등의 단편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진실일 리가 없다. 이 사실을 큰 소리로 이야기할 용기가 내게는 없다”6)라던 아룬다티 로이의 중얼거림을 빌려 말해 보자. 박솔뫼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불확실한 도시의 시간에 ‘내일’은 없다고 진술하는 것이다. 없는 미래, 도래하지 않는 미래, 끝끝내, “도무지 어떤 것인지 모”(58쪽)르는 미래. 그것만이 진실이며, 다만 그 사실만을 이야기한다. 안타깝지는 않다. 안타까운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저 ‘아까울’ 뿐이다. “뭐가 안타깝지? 아무것도. 나는 지금이 너무 선명하고 아깝다”(79쪽)라는 심경의 고백. 어쩌면 이것이 용기이고, <도시의 시간>이 지닌 특유(特有)는 바로 여기에 있다.


  3. ‘장막’의 소설쓰기 

  “나는 나에 대해 별생각이 없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어떻게 되겠지라고 생각했다. 정작 뭐가 되어 가는 것은 없었다. 뭐가 될 리가 없었다. 시간은 흐르고 나는 지금처럼 살아갈 것이다. 지금 같은 대학생이 직장인이 될 것이다. 그마저도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날 것이다. 그 이후는 알 수 없다. 되는 것 없이 변하는 것 없이 완성되는 것도 나아지는 것도 없고 깨닫고 나아가는 것도 없다. 그것만은 꼭 그렇게 될 것이다.”(46쪽) 


  결국 인간의 정서를 적나라하게 꿰뚫어보고 그것을 결정적으로 제시하려는 노력 없이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 소설이다.7) 물론, 단연코, 박솔뫼의 소설쓰기 방식이 정치적이라거나 혹은 그의 소설을 ‘정치소설’로 규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소설은 근본적으로 동시대성의 함의를 품고 있으며, 구체적인 경험을 포착하려는 작가의 의지적인 시선으로 인해 작가의 세계관이 노출될 여지가 다분한 장르다. 또, 그러한 인식의 지점들이 이 소설에 독특한 정치성 혹은 유의미한 내적 긴장감(internal tensions)을 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싶다. 

  등단작인 <을>을 시작으로, 박솔뫼는 장편뿐 아니라 여러 단편들을 통해 <도시의 시간>과 궤를 같이하는 현실인식의 지점들을 보여 왔다. 앞서 이야기한 <도시의 시간>에서의 “먼 곳”은 <을>이나 ‘안나의 테이블’에서도 ‘없는 미래’의 공간으로 제시되었던 바 있고,8) “뭐가 될 리가 없었다. 시간은 흐르고 나는 지금처럼 살아갈 것이다. 그마저도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라고 내내 회의(懷疑)하던 <도시의 시간>에서의 ‘나’는, “성장이나 변화의 기점이 없는 사람의 표정”을 하고 “노을처럼 늘, 처음부터 언제나 지고 있”는 <을>의 주인공 ‘노을’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또한, 소설집 <그럼 무얼 부르지>에 수록된 여러 단편들도 <도시의 시간>에서처럼 한결같이, “그 모든 것에는 무언가가 있다”는 걸 알지만 그저 “간신히 서 있”을 뿐인 왜소한 인물들을 그린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아무리 허우적거려도 이 세계가 나를 무너뜨리고 싶어하는 것인지 놀리고 싶어하는 것인지 미워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는 ‘곤란’에 처해 있고, “직선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 그것만을 확신하며 오늘을 살아낸다. 

  <도시의 시간>에서의 ‘나’는 전북의 중소도시에서 살다가, 아버지가 큰아빠의 인쇄소를 도와 같이 일하기 위해 온 가족이 “대구의 끝”으로 옮겨왔다. 신도시이지만 보통은 “변두리”일 뿐인 곳에서 청소년이지만 학생이 아닌, 하물며 꿈도 없는 ‘나’는 매일 노래하듯 말한다. 뭐가 될 리가 없고, 흘러도 지금과 같을 것이라고. 대학생이나 직장인 아니 그마저도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역시 이 모양이네 싶은 기분”(87쪽)으로 속삭인다. “모두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고 점점 더 알 수 없게”(96쪽) 되는 것이 도시에서의 시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안에서 끝내 죽지 않고 살아남을 거라고. 이것만이, ‘나’와 우나가 그토록 경멸하는 “아이러니”의 본질이다. “옷을 잘 입은 사람이 바지에 크림이 묻은 걸 하루 종일 고민하는 것”(29쪽)으로 비유되는 이 아이러니는 도시의 시간을 살아가는 이들이 겪게 되는 필수불가결한 모순이나 부조화를 의미한다. 건설되는 동시에 파괴되고, 도무지 ‘실체’를 파악하지 못한 채로 타의(자본)에 의해 변방으로 이주되면서도, “어떻게든” 생을 지속해 나가야만 하는 도시에서의 삶. 도시의 공간영역은 확장되지만 인간의 활동영역은 축소되기에, 도시에서 ‘나’를 비롯한 모든 개인은 자기가 놓인 ‘위치’만을 끝도 없이 가늠해 나가게 된다. 이렇듯 일상의 연이은 회의(懷疑)로 착종되는 인생의 딜레마는, 은폐되고 잠재된 불안을 기저로 하는 ‘겨울의 눈빛’에서도 마찬가지로 서술된다. “어째서 참을 수 없이 화가 나는지는 알 수 없고 그리고 또 언제나 내가 견뎌야 할 모멸감은 나보다 크다. 그러나 나는 그 모든 것들과 함께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9) 

  박솔뫼의 소설쓰기는 “전통적인 형식에서 벗어나 있고 의식의 현재 상태를 즉자적으로 노출하는 듯 보이기도 해서 대중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10) 특징을 갖는다고 평가받는데, 그것은 이 소설이 인물들의 내면에서 발견되는 자조와 체념, 미래 부정을 보여주는 데 탁월한 효과를 갖는다. <도시의 시간>에서의 ‘나’가 가장 많이 말하는 동사는 ‘알거나 이해하지 못함, 가지고 있지 못함’이라는 의미의 “모르다”(모른다, 모르는 체, 모르는 것, 모르는 시간, 알 수 없다)이며, 따라서 (이러한 ‘모르는’ 행위자에 의해) 가장 빈번히 제시되는 시제 역시 ‘가정형’이다(“나중에는 원만 남을 것이다. 결론은 우리 모두는 원 안에 살게 되겠지. 주어진 미래와 해야 하는 발전이 그랬다.” 145쪽). “의식의 현재 상태를 즉자적으로 노출하는” 이러한 방식은 바꿔 말해, 소설을 읽어나감으로써 (부득이하게) 노출돼 버린 작가 자신의 목소리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어쩌면 이것은 소설이 얼마나 우리의 삶을 조명해 주는가, 혹은 작가가 얼마나 광범위한 도덕적 시각을 제시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의 답으로써 말해질 수 있을 텐데, “없는 미래”에 대한 이해를 한 번 더 구하기 위해서는 그녀가 작품 안에 매복해 놓은 ‘장막’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짚어보아야 할 것이다. 그녀의 소설 곳곳에서 발견되는 전언, 곧, 가려져 있거나 보이지 않고, “모르고 앞으로도 잘 모를 것”이며, 심지어 “없”다고 여겨지는 ‘미래’는 아마도 작가가 현실에서 인지하는 이 ‘장막’ 때문일 테다. “모든 명확한 세계들이 내게서 장막을 치고 있었다” “다만 내 앞으로는 몇 개의 장막이 쳐져 있고 나는 그 앞으로 직선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 그것만은 확실하다”라는 진술은 ‘그럼 무얼 부르지’에서부터 거듭 토로되어 왔는데, 장막으로 인해 ‘가려짐’ ‘보이지 않음’ ‘알 수 없음’ ‘나아가지 못함’ 등의 부정(否定)한 언술이 반복·지속된다. 

  이러한 장막은 “일정한 거리를 둔 채로 사회적 사건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장치”11)로 이해되어 온 바 있는데, 실제로 그간에 박솔뫼는 광주나 원전 방사능 등과 같은 제재를 다루면서도 무위와 무욕의 태도로써 ‘이야기’를 듣는 청자로 인물을 위치시키는 방식을 써 왔다. 버클리에서, 또 교토에서 5·18과 관련한 시와 노래를 듣지만, 그것은 공기나 바람처럼 ‘나’를 “유유히 지나”갈 뿐이다(‘그럼 무얼 부르지’). 그러나 이러한 ‘나’의 무감(無感)은 ‘장막’ 때문이며, 역설적이게도 이 ‘가려진’ 장막 때문에 ‘이야기’는 ‘나’로부터 지속적으로 호명되고 또 소환되어 왔다. 논자의 말대로, “분명한 것은 박솔뫼 소설이 저 사건들을 ‘기어이’ 보려 한다는 점”이다. “사건에 무감하되 현장을, 사건 그 자체를 반복해서 보”는 집요한 시선이야말로 그녀의 소설이 담고 있는 미덕이라는 것에 수긍하면서,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세계의 ‘장막’이 <도시의 시간>에서는 어떻게 구체화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도시의 시간>에서 ‘우나’와 ‘우미’는 다르다. 우나는 죽어버린 아버지 ‘송주영’이 남기고 간 제니 준 스미스의 앨범이나 그녀의 흔적을 찾아 헤매고, 우미는 부산으로 갔다가 다시 일본으로 가서 “어떻게든” 학교를 졸업하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우나는 과거를, 우미는 미래를 생각한다. 그 가운데서 ‘나’와 ‘배정’은 현재를 적시한다. ‘나’는 우나의 등을 바라보며 “봐야 할 것이 있”다고 깨닫고, 배정이 그런 ‘나’에게 동감하는 장면은 그래서 문제적이다. “먼 곳”일지라도, 도달하지 못할지라도 그들은 가야 한다고, 봐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이러한 설정상의 차이는 결말에서 우나 혼자만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그러나 결국 어디에도, 그들이 온전히 복원하거나 소유할 만한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도시에서 발 내디뎌 걷는 이는 “우는 사람”이며, 그들이 보내는 도시에서의 시간은 그저 “축축”하게 “흘러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기다리며, 걸으며, 돌아다니며, 한숨을 쉬며, 잠을 자며 그들은 무언가 하지만, 결국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도시에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고, 결과를 알기란 요원하며, 미래는 기약되지 않고, “무서움” 외에는 느낄 수 없다. “그건 슬퍼할 일도 안심할 일도 아니고 너무 많은 우리는 단지 그 길에 던져졌다는 그 정도의 일이다”(173쪽)라는 <도시의 시간>에서의 마지막 문장은 그래서, ‘나’가 느끼는 피투적 존재로서의 공포를 보여준다. 아무것도 나를 ‘결정’해 주지 않는 시대에서 오로지 나의 불안한 실존만을 체감하며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 그야말로 지옥적이다. “이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낙오 상태에 대한 감수성”12)에 지배되고 있다. 던져졌을 뿐인, 그리하여 도저히 장막이 걷히지 않는 이유는, 도시의 시간이 언제나 “모든 하던 중의 세계”인 탓이다. 그러니 도시는 어디까지나 완성되지 않은 것, “원래 없었던 것” “없는 미래”였던 것이다. 도시는 과거에도, 미래에도, 있던 적이 없다. 


  4. “굴착기의 속도”-도시의 시간 

  “우리는 가장자리에 작은 점처럼 앉아 앞을 보았다. 굴착기가 왔다 갔다 하는 공사장이 보였다. 저 굴착기는 땅을 파고 그 땅 위에는 다시 아파트가 쇼핑센터가 세워질 것이고 소나무는 베어질 것이고 숲도 공터도 아닌 이곳은 좀 더 확실한 곳이 되겠지요.”(89쪽)


  “바람은 불었는데 그냥 그랬고 새소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안 들렸다. 원래 없었던 것이다. 좋은 건 하나도 없었다. 그저 그런 곳이었다. 그런 곳에 갔다. 눈앞의 정경은 움직이는 굴착기. 굴착기의 속도로 묻는다. 굴착기가 땅을 헤치고 흙을 파내고 다시 땅을 헤치는 속도로 무엇을 좋아해야 해 무엇을 어떻게 어떻게 무엇을. 혹은 이것을 미워해야 해? 미워하는 이곳을 진심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질문만 던지는 나와 나의 팔을 안고 있는 우미 그저 그런 곳에 함께 누워 있다.”(91쪽)

  도시는 무언가 하는 이들로 넘치지만, 아무것도 완성되거나 결론지어지지 않는다. 언제나, 매일 도시에 머물고 있지만, 도시란 그저 “모든 하던 중의 도시, 공사 중의 세계”이다. 도시는 “원래 없었던 것”이고, “미래란 도무지 어떤 것인지 모”르고, “불안과 초조로 영혼이 부풀어 자꾸만 커져 가”(59쪽)는 것만을 절실히 느끼는 공간이다. 이때 <도시의 시간>에서 ‘나’의 시야를 가린 장막, 그 불가해와 불확실성의 원인은 ‘굴착기’로 말해지고 있다. 

  ‘나’는 신도시라고 불리지만 보통은 ‘변두리’로 생각되는 곳에 산다. 그곳은 “가까운 미래에 여기저기 다 개발될” 예정이다. 개발은 곧 “발전”된다는 것이며, “사람들이 말하는 발전은 모두가 아는 어떤 것이 들어선다는 것”(54쪽)이지만, ‘나’의 눈에 모든 공사 중의 세계는 미분양된 “텅 빈 시멘트 덩어리” “아주 어두운 덩어리”일 뿐이다. 새소리가 들리지 않고, 좋은 건 하나도 없고, 시멘트 덩어리 사이를 걸어가는 인물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미래를 향해 살 수 없는, 디스토피아적 현재를 그려 보인다. 굴착기는 땅을 파고, 소나무를 베어낼 것이다. 이곳은 숲도 아니고 공터도 아니게 된다. “산과 땅은 서서히 지워”진다. 인간이 가진 고유한 희망이란 “새로운 미래를 향한 긴장”에 있다는 말을 떠올린다면(에른스트 블로흐), <도시의 시간>에서 묘사되는 황량한 미래는 이처럼 명백히 반(反)이상향적인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이전에 쓰인 <을>과 <백행을 쓰고 싶다>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을’이 자라 온 곳 역시 “공장지대를 끼고 있는 도시”로 설명된다. “낯익은 회색 길들의 연속”이자 “중심가를 제외하고는 모두 똑같은 길의 연속”이었던 곳을 떠나 을의 가족이 이사 간 곳은 “아직 논밭이 남아 있던 신도시”이다. 그러나 빈터에 갑작스레 아파트와 학교가 들어서며 사람들이 몰려들자, 을은 끊임없이 아파트가 지어지는 그 광경을 “어딘가 기형적”(103쪽)이라고 느낀다. <백행을 쓰고 싶다> 역시 그러하다. 배경은 “바닷가 큰 도시”이지만 그곳은 자본의 논리에 의해 부서지고 폭파되어 새로이 조성되고, 주민들은 쫓겨나듯 이주된다. 그들은 도시와 섬을 연결하는 다리 공사장 위에서 투신하고, 금세 잊힌다. “누군가 먼저 이만 가보겠다고 다리를 내려간다. 그리고 남은 사람은 신발을 벗고 다리 위로 올라가 바다로 떨어졌다”(23쪽)라는 서술이 그것이다. 고작해야 쇼핑센터나 놀이공원이 만들어지는, 어디까지나 ‘공사장’일 뿐인 세계에서 사람은 쫓겨나 도시로 ‘던져’진다. 그렇게 죽고,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는다. 남은 자들은 누구도 쫓아내지 않는 곳으로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고 싶어하며, 이 모든 비정상적인 세계에서 “초조”해하거나 “피곤”해할 뿐이다(“누구도 쫓아내지 않는 곳이 있어? 있다면 이사 가고 싶습니다.” 24쪽). 이러한 ‘공사 중’의 세계 인식은 근작인 ‘주사위 주사위 주사위’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벌써 몇 년째 공사 중인 상태로 불편을 끼치고 있는 광주아시아문화전당을 바라보며 ‘나’는 옛 도청을 허물고 세우는 이 공사가 “얼마나 사람을 지치게 하고 갉아먹는”지에 대해 반문한다. 그리고 “누군가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갉아먹어야 무언가 올라가고 세워진다는”(53쪽) 사실을 예민한 촉수로 감지하고 있다. “이미 오래 공사 중”인 곳에서, ‘나’는 “무게가 없는 것처럼” 그저 그곳을 걸어 다닐 따름이다. 

  우리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직접 볼 수 없다는 건 당연하고, 또 도시는 이질적인 것들의 공존(co-existence)으로 나타나기 마련이지만, 도시 건설을 바라보는 목격자로서의 개인이 체감하는 ‘굴착기의 속도’란 다분히 기형적이고 비정상적인 것으로 서술되고 있다. “백행을 쓰는 것처럼” “비명”을 질러대는 이런 장면들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낡은 사회를 대신해서 등장한 사회가 덜 야만적이라는 보장은 없다”라던 데이비드 하비의 말을 곱씹어 보게 한다.13) 그는 도시화 과정 자체가 자본주의의 자본 축적과 잉여가치의 창출을 뒷받침했다고 주장하며, 도시 공간 형성 과정에서 약자들이 끊임없이 도시로부터 추방당해 외부·주변부로 밀려나는 것에 집중한다. 고로, 아직 무언가 확실하게 ‘되지 않았거나’ 혹은 ‘갖고 있지 않은’ 이들이 시나브로 확대되는 도시의 변방으로 이동하며 ‘헤매는’ 서사적 과정은, “텅 빈 시멘트 덩어리”로서의 ‘신도시’의 실체를 증명한다. 그것은 <도시의 시간>에서 ‘나’와 엄마가 새로 생긴 쇼핑센터를 “지하부터 9층까지” 다 구경하고 나서도 아무것도 살 게 없고, 별게 없고, “다시 오기 싫”(144쪽)다고 말하는 장면과도 상징적으로 연결되고 있다.

  “내가 사는 집은 이전에는 원 안에 없었다. 원 밖에 있는 땅이었다. 지금은 원 안이었고 나중이 되면 더욱 명백한 원 안이 될 것이다. 그런 식으로 산과 땅이 서서히 지워지고 나중에는 원만 남을 것이다. 결론은 우리 모두는 원 안에 살게 되겠지. 주어진 미래와 해야 할 발전이 그랬다.”(145쪽)

  그리하여 소설에 제시되는 모든 ‘공사 중’의 세계는 ‘준비 중’의 세계를 살아가는, ‘나’를 비롯한 청년세대의 민낯으로 자연스레 치환된다. “모든 것이 하고 있는 중, 모든 것이 준비 중”(145쪽)인 단계에서 개인의 개별성은 고립된다. 변화와 창조보다는 질서와 위계에 순응하며,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행동하기만을 요구받는다. 결론은 모두가 “원 안”에 살게 되는 것. 그것만이 “주어진 미래와 해야 할 발전”으로 제시되는 곳. 그곳이 도시다. 도시의 시간이다. 우나가 죽고 난 뒤에 ‘나’는 여전히 십대로 입시준비를 하고, 배정은 기계공업전문대를 졸업한 후 카페에서 일하며, 우미는 부산으로 갔다가 다시 일본으로 떠난다. 누군가의 존재가 사라지고 난 후에도 “먼지”만이 가득한 길 위에서 개별적 삶은 서로 다르지 않게 지속된다. 어두움에 던져졌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단지 “흡착력 강한 어떤 익숙한 성질로 다가”올 따름인, 어떤 익숙하고도 자연스러운 ‘현시창’과 ‘잉여’의 세계, “점”들의 세계로 함몰돼 버리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눈앞에 보이는 ‘굴착기의 속도’로 묻고는(“무엇을 좋아해야 해 무엇을 어떻게 어떻게 무엇을. 혹은 이것을 미워해야 해? 미워하는 이곳을 진심으로?”), 그것을 “짐짓 모르는 체”(“왜인지 나는 다 알고 있는 것을 짐짓 모르는 체하는 기분이 든다.” 102쪽)해 버린다. 여기서 ‘모르는 척’ 가장하는 것이야말로 ‘장막’을 걷어내지 않고도 끊임없이 시대와 사회를 현시(顯示)하는 박솔뫼만의 방식이다. 도시는 우리가 미지의 것과 대화할 수 있으면서 또한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있는 사회적 장소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는 까닭이다.14)


  5. “원 안”에서- 다시, 도시의 미래 

  아울러 말하자면, 박솔뫼는 <도시의 시간>을 통해 내일(희망)이 없는 시대에 길 위(도시)에 놓여진, 지극히 미소(微小)한 존재로서의 개인을 이야기한다. “원 안”에 살고 있지만 도시에서는 누구나 울고 있다. “매번 헤매는 길을 다시 또 걸어야 하고, 문을 열어야” 하기에 매일 피로하고, 피곤하며, “비명”을 기도할 수밖에 없다. 생전의 우나가 아버지의 유품이기도 한 제니 준 스미스의 앨범과 그녀의 행적을 찾는 데 몰두하는 것은, 그녀가 “먼 곳을 부르는 목소리로 노래하는”(92쪽)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세계를 향해 질문을 던지기를 멈추지 않는 ‘나’와, 제니 준 스미스를 매일 듣고 매일 생각하는 우나는 끝내 답을 듣거나 가질 수 없다는 점에서, “매일 새삼스럽게 추워하며 추운 겨울을”(100쪽) 산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굴착기’로 파헤쳐지며 성실히 건설되는 ‘공사장’ 같은 세계에서 개인은 누구나 훼손된다. 탈주는 불가능하다. “주어진 미래와 해야 할 발전”은 가속화되고, 점점 더 심각한 가난과 더 많은 죽음, 더 많은 불평등과 불공정이 초래될 것이다. <도시의 시간>을 가로지르는 불안은, 불길한 전조는, 그리하여 “없는 미래”라는 단언 속에서 공기처럼 퍼져나가는 중이다. 


  “나는 딴생각을 했다. 다른 무서운 것들을 생각했다. 왜 밤에 잠이 들 때 내일 눈을 뜰 것을 생각하면 무서울까? 땅끝까지 떨어지는 기분으로 무섭다. 분명 누군가가 내게 엄청난 상처를 줄 것 같아서 눈을 뜨기가 무섭고 또 언젠가 내가 누군가를 해칠지도 몰라서 무섭다. 나는 가끔 그것 때문에 내일 아침 눈을 뜨기가 무서운데 우나야 너는 얼마만큼 무서운 건데? 나보다 훨씬 훨씬 무섭다? 침대에서 걸어 나가 길에서 얼어 죽을까봐 무섭다? 무섭다. 무섭다. 아 무섭다. 무서워서 무섭다.”(78쪽)


  “무서워서 무섭다”라는 ‘나’의 목소리는, 그 모든 불안과 불평등으로써 즉각적으로 ‘손상’돼 버린 흔적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나’는 점차로, “곧 도덕이 황폐화되는 현실이나 윤리적인 문제들에 대해 무지해지거나 무감각해지는 상황” 또는 타인에게 가하는 “해악에 대해서까지도 습관적인 일로 바라보게 되는 상황”에 맞닥뜨린다. 그리고 이러한 ‘손상’이야말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의미 있는 공동생활에 대한 모든 가치들을 ‘침식’시켜 버린다.15) “나는 사람들을 모르고 앞으로도 잘 모를 것”인데, “누군가 내게 엄청난 상처를 줄까봐 무섭다”. 이는 곧 자신 또한 상처받는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줄 수도 있는 존재라는 자각에 이르게 한다. 결국 나의 공포와 너의 공포는 다르지 않아야 한다. ‘다르다’는 사실 그 자체가 다시 공포로 다가온다. 자신이 느끼는 무서움을 상대는 느끼지 못할까봐, 나의 무서움과 너의 무서움의 정도가 같지 않을까봐, ‘나’는 그것이 무섭다.

  ‘무서움’의 진원은 도시에서 이렇듯 ‘습관적으로’ 서로에게 행해지는 ‘가해’ 때문이며, 개인은 이렇듯 외부로 표출되는 모든 가해와 위해(危害)에 무방비하다. 이러한 서술은 ‘차가운 혀’에서도 마찬가지로, ‘나’와 누나는 아르바이트하는 술집 사장이 ‘런던’에 다녀왔다는 얘길 듣고는 ‘무서워’한다. “런던 같은 데가 있을까봐. 런던 같은 데서 누가 살고 있을까봐. 가본 적도 없고 앞으로 갈 수도 없을 것만 같은데 누군가 살았다고 하니까” 그들은 무섭다. 누나에게 “학교도 다니지 말고 나와 본드나 마시자”는 ‘나’의 제안은 “기분 나쁘게 어지러운” 이 도시에서 손상돼 버린 개인의 비극, 그 상해의 잘린 단면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태도를, 도시의 미래를 “없는” 것으로 비관하는 데 있어서조차 도저히 비껴가거나 외면해 버릴 수 없는 작가의 윤리라고 말할 수 있다면 어떨까. “나는 그런 것만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16)라고, 그녀는 말한다. “먼 곳”을 향해 걷는 “길 위”의 속도로, 박솔뫼는 도시의 시간 그 이면의 서사를 내밀히 적어내고 있다.


  >> 각주 

  1) 이 글은 <도시의 시간>(민음사, 2014)을 고찰하는 데 중점을 두지만, 박솔뫼의 다른 장·단편 소설들도 함께 읽는다. 언급되는 작품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장편소설 <을>(자음과모음, 2010), <백행을 쓰고 싶다>(문학과지성사, 2013), 소설집 <그럼 무얼 부르지>(자음과모음, 2014), ‘겨울의 눈빛’(‘창작과비평’ 2013년 여름호), ‘주사위 주사위 주사위’(‘현대문학’ 2015년 2월호). 참고로 본문에서 소설을 인용할 경우 <도시의 시간>은 괄호 안에 쪽수를, 다른 소설들은 각주에 제목과 쪽수를 적기로 한다. 

  2) 지그문트 바우만, <희망, 살아있는 자의 의무>, 궁리, 2014, 72쪽

  3) 지그문트 바우만, 위의 책, 71쪽 

  4) 지그문트 바우만, 위의 책, 76쪽 

  5) 미셸 제라파, <소설과 사회>, 문학과지성사, 1989, 17쪽 

  6) 아룬다티 로이, <생존의 비용>, 문학과지성사, 2003, 42쪽 

  7) 어빙 하우, <소설의 정치학>, 화다, 1988. 

  8) “민주는 차가운 공기를 헤치며 걸었다. 어딘지 알 수 없는 먼 곳을 향하는 기분이었다.”-<을>, 24쪽, “먼 미래에는 있을 것이다. 시간아 얼른 가 하고 바랐다.”-<안나의 테이블>, 224쪽

  9) <겨울의 눈빛>, 151~152쪽 

  10) 손정수, ‘모더니즘의 문체와 리얼리즘의 문제는 어떻게 하나의 이야기 속에 양립할 수 있었는가?’, <그럼 무얼 부르지> 해설, 자음과모음, 2014, 230쪽 

  11) 김주선, ‘증언의 아카이브-박솔뫼론’, ‘문학과 사회’ 여름호, 문학과 지성사, 2015, 562쪽

  12) 김형중, ‘‘탈승화’ 혹은 원한의 글쓰기-박솔뫼, 김사과, 황정은의 소설에 대하여’, ‘문학과 사회’ 봄호, 2013, 382쪽 

  13) 데이비드 하비, <반란의 도시>, 에이도스, 2014, 215쪽 

  14) 마르쿠스 슈뢰르, <공간·장소·경계>, 에코리브르, 2010 

  15) 지그문트 바우만, ‘불평등이라는 시한폭탄’,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동녘, 2012, 193~194쪽

  16) ‘주사위 주사위 주사위’, 59쪽 



  <당선소감>


  어제보다 나은 인간으로, 세계를 바라볼 수 있길


  스물넷에 처음으로 소설을 발표했을 때, 아버지는 등단작이 실린 문예지를 백여 권 이상 사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추궁해 알아낸 것만 그 정도이지 사람을 좋아하고 발이 넓었던 아버지는 어쩌면 더 많이 사셨을지 모를 일이죠. 아는 이 누구에게라도 문예지를 나눠주며 여길 좀 봐요, 했을 아버지를 어린 날의 나는 꽤나 쑥스럽고 민망해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한 가지는 충분히 알았습니다. 글 쓰는 딸을 걱정하면서도, 당신의 딸이 소설 쓰는 사람이 되었다는 걸 아주 자랑스러워하셨다는 걸요. 소설을 쓰는 일은 지치고 힘에 부칠 때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언제나 잘한다고, 잘하고 있다고 말해주던 아버지, 그의 든든한 격려가 아니었다면 등단 이후에 꾸준히 써오지는 못했을 테죠. 아버지가 곁에 계셨다면, 당선작이 실린 오늘의 이 신문을 몇 부나 사셨을까요. 그의 목소리가, 따뜻한 눈빛이, 꽉 쥐어주던 큰 손이 그립습니다. 어떻게 새끼손가락 마디가 휘어진 것까지 나랑 닮았니. 손을 잡으면 몇 번이고 들여다보며 습관처럼 그런 말씀을 하셨죠. 안경을 쓰고 집중해 들여다보면서도 이 소설은 무슨 내용이냐, 그래도 좋아하는 걸 써라, 중얼거리시던 것도 떠오릅니다. 그런 장면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결코 잊히지 않습니다. 꿈에서 자주 아버지를 봅니다. 주로 내가 떠들고, 아버지는 듣습니다. 이번에도 분명 기뻐해 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서른다섯에도 여전히 쓰고 있습니다. 이따금씩 그 사실이 당황스럽고 절망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읽고 쓰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행운인지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다만 성실히 움직이고 싶습니다. 불운에 초조해지거나 피로해지지 않고 ‘앞’이란 게 있다면 조금 더 나아가고 싶습니다. ‘함께’한다는 것은 얼마나 힘이 되는 말인지요. 읽으며 늘 어제보다 나은 인간이 되고 싶고, 쓰면서 어제보다 나아진 인간으로 타인을 이해하고 세계를 바라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애틋함을 잃지 않고 싶습니다. 쉽게 뜨거워지거나 차가워지지 않는, 고요하고 정갈한 눈을 갖고 싶습니다. 아직은 너무나 부족합니다. 그것을 가장 먼저 알아봐 주셨을 두 분 심사위원 선생님께 감사드리고, 동국대학교의 많은 선생님들께도 존경의 마음을 전합니다. 섣부르지 않도록, 부끄러움을 잊지 않고 쓰겠습니다. 그리고 소중한 나의 가족에게, 말로 다 표현 못할 사랑과 고마움도요. 


  ● 1982년 서울 출생. 서울 거주.
  ●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심사평>


  진지한 문제의식·시대를 이해하는 과정 공감


  문학 안팎으로 위기의 진단이 무성하고 문학평론에 대해서도 이러한 위기에 대응하는 과감한 시도가 요구되고 있는 시점이다. ‘그렇기 때문에’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인지, 응모작들의 수준은 높았고 문제의식도 뜨거웠다. 섣부른 위기의식을 경계하는 침착한 응시와 분석의 가치를 실감할 수 있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반(反)현실의 탄생, 경향신문 1면 2016.10.06.~12.10’은 신문 1면을 텍스트로 삼아 문학평론을 사회평론의 영역으로 확장하려는 기획을 보여주었다. 세월호, 보수정권의 부패와 무능, 공공성의 붕괴와 사회적 윤리의 파탄이라는 최근의 현실이 평론의 글쓰기를 다른 방식으로 재구성하기 시작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글이었다. ‘고집스러운 공백의 가능성-소녀는 마스크를 벗지 않는다’와 ‘상상적 탈주와 상징계의 불심검문-정지돈 소설의 이중의 거짓말’ 역시 사회적 현실과 문학적 지형변화를 글쓰기의 형식에 반영한 글이었다는 점에서 인상 깊었다. 전자는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을, 후자는 정보화시대의 독자의 위치를 화두로 삼아 텍스트에 접근하는 새로운 비평적 글쓰기를 보여주었다. 새로운 글쓰기가 주는 매력을 외면하기 어려웠지만, 설득력과 완결성의 문제에서 오는 아쉬움 때문에 최종 결정을 유보할 수밖에 없었다.

  강성은과 이제니의 시를 분석한 ‘대칭 불가능한 거울의 세계’, 박솔뫼를 분석한 ‘없는 미래와 굴착기의 속도’는 해당 텍스트를 정밀하게 분석하는 능력, 현재의 한국문학, 한국사회에 대한 비판적 안목을 모두 갖추고 있는 글이었다. 당선작으로 ‘없는 미래와 굴착기의 속도’를 결정한 것은 텍스트를 넘나들면서 ‘미래 없는 세대’의 고통과 현실의 불모성에 접근해 가는 일관되고도 진지한 문제의식에 더 마음이 끌렸기 때문이다. 박솔뫼의 소설을 통과하면서 자신의 세대와 자신의 시대를 해명하고 이해하는 과정이 독자에게도 따뜻한 공감을 선사한다. 

  가명으로 응모된 당선작의 필자가 소설가 염승숙씨라는 것을 당선 통보 뒤에 알았다. 평론가로서의 새로운 출발이 그의 소설세계에도 깊이를 더해줄 것을 기대한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전하면서 잠시 등단이 유보된 다른 예비평론가들에게도 응원을 보낸다. 가까운 시일 안에 다른 자리에서 반갑게 만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심사위원 : 권성우, 서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