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국제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4664 / 조정규

<당선작>
4664 / 조정규
- 욕창 막으려… 나의 몸은 세 시간마다 뒤집혔다
- 아내가 속삭였다 … 미안해, 다른 남자가 생겼어
- 17년입니다 … 할 만큼 하셨어요, 산 사람은 살아야죠
- 사천육백육십사 번째 뒤집기… 이 숫자를 잊어선 안돼
구멍 깊숙이 소리가 들어왔다. 다른 남자가 생겼다고 아내가 속삭였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콜라가 엉겨 붙은 낡은 이불이었다. 두 번은 접히지 않을 정도로 두꺼웠다. 대학교 세 번째 엠티였나, 나와 아내는 술기운으로 발갛게 달아올랐다. 무슨 게임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는 이불 아래 손을 넣은 채 서로의 손을 쥐락펴락했다. 게임 규칙에 따라 움켜잡은 아내의 손은, 작았다. 누군가 벌칙을 받고 다시 손을 넣는 순간 아내 손등이 슬쩍 팔을 쓸었는데, 그제야 나는 여자의 체온에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손을 쥐는 횟수가 늘수록 아내는 다른 종류의 사람으로 변했다. 규칙을 어기고 나는 힘을 빼야 할 때도 손을 쥐었다. 아내는 뿌리치지 않았다. 오히려 화답하듯 검지로 나의 손바닥을 쓰다듬었다. 여자 경험이 없던 나는 작은 손가락 하나에 무방비로 녹아내렸다. 은밀한 스킨십으로 게임은 금세 엉망이 되었다. 누군가 그냥 술이나 마시자고 소리쳤을 때도 우리는 손을 놓지 않았다. 눅눅한 이불에 부드러운 손길, 어지러운 술바닥 위로 깨끗하게 달아오른 스무 살의 겨울, 그런 꿈같은 장면을 뒤로 하고 아내는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려 한다.
짧은 고백을 마친 아내는 연인의 정체를 말하려다 입을 닫았다. 늦은 시간이었다. 어제부터 초침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음 시계로 바꾼 듯했다. 아내는 이불을 펴고 거실과 안방 불을 껐다. 언젠가부터 아내는 바닥에서 잠을 잤다. 침대 사이즈가 작은 탓도 있지만, 나와 살을 맞대는 걸 불편해했다. 곧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불 쓸리는 소리가 이 분에서 삼 분마다 계속됐다. 아내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이불의 저음이 점차 멀리서 들리는 굴착기 소리와 겹쳤다. 지반을 뚫는 천공기 소리는 노크처럼 시작되었다가 몇 분 만에 총탄음처럼 귓전을 때렸다. 공사장 소음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시로 들렸다. 잠잠하던 아내도 불편하게 신음했다. 굴착기 소리에 장단 맞춰 가슴을 치기도 했는데, 꼭 나를 향한 시위 같았다. 아내와 대치해 봐야 좋을 건 없었다.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 아내는 평온하게 잠들 것이다. 일 초, 십 초, 백 초, 오백오십 초. 아내의 쌔근대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나 깊이 파려는지, 굴착기는 멈추지 않았다. 볼륨이 낮아지고 빈도가 줄어도 여전히 거슬렸다. 벌써 반년 넘게 이어진 소리였다. 처음에는 대대적인 공사로 짐작했다. 재개발 중이라는 소식은 들었지만, 한밤중에도 공사를 멈추지 않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상식을 벗어났다. 현장을 확인할 방법도 없었다. 굳이 가정하자면, 대화가 통하지 않는 모든 소음은 환청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설득력 있었다. 그리고 나는 설득되었다. 나에게. 환청이라니, 왜? 내 삶의 특별한 것은 모두 아내와 관련 있었다. 환청은 특별했다. 특별한 환청이라면 결국 아내가 원인일 것이다. 관련이 있으니 원인일 것이다, 라고 믿었다. 소음이 있으면 아내가 있다. 혹은 아내가 있으면 소음이 있다. 약한 소음, 강한 소음, 온화한 아내와 화난 아내, 저음과 고음, 행복한, 슬픈, 온갖 조합에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무의미한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자정이 훨씬 넘었을 텐데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꼬리를 무는 망상은 정체불명 남자에 맞물려 대학생 시절을 떠오르게 했다. 아내의 새로운 사랑이 그때와 어떻게 다를지 궁금했다. 너는 언제 살아있다고 느껴? 아내의 질문이었다. 공인받지 못한 철학이라면 나나 아내나 일가견이 있었다. 교양 수업으로 서양 철학사를 들으며 우리는 삶과 죽음에 대해 논쟁하곤 했다. 진지한 의문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논거도 없었다. 심오한 단어를 그럴듯하게 조합해 어설픈 문장 하나 만드는 것으로 충분했다. 우리는 대학로에서 연극을 보고 습관처럼 삶과 죽음을 이야기했는데, 딱히 연극 내용이 철학적인 것도 아니었다. 살아있다는 느낌? 나는 답했다. 그것을 알려면 왜 살아야 하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고 했다. 인간은 껍데기가 있는 한 이상을 실현할 수 없으니 삶은 무가치하다고도 했던가. 아내는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다고 핀잔했다. 가치 없는 삶? 그럼 죽을 거야? 어차피 살 거잖아. 아내는 난해한 질문에 당연한 해답을 제시하며 미소 지었다. 날 서지 않은 온화한 표정이었다. 죽음을 말하면서 아내는 웃었다. 조롱했고 가르쳤고 격려했다. 대화의 소스라고 해봐야 교수가 정리해 준 피피티 자료가 전부라서 우리의 논쟁은 말다툼에 가까웠지만, 아내의 미소만큼은 완벽하게 철학적이었다.
그날 아내의 미소가 사색만 담은 것은 아니었다. 원초적이고 형이하학적인 것이 떠오를 만큼 매력적이기도 했다. 나는 용기 내어 네 평 남짓 조그만 자취방에 아내를 초대했다. 방이라고 할 만한 곳에 단둘이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사귄 지 한 달이나 지났을까, 그때만 해도 우리의 스킨십은 입술에 정체되어 있었다. 폐쇄된 공간에서 야릇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어떤 말을 해도 어색했지만 어떤 말이라도 이어야 했다. 즉흥적인 상황에 밑천은 빠르게 바닥났다. 말을 대신할 적당한 소음이 필요했다. 로맨스 드라마가 나오길 기대하며 티브이를 켰는데, 안타깝게도 눈앞에 나타난 것은 지친 기색으로 어슬렁거리는 암사자 한 마리뿐이었다. 엄마의 고통에도 새끼들은 자기 배고픈 게 우선이라는 내레이션이 들렸다.
다큐멘터리에 시선을 두면서도 나는 머릿속으로 합리적인 제안과 적당한 순간을 끊임없이 쟀다. 그사이 암사자는 새끼들의 성화에 사냥을 떠났다. 사냥법은 단순했다. 사냥감보다 빨리 달리면 먹을 것을 얻었고, 앞지르지 못하면 굶어야 했다. 속도가 중요했다. 한 달은 이른 감이 있었다. 둘 다 연애는 서툴렀다. 백일 정도가 적당하긴 했다. 출산 후유증으로 암사자는 걸음이 느렸다. 주의력이 산만한 새끼 누를 발견한 건 행운이었다. 암사자는 단번에 누의 목을 물었다. 작은 화면에 피범벅의 누가 여과 없이 재생되었다. 빨간 핏물이 바닥에 고였고 새끼 누는 숨을 헐떡이며 눈물을 흘렸다. 나는 아내가 눈물을 보일 만큼 보수적이지 않기를 바랐다. 사귀어 본 남자가 없다고 했던가. 아내는 덤덤하게 화면만 보았다.
사람이나 사자나 부모만 고생한다고, 나는 다음 단계를 위한 가벼운 말을 던졌다. 아내는 풀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고생할 기회조차 없었어. 쟤도 선택할 수 있었다면 기꺼이 고생했을 거야. 아내가 본 것은 사자도, 죽은 새끼 누도 아니었다. 일 초도 안 되어 화면에서 사라진 어미 누였다. 울고 있다고 했다. 새끼 대신 죽는 방법을 몰라서 발만 구른다고 했다. 화면 밖의 화면이었다. 아내는 볼 수 없는 곳을 보았고, 나는 볼 수 있는 곳에서 아내의 상상을 상상할 뿐이었다. 초조했다. 사자든 누든,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절벽 같은 대답에 나는 말을 잃었고 속절없이 티브이를 보며 다음 기회를 모색했다. 아내는 부러 내 시선을 피했다. 우리는 조용히 맥주를 마시며 다큐멘터리에 집중했는데,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수사자가 나타난 것이다. 수사자는 내게 윙크를 보냈다. 온 우주가 나와 아내의 결합을 원했다. 그 끝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독수리 떼가 누 사체를 처리하는 동안 수사자는 무심하게 암사자 뒤편에 올라탔다. 아름다운 사랑이 시작됐다는 내레이션과 달리 내 눈에는 욕정 가득한 수컷 짐승만 보였다. 침 삼키는 소리가 커졌다. 힘겨운 사냥에 암사자는 지쳤다. 새끼들은 신나게 흙바닥을 뒹굴었다. 그 순간, 나도 안다. 타이밍이 아니었다. 변명하자면, 처음이라 그랬다. 티브이라도 껐으면 덜 후회했을 것을. 나는 암사자와 아내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우리도, 할까?
아내는 여러모로 나보다 나았다. 외모나 학점같이 겉으로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주관적인 면에서도 두루 나았다. 배려와 인내, 온화함, 모든 것이 나았다. 다큐멘터리 같은 우리의 관계도 아내의 취향이었다. 아내는 자기가 설정한 선을 아슬아슬 넘나드는 내게 매력을 느꼈다고 했다. 첫사랑이었다. 나는 졸업도 하기 전에 대기업 면접에 합격한 아내를 보며 경이로움을 느꼈다. 말단 직장인 신분으로 입대한 남자 친구를 끝까지 기다리는 모습에 공경심을 느꼈고, 남은 학기 등록금을 내주는 걸 보고는 경외심을 가졌다. 이런 이유로 나는 진심을 담아 프러포즈를 할 수 있었다. 결혼이니까, 명분은 충분했다. 아내가 나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해서 우리의 결혼이 불공평했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우연히 보석을 발견했다. 아내는 평범한 돌덩이를 보석으로 믿는 능력이 있었다. 우리 모두 보석이란 건 같았다. 아내는 티파니 반지와 손 편지를 보며 미소를 지었고 망울이 맺힐 정도로 눈물을 흘렸다. 거기에는 철학도, 사자도 없었다. 그저, 그 순간은 좋았다.
*
풋풋한 이십 대를 그리는 동안 굴착기가 멈추었다. 새로운 남자는 잊기로 했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한번은 겪어야 할 일이기도 했다. 길었던 상상으로 짧은 밤이 지나고, 아내는 양치질하며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제 도착하냐고 조심스레 물은 뒤 네, 네, 라는 말을 반복했다. 어머니는 사소한 불만을 쏟아냈을 것이다. 홀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내는 대학생 시절부터 나의 어머니를 친엄마처럼 살갑게 대했다. 어머니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이었다. 우리 가족의 화목에는 아내의 인내가 큰 지분을 차지했을 것이다. 감정을 누르며 통화를 이어가던 아내는 오후에 교회 사람들이 올 것이니 그때까지만 있으면 된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대기업에서 퇴사한 아내는 돈 안 되는 많은 아르바이트를 했다. 다행히 요새는 안정적인 일을 찾은 듯 했다. 평일에는 집에서 동영상을 편집했고 주말이면 구립 도서관으로 출근했다. 언젠가부터 교회를 다니기도 했는데, 아내의 새로운 남자는 도서관 아니면 교회에 있을 가능성이 컸다. 아내가 떠나고 어머니는 아침 내내 티브이만 봤다. 트로트 가요에 욕설이 난무하는 영화 대사가 들렸다. 오늘 경기 결과에 따라 롯데의 프로야구 정규 시즌 우승이 결정된다는 스포츠 뉴스도 들렸다. 어머니는 내게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거실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자꾸 무언가를 떨어뜨리기도 했다. 어휴, 탄성과 함께 어머니는 티브이를 껐다. 더는 소음이 없었다.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오후에 교회 소모임 사람들이 도착하자 어머니는 인사도 없이 집을 나섰다.
오늘은 다섯 명이었다. 어른 셋에 아이가 둘이었다. 토요일이면 멤버를 달리하여 교인들이 우리 집을 찾았다. 아이 중 한 명은 단골 은희였고, 다른 아이는 은희보다 앳된 목소리의 누군지 알 수 없는 꼬마였다. 콧노래로 찬송가를 부르는 남자는 인솔자 부목사였다. 단골이었던 은희 아빠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은희와 부목사는 익숙하게 합을 맞추어 나의 몸을 뒤집고 요를 받았다. 함께 온 꼬마가 이건 뭐예요, 저건 뭐예요,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질문을 쏟아냈다. 부목사가 내 가슴에 손을 얹고 작은 소리로 기도할 때도 철없는 꼬마는 이렇게 누워있는 것과 죽은 것의 차이가 무어냐고 묵직한 질문을 던졌다. 부목사는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에게 예의 없이 굴지 말라며 꾸짖었다. ‘영원한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는 말로 기도가 끝났고, 꼬마는 어차피 듣지도 못할 텐데, 반항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꼬마 말대로 듣지 않는 편이 나았다. 벌써 이 년째다. 축복은 없었다. 영원만 익숙했다. 만약 영생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영원을 순간처럼 느낄 감각기관뿐이다. 어떤 감각도 영원히 지속되면 고통에 가까워진다. 나의 시간은 완벽한 영원이었다. 하루와 일 년의 차이도 명확하지 않았다. 유일한 감각, 청력만으로는 버거웠다. 넋 놓고 있으면 시간이 흐른다는 느낌마저 잃었을 것이다.
욕창을 방지하기 위해 나의 몸은 세 시간에 한 번씩 뒤집혔다. 나는 시간을 가늠하기 위해 뒤집히는 횟수를 셌다. 요양 장소를 집으로 옮기면서 생긴 습관이었다. 세 시간은 하나의 인생이었고, 세 시간이 지나면 다른 인생이 시작되는 것으로 믿었다. 영원을 순간처럼 느끼기 위한 꼼수이기도 했다. 세 시간 중 처음 한 시간은 몇 번째로 뒤집혔는지 횟수를 암기하는 것으로 보냈다. 처음 두 자리 숫자까지만 해도 쉽게 외울 수 있었지만, 천 단위를 넘기고 숫자가 복잡해질수록 헷갈리지 않으려면 한 시간은 암기해야 했다. 비효율적이어도 게을리할 수 없었다. 이 숫자를 잊는 순간 꼬마의 말대로 나는 시체와 다를 바 없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한 시간이 지나면 다음 한 시간은 자유로이 지난날을 회상하는 것으로 보냈다. 좋은 일과 나쁜 일. 아내의 체크무늬 스웨터와 베이지색 숄더백. 암사자. 옅은 갈기. 그리고, 그건 뭐였더라. 정성껏 저항해도 기억은 흐려졌다. 마지막은 다음 뒤집기를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쓸쓸한 황혼기였다. 이런 과정으로 몸이 여덟 번 뒤집히면 하루가 지난 것이고, 이백사십 번 뒤집히면 한 달이, 이천구백이십 번 뒤집히면 일 년이 지난 것이다. 나는 조금 전 은희와 부목사에게 사천육백육십사 번째 몸이 뒤집혔다. 4664. 이 숫자를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의 인생 혹은 순간이 끝났다.
나의 셈법에 허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잠이 들어 의식이 끊긴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듣는 것과 생각하는 것밖에 할 수 없는 몸뚱이라도 휴식은 필요했다. 그럴 때면 빌라 밖에서 들리는 잡담이나 티브이 뉴스로 단서를 얻어 시간의 흐름을 추측했다. 시계보다 정확하진 않지만 뒤집기 타이머는 영원을 보내는 좋은 수단이자 삶을 증명하는 유력한 징표였다. 세 시간을 계획대로 보내면 가치 있는 삶을 산 것처럼 보람 있었고 그렇지 않으면 절망을 느꼈다. 돌이켜보면 절망이 많았다. 의도와 달리 대부분 시간은 다음 뒤집기를 기다리는 데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지난 인생은 오래 기억될 인생이었다. 보람이나 절망 따위를 넘어 근원적인 의미가 있었다. 우선 숫자가 주는 위안이 있었다. 천백십일 번째 뒤집기부터였나, 숫자가 맞아떨어지면 묘한 쾌감이 일었다. 같은 숫자가 반복되는 인생은 중요한 기념일처럼 느껴졌고, 이천사백이십사 번째 인생에서는 어쩐지 집을 옮겨야 할 것 같은 생각에 들뜨기도 했다. 이번에도 그랬다. 세간의 오해와 달리 사(四)는 가장 안정적인 숫자다. 사계절, 사방위, 사주, 사지 등 증거는 차고 넘친다. 육(六)은, 굳이 의미를 찾자면 육신이나 신체가 떠오른다. 안정적인 두 개가 불안정한 신체를 앞뒤로 막았으니 이보다 조화로울 수 없었다. 아쉬움도 있었다. 새로운 남자가 문제였다. 숫자의 배열보다 아내가 처음으로 숙면을 취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밤에도 나의 몸은 뒤집혀야 한다. 이번 인생에서 아내는 한 번도 깨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여유롭게 아프리카 초원을 누볐고 아련한 젊은 시절을 경험했지만 살아있다는 느낌은 희박했다.
교인들의 소리가 줄었다. 아이들은 스마트폰을 만지고 있을 것이고, 부목사는 성경을 보거나 벽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을 것이다. 계속 말을 걸면 기적처럼 눈을 뜬다는 사례가 많을 텐데, 아내도, 어머니도, 교인들도 말을 걸지 않았다. 나는 깨어날 여지가 있었다. 무엇보다 의식이 명료했다. 뇌파 검사로도 증명되었다. 의사는 손을 들어보라 했다. 나는 양쪽 팔에 온정신을 쏟았고, 의사는 미세한 뇌 활동이 감지된다고 했다. 아내는 들떴다. 의사는 가라앉혔다. 우연 혹은 인과관계 없는 반응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았다. 편견 없는 건 아이들이 나았다. 능숙하게 요를 받고 있는 은희도 그중 하나였다. 나에게 조용히 대화를 시도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듣고 싶은 말을 하는 때는 없었지만 살아있다는 걸 느끼게 해 주었다. 지금처럼.
오늘도 천국 안 가요?
아내가 돌아왔다. 교인들이 떠나고 아내는 묵묵히 나의 몸을 뒤집었다. 오후 다섯 시나 되었을까, 사천육백육십오 번째 뒤집기였다. 사각거리는 소리로 마사지가 시작되는 것을 알았다. 줄을 잡아당기는 소리는 석션 튜브로 가래를 빼는 소리였다. 보통은 아침에 하는 일인데 오늘은 늦었다. 조르륵 물 내려가는 소리는 소변을 비웠다는 것이고 천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옷을 입히거나 벗긴다는 뜻이었다. 이제 첨벙첨벙 물 튀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 목욕은 알몸의 스킨십을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이벤트였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소리에 집중했다. 조용했다. 물 튀는 소리 대신 단추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목욕은 나중에 하자. 도저히 못 보겠어. 미안해. 무서워. 사천육백육십오 번째 인생에서 아내는 목욕을 중단했다. 한밤중 깨지 않은 것도, 목욕을 거르는 것도 처음이었다. 아내의 단어를 곱씹었다. 새로운 남자 때문에 내 얼굴을 못 보겠다는 자책과 그걸 반영한 사과는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무섭다는 말이 문제였다. 4665. 이전까지는 좋았잖아. 나도 무서웠다. 무엇 때문에 아내가 무서워하는지, 경험할 수 없는 세상에서 내가 어떻게 비치고 있을지, 알 수 없어서 무서웠다.
천 쓸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불을 덮어준 아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사뿐거리는 소리가 잠깐 들리고 거실에서 설거지 소리가 들렸다. 교인들이 남긴 그릇일 것이다. 잠을 자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세 시간의 인생 중 사천육백육십오를 외워야 할 시기였지만, 이번에는 다른 일을 하기로 했다. 사천육백육십사의 인상이 강렬해서 그다음 숫자는 힘들여 암기할 필요가 없었다. ‘완벽한 숫자 다음의 횟수’ 정도로 기억하면 충분했다.
모처럼 여유가 생겼는데 아내의 돌발행동에 불안을 떨칠 수 없었다. 나는 상상으로 모눈종이를 그리고 지뢰 찾기 게임을 했다. 잡념이 가득하거나 무료할 때 종종 하던 게임이었다. 룰은 간단하다. 바둑판 같은 여러 칸에서 숨겨진 지뢰를 찾으면 된다. 지뢰를 누르면 게임에서 패배하고 지뢰가 없는 곳을 누르면 주변 지뢰만큼 숫자가 나타난다. 컴퓨터로 할 때는 수십 칸의 게임도 어렵지 않게 성공했는데, 기억만으로 진행할 때는 가로 여섯 칸, 세로 여섯 칸, 총 서른여섯 칸이 한계였다. 게임 방식은 달랐다. 처음부터 지뢰 위치를 알고 시작해야 했다. 답을 정해 놓지 않으면 게임 구성 자체가 불가능했다. 컴퓨터 지뢰 찾기가 정답을 찾는 과정이라면 나의 게임은 답을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 변죽을 들추고 거기에 들어갈 숫자를 암기하는 과정이었다. 정답만 기억하면 잘못된 숫자를 써넣더라도 실패할 리 없었다. 설거지 소리가 시끄러웠다. 나는 집중하여 지뢰 위치를 외웠다. 이번에는 서른여섯 칸에 일곱 개의 지뢰를 심었다. 채찍 소리가 들렸다. 아내가 고무장갑을 벗었다. 요란한 진동 소리에 아내는 전화를 받았다. 나는 게임을 시작했다. 첫 번째 지뢰가 있을 곳에 엑스 표시를 하고 주변 빈칸을 들췄다. 들춘 곳마다 숫자를 적고 외웠다. 두 번째 지뢰 근처에도 같은 방법으로 숫자를 적었다. 지금요? 집 앞이요? 아내가 답했다. 여기는 4, 저기도 4. 서서히 지뢰 위치가 드러났다.
오랜만의 방치였다. 주인 잃은 숨소리만 가득했다. 아내를 위하든 나를 위하든, 할 수 있는 일 없었다. 생각을 멈추고 싶었다. 죽음 같은 무력, 정확히는 죽음 이상의 무력이 찾아왔다. 내 힘으로는 죽는 것조차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무력과 죽음, 어느 하나 선뜻 선택하기 어려웠다. 물론 아내를 위한다는 명분만 있으면 죽음을 받아들일 의향은 있었다. 의식이 끊기는 짧은 순간만 견디면 아내를 잃는 대신 무력과 영원에서 벗어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죽음은 아내를 향한 나의 의지여야 한다. 다른 남자의 등장 따위가 원인이어서는 안 된다.
삐걱대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렸다. 두 명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내의 소곤거림 가운데 익숙한 남자 목소리가 섞였다. 차분하고 중후한, 은희 아빠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긴 대화가 시작됐다. 세 번째 결혼기념일, 아내와 나는 푸른 네온 조명 아래 은은한 스모그가 퍼지는 레스토랑에서 이제 아이를 가지는 게 어떨까, 걱정과 설렘을 담아 한참을 이야기했다. 곧 새로운 미래가 결정되었고, 우리는 모처럼 분위기를 내어 이름 모를 와인을 세 병이나 비웠다. 무대 위 재즈 연주는 감미로웠고 적당히 올라간 체온은 초겨울 추위와 완벽한 균형을 이루었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 옥외 광고판 위로 마치 이 순간을 기다린 것처럼 좁쌀만 한 첫눈이 내렸다. 아내는 잠들었고, 나는 차창 밖 풍경을 찍으려고 스마트폰을 찾았다. 바지와 외투의 모든 주머니를 뒤져도 만져지는 것이 없었다. 평소처럼 아내가 챙겨두었을까, 화장품과 거울, 볼펜, 노트, 목도리로 수북한 숄더 백을 뒤적거렸다. 어두웠다. 그렇지, 실내등을 켜야지. 이제야 모든 게 제대로 보였다. 여전히 아내는 머뭇거렸고 남자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은희도 허락했어요. 이제 놓아줍시다.
주변이 밝아지고 모든 게 선명하게 보이는데, 유독 스마트폰만은 찾을 수 없었다. 진눈깨비 사이 휘날리는 옥외 광고판만 오래 바라보았다. 이윽고 섬뜩한 발파음이 들렸다. 굴착기였다. 나는 창을 열고 소리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차도 옆에 깨끗한 공사장이 있었다. 굴착기는 굉음을 내며 모래를 뚫고 있었다. 신기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첫눈 내리는 결혼기념일에 공사장 한가운데서 모래를 뚫는 굴착기라니, 영상에 담아 아내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스마트폰! 포기하기엔 일렀다. 다시 숄더백과 외투를 뒤졌다. 처음부터 없던 것은 아닌지, 아름답기만 했던 레스토랑에 실수로 두고 온 것은 아닌지, 불안한 기운이 스멀거렸다. 큰소리로 스마트폰을 외치던 그때, 아마 아내가 눈을 떴던 것 같다.
남편이 무서워요. 눈동자가 사라지고 다리는 새까맣게 타고 있어요.
눈을 뜬 아내는 다시 잠들었다. 과음 탓인지 코를 골기도 했는데, 굴착기 소리와 쿵작쿵작 장단이 잘 맞았다. 그다음 기억은 없다. 정신을 차리고 처음 들린 것은 이럴 바에야 죽는 게 낫겠다는 어린 꼬마의 음성이었다. 은희, 그 작은 계집애. 죽는 게 낫겠다고? 남의 인생 그렇게 쉽게 평가하면 안 된다. 죽는 게 나아도 죽을 수 없는 사람의 비통함을 어찌 알겠는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순응뿐이었다. 오늘 숨을 쉬면 내일도 숨을 쉬어야 했고, 내일의 숨을 위해 오늘도 숨을 쉬어야 했다. 영원이 익숙해졌다. 증오는 없었고 열망도 사라졌다.
십칠 년입니다. 할 만큼 하셨어요.
남자의 중얼거림이 거슬렸다. 조용히 좀 하라고! 생각 중이잖아! 어쨌든 아내는 나와 함께여야 한다. 이 년이든, 십칠 년이든, 세상의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 아닐 거야. 이 년이라니까? 참으로 소박한 욕망이 아닐 수 없다. 맞지? 아직 이 년이지? 아내라면 충분히 실현해 줄 수 있는 아주 작은 소망, 그 쉬운 걸 아내가 버거워한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행복했던 과거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행복했던 시절의 마지막 장면.
시끄러운 공사장 소리를 대신해 고주파 진동이 시작됐다. 굴착기 소리를 밀어낼 정도로 볼륨이 높았다. 삐이익, 귀로는 수음할 수 없는 높은 톤의 비명이 아내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무슨 대화를 나눌지 궁금하여 귀를 기울였으나, 언어는 없고 신음만 가득했다. 스무 살의 정수가 담긴 아내의 탄성, 교태의 극치였다.
*
시간은 멈추었다. 졸렸다. 잠이 들었다. 잊었다. 소리가 들렸다. 뒤집혔다. 사천육백육십 얼마였더라, 기억에 자신이 없었다. 아내에게 새 남자가 생긴 건 분명했다. 누구일지 궁금했다. 그러고 보니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데자뷔인가? 긴 꿈이었지만 깨자마자 첨벙대는 소리가 들려 금세 잊혔다. 낮은 수압으로 바가지에 물을 담기까지 삼 초가 걸렸다. 조심스러운 볼륨으로 물방울이 튀었다. 눈뜨고 싶은 욕망이 들끓었다. 차분하게 수건 쓸어올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성이 느껴졌다. 마사지 소리가 끝나고 문밖으로 저녁 뉴스가 들렸다. 롯데가 정규 시즌 우승을 확정했다. 오늘의 우승인지, 십 년만의 우승인지 알 수 없었지만, 누구에게나 시간은 공평하게 흘러 결과를 만들어냈다.
목욕을 마친 아내는 처남과 전화했다. 하나뿐인 아내의 혈육이었다. 대화의 행간을 보아 한 시간 내로 우리 집에 방문할 예정이었다. 아내가 급하게 목욕시킨 이유였다. 통화는 짧게 끝나지 않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처남은 교인 몇 명과 같이 오겠다고 했다. 베개를 바로 잡듯 솜이 퍼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내는 침대에 걸터앉아 말이 없었다. 어디를 보고 있을지 궁금했다.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불안했다. 열네 번의 진동에도 아내는 꿈쩍하지 않았다. 고민하는 듯했다. 휴대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안방을 걸었다. 몇 분 만에 손에 쥔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고 이번에도 아내는 반응하지 않았다. 고마웠다. 두 번의 거절은 나를 위한 배려였다.
아내는 끝내 세 번째 전화를 받고 ‘네’와 ‘모르겠어요’가 전부인 대화를 시작했다. 통화는 금방 끝났다. 아내는 침대를 지키며 생각에 잠겼다. 귓가에 아내 숨소리가 들렸다. 무슨 대화를 했을지 상상했다. 아내의 톤은 낮았고 발음은 어눌했다. 상대방 말을 거스르는 느낌은 아니었다. 첫 경험 때 아내의 대답이 떠오르는 말투였다. 우스꽝스러운 질문에 아내는 당황했다. ‘어’와 ‘근데’라는 말만 몇 번이고 더듬거리며 반복했다. 답은 정해져 있는데, 그것이 아내의 진의인지 알 방법도 없는데, 나는 기어이 아내에게 승낙을 강요했고, 아내는 마지못해 어깨에 기대어 소곤거렸다.
미안해.
처남은 이름 모를 꼬마 아이와 왔다. 처남과 꼬마, 그리고 은희 가족까지, 거실에서 아내를 포함한 다섯 명의 목소리가 들렸다. 결혼식 후로 처남을 본 적은 없었다. 이듬해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유학을 떠났는데, 지금쯤 한창 석사를 마무리할 시기였다. 늦은 시간이었다. 처남은 은희 가족에게 사과했다. 급한 일이 생겨 새벽 출국으로 일정이 바뀌었다고 했다. 어른들은 무언가 합의를 시도했다. 두 명의 아이는 증인이었다. 은희는 어른스럽게 아빠를 따르겠다고 했다. 다른 아이는 초등학생의 억양과 말투로 모르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서른도 안 되었을 처남에게 줄곧 ‘아빠’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대체 이 년 사이 무슨 일이 있던 걸까.
다섯의 의견이 모이자 무거운 이야기가 오고 갔다. 평소와 달리 아내가 대화를 주도했다. 눈물이 간간 섞인 일방적인 독백이었다. 아내는 어제 겪은 일처럼 생생하다고 했다. 당장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은 없었다. 뒤를 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눈앞의 과제만 따라가다 보니 벌써 오늘이 되었고, 긴 세월이 마치 하루 같았다고 했다. 굴착기가 필요했다. 화강암을 때려 부술 만큼 강한 굴착기가 필요했다. 귀를 부수고 싶었지만 공사는 이미 끝났다. 모든 소음은 고운 모래 아래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아이들은 말이 없었고 처남은 크고 작은 한숨으로 대꾸했다. 나의 시간과 아내의 시간이 불협화음처럼 충돌했다. 아내를 추측했다. 아내의 인생도 세 시간에 한 번씩 뒤집혔을 것이다. 내가 긴 인생을 보내는 동안 아내는 이불과 옷을 빨았다. 간병 사례를 수집하고 동영상을 편집하며 요를 받고 허둥지둥 마사지하다가 출근을 준비했다. 돈을 받았을 것이고 돈을 썼을 것이다.
아이들은 졸린다고 했다. 은희 가족이 먼저 떠났고, 꼬마는 이내 코를 골았다. 처남의 대화는 황량했다. 나의 가치가 빠진 객관적인 이야기만 오고 갔다. 듣고 싶지 않았다. 귀를 닫고 지뢰 찾기 게임을 했다. 집중할 것이 필요했다. 신중하게 모눈종이를 그리고 다섯 개의 지뢰를 심었다. 빈칸을 찾아 누르고 주변 지뢰의 숫자를 기록했다. 정답을 알고 있는데 숫자가 자꾸 잘못 적혔다. 어려웠다. 그래서 매형은? 숫자가 바뀌면 정답도 바뀌었다. 상관없었다. 지는 건 불가능한 게임이었다.
은희 아빠가 요양원을 알아봤대.
아내는 돌이킬 수 없었다. 내가 받아들이는 것이 옳았다. 생각밖에 없는 삶에서 가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무얼 해야 할지 생각했다. 은희를 양자 삼는 게 먼저였다. 그래서 양자로 삼았다. 은희는 나의 딸이다. 아내의 삶에 아무런 영향이 없는 선언이었다. 나의 선언으로 영향을 받을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선언을 통해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매형이 불쌍해. 나는 가치 있다. 사라져서는 안 될 존재다. 그리고 누나도. 아빠가 되는 건 상상해 본 적 없었다. 사춘기 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막막했다. 은희라면 장소가 바뀌어도 나를 찾아 몸을 뒤집을 것이다. 속삭이는 내용도 달라질 것이다. 모르겠어. 어떤 게 내 진짜 마음인지. 은희는 내 딸이다. 아빠가 두 명이다. 나는 아내의 남자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생각했다. 명칭이 있긴 한가? 누구라도 상관없었어. 은희 아빠 아니었으면 다 같이 죽었을지도 몰라.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서로 부를 일이 없기를 바랐다. 내키지 않지만 남자를 인정하기로 했다. 아내의 행복을 위해서였다. 나의 가치가 한 단계 높아졌다. 생각은 내가, 행동은 남자가 한다. 이 정도면 누구도 불리하지 않았다. 좋은 생각이었다. 뿌듯했다. 뿌듯했고, 그다음은 몰랐다. 허공이 차가운 소리를 냈다. 가치는 문제가 아니었다. 외로웠다. 울고 싶었다. 소리 내고 싶었다. 나는 계속 숨 쉬고 싶었다.
그런 말 하지 마. 그래도 살아야지. 살아있는 사람은.
*
자정이 지났다. 처남은 새벽 비행기를 탈 것이라며 꼬마를 안고 나갈 채비를 했다. 아내는 배웅하지 않았다. 고요했다. 아내 위치를 찾을 수 없었다. 어디선가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것이다. 생각할 시간이 없어도 나보다 많은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적막 가운데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나는 아내가 들렸다. 들으려 하지 않았던 소리였다. 연민의 총량을 빼앗길까 두려웠던 소리였다. 몸이 뒤집혔다. 아내에게 한마디를 남길 수 있다면 무얼 남겨야 할지 고민했다. 주어를 정할 수 없었다. 익숙하지 않은 소리를 들었다. 마사지 소리보다 톤이 높았다. 이 초 간격으로 스르륵, 아내가 내 얼굴을 매만지는 소리였다. 스무 살의 예쁘장한 여자아이가 떠올랐다. 살며시 손등이 스칠 때 사각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긴 터널을 걸으며 우리는 손을 놓지 않았다. 어두웠다. 나는 생각에 갇혔고 아내는 시간에 갇혔다. 이해한다. 이해하기로 했다. 이미 모든 것을 알았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몰랐을 뿐이다.
결국 나는 누워있기로 했다. 할 수 있는 일을 찾은 것이다. 의미나 가치는 접어두기로 했다. 실천 없는 생각만 고착시킬 뿐이었다. 바라는 것을 지웠다. 이별할 때가 되었다. 생각은 그만하고 시체처럼 누워있기로 했다. 결심을 마쳤다. 비웃음이 들렸다. 내가 만든 소리였다. 복부를 가르고 한꺼번에 쏟아지는 구더기 떼처럼 온갖 생각이 터져 나왔다. 몸이 뒤집혔다. 아내는 늙고 병든 첫사랑을 바라보았다. 서럽게 울다가 고개를 숙이고 귓가에 속삭였다. 이제야 말해서 미안해. 다른 남자가 생겼어. 나는 문득 콜라가 엉겨 붙은 낡은 이불이 떠올랐다. 대학교 첫 엠티였나? 이불 아래 손을 넣고 손바닥을 쓰다듬었던 시절이었다. 아내도 기억할 것이다. 그때의 장면이 남아있다면 조금은 더 인내할 수 있지 않을까? 아내의 고백에도 나는 선택할 수 없었다. 죽고 싶은 이 시간이 조금만 더 유지되기만을 바랐다. 나는 조심스레 되물었다. 이해해. 그래도,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꼭 그래 달라는 건 아니고, 조금만 더 시간을 줄 수는 없겠지?
대답을 기다렸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멈추고 단추 푸는 소리가 들렸다. 마사지가 시작될 것이다. 몇 번째 뒤집기인지 떠올리다 숫자 암기의 이유를 잊었다. 기다림이 우선이었다. 아내의 따뜻한 손길을 떠올리며 대답을 기다렸다. 듣고 싶은 말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마지막 선택의 시간이 다가왔다. 아내는 순간을 영원처럼 견디었다. 몸을 뒤집는 것만으로 아내는 과한 애정을 보여준 것이다. 거기에 한마디만 더 해 준다면, 욕심인 줄 알지만, 나의 존재 이유는 충분했다. 당신과 함께여서 행복했다는 거짓말 같은 속삭임이건, 내 인생 돌려내라는 불평 섞인 회한이건, 무슨 말이건, 한마디면 충분했다. 부디 한마디만 들리기를, 대답을 기다리다 오래 기다리다 아무런 답도 얻지 못한 채 사천육백육십사 번째 뒤집기, 그래, 이 숫자를 잊어서는 안 된다, 나도 모르는 사이 잠이 들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지 못한 채 마지막 의식이 끊기기 전에, 사천육백육십사. 사천육백육십사.
<당선소감>
봐 주는 사람 있든 없든 … 글쓰기 계속 이어갈 것
사춘기 시절부터 사람 사는 것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나는 이런 생각으로 이렇게 사는데, 왜 저 사람은 저렇게 사는 걸까. 호기심이 많았지만 내향적인 성격 탓에 누군가에게 말을 꺼낸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다 자연스레 소설을 쓰게 되었습니다. 소설을 쓰다 보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치기 어린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남의 속을 본다는 건 생각보다 고통스러웠습니다. 타인의 사정을 내 멋대로 단정 짓고 있는 건 아닌지 회의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언젠가부터 한 문장을 완성하는 것이 어려웠고, 무얼 써야 할지 길을 잃은 날도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글 쓰는 걸 멈출 수 없었습니다. 왜냐고 물으면 딱히 할 말이 없습니다. 무언가 거창한 가치를 생각한 것도 없습니다. 마치 살아있는 사람의 본능인 것처럼 계속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봐주는 사람이 있든 없든, 수많은 문장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다 덜컥 신춘문예 당선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얼떨떨합니다.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지만 동시에 엄중한 책임감을 느낍니다.
소설의 걸음마를 떼게 해 주신 조영아 선생님께 감사를 전합니다. 일기 같은 글이 소설의 형태를 갖추기까지, 9할은 선생님의 가르침 덕이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읽기와 글쓰기의 재미를 알게 해 주신 김성중 선생님께도 감사를 전합니다. 그리고 묵묵히 글쓰기를 응원해 준 가족, 특히 아내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합니다.
당선 소식을 들은 날, 국제신문 심사위원님들과 짧은 통화를 했습니다. 경황이 없어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는데, “계속 쓰는 게 중요해요.” 어느 분이 지나가듯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이 잊히지 않습니다. 작은 소리였지만 진심이 느껴졌습니다. 그 말을 따르려 합니다. 앞으로도 중요한 것을 계속 이어 가겠습니다..
● 1977년 충남 금산 출생 ● 성균관대 영문과 졸업 ● 변호사. 서울 거주.
<심사평>
독특한 설정, 압도적 몰입감… 독백적 발화 밀도 탁월
올해 투고작은 예년에 비해 다소 줄어 321명이 330편을 응모했다. 노년 세대의 투고작이 많았다. 대조적으로 청년 세대의 주거 불안정과 최저임금을 다룬 소설이 여럿 눈에 띄었다.
노동현장을 세밀하게 묘사한 작품이 많아졌다는 사실이 이채로웠다. 건설현장, 라이더, 택배, 펫시터 등 실제 체험 없이는 불가능한 묘사가 인상적이었다. 이주노동자들이 서사의 중심으로 진입하고 있는 것도 반가웠다.
자립청소년, 은둔형 외톨이, 요양원 등 그늘 가득한 삶의 모습에 대한 관심은 여전했다.
본심에서 거론된 작품은 ‘4664’, ‘아웃포커싱 하이라이트’, ‘풍선병’, ‘빛이 우리를 스칠 때’, ‘차곡차곡 쌓이는’ 등 5편 정도였다. 최종적으로 논의된 작품은 ‘4664’와 ‘아웃포커싱 하이라이트’ 두 편이었다.
‘아웃포커싱 하이라이트’는 부재의 현상학에 관한 서사다. 세상을 떠난 존재가 읽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사로잡는 서사적 기법이 능숙했다. ‘4664’의 서술자는 코마 상태의 환자다. 이 특이한 설정으로 서사적 긴장을 끝까지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아웃포커싱 하이라이트’의 깊은 여운에도 불구하고 ‘4664’의 압도적인 몰입감과 독백적 발화의 밀도에 기대를 걸기로 했다. ‘4664’를 당선작으로 결정한다. 선자들 모두 이견이 없었다.
당선자에 축하의 말씀을 드린다. ‘아웃포커싱 하이라이트’ 또한 당선작으로 밀어도 충분한 작품이었다. 다른 지면에서 볼 수 있으리라 믿는다. 소설가가 아니기엔 이미 먼 길을 온 듯하다.
다른 응모작들도 각기 남다른 개성과 미덕을 가지고 있었다. 부단한 정진을 바란다.
심사위원 : 함정임, 김탁환 소설가, 박대현 문학평론가
<AI와 함께하는 작품 분석>
0) 제목 ‘4664’가 먼저 하는 일: 이야기를 “사건”이 아니라 “리듬”으로 바꾼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움직이지 못하고, 볼 수 없고, 말할 수 없고, 듣기만 가능한 상태입니다. 그러면 서사는 보통 멈추죠. 그런데 작가는 ‘뒤집기 횟수’를 시간의 단위로 만들어 사건을 발생시킵니다.
- 3시간마다 뒤집힘 → 하나의 “인생”이 시작/종료
- 그 “인생”이 4664번째에 도달 → 이야기는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를 하나의 숫자에 걸어버림
그래서 제목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이 소설의 시간론(영원을 버티는 방법) 자체입니다.
1) 서두의 4줄(기사 헤드라인처럼 보이는 문장): ‘핵심 갈등’을 스포일러하면서도 더 불안하게 만든다
서두는 소설이 아니라 뉴스 속보/기록지처럼 시작합니다.
- “욕창 막으려… 세 시간마다 뒤집혔다”
- “아내가 속삭였다… 다른 남자가 생겼어”
- “17년입니다… 할 만큼 하셨어요”
- “4664번째 뒤집기… 잊어선 안 돼”
여기서 중요한 건 “정보”가 아니라 형식이에요.
- **객관 문장(기사체)**는 감정을 배제한 듯 보이지만,
- 그 안의 내용은 가장 잔혹한 개인사(불륜, 간병, 생사결정)이고,
- 그래서 독자는 시작부터 “이미 결론이 난 참사”를 읽는 기분이 됩니다.
즉, 작품은 처음부터 “무슨 일이 벌어질까?”가 아니라
“이 사람이 어떻게 이 결론까지 오게 되었나?”(몰락/침식의 과정)로 독자를 끌고 가요.
2) 1인칭이지만 ‘몸’이 없다: 이 소설의 서술자는 “청력과 생각”만 남은 존재
“구멍 깊숙이 소리가 들어왔다”라는 첫 문장은, 서술자의 존재 방식을 정의합니다.
- 구멍(귀, 혹은 의식의 통로)
- 소리만 들어오는 세계
- 따라서 현실은 시각적 장면이 아니라 소리의 배열로 구성됩니다.
이 때문에 이 소설의 묘사는 계속 이런 방식으로 움직이죠.
- 단추 잠그는 소리 = 목욕 중단
- 석션 튜브 소리 = 가래 제거
- 물 내려가는 소리 = 소변 비움
- 이불 쓸리는 소리 = 아내의 불면/죄책/불안
- 굴착기 소리 = 바깥 공사이자, 내부의 환청이자, “파고드는” 정신의 은유
사물-소리-의미로 세계를 해독하는 독특한 감각체계가 만들어지고, 독자는 그 체계에 적응하는 순간 빠져나오기 어려워집니다.
3) “다른 남자” 고백 직후 떠오르는 것이 ‘낡은 이불’인 이유
아내의 불륜 고백을 들은 화자가 즉시 떠올리는 것은 “분노”가 아니라 대학생 MT의 이불입니다.
이게 핵심이에요.
- 보통의 서사라면 “배신/증오”가 먼저 나오겠죠.
- 그런데 이 소설은 **“감각 기억”**이 먼저 튀어나옵니다.
- 콜라가 엉겨 붙은 두꺼운 이불 = 가난하고 서툴렀지만 살아있던 시절의 촉감
즉 화자는 “불륜”을 윤리 문제로 처리하지 않고,
그 말을 듣는 즉시 **사랑의 최초 장면(첫 스킨십의 열)**으로 도망가요.
이 도망은 비겁함이라기보다, 지금의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능동성입니다.
그는 싸울 수도, 붙잡을 수도, 확인할 수도 없으니까요.
남은 건 **회상(내면의 영상)**뿐입니다.
4) 굴착기 소리: 바깥의 소음이자 “의식의 천공기”
굴착기 소리는 이 작품 전체의 ‘기계적 리듬’이에요. 뒤집기와 쌍을 이룹니다.
- 뒤집기: 내 몸을 유지하는 관리 행위(생존의 기술)
- 굴착기: 내 정신을 뚫고 들어오는 침입(불안의 기술)
화자는 처음엔 현실로 받아들이고, 곧 “상식 밖”이라며 환청으로 돌리고, 다시 그 환청의 원인을 아내에게 연결합니다.
“특별한 환청이라면 결국 아내가 원인일 것이다.”
여기서 소설은 아주 잔인한 논리를 보여줘요.
- “내 삶에서 특별한 것은 모두 아내”
- 그러니 “특별한 고통(환청)도 아내”
- 인과가 아니라 의존의 논리입니다.
이 화자의 사고는 사랑의 증거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공포예요.
아내는 곧 ‘유일한 세계’인데, 그 세계가 흔들리면 현실 자체가 흔들립니다.
5) 사자 다큐 장면: ‘성’의 코믹함이 아니라, 관계의 원형을 미리 보여준다
자취방에서 틀어버린 사자 다큐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처럼 보이지만, 서사적 기능이 큽니다.
- 암사자: 출산 후유증으로 느림, 새끼에게 시달림, 사냥해야 함
- 사냥: “앞지르면 먹고, 못하면 굶는다”
- 어미 누: 화면 밖에서 울고 있음(아내가 상상으로 복원함)
이 장면은 현재의 아내를 예고합니다.
- “부양/간병/가족/인내”를 떠안고 느려진 존재
- “고생할 기회조차 없었어”라는 아내의 대사는, 훗날 17년 간병으로 이어지는 삶의 서늘한 예언처럼 작동합니다.
또 결정적으로, 화자는 이 순간에도 “중요한 건 따로 있다”며 타이밍을 재고, 결국 “우리도, 할까?”를 던지죠.
즉, 그는 항상 **머릿속 계산(생각)**으로 순간을 관리하려 하고, 아내는 그 계산 바깥의 감정/상상을 먼저 봅니다.
이 대비는 후반의 유명한 문장으로 압축돼요.
“생각은 내가, 행동은 남자가 한다.”
6) 전환부의 진짜 폭탄: ‘2년’인가 ‘17년’인가
작품 내내 가장 큰 공포는 “불륜”이 아니라 시간입니다.
초반의 헤드라인은 “17년입니다”를 던지고,
화자는 중반에 “벌써 이 년째다”라고 말합니다.
이 불일치는 단순 오류가 아니라, 서술자의 존재 조건에서 나옵니다.
- 그는 시각·행동이 없고 청력만 있어요.
- 그리고 수면/의식단절이 잦습니다.
- 뒤집기 횟수로 시간을 세지만 “잠들면 누락”됩니다.
즉, 그의 시간은 정확한 연대기가 아니라 체감 리듬(뒤집기)과 주변 소리 단서로만 구성돼요.
그런데 아내 쪽은 “세상의 시간”을 그대로 살았을 겁니다.
그래서 작품은 두 개의 시간이 충돌합니다.
- 화자의 시간: “영원처럼 늘어진 2년(혹은 그만큼)”
- 아내의 시간: “하루처럼 쓸려간 17년”
후반의 아내 독백이 그걸 말해요.
“벌써 오늘이 되었고, 긴 세월이 마치 하루 같았다고…”
여기서 소설의 비극은 “간병이 힘들다”가 아니라
같은 사건을 두 사람이 전혀 다른 시간 감각으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서로 이해할 수가 없어요.
7) ‘뒤집기’의 의미 변화: 돌봄 → 증명 → 협박 → 애정
처음에 뒤집기는 의료적 필요(욕창 방지)인데, 화자에게는 곧바로 존재 증명이 됩니다.
- 숫자를 잊는 순간 “시체와 다를 바 없다”
- 그래서 그는 숫자를 암기하며 “살아있음”을 붙잡습니다.
그런데 뒤집기가 반복될수록 의미는 점점 바뀌어요.
- 루틴: 생존 관리
- 계산: 시간 단위
- 정신의 닻: 영원을 순간으로 쪼개는 장치
- 관계의 최소치: 아내가 나를 아직 “손댄다”는 증거
그래서 마지막엔 뒤집기가 거의 “사랑의 최저 단위”처럼 돼요.
“몸을 뒤집는 것만으로 아내는 과한 애정을 보여준 것이다.”
이 문장이 잔인한 이유는, 정상적 사랑에서 “과한 애정”은 대화·포옹·미래인데,
여기서는 뒤집기 하나가 과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8) 지뢰찾기 게임: 무력한 인간이 할 수 있는 ‘통제의 흉내’
화자가 지뢰찾기를 하는 방식이 특이합니다.
- 원래 지뢰찾기는 “모르는 답을 찾아가는 게임”
- 그런데 그는 “지뢰 위치를 알고 시작”해야만 게임이 가능하다고 말하죠.
즉, 이 게임은 탐색이 아니라 **연기(아는 것을 모르는 척)**입니다.
이건 화자의 삶과 완전히 겹칩니다.
- 그는 현실에서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고,
- 최소한 머릿속에서는 “정답을 가진 세계”를 만들고 싶습니다.
- 그러나 숫자를 자꾸 잘못 적습니다.
→ 통제의 흉내마저 무너지는 순간, 공포는 배가됩니다.
9) ‘교회 사람들’과 ‘은희’ 장치: 도덕의 언어가 오히려 더 잔혹해지는 구간
교회 방문은 따뜻한 위로처럼 보이지만, 화자에게는 대부분 소음이자 객관화예요.
- “영원한 축복” 같은 말은 그에게 닿지 않고,
- “17년입니다… 산 사람은 살아야죠” 같은 말은 현실을 “처리”하려는 문장입니다.
특히 아이의 질문은 핵심을 찌릅니다.
“이렇게 누워있는 것과 죽은 것의 차이가 무어냐”
이 질문이 작품의 중심 질문이에요.
그리고 화자는 그 질문에 분노합니다.
분노 자체가 “나는 죽지 않았다”의 증거니까요.
‘은희’는 또 다른 축이에요.
- 은희는 화자에게 말을 걸어주는 “유일한 대화”의 흔적
- 후반부에 화자는 “은희를 양자로 삼았다”는 선언으로 자기 가치를 세우려 함
근데 그 선언은 실제 세계를 바꾸지 못합니다.
오히려 “선언만으로 가치 있다”는 자기최면이 깨지는 순간, 남는 건 외로움뿐이죠.
10) 후반의 진짜 공포: 불륜이 아니라 “아내가 나를 무서워한다”
중요한 장면이 있어요.
“도저히 못 보겠어. 미안해. 무서워.”
불륜 고백보다 이게 더 잔혹합니다.
왜냐하면 화자가 가진 유일한 삶의 끈은 ‘아내의 손’인데,
그 손이 나를 돌보면서도 두려워한다는 뜻이니까요.
그리고 뒤에 결정타로 회상/재구성이 붙습니다.
“남편이 무서워요. 눈동자가 사라지고 다리는 새까맣게 타고 있어요.”
이건 현실 묘사라기보다, 아내가 술에 취해 본 악몽/환각/공포 이미지일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사실 여부가 아니라, 아내가 그 공포를 품고 17년(혹은 긴 시간)을 버텼다는 점이에요.
즉, 아내는 “나를 사랑했지만, 동시에 나를 두려워했고, 그 두 감정 사이에서 갈려나갔다”는 것.
11) “삐이익 고주파”와 “교태의 탄성” 장면: 독자의 도덕 감각을 흔든다
중후반에 등장하는, 아내의 신음/탄성처럼 들리는 소리 묘사는 일부러 독자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 화자는 “언어는 없고 신음만”이라고 듣습니다.
- 그걸 “첫 경험의 탄성”과 겹쳐 떠올립니다.
여기서 작가가 노리는 건 “불륜의 선정성”이 아니에요.
오히려 반대입니다.
- 우리는 이 소리가 정말 불륜의 소리인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 화자는 환청과 현실을 계속 혼동하고, 기억은 망상과 결합해요.
- 하지만 “불륜”이라는 서사는 너무 강해서, 독자는 자동으로 그쪽으로 해석합니다.
즉, 작품은 독자의 머릿속에서 판결이 내려지는 과정을 드러내요.
“증거 없이도 우리는 누군가를 단정한다.”
화자가 스스로 “타인의 사정을 내 멋대로 단정 짓는 게 아닌지”라고 당선소감에서 말하죠. 이 소설 자체가 그 문제의 실험장입니다.
12) 결말의 구조: 원(圓)으로 돌아오는 이유는 ‘해결’이 아니라 ‘의식의 반복’이기 때문
마지막은 해결이 아니라 반복입니다.
- 화자는 아내에게 “조금만 더 시간을 줄 수는 없겠지?”라고 묻고,
- 답을 기다리다가,
- “4664”를 다시 붙잡으며 의식이 꺼져요.
여기서 4664는 더 이상 “살아있음의 증거”만이 아닙니다.
- 답을 듣지 못한 채 끝나는 관계의 숫자
- 선택권이 없는 존재가 붙잡을 수 있는 마지막 표식
- 서사가 ‘진전’하지 못하고 제자리로 돌아오는 고리
그래서 소설은 마치 “뒤집기”처럼 독자를 한 번 더 뒤집습니다.
처음 서두의 헤드라인(4664)을 다시 돌려주며 끝내죠.
결국 이 작품의 형식 자체가 “코마의 시간”을 닮아 있어요.
핵심 주제 정리 5가지
1) 존재 증명으로서의 “숫자”
4664는 사랑도, 윤리도, 신앙도 아닌 존재의 최소 단위가 된다.
2) 돌봄의 윤리 vs 돌봄의 피로
아내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 시간에 갈려나간 사람으로 그려진다.
불륜 고백은 욕망이 아니라 “인간으로 살기 위한 마지막 흔들림”처럼 처리된다.
3) 시간의 충돌
환자는 영원을 살고, 간병인은 하루를 산다.
둘은 같은 집에 있지만 서로 다른 시간대에 갇혀 있다.
4) 소리의 세계가 만드는 공포
시각이 없을 때 세계는 “의미”가 아니라 “징후”로만 들어온다.
그 징후 해석이 흔들릴 때, 현실 전체가 무너진다.
5) ‘산 사람은 살아야’라는 말의 잔혹함
이 말은 맞는 말이지만, 듣는 사람(누워 있는 사람)에게는
“너는 이미 산 사람이 아니다”라는 선고처럼 들린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에서 “다른 남자”는 실제 인물이라기보다 ‘기능’일 가능성이 크다
물론 서사상 “다른 남자”가 실제로 존재할 수 있어요(은희 아빠, 교회/돌봄 네트워크 등).
하지만 작품이 주는 체감은 이렇습니다.
- 다른 남자는 사건의 중심이 아니라,
- **아내가 결단해야 하는 “삶의 방향”**을 구체화하는 매개입니다.
- 화자에게는 그게 “배신”으로 들리지만,
- 아내에게는 “살아남기 위한 출구”일 수도 있어요.
그래서 이 소설은 불륜극이 아니라,
돌봄의 끝에서 ‘관계가 죽지 않은 채 삶이 죽어가는 상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라는 윤리극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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