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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안아주는 공 / 김미경

 

그 집에서 아이가 주로 지내는 놀이방은 나의 일터다. 놀이방 한 켠에 공이 오종종히 모여 앉아 있다. 한데 어우러진 노랑, 초록, 빨강, 분홍색 공이 줄기를 자른 꽃송이를 둥글게 묶어 만든 플라워 볼처럼 보인다.

공을 집어 들어 바닥에 던진다. 저녁 강 물 위로 뛰어오르는 피라미처럼 탄력적으로 튀어 오른다. 더 이상 내려갈 곳 없이 바닥을 칠 때, 공은 제 몸을 딛고 일어난다. 방바닥을 박차고 오른 공이 아치형 발걸음을 뗀다. 그러다 냅다 달음질친다. 공이 달려가서 아이를 안아준다. 공을 품에 안은 네 살짜리 아이 얼굴에서 분홍색 실타래 웃음이 풀려나온다. 불과 몇 달 전까지도 두 눈에 미음 돌 듯* 그늘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아이가 아니던가.

아이를 안아준 공은 둥글다. 둥글다는 말 속에는 모나고, 거칠고, 투박한 것들을 품어 아우르는 기운이 깃들어 있다. 공은, 모서리를 내민 아프고 슬픈 기억들을 원형 속에 꿍쳐 어루만지며 치유해주는 힘이 있다. 땀이 나도록 공을 던지고 굴리며 놀다 보면, 어느새 찌무룩한 얼굴에 볕뉘가 드리워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또한 공은 주어진 환경을 탓하지 않고 언틀먼틀한 길도 마다하지 않는 여유와 설산에서 크레바스의 스노우 브릿지를 만나더라도 겁내지 않고 뛰어 넘는 기개도 지녔다.

아이에게 달려간 공은 코바늘로 둥근 모양을 떠서 구름솜과 삑삑이를 넣고 마무리한 뜨개질 공이다. 여러 날 내 손끝에서 아기둥 바기둥 뒤척이던 실타래가 내어 준 웃음 뭉치인 것이다.

몇 달 전, 구직 면접 보는 자리에서 아이를 처음 만났다. 여자 아이가 불안한 얼굴로 흘끔흘끔 쳐다봤다. 아이 엄마와 아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아빠 없어."

아이가 묻지도 않은 말을 해서 아이 엄마와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애정결핍과 분리불안증으로 보채고 울면서 한시도 내 옷자락을 놓지 않았다. 유난히 애착이 심했던 아이에게 안아주는 공이 돼 주고 싶었다. 시간 나는 짬짬이 색깔 별로 뜨개질 공을 뜨면서 아빠의 빈자리에 굴러가서 사랑으로 채워지길 바랐다. 공에 보풀이 일면서 불안했던 아이의 시선이, 움츠렸던 태도가 안온해졌다. 실 한 올 한 올이 포근함으로 부풀어 올라 아이 마음속을 넘나들면서 모서리와 응어리를 뭉툭하게 매만져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이의 정서적 긴장을 해소시키기 위해 신문지 찢기 놀이도 했다. 아이가 찢어 놓은 신문지를 뭉쳐서 종이 공을 만들었다. 바구니에 공 던지기 놀이를 했다. 아이가 던진 공이 바구니 모서리에 맞고 내 앞으로 굴러왔다. 그때였다. 아이가 던진 종이공이, 어릴 적 동생과 놀았던 우그러진 무채색 종이 공을 불러왔다 .

변변한 장난감 하나 없었던 집안에서 신문지를 뭉쳐 만든 종이 공은 유일한 놀잇감이었다. 날짜 지난 신문지를 모아서 둥글게 뭉쳐 풀칠하고 테이프를 붙여 만들었다. 운동회 날 운동장에서 구르던 백군 공처럼 커다란 종이 공을 굴리면서 놀았다. 황토마당에서 굴리던 공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둥글게 말아 안아주는 것 같았다.

초록의 유년시절을 지나 어느새 중년의 늦가을이 찾아왔다. 낙엽비가 내리면. 속수무책으로 휑한 가슴팍에서 휘돌아나오는 소슬바람을 어찌하랴. 그럴 때 재활용통에 모아둔 폐지로 하릴없이 종이 공을 만든다. 종이 공을 벽에 던져 받기 놀이, 공차기 놀이를 한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도록 공놀이를 하다보면, 초라한 종이공일지라도, 괜스레 휘청거리는 마음을 보듬어 안아주는 공이 여간 고마운 게 아니다.

세상에는 부모의 든든한 지원과 응원을 받으며 모두에게 환영 받는 빛나는 공만 있는 건 아니다. 우그러지고 못난 무채색 종이 공도 존재한다. 어른이 되어도 종이 공을 외면하지 않고 갖고 노는 건, 어린 시절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 주고 둥글게 안아 준 기억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공이 굴러 온 삶의 흔적이야 초라하든, 빛나든 품은 뜻만은 따뜻했으면 한다.

공이 데리고 오는 세상은 모나지 않고 둥글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기억하는 공은 세상을 둥글게 안아주는 따뜻한 품새를 갖고 있다.

늘 그랬듯이, 어머니의 자궁 속에 연결된 탯줄 같은 실타래를 풀어 아이들 마음을 둥글게 보듬고 안아주는 삶을 한 코 한 코 이어가리라.

아이가 분홍색 뜨개질 공을 집어 던진다. 놀이방이 비좁다는 듯 튀어올랐다가 데구르르 굴러다니는 공이 아이처럼 늘품 있고* 늡늡하다*. 놀이방 한 쪽에 플라워 볼처럼 놓여 있는 공들 중에서 초록색 공을 집어 들어 아이에게 굴린다. 지구별만 한 공이 데굴데굴 굴러가서 아이를 안아준다.



*미음 돌 듯 : 눈물이 가장자리로부터 조금씩 피어드는 모양

*늘품 있다 : 앞으로 좋게 발전할 가능성

*늡늡하다 : 속이 너그럽고 활달하다




  <당선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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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나무 묘목을 심고 가꾼 지 13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나무는 올 겨울 유난히 바알간 꽃숭어리를 나뭇가지마다 풍성하게 달고 있습니다. 동백나무는 저의 글벗입니다. 제가 바닥 가까이 앉아서 세상을 독대(獨對)하며, 애오라지 글쓰기라는 꿈을 향해 자신과의 싸움을 하며 우직하게 살아온 저를 지켜본 산 증인이기도 합니다.

뜻밖의 당선 소식을 들었을 때, 제가 돌봐준, 사랑스러운 아이들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제 글이 영글게 힘을 보태준, 고마운 아이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제가 있겠지요.

왕방산에 누워 계신 아버지께 당선 소식을 올릴 수 있도록 기회를 준 매일신문에 마음 깊이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저와 같이 애면글면 혼자 글 쓰면서 어깨를 겯고 응원해 준 대학 동기 조현미 수필가와 따뜻한 손을 내밀어 준 방송대 선배님과 함께 호호 할머니가 되어도 글 쓰면서 멋있게 늙어가고 싶습니다.

부족한 글을 세상에 빛을 보게 해 준 심사위원 선생님께도 감사합니다. 저의 첫 독자가 되어 준 남편, 아들딸, 존재만으로 감동인 이쁜 태인이, 사위, 친정오빠, 여동생, 친구들과 저를 기억하는 이들과 당선의 기쁨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생업을 하면서 밤낮없이 글쓰기의 꿈을 향해 정진하는 세상의 모든 무명의 문학도들과 글을 쓰는 선생님들 모두 힘차게 응원합니다.


  ● 1968년 충북 제천 출생
  ●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 제9회 사이버 중랑신춘문예 수필 장원
  ● 제2회 혜암아동문학상 동시 부문 수상


 

  <심사평>


  일상의 가치를 깨우쳐 주는 수필들


수필을 쓴다는 것은 일상의 자질구레한 것들에 의미를 입히는 일이다. 수필은 하찮게 여기거나 무심코 흘려보냈던 삶의 일부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돌아보게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수필을 쓰고 읽으면서 산다는 것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며 존재감을 느끼게 된다. 코로나19라는 감염병 하나가 일상의 행진을 가로막고 있는 이 시대에 수필의 책무가 더욱 소중해 보인다.

539편의 수필 가운데 마지막까지 손에서 떨쳐 보내지 못하고 매만졌던 작품은 '한때 나였던 것들'(진서우), '질투는 나의 힘'(송혜현), '안아주는 공'(김민경)이었다.

제목이 유혹적인 '한때 나였던 것들'은 '내 안의 당신'에게 전하는 말들로 채워놓은 글이다. 사랑이든 증오든 '나'를 둘러싼 것들 모두가 소중하다는 주제를 의도했다. 그러나 '나였던 것들'을 삶의 어떤 양상으로 구체화하지 못하고 여린 감정만 담아 놓은 점이 아쉬웠다. 질투가 삶의 동력이라는 아이로니컬한 논리로 무장한 '질투는 나의 힘'은 소유욕으로 가득 찬 인간의 속성을 빈정댄다. 풍자의 칼날을 숨긴 구성전략과 주제의식이 통괘하다. 다만, 메말라 있는 문체뿐 아니라 기형도의 시를 용사(用事)한 것이 걸림돌이었다.

끝까지 남은 작품은 '안아주는 공'이었다. 놀이방에서 아이들에게 던져주는 공에 작가의 심경을 투사시켰다. 꽃무늬 새겨진 고무공, 구름솜과 빽빽이를 넣은 뜨개질 공, 신문지를 뭉쳐서 만든 종이공은 더 이상 무정물이 아니다. 분리불안에 보채고 우는 아이에게 달려가 아이를 안아주는 품이다. 아프고 슬픈 기억들을 원형 속에 꿍쳐 어루만지는 힘을 지녔다. 아빠의 빈자리에 굴러가 사랑을 채워주고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감싸주는가 하면, 마침내 늘품 있고 늡늡한 아이들을 안아주는 지구별이다. 결손가정의 네살박이 아이를 주인공으로 클로즈업하고 작가의 어린 시절 기억을 살짝 곁들여, 관념적이고 밋밋하게 전달되기 쉬운 경험담에 사실성과 진정성을 불어넣고 입체성을 살렸다. 모두가 지나쳤던 사물과 직업으로 반복되는 사소한 일상을 통찰하고 해석하여 그 의미를 찾아냄으로써 가치 있는 삶으로 환원시켰다.

우리 심사위원들은 마침내 김민경의 '안아주는 공'을 당당하게 당선작으로 내세운다. 수필은 무딘 일상에 값진 생명을 불어넣는 장르임을 새삼스럽게 깨달으면서.

심사위원 : 구활, 여세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