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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결핍을 통해서만 사랑은 자라난다 - 윤가은의 '우리들' / 김세나

 

  언제였는지 아득하기 만한 잔상들이 떠오른다. 같은 집 방향이면 등굣길에 들러 같이 학교에 가고 돌아오던 그때. 하교 길 마주하는 주위의 대상들은 모두가 호기심과 관심의 세상이던 그 시절. 헤어지기 아쉬워 저녁 시간이 다 되도록 나의 집에 돌아가지 않고 눈치 없이 그 집 밥을 같이 하던 그때가 말이다. 윤가은의 ‘우리들’은 자라나는 아이들이 겪고 있는 결핍과 애정에 대한 상관관계를 따뜻하면서도 본질적으로 그리고 있다. 사랑과 애정의 감정은 과연 결핍된 아이들의 마음을 보듬어 줄 수 있을까?


  외톨이처럼 학교생활을 보내는 ‘선’은 ‘보라’의 무리들과 친해지고 싶지만 좀처럼 끼어 들 수 없는 상태다. 선이가 보라의 생일파티에 함께 하고 싶어 하는 눈치를 보이자, 그녀는 잘못된 주소가 적힌 초대장을 일부러 주면서 간접적으로 친해지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보인다. 왜 나는 그 무리에 낄 수 없는 것인지,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선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해결해야만 숙제로 남는다. 그렇게 시작되는 방학 일에 해답처럼 ‘지아’가 왔다. 새롭게 누군가와 사귄다는 일은 언제나 설레고 조심스럽다. 상대에게 꼭 맞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에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면서 공유하는 추억이 쌓여갈수록 서로는 서로에게 길들여지게 된다.


  ‘우리들’은 선과 지아가 단둘이 ‘비밀’을 공유할 만큼 가까워지는 순간 깨져버리는 장면을 그려낸다. 친밀한 관계일수록 비밀은 공유되고 하나 이상을 가질 수도 있다. 스스로 남에게 알려서는 안 되는 비밀을 만들고 타인에게 발설하는 순간의 내밀함은 그 얼마나 은밀하고 부끄러운 감정이던가. 가까워지게 되면서 지아는 선에게 부모님의 이혼 사실을 고백한다. 선이도 이때 그에 응답하듯이 내밀한 비밀 하나를 마련해 내줄만 한데 ‘같이 바다 보러 가자’는 말로 함께 하고 싶은 일을 발설하고 있다. 이는 왜일까? 아마도 선은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지아와는 다른 식으로 묶여 있는 존재이기 때문은 아닐까.


  세상에 나를 드러내는 일이 성인들보다 아이들이 더 힘들 수 있다는 전제는 ‘아이들’을 끌고 가는 묵직한 울림으로 드러나고 있다. 나의 규정은 어린 소녀들에게는 민감하면서도 온 세상의 문제로 다가오게 된다. 보라의 생일 파티에 선물을 사지 못하고 직접 팔찌를 만들어가거나, 영어학원에 같이 다니자는 지아의 부탁에 어려운 집안 사정을 먼저 떠올려야 하는 선이의 모습은 매사 자신 없고 솔직한 태도를 갖지 못하게 작용한다. 하지만 지아 역시도 부모님의 이혼 사실에 주눅이 들긴 매한가지다. 선이가 엄마와 다정하게 스킨십하며 응석부리는 모습에서 지아는 다 갖고 있어도 단 하나 갖지 못하는 보물처럼 느끼며 질투한다. 서로는 각자 결핍을 느끼는 부분들이 있다. 스스로를 한정짓게 되는 결핍은 상대방에게 비춰질 것으로 인식한 스스로가 만들어낸 부분들이다. 상대가 나를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를 먼저 판단하여 만들어낸 결과인 것이다.


  알리고 싶지 않은 비밀을 공유한 사이가 멀어지게 되면 상실감이 배가되어 폭로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선은 보라와 가까워지면서 멀어진 지아가 보라로부터 멀어지는 장면을 포착해낸다. 홀로 울고 있는 보라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위로를 한다고 지아의 가정사를 전달한 것은 어떤 마음에서였을까? 아마 선은 보라와 가까워지기 위해서 지아의 가정사를 밝히며 둘만의 비밀을 만들어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 얘기 하지 말아주’라는 제 1원칙을 보라가 먼저 깨기 때문에 당황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왜 나한테 얘기 했느냐’는 보라의 말에 선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누군가와 친해지기 위해서는 상대가 원하는 비밀, 그것이 내 것이 아닐지라도 상대가 원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게 되면 공유해야 한다는 선이의 의식은 어느새 지아에게 길들여진 모습은 아니었을까. 학급 친구들 앞에서 서로의 가정사가 폭로전으로 난타되는 장면은 비밀로 주고받은 내밀한 고백의 내용만을 다루고 있지 않게 된다. 단 둘만의 추억과 시간들은 이제 스스로가 상대의 결핍들을 파악했던 악몽의 시간들이 되는 것이다.


  그저 하나의 친구를 갖는 일이 이렇게 치사하고도 혈투가 일어나는 일이었나 싶기도 하지만, 가장 내밀하고도 수치스러운 부분이 공유된 관계였다는 점에서 충분히 이해받아야 할 일이다. ‘때리면 나도 때리고 또 때리면 나도 또 때리는’ 사이는 과연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동생 윤의 우문현답을 통해 선은 그 해답을 찾는다. 더불어 결핍을 그대로 내버려둔 채 다시 가까워지기 위한 시도를 하게 되는데 이는 할아버지의 죽음을 통해서 느낄 수 있다. 선에게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관계는 좋지 않은 부자로 느껴진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임종을 앞둔 상황에서도 직접 대면 못하다가 임종 이후에야 ‘어떤 화해’가 이뤄진 것처럼 선이는 느낀다. 그렇게 어른이 되면 ‘다시’의 관계가 생성될 수 없음을 선이는 어렴풋하게 느낀 건 아닐까.


  사랑은 언제나 곳곳에서 피어날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은 결핍을 치유해주지는 못한다. 보듬고 덮으려 하면 할수록 울화처럼 튀어 올라 상대에게 생채기를 남길 수 있다. 그러니 이제 질문은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오직 결핍된 자만이, 사랑을 키울 수 있다고. 


  오인된 세계와 본능의 주체로 살아남기- 나홍진의 '곡성'을 중심으로 /  김세나

 

  진실은 오인의 구조 속에서 태어난다


  누구나 그런 일을 겪은 적이 있을 것이다. 원치 않는 상황에 처하고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야만 하는 일. 혹은 그 과정에서 의도한 바대로 일의 방향이 진행되지 않아 당혹스러웠던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더 나은 상황이 펼쳐지기도 하는 일. 가끔 생은 우리에게 질문의 순간들을 만든다. 나의 삶은 내 의지대로 진행하고 있는가? 나는 내 삶의 주인으로 살고 있는가? 자꾸만 어긋나는 삶의 경로에 진입하게 되면 이런 상념들에 빠지곤 한다. 과연 삶의 의지는 나 자신만이 온전히 끌고 갈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나 정신과 같은 것이 개입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고 말이다. 이렇게 고민하다 보면, 인간의 삶은 우연성에 따른 것인지, 아니면 필연성에 따르는 것인지의 문제로 까지 연결된다.


  인간은 구조적 동물이다. 사회적 시스템이라는 거시적 장 안에서 다양한 객체들을 마주하며 교감하거나 취사선택을 한다. 일정한 체계를 유지하려 노력하고 각기의 개성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 상황을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다. 나 자신 뿐 아니라 마주하는 타자 역시 같은 상황일 것이다. 그 역시 일정한 체계와 패턴을 갖고 있으며 고유한 개성을 지닌 객체인 채로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상황에 놓이든지 스스로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으면서도 전혀 예측할 수가 없다. 즉, 필연적 삶을 추구하는 구조 안에서 발버둥치는 우연적 삶의 존재들이다. 이런 인간 사회의 특성은 나홍진 영화의 주된 배경이 된다. ‘추격자’와 ‘황해’, 그리고 ‘곡성’에 이르기까지 그 과도하고도 광기어린 인간의 모습들은 공통적으로 ‘끼인 상태’에서 뭔가를 찾고, 구해야 하며, 해결해야만 한다.


  ‘추격자’의 경우, ‘미진’의 행방을 알기 위해 분투하는 ‘엄중호’의 모습은 전직 경찰이자 현재는 포주라는 끼인 상태의 구조에 놓인 인물로 나타난다. 엄중호는 법의 체계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법의 실현을 대행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취약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황해’의 경우 상황은 더 중첩되어 나타난다. ‘구남’ 역시 먹이사슬의 관계망 안에서 아내의 행방과 돈 때문에 한국행을 선택한다. ‘면가’의 살인청부 의뢰를 하청 받았지만 살해대상이 이미 살해된 상황을 목격하게 됨으로써 경찰로부터 범인이라는 누명을 쓴 채 분투해야 하는 상황이다. 사실상 구남의 한국행 지시는 살인 청부가 목적이 아니라 경찰로부터의 따돌림을 위한 ‘버리는 패’였음을 깨닫게 되면서 어느 곳에도 자기 자신을 설명할 수 없는 끼인 상태가 된다. 왜 청부 살인이 일어나야 했는지, 자신을 이 구조에 빠뜨린 원인을 알아보고자 ‘구남’이 움직이게 되면서 영화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그런데 이때부터, 자기가 놓인 구조를 파악해 나가면서 새로운 진실이 펼쳐지게 된다. 이중의 살인의뢰가 있었으며, 자신을 호명한 구조 이면에는 또 다른 구조가 있었다는 사실에서, 진리(진실)은 언제나 오인의 구조를 통해서 나타난다는 라캉의 말을 떠올릴 수 있게 된다.


  ‘곡성’은 어떠한가. ‘종구’ 역시 ‘끼인 상태’의 인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무명’과 ‘외지인’의 힘겨루기 사이에 놓인 매개물로써 말이다. 나홍진 영화에 주요 소재이기도 한 경찰의 신분이지만 그는 허술하고 나약하며 법의 체계에 온전히 부합하는 인물은 아니다. 마을에 살인 사건이 일어났음에도 곧바로 출발하지 않고 평상시 해오던 대로 밥을 먹고, 아이의 등교를 도와주는 일 등. 하지만 자꾸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고 자신의 삶(효진의 병) 영역에 까지 그 영향이 미치게 된다고 파악하게 되면서 다른 인물로 변해가게 된다. 이는 ‘황해’의 ‘구남’과 같은 궤도에 놓인 동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구남 역시 이미 짜여진 구조 안에서 자신의 역할만을 수행하면 된다라는 의식에서, 이 구조를 짠 자는 누구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는 계기로 변모하게 되면서부터 영화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곡성’ 역시 종구가 자신의 삶의 영역에 생긴 균열이 무엇 때문에 발생했는지를 의심하게 되면서부터 새로운 전개 양상을 보여준다. 이는 일광의 출현과도 같은 말이 될 것이다.


  그렇게 진실을 찾고자 하는 인물들은 결과적으로 모두 파멸에 이른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알면 안 되는 사실을 알아내려 노력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 과정에서 어긋나는 현상의 결과인 것일까? 혹은 진실을 알고자 하는 과정에 어떤 잘못된 개입이 이루어져서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는 것이었던가? 진실을 알고자 마음을 먹게 되는 과정에 어떤 잘못된 판단이나 악의의 의도가 있었던 없었던 간에, 원래 진실을 추구하는 일은 냉혹하고도 무정한 과정 속에 있는 나를 발견하는 일이다. 알렌카 주판치치는 진리(진실)는 삶에 이롭기보다는 해롭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진리(진실)를 마주하게 되었을 때 온전한 자신의 주체성을 보존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그만큼 진실을 추구하는 일은 적대성과 이질성을 특성으로 하기 때문에 이를 파헤치고자 하는 자를 파멸에 가까운 결과를, 즉 주체성의 해체라 할 수 있을 결과만을 남기는 것이다. 결국 ‘곡성’의 종구가 일광 그리고 무명을 상대로 ‘왜 우리 딸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와 같은 질문을 던질 때, 원인이 무엇인지를 묻고자 하는 것인데 이는 끝까지 필연성의 세계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이다. 삶이 아무런 인과 관계없이 전개되는 우연성의 세계에 속하며, 그 안에서 나는 내가 놓인 환경에서 할 수 있는 선택을 할 뿐이다.


  이처럼 진실을 대면하고자 하는 일은 우연성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이게 된다. 하여 진실은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오인(誤認)의 구조 속에 있다. 상황을 잘못 인식하는 것, 혹은 자기 식대로 인지하는 것이 어떤 결과들을 만들어내는가. ‘효진’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종구’가 시도하는 일련의 행위들은 자기 스스로 그 원인을 단정 짓고 벌였던 일들이다. 뭔가 그 과정에서 오인이 일어났으며 외려 그 때문에 외지인에 대한 ‘진실’을 파헤칠 수 있는 것이다.


  자기 발이 달린 소문은 어느덧 들러붙어 석화되고


  사건은 한적한 시골 마을에 살인 사건이 벌어지면서 시작된다. 조씨네 부부가 살해되는 현장에 도착한 종구는 미리 도착한 경찰들에게 치정 사건인 듯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건의 전말을 추리해본다. 조씨는 용의자의 집에서 죽고 이후 조씨 집까지 끌려와 버려진 뒤 그의 부인까지 살해되었을 것이라는 전말에서 단순한 치정관계로 살인사건은 파악될 무렵,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몇몇 현장을 목격한다. 죽은 조씨 집에 걸려 있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마른 꽃과, 용의자의 집에서 발견된 주술적 행위의 흔적들은 치정 관계로 포섭되지 않는 현상으로 남게 되며 종구와 다른 경찰들의 의식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넋을 잃은 사람처럼 보이는 용의자 흥국은 성복의 말처럼 ‘뭔가 잘못 먹은’ 사람처럼 심한 두드러기 증상을 앓고 있다. 이렇게 ‘곡성’은 두 개의 관점, 즉 과학의 세계와 미신의 세계를 동시에 보여주면서 관객들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낮에 일어난 살인사건의 정확한 원인은 아직 명확히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복은 종구에게 ‘파다한 소문’을 들려준다. 조용하던 마을에 자꾸만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외지인이 마을에 들어온 뒤부터라는 인과관계가 결합되면서 기괴한 형상의 괴물인 이방인의 모습으로 이야기는 전달된다. 언제나 그렇듯이 소문이 진실인가 거짓인가 하는 점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소문은 시의성의 유무에 따라 만들어지고 살이 붙는 특성이 있다. 한스 J. 노이바우어에 따르면 소문은 하나의 특정한 사건과 하나의 주어진 상징적 체계 사이의 관계에서 형성된다. 소문은 소문이 생겨난 그 틀 내에서 의미가 형성되고, 그렇기 때문에 해석을 요구한다. 성복의 말에 ‘말린 버섯이 많이 나왔다’고 응수하면서도 종구는 그날 가위눌림을 당한다. 성복에게 들었던 외지인의 형상은 실제 외지인의 형상에 소문의 살이 덧붙여져 기괴하고도 악마와 같은 모습으로 출현한다.


  그렇다면 ‘곡성’은 정녕 외지인이 악마(혹은 귀신)의 존재라 기성사실로 정의하고 있는가. 명확히 그렇지만은 않다. 종구가 외지인을 산에서 던져버리는 후반 장면에 이르기까지 ‘야생 버섯’ 때문이라는 관점이 등장한다. 뉴스에서 ‘야생 독버섯-건강식품 유통’이라는 과학적 관점이 소문의 관점 못지않게 일관성을 부여받는다. 하지만 더 이상 종구에게는 객관적이고도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하다. 이미 ‘파다한 소문’은 구체적 해석의 살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사건,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르고 혼자만 살아남았던 여자는 그 스스로 목을 달고 죽는다. 전날 파출소 문 앞에 나체로 서있던 여자와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되면서 ‘일본놈에게 당했다’는 소문은 실제 종구가 본 일과 겹쳐져 이제 하나의 연관성을 갖게 된다. 외지인에게 추행을 당했다는 소문은 실제 나체로 돌아다니는 모습을 본 종구의 경험과 결합하여 화병이 생겨 알몸으로 돌아다닌 것이라는 상황 인식을 만들어낸다. 여기에 그 여자의 몸에 두드러기가 있었다는 정육점 부인의 증언까지 덧붙여지는데 두드러기와 버섯의 연관성을 더 이상 인과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종구다. 그렇게 소문을 추적하는 과정과 현실의 경험들이 동시에 교차편집으로 평행 전개되면서 더욱 관객들을 혼란케 하고 있다. 각기의 쇼트들이 담고 있는 의미를 모두 소화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음으로써 나홍진은 종구의 내면 심리 상태 전달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것이다.


  그 결과 관객은 자연스레 종구의 입장에 동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학적 관점과 소문의 관점을 모두 보여주면서도 나홍진은 소문의 관점에 휩싸인 종구의 처지만을 집중하여 보여주고 있다. 죽은 사람들이 버섯을 먹는 장면이나 집에 말인 버섯이 나오는 증거 장면 등은 ‘곡성’에 등장하지 않는다. 허나 이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홍진은 한 인물에게 객관적 현실인식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 또 그 안에서 얼마만큼 나약하고도 집착스런 광기를 널뛰듯이 보여줄 수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제 소문은 그 스스로 자율성을 갖게 되었다. 종구에게 들러붙은 소문은 하나의 틀과 같다. 이전에 직접 보았던 동일한 대상이 이제는 틀을 통해 보이게 된다. 스크린과 같은 창을 통해 어떤 현실을 바라볼 때 그 자체의 외양이 변한다는 슬라보예 지젝의 말처럼, 종구에게 외지인이라는 타자는 이제 단순한 이방인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동일한 대상이 이제 소문을 통해서만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이때 일종의 ‘과잉-효과’가 생성되어 종구는 자꾸만 소문을 추적하기에 여념 없는 모습이다. 그 스스로 발이 달린 소문은 여기 저기 자취를 남기고, 추적하고 찾게 되면 찾아지는 사건의 증거물들로 쌓여간다. 그렇게 소문은 거대한 돌처럼 움직이려야 움직일 수 없는 신념의 돌이 되었다.


  신앙? 아니요, 이건 본능의 문제입니다


  ‘곡성’은 다양한 신학적 해석을 함의하고 있는 영화이다. 프롤로그부터 그 맞짝인 부제와 외지인의 독대 신뿐 아니라 종구가 소문에 휩싸여 확신에 이르는 과정 곳곳에 소품적으로 신학적 해석 요소가 산재해 있다. 첫 번째 사건이 일어난 현장에서 발견된 무언인가가 태어난 흔적이 있는 장소가 돼지우리가 있는 집이며 돼지는 퇴마의식 도구로 활용된다는 점을 떠올리게 한다.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때, 마을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굿을 하는 장면들 역시 자주 등장하면서 크게는 믿음이라는 범주 아래 포괄될 수 있는 소재적 역할을 하고 있다. 무명의 존재적 특성을 파악하는 일이나 신부와 부제가 크고 작게 작중 인물로 등장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 일 터이다. 한마디로 ‘곡성’은 기독교적 인물인 부제 및 신부, 토속 신앙적 인물이라 할 수 있는 무명, 이에 대척되는 이방의 낯선 신(악의 형상)의 다양한 종교적 색채를 바탕으로 한 본질적인 믿음의 문제에 대해 질문하고 있는 영화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신학적?종교적 해석 요소가 많다 하여, 이를 종교적 색채의 작품이라 한정지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 정확히 선과 악의 대결 구도로 분리할 수 있는 틈을 나홍진은 촘촘하게 메꾸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도 종교적 우위에 세울 수 없고 누구도 선이라, 악이라 단정할 만큼의 선악을 보여주지 않는다. 아니, 너무 많이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 가운데 외지인이 종구 일행을 피해 벼랑 아래 몸을 숨겨 울음을 삼키는 신, 일광이 종구 앞에서 옷을 갈아입을 때 종구의 환상 속 외지인의 차림과 같은 옷을 입고 있는 신, 무명이 사건에 놓인 사람들의 소지품을 착용한 채 종구 앞에 나타나는 신 등은 한 면만 부각되어 나타나지 않고 다양한 추측을 유발시키는 작용을 한다.


  그렇다면 ‘곡성’을 신앙의 범주에서 확장시켜 줄 다른 단서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이에 대한 해답은 인물을 추동케 하는 추동력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려는 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외지인이 마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어떤 연관이 있다는 확신이 들게 되면서 종구의 믿음은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일찍이 니체는 확신이 진리의 적이라는 생각을 주장했는데, 확신이 생기는 과정에서 ‘거짓’이 섞이는 일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들에게 편리한 것만 확신하는 경향이 있고 또 이런 확신이 도대체 거짓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물었던 것처럼 나홍진 역시 같은 질문과 대답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효진이 사경을 헤매자 부제의 조언을 듣고 종구는 신부를 찾는다. 외지인에 대한 소문은 이미 신부도 익히 들었다면서 다른 소문의 외지인의 형상을 전해준다. 유명한 대학 교수니, 스님이니, 무시무시한 소문들까지 들었지만 이것은 모두 ‘그냥 소문’이지 않느냐는 신부의 진단에 ‘아니다’는 단호한 태도를 종구는 보인다. 이때 신부는 ‘확신을 하시네요’라는 말로 일축하며, 어떻게 직접 보지도 않고 확신하느냐며 종구를 타박한다. 어떤 현상을 믿고 믿지 않는 문제는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야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는 전제를 가져온다. ‘곡성’은 다양한 신앙의 요소들을 배경으로 하여 믿음-확신이 발생하는 지점과 그 파급효과를 극단적으로 밀고나가고 있다.


  확신에 이르는 과정과 그 결과를 추적하다 보면 하나의 공통된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다. 바로 ‘비-이미지’인데, 영화에서 비는 다섯 번에 걸쳐 내린다. 첫 번째로 조씨네 부부 사건이 발생하여 현장 조사에 나간 장면과 같은 날로 이어지는 종구와 성복의 파출소 장면에서 비가 내린다. 두 번째는 소문의 시발점이 되는 건강원 주인과 함께 외지인 집을 향해 가는 길에서 잠깐의 폭우로 내린다. 세 번째, 부제를 동반한 외지인 집의 방문에서 주인이 없는 차에 다양한 현장을 파악하고, 성복은 효진의 물건으로 짐작되는 실내화를 몰래 가지고 내려오는데 이때 역시 비가 내린다. 네 번째, 외지인을 죽이기 위해 마을 사람들을 모아 외지인 집을 다시 찾아가 추격전을 벌이다 놓치고 돌아오는 도중 우연히 차에 외지인이 떨어진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파악하기보다는 확실히 죽이는 방향으로 종구는 산에서 그를 던지는데 이때도 비가 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는 효진이가 가족들을 모두 죽인 뒤 무명이 집에 덫으로 쳐 놓은 꽃이 마르는 장면인데 이때 역시 비가 온다. 비-이미지는 하나의 인과성을 갖고 있다. 다섯 번의 비-장면은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인과적 구성을 갖고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첫째, 종구는 소문을 접한다. 둘째, 소문의 근원지를 찾아간다. 셋째, 의심이 생기고 조사하는 과정에서 확신이 확산된다. 넷째, 죽이기로 결심하고 죽였다(또는 죽였다고 오인한다), 다섯 째, 그 결과 인과응보 격으로 파멸에 이르게 된다.


  믿음의 메커니즘, 즉 믿음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또 유지하게 하는 요인은 무엇인지, 그 가운데 어떤 잘못들이 영향 관계에 있는지를 ‘곡성’은 확신에 찬 사람이 빠질 수 있는 오류를 통해 보여준다. 하여 ‘곡성’은 신앙의 범주에 국한하여 접근하기 보다는 외려 본능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안티 크리스트’에서 니체는 신의 비판이 아닌 종교적 관점을 비판하면서 그리스도교를 추동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본능적인 적대에서 그 요소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을 지배했던 것은 ‘신앙’에도 불구하고 실은 본능에 불과하며, 신앙 뒤에는 항상 본능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특정한 본능들이 신앙(믿음과 확신)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기 위함이며 사람들은 입으로는 항상 신앙을 이야기하면서도 사실은 항상 본능대로 행동해 왔다는 것인데, 이 본능이란 게 정확히 ‘곡성’에서 보여주는 세계와도 연결된다. 곧 스스로 세운 믿음의 체계를 완성하고자 하는 자는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해 확신이 필요하다. 그러나 확신은 도리어 그 대상에 이용당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다. 종구가 소문을, 무명을, 일광을 통해서 만들어낸 확신은 이제 그 누구의 말도 믿을 수 없는 상황으로 번지는 것을 막지 못한다. 그리하여 믿음보다는 그 뒤에 더 강한 힘처럼 본능이 작용하고 있음을, 본능적인 적대를 바탕으로 하여서만 그 당위성이 형성되는 극렬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신(악마)은 구체성 속에 자리 한다


  만약 의심하지 않았더라면, 소문의 진위 여부를 추적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과학적 접근을 통해서 파헤치고자 시도했다면 종구는 파멸하지 않게 되었을까? ‘곡성’은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현상의 구체적 현현에 주목하고 있다. 때문에 종구의 의심이 큰 줄기로 자리 잡아 영화의 방향을 이어나가지만, 가능태를 지닌 모든 의심과 현혹에 대해서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이런 장면들이다. 먼저 종구가 낯선 외지인에 대해 갖는 의심은 반복되는 마을의 악재와 분명하게 해소되지 못하는 현실 인식에서부터 시작한다. 현실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일들이 자꾸 일어나게 되면 그것은 현실 속에 환상적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 반복되는 가위눌림은 해소되지 못한 궁금증에 대한 대답처럼 자꾸만 나타난다. 외지인에 대척되는 무명 역시 정확한 성격화를 부여받지 못한 채 일관되고 있는 것도 의심은 다발적으로 나타나 종구에게 작용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무명은 외지인의 형상에 대척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처럼 구도 잡고 있다. 시종일관 종구 곁에서 사건 방향의 갈피를 잡게끔 조언하는 존재다. 언뜻 보면 외지인이 마을에서 벌이는 기이한 사건들을 막기 위한 토속 신앙의 수호적 인물로도 생각될 수 있다. 그런데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그녀의 실존성은 점점 희미한 모습이다. 실제 존재하는 사람인지 미혹을 불러일으키는 (귀)신의 형상인지 의문점을 남긴다.


  그 이름에서부터 ‘무명’은 ‘곡성’에서의 성격화가 분명히 드러난다. 이름이 없거나 이름을 알 수 없다는 일차원적 해석을 바탕으로만 하고 보더라도, 무명(無名)은 ‘이름’으로 유형화할 수 있는 정확한 본의를 갖지 못한 인물이다. 한편 불교에서 무명(無明)이란 진리에 통탈하지 못한 마음의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종구에게 미혹을 불러일으키는 무명의 존재는 처음부터 사건 현장을 ‘봤다’고 현혹하면서, 그의 판단에 기준점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죽어가거나 죽은 사람들, 박춘배와 효진, 술집여자의 소지품을 착용하고 종구의 마음에 새로운 확신을 만들어 내는 것도 종구가 직접 본 사람들이며 그만 알고 있는 소지품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무명은 실제 존재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종구가 만들어낸 허상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실존인물인지, 허상인지를 명확히 포착할 수 없게끔 표상되고 있는 무명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우리가 선이라 확신하는 대상에 대해 과연 그 믿음이 정확한 것인지, 또 끝까지 그 확신을 고수할 수 있느냐는 물음이다. 확신의 반대편이 불신이 아니라 맹신은 아닐까? 하는 물음말이다.


  일광의 역할 역시 모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일광은 마을에 오기 전부터 이미 외지인과 한 패였던 것인가. ‘곡성’의 결말부에 파멸에 이른 종구네 일가에 그들의 사진을 찍기 위해 방문한 일광의 모습을 나타난다. 익히 외지인이 죽은(죽을) 사람의 사진을 찍었듯이 익숙하고도 자연스러운 절차로 일광 역시 그를 대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관객은 자연스레 이 신을 보게 되면서 처음부터 일광이 마을에 출현할 때부터 외지인의 하수인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라 종합적 판단을 내리게 된다. 종구 앞에서 옷을 갈아입을 때 보았던 꿈(환상) 속의 외지인의 형상과 같은 차림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면서 결국 같은 무리였다고 판단할 여지를 만들고 있다. 그런데 일광 역시 처음부터가 아니라 ‘무언가로부터’ 현혹되어 변화된 지점이 있다. 외지인에게 살을 날리기 위한 굿을 하는 신과 일광의 종구 일가의 사진 촬영 장면은 결과적으로 그 스스로가 살을 맞은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드는 지점이다. 그 자신이 믿는 신(혹은 악)의 형상은 자신 안에서 나오게 된다. 무명과의 만남 이후에 일광은 겁에 질려 마을을 떠나고자 채비를 하는데 신방의 제구와 벽화들은 자기 자신의 믿음의 영역 안에서 만큼만 기괴하고도 충격을 주고 있다. 그가 무속인이기 때문에 그 스스로가 만든 믿음의 영역 범위 안에서 ‘누군가 나를 공격하고 방해 한다’는 느낌이 표현되는 것이다. 떠나려는 일광을 방해하는 새떼의 공격 역시 그 스스로 만들어낸 믿음의 범주 안에서 해석할 수 있는 결과들은 아닐까. 종구 일행이 외지인을 산에서 던져버렸을 때 일광은 ‘이 버럭지 같은 놈이 미끼를 삼켜버렸고만’이라며 자조적 독백을 보일 때까지도 일광은 외지인의 형상에 완전히 포섭된 인물로 정의할 수 없다. 미끼를 삼켰다는 것은 결국 ‘걸려들었다’는 사실로, 미끼를 던진 이와는 관계없이 덥석 삼켜 걸려든 대상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다. 그 스스로가 ‘선택’하여 걸려든 결과라는 말이다.


  의심과 확신을 품는 일,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잘못된 판단이 개입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곡성’은 신(혹은 악)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하고 있다. 악은 항상 자유 선택에 해당되는 것이며, 이를 전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결정이 깃들여 있는 상황 판단에서 악이 형성된다고 슬라보예 지젝이 말할 때, ‘선택’하는 개인의 의지에 방점이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즉 자유의사로 우리가 대상을 판단하고 인식하는 선택 과정에서 그 스스로 악의 형상을 만들어 낼 수 있으며 그 모든 책임 역시 본인의 선택에 따른 결과이므로 그 내부에서 만들어진 작용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악을 규정하는 일은 구체성을 획득하게 된다. 외부 요인들은 그저 외부 요인일 뿐, 무언가를 선택하고 결정짓는 것은 모두 내 안에서 이루어진다. 하여 악은 철저하게 구체성 속에서, 스스로가 만든 현상에 대한 이해와 선택에서 만들어지게 된다.


  오로지 너 자신만이 스스로에 대한 책임이 있다


  종합적으로 ‘곡성’은 다양한 종교적 색채와 기괴한 이미지들을 포진시켜 놓고 있지만 모든 일에는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라 네 스스로가 선택하여 만든 결과들이라는 세계관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그 선택이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말이다. 이러한 세계관을 금욕주의적 사제의 형상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알렌카 주판치치는 니체에 대한 해석 가운데 금욕주의적 사제의 형상을 찾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모든 고통 받는 자는 그의 고통의 원인을 찾게 되고 대개 그 원인을 바깥에서 찾게 된다. 하지만 너 자신이 이러한 상황을 만든 그 누군가(바깥에서 찾는 원인)이며, 오로지 자신이야말로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곡성’의 부제-이삼이 외지인이 ‘누구’인지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그를 찾아가 대면하는 신은 정확히 금욕주의적 사제의 형상과 맞아 떨어지는 장면이다.


  ‘낫’을 들고 외지인을 찾게 되면서 이미 이삼은 그 스스로 확신과 결심을 마친 상태이다. 외지인에게 ‘정체가 무엇’이냐 묻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이미 너의 내부에 있다는 식이다. ‘넌 의심을 확인하러 온 거야’라며 도리어 ‘뭐라 생각하느냐’고 그가 물었을 때, ‘악마(하쿠마)’라 대답하는 그의 태도에서 우리는 철저하게 그 스스로 만든 질문에 갇혀 있는 이삼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삼 역시 초반에 보여주던 이성적인 태도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면서 종구가 저지른 실수들을 병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동시에 전개되는 무명과 종구의 대화 장면이 배치되어 편집된 것 역시 무명이 종구에게 하는 말 ‘남을 의심하고, 죽이려’하는 마음이 종구 뿐 아니라 이삼에게도 해당되는 말이기 때문일 테다. 그렇게 ‘곡성’은 인간 스스로가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선택들이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그 자신 안에서 만들어지고 있음을 끈질기게 증명한다.




  <당선소감>


   잃어버린 다짐을 찾아봐야겠다


  5년 동안 매주 서울과 군산을 이동했다. 학교에 일이 있을 때는 한 주에 두세 번도 왕복했다. 스스로 선택한 일이라며 지칠 때마다 마음을 다잡곤 하지만, 5년이란 시간은 내게 타성을 만들어 이제는 허약한 정신상태를 극복하기 어렵다고 스스로를 진단하곤 한다. 길 위에서 흘려보내고 잃어버린 다짐들은 어디쯤 있을까. 언제인가부터는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아예 약속을 하지 않으려 타협하는 나를 마주하게 되었다. 타성에 젖은 나를 질책이라도 하는 듯, 당선 소식이 들려왔다.

 시작을 했으면 끝을 봐야지 않겠는가. 이제라도 부랴부랴 잃어버렸던 다짐과 약속을 찾아보고 살펴봐 주어야겠다. 그뿐이랴. 새로운 다짐을, 새로운 약속을, 새로운 각오를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만들 준비가 되었다. 자, 다시 서울행 버스를 탈 준비를 하자.  

 부모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해 본 경험이 없다. 감사할 일이 없었다는 게 아니라 뻣뻣한 내 표현 능력 탓일 것이다. 제멋대로 결단하고 항상 일방 통보만 해오던 딸을 묵묵히 믿어 주시고 지켜봐 주시는 부모님께 이 자릴 빌려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  


  ● 1985년 전북 군산 출생.

  ●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 수료.


 

  <심사평>


  안정적 문장력으로 치밀한 논리 펼쳐 


  응모작 중 ‘곡성’을 다룬 비평이 가장 많았다. ‘부산행’과 ‘아가씨’를 다룬 글이 차례로 뒤를 이었다. 비평적 관점도 다양했다. ‘아가씨’를 근대성의 관점에서 분석한 글은 박찬욱의 영화 스타일을 ‘오페라’에 비유해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한정된 지면에 너무 많은 예시를 끌어들여 초점이 빗나가고 말았다. ‘부산행’을 다룬 글 중 ‘동일성의 자기복제와 현대성의 파국’이라는 화두로 논의를 전개한 글은 좀비영화의 현황을 상세하게 분석해 주목할 만했다. 하지만 논문 식의 전개 방식이 아쉬움을 남겼다. 

 ‘곡성’은 영화 자체가 열린 구조여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염세주의라는 테마로 해당 작품을 분석한 글은 ‘곡성’이 기존 장르영화의 관습을 한참 벗어났는데도 관객을 사로잡은 이유를 설득력 있게 분석했다. 단정적인 문장이 흠이랄까. ‘곡성’을 신학적 관점에서 해석한 글도 두 편 있었다. 그중 ‘오인된 세계와 본능의 주체’라는 화두로 논의를 전개한 글을 최종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이 글은 극중 주인공이 파멸하는 것은 외부의 불가해한 힘(악마)이 아니라 주체의 본능에서 비롯된 절대적 확신(즉 맹신) 때문이었음을 치밀하고 차분한 논리로 입증하고 있다. 문장도 안정적이다. 문장력은 좋은 평론가의 필수 요소다.

심사위원 : 김시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