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당선작>

 

   비판의 상실: 탈정치 사회의 전시가 아파트를 장소화하는 전략 / 소현

 

1. 아파트와 함께하기

아파트는 보통 다른 곳을 보게 한다. ‘내 집 마련’의 꿈이나 더 넓고 비싼 집 같은 것들 말이다. 사람들은 지금 여기에 집중할 수 없어서 좀처럼 집과 친해지지 못한다. 그렇지만 인간이 계속 깃들어 살다 보면 이곳에도 삶의 자취는 밴다. 거주자의 취향과 생활 패턴에 맞추어 물건이 쌓였다 사라지기도하고 여기저기 보수되다가 집의 구조가 바뀌기도 한다. 원치 않더라도 이웃들과 이런저런 관계도 형성하게 되며, 그렇게 얽히고설킨 기억들이 역사성을 띠는 경우도 더러 생긴다. 오래된 아파트는 인간과 도시 공간의 화해 가능성을 보여준다.

재개발은 그 가능성을 주기적으로 지우고 모든 걸 원점으로 되돌린다. 기술은 발전했다고 하는데 백 년 이상 버티는 집은 좀처럼 지어지지 않는다. 자본의 흐름을 위해서 때가 되면 새로운 건물에 자리를 내어주어야 하는 까닭이다. 재개발을 주제로 한 전시들은 오래된 아파트에서 사라지기 직전의 인간적 자취를 움켜쥐려 해왔다. 하지만 미술의 힘은 자본의 흐름을 바꿀 정도로 세지는 않아서 재개발이 시작되면 인간적 자취는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간다. 그렇지만 한 번이라도 모래를 움켜쥐어 보았던 손은 그 느낌을 기억한다. 미술이 궁극적으로 지향해왔던 지점은 바로 그 느낌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대 사회의 대표적 거주 공간인 아파트의 비장소성에 대응하는 전시의 전략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해왔다. 뒤에서 다시 자세히 다룰 테지만 비장소는 일반적인 장소와는 다르다. 장소는 인간과 그 공동체가 특정한 물리적 공간을 깊이 알아가고 그곳에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구축된다.[1] 반면 비장소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에 단순한 공간으로 볼 수는 없지만, 정체성·관계·역사가 형성될 수 없는 자리이다.[2] 1998년 결성된 성남 프로젝트의 전시들[3]은 (아파트 자체를 중심 주제로 다루지는 않았지만) 현장조사를 기반으로 재개발과 집의 문제를 다루는 전시들의 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 성남 프로젝트는 1960년대 신도시 건설을 위해 정부가 판자촌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켰던 성남을 무대로 국가 주도 도시 계획의 문제점을 공론화했다.[4] 또 주민들이 삶의 자리에서 필요에 의해 제작한 오브제들 ― 차양막, 증축된 건물 등 ― 을 ‘주민 미술’이라 명하고 이를 도시 장소화의 전략으로제시하기도 했다.[5] 성남 프로젝트는 도시 계획의 폭력성을 계급 정치의 맥락에서 접근하면서 도시 공간에 비판적으로 개입하였다.

2009년에 결성된 옥인 콜렉티브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견지하지만, 계급보다는 개인의 차원에서 도시 개발 문제에 접근하려고 했다. 2009년 7월부터 2010년 11월까지 진행된 <옥인 아파트 프로젝트>는 엄숙했던 정치 참여를 자유롭고 재미난 축제로 뒤바꾸며 즐거움에 기반한 연대를 모색했다. 참여자들은 다 같이 아파트 내외부 공간을 투어하며 친밀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콘서트와 불꽃놀이 등을 통해 도시 공간에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놀이와 액티비즘을 결합했다. 옥인아파트 철거 직전에 열린 전시 ≪옥인동 오픈 사이트≫(2010. 3. 7, 옥인아파트)에서 참여 작가들은 재개발을 바라보는 각자의 시각을 관람객과 공유하면서 도시 공간의 명암을 입체적으로 그려냈다.

최근 개최된 아파트 재개발 전시에서도 개인주의의 맥은 계속 이어진다. 2010년대 후반에 이르면 계급 정치적 색채는 매우 옅어지는 한편, 개인주의적 색채는 한층 더 진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코로나19 사태를 전후로 하여 열린 ≪투명함을 닫는 일과 어두움을 여는 일≫(2018. 4. 27~6. 28)과 ≪이주임박≫(2020. 7.10~7. 19)을 살펴보려고 한다. 나는 두 전시가 비장소인 아파트를 장소화하는 전략을 비교함으로써 탈정치 사회의 전시들이 어떤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짚어볼 예정이다. 이를 통해 장소 복원을 위해 미술이 고려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선택지를 제안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2. 강남아파트: 도시의 리듬을 파헤치는 고고학적 여정

≪투명함을 닫는 일과 어두움을 여는 일≫(이하 ≪투명함≫)은 도시적 ‘쿨함’의 기조를 보여준다. 참여 작가들은 기획자의 지휘 아래 유기적으로 얽혀 한 가지 주제를 향해 나아가기보다는 각자의 호실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묵묵하게 풀어나간다. 일견 서로에게 무심해 보이는 느슨한 유대는 아파트를 닮았다. 전시는 또한 재개발에 맞서 투쟁하기보다는 상황과 거리를 유지한 채 미술이 할 수 있는 일에 차분히 집중하려 한다. 여기서 ‘미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 일상의 제스처가 반복되며 남긴 흔적 위에 작가들의 비일상적이고 함축적인 행위들이 덧씌워져 과거의 시간을 현재가 가로지르는 (혹은 간섭하는) 상황을 시각화”[6]함으로써 몸이 경험하는 도시 생활의 리듬을 탐색하는 것이다. 탐색은 거의 고고학적으로 이루어진다. 참여 작가들은 강남아파트라는 현장에 쌓인 시간의 지층 속에서 기억의 파편들을 발굴하며 도시의 시공간을 탐사한다.

전아라는 재개발을 앞둔 아파트에 각인된 도시적 삶의 패턴과 정주할 수 없는 현대인의 삶에서 새어 나오는 불안을 연결한다. 그는 1863호에 <Emergency Shelter>(2018)를 꾸리고 이곳에서 임시 거주자로서 일상을 엮어내고자 했다. 여기에 자신의 살림살이를 옮겨놓고 그 물건들을 사용함으로써 일상의 리듬을 연주한 것이다. 가져다 놓은 물건 중에는 화분이나 어항처럼 정주의 느낌을 주는 것들도 있지만, 텐트나 아직 풀지 않는 (혹은 곧 옮길) 상자 더미처럼 이주의 느낌을 주는 것들도 있다. 전자가 곧 사라질 집을 위태롭게 자기 장소화 할 때 후자는 이곳이 결코 정주의 장소가 될 수 없다고 반박한다. 두 축의 물건들이 대립하며 만드는 위태로운 불협화음 속에서 불안이 배어난다. 그리고 그 불안은 다시 강남아파트의 리듬, 즉 불안정한 주거 환경에서 구축된 도시생활의 리듬과 연동되며 극대화된다.

마르크 오제는 『비장소』(1992)에서 두 가지 장소를 대비시켰다. 하나는 전통적인 공동체가 형성되는 인류학적 장소다. 탄생과 동시에 사람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하고 그들 간의 관계를 만들며 그 관계를 토대로 역사를 형성하는 곳이다. 오제는 초근대적 사회가 도래하며 인류학적 장소가 수명을 다했다고 주장했다. 초근대적 사회는 세 가지 특징을 보인다. 첫째, 의미가 부여된 사건들이 너무 많아져서 역설적으로 어떤 사건도 특별한 의미를 갖지 못한다. 방대한 정보량과 세계 각국의 상호의존성에서 기인한 현상이다.[7] 둘째, 사람들이 자기 영역으로 여기는 공간도 지나치게 커진다. 고도로 발전한 이동 수단으로 세계 어디라도 수 시간 내에 갈 수 있고, 인터넷 등의 매체를 경유하여 먼 나라의 이미지들이 일상의 풍경과 뒤섞이는 까닭이다.[8] 셋째, 개인주의의 발달로 사람들은 공동의 세계보다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구성하려고 한다. 그들은 정보를 스스로 해석하고 거기에 개인적인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한다.[9] 한마디로 공동체에 기반한 안정감이 사라진 셈이다. 오제가 제시한 또 하나의 장소인 비장소는 초근대적 사회의 부산물이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자신의 배경과는 무관하게 단일한 정체성 ― 승객, 고객, 관람객 등 ― 을 부여받는다. 그들은 이곳에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를 끊임없이 요구받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텍스트의 지속적인 침입 ― “마스크를 착용하세요”, “나가는 곳” 등 ― 으로 컨트롤 된다. 비장소에서는 정체성도 관계도 역사도 형성될 수 없다. 계약으로 맺어진 익명의 존재들이 서로를 차갑게 스쳐 지나갈 뿐이다.

사람은 인류학적 장소에 정주하며 그곳을 근거로 시공간 속에 위치 지어진다. 하지만 끝없는 이주 상태에 놓인 사람은 인류학적 장소를 경험할 수 없다. 어딜 가나 이어지고 확장하는 비장소를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집의 느낌 자체를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로 이사 가게 될지 모르는 불안정한 상태도 집과 관계 맺는 걸 가로막는다. 전아라가 그리는 도시 생활자는 능동적으로 불안을 선택한 노마드도 아니다. 이 작업에서는 어딘가에 자리 잡고 소속되어 불안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더 강하게 드러난다. 그는 1863호에 자기 물건을 배치하고 몇 가지 일상적 행위를 수행함으로써 자기 장소화를 시도하지만, 불안은 쉬이 가시지 않는다. 삶의 조건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의도적인 실패는 오히려 비장소의 완강함을 부각한다.

<Emergency Shelter>는 외부보다는 내부를 향하는 작업이다. 불안에 침잠해 있는 동안에는 타자를 바라볼 여유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불안한 사람들은 내면에 집중하게 되면서 주변 환경으로부터 단절된다. 특히 상품으로 거래되는 아파트는 ‘소유권’이라는 명목으로 철저하게 개인에게 귀속됨으로써 도시적 내향성을 부추긴다. 거주민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성가신 이웃을 배제하고 외부 세계로부터 단절될 수 있는 구조다. 그 단절이 신자유주의적 초개인주의의 토대다. 신자유주의적 초개인주의는 시민들이 사회와의 연결을 거부하고 자아의 기획에 극도로 몰두하는 현상을 일컫는다.[10] 초개인주의자들은 ‘자기 관리’라는 미명하에 ‘자기 착취’를 일삼게 된다. 이미 마케팅 수단이 되어버린 ‘자기애’는 사람들이 상품 구매 통해 자아를 표출하게 유도하면서 자아도취를 부추긴다. 사람들은 자기 삶과 무관하다고 여겨지는 타자의 문제에는 극도로 무관심해진다. 아파트는 초개인주의를 부추기며 공동체를 폐허로 만드는 데 일조한다.

김이박은 인류학적 장소화를 시도하며 공동체의 복원 가능성을 탐색한다. 그는 1806호에 살았던 가족과 아파트 앞에 방치됐던 식물들 그리고 자신의 서사를 한 데 엮으며 새로운 관계망을 구축하려 했다. <강남아파트 – 아카이브>(2018)는 발굴 행위를 통해 이주와 동시에 사라졌을지도 모를 가족의 기억을 복원한 결과물이다. 김이박은 가족이 남기고 간 사물들 ― 편지, 라면 봉지 등 ― 을 수집하고 액자에 넣어 전시했다. 누군가의 사적인 기억을 관객에게 직접 노출하지 않으려고 액자 처리를 선택했다고 하는데,[11] 이는 한편으로 박물관의 유물 전시 방식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감춰진 편지 내용은 리본만으로 이루어진 기념 화환 <수많던 축하와 위로>(2018)에 부분적으로 인용되었다. 리본에는 편지에서 발췌한 사적인 메시지뿐만 아니라 부동산 개발 사업의 문맥에서 오갈 법한 형식적인 축하 문구들과 작가가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과 관람객에게 개인적으로 전하고 싶었던 말도 슬쩍 섞여 있다. 하나의 화환 안에서 과거와 현재가, 일상의 작은 리듬과 도시의 거대한 리듬이 한 데 뒤엉키며 충돌한다.

이렇게 구축된 인간의 서사는 다시 식물의 서사와 얽힌다. <이사하는 정원-강남아파트>(2018)는 화단에 남겨진 식물들을 집 안으로 초대해 방 한 칸을 내어주고, 부서진 콘크리트 조각을 겹겹이 쌓아 만든 화분 세 개에 안착시킨 작업이다. 한때는 무관심 속에 방치되었을 식물들이 이곳에서 재배용 조명 빛을 받으며 보살핌을 받고 있다. 도시에서 식물은 보통 길가의 잡초로 방치되거나 인테리어용으로 쉽게 소비되고 버려지곤 한다. 반면 1806호의 식물은 차가운 콘크리트를 뚫고 나와 푸른빛을 뽐내며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는 듯하다. 이 작업은 무자비한 도시 계획의 틈새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남는 식물의 생명력을 보여주면서도, 경제 발전 이외에 다른 것들을 고려하기 시작할 때 아파트의 장소적 문맥 역시 바뀔 수 있다는 전망을 제시한다. 아파트가 타자에게 열린 공간이 될 수 있다면 주민의 삶 역시 변하게 될 것이다. 관람객은 여기서 작은 존재들에게 집중하는 섬세함과 이들을 돌보려는 노력이 이루어낼 수 있는 도시 공간의 발전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관계망의 중심에는 김이박이라는 한 예술가가 있다. 1806호에 구현된 상생하는 공동체는 작가가 자신의 작업 여정을 통해 여러 차례 제안해왔던 이미지다. 그는 강남아파트에서의 작업이 특히 <노심초사>(2017) 연작과 일정 부분 연결되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언급했다. <노심초사>는 지지대를 세운 식물의 모습을 작가의 아버지가 남긴 편지 위에 겹쳐 그린 회화 작업이다. 김이박은 이 연작을 시작한 계기가 아픈 식물들을 돌보는 자신의 모습과 재수 시절 자신을 바라보던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 보였던 순간이라고 설명한다.[12] 1806호에서도 서로 다른 존재들이 뒤얽혀가며 삶을 일구는 모습이 겹겹이 쌓인 시간의 레이어를 통해 구현된다. 가장 오래된 과거의 층에는 강남아파트가 건축되던 도시 개발의 층이 있다. 그 위에 어떤 가족과 식물이 이곳에서 생활했던 시간의 층이 쌓인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어디론가 떠나버렸고 아파트는 폐허가 되었다. 이에 김이박은 과거의 흔적을 건져 올려 현재의 시점으로 끌어온다. 현재의 층에서 축하와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은 작가의 시간과 이 모든 만남을 한꺼번에 종합하는 관객의 시간이 만난다. 도시의 리듬 속에서 과거와 현재가 교차한다.

1806호에서는 다양한 존재들이 같은 집을 공유하며 일시적으로 같은 정체성을 나눠 가진다: “집단의 기원은 종종 다양하지만 그 기반을 이루고 이들을 모이게 하며 이들을 하나로 묶는 것이 바로 장소의동일성이다”.[13]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이 집이 인류학적 장소로 기능할 수는 없다. 이곳에서는 더 이상 삶이 이루어지지 않는 까닭이다. 따라서 이곳은 필연적으로 ‘기억의 장소’가 된다. 피에르 노라는 「기억과역사 사이에서」(1989)에서 현대인은 더는 공동체를 통해 자연스럽게 기억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기억해야 할 사건이 너무 많아진 데다가 예전에는 상이했던 사회들이 이제는 다 비슷비슷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억을 잃은 사람들은 기억에 더욱 집착하게 된다.[14] 기념비나 박물관, 방대한 아카이브 같은 것들이 이러한 경향을 방증한다. 1806호에서도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것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며 망각 속으로 순순히 사라지기를 거부하고 있다. 하지만 김이박은 기억의 상실 자체를 은폐하려 하지는 않는다. 그는 다만 망각이 진행되고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는 주변부의 역사를 생성코자 한다.

≪투명함≫은 아파트라는 공간이 어떻게 팽창하는 도시의 중심축으로 기능해왔는지 보여준다. 도시 생활자들은 자본의 흐름을 따라 ― 때로는 국경도 초월하여 ― 이곳저곳으로 이사 다니며 생활 리듬을 구축한다. 아파트는 그 흐름 속에서 일종의 숙소로 기능하며 언제 어디서나 안전하고도 균질한 거처가 되어 준다. 사람들에게 소유자로서의 배타적 권리를 가르치는 아파트 단지는 외부 세계의 노이즈를 차단하고 거주민만을 위한 유토피아로 기능코자 한다. 전시의 전략은 자본이 생산한 이주의 흐름을 강남아파트라는 현장을 토대로 포착하는 것이었다. 전시는 이를 위해 아파트를 둘러싼 겹겹의 시공간 층에서 흔적을 수집하고 분석과 해석을 통해 도시인의 생활 리듬을 재현했다. 그리고 이주의 흐름 속에서 상실되는 것들을 포착함으로써 아파트를 장소로서의 집으로 재맥락화하려고 했다. 강남아파트라는 매개를 경유하여 이주민, 참여 작가, 기획자, 관람객 등은 서로에게 느슨하게 연결되면서 일시적인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 ≪투명함≫은 아파트도 인류학적 장소로 기능할 수 있다는 전망을 보여주었다.


3. 올림픽타운: 대지로녹아드는 진혼곡

코로나19 사태 이후에 열린 ≪이주임박≫은 앞선 전시와 사뭇 다른 분위기를 띤다. ≪투명함≫은 아직 낙관적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를테면 전아라는 불안한 거주 환경에서도 자기 장소화의 의지를 보여주었고, 김이박은 재개발의 틈바귀에서 가차 없이 지워지는 것들을 기억의 자장 안에 되돌려 놓고 돌봄에 기초한 새로운 공동체를 꿈꿨다. 반면 ≪이주임박≫은 무언가를 바꾸어보려 하지 않는다. 적극적인 개입보다는 관조에 가까운 태도로 “[..] 이주가 어떠한 강제성과 조직성을 이면에 두고 이루어져 왔다는 것, 그것이 일시적이지 않으며 뿌리 깊은 곳부터 출발한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머물거나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이 증거처럼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15] 원치 않는 이주를 피할 길은 없다고 판단하게 된 사람이 집의 마지막을 응시하는 듯한 느낌이다. 전시는 격양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기 이야기를 하기로 결정한 주민의 자세로 올림픽타운과 담담하면서도 절절한 작별 인사를 나눈다.

고기린의 <무제>(2020)는 탄탈로스의 지옥 같다. 이 작업은 주 전시 공간인 올림픽타운 106동 104호의 방 두 개 중 하나에 설치되어 있다. 방 안에 들어가면 관람객은 제일 먼저 장판이 깔린 벽면을 마주하게 된다. 방바닥처럼 기능하는 그 벽면에는 여러 조각으로 쪼개진 테이블과 의자, 책장이 놓여 있다. 천장에는 방문이, 바닥에는 전신 거울이 붙어 있고, 거울 옆에는 뒤틀린 방을 바라볼 수 있는 의자가 하나 놓여있다. 관객은 방 안으로 들어갈 수 없기에 그저 밖에서 바라만 볼 수 있을 뿐이다. 방은 사람들을 자신의 자장 밖으로 계속 밀어낸다. <무제>는 ‘임시 거주자’로 초대받은 관람객이 어디까지나 ‘임시’이며 그것이 그네들이 마주한 냉혹한 현실이라고 또박또박 말해준다.

여기서는 관계의 가능성도 차단된다. 우선 작품에 사용된 가구는 이주민이 버리고 떠난 물건이다. 폐가구는 자신이 사용된 시간을 여전히 품고 있으나 이제는 이주민의 세계에서 분리되었다. 가구는 또한 내부로부터 분열되어 형태만을 겨우 유지하고 있다. 아마 조각 간의 거리가 조금만 더 멀어지면 가구로 인지되지도 못할 테다. 쓰임새를 잃은 폐가구는 관람객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할 수도 없다. 가구와 관람객은 그저 각자의 세계에서 ‘존재’하고 있을 따름이다. 방문객들도 마찬가지로 분열된다. ≪이주임박≫은 방역 수칙을 지켜야하기에 두 명 이상이 동시에 관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정해진 시간에 방을 방문해 각자의 경험을 마치고 돌아간다. 전시 공간은 열린 공간이라기보다는 닫힌 공간에 가까워진다.

고기린은 어떠한 장소화도 시도치 않음으로써 오히려 사태를 여실히 드러낸다. 이 방은 그 누구에게도 속할 수 없으며 그 누구에게도 자리를 마련해주지 못한다. 방은 피난처로 기능하기를 거부하고 끝내 비장소로 남기를 고집한다. 여기에서는 점과 점이 모여 선이 될 수 없으며 선들이 모여 광장을 이루는 것도 불가능하다. <무제>는 우리가 뿔뿔이 흩어져있음을, 멀리서 서로를 지켜볼 수밖에 없음을, 그리고 그 상황을 어떻게 해볼 수도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케 한다. 이 작업은 무언가를 변화시키려 한다기보다는 그저 현실에 대해 말할 뿐이다. 우리는 이제 가서 살 집도 없고 저항할 힘도 남아있지 않다고. 불안보다는 체념에 가까워진 감정으로 이 작업은 ‘n포 세대’의 무력감 같은 것을 그린다.

이에 진주의 <무제>(2020)는 질긴 생명력에 기대보자고 말하는 것 같다. <무제>는 106동 104호 화장실에서 시작하는 1km의 밧줄이 아파트 단지 이곳저곳을 지나도록 설치된 작업이다. 관객은 밧줄을 따라가면서 올림픽타운을 전체적으로 산책하게 된다. 걷다 보면 종종 소용돌이 문양으로 밧줄이 돌돌 감겨 있는 ‘체크포인트’를 발견할 수 있다. 거기엔 물이 들어찬 지하실과 폐가구 더미, 자전거 보관소, 놀이터와 버려진 노인정 등이 있다. 이 공간들은 한때 주민들의 일상이 이루어지던 살아있는 풍경이었을 테지만 지금은 사람들이 떠나고 폐허가 되어버린 스펙터클이다. 국가 이미지를 위해 “당시 올림픽을 맞아 ‘내려온’ 정부의 지원금으로 지어진”[16] 올림픽타운은 이제 그 쓸모를 다했으니 다른 부동산에 자리를 내어주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거주민의 삶은 크게 고려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적되고야 마는 삶의 흔적이 무너져가는 스펙터클의 틈새에서 흘러나온다. 그리고 그 풍경에서 발산되는 생의 의지가 수동적 저항의 가능성으로 제시된다.

생의 의지는 밧줄에 심은 1만여 개의 밀 씨앗 이미지와 교차하며 더욱 증폭된다. 관객은 밧줄을 따라가면서 (아마도) 밀짚으로 만들어진 밧줄을 퇴비 삼아 무럭무럭 자라는 밀 씨앗들을 지속적으로 마주한다. 이는 삶과 죽음의 순환 속에서 올림픽타운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시작일 수 있다는 의미로 읽힐 수 있다. 한편으로는 ≪이주임박≫을 전체적으로 감돌고 있는 관조적 태도와 연결되는 지점이다. 정치적 주체 되기보다는 생의 의지를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작업은 시간 앞에서 영원한 것은 없는 만큼 올림픽타운의 죽음도 피할 수는 없는 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생태적 순환 속에서 어떤 형태로든 끈질기게 이어지는 생명력을 통해 아파트의 비장소성에 대항할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도나 해러웨이의 ‘퇴비 되기’ 전략을 상기시키며 새로운 정치적 에너지를 암시하기도 한다. 해러웨이는 생명체들이 서로 간의 얽힘 속에서 구성과 분해를 반복하고 공생한다고 주장하며, 포스트휴먼보다는 퇴비가 되자고 제안했다.[17] 인간 중심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포스트휴머니즘의 중심에도 여전의 타자를 받아들일 줄 아는 너그러운 인간 이미지에 대한 집착, 즉 인본주의의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반면 ‘퇴비주의자’는 자아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전체에 녹아들어 다른 존재들을 싹 틔우는 자양분이 되고자 한다. 이질성을 ‘관용’하는 존재가아니라 이질성의 일부로 녹아드는 셈이다. <무제>에서 퇴비가 되고자 하는 인간의 자취는 찾아볼 수 없지만 죽은 밀과 성장하는 밀의 상호작용은 퇴비 되기의 가치를 다시 한번 곱씹어 보게 한다.

존재를 주장하기가 아니라 녹아들기. 바로 이 지점에서 진주와 김이박은 근본적으로 다른 길을 간다. 김이박의 작업은 기억하고자 하며 여기서 더 나아가 역사성을 지향하는 야망까지도 보인다. 반면 진주의 작업은 잊히고자 한다. 올림픽타운을 보존코자 하기보다는 아파트가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후, 망각의 순간을 직시하고 애도하려 할 뿐이다. 진주의 <무제>는 망각되기를 받아들임으로써 오히려 새로운 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지 모른다고 제시한다. 이 작업은 인류학적 장소를 넘어 생태적 장소를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이주임박≫의 올림픽타운은 포스트 코로나 세계의 축소판이다. 감염병 사태 이후 운신의 폭이 줄어들며 세계는 꽤나 로컬 해졌다. 밖으로 뻗어나가는 노마드적 삶이 선택지에서 사라진 지금, 사람들은 축소된 세계에 집중하면서 새로운 장소화 전략을 짜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록지가 않다. ‘거리두기’는 사람들 간의 유대를 가로막고, 감염 공포는 이질성에 대한 거부감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각국은 자국민만을 위한 피난처로 변하고 있다. 아파트 역시 자본의 흐름을 구현한 스펙터클을 넘어 배타적인 피난처로 거듭났다. 집세가 치솟으며 입주 장벽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이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은 점차 방역에 취약한 장소로 밀려날 가능성이 크다. 모두가 집에 머물러야 하는 상황에서 집을 잃게 되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이다. 아파트 단지는 성채 안의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성채 밖 사람들을 위험 속에 내버려 둔다. 배제는 점점 더 광범위하고 냉정하게 일어난다. 하지만 피난처를 상실한 사람들이 몸을 의탁할 곳은 어디인지 ≪이주임박≫은 답을 주지 못한다. 곧 사라질 풍경에 작별을 고하며 전망이 사라진 세계를 응시할 따름이다.


4. 마주 보는 전시

두 전시를 연속선상에서 바라볼 때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은 점점 짙어지는 탈정치화 경향이다. 탈정치화란 사람들이 정치를 특수한 영역으로 여기면서 분명하게정치적인 사안을 정치적 색채 없이 다루려고 하는 현상을 의미한다.[18] ≪투명함≫의 경우에도 직설적으로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대신 느슨한 연대를 모색하며 일상의 영역에서 아파트의 비장소성에 저항하려고 했다. 박지형 기획자는 이러한 접근 방식을 택한 이유에 대해 “도시의 유휴공간을 중심으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도시, 폐허 등을 화두로 하는 전시들을 보며 젠트리피케이션에 반응하는 행동주의적인 측면으로만 흘러가거나, 노스텔지어적인 감수성을 전면화하는 쪽으로 쏠려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19]라고 설명하며 비슷한 맥락에서 반복 생산되는 재개발 관련 전시들에 피로를 드러냈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 입장을 취하되 이를 표현할 수 있는 색다른 길을 모색하기보다 정치색을 지우고 일상으로 한 걸음 물러나는 우회로를 선택했다. 정치와 일상이 별개일 수 없다는 점에서 이 또한 정치적이라고 볼 수는 있겠지만 기획자는 정치와 일상을 어느 정도 분리해서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 필자의 주관적인 기준에서 […] 재개발, 도시, 젠트리피케이션 등의 소재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을 관철하고자 하는 작가들은 제외하고자 했다. 그보다는 주변을 관찰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해나갈 수 있는 작가들, 그리고 적극적으로 주어진 장소의 의미를 새롭게 탐색하는 데에 흥미가 있는 작가들에게 전시를 제안하게 되었다.”[20] ≪투명함≫은 정치적 개인으로서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행위 자체를 삼가고 싶어 하는 듯한 인상을 주며 탈정치화의 조짐을 보여준다.

탈정치화 경향은 ≪이주임박≫에 이르면 더욱 뚜렷해진다. 조혜수 기획자는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강제적이고도 조직적인 이주에 문제를 제기하고는 있지만, 전시라는 매개를 통해 해결방안을 찾아보려는 적극성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전시는 답을 알 수 없는 막막함의 풍경을 핍진하게 그려내는데, 이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만연해진 사회적 차원의 우울과 곧장 연동되며 상당한 울림을 자아낸다. 물론 우울이라는 감정이 새로운 연대의 씨앗으로 작동할 수도 있을 테지만,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부재한 상황에서 우울은 오히려 정치적 허무주의를 부추기며 사람들이 개인적인 감정에 몰두하게 할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불행히도 방역 지침을 준수한 전시장 환경 역시 여기에 일조한다. 그렇지만 ≪이주임박≫은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지도, 시민인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일들을 제안하지도 않는다 ― 오히려 기획자 자신이 누구보다 가능성의 부재를 확고히 믿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작업은 온전히 관람객의 몫으로 남게 되지만 전시장이 낙관적인 상상력을 고취하는 환경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관객은 여기서 정치적 허무주의의 정당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우울에 젖어 집으로 돌아가게 될 공산이 크다. 그렇다면 변화는 당연히 기대할 수 없다.

두 전시는 적극적으로 주장하지 않기에 제대로 된 비판도 하지 못한다. 이들 전시는 재개발의 주체인 한국 정부와 자본주의를 ‘우회적으로’ 비판하면서 생활 터전을 잃은 도시 생활자들에게 공감하거나 그들을 위로하는 데 더 무게를 둔다. 공감과 위로는 중요한 일이지만 이런 식의 접근은 시민들을 납작하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는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의심치 않고 내면화했으며, 시민 대부분이 불필요하게 잦고 삶을 고려치 않는 재개발 사업에 저항하고 있는 상황도 아니다. 우리가 권력과 더불어 이 지옥도를 함께 그렸다. 권력은 마땅히 견제되어야 하지만 체제 비판만으로는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지금 더 필요한 건 변화의 주체인 관람객, 즉 시민을 향한 비판이다. 까다로운 작업이지만 피할 수는 없다.

대상이 분명한 비판을 회피하려는 태도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뿌리를 두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백인 남성의 시각을 토대로 한 거대 서사를 해체하고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한 미시 서사들을 세상 밖으로 끌어내려고 했던 문화 운동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보편주의를 피하려다가 무언가를 강하게 주장하는 행위 자체를 권위주의와 연결 지어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비판과 논쟁을 기피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헬 포스터는 「비판 이후」(2012) 라는 글에서 “비판-이후의 상황은, 우리를 구속해온 (역사적, 이론적, 정치적) 입장들로부터 우리를 풀어주는 듯싶지만, 대부분 경우 그 상황은 다원주의와 거의 관련이 없는 상대주의를 조장해왔을 뿐”이라고 올바르게 지적했다.[21] 다원주의는 다양한 목소리들이 한 데 얽혀 새로운 서사를 끊임없이 생성케 하지만, 상대주의는 사람들이 점점 더 파편화되고 자기 세계에 몰두하도록 추동한다. 각자의 세계를 존중하려다가 서로에게 무관심해진 셈이다. 소셜 미디어가 보편화하면서 외부 세계에는 신경 쓰지 않고 개인적인 삶에만 몰두하려는 현상은 극에 달하고 있다. 하지만 비판은 내면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외부를 바라보게 할 수 있는 힘이 있다. 비판은 우리가 함께 공동 지식을 구축해나가자는 제안이며 다원주의를 촉진한다. 반면 위로는 사람들이 내부를 바라보게 하며 상대주의를 강화한다.

우리는 불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합리적인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공론장이 유명무실해진 사회에서 대화를 끌어내려면 전시는 대화의 장이 되기보다는 대화 상대방 되어서 관객에게 먼저 다가가야 한다. 그것은 자신이 곧 보편이라 우기는 오만방자한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해러웨이가 그 미묘한 차이를 잘 잡아냈다. 그는 「상황적 지식들」(1988) 이라는 에세이에서 상대주의와 절대주의의 사이에서  ‘상황적 지식들’을 구축하자고 제안했다.

상대주의의 대안은 정치에서는 결속이라고 불리고, 인식론에서는 공유된 대화라고 불리는 그물망 같은 연결 관계들의 가능성을 유지하는 부분적이고 소재 파악이 가능한 비판적인 지식이다. […] 지속적이고 합리적이며 객관적인 의문의 가능성이 그대로 남는 곳이 바로 부분적 시각의 정치이며 인식론이다. [22]

해러웨이 말에 따르면 상대주의는 보편주의의 “완전한 거울 쌍둥이”이다. 상대주의는 어떤 입장도 취하지 않음으로써 되려 우위를 선점하려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지배자의 위치에서 보편 서사를 구축하게 될까 두려워 사람들은 자신의 위치에서 말하고 투쟁하는 책임을 회피하게 되었다. ‘상황적 지식’은 자신의 자리에서 구성된 부분적인 지식이다. 공론장에서 무엇이 객관인지 따져보기 위해 자기 지식에 책임을 지고 논쟁하는 행위를 전제로 한다. 정치와는 도저히 무관할 수가 없다. 전시는 기획자와 참여 작가들이 함께 구축한 ‘상황적 지식’을 제안하는 틀이 되어야 한다.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면 시민 사회의 차원에서 도시 문제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까닭이다. 전 지구적 위기 상황 앞에서 우리에게 집은 어떤 의미인지, 도시와 아파트는 어떤 장소가 되어야 하는지, 그것을 위한 새로운 장소화 전략은 무엇이며 우리가 반성해야 할 부분은 없는지 함께 고민해나갈 수 있는 것이다. 섬세한 방식으로 입장을 취하는 전시가 많아졌으면 한다. 나는 관객을 마주 보는 전시를 보고 싶다.


[1]이 글에서 공간과 장소의 정의는 다음의 논문을 참고하였다: “공간과 장소는 공통의 경험을 나타내는 친숙한 단어들이지만 공간은 장소보다 더 추상적인 성격을 지닌다. 특수화되지 않은 (추상적인) 공간에서 출발하여, 우리가 공간을 더 잘 알게 되고 그 공간에 가치를 부여하게 됨에 따라 공간은 장소가 된다는 것이다.” 정현목,「전통적인 장소의 변화와 ‘비장소(non-place)’의 등장: 마르크 오제의 논의와 적용사례들을 중심으로」,『비교문화연구』, 제19집 1호 (2013), p.113.

[2]Ibid, p.111

[3]성남 프로젝트의 전시는 다음과 같다: ≪성남모더니즘≫, ≪1998 도시와 영상: 의식주전≫(1998. 10. 16 – 11. 4. 서울시립미술관), ≪성남과 환경미술≫(1998. 10. 19 – 10. 25. 성남시청 로비), ≪모란장 그 공간의 의미≫(1999. 10. 13 – 10. 17. 성남시청 로비) 등.

[4]신정훈, [11]호 “성남프로젝트 다시 읽기: 지역-특정적 한국 미술의 역사”, 「성남문예비평창」, 2020년6월 24일. http://www.artforum.or.kr/117 (2020년 11월 24일 검색).

[5]신정훈, 「포스트-민중시대의 미술: 도시성, 공공미술, 공간의 정치」,『한국근현대미술사학』, 20 (2009).

[6]박지형 외,『투명함을 닫는 일과 어두움을 여는 일』, 전시회 도록,  2018, p.29. https://adocs.co/books/a-way-to-close-transparency/ (2020년 11월 18일 검색).

[7]마르크 오제,『비장소: 초근대성의 인류학 입문』, 이상길, 이윤영 역 (아카넷: 2017), pp. 40-43.

[8]Ibid, pp.44-49.

[9]Ibid, pp. 49-54.

[10]이영자, 「신자유주의 시대의 초개인주의: 개인주의의 후기 근대적 변종」,『현상과인식』,통권 114호(2011), pp.110-111.

[11]박지형 외, Ibid, p.176.

[12]박지형 외, Ibid, p. 176.

[13]마르크 오제, Ibid, p. 61.

[14] “우리가 아직도 우리의 기억에 살고 있다면, 우리는 그 기억의 장소들을 축성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기억의 장소들은 아예 존재하지조차 않을것이다”, 피에르 노라, ‘기억과 역사 사이에서: 기억의 장소들에 관한 문제 제기’,『서양사론』,87권, 87호 (2005), 김인중 역, p.288.

[15]조혜수, ‘2주 간의 이주’, ≪이주임박≫ 전시 리플렛(2020).

[16]Ibid.

[17] “Critters are at stake in each other in every mixing andturning of the terran compost pile. We are compost, not posthuman; we inhabitthe humusties, not the humanities. Philosophically and materially, I am a compostist, nota posthumanist. Critters – human and not – become-with each other, compose anddecompose each other, in every scale and register of time and stuff insympoietic tangling, in ecological evolutionary developmental earthly worldingand unworlding.” Donna J. Haraway, ‘Sympoiesis: Symbiogenesis and the LivelyArts of Staying with the Trouble’, Staying with the Trouble, (Durham,London: Duke University Press, 2016), p.97.

[18]탈정치화란 정치의 영역을 다른 영역과 분리하고 정치적 사안을 정치 이외의 영역으로 전환하는 모든 기제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박홍원, 「탈정치화 시대의 미디어와 민주주의 – 정치의 탈정치화와 미디어의 정치화」,『한국방송학회 학술대회 논문집』 (2016), p.2.

[19]박지형 외, Ibid, pp. 185-186.

[20]박지형 외, Ibid, p.188.

[21]핼 포스터,「비판 이후」, 이영욱, 조주연 역.  http://tigersprung.org/?p=3376 (2020년 11월 18일 검색).

[22]다나 J. 해러웨이,「상황적 지식들: 페미니즘에서의 과학의 문제와 부분적 시각의 특권」,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민경숙 역 (동문선: 2002), p.343.




  <당선소감>


   "미술 덕분에 제 안의 괴물을 달랠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 왜 평론을 하고 싶냐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대답을 찾지 못해서 부끄러웠습니다. 질문은 그 후로 그림자처럼 저를 쫓아다녔습니다. 답은 그때그때 바뀌어 왔고, 어느 것 하나 정직한 답이라 자신할 수는 없었습니다. 사실 내일의 제가 어떤 답을 내놓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의 (다소 무책임한 듯한) 답을 해보자면, 저는 아무래도 제대로 살아있기 위해 평론을 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어떤 작품 혹은 어떤 전시는 제 일부를 깨뜨립니다. 적당히 넘어갈 수 없는 질문을 던져 꼼짝없이 자신을 마주하게 만들고, 가끔은 제 세계를 흔들어 마주한 현실 너머를 상상할 수 있게 하기도 합니다. 저에게 평론은 미술에 응답하는 가장 정성스러운 방식이자 게으른 감상으로 적당히 넘어가지 않으려는 다짐입니다. 미술 덕분에 제 안의 괴물을 달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성실한 관객이 되어 보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저 혼자서는 이 글을 쓸 수 없었음을 밝힙니다. 이해하기 힘든 딸을 묵묵히 지원해주신 부모님,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감사합니다. 부족한 제자를 참을성 있게 가르쳐주신 선생님들께도 감사합니다. 특히 정상현 선생님, 공부를 그만둘까 흔들렸던 순간에 선생님께서 건네주신 격려의 말이 아니었다면 이 글은 쓰지 못했을 겁니다.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벼 방’ 여러분, 좋은 전시 정보를 공유해주신 인영 님, 고맙습니다. 저는 여러분 덕분에 공동체를 다시 믿을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흠결 많은 글을 좋게 봐주신 심사위원들께도 감사드립니다.


  ● 1991년 서울 출생
  ● 숙명여대 국어국문학과·프랑스언어문화학과 졸업
  ● 폴 발레리 몽펠리에 제3대학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 골드스미스 런던대 현대미술이론 석사 재학



 

  <심사평>


  미술계 현장과 교감하는지를 먼저 봤다


올해 미술평론 부문 응모작은 총 13편이다. 한 해 쏟아져 나오는 미술 관련 논문들에 비하면 매우 적은 수치지만, 코로나 사태로 대면 접촉에 의지하는 미술계가 크게 위축된 점을 고려한다면, 그나마 이론과 현장을 이어줄 만한 내용이 있음은 다행이다. 선정 기준은 미술계 현장과의 순발력 있는 교감을 전제로 하는 분석적 평문으로 봤다. 13편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 분야가 작가론(4편)이다.

박현기, 김용익, 오인환, 변연미 등, 이미 미술사의 반열에 올랐거나 깊이 연구해야 마땅한 위치에 있는 중요 작가들이다. 작가론 스타일의 평문은 해당 작가의 초창기 작품부터 최근 작업까지 연구, 소개한다. 그러나 작가론 4편은 논문으로 더 적절한 주제라는 생각이다. 평문은 논문의 축약본도 아니고, 중요 작품들을 놓고 감상문에 머물러서도 안 되는, 그 자체의 자족성과 완결성을 요구한다. 논문으로 적당한 주제는 논문으로, 평문으로 적당한 주제는 평문으로 써지면 더 좋을 것이다.

그다음으로 미술 이론, 특정 주제, 미디어, 자유로운 에세이 등으로 분류될 만한 평문이 각 2편씩 있었다. 미술이론 중 색채론으로 작품을 분석한 평문이 2개나 있어서 색이 차지하는 위상을 반영한다. 블루를 중심으로 색채론을 펼친 다음 해당되는 작가 셋을 꼽아 분석한 평문, 한국의 고유색 또는 향토색이라 할 만한 것을 탐구하고 관련 작가들을 다수 호명한 평문들이다. 그것들은 이론과 작품이 함께하는 이상적인 방향성을 가지지만, 왜 그 작가들이 예시되는가에 대한 근거가 다소간 임의적이다.

특정 작가를 초대해서 당장에 전시로 보여줘야 하는 기획문과 달리, 비평으로만 논구되는 작가나 작품은 좀 더 단단한 객관성이 요구된다. 특정 주제를 탐구한 평문 두 편은 주제에 관한 논술이 장황해서 정작 개별 작품에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대한 진짜 궁금한 사항이 묻혀버렸다. 사진이나 미디어 아트 등, 지역성으로부터 자유로운 국제적 주제는 예시되는 작품들이 주로 외국 작가들이라는 점이 아쉬웠다.

자신의 마음속 작품들이라 할 만한 것들을 소재로 자유로운 에세이식으로 쓰인 평문은 편하게는 읽었지만, 독자들이 작품이라는 생생한 대상을 앞에 두고 굳이 어떤 글을 읽을 때 요구하는 바를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 13편 모두 흥미롭게 읽었지만, 조금씩 부족한 부분을 체크하고 나니, 당선작은 현장성과 이론적 분석이 골고루 안배된 ‘비판의 상실; 탈정치 사회의 전시가 아파트를 장소화하는 전략’ 1편이 남았다. 거주 공간인 아파트를 전시장으로 삼아 이뤄진 프로젝트를 다루는 이 평문은 미술관보다 더 현장이라고 할 수 있는 장소에서 게릴라식으로 전시한 젊은 작가들과 함께했으며, 비장소(non-place)에 관한 마르크 오제의 논의를 적절하게 적용했다. 그것은 추상적 공간이 집을 포함한 구체적 자리를 밀어내는 현대사회의 상황을 반영하며, 지금 우리에게 절박한 과제인 공동체의 문제를 포함한다.

 

심사위원 : 이선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