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한국일보 신춘문예 희곡 당선작] 실화를 바탕으로 함 / 김정민

<당선작>
실화를 바탕으로 함 / 김정민
등장인물
만돌
배우 - 만돌 역의 배우가 1인 2역
옹점 - 흰 머리의 옹점 / 검은 머리의 옹점 (동일 인물)
능룡
홍장군
순사
주인장
복면남
프롤로그
현재, 텅 빈 무대.
속옷 차림의 배우가 이불을 들고 들어와, 바닥에 펴고 눕는다.
배우: (관객에게) 안녕하세요. 저는 이름 없는 배우입니다. 남의 인생 흉내 내며 산 지 이십 년쯤 됐습니다. 제법 오래 버텼죠? 예? 잘하냐고요? 글쎄요… 요즘은 역할이 없네요. 오디션도 없고, 대본도 안 오고요. 그래서 그냥 쉬고 있었습니다. 쉬고 있었는데…
흰 머리의 옹점이 등장한다. 손에는 낡은 옷 한 벌이 들려 있다.
옹점이 곁에 앉자, 배우가 일어난다.
옹점: 아가.
배우: 할머니, 잘 지내셨어요?
옹점: 그래. 우리 손주는 요즘 뭐 하니?
배우: 그냥 쉬어요.
옹점: 저번에도 쉰다더니?
배우: 그땐 기다렸고요. 이번엔 기다리는 것도 쉬는 중이에요.
옹점: 이제는 네가 직접 해보는 게 어때?
배우: 몰라요. 뭐가 있어야 하죠.
사이.
옹점: 사실 할미한테 끝내주는 얘기가 있거든.
배우: 무슨 얘긴데요?
옹점: 네 할애비 얘기.
배우: 할아버지요?
옹점: 그래. 얼마나 대단했다고.
배우: 다들 자기 얘기는 끝내준다고 해요. 그리고 저 글 써 본 적 없어요.
옹점: 글이 뭐가 필요하니. 내가 말로 다 해줄게.
배우: 그래도 형식이란 게 있잖아요.
옹점: 그러니까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이놈아. 나는 말해줄 이야기가 있고, 너는 그걸 살아낼 줄 아는데.
옹점, 옷을 건네주고 퇴장한다.
배우: (관객에게) 저는 할아버지를 직접 뵌 적이 없습니다.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거든요.
배우, 자리에서 일어나 이불 밖으로 나온다.
배우: 아무튼 그게 시작이었어요. 처음에는 그냥 그런 옛날 얘기인 줄만 알았는데, 이상하게 듣고 나니까 계속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한 번 해보기로 했습니다.
배우, 옷을 입는다. 일제시대의 국민복이다.
1장
1941년, 경성의 어느 주막.
무대 왼편에는 식탁 하나와 의자 두 개. 오른편은 어둠.
딸랑- 문 열리는 종소리가 들리고, 오른편에서 만돌이 들어온다.
(주방, 출입문, 계산대 등은 마임으로 처리된다.)
만돌: 계십니까?
고요한 주막 안. 만돌이 쭈뼛쭈뼛 식탁 앞으로 가 앉는다.
잠시 후, 왼편 주방 쪽에서 주인장이 나온다.
주인장: 아이고, 또 오셨구먼! 근디 우짜죠잉, 지금 재료가 다 떨어져 부렀는디.
만돌: (벌떡 일어나며) 아, 기럼 다음에…
주인장: (눌러 앉히며) 아니, 그라지 말고, 내 장을 봐올 텡게, 여 짬만 계실라요?
만돌: 예?
주인장: 퍈히 있어요, 퍈히. 내 언능 댕겨올게!
주인장, 딸랑- 종소리와 함께 퇴장한다.
만돌, 혼자 남아 있는데,
다시 딸랑- 문 열리는 소리. 능룡이 들어온다.
능룡: 막걸리 하나.
만돌: 예? 아, 여 주인장 아즈바이 짐 장 보러 갔소. 곧 돌아올 거요.
능룡: 댁은 뉘쇼?
만돌: 나요? 나는 객(客)이오.
능룡: 그럼 지금 여기 아무도 없는 거요?
만돌: 그렇소.
능룡, 주위를 훑으며 서성인다.
능룡: 이런 데는 털어도 아무도 모르겠는데.
만돌: 예?
능룡: 내가 한번 털어봐도 되겠소?
만돌: 예?
능룡: 강도질 좀 해도 되겠냐, 이 말이야.
사이.
만돌: 그,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오. 난 그냥 객인데…
능룡, 금전함을 열고 돈을 턴다.
만돌, 얼어붙은 채 자리에 앉아 있다. 그때,
순사: (어둠 속에서) 오능룡이를 바로 알아봤다고레?
일본 순사가 오른편에서 걸어 나온다.
지금까지의 장면은 회상이었던 듯, 순간 '일시 정지'되는 장면.
능룡은 그대로 멈추고, 순사는 만돌의 맞은편에 앉는다.
만돌: 하잇! 수배 전단에서 본 적이 있스므니다!
순사: (식탁 쾅 치며) 코노야로! 그놈와 처음부터 여길 털 생각이었쓰까?
만돌: 자, 잘 모르겠스므니다.
순사: 근데 여기가 털리는 동안 자넨와 뭘 했쓰네?
만돌: 아… 아무것도 못 했스므니다.
순사: 나니?
만돌: 에, 그게 소레와, 주인장이 금세 돌아오는 바람에…
딸랑- 양손 가득 짐을 들고 들어오는 주인장.
일시 정지 상태의 능룡을 못 보고, 만돌에게 걸어온다.
주인장: 아이고, 참말로 미안허고 고맙소잉, 내 손님은 특벨히 곱빼기루…
순간, 일시 정지 상태가 풀리는 능룡.
주인장의 뒤로 다가가, 손가락으로 권총을 만들어 겨눈다.
능룡: (입으로 소리 내며) 빵.
주인장: 으악!
주인장, 픽 쓰러진다.
순사: 그러고 휙 가버렸다, 이 말이네?
만돌: 하, 하잇.
능룡, 몸을 돌려 사라진다.
순사: 일단 알겠쓰네. 자넨와 다시 호출이 갈 것이네.
순사, 주인장의 다리를 잡아끌며 퇴장한다.
만돌, 엉거주춤 일어나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린다.
만돌: 바, 반자이! 덴노 헤이카 반자이!
2장
그날 저녁, 만돌의 집 안방.
무대 오른편에 이불이 깔려 있고, 왼편은 어둠.
만돌과 검은 머리의 옹점이 한 이불을 덮고 나란히 앉아 있다.
옹점, 신문을 펼쳐 읽는다.
옹점: (소리 내어) 오늘 오후 동대문 주막에 괴한이 침입하여 주인을 권총 사살한 후 현금을 강탈, 도주하였다. 취조 결과, 범인은 지난겨울 한성은행 무장 강도 사건의 범인 오능룡으로, 아직 행방이 미상하다 한다.
옹점, 신문을 내려놓고 멍하니 앉아 있는 만돌을 본다.
옹점: 괜찮소?
만돌: 어.
옹점: 긴데 얼굴빛이 어째 그러오?
사이.
만돌: 내 실은, 고 쪽바리 순사 새끼헌티 아이 말한 기 있다.
옹점: 무스겜까?
만돌: 뭐이 벨 건 아이고, 오능룡이 고 쌔스개허구 나허구 둘 간에 사정인데…
무대 왼쪽 밝아지며, 다시 식탁과 의자 두 개가 드러난다.
능룡이 출입문 앞에 서 있다.
당시를 재연하려는 듯, 만돌이 식탁 자리로 가 앉는다.
능룡: 내가 한번 털어봐도 되겠소?
만돌: 예?
능룡: 강도질 좀 해도 되겠냐, 이 말이야.
만돌: 그,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오. 난 그냥 객인데…
능룡이 금전함을 턴다. 만돌은 가만히 앉아 있다.
능룡: 근데 형씨는 어디 출신이쇼?
만돌: 예? (주저하다가) 쩌어기 하, 함경도… 두만강 언저리오.
능룡: 이름은?
만돌: (또 주저하다가) 쩌어 흐, 흥양… 오가요.
능룡, 순간 멈칫하며 만돌을 바라본다.
능룡: 함경도에 흥양 오가는 없는데?
만돌: 그, 그기 무시긴 소리오.
능룡: 내가 아는 양반이 그랬어. 흥양 오가는 전라도에만 산다고.
만돌: 그 양반이 누, 누기오?
능룡: 오덕기 씨라고, 우리 아부지. 흥양 오가네 종손.
이부자리에서 지켜보던 옹점, 만돌의 앞으로 다가가 앉는다.
옹점: 아이 기럼 기 쌔끼두 흥양 오가에, 거기다 종갓놈이엤다 이 말임까?
만돌: 어.
옹점: 기럼 기 쌔끼가 '것'두 바루 알어차렸소?
만돌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능룡을 돌아본다.
능룡: 그래서? 우리 집안 족보는 얼마 주고 샀어?
만돌: (옹점에게) 아, 그라드니 불쎄루 쌍소리를 까꾸박는 기야.
능룡: (비웃으며) 근데 혹시… 자네 애비애미가 우리 집안 쌍놈이었는가?
순간 만돌의 표정이 굳는다.
옹점: (만돌의 손을 붙잡으며) 됐소. 그깐 행바이 없는 새끼래매 대상하지 마오.
만돌: 해두 내 사람 새낀데, 버버리처르 한 소리두 아이 할 순 없잖니? (능룡을 돌아보며) 우, 우리 집안 쌍놈은, 거기서 도적질허고 앉은 그쪽 아이오?
능룡: 뭐?
만돌: 그리고 내 아는 바루는, 쌍놈들은 쩌어기 옛날에, 갑오년 경장 이후로 시상 천지서 사, 사라졌소.
사이.
능룡: (헛웃음) 허, 그르치. 그래두 쌍놈 피가 어디루 빠져나가는 건 아니니까… 아니다. 자네두 또 반절은 양반 핏줄일 수도 있어.
만돌: 또 무, 무시긴 말이오.
능룡: 거 왜, 자네두 알잖나. 이 나라 노비년들 중에 (천박한 손짓하며) 제 주인 손 안 탄 년 없는 거. (속삭이듯) 아, 그러니까 니 놈이 아는 니 놈 애비두, 실은 니 놈 애비가 아닐 수도 있다, 이 말…
만돌: (옹점을 홱 돌아보며) 뭐이, 더 듣구 싶니?
옹점: 아이오. 일 없소. 기캐, 거 쌔스개헌테 들이받었소?
만돌: 기래. 내 열토이 번져, 거 자애끼 배통을 확 갈라불라 했다.
만돌, 의자를 밀치고 일어선다.
만돌: 아, 기데 바루 기 참에…
딸랑- 주인장이 들어온다.
주인장: 아이고, 참말로 미안허고 고맙소잉, 내 손님은 특벨히 곱빼기루…
능룡: 빵.
주인장: 으악!
주인장, 바닥에 고꾸라져 끙끙 신음을 낸다.
능룡, 만돌에게 다가온다.
능룡: 왜 일어난 거야?
만돌: (주인장을 가리키며) 저, 저 아즈바이는 어째 쏜 거요?
주인장, 이내 신음을 멈추고 조용해진다.
능룡: (그대로 다시) 왜 일어난 거야?
사이.
만돌: (눈을 내리깔며) 기, 기냥 나갈라 캤소.
능룡: (피식) 그게 다야?
만돌: 그게 다요.
능룡: 근데 너 이름이 뭐냐?
만돌: 오, 광, 석, 이오.
능룡: 말고. 그 전에 진짜 이름.
사이.
만돌: 만돌이오.
능룡, 풉 웃더니 만돌의 뺨을 툭 치고 나간다.
만돌,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
만돌: (주인장 시체를 가리키며) 요 아즈바이, 아무캐도 나 땜시 죽은 거 같다.
옹점: 또 무시기 소리임까?
만돌: 내가 써거 등신이었다. 댑따 나사들지도 못허고… 뭔 족보를 샀네, 부모가 쌍놈이네, 개보대 새끼가 멋대루 지껄이게 냅두고… 아즉도 열이 버쩍버쩍 치민다.
만돌, 어깨를 늘어뜨린다.
옹점이 그를 데리고 이부자리로 가 앉힌다.
옹점: 기깐 지지벌대는 소리에 새도리 피지 마시오! 종갓놈이 도적놈인 집안이믄, 흥양 오가도 차승 개족보인 거 아이오? 뭐 맹꼬이처르 열이 치미오? (만돌 어깨를 토닥이며) 가마이 잘 물러섰소. 그 썅간나 새끼, 맨손으로 붙었스메 당신이 무조건 이겼소.
3장
일주일 후, 만돌의 집 안방.
무대 오른편에 이부자리. 왼편은 어둠.
옹점이 바느질하며 앉아 있고, 만돌은 신문을 들고 있다.
옹점: 여 살라믄 인쟈 우리 경성 말씨루 좀 바꾸오. 촌느마 티내지 말구.
만돌, 신문을 읽는다.
만돌: (어설픈 서울말) 일천구백사십일년 유월 십삼일. 강도 살인범 아직 미체포. 지난 오일 동대문 주막 강도 사건의 범인 오능룡의 종적이 아즉 묘연하다.
만돌, 신문을 내려놓는다.
만돌: 거 죽은 주인장 있잖니, 우리처럼 옛날에 쌍놈이었다 하더라.
옹점: 그게 무슨 말이요?
만돌: 그 주인장이 양반 출신이었으면, 오능룡이 그 개쌔낀 즈쯤 떼까닥 붙잡혀 써거졌을 거란 말이다. 아니?
옹점, 바느질을 멈추고 만돌을 바라본다.
만돌, 고개를 숙인다.
4장
일 년 후, 만돌의 집 거실.
무대 왼편에 식탁 하나와 의자 세 개. 오른편은 어둠.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만돌과 옹점이 한쪽에, 순사가 맞은편에 앉아 있다.
순사: (기계적으로) 성명, 백규복. 나이, 삼십 세. 김포 정미소 백미 열 가마 절취 혐의로 수배 중이었쓰네.
순사가 손짓하면, 무대 오른편이 밝아진다.
복면을 쓴 남자가 바닥의 이부자리에 널브러져 있다.
순사: 쟈, 그라므노 이 상황을 젠부 설명해 보시겠쓰네?
만돌: 젠부… 젠부 말씀이시므니까?
만돌, 어딘가 들뜬 표정이다.
옹점, 그의 팔을 살짝 눌러 앉힌다.
옹점: (순사에게) 와타시가 설명드리겠스므니다. 처음부터 아는 건 와타시므니다.
순사: 아, 소데스네. 도죠.
옹점: 하잇.
만돌은 아쉬운 눈치인데, 옹점은 개의치 않고 목을 가다듬는다.
옹점: 한밤중이었스므니다. 자다 일어나 변소에 가고 있었스므니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제 목을 확! 잡아챘스므니다. 슬쩍 보니 복면의 강도였스므니다.
그때, 바닥의 복면남이 일어나,
앉아있는 옹점의 뒤로 다가가 목덜미를 감는다.
옹점: (그 상태로) 전 조용히 "살려주세요"라고 했스므니다. 그러자 그 강도가,
복면남: 돈을 주면 살려준다.
옹점: 고 속닥거리더니,
복면남: 돈 어딨어?
옹점: 라고 물었스므니다. 전 남편이 들을 수 있도록, "돈은 안방에 있어요"라고 일부러 큰 소리를 냈스므니다. 하지만 안방은 조용했고… 결국 강도와 함께 안방으로 향했스므니다.
만돌: (못 참겠다는 듯) 아노, 여기서부턴 와타시가 말씀드려도 다이죠부 데스까?
옹점, 만돌을 바라본다.
그리고는 마치 손자에게 말하듯, 이야기를 이어간다.
옹점: 할애비 얘기는 이랬어.
만돌,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 오른편의 '안방' 자리로 옮겨 선다.
옹점: 할애비는 벌써 깨 있었대. 안방 문 뒤에 바짝 붙어서, 한 손에는 화로 쑤실 때 쓰는 쇠꼬챙이를 꼭 쥐고 말이야.
만돌, 쇠꼬챙이를 쥔 듯한 마임으로 허공을 몇 번 찌른다.
옹점: 빨랫방망이를 들까 고민도 했지만… 쇠꼬챙이가 더 확실해 보였다지.
옹점, 여전히 복면남에게 목이 잡힌 채 자리에서 일어난다.
둘은 조용히 '안방 문' 앞으로 향한다.
끼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
옹점과 복면남이 안방으로 들어선다.
만돌: 손 들어! 아님 죽는다.
복면남: (안 들고) 뭐야?
만돌: (입으로 칼소리 내며) 푹.
옹점: 할애비는 한 치 망설임도 없이 그놈 옆구리를 쑤셔 버렸어.
복면남, 쿵 쓰러진다.
순사: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 칼에 죽였다, 이거네?
만돌과 옹점, 식탁으로 돌아와 앉는다.
순사, 코털을 매만지며 복면남 쪽으로 다가간다.
옹점: 아무래도 안 믿기시나 본데… 이 양반, 눈 감고도 순사 나리 코터래기 쯤은 깔끔히 정리해 드릴 수 있스므니다.
순사: 에헴…
순사, 헛기침하며 시체를 살펴본다.
순사: 아무튼 강도를 박살 낸 것은 정당방위로 인정될 것이데스네.
순사, 복면남의 다리를 잡아끌며 퇴장한다.
거실에는 만돌과 옹점만 남는다.
옹점: 뭔 생각하시오?
만돌: 그치는 어째 손을 안 들었을까.
옹점: 뭐 그런 생각을 하시오? 그치가 딱허진 않어요?
만돌: …
순간, 만돌이 '만돌'에서 빠져나와 '배우'로 돌아온다.
(이후, 만돌과 배우는 계속 역할을 넘나든다.)
배우: 잠깐만요. 그럼… 할아버지가 사람을 죽였다는 거예요?
옹점: 그래.
배우: 잘… 잘 안 믿겨요.
옹점: 그땐 그런 시대였어. 죽으면 그저 죽는 거지. 오늘은 그이가 죽고, 내일은 내가 죽고… 그런 거였어.
사이.
옹점: 네 할애비, 참 차분했다. 나는 알았지. 이게 다 오능룡이 그놈 때문이구나. 이 남자는 이제 내가 알던 그 남자가 아니구나. (조용히 웃으며) 그게 썩 나쁘진 않았어. 그렇다고 좋지도 않았지만.
옹점, 식탁 위를 말없이 쓸어내린다.
배우, 그 말을 한참 곱씹는다.
배우: 그때 할아버지가 또 뭐라고 하셨어요?
옹점: 별말 안 했어. 그냥 한참 혼자 생각하더니, 한마디 하더라고.
사이.
옹점: 우리 만주로 가야겠소.
덜컹덜컹- 멀리서 기차 소리가 들려온다.
배우, 자리에서 일어나 관객을 향한다.
배우: 그로부터 열흘 뒤, 두 분은 정말 만주로 떠나셨다고 합니다. 할머니 말로는, 할아버지가 오능룡이 만주에 있다는 소문을 들은 것 같다고 해요.
5장
1943년, 만주의 이발소.
텅 빈 무대.
배우가 바퀴 달린 의자를 밀며 들어온다.
배우: (관객에게) 아무 계획 없이 떠났던 두 분은 일 년쯤 이 일 저 일 하며 고생 깨나 하셨답니다. 그러다 할아버지는 흘러 흘러 이발 일을 시작하셨죠.
옹점, 흰 가운을 들고 등장한다.
배우, 가운을 건네받아 입는다.
배우: 손재주가 좋았던 할아버지는 금세 이름을 얻었고, 단골도 여럿 만드셨대요. 그중에는 할아버지가 가장 존경해 마지않는 분이 한 분 계셨는데…
딸랑- 문 열리는 소리.
만돌: (깜짝 놀라며) 어, 어서 오십시오!
무대 오른편에서 홍장군이 조용히 걸어 나온다.
배우: (관객에게) 노비로 태어났지만 무장투쟁에 나선 독립 영웅. 그분은 바로… 홍범도 장군님이었습니다.
만돌, 홍장군을 안내하며 의자에 앉힌다.
옹점, 외투를 받아들고 퇴장한다.
만돌: 시, 시작하겠습니다…
만돌, 홍장군의 목에 보자기를 두르고 그의 얼굴에 비누 거품을 바른다.
배우: (조용히) 장군님이 세 번째 찾아오신 날, 할아버지는 처음으로 조심스럽게 말씀을 건네셨대요.
만돌, 홍장군 쪽으로 몸을 숙인다.
만돌: 존경합니다, 장군님. 시키실 일 있으시면 뭐든 시켜주십시오. 저도 조국에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홍장군, 미소만 짓는다.
만돌, 면도칼을 꺼내 날을 펼친다.
만돌: 저 이래 봬도 사람도 죽여본 사람입니다.
사이.
홍장군: 누구를 죽였단 말이오?
만돌: 저희 집에 쳐들어온 강도였습니다.
홍장군: 강도?
만돌: 예. 실은 그전에도 강도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아무것도 못 하고… 다른 이가 죽는 걸 지켜봐야 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다시는 가만히 당하지 않겠다, 속을 갈아엎고 살다가… 다음번엔 제가 먼저 베었던 겁니다.
사이.
만돌: (갑자기 울컥) 저도 장군님처럼 노비 출신입니다! 그런데 그놈이 저를 쌍놈 취급하고, 제 이름과 부모님을 욕보였습니다! 제가 여기 만주까지 온 것도 다 그놈을 찾으려고…
홍장군: (말 끊으며) 잠깐. 지금 그대가 죽였다는 강도가, 그대를 욕보인 그놈이었단 말이오?
만돌: 아닙니다. 제가 죽인 건 그놈이 아니고, 다른 강도였습니다.
홍장군: 그럼 그댈 욕보인 놈은 따로 있고, 그대는 다른 이를 죽였다는 거요?
만돌: 예… 맞습니다.
사이.
홍장군: (버럭) 그게 대체 무슨 말이오! 자넨 왜 그 강도를 죽인 겐가! 오로지 자네 집에 쳐들어왔다는 이유 하나로 그 강도가 죽을죄를 지었다고 여긴 건가? 아님 예전 그놈에게 당한 치욕을 엉뚱한 데 쏟아낸 건가!
만돌: 그… 그건…
홍장군: 정신 차리게! 자네는 그저 분풀이에 칼을 든 것뿐이네! 그깟 사사로운 감정 하나 다스리지 못하면서 어찌 조국을 입에 올린단 말인가!
홍장군, 벌떡 일어나 보자기를 풀어내며 걸어 나간다.
옹점, 외투를 들고 급히 나온다.
홍장군: (외투를 받아 입으며) 내 그대를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네. 나도 내 이름을 지키려다 칼을 든 적이 있어. 자네도 그날 이후 칼을 쥐고 살았던 거겠지. 그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야. 허나 칼이란 뜻을 거쳐야 비로소 날이 서는 법일세.
홍장군, 나간다.
만돌, 힘없이 의자에 앉는다.
옹점: (다가오며) 괜찮소? 국수라도 삶아주오?
만돌: 자네 보기에도… 내가 그리 사사로운 인간인가?
옹점: 또 뭔 소리오? 다 사사로우니까 밥도 해먹고 사는 거요! 아님 산에 들어가 중이 돼야지. 거 장군님도 밥 안 굶고 사는 거 보면 사사롭기는 마찬가지요. 그러니까 얼굴 좀 펴요. 내 국수 말아다 줄게.
옹점, 만돌의 등을 툭 치고 퇴장한다.
정적이 흐른다.
잠시 후, 딸랑- 문 열리는 소리.
일본군 제복을 입은 남자가 신문을 읽으며 들어온다.
만돌: 이… 이랏샤이마세…!
남자가 신문을 내리면, 그 얼굴이 드러난다.
능룡이다.
배우: (관객에게) 할아버지는 덜덜 떨기 시작했습니다. 소위 오니시 류노스케… 그는 오능룡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저를, 아니, 할아버지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6장
능룡, 얼굴에 비누 거품을 묻힌 채 의자에 앉아 있다.
만돌, 면도칼을 들고 다가온다.
능룡: (신문을 건네며) 자네, 조센징이지? 이거 좀 읽어 봐. 소리 내서.
만돌, 신문을 받아들고 더듬더듬 읽는다.
만돌: 말 잘 타는 조선 청년. 관동군에서는 지난해 후보자로 조선 청년 오십 명을 뽑았는데, 훌륭한 기사대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이번 여름 만주 승마 대회에 출장하여 훌륭한 기예를 보여 박수갈채를 받았다. 특히…
능룡: (가로채며) 특히 관동군 후보생 오니시 류노스케는 총독으로부터 격려상을 받아 교관 일동도 함께 감격하고 있다 한다. 크으… 스바라시! 기모찌!
능룡, 뿌듯하게 웃는다.
만돌, 말없이 면도를 시작한다.
배우: (관객에게) 할아버지는 손끝이 떨렸습니다. 오늘은 정말, 이놈을 죽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능룡은 자기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능룡: 근데 또 그 덕에 골치 아픈 일도 생겼지. 특수 임무를 맡게 됐거든. 거 왜, 독립한다고 날뛰는 반동 조센징들 잡는 일인데… 오늘이 첫날이었어.
만돌: 며, 몇 사람이나 잡으셨습니까?
능룡: (손가락으로 세며) 이치, 니, 산, 시, 고, 로쿠, 시치, 하치, 큐, 쥬, 쥬이치, 쥬니. 본때를 보여줬으니 이제 다른 놈들도 정신 좀 차리겠지. (하품하며) 하암… 피곤하구먼…
능룡, 스르르 눈을 감는다.
배우: (관객에게) 그날 주막에서처럼, 할아버지는 또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잠든 얼굴만 바라봤죠. 그 얼굴은 훨씬 더 더러워져 있었습니다.
만돌, 떨리는 손으로 면도를 이어간다.
칼끝이 능룡의 목 아래를 스치자, 능룡이 눈을 번쩍 뜬다.
능룡: 오늘 여섯 시에 마을 사람들 다 광장으로 불러낼 거야.
만돌: 무, 무슨 일입니까…?
능룡: 잡아온 조센징놈들 말이야, 홀딱 벗겨서 나무에 거꾸로 매달고 불알 맞추기 사격 대회를 할 거거든. 재밌겠지?
만돌: 그… 근데 마을 사람들은 왜…
능룡: 봐야지. 다들 봐야지.
능룡, 한쪽 뺨에만 거품을 남긴 채 다시 눈을 감는다.
배우: (관객에게) 그때 할아버지는 생각했습니다. '지금 내가 이놈을 죽이면 나는 영웅이 될까? 사람들이 내 이름을 불러줄까?'
잠시 정적.
홍장군의 목소리가 무대 밖에서 들려온다.
홍장군: (소리) 자네는 그저 분풀이에 칼을 든 것뿐이네! 그깟 사사로운 감정 하나 다스리지 못하면서 어찌 조국을 입에 올린단 말인가!
목소리가 멀어진다.
만돌, 능룡의 얼굴을 내려다본다.
배우: 아무리 봐도 그건 그냥 사람의 얼굴이었습니다. 더럽고, 땀나고, 잠든 얼굴. 그게 다였어요.
만돌, 조용히 능룡의 목에 면도칼을 갖다 댄다.
만돌: (작게) 칼은 뜻을 거쳐야 날이 선다 하셨지. 헌데 내 칼은 너무 무디다.
면도칼이 서서히 내려간다.
비누 거품이 닦여 나가며, 능룡의 얼굴이 드러난다.
능룡: (일어나며) 수고했어.
능룡, 바지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만돌에게 건네고,
밖으로 나가다가 문득 멈춰 서서 돌아본다.
능룡: 사실 동료들하고 내기를 했거든. 자네가 나를 죽일지, 안 죽일지… 자네가 독립군 꼬붕질 한다는 소문이 돌아서 말이야. (웃으며) 근데 사람 죽이는 거, 만만한 일이 아니지? 나도 처음엔 그랬어.
능룡, 밖으로 나간다.
잠시 정적.
그때, 다시 딸랑- 문을 열고 들어오는 능룡.
능룡: 두고 간 게 있어서.
능룡, 의자로 다가가 신문을 집어든다.
그가 돌아서려는 순간, 만돌이 조용히 한 걸음 다가선다.
면도칼이 번쩍 들렸다가-
아무 소리 없이 만돌의 팔이 내려간다.
능룡, 미처 놀라지도 못한 얼굴로 바닥에 고꾸라진다.
배우: 할아버지는 그놈을 죽였습니다. 그렇게 끝이었어요. 그 뒤로는 아무 일도 없었고,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함께 무사히 돌아와 평범하게 늙으셨습니다.
에필로그
현재. 무대 가운데, 하얀 이불 위에 옹점이 누워 있다.
그 옆에 앉아 있는 배우, 한동안 말이 없다.
배우: (관객에게) 이야기를 끝내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쓰러지셨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서야 잠깐… 정말 잠깐 눈을 뜨셨어요.
배우, 조심스레 옹점의 손을 잡는다.
배우: 할머니, 괜찮으세요?
옹점: 그래, 아가. 그래도 이야기를 마쳐서 다행이야.
배우: 네. 정말… 끝내줬어요.
둘, 서로를 보며 조용히 웃는다.
잠시 정적이 흐른다.
배우: 근데 할머니, 저… 궁금한 게 있어요.
옹점: 말해보렴.
배우: 그 이야기… 정말이었어요?
사이.
배우: 제가 조금 알아봤거든요. 오능룡이라는 사람, 정말로 족보에 있더라고요.
옹점: 있었지.
배우: 흥양 오씨, 종가 장손으로요.
옹점: 맞아.
배우: 할아버지랑 거의 같은 시기에 살았고요.
옹점: 그럼.
배우: 근데 은행 강도 오능룡에 대한 기사는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어요.
옹점: …
배우: 오니시 류노스케라는 일본군도 없었던 것 같고요.
옹점: …
배우: 홍범도 장군님도 그때 그곳에는 계실 수가 없었대요. 기록에는 그 시기에 다른 전선에 계셨다고 나와요.
옹점: …
배우: 그러니까 그 이야기… 반쯤은 거짓말이에요.
옹점: (미소 지으며) 반쯤은 정말이지.
사이.
배우: 왜 그러셨어요? 왜 저한테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신 거예요?
옹점: 너희 할아버지가… 그렇게 살고 싶어했거든. 노비라고 무시하는 사람한테 대들어도 보고, 집에 든 도둑놈 때려잡아도 보고, 저기 만주 가서 장군님도 만나보고, 일본놈한테 칼도 한번 휘둘러보면서 말이야.
사이.
배우: 혹시… 오능룡은 할아버지랑 아는 사이였어요?
옹점: 그래.
배우: 무슨 관계였어요?
옹점: 젊었을 땐 주인집 아들이었지. 근데 늙어서도 윗사람 노릇 하려 했고. 평생 성가시게 굴었어.
배우: 그래서 이야기 속에서라도 그렇게…
옹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둘 사이 공기가 조금 부드러워진다.
배우: 그럼 오능룡을 죽일 때… 할아버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사이.
옹점: 해보니까 어땠니?
배우, 잠시 생각에 잠긴다.
배우: 말로는 설명 못 하겠어요. 근데 왠지… 알 것도 같아요.
옹점: 그래, 그럼 됐다. 네가 대신 살아줬으면 됐지. 할애비도 좋아할 거야. (잠시 바라보다) 고마워, 아가.
둘, 서로를 안아준다.
잠시 후, 옹점이 배우를 놓아주고 다시 천천히 자리에 눕는다.
조명이 부드럽게 어두워진다.
배우: (관객에게)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할머니는 편하게 웃으면서 떠나셨고, 그 이야기만 제 안에 남았네요. (자리에서 일어나며) 근데 참 이상해요. 그 이야기를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전부 진짜처럼 느껴져요. 장군님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 순간도, 비누 거품 속에 떠오르던 그 얼굴도, 모두 눈앞에 보이는 것 같습니다.
사이.
배우: 저희 할머니가 그러셨어요. "모든 이야기는 들어줄 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 나는 네가 그 사람이 돼줄 줄 알았다." 그리고 오늘은… 그 자리에 여러분이 계신 것 같네요.
배우, 조용히 웃으며 관객을 바라본다.
막.
<당선소감>
"제 이야기가 더 멀리 가볼 수 있도록 등 떠밀어준 친구에게 영광을 바칩니다"
아주 가까운 친구가 있습니다. 십오 년 전 처음 '이야기를 만든다'는 행위를 할 때 함께 있었고, 그렇게 만든 이야기들을 들어주었던 친구입니다. 그 이후 긴 시간 동안 세상에 나가지 못한 저의 이야기들은 그 친구가 들어준 덕분에 사라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모든 이야기는 들어줄 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라는 본 작품 속 대사는 그런 경험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리고 지난해, 그 친구가 안타까운 사고로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제는 저의 이야기로 자기만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라고, 제 이야기가 더 멀리 가볼 수 있도록 등을 떠밀어준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하늘에서 누구보다 기뻐해주고 있을 세오에게 가장 큰 영광을 돌립니다.
뭔가 더 멋진 말을 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했지만, 이 지면을 통해 감사한 분들께 마음을 전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텔레비전 속 상 받는 사람들을 보며 '누군지도 모를 이름들을 왜 저렇게 불러대나' 하고 생각한 적이 많았지만, 막상 이런 기회가 오니 저 역시 같은 마음이 되네요. (반성합니다.) '소중한 사람들에 대한 마음은 전할 수 있을 때 전하자'는 것 역시 그 친구가 떠나며 제게 알려준 교훈이기도 합니다.
먼저 언제나 좋은 이야기라며 격려를 아끼지 않고, 그래서 평가의 객관성에 늘 의구심을 갖게 하지만, 그런 무조건적인 믿음 덕분에 또 계속 쓸 수 있는 힘을 주는 지현. 그리고 두세 시간씩 붙잡고 이야기에 대해 물고 늘어질 때에도 늘 함께 고민해주고, 이번 작품에 대해서도 치열하게 의견을 나눠주었던 최고의 배우 상현. 둘에게는 조금 더 특별한 사랑과 감사를 전합니다. 덕분에 글쓰기가 고통스럽지 않고 즐겁습니다.
무슨 짓을 하고 다니든 항상 묵묵하게 지켜봐주시는 부모님, 좋은 작품은 좋은 인격에서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시며 제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게 해주시는 어바웃필름 성환 대표님, 인생의 동료로서 외롭지 않게 곁을 지켜주는 도일, 작업의 동지로서 함께 열정을 불태워준 또 다른 최고의 배우 지훈, 그리고 소식을 듣고 기꺼운 축하를 보내주신 이모와 이모부, 친구 재영과 정민 등에게도 마음을 전합니다.
앞으로도 즐겁게 쓰겠습니다. 부족한 작품을 선정해주신 한국일보와 심사위원 여러분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1990년 서울 출생 ● 고려대 심리학과 졸업
<심사평>
"국가와 사회 위기가 개인에게 전가한 현실 유입돼"
희곡을 쓴다는 행위는 전환기에 놓여 있다. 희곡은 점점 소수화되고, 무대라는 현실 조건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장르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놓여 있지만, 동시에 어떤 이야기든 희곡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 또한 열려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새로운 시도를 낳기도 하지만, 특정한 서사 구조와 정서, 문제의식이 반복되는 '패턴화'라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올해 135편의 투고작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의 원고가 내용과 형식, 주제와 설정, 도입부에 이르기까지 유사한 경향을 보였다. 무난하게 중반까지는 읽히지만, 이후에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세계를 보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남기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야기는 이전보다 더욱 개별화되었으나, 그 개별성 속에서 고유한 개성이나 작가적 태도는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다. 일부 작품에서는 작가가 스스로 약자의 위치를 자처하며 연민에 머물거나, 자명한 약자성만으로 세계를 설명하려는 태도 또한 반복되었다. 그 결과 극의 개연성과 핍진성이 확보되지 못한 경우도 적지 않았으며, 이유 없는 폭력과 적대, 증오가 극적 세계관의 전면에 놓인 작품들도 눈에 띄었다. 원작을 재가공하거나 스핀오프 방식으로 확장한 시도들은 흥미로웠으나, 원작의 그늘 뒤로 작가가 숨어버린 인상을 지우기 어려웠다.
전반적으로 하나의 경향으로 묶기 어려울 만큼 화제들이 다양했으나, 공통적으로 감지된 것은 '개인'의 발견이었다. 연극이 개인화되었다기보다는, 국가와 사회의 위기가 개인에게 전가된 현실이 희곡 안으로 유입되고 있다고 느껴졌다. 익명성과 몰개성을 자처한 개인은 무대 위에서 절규하고 호소하며 관객에게 이해와 공감을 요청한다. 그러나 이러한 바람은 세계에 대한 사유로 확장되기보다는 감정의 토로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고, 연극적 순간을 충분히 만들어내지 못했다. 주제는 분명하나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상황이야말로, 전환기에 놓인 희곡이 더욱 치열하게 고민해야 할 지점일 것이다.
본심에서는 'R에 관한 이야기', '실화를 바탕으로 함', '연인'을 중심으로 논의가 이루어졌다. 세 작품 모두 당장 공연으로 옮겨도 손색없는 완성도를 갖춘 희곡들이다. 최종적으로는 'R에 관한 이야기'와 '실화를 바탕으로 함'을 두고 오랜 토론을 거쳤다. 두 작품 모두 작가의 확고한 세계관 아래 인식과 의식 자체를 메타화하며, 장면의 점층적 진전을 통해 의미와 재미를 함께 성취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투고된 희곡 중에서 가장 또렷한 변별력을 지닌 두 작품이기도 했다. 여러 차례의 다시읽기와 논의 끝에 '실화를 바탕으로 함'을 올해 한국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문 당선작으로 정하였다. 'R에 관한 이야기'를 쓴 작가 또한 현장에서 꼭 보고 싶다는 바람을 전한다. 각자의 방식으로 전환기를 통과하고 있는 작가들에 건승과 건강을 빈다.
심사위원 : 김명화, 정진새
<AI와 함께하는 작품 분석>
1) 한 줄 핵심
‘실화’라는 권위를 빌려 살고 싶었던 삶을 재구성하고, 그 재구성이 결국 **살아남은 자(옹점)와 연기하는 자(배우)**를 구원하는 이야기.
→ “진짜/가짜”가 아니라 **“왜 그런 이야기가 필요했는가”**를 묻는다.
2) 제목이 던지는 함정: “실화를 바탕으로 함”
이 제목은 관객을 자동으로 길들인다.
- “실화”라는 말이 붙는 순간 관객은 믿을 준비를 한다.
- 하지만 작품은 끝에서 “반쯤은 거짓말, 반쯤은 정말”로 뒤집는다.
즉 제목 자체가 극의 장치다.
믿음이 만들어내는 진실(=서사의 효능)을 시험하는 구조.
3) 큰 구조: ‘프레임 희곡’ + ‘역할의 도치’
이 작품은 현재의 배우/옹점이 액자(프레임)를 만들고, 그 안에서 만돌의 과거가 재연된다.
(1) 프롤로그: “나는 이름 없는 배우”
배우는 “남의 인생 흉내”로 살아왔고, 이제는 “역할이 없다.”
→ 이 결핍이 곧 이야기를 받아 적고 연기할 동기가 된다.
(2) 1~6장: 재연의 누적, ‘폭력의 학습’
주막 사건(침묵) → 가정 침입자(칼) → 만주 이동 → 면도칼 앞 능룡
→ 만돌은 점점 “가만히 있던 사람”에서 “손을 드는 사람”으로 이동한다.
(3) 에필로그: “그 이야기, 정말이었어요?”
여기서 작품은 관객을 향해 질문을 되돌린다.
우리는 왜 ‘실화’에 더 흔들리는가?
그리고 옹점이 답한다: “반쯤은 정말.”
4) 인물 3각형: 배우–옹점–만돌
배우: ‘연기’로 먹고 산 사람, 그러나 이제 역할이 없는 사람
배우는 처음엔 “이야기를 소비”하지만, 점점 “그 삶을 살아내는 자”가 된다.
에필로그에서 중요한 대사 전환이 생기죠: “해보니까 어땠니?”
→ 옹점은 배우에게 “진실 확인” 대신 체험의 진실을 묻는다.
옹점: 증언자이자 각본가, 그리고 윤리적 편집자
옹점은 단순한 ‘할머니’가 아니라,
- 과거를 구성하고
- 누락을 선택하고
- 손자의(배우의) 욕망과 할아버지의 욕망을 연결한다.
즉 옹점은 “기억”이 아니라 서사를 만든다.
만돌: 피해자의 몸을 가진 채, 가해 시스템(식민권력)을 통과한 자
만돌은 처음엔 순사 앞에서 “반자이”를 외친다.
이건 비겁함이라기보다, 그 시대의 생존술이자 자기보존의 연기다.
희곡은 만돌의 “비겁/용기”를 단순 도덕으로 갈라놓지 않고,
폭력의 구조 속에서 선택이 어떻게 왜곡되는지를 보여준다.
5) 가장 무서운 장치 2개: “일시정지”와 “마임(빈 공간)”
(1) ‘일시정지’ = 기억의 재생 버튼, 그리고 죄책감의 동결
주막 장면에서 순사가 들어오며 시간이 멈추고 “취조”가 끼어든다.
이때 관객은 깨닫는다:
그 사건은 과거의 한 순간이 아니라 현재까지 반복 재생되는 트라우마다.
(2) ‘주방/출입문/계산대는 마임’ = 폭력의 빈칸
무대가 비어 있다는 건 “리얼리즘 부족”이 아니라
역사 기록의 공백, 서민의 삶이 기록되지 않는 방식을 닮았다.
비어 있는 공간을 채우는 건 배우의 몸(=연기)이고,
그게 곧 “기록되지 못한 삶을 무대가 대신 기록한다”는 선언이 된다.
6) 핵심 대립: 능룡(가해) vs 홍장군(규범)
이 작품이 촘촘한 이유는 “악인 처단”으로 단순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능룡: 계급/식민 권력의 “연장선”
능룡은 강도일 때나 일본군일 때나 본질이 같다.
- “족보”를 들이대며 모욕한다(계급 폭력)
- 사람을 숫자로 세며 말한다(식민 폭력)
→ 개인 악마가 아니라 폭력의 체계가 한 인간 안에서 작동하는 형태다.
홍범도 장군: ‘칼의 윤리’를 묻는 목소리
홍장군은 만돌의 서사를 흔든다.
“분풀이로 칼을 들었을 뿐”이라는 꾸짖음은
관객이 기대하던 “복수의 카타르시스”를 멈춰 세운다.
그리고 이 말이 6장(면도 장면)에 귀환한다.
→ 작품 전체가 “칼을 들 이유”를 끝까지 심문한다.
7) 6장의 정점: “죽일 수 있었지만, 죽이지 못했고… 결국 죽인다”
면도칼 앞에서 만돌은 “영웅이 될까?”를 상상한다.
여기서 작품은 영웅서사의 유혹을 드러낸다.
하지만 즉시 홍장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칼은 뜻을 거쳐야 날이 선다.
→ 이때 만돌이 멈추는 건 ‘겁’만이 아니라 윤리의 개입이다.
그런데 결국 능룡은 “내기”를 말하고, “사람 죽이는 건 만만치 않다”고 조롱한다.
이 조롱은 만돌의 칼을 “뜻”이 아니라 “모욕”으로 다시 흔든다.
그래서 마지막 살인은 복수극의 쾌감이 아니라,
인간이 윤리와 분노 사이에서 무너지는 순간으로 남는다.
(그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서술이 더 잔인함: 폭력은 세계를 바꾸지 못하고, 다만 사람을 바꿔버린다.)
8) 에필로그의 진짜 결론: “거짓말이 왜 필요했나”
배우가 자료조사를 해보니 기록이 맞지 않는다.
그러자 옹점이 말한다:
“너희 할아버지가 그렇게 살고 싶어했거든.”
이 대목의 무게는 엄청 큽니다.
- 할아버지는 실제로는 침묵/굴종/무력감으로 살았을지 모른다.
- 그래서 옹점은 “실화”를 만들어 소망을 대신 살게 한다.
- 배우는 그걸 연기함으로써,
할아버지의 ‘살지 못한 삶’을 현재에서 한 번 살아낸다.
이때 “진실”은 사실성(fact)이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이 버티기 위해 필요한 의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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