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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 한 켤레

 

잠이 깬 새벽녘에 물끄러미 바라보니

현관 쪽 신발들이 제 멋대로 잠들었다

고단한 입을 벌리고 코를 고는 시늉이다

늘 그렇게 아옹다옹 하루를 부대끼다

저들도 가족이라 저녁에 모여들어도

서로가 지나 온 길을 묻는 법 절대 없다

오고 가는 내 모든 길 묵묵히 따르느라

굽도 닳고 끈도 풀린 가여운 내 아바타여

부푸는 밤공기를 안고 나처럼 누웠구나

 

심해深海

- 칠예가 전용복

 

옻나무 가지에는 일월日月의 물결무늬

깊은 어둠에서 한 줄기 빛을 찾듯

잉걸불 피어 올리며 화폭을 달구고 있다

휘휘 도는 칼끝에서 한 틈이 생겨나고

그쯤에서 섬광처럼 환하게 열리는 하늘

무너진 메구로가조엔* 살아나서 꿈틀댄다

검게 우는 붓질 따라 출렁이는 마음일 때

바다 속 숱한 상처가 진주로 영글듯이

사나이 살아 온 궤적이 신의 손에 오롯하다

 

* 1931년에 세워진 일본의 최고의 연회장을 전용복이 복원

 

 

우체통이 보인다

 

 

길모퉁이 돌아가면 서있는 빨간 우체통

혼자서 하루 종일 늦가을 비를 맞는다

따스한 안부 한 장을 받아본 지 얼마일까

메일과 카카오톡 넘치는 요즘세상

우표붙인 편지 들고 그 누가 오련마는

오늘은 빗줄기를 세며 가슴을 비워둔다

살아 온 나이만큼 너 또한 세월을 이고

반쯤은 희미하게 웃어도 주는 구나

그리워 성긴 시간 속 숨어들어 망을 본다

고요가 깔려있는 단칸방 하나 얻어

그럭저럭 철도 들며 너와 함께 건넌 시간

바람이 지나 가는지 휘파람 소리를 낸다

 

 

<당선소감>


문학 모임이 있던 12월 끝자락에서 당선 소식을 들었습니다.

 

갑자기 온 몸에 후끈해지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문밖은 희뜩희뜩 눈이 쌓이고 바람도 제법이었는데 순간 온 세상이 아늑해져왔습니다. 시조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서너 해 동안 신춘의 문을 기웃거렸으나 언제나 문전에서 돌아섰던 허전함의 연말이었는데, 당선이라니요. 세상 부러운 게 없어지는 한순간이었습니다. 제 책상머리 맡엔 시조로 보고, 시조로 생각하고 시조를 꿈꾼다. 시조가 품을 열 때까지!’라는 경구가 붙여 있습니다. 평소 즐기던 사진 취미도, 인물화 그리기도 제쳐 두고 지난 몇 해를 오로지 시조에만 일념 했습니다.

추운 겨울을 앞서 내보내는 봄의 뜻을 이젠 알 것만 같습니다. 겨울을 견딘 씨앗만이 새싹을 돋게 하듯, 잠 못 이루던 날의 불빛마저도 고맙기만 합니다. 이렇게 새로운 시조 세상에 첫발을 내딛습니다. 이 발걸음이, 오늘과 내일을 환하게 밝혀 줄 것을 믿습니다. 36구의 아름다운 구속에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겠습니다.

어두운 문학의 길목마다 등불을 밝혀주신 스승님들의 은혜 또한 잊지 않겠습니다. 부끄러운 제 작품에 손을 들어 주신 심사위원님께 마음의 밀물로 달려갑니다. 오늘의 자리가 헛되지 않게 좋은 작품과 인품으로 시조의 길을 닦겠습니다.

늘 부족한 사내를 평생 믿고 따라준 아내와 아버지를 응원해준 애들에게도 기쁨과 고마움을 전합니다.

시조야말로 제 영혼의 아바타입니다.

우체국 창가에서

 

전남순천출생 / 방통대 국어국문학과, 전남대 행정대학원 졸 / 8회 광주광역시 시인협회 백일장 장원

12회 공무원문예대전 시조 최우수상 수상 / 근무처 : 화순 능주우체국(국장)

 

<심사평>

서정의 진경과 흥미로운 상상력

 

여전히 시가 이 되지 않는 오늘의 시대에도 신춘문예를 서성대는 영혼이 늘어나는 것을 보면, 물질이 해결하지 못하는 상당한 부분을 문학이 위로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영주신춘문예 역시 예년에 비해 작품의 양과 질이 부쩍 늘었음을 밝힌다.

사유는 서정의 살이요, 서정은 사유의 힘줄이라서 우리 몸속에 거부감 없이 들어와 말의 개념을 정당화하고 언어에 생명을 불어 넣는다. 이번 심사도 주제의 밀도와 짙은 서정성에 바탕을 둔 작품을 눈여겨보며 인생의 애환을 통해 서정의 진경을 얼마만큼 담아냈는가에 초점을 두었다.

진주와 남강, 비봉산의 가을 정경을 팔검무로 묘사, 시조의 장과 장을 퉁소가락처럼 뽑아낸 김재길의<새벼리 戀歌>, 하루 종일 우리의 정신과 몸을 고스란히 이끌고 다니는 신발이야기를 풀어낸 문제완의<아바타 한 켤레>, 를 악보의 음표, 으뜸음자리와 높은음자리 로 빗대어 다시 어머니의 무량한 사랑으로 거듭 앉힌 서상규의 <섬의 수의>, 폐지를 수거하여 생계를 꾸려가는 초로의 사내를 통해 연민과 암울한 현실 세태를 짚어낸 이우식의<빙벽氷壁>, 낡았으나 비루치 않고 해졌으나 허술치 않은 섬마을의 풍경을 담담하게 관조의 자세로 엮어낸 천유철의 <섬마을 여행길>, 지병으로 병원을 오가는 환자의 투병기록 속에 혈육의 애틋함을 진솔하게 녹여낸 허은호의 <햇살 한때>가 최종으로 올랐다.(가나다 순)

작품들이 보여주는 각각의 개성과 고른 호흡으로 심사에 상당한 고심이 있었음을 밝힌다. 그 중, 끝까지 따라와 선자들의 심금心琴을 튕긴 문제완의 <아바타 한 켤레>를 맨 윗자리에 놓았다.

온종일 주인의 행적을 낱낱이 알고 있으면서도 서로가 지나온 길을 묻는 법 절대 없다는 아바타의 단호한 내면세계를 흥미로운 상상력으로 풀어냈다. 사물의 실체를 바탕으로 하되 견고한 현실 감각과 자기심화과정에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아울러 함께 투고된 다른 작품에서 보여준 일관성과 서정의 힘도 한 몫을 했다. 어딘가 불편함을 주는 시가 마침내 시의 영토를 확장한다는 말에 공감하면서 다량의 조미료 맛이 아닌, 토속적인 맛을 낸 작품이 시조의 미래를 지켜 가리라 믿는다.

당선자에게 다함없는 격려와 박수를 보내며 최종에 오른 다섯 분께도 거경궁리居敬窮理의 자세로 용의 해를 열어가길 바란다.

심사위원 : 이승은, 강문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