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광남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 ‘모름’의 형이상학 -서이제 論- / 김상범
<당선작>
‘모름’의 형이상학 -서이제 論- / 김상범
1. “모른다”라는 이접적 종합과 시간을 믿기
서이제의 소설, 특히 「미신(迷信)」이라는 작품에서 “모른다”라는 말은 매우 많이 반복된다. 서이제는「벽과 선을 넘는 플로우」라는 다른 작품에서 작중 화자를 통해「미신(迷信)」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를 그렇게 만든 소설은 서이제의「미신(迷信)」이었다. 제목부터 불길하더니, 역시나 그랬다. 한 문장 한 문장 꼼꼼하게 읽어보아도 무슨 내용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읽어도 안 읽은 것 같고 안 읽어도 읽은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소설이었는데, 기억에 남는 건 희미한 안개 속에서 계속 중얼거리는 누군가의 목소리 뿐이었다.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 나조차도 내가 뭘 읽은 건지 알 수가 없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 소설은 온통 모른다는 말로만 가득 채워진[...]”1)
여기서 ‘알지 못한다’ 혹은 ‘모른다’가 단순히 아무 뜻도 없이 반복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역설적으로 ‘모름’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서이제의 소설을 이해하는 데에 핵심적일 수 있다. 또한 편지를 쓰는 화자에게 붙은 애칭 ‘시나이’는 “모른다”는 뜻의 일본어 ‘시라나이知らない’에서 온 것이다. 화자는 과거의 많은 사건들이 실제로 발생했는지 아닌지 모른다. 그래서 이 소설 속의 사건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계열화될 수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양립 불가능한 다양한 가능 세계들을 읽어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역설적으로 화자의 ‘모름’으로 인해 우리는 소설에서는 보기 드문 형이상학적 성찰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시나이는 ‘이 군’이 선생님을 죽였는지 아닌지 모른다. 따라서 ‘선생님을 죽임’과 ‘선생님을 죽이지 않음’이라는 양립 불가능한 사건들이 소통하고 있다.
들뢰즈에 의하면 라이프니츠는 개념들의 모순을 사건들 사이의 양립 불가능성에 기초 지웠다. 이것은 개념들에 대한 모순율을 제1 원칙으로 삼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전통 논리학에 대한 최초의 혁신이다. 예를 들어 나비의 한 종(種)은 회색인 경우에는 약하고 강한 경우에는 검은데, ‘회색임’과 ‘강함’의 개념들을 그 자체로 분석한다고 해서 우리는 이 둘 사이의 모순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어떤 물리적 메커니즘 속에서 ‘회색임’과 ‘강함’ 사이의 양립 불가능성이 성립하기 때문에 ‘회색임’과 ‘강함’ 사이의 개념적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것은 ‘회색이 되다’라는 사건과 ‘강해지다’라는 사건들의 양립 불가능성으로부터 ‘회색임’과 ‘강함’이라는 술어들의 양립 불가능성이 발생하므로, 개념들 사이의 모순은 사건들 사이의 양립 불가능성에서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가 순수 사건들을 문제 삼는다면, 우리는 회색이 되다가 검어지다보다 덜 긍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다. ‘회색이 되다’는 안전성의 증가[...]를 표현하며, 그만큼 ‘검어지다’는 강함의 증가를 표현한다.”2)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는 라이프니츠가 ‘사건’에 대한 최초의 이론가라고 말한다. 라이프니츠의 논리학은 전통적인 논리학이 아닌 ‘사건’의 논리학인 것이다. 이와 같은 라이프니츠의 파격에도 불구하고 들뢰즈는 라이프니츠의 ‘양립 불가능성’이 사건들 사이의 배타적/배제적 관계를 상정한다고 비판한다. 오히려 들뢰즈는 이러한 부정과 배제가 아닌, 차이를 긍정하는 포괄적인 ‘이접적 종합’에 의한 사건들 사이의 소통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접적 종합이란 이질적인 A와 B를 “A or B”라는 말로 묶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접적 종합 중에서 차이를 긍정하는, 포괄적인 이접적 종합을 설명하기 위한 구체적인 사례로서 양자역학에 있어서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들 수 있다. 상자 안에 고양이를 두고 그 상자 안에서 죽을 확률이 인 환경을 만든다면, 고양이의 상태는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상태라는 것이다. 고양이의 상태는 ‘삶’과 ‘죽음’이 ‘이접적 종합’을 통해서 소통하는 상태인 것이다.
들뢰즈는 ‘포괄적인 이접적 종합’에 의한 ‘사건들의 소통’에서 부정과 배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쓴다.
“일련의 술어들이 한 사물로부터 그 개념적 동일성에 따라 배제되는 대신, 각각의 ‘사물’은 그것이 통과하는 무한한 술어들에로 스스로를 개방하며,[...] 술어들의 배제는 사건들 사이의 소통으로 대체된다.”3)
다시 「미신」이라는 작품으로 돌아오면 여기서 ‘모른다’라는 말은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사건들의 <포괄적인 이접적 종합>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포괄적인 이접적 종합 속에서의 사건들 사이의 소통은 들뢰즈의 말대로 유한한 개념적 동일성을 뒤흔드는 ‘무한한 술어들에로의 개방’을 이끌어낸다.「미신」이라는 작품은 이러한 이접적 종합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 이러한 밀고 나감은 어느 정도의 <광기>를 필요로 한다. 서이제는 실제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어쩌면 내가 기억하는 선생님은 없을지도 모른다. 선생님은 애초에 없었으므로, 선생님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실제로는 벌어지지 않았던 일일지도 모른다. 벌어진 적도 없었던 이 수많은 일을 떠올릴 수 있었던 건, 내가 제대로 미쳤거나 완전히 돌아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4)
이러한 ‘모른다’를 끝까지 진행시킬 때, 우리는 거의 모든 믿음을 파괴하며, 그렇기 때문에 삶에 대한 믿음조차 파괴된다. 서이제는 다음과 같이 쓴다.
“이미 죽은 삶을 살아가는 기분이 들어요. 별다른 이유 없이도 괴로워하는 제 자신이 미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저는 괜찮아질 수 있을까요? 정말로 저는 살아 있나요?”5)
삶과 죽음이 슈뢰딩거의 고양이에서처럼 소통하는 것이고, 이러한 ‘죽은 삶’이란 데리다가 말한 ‘유령’으로서의 삶을 의미한다. 양자역학은 오늘날 모든 사물이 그 심층에서는 이와 같은 ‘유령성’을 띤다고 말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서이제는 여기서 “시간이 지나면...”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데리다의 ‘유령론’에서 중요한 테제 중 하나는 “시간의 이음매가 빠져 있다 The time is out of joint”이다. 시간의 이음매가 빠져 있다는 것은 직선적이고 선형적인, 목적론적인 시간관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순수한 현재’는 불가능하고 언제나 ‘타자’로서의 ‘미래’, 즉 현존의 질서를 붕괴시키는 ‘미래’가 현재 속에 우글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하면 시간의 종합이 차이를 동일자로 환원시키는 것이 아닌 차이를 긍정하는 <포괄적인 이접적인 종합>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역설적으로 ‘모른다’를 끝까지 진행시키면 시간의 근원적인 이접적 종합에 도달하게 되며 모든 것은 바로 이러한 시간의 근원적인 종합의 파생물에 불과하다. 화자의 말대로 “시간이 지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을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시간만이 진정한 의미의 ‘타자’를 도래시킬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시간에 대한 믿음에 도달하게 된다. 말하자면 시간은 직선적이지 않고 목적론적이지 않기에 나의 뜻대로 되지 않지만, 반대로 목적론적이지 않기에, ‘타자’의 도래에 의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서이제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저는 인생은 지나쳐가는 것이고 삶은 지속되는 것이라는 선생님 말씀을 이해했다고 착각하기도 하지만, 이제는 그것도 착각이 아니라고 믿어야겠지요. 이제는 모든 일이 저를 지나쳐가고 제 삶이 지속되었으면 합니다.”6)
이러한 시간에 대한 믿음은 미신에 불과할지라도 인간은 이러한 믿음을 포기할 수 없다. 이것이 거의 모든 믿음을 ‘모른다’를 통해서 파괴한 후 얻게 되는 믿음이다. 실제로 서이제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해는 떠오르고 있었다. 물속을 빠져나오듯, 수평선 위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오늘이 새해라고 믿는 사람들 모두가 해를 바라보았다. 나는 해를 보고 있었다.”(7)
해가 떠오른 사건은 물리적 관점에서 보면 김빠진 동일성과 유사성의 반복이지만 <의미>의 차원에서 보자면 두 개의 연도, 과거와 미래가 갈라지는, 그리고 이러한 갈라짐을 사회 전체에 기입하는 의미심장한 사건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시간을 믿는 것은 어떠한 <의미>를 생산한다.
2. ‘어쩌면’과 ‘바보’
이렇게 시간을 믿는다는 것은 현존하는 질서 속에서는 ‘불가능한’ 것의 도래를 믿는다는 것이다. (현존하는 질서 속에서 가능한 것의 도래는 신앙이라기보다는 ‘기대’의 대상에 가깝다.) 이것이 서이제의「0%를 향하여」라는 소설이 의미하는 바이다. 이 소설에서 지속적으로 독립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첫 번째 작품에서 성공한 독립영화감독은 상업영화감독으로 전향하기 마련이며, 첫 번째 작품에서 실패한 독립영화감독은 영화계에서 퇴출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독립영화의 작가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불가능’에 도전하는 사람들을 서이제는 제시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고병권이 해석한 전태일과 같은 사람들이다. 고병권은 “세상의 율법을 너무 잘 아는” ‘현자’로서의 선배 재단사들은 전태일의 시도가 실패하리라는 것을 너무 잘 알았다. 그러나 전태일은 ‘불가능’에 ‘어쩌면’으로 도전했으며 이것은 미래에 대한 “모름”에 의해 추동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전태일의 위대함은 그 바보 같음에 있던 것이다. 고병권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예컨대 전태일 같은 이가 이런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전태일이 모임을 만들었을 때 선배 재단사들은 그를 바보라고 불렀다. 선배들은 세상의 율법을 너무나 잘 아는 현자들이었다. 노동조합 결성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고[...] 회사와 관청은 모두 한통속이라는 것 등등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 전태일은 살아 있는 바보였다. 그때 그는 마음 속에 떠올리지 않았을까. 선배 재단사들이 옳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8)
이런 의미에서 ‘어쩌면’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변형시키는 “가능화의 단어”9)라고 고병권은 말한다. 또한 이 ‘어쩌면’을 통해 불가능을 돌파하는 자들은 율법에 얽매인 ‘현자’와는 달리 진정으로 자유로운 ‘바보’들이다.
서이제가 이 소설 속에서 등장시키는 영화인들이야말로 ‘어쩌면’을 통해 불가능을 가능으로 변형시키는 ‘바보’들인 것이다. 이 바보들은 ‘미래’에 대해 ‘모른다’는 태도를 취한다. 반면 ‘현자’들은 다음과 같이 미래를 확정적인 것으로 고정시킨다.
“정치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고 싶지만, 내가 생각해도 독립영화는 안 될 것 같았다. 거의 모든 부분에서 독립영화는 가망이 없어 보였다.[...] 자본 논리로 돌아가는 게 당연한 거야. 흐름이 그래. 맞아. 독립영화인들도 독립영화는 안된다고 하잖아. 미래가 없다고 하잖아. 미래를 본 적도 없으면서, 미래가 없다고 했다. 미래를 본 적이 없어서, 미래가 없다고 했다.”10)
반면 바보들의 ‘모름’에 기초한 ‘어쩌면’에 의해 기존의 율법들은 근원적인 문제제기에 직면한다. 서이제는 ‘석우’라는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독립영화판에 답이 있었던 적”11)이 없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어찌보면 독립영화 혹은 진정한 예술은 자본의 율법에 기초한 ‘답’을 의문시하며 자본의 율법에 근원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기에 이러한 석우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말할 수 있다. 서이제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석우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맞는 말을 한 것도 아닌 것 같았다.”12)
서이제는 데뷔작인 「셀룰로이드 필름을 위한 선」에서 아예 권력과 자본의 지배 아래에서 독립영화를 꿈꾸는 사람이 자조적으로 자신을 ‘바보 멍청이’라고 부르는 신(scene)을 등장시킨다.
“나는 [...] 바보 멍청이로 살 수 밖에 없었고, 그렇게 사는 바보 멍청이이기 때문에 또다시 영화를 찍고 싶었고[...]”13)
이 사람은 수준 낮은 영화가 ‘국뽕’을 동원하여 흥행하는 것을 보고 이를 정당화하려는 노력에서 자살 충동을 느낄 정도로 영화에 진심이다. 그의 영화에 대한 진심은 셀룰로이드 필름의 시대에서 디지털 영화의 시대로 이행하면서 아무나 영화를 찍게 됨으로써 영화의 평균적인 수준이 떨어진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한탄하는 것에서도 느껴진다.
“디지털 시대의 도래는 불에 타 없어질 위기로부터 영화를 구원해주었지만, 세상을 더욱더 구린내가 나도록 만들었다. 사람들은 디지털카메라를 이용해 더 많은 똥을 쌌는데[...]찍는 양이 늘어서 영화생산량이 함께 증가한 것뿐, 더 많은 영화가 탄생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14)
예술이 대체 무엇이기에 사람을 이렇게 ‘바보’로 만드는 걸까? 물론 이들은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율법의 힘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그렇지만 이 작품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은 이러한 현실의 힘에 때로는 복종하고 타협하지만, ‘영화를 향한 열망’은 꺼지지 않고 ‘바보같이’ 어느새 영화를 만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 소설에서 유미 선배는 끊임없이 자신이 만든 영화의 필름이나 DVD를 불태우지만 끊임없이 다시 창작에 대한 열정을 못 이겨서 영화를 만들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자본주의적 현실에 대한 ‘소소한 저항’은 총체적인 혁명이 아니므로 의미가 없는 것일까? 오히려 총체적이고 중심이 존재하는 혁명이 아닌 ‘다양한 저항들의 탈중심화된 느슨한 연합’이 필요할 수도 있다. 푸코는 『성의 역사1: 지식의 의지』에서 오히려 다음과 같이 쓴다.
“권력에 대한 커다란 거부의 ‘한’ 장소, 가령 반항의 정신, 모든 반란의 중심, 순수한 혁명가의 권위는 없다. 반면에 일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특별한 경우인 “여러” 저항, 예컨대 가능한 저항, 필요한 저항, 있음직하지 않은 저항, 자발적 저항, 우발적 저항, 외로운 저항, 합의된 저항, 은밀히 퍼지는 저항, 격렬한 저항, 화해가 불가능한 저항, 재빨리 타협하는 저항, 이해관계 때문에 일어나는 저항, 또는 희생적 저항 등이 있는데[...]”15)
물론 탈목적론적인 시간 속에서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 예술가들의 노력이 탈중심화된 연합을 이룬다고 해서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바보 같이’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어쩌면’이라는 단어를 통해 꿈꿀 수 있다.
3.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
인간은 많은 경우에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모른다. 이것을 서이제는「출처 없음, 출처 없음」이라는 소설에서 잘 보여준다. 이 소설은 과학기술과 미디어가 발전한 오늘날 인간은 알고리즘에 의해 제공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이러한 정보의 출처를 알려고 하지 않으며 또한 정보가 신빙성이 있는지 따지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정보를 믿어버린다. 이것이「출처 없음, 출처 없음」이라는 제목이 의미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아역 배우였던 신이정은 외모가 ‘역변’하게 됨으로써 한국의 연예계 생활을 중단하고 캐나다로 유학을 가려다가 실패한다. 그런데 중단 선언 전에 영화 촬영장에서 연기를 위해 담배를 입에 물고 몽환적인 표정을 지었으나 이것이 사진에 찍혀 인터넷을 돌아다니면서 그녀의 이미지는 씻을 수 없는 타격을 받게 된다. 그녀는 미성년자임에도 불구하고 마약을 핀 사람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대중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 새끼 100% 약 했다. 미성년자가 돌았네. 캐나다 유학 가서 약쟁이 됐구나. 신이정은 약 배우러 간 거야? 캐나다 마약 합법이잖아. 대마초 말하는 거다. 사실 대마초보다 담배가 더 중독성 강함. 신이정 좋아했는데. 신이정 왜 저 지경이 됨? 정신차려라 진짜.”16)
말하자면 대중들은 사정을 제대로 알지 못함에도 자신들이 잘 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신뢰할만한 출처가 있는지 확인하지도 않으면서 시뮬라크르를 확대 재생산한다. 이것은「로맨틱 아일랜드」라는 게임에 관한 네트워크 상의 소문도 아무런 증거나 출처 없이 확대재생산되는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대중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열매 화석을 발견한 유저에게는 상급이 지급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달러로 받는 거야? 상금 얼마임? 게임회사니까 돈 엄청 많겠지? 와, 부럽다.”17)
그러나 애초부터 열매 화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돈이 아니다. 회사는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유저가 원하는 것을 파악하고, 가상공간에서 유저가 열매 화석을 땅에 심을 때 유저가 원하는 것이 ‘가상적으로’ 생기게 만들었던 것이다.
대중들이 자기가 얻은 정보가 신뢰할만한 것인지를 분별했다면, 그래서 신뢰할 수 없는 출처에서 만들어진 자신이 잘 모르는 대상에 대한 자극적인 정보를 믿지 않고, 자신이 대상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면, 이런 코미디와 같은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어느 정도는 자신이 잘 모르는 대상을 억지로 관념적 편견을 통해 파악하려고 하지말고 잘 모르는 대로 내버려 두는 윤리가 필요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앞의 논의에서 ‘모름’이라는 테마가 서이제의 소설들을 가로지르고 있음을 보았다. 또한 이러한 ‘모름’의 궁극에 도달함을 통해 역설적으로 믿음에 도달함을 보았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모름’과 ‘어쩌면’이라는 단어를 통해 불가능을 가능으로 변환시킬 수 있음을 보았다. 이제 ‘모름’에 대한 ‘앎’의 필요성을 제시하며 이 평론을 끝맺으려고 한다.
이러한 ‘모름’에 대한 ‘앎’이 필요한 것은 인간의 인식능력이 유한하기 때문만은 아니고, 5차 이상의 방정식의 일반적 해법이 존재하지 않음에서 보듯이, 현대 사상으로 올수록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의 객관성”18)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러한 무지는 단순한 부정적, 주관적 사태가 아니며 “대상 안의 어떤 근본적인 차원과 이어지는 어떤 규칙”을 알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갈루아는 5차 이상의 방정식의 일반적 해법이 존재하지 않음을 보이는 과정을 통해 현대 대수학의 여러 대상들을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이 “대상 안의 어떤 근본적인 차원과 이어지는 어떤 규칙”19)을 발견했다. 이런 의미에서 서이제는 “알지 못하는 것의 객관성”을 정립하고 이를 통해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대상을 고찰하는 특이한 소설들을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각주
1)서이제,「벽과 선을 넘는 플로우」, 『낮은 해상도로부터』, 파주: 문학동네, 2023, 121쪽
2)질 들뢰즈, 『의미의 논리』, 이정우 역, 서울: 한길사, 1999, 291쪽
3)『의미의 논리』, 296쪽
4)서이제,「미신(迷信)」, 『0%를 향하여』, 서울: 문학과 지성사, 2021, 28쪽∼29쪽
5)「미신(迷信)」, 『0%를 향하여』, 32쪽
6)「미신(迷信)」, 『0%를 향하여』, 32쪽
7)「미신(迷信)」, 『0%를 향하여』, 35쪽
8)『다이너마이트 니체』, 84쪽∼85쪽
9)『다이너마이트 니체』, 86쪽
10)서이제,「0%를 향하여」, 『0%를 향하여』, 서울: 문학과 지성사, 2021, 348쪽
11)「0%를 향하여」, 『0%를 향하여』, 305쪽
12)「0%를 향하여」, 『0%를 향하여』, 306쪽
13)서이제,「셀룰로이드 필름을 위한 선」, 『0%를 향하여』, 서울: 문학과 지성사, 2021, 119쪽
14)「셀룰로이드 필름을 위한 선」, 『0%를 향하여』, 71쪽∼72쪽
15)미셸 푸코, 『성의 역사1: 지식의 의지』, 이규현 옮김, 파주: 나남, 2010, 105쪽
16)서이제, 「출처 없음, 출처 없음」,『낮은 해상도로부터』, 파주: 문학동네, 76쪽
17)「출처 없음, 출처 없음」, 92쪽
18)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김상환 옮김, 서울: 민음사, 2004, 394쪽
19)『차이와 반복』, 394쪽
<당선소감>
유연한 비평 위해 말랑말랑한 정신 유지 노력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당선되었다는 전화를 받은 순간부터 당선 소감을 작성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어안이 벙벙하다. 이러한 기쁨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이 기쁨을 설명하기보다는 조금 결이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나는 어떤 비평가가 되고 싶은가? 작품을 사람들의 안온한 의식의 지층을 뒤흔드는 ‘지진’으로서 하나의 ‘사건’이라고 본다면, 나는 평론이 이와 같은 ‘지진파’를 이성의 언어로 번역하는 ‘지진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진계를 통해 지진파의 속도와 성격, 지진의 규모 등을 알 수 있듯이, ‘사건’으로서의 작품이 어떤 전대미문의 의미와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를 일반 독자에게 명료하게 전달하는 것이 비평가의 책무라고 생각한다. 나는 좀 더 민감하고 정확한 지진계와 같은 비평가가 되도록 노력하겠다. 이와 같은 민감한 지진계가 되기 위해서는 인식의 유연성과 정확성이 요구되며, 이러한 인식의 유연성과 정확성을 갖는 것은 끊임없이 의식의 관성을 깨뜨리고 정신의 말랑말랑함을 유지해야 가능하다.
그동안 많은 방황과 모색이 있었다. 과학고와 대학 수학과를 나와 철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신춘문예에 응모하는 다양한 경험을 쌓아왔다. 이러한 다양한 영역의 횡단을 통해 나는 나의 딱딱한 앎의 체계가 무너지는 순간을 많이 겪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이러한 지적 방황이 의미 없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자기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한 끊임없는 회의가 내가 문학비평을 하는 데에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더 나아가 ‘정신의 말랑말랑함’을 유지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고, 결국에는 편협한 사고를 벗어날 수 있게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나의 포부는 지나치게 거창하지만 신인의 치기 어린 패기로 보아주시면 감사하겠다.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당선이었다. 여러 가지로 부족한 원고를 ‘가능성’을 보고 뽑아주신 심사위원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더 열심히 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겠다. 의식이 딱딱하게 굳지 않도록 더 많은 작품을 정확하게 읽고 더 많이 지적으로 방황하는 비평가가 되어야겠다.
● 서울 출생
● 포항공대 수학과 졸업
● 연세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단행본 ‘들뢰즈의 이념적인 놀이’·‘현대철학과 코뮤니즘’·‘기호와 현대철학’·‘보드리야르 연구’·‘철학은 주사위 놀이다’
<심사평>
설득력 있게 규명…열거한 장점 두드러져
비평은 논문과 다르다. 단지 형식적 요건을 갖춰야 한다거나 논의 대상이 어떠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비평은 ‘지금 여기’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들’과 긴밀하게 그리고 역동적으로 관련되는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그 개별적 실천이나 문제의식 내지는 그것을 둘러싼 역사, 사회, 정치, 문화 등의 다양한 맥락(context) 및 담론과 절합(articulation)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논문은 기본적으로 역사적 방법론을 취하며 과거의 대상을 다루기 때문에 그것의 현재적 의미에 굳이 주목하지 않아도 된다. 특정한 방법론에 입각하여 텍스트를 재단하기에 급급하거나 구태의연한 견해와 주장을 답습하는 경우에는 비평으로서는 물론이거니와 논문으로서도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렵다. 과거의 주제와 방식에 머물러 있는 논문적 형식의 글쓰기가 다수 투고되어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았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영화 비평이 우세했다. 허필은의 ‘욕망의 나에서 공감의 너와 나’로는 ‘너와 나’에 관한 다정하고 섬세한 분석이 인상적이었으되 공감과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다소 상식적인 논의로의 귀결이 아쉬웠다. 허병민의 ‘동상이몽의 논리 안에서 꿈으로의 탈주-오아시스론’은 ‘오아시스’에 관한 파격적인 해석이 돋보였으나 그것이 정작 무엇을 위해 제기된 것인지가 다소 불분명했다. 김윤희의 ‘그녀는 도대체 왜-영화 잠 돌아보기’는 간결하고 안정된 문체와 영화에 관한 정교한 분석, 비평이론의 적절한 활용 등에 있어서 장점이 두드러졌다. 다만 ‘잠’에 관한 기존의 일반적인 논의로부터 얼마나 거리를 두고 새로운 관점을 제기하고 있는지가 의문시되어 마지막까지 고민하다가 손에서 내려놓게 되었다. 이어진의 소설 비평 ‘잊고, 쓰고, 기억하고, 해피엔드-임솔아, 초파리 돌보기를 중심으로’ 역시 탁월한 문체와 오늘날 여성의 현실에 관한 문제의식, 텍스트에 관한 세심한 분석이 돋보인 완성도 높은 비평이었다.
하지만 임솔아의 소설을 ‘여성적 글쓰기’로 규정하는 논리의 근거와 구조가 기존의 페미니즘 비평의 일반적인 담론을 답습하는 감이 없지 않았다. 이상 거론한 투고작들은 나름의 장점이 뚜렷하고 비평으로서의 완성도가 우수했다. 와신상담하여 약점으로 지목된 부분을 보완하기만 한다면 여타 비평 관련 지면이나 현장에서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다분한 글이었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다.
김상범의 ‘모름의 형이상학-서이제론’은 발군이었다. 들뢰즈를 중심으로 한 서양 철학·비평이론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서이제 소설의 중요한 특징과 가능성을 설득력 있게 규명해 내고 있었다. 문제의식 및 논의를 위해 필요한 개념을 설정하고 밀어붙이는 강단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간명한 문체 역시 돋보였다. 이론적 논의가 우세한 데 비해 텍스트에 대한 검토와 분석이 다소 부족하고 기존 서이제 소설 관련 논의로부터 얼마나 벗어나 있는가에 관한 의문이 들긴 했으나 이러한 아쉬움을 압도적으로 상쇄할 정도로 앞서 열거한 장점과 가능성이 두드러지는 비평이었다. 당선을 축하한다. 아울러 아쉽게 기회를 얻지 못한 여러 투고자께 위로와 격려의 마음을 전한다.
심사위원 : 조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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