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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서해의 쓸모 / 류혜진

 

지후가 누워 있는 침대 난간에 내 시선이 멈췄다. 3년 전 환자용 침대로 바꾸면서 지후는 흰색 프레임이 싫다며 어디서 봤는지 프랑스 베르동 협곡의 호수 같은 에메랄드색으로 바꾸고 싶다고 했다. 다음 날 평소보다 한 시간은 일찍 퇴근한 남편은 침대의 모든 나사를 풀러 분해하고 흰색 아크릴 물감에 초록색을 조금씩 섞어가며 지후가 원하는 색으로 꼼꼼히 칠해 주었다. 나는 손때 묻은 난간의 얼룩진 색이 눈에 거슬렸다. 다시 칠해야 하나 잠시 고민에 빠졌다.

엄마 뭐해? 아니 진 여사님? 하던 거 해야지.

지후의 발을 닦고 있던 따뜻한 물수건이 그새 차갑게 식어있었다. 지후의 몸은 근육이 빠져나가면서 휘어진 등과 허리, 윤기 없이 푸석한 피부와 강직으로 어그러진 팔과 다리는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다. 겨우 손가락만 느리게 제 역할을 한다. 아이의 몸피는 종이 인형처럼 얇고 위태로우며 물에 젖은 목화꽃처럼 무겁다. 그리고 지후는 눈치가 참 빠르다. 몸의 감각은 있으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없으니, 감각의 일부가 눈치로 편입되는 것만 같다. 지금도 다른 생각에 빠진 나를 궤도 위로 올리며 하던 일을 끝내라고 한다. 멈칫멈칫하는 내게 짜증 내지 않는 걸 감사히 여겨야 하겠지.

2주 전 우리는 서로에게 크게 마음 상하는 일이 있었다. 그날 내 상함의 가장 큰 핵심은 존재를 부정당하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거였다. 그건 언제나 나를 확인받고자 하는 내 고질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그럴 때는 아픈 아들이 안쓰럽다거나 엄마라면 모름지기 어떠해야 한다거나 하는 따위는 생각나지 않는다. 지친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는 것도 서럽고 세상에 혼자서 아픈 아들을 감당해야 하는 억울함과 죄책감에 기가 눌려 버린 탓도 있으리라.

나는 각질이 일어난 입술에 침을 바르고 지후에게 수면양말을 신겨주며 물었다.

우리 바다 보러 갈래?

일주일 후면 지후는 스물한 살이 된다. 스무 살을 넘기기 힘들다던 지후의 스물한 살 생일을 축하하고 싶었다.

바다? 갑자기? 난 너무 좋지. 그런데 괜찮겠어?

우리 잘 다녔잖아. 여행에 필요한 게 뭔지, 어디로 갈지 생각해 보자.

당연히 서해지. 말해 뭐해.

그러자. 혹시 모르니까 안전을 위해 필요한 게 있는지도 살펴봐야겠네. 휠체어 바퀴에 바람도 넣고, 모래 위로 갈 수 있는 휠체어가 있다던데, 그것도 알아봐야겠다. 우리 지후 컨디션이 좋아야 할 텐데.

며칠 동안 우리는 여행계획을 세웠다. 지후와 바다 여행을 길게 할 수는 없었다. 지후 아빠와 헤어진 후에는 몸이 불편한 아이와 단둘이 가는 여행이 엄두가 나지 않아 계속 망설였다. 지후 아빠가 있을 때는 외부 활동이 두렵지 않았는데 이럴 때는 야속한 마음이 들었다. 아이를 생각해서 이혼만은 하지 말자고 그렇게 말했는데, 지난 20년의 결혼생활이 무색해져 버렸다.

처음 지후의 병이 아들에게만 생기는 모계유전이라는 걸 알았을 때부터 외동인 남편은 건강한 아이를 원하는 시부모를 보기 힘겨워했고 둘째를 가지라는 시어머니에게 시달렸었다. 사실 시어머니가 그러는 건 이해한다 해도 지후 담당 의사까지 정기검진을 갈 때마다 우리 부부에게 말했다. 둘째를 왜 안 가지냐며 산전 검사로 장애 유무를 알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나는 진짜 사람들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만약 장애가 있다면 태중 아이는 없애도 좋다는 건가? 그런 위험을 감내하며 아이를 가져야 한다는 건데 난 그러고 싶지 않았다. 모두 무섭고 겁나는 일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시어머니는 노골적으로 남편과 헤어지기를 종용했다. 결국 2년 전 시어머니는 이혼서류를 직접 들고 왔다. 무슨 용기였는지 나는 남편을 더는 붙잡고 싶지 않았다.

그래 이제 우리 그만하자. 결혼한 지 20년이면 오래 버텼어.

미안해 지후 엄마, 생활비랑 양육비는 매달 넉넉히 보낼게. 그건 걱정하지 마.

지후는 돈보다 아빠가 더 필요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처럼 말했다. 아빠를 좋아하는 지후 생각에 마음이 복잡했지만 더는 지후와 나를 무시하는 시가를 상대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기에 오히려 마음 한편이 홀가분했다.

지후가 만 두 돌이 지날 무렵 나는 아이가 가진 근육병에 대해 처음 들었다. 그날 대학 병원은 지하 주차장 확장공사로 시끄러웠고 어린이 병동으로 가는 길은 좁고 어수선했다. 좁은 통로를 지나야 하는 유아차에 어쩔 수 없이 멈춰서야 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짜증스러워 보였다. 대기실에는 환자들로 가득했고 오랜 대기 시간으로 지친 지후는 이리저리 몸을 꼬며 칭얼거렸다. 지후는 한 달 전 영유아 검진에서 간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높았다. 여러 번의 검사에 유전적인 결함이 있는 것 같다며 담당의는 지후의 허벅지에서 근육조직을 채취해 조직검사를 시행했고 그 결과를 보는 날이었다. 며칠 전부터 시도 때도 없이 가슴이 벌렁거리며 찌릿찌릿한 기분을 별일 아닐 거라 다독였지만 막연한 불안에 계속 잠을 설쳐 몹시 피곤했다. 어렵게 만난 의사는 낮고 건조한 소리로 자동인형처럼 지후의 병을 설명했다.

조직검사 결과 지후는 뒤셴형 근육병이에요. 근육병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중에 뒤셴형은 스무 살 전후로 생존이 어려운 난치병입니다.

네?

안타깝게도 아직 치료제는 없습니다. 지금은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뒤셴형 근육병은 50대50의 비율로 남아에게만 발병하고 여아일 경우는 보균자가 될 확률이 있어요. 모계유전일 확률이 높아서 어머니 유전자 검사를 진행하려 합니다.

의사의 목소리는 성가신 벌레 마냥 내 귀에 윙윙거렸다. 어느새 윙윙 소리에 속도가 붙더니 내 등줄기에 올라타고 순식간에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가서는, 다시 어깨를 타고 심장으로 곤두박질쳤다. 안도하는 순간 다시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며 도리 짓을 하는 듯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혹시 다른 자매나 외할머니도 가능하시면 함께 해보시는 게 어떨지요? 아무래도 희귀병이라 데이터가 많이 없어요. 앞으로 치료제 개발 연구에 도움이 될 거예요.

오한이 든 것처럼 몸이 마구 떨렸다. 그 와중에 내 눈은 키보드 위에서 계속 움직이는 의사의 크고 두툼한 손을 쳐다봤다. 꼭 사기꾼 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가 하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몸의 근육이 점점 줄어 호흡이 어렵거나 심장이 멈추게 되는 병이라니. 의사의 말은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병원문을 나서는데 겨울바람이 갑자기 크게 불어 몸이 휘청했다. 남편은 지후를 꼭 끌어안고 앞장서 걷고 있었다. 남편의 큰 키와 마른 몸이 마치 흐느적거리는 광고용 풍선 인형처럼 우스꽝스럽고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나는 말도 안 되는 이 상황에 헛웃음이 나왔다. 어서 집으로 가서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고 정신 나간 듯 계속 중얼거렸다. 지금 우리 지후는 아주 건강해. 괜찮아. 아직 괜찮아. 괜찮을 거야.

병원 진료에서 돌아오자마자 소파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깼을 때는 이미 자정이 넘어가고 있었다. 안방에는 지후와 남편이 잠이 들어 있었다. 다행히 남편이 지후를 살뜰히 보살핀 것 같았다. 나는 거실에 흩어진 장난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긴 꿈을 꾼 거 같았다. 꿈인 거야. 꿈이 아니라면 너무 하지. 이건. 진짜 너무 한 거야. 나한테 왜 그러는데? 이건 아니지. 내 인생은 죽어가는 아이를 지켜보며 남은 삶을 살아야 하는 거였어? 그런 거야? 그러면 지후는 무슨 죄가 있어서 그래야 하는데? 누구에게라도 매달려 모계유전이라는 고약한 운명을 없애고 싶었다. 무엇에든 매달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 부질없음에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가슴이 조여들었다. 그때 소파 아래 깊숙이 들어가 있는 지후가 제일 좋아하는 장난감 자동차가 보였다. 장난감을 보기보다 깊이 박혀있었다. 꺼내려 기를 쓰다 보니 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언니가 지금 나라면 어떻게 할까?

연년생이었던 언니는 나 때문에 자동차 사고를 당했다. 지후도 나 때문에 아프다. 그 생각을 하니 입에 침도 마르고 목도 따끔거렸다. 눈물이 계속 흘렀다. 끄집어낸 장난감을 보니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순간 온 신경을 서걱거리게 하는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흐느끼는 소리 같더니, 어느새 온몸을 마구 잡아 뜯는 것같이 괴성으로 변했다. 배고픈 들짐승이 울부짖는 소리처럼 들렸다. 누가 도시 아파트에 저런 기괴한 소리를 내는 들짐승을 풀어놓았을까? 이상한 소리에 온 신경이 곤두서고 다리가 굳어 움직이기 어려웠다. 소리는 점점 선명해졌고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다. 다행히 환청은 아닌 게 분명했다. 조심히 베란다로 나가 창문을 열고 잘 보이지 않는 어둠 속 거리를 둘러보았다. 찬 바람이 불었다. 아파트 끝 대로변에서 희미하기 보이는 검은 그림자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누가 저리도 크게 우는 걸까? 어기적거리는 행세가 술에 취한 사람이구나 싶은 마음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들짐승을 풀어 놓았다고 생각하다니 어이가 없었다. 물끄러미 술 취한 검은 그림자가 흔들리며 가는 길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검은 그림자는 들짐승 소리는 내며 서서히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인간에게도 저런 소리가 나는구나! 검은 그림자의 울음소리에 처연함과 동시에 묘한 희열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그림자의 무사 귀환을 간절하게 빌었다.

지난밤은 사실 너무나 요사스러웠다. 엄청난 울부짖음에도 아파트촌은 너무나 고요하고 적막했다. 두려움에 다들 귀를 막고 있는 건지 아니면 진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지후도 남편도 피곤한지 아무런 뒤척임도 없이 깊게 잠들어 있었다.

지후 아빠 어젯밤에 무슨 소리 못 들었어?

무슨 소리? 난 못 들었는데. 너무 피곤해서 내리 잤어. 무슨 일 있었어?

아니야. 아무 일도 없었어.

밤새 낯설고 끔찍한 아우성을 나만 들었다는 사실이 기이했다. 한편으론 아무도 모르는 게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오전 내 인터넷으로 근육병에 대해 찾아보니 지후가 살아가야 할 날들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온몸이 마구 쪼개져 허공을 둥둥거리며 떠다녔다. 가슴은 안방에, 팔다리는 거실과 부엌에, 머리통은 베란다 바깥 하늘 위로 흩어져 현기증이 났다. 하늘도 집안도 흐릿하고 모노 톤으로 변해 버렸다. 밤새 울부짖던 검은 그림자처럼 나도 그래야 살 수 있는 건가? 내 몸속 세포 사이사이 찐득하게 피떡이 진 우울 덩어리를 밖으로 개어 내야만 하는가? 내겐 내 아이를 살릴 아무런 힘이 없고 이렇게 망연자실하며 살 자신도 없다. 나는 어떻게 지후의 시간과 함께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지후를 지킬 수 있는 걸까?

저녁 무렵 전화벨이 끊임없이 울렸다. 엄마에게 걸려 온 전화였다.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니? 지후 아빠한테 들었는데 이제 지후는 어쩌니?

엄마는 다짜고짜 울기 시작했다. 나는 가만히 엄마의 목소리가 새어 나오는 전화기를 옆으로 밀어놓았다. 지후는 긴 낮잠을 자고 있었다. 전화기 너머로 엄마의 우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미칠 것 같아 더 참을 수 없었다.

엄마 그만 울어. 울고 싶은 사람은 난데 엄마가 왜 울어. 그리고 다음 주 병원에서 유전자 검사하자는데 엄마도 같이 갈 수 있지?

아니 왜? 내가 왜 유전자 검사를 해?

지후 병이 모계유전이 되는 거래. 그래서 의사가 나도, 엄마도 검사해 보자고.

어머, 난 싫다. 내가 왜 검사를 해? 그럴 리가 없잖니? 너도 생각을 해봐. 네 남동생도 정상이고, 조카들도 다 정상인데.

엄마가 흔쾌히 동행할 거라고는 생각 안 했지만, 정상 비정상을 운운하다니 어이가 없었다.

엄마 그럼 지후는 정상이 아니라는 거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그럼, 지후가 왜 그러는 건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아니?

엄마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검사를 해보자는 거잖아. 엄마? 나 엄마 딸 맞아?

넌 그걸 말이라고 하니? 넌 무슨 일만 있으면 매번 그렇게 묻더라. 난 검사 안 할 거니까. 그런 줄 알아. 난 정상이야, 아무 문제 없어. 지후가 걱정돼서 전화한 건데, 아직은 괜찮다니까 이만 끊는다.

이런 식으로 엄마가 말할 때마다 목구멍에서 욕지기가 치받쳐 올라왔다. 낮잠에서 깬 지후가 칭얼거렸다.

별나게 구니까 이런 일이 생기지. 너만 아니었으면. 네 언니는 안 죽었어.

엄마는 언니가 죽었을 때도 나에게 지독하게 말했다. 난 겨우 여덟 살이었는데. 언니가 사고를 당한 건 내 인생 첫 여름방학이 시작하는 날이었다. 나는 신이 나서 학교 근처 돌담 위를 걸어가고 있었고, 언니는 뒤에서 큰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서해야, 내려와. 위험해. 어서 내려오라니까.

왜? 괜찮다고, 안 위험해.

뒤로 고개를 돌린 순간, 골목에서 나오던 자동차가 빛을 번쩍이며 언니를 비췄다. 언니는 하늘로 떠 올랐다가 춤을 추듯 바닥에 떨어졌다. 장미 꽃잎이 느리게 언니 머리 위로 흩어져 내렸다. 나는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되었고, 그 후의 내 기억은 흩어진 꽃잎처럼 뒤죽박죽이 되었다. 내가 기억하는 언니는 7월의 장미 같았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떨치고 더위에 지쳐 뚝뚝 바닥에 떨어져 지저분해지는. 나에게 언니는 그랬다. 꽃이 떨어지는 건 순간이었다. 모든 일은 찰나에 일어났고 엄마 아빠는 유난한 나 때문에 언니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 또한 그렇게 믿었다.

언니의 죽음이 할퀴고 간 자리는 지독했다. 집안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축축하고 찐득한 우울함이 퍼지고, 엄마 아빠는 건조한 사막처럼 서걱거렸다. 나에게 차가워진 엄마 아빠와 사는 건 외롭고 어딘가 억울했다. 그렇게 나는 점점 가족들과 멀어져 유령처럼 지냈다. 그 후 엄마는 나에게 이상하고 별나다는 소리를 달고 살았다. 엄마가 그럴수록 나는 그냥 지나쳐도 되는 일들마저 원칙을 세워 지키려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나를 지키는 최선이라고 믿었고, 엄마의 비난을 피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주변에서는 따지기 좋아하는 피곤한 사람으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늘 긴장하며 지냈고, 다르다고 취급받는 것은 견딜 수 없이 두려운 일이었다.

언니가 죽은 후에 내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너 때문이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무력해졌다. 그건 용도를 알 수 없는 독한 화학약품 냄새보다 더 지독하게 나를 괴롭혔지만,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엄마와 통화 후 며칠 동안 어지럼증과 무력감에 지후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데리고 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지후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는 다니던 병원에서 어지럼증약을 받아왔다. 들어오자마자 약을 먹고 소파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잠결에 거실이 지난 새벽에 본 검은 그림자가 내려앉듯 어두워졌고, 익숙한 목소리에 깜짝 놀라 일어났다. 서해야 정신 차려, 이러다가 죽는 거야. 그 서늘함이 너의 폐부를 얼리고 네 아이를 훔쳐 갈지도 몰라. 정신 차려. 지후를 생각해 봐. 어서. 안 그러면 네가 먼저 죽을 거야.

어릴 때는 나를 걱정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리면 들뜨고 기분이 좋았다. 그렇지만 이젠 잘 안다. 그 들뜸이 더 마음을 옥죄이고 조롱하며 결국에는 난봉꾼으로 변해 더 깊은 불안 속으로 나를 몰아넣는다는 걸. 그래서 언제부턴가 걱정해 주는 척하는 목소리에 다시는 휘둘리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다. 속지 마. 지금 나에게 호의적인 저 목소리는 언제 내 목덜미를 움켜쥐고 내 운명 뒤에서 비웃을지 몰라.

나는 천천히 현관 밖으로 걸어가며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어느새 지후를 데리러 갈 시간이었다. 내 우울에서 지후를 지켜야 한다. 아니야. 난 절대 안 죽어. 절대. 이제 곧 지후가 돌아올 시간이야. 난 너에게 더는 속지 않아.

지후가 막 걷기 시작한 여름이 생각났다. 우리 가족은 처음으로 바다에 갔었다. 기저귀 찬 엉덩이를 뒤뚱대며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바다와 내 눈을 번갈아 보며 겁 없이 물을 향해 걸어가던 지후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 후 우리는 매년 지후 생일이 있는 6월에는 바다에 갔었다.

아니 무슨 어린이가 입학선물로 바다에 가자고 해? 게임기나 뭐 이런 거 사달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갖고 싶은 거 없어?

엄마 난 바다가 좋아. 바다에 가자.

바다가 그렇게 좋아? 왜 그렇게 바다가 좋아?

바다를 보고 있으면 그냥 기분이 막 좋아져. 그래서 계속 보고 싶어. 근데 난 엄마 이름이 서해여서 바다가 더 좋은 것도 있어.

어쩜 지후는 말도 이렇게 예쁘게 할까?

지후는 초등학교 입학선물로 바다에 가자고 할 정도로 바다를 좋아했고, 전국 지도책을 보며 고속도로와 길 그리기를 좋아했다. 지후가 그린 길을 보면 지후가 얼마나 훌륭한 재능을 가졌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림 속 길들은 화려하지만 자연스럽고 어설픈 것 같지만, 꽉 차 있었다.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강렬한 원색과 자연스럽게 배치한 직선과 곡선의 그림을 바라보면 그림을 그리던 어린 지후의 숨결이 느껴져 몸과 마음이 따뜻해진다. 다섯 살 때 거실 벽에 그린 동네 길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했다. 혼자서 자신의 키만큼 큰 의자를 끌고 올라가 벽면 전체에 그린 크기와 공간감은 다섯 살 아이의 그림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재능이 남달랐다. 지후는 아침에 일어나면 동화책 대신 지도책을 펼쳐 보고 또 보고 자신이 본 지도를 그리고 또 그렸다.

엄마 너무 재밌어. 길들이 살아있어. 모두 연결되어 있어.

너는 어떻게 그런 걸 다 알아. 정말 천재 아니야.

나는 지후가 세상의 진리를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게 신기했다. 이 아이가 그려 내는 고속도로와 길을 보고 있으면 아이의 머릿속을 현미경으로 세세히 들여다보고 싶어지곤 했다. 그렇게 지후의 몸이 자유로웠을 때는 모든 게 가능할 것만 같았다. 초등학교 5학년 지후는 넘어지면서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처음으로 휠체어를 타고 학교에 가던 날 지후와 나는 뭔가에 잔뜩 화가 나 있었다. 지후는 나에게 화가 난 거 같았다. 나도 나에게 화가 났다. 지후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화가 났고, 지나가며 짖는 강아지에게조차 화가 났다. 그럼에도 아닌 척 괜찮은 척 서툴게 속을 달래며 휠체어를 밀었다. 점점 병이 진행되고 염려스러움이 더해지면서 자꾸 지후의 존재를 돌봐야 하는 환자로만 여겼다. 허리가 휘어지고 골반이 틀어진 성인이 된 지금도 휠체어와 침상에만 있는 지후를 보면서 어리석게도 아이의 영혼도 휘어지고 틀어졌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2주 전 주말 저녁 지후와 나는 서로 모른 척했던 힘든 마음이 터져 나왔다. 시작은 평소라면 그냥 넘길 정말 사소한 말 때문이었다. 우리는 저녁을 먹고 새로 시작하는 TV 예능 프로그램이 시작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용하고 낮게 지후가 말했다.

엄마 난 이렇게 사는 게 너무 억울해. 나무토막 같은 내 몸을 보는 게 힘들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이제 난 뭘 할 수 있을까?

왜 할 수 없다고 생각해?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도와줄 사람이 주변에 얼마나 많은데. 몸이 힘들다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건 아니잖아.

엄마 진짜 그렇게 생각해? 좀 솔직해져 봐. 내가 뭘 할 수 있는데? 엄마가 나처럼 움직이지 못하는 몸에 갇혀 있다면 어떨 것 같아?

지후는 나를 비웃는 듯 목소리가 건조했고 나는 너무 당황스러웠다. 평소에 지후가 자신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잘하는 편이라 그렇게 딱딱하게 말하는 건 처음이었다. 긴장한 나도 무뚝뚝하고 사무적인 목소리가 되었고 대화를 피하고 싶었다.

뭘 할 수 있는지는 네가 생각해야지. 나한테 그러지 말고?

엄마, 난 지금 힘들다고 얘기하는 거야. 그냥 들어주면 안 되는 거야? 엄마라는 사람이 뭐 그래?

엄마라는 사람은 다 들어주는 사람인 줄 알아? 왜 그래야 하는데? 넌 너만 힘들지? 엄마 힘든 거는 안 보이지?

내가 싫어하는 친정엄마의 모습을 지후에게 그대로 하는 내 자신이 끔찍했다. 떠난 아빠 몫까지 한다고 했는데 엄마라는 사람이라는 지후의 말에 해서는 안 되는 말로 아이의 마음을 후벼 팠다. 지후도 그에 질세라 그동안 쌓아 두었던 응어리를 내게 마구 쏟아부었다.

엄마는 집에서 놀면서 뭐가 힘들다는 거야?

논다고? 내가 노는 걸로 보여? 널 돌보는 일이 노는 일이야? 밤에는 두 시간마다 깨서 네 자세를 바꿔 줘야 하고 씻고 먹이고 화장실이며 모든 일을 하고 있는데. 온전한 내 시간은 밥 먹는 시간뿐인데. 너무 한 거 아니야? 몇 년째 활동 보조도 구해지지 않아서 난 하던 일도 포기하고 너만 보는데.

엄마가 뭘 포기했는데. 하고 싶은 거 지금까지 다하고 살았잖아.

지후와 6년을 함께한 활동 보조 선생님이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 일을 그만두었다. 그 후 면접을 보러오는 활동 보조인마다 출퇴근 거리와 시간이 맞지 않았고, 지후 상태를 보고는 못 하겠다며 뒷걸음쳤다. 결국 지난해 나는 20년 동안 일한 회사를 그만두었다. 대학 졸업하고 시작한 편집 일은 나에게 잘 맞았고 재미도 있었다. 성과도 많았고 몇 년만 더 다니면 임원이 될 수도 있었지만 일과 간병을 병행하는 건 무리였다. 내 인생에 더 중요한 지후를 위해 일은 그만두었다. 아쉬움이 컸지만, 나의 선택에 후회는 없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하고 논다고 말하다니 화가 나서 한 말이겠지만 속상했다.

결국 엄마와 자식이라는 서로의 기대치는 처절했다. 악랄하게 서로의 상실감과 무력감에 식초를 뿌리고, 소금을 뿌리고, 불을 댕기며, 먹고 죽을 수밖에 없는 독이 가득한 음식을 만들어, 서로의 입에 억지로 쑤셔 넣었다.

아이가 당연하게 여기는 돌봄에 충실한 엄마라는 역할에 숨이 막혔고 지후는 이혼을 감행한 이기적인 부모를 향한 화로 가득했다. 터질 게 터진 것뿐이었는데 내 마음이 무너졌다.

격렬했던 전장은 고요하고 적막해졌지만, 독이 든 음식을 먹고 게워 낸 토사물들로 마음은 얼룩이 지고 너덜너덜하게 해어져 있었다. 지후와 나는 서로 눈길을 피하며 침묵했고, 각자 자신들의 상처를 핥고 꿰매기에 여념이 없었다. 당분간이라도 이 상황에서 도망가고 싶었지만, 물리적으로 지후는 나를 외면할 수 있는 선택권이 없었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거의 일주일 동안 손에 닿는 지후의 피부도 소름 끼쳤고 숨소리도 듣기 싫었다. 자식을 보기 싫어하는 엄마라는 내가 더 역겹고 경멸스러웠다.

지후가 자꾸 넘어지고, 어느 날 걷는 게 안되고, 또 휠체어에 앉는 게 어렵고, 음식을 삼키는 게 어렵고, 손가락 하나의 움직임에도 온 힘을 써야 했다. 자신의 꿈을 하나씩 접으며 무심한 듯 애쓰는 지후 모습에 행여 엄마인 내가 먼저 넘어질새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내가 지후의 마음을 아무리 이해해도 아이가 느끼는 상실의 깊이에 결코 닿을 수 없었다.

엄마는 지금도 나를 보면 말한다.

너는 지후 아빠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데 이혼해서는.

엄마 말은 나는 나쁜 사람이라는 거네.

혼자서 어쩌려고. 참고 시댁에서 하라는 대로 하면 될 것을 성질하고는.

어떻게 하라는 대로 해. 아이를 가져서 병이 있으면 없애고 다시 가져서 아니면 또 없애고. 내가 무슨 짐승이야?

넌 왜 부정적인 생각을 먼저 하니? 안 아플 수도 있잖아.

어떻게 생각을 안 하냐고. 다들 너무하는 거 알아? 난 지후 하나면 충분해.

엄마는 혼자 된 딸을 위로하기는커녕 늘 내 탓을 했다. 내가 참으면 되는 일이었던 건가? 그랬다면 지후가 덜 힘들었을까? 사는 게 뭐 이럴까. 이 큰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처럼 막막했다. 지후도 그랬을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눈물이 흘러넘쳤다. 지후는 나보다 더 무력하고 힘들겠지. 처음 병을 알고 돌아온 날 막막한 밤에 봤던 검은 그림자처럼 짐승 같은 소리가 입술 사이로 삐져나왔다. 입을 틀어막아도 새어 나오는 소리를 막기가 어려웠다. 어릴 때 엄마를 보면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엄마는 나를 미워했다. 나를 바라보는 웃음기 없는 얼굴과 눈을 가늘게 뜨고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던 모습. 언니가 죽은 뒤로 늘 그랬다. 난 부모가 자식을 미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자식도 부모가 미울 수 있는 거고. 나도 지후가 미웠다. 그런데 난 오래 미워할 수가 없다. 그 상황이 지나면 다시 아이가 가엽고 사랑스럽다. 그런데 엄마를 보면 한결같이 나를 미워한다고 느껴진다. 지후와 그런 모자 관계가 될 수는 없다. 난 그럴 수만 있다면 무의식 바닥까지 샅샅이 뒤져서 지후에게 퍼부은 나의 악랄함과 비열함의 소리를 삭제해 버리고 싶었다.

피떡 진 울분을 뱉어내니 생각이 하나로 모아졌다. 난 강박적으로 좋은 엄마여야 한다는 죄책감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언니의 죽음 이후 나를 확인받지 못한 결핍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냥 난 나로 있으면서 지후를 만나면 되는 거였는데.

지후야 엄마 때문에 속상하지?

그렇지 뭐.

엄마가 정말 미안해. 엄마가 아빠 몫까지 해야 한다는 조바심에 힘들었나 봐. 정말 부끄럽게 생각해.

아니야 나도 잘한 건 없지. 나도 엄마에게 막말한 거 잘못했어.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지만, 드디어 보이지 않는 전쟁이 끝났다.

생각을 좀 해봤는데. 지후에게 부탁이 있어.

부탁? 무슨 부탁?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날 엄마라고 안 불렀으면 좋겠어.

응? 그러면 뭐라 불러?

지후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면서 말했다.

이제부터 엄마라고 부르지 말고, 이름을 부르면 어떨까?

엄마 이름을 막 불러도 된다고? 쉽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런다고 엄마가 아닌 건 아니니까 그냥 호칭을 바꾸자는 거야. 변하는 건 없어.

글쎄, 어색한데. 그래도 한 번 해볼게. 서해야, 아니 엄마, 아무래도 적응하기 힘들겠는데. 이름만 부르는 건 어렵네. 진 여사라고 할까?

지후는 난감한 듯 어렵다고 말했지만, 표정과 목소리는 무척 신이 나 보였다.

그런데 내가 엄마라고 부른다고 진서해가 아닌 건 아니잖아?

물론 그렇지. 강요하는 건 아니야 생각해 보라고.

난 엄마가 아니, 서해가 참 재미난 분 같아. 알았어. 좋아. 외국 사람들처럼 이름을 부르라는 거잖아. 이 기회에 외국 이름 지어서 부를까? 아 그러면 이참에 나도 다른 이름으로 불러줘.

그래 좋아. 뭐라고 부를까?

지구라고 불러줘. 지구.

지구? 그래. 그게 뭐 어렵겠어. 근데 왜 하필 지구야?

자, 이제부터 서해는 지구 없으면 안 돼. 서해는 지구 안에서만 존재하거든.

뭐라고? 정말 그러네. 지구가 있어야 서해가 있는 거네. 그럼 불러볼까? 지구야?

응, 진서해.

나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호칭이라는 게 그저 단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살아있는 괴물처럼 목구멍에 들러붙어 숨통을 조이고 무력하게 했다는 걸 알았다. 생각이 느슨해지고 마음이 자유로워지면서 목을 조이던 엄마라는 이름의 역할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주중이라 그런지 서해안고속도로는 생각보다 차들이 많지 않았다. 지구와 나는 석양이 좋다는 만리포에 가기로 했다. 6월의 하늘은 맑고 바람도 적당하니 상쾌했다. 지구의 자리는 조수석을 뒤로 한껏 밀고 의자를 젖혀 앉은 듯 누웠고 나는 최대한 조심히 운전했다. 가는 길에 아이가 좋아하는 연륙 도인 행담도휴게소에서 알감자도 먹고 사람 구경도 하고 몇 년 만의 여행에 들떴다. 이렇게 나오면 되는 건데 나는 그동안 뭐가 그리 두려웠던 건지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바다가 눈앞에 있는 독채 빌라는 지구와 지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숙소에는 업체에 미리 부탁한 모래 위를 갈 수 있는 휠체어도 준비되어 있었다. 우리는 잠시 쉬고 만조가 되는 오후에 바다로 나가 볼 계획이다. 바다로 향해 있는 발코니 창을 열자 바람과 함께 기분 좋은 비릿한 바다 냄새가 들어왔다.

좋아?

너무 좋아.

우리는 정말 바다에 왔다는 게 실감이 되어 한동안 벅찬 마음에 서로 얼굴을 보며 크게 웃었다.

창가에서 보니 해변까지 물이 올라와 만조가 되었다. 밖으로 나오니 만리포 해안을 따라 곱게 핀 진홍색 해당화꽃 향기가 우리를 수줍은 듯 반겨주었다. 깨끗한 모래사장을 해변용 휠체어로 다니니 모래에 빠지지 않고 가까이에서 잔잔한 바다를 마음껏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일찍 저녁을 먹고 해 떨어지는 시간에 맞춰 해변에 자리를 잡았다. 날이 좋아 색색이 변하는 붉고 푸른 노을빛이 보는 내내 황홀하고 따뜻했다. 지구는 붉은 태양 끝이 점점 사라져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 감탄사를 연발했고 작은 목소리에 활기가 넘쳤다. 기적처럼 세상이 온통 선홍빛으로 물들었다.

다음 날 아침 이미 떠오른 6월의 해는 갓 쪄낸 감자처럼 뽀송해 보였다. 물이 빠지는 바다 위로 쏟아지는 햇빛에 물거품 같은 잔잔한 파도가 반짝거렸다. 바다가 보이는 펜션에서 지구는 스물한 살 생일을 맞았다. 준비한 미역국과 노란색 스웨터를 입고 찍은 지구의 웃는 사진이 박힌 생일 케이크에 스물한 개의 초를 꽂고 불을 밝혔다. 살랑이는 촛불을 보며 지구가 나로 인해 외롭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지구는 언제 준비했는지 비뚤배뚤 힘겹게 쓴 종이를 내밀었다.

한지구가 진서해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나의 뒤틀린 몸이 슬프다고, 내 존재가 하찮은 게 아니란 것을,

진서해에게 배웠습니다. 나는 계속 내 몸에 갇혀 남은 삶을 살겠지만,

이 몸이 한지구의 모든 흔적을 담기에 더욱 정성껏 살겠습니다.

 

 

  <당선소감>

 

   주변 살피는 소설가로 살겠다

언제부턴가 계속 차오르는 분노가 일상을 흔들어 힘든 날이 길어졌습니다. 숨을 곳이 필요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를 잘 숨길 수 있을까? 잔뜩 쪼그라진 마음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던 날들이 계속되었습니다.

더는 미루지 말고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뒤늦게 내 안의 틈을 메꾸기 위해 시작한 글쓰기였지만 메꿀 수가 없었습니다. 무언가 충분하지 않은 느낌에 분명 무언가 사방으로 더 본질에 가까이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갈 수 없는 한계에 닿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느 순간 글쓰기는 혼자서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사회와 사람들과의 틈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면서 드디어 조금씩 소설이 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막 걸음마를 시작하는 저의 부족한 소설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과 불교신문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소설이 살아나도록 창밖을 내다보며 주변을 살피는 소설가로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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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평>

  

  괴로운 관계에 대한 절절한 묘사

2026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응모작 170여 편의 작품을 여러 날에 걸쳐 꼼꼼히 읽었다. 그중에서 본심에 올리고 거듭해서 읽을 작품으로 다섯 편을 추렸다. ‘아륜’, ‘모르포’, ‘부드럽고 따뜻한’, ‘서해의 쓸모’, ‘알고리즘의 49재’. 이 중에서 최종적으로 검토할 작품으로 ‘부드럽고 따뜻한’과 ‘서해의 쓸모’를 선택했다.

투고작들을 읽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 전교생 조회 시간에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을 들을 때면 늘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듣고 싶은 말이 아니라 하고 싶은 말씀만 하시니까. 그런데 하루는 귀가 솔깃한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 그날은 내가 상을 받는 날이었다. 자기 이야기에는 누구나 귀를 솔깃하게 마련이다.

누군가 이건 내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소설을 쓸 수 있다면, 작가도 독자도 행복할 수밖에 없다. 많은 이들이 자기 이야기를 하는데 그게 내 이야기로 읽히는 작품은 많지 않아 아쉬웠다.

‘부드럽고 따뜻한’과 ‘서해의 쓸모’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최종적으로 ‘서해의 쓸모’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아이를 키우는 일과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질병과 평생 계속되는 괴로운 관계에 대한 절절한 묘사 끝에 나오는 마지막 장면의 말들이 너무 따뜻하고 고마워 이 작품을 외면하기 힘들었다. ‘부드럽고 따뜻한’은 제목처럼 부드럽고 따뜻하게 잘 읽히는 소설이다. 동물과의 이별도 상실이라면 상실이니 그 상실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갔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심사위원 : 김연수 소설가


 

  <AI와 함께하는 작품 분석>

 

1) 한 줄 핵심

이 소설은 “엄마”라는 호칭(역할)이 만든 목조임에서 벗어나, **서해(나)**와 **지구(지후)**가 서로를 다시 “한 사람”으로 호명해 관계를 재구성하는 이야기입니다. 마지막의 바다는 여행지가 아니라, 구별/위계/정상-비정상/쓸모-무쓸모 같은 분별을 잠시 내려놓게 하는 ‘장(場)’이에요.


2) 서사 구조: 현재→과거→충돌→재명명→바다(사건)→증여(편지)

① 현재(침대 난간)로 시작

  • 시작 시점이 “침대 난간 색”에 꽂히는 건 사소해 보이지만, 곧바로 돌봄 노동의 디테일과 **삶의 마모(손때/얼룩)**를 보여줍니다.
  • “다시 칠해야 하나”는 단순 미관이 아니라, 삶을 다시 ‘정돈/수정’하고 싶은 강박의 미세한 시작점이에요.

② 과거(진단–가족–언니 죽음)로 깊게 잠수

  • 뒤셴형 근육병 진단 장면은 “의사의 손(사기꾼 손 같음)” 같은 디테일로, 정보의 전달보다 불신·붕괴의 체감이 우선하도록 씁니다.
  • 이때부터 소설의 큰 축이 생겨요.
    (1) ‘너 때문’이라는 목소리(죄책의 계보)
    (2) ‘정상/비정상’이라는 폭력적인 언어(사회적 시선)

③ 현재의 갈등(2주 전 싸움)

  • 이 소설의 진짜 전장은 병이 아니라, **“기대치가 처절한 엄마-자식 관계”**예요.
  • 서로가 서로에게 “상실감·무력감에 식초/소금/불”을 뿌리는 비유는, 누가 악인인지 가르기보다 관계가 악화되는 메커니즘을 보여줍니다. (나쁜 사람이 아니라, 악화된 구조)

④ 전환점: 호칭 바꾸기(엄마→서해/진 여사, 지후→지구)

  • 여기서 소설이 “해결”을 선언하지 않고, 언어를 바꾸는 작은 장치로 현실을 옮겨 심어요.
  • “호칭은 단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살아있는 괴물처럼 목구멍에 들러붙었다”는 고백이 핵심이에요.
    → 즉, 이 작품은 관계의 폭력이 언어로 정착하고, 반대로 언어의 재배치가 관계를 숨 쉬게 한다는 걸 밀어붙입니다.

⑤ 바다: ‘사건’으로서의 여행

  • 바다는 낭만이 아니라 재조정의 현장이에요.
    모래 위 휠체어, 만조, 노을, 생일 초, 미역국… 모두가 “우리가 다시 살 수 있다”는 미시적 증거로 기능합니다.

⑥ 결말: ‘편지’라는 증여

  • 마지막 편지의 문장들이 심사평에서 말한 “너무 따뜻하고 고마운” 지점을 만드는 이유는, 편지가 감동을 ‘설명’하지 않고 **새로운 윤리를 ‘선언’**하기 때문이에요.
    • “내 존재가 하찮은 게 아니란 것을 배웠다”
    • “이 몸이 모든 흔적을 담기에 더욱 정성껏 살겠다”
      → 몸이 ‘감옥’이 아니라 ‘그릇(흔적을 담는 용기)’으로 재정의됩니다.

3) 제목 해석: “서해의 쓸모”

제목이 굉장히 잔인하고 정확해요. “쓸모”는 보통 대상의 가치를 기능으로 재단하는 말이죠. 이 작품은 그 말을 일부러 전면에 내세워, 다음 질문을 겨눕니다.

  • 엄마의 쓸모: 돌봄을 수행하는 기능으로만 남는가?
  • 장애인의 쓸모: 생산/기여로만 평가되는가?
  • 서해의 쓸모: “서해(바다)”는 누구에게도 ‘쓸모’를 증명하지 않지만 그냥 있음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지후가 “지구”가 되면서 말하죠.

“서해는 지구 없으면 안 돼. 서해는 지구 안에서만 존재하거든.”

이건 말장난 같지만, 사실 소설 전체의 대답이에요.
‘쓸모’가 아니라 **연결(존재의 조건)**로 관계를 다시 묶습니다.
엄마가 ‘쓸모 있어야’ 존재하는 게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조건이 되는 방식(연기)으로요.


4) 반복되는 상징·장치 6개

1) 난간 색(에메랄드)

  • 환자침대의 흰 프레임 → “병/시설/환자”의 표식
  • 이를 에메랄드로 칠함 → “환자”라는 표식을 생활의 색으로 덮는 시도
  • 시간이 지나 “얼룩”이 거슬림 → 돌봄의 마모가 다시 표면으로 올라옴

2) 지도·길

  • 지후의 재능이 “길은 살아있고 연결되어 있다”로 표현되죠.
  • 이건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지후가 병으로 ‘몸의 이동’을 잃어갈수록 정신/상상/연결로 세계를 만지는 방식이기도 해요.
  • 바다로 가는 서해안고속도로, 행담도휴게소 같은 디테일은 그래서 “실제 이동”이면서 동시에 연결 회복의 의식이 됩니다.

3) 검은 그림자의 울음

  • 이 장면은 현실의 사건이면서 동시에, 화자의 내면이 외부로 튀어나온 형상화된 절규처럼 읽혀요.
  • 더 중요한 건 “아파트촌의 고요”입니다.
    거대한 울음이 있는데 아무도 듣지 못한 듯한 세계 = 돌봄/비탄이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구조.

4) ‘정상/비정상’ 언어

  • 의사, 시어머니, 엄마가 반복적으로 “정상”을 말합니다.
  • 소설은 이 말을 윤리적으로 비판하는데, 설교로 하지 않고 대사 충돌로 보여줘요.
    (“그럼 지후는 정상이 아니라는 거야?”)

5) 호칭(엄마 vs 이름)

  • 이 작품의 가장 강력한 장치.
  • 호칭을 바꾸는 건 관계를 바꾸는 ‘기술’이자, 역할 폭력(엄마는 다 들어줘야 한다)에서 벗어나는 최소한의 탈출구입니다.

6) 물과 바다(만조·노을·썰물)

  • 물은 경계를 허물고 섞이며, 바다는 “그냥 있는” 존재의 상징이에요.
  • 바다 장면이 위로로 끝나지 않는 이유는, 다음 날 생일 편지처럼 **삶의 태도(정성껏 살겠다)**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5) 인물 읽기: “악인”이 아니라 “구조에 갇힌 사람들”

  • 서해(화자): 확인받고 싶은 결핍과 ‘좋은 엄마 강박’이 맞물리며 스스로를 갉아먹습니다. 중요한 건, 소설이 서해를 성인군자로 만들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자식을 보기 싫었던” 감정까지 써서, 돌봄의 윤리를 현실의 진흙 위에 놓습니다.
  • 지후/지구: 냉소와 유머가 섞여 있고, 대사로 관계를 뚫는 힘이 있어요. “진 여사”, “지구”는 단지 귀여움이 아니라 살기 위한 언어 창안이에요.
  • 엄마(외할머니): 자기 방어(부정) + 죄책의 전가(너 때문)를 반복하는 인물. 이 인물 덕분에 소설은 개인 서사가 아니라 세대 전이되는 죄책·낙인의 이야기로 확장됩니다.
  • 전남편/시가: 직접 악행보다 “무게의 부재”로 존재합니다. 결국 서해가 “혼자 감당”하게 되는 구조를 만들죠.

6) 불교적 결(직접 말하지 않는데 스며드는 것)

이 작품은 불교를 교리로 말하지 않지만, 정조(情調)와 구조가 불교적이에요.

  • 연기: “서해는 지구 안에서만 존재”
  • 무상: 병의 진행, 관계의 균열, 노을이 사라지는 순간들
  • 자비/증여: ‘엄마 역할’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서로를 살리는 선택
  • 분별의 완화: 정상/비정상, 유용/무용 같은 분별을 흔들어 놓음

그래서 제목의 “쓸모”는 불교적 관점에서는 오히려 역설이 됩니다.
쓸모가 아니라 그냥 존재함이 중심이니까요.


7) 문장과 리듬: 이 소설이 “절절”한 이유

  • 감정이 격해질 때 소설은 비유를 과감하게 씁니다.
    (“식초, 소금, 불… 독이 든 음식을…” / “광고용 풍선 인형” / “몸이 흩어져 둥둥”)
    → 이 과잉이 바로 ‘절절함’의 물리적 체감치를 만듭니다.
  • 반대로 전환점(호칭)과 바다 장면에서는 문장이 맑아지고 사건이 단정해져요.
    그래서 감정이 “설명”이 아니라 “호흡”으로 전달됩니다.